1.
처음 보는 순간 벼락처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겠구나 단번에 알게 되는 사랑이 있다. 한편,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비 듣는 소리를 듣다가, 찌개에 넣어먹을 감자를 타박타박 썰다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슬며시 알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다.
2.
당신은 어떤 경험이 더 많았습니까?
3.
고종석은 마르크스주의가 망한 이유로, 그 이론 속에 인간의 마음, 정서, 욕망 같은 것들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짚는다. 완전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사회가 오면, 과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축적의 욕망, 타인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이 일거에 사라질까? 이론적으로 가능한 그 세상이 정서적으로도 가능할까?
거의 같은 이유로, 나는 내 연애관을 공산주의 연애관이라고 즐겨 부르는데, 연애사에 펼쳐질 수 있는 굵직큼직한 사건들에 대해 이론적 대처방안이 거의 완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며, 또 <공산당선언>처럼 몇 개의 강령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공산주의 연애강령 1 : 너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한 모든 우호적 감정은 죄다 사랑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2 : 모든 사랑은 복합감정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3 : 네가 하는 모든 사랑은 제각기 다 다른 사랑이다
.......
공산주의 연애강령 부칙 : 이 강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니 사랑은 그대로 폭망이다
5.
늘 타던 가락이 무서운 가락이고, 놀던 물에 물드는 것이 인간이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하기보다 하던대로 하기를 선호한다. 사랑할 때 익숙한 방식을 선호하는 일은 때론 운 좋게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대체로 망하거나, 불필요하게 파손된 상태로 사랑을 시작하게 한다.
연애를 망하게 하는 여러가지 태도는 새롭게 사랑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은 <옛날걔는나한테안그랬는데>. 지난 사랑의 그림자에 직접적으로 묶여 있는 경우 되시겠다. 더 나아가, 꼭 깨지고 나서 아, 그게 다 내 욕심이었어, 나도 노력했어야 했는데, 하는 부질없는 후회로 귀결되기 마련인 <있는그대로의나를받아들여주는게진짜사랑아니야?>도 있다. 이런 경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가 되어 결국 잘 해봐야 쌍방과실이다.
6.
우리는 모두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장님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관계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코끼리다. 더듬어야 한다. 더듬는 것 말고는 이 코끼리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알 길이 없으므로, 적극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더듬어야 한다. 그러다 내 손끝이 마주 더듬어 오고 있는 다른 장님의 손끝과 맞닿아 찌릿-하는 순간 우리는 이 코끼리가 어제까지의 모든 코끼리와 다른 오늘의, 오늘만의 코끼리임을 직감한다.
7.
남자와 여자는 메일을 주고 받으며 조금씩 드러나는 자신들의 새로운 코끼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과거의 코끼리들이, 혹은 사회가 입력하는 표준 양식 코끼리들이 끼어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찾고 싶었던 부분은, 처음에는 새로운 형태였던 그들의 관계가 진부한, 그러니까 절절하긴 해도 결국은 기존의 사랑의 문법에 매인 예측가능한 형식의 사랑으로 바뀐 그 지점이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만나야 해. 사랑이라면 당연히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 머릿결이 일으키는 바람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야 해. 어쩌면 그 모든 "당연히"는 어제까지의 사랑에만 통용되는 문법일 수도 있는데?
사실 잠깐이나마 그들에게도 실제로 만나지 않고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고, 필요한 감정을 충만하게 채워주던 지점이 있었다. 서로를 궁금해하긴 했지만 서로의 실체를 교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서로를 잃기는 싫었지만 서로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그런 지점이. 그 때 만약 그들이, 그들의 코끼리가 완전히 새로운 코끼리이며, 그 코끼리를 위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완전히 새로운 집을 지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당연한" 사랑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만을 가져다 놓는 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는데 합의했다면 어땠을까. 기존의 사랑은 기존의 사랑의 자리에 맞추어 따로 운영하면서, 그들은 딱 처음의 좋았던 시절에 멈추어 한발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선을 지키며 그들만의 독특하고 유익한 사랑을 유지한다면,
8.
그랬으면 이 책은 아마 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다. 사랑이 무슨 알파고 바둑 두는 것도 아니고, 뭔 수로 선을 지키냐고. 다른 사람을 향해 치닫는 마음이 조절이 되면 우리는 그를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다. 붓다라고 부르지.
9.
그들의 마음이 선을 넘고 서로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내달리는 그 한순간이 어딘지 우리는 결코 짚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지개의 한쪽 끝부터 짚어가며 연두색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처럼 알쏭달쏭하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처럼, 그런 사랑의 그라데이션에다 기적이나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지만, 운명은 그저 사랑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거나 지난한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부적, 메마른 사랑에 부어주는 영양제일 뿐이다. 사랑은 운명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운명이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지금 이 순간 격하게,
내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다.......우주의 모든 중2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10.
그들의 이 다음 순간을 읽기를 즐거이 기다리고 있다. 손발이 마침내 없어지기 전에 어서 등록하기 버튼을 누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