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 보는 순간 벼락처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겠구나 단번에 알게 되는 사랑이 있다. 한편,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비 듣는 소리를 듣다가, 찌개에 넣어먹을 감자를 타박타박 썰다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슬며시 알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다.

 

 

2.

      당신은 어떤 경험이 더 많았습니까? 

 

 

3.

      고종석은 마르크스주의가 망한 이유로, 그 이론 속에 인간의 마음, 정서, 욕망 같은 것들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짚는다. 완전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사회가 오면, 과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축적의 욕망, 타인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이 일거에 사라질까? 이론적으로 가능한 그 세상이 정서적으로도 가능할까?

 

      거의 같은 이유로, 나는 내 연애관을 공산주의 연애관이라고 즐겨 부르는데, 연애사에 펼쳐질 수 있는 굵직큼직한 사건들에 대해 이론적 대처방안이 거의 완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며, 또 <공산당선언>처럼 몇 개의 강령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공산주의 연애강령 1 : 너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한 모든 우호적 감정은 죄다 사랑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2 : 모든 사랑은 복합감정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3 : 네가 하는 모든 사랑은 제각기 다 다른 사랑이다

      .......

      공산주의 연애강령 부칙 : 이 강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니 사랑은 그대로 폭망이다

 

 

5.

      늘 타던 가락이 무서운 가락이고, 놀던 물에 물드는 것이 인간이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하기보다 하던대로 하기를 선호한다. 사랑할 때 익숙한 방식을 선호하는 일은 때론 운 좋게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대체로 망하거나, 불필요하게 파손된 상태로 사랑을 시작하게 한다.

 

      연애를 망하게 하는 여러가지 태도는 새롭게 사랑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은 <옛날걔는나한테안그랬는데>. 지난 사랑의 그림자에 직접적으로 묶여 있는 경우 되시겠다. 더 나아가, 꼭 깨지고 나서 아, 그게 다 내 욕심이었어, 나도 노력했어야 했는데, 하는 부질없는 후회로 귀결되기 마련인 <있는그대로의나를받아들여주는게진짜사랑아니야?>도 있다. 이런 경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가 되어 결국 잘 해봐야 쌍방과실이다.

 

 

6.

      우리는 모두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장님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관계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코끼리다. 더듬어야 한다. 더듬는 것 말고는 이 코끼리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알 길이 없으므로, 적극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더듬어야 한다. 그러다 내 손끝이 마주 더듬어 오고 있는 다른 장님의 손끝과 맞닿아 찌릿-하는 순간 우리는 이 코끼리가 어제까지의 모든 코끼리와 다른 오늘의, 오늘만의 코끼리임을 직감한다.

 

 

7.

      남자와 여자는 메일을 주고 받으며 조금씩 드러나는 자신들의 새로운 코끼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과거의 코끼리들이, 혹은 사회가 입력하는 표준 양식 코끼리들이 끼어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찾고 싶었던 부분은, 처음에는 새로운 형태였던 그들의 관계가 진부한, 그러니까 절절하긴 해도 결국은 기존의 사랑의 문법에 매인 예측가능한 형식의 사랑으로 바뀐 그 지점이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만나야 해. 사랑이라면 당연히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 머릿결이 일으키는 바람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야 해. 어쩌면 그 모든 "당연히"는 어제까지의 사랑에만 통용되는 문법일 수도 있는데? 

 

      사실 잠깐이나마 그들에게도 실제로 만나지 않고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고, 필요한 감정을 충만하게 채워주던 지점이 있었다. 서로를 궁금해하긴 했지만 서로의 실체를 교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서로를 잃기는 싫었지만 서로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그런 지점이. 그 때 만약 그들이, 그들의 코끼리가 완전히 새로운 코끼리이며, 그 코끼리를 위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완전히 새로운 집을 지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당연한" 사랑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만을 가져다 놓는 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는데 합의했다면 어땠을까. 기존의 사랑은 기존의 사랑의 자리에 맞추어 따로 운영하면서, 그들은 딱 처음의 좋았던 시절에 멈추어 한발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선을 지키며 그들만의 독특하고 유익한 사랑을 유지한다면,

 

 

8.

      그랬으면 이 책은 아마 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다. 사랑이 무슨 알파고 바둑 두는 것도 아니고, 뭔 수로 선을 지키냐고. 다른 사람을 향해 치닫는 마음이 조절이 되면 우리는 그를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다. 붓다라고 부르지.

 

 

9.

      그들의 마음이 선을 넘고 서로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내달리는 그 한순간이 어딘지 우리는 결코 짚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지개의 한쪽 끝부터 짚어가며 연두색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처럼 알쏭달쏭하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처럼, 그런 사랑의 그라데이션에다 기적이나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지만, 운명은 그저 사랑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거나 지난한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부적, 메마른 사랑에 부어주는 영양제일 뿐이다. 사랑은 운명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운명이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지금 이 순간 격하게, 

 

      내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다.......우주의 모든 중2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10.

      그들의 이 다음 순간을 읽기를 즐거이 기다리고 있다. 손발이 마침내 없어지기 전에 어서 등록하기 버튼을 누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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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9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싸~ (올라와서 읽을 수 있다는 기쁨에서 오는 환호 ㅋㅋㅋㅋㅋ)


‘이론적 대처방안이 거의 완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 -> 오, 현명하십니다. 저는 몰랐어요. 저는 제가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남들은 다 그래도 저는 안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던지요. 저는 무슨 제가 강철로 만들어진 인간인줄로만 알았어요. 저도 그냥, 보통 사람인데 말입니다. 쇼님은 그런데,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런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현명하십니다.


‘이 강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니 사랑은 그대로 폭망이다‘ (끄덕끄덕)
아, 제가 뭔가 이 나이에 연애에 대해 또 새롭게 배우는 기분입니다.


우주의 모든 중2의 기운이 모여들었습니까? ㅋㅋㅋㅋㅋ 좋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지간에 곧! 다음 순간을 읽도록 합시다. 딱 대기하고 있어요!!

syo 2017-05-29 15:09   좋아요 0 | URL
스스로도 손발이 좀 오그라드는 이런 글 쓰면,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옛날에 제 글 읽어주던 친구놈이 생각나요. 저한테 그랬거든요. ˝양산형 알랭 드 보통˝같은 글 쓰지 말라고. 그 대머리가 지만 할수 있는 글 가지고 깜냥도 안 되는 사람 여럿 버려 놨다고. 사실 저도 그 친구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1년 뒤쯤 다시 읽으면 사라지고 싶을거에요, 아마.

그나저나,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그 개새끼는ㅋㅋㅋㅋ

2017-05-29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5-29 15:59   좋아요 2 | URL
맞아요 맞아요.
어느 상대방을 몰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나를 잘 모르는 것과 다른 사람을 잘 모르는 것이 뒤섞여 가지고 관계가 안드로메다시궁창으로 가는 일이 허다하지요.

2017-05-29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5-2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파멜라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다락방 2017-05-29 18:07   좋아요 0 | URL
심장 아파요 ㅠㅠ

2017-05-29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유레카님의 글에 장난처럼 댓글을 달고 나니 진짜 궁금해졌다. 정말 알라디너들의 매체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이곳 알라딘 서재 공간은 가입에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은 온라인 커뮤니티 중에서 회원들의 지적/지각적 역량이 가장 훌륭한 곳임에 틀림이 없는데? 책은 결국 모든 것이니 이곳에는 어떤 분야라도 논프로패셔널 전문가가 최소 한 명 씩은 있을 것인데? 이웃분들의 무릎을 탁 칠만한 글들을 하도 읽다보니 나는 무릎이 나갈 지경인데? 심지어 저 바깥 세상에는 주옷같은 것들의 주옷같은 글들이 난무하는 마당인데도?? 4대강 소식 듣고 낙동강 미꾸라지 걱정하는 1급수 버들치같은 기분이다. 최소한 좋은 글들을 이슈별로 묶어서 제공해 주는 시스템이라도 만들어 주면 안 되냐는 말입니다.

 

 

2.

      딱 오늘까지만, 미친 놈처럼 읽는 것은 딱 오늘까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3.

      오늘 어떤  의미있는 대화 끝에 우연찮게 근 10년 전에 읽었던 책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만나지 못했던, 오늘에서야 처음 열린 작지만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시선은 아마도 다양한 것을 보고 읽는 데는 그리 유용하게 쓰이지는 못할 것이다. 고작 과거에 있었던 작은(그때는 거대하다고 믿었던) 몇몇 사건들을 다르게 읽는 데만 쓰이고는 말 것이다. 오늘까지 맞다고 믿어 왔던 과거의 어떤 일이 틀렸거나 혹은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아닐 수 있었다는, 그저그런 깨달음. 살면서 한 번 겪었던 상황과 다시 한 번 맞닥뜨리고,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는 선택을 하는 그런 일은 거의 없으니, 결국 이 책은 내 추억의 한 귀퉁이를 채색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렇지만 이렇게 덧칠된, 그래서 오히려 한꺼풀 벗겨진 추억을 때로 다시 곱씹고, 그날 그 사람의 마음을 윤곽이나마 다시 한 번 어림해보는 과정에서, 익숙한 나에서 낯선 나로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읽은 글들

 

      문학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미미한 것들을 소환해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비슷비슷한 하루의 반복은 그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표상된 외면을 찢고 들여다 볼 때 거대한 새로움이 있다. 문학은 우리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가는 단상이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파편적인 모습들을 정밀하고 미묘하게 묘사해 내서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현상에 대한, 기억에 대한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_최은주,『책들의 그림자』23쪽

 

      익숙한 표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우리에게 낯설다. 하지만 표상과 재현에 익숙한 시선으로는 늘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을 뿐이다.

_권용선,『세계의 역사와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78쪽

 

      그가 말하는 일관성이란 단일한 서사적 구성이나 완결된 전체를 염두에 둔 통일체적 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각각의 부분들이 자율적으로 자기 가치를 가지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방식, 각각의 부분들이 각자 자기 안에 다른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것의 일부로 기능하는 그런 관계들의 일관성이다.

_같은 책, 81쪽

      -무슨 말인지 참 알듯 말듯하지만, 이건 알겠다. 벤야민의 이 방식 내적으로 잘 체현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방식을 외적으로 잘 체현하면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

 

      "지어낸 이야기 안에만 담을 수 있는 마음도 있는 거예요. 만일 세상 모든 게 현실이라면,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나 쓸쓸할 거예요......"

_미카미 옌, 『비블리오 고서당 사건수첩 5』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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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새벽 세시 읽으면서 퇴근중이에요. 씐나서 읽다가 레오가 전여친이랑 ‘잘뻔‘ 했다고 해서 지금 저 빡쳤어요 --^

syo 2017-05-26 19:44   좋아요 0 | URL
이번에도 새삼 또 다시 빡칠 수 있는 다락방님의 그 능력이 저는 더 놀라워요ㅎㅎ

2017-05-27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5-27 13:34   좋아요 0 | URL
그쵸? ㅎㅎㅎㅎ

다락방 2017-05-2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다 읽었고, 지금 지하철 안이에요! 이 뒷이야기를 누구 빌려줬는데 누구인지 생각이 안나 받을 수가 없어서 초조해요. 다시 사야겠어요. 지금 제 마음은 이 뒷이야기를 꼭 읽어야해요! 흙흙 ㅜㅜ

syo 2017-05-27 13:35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뒷이야기 어떡해야 하나 하고 있어요. 저는 심지어 안 읽었거든요..... 궁금해 죽겄어요.

카알벨루치 2018-12-25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이거지 이거 ㅋㅋㅋ찾았넹

syo 2018-12-25 18:54   좋아요 0 | URL
아닌데요?? ㅋㅋㅋㅋ
 

오늘 읽은 글

 

      비평의 과정이 '구원의 한 형식'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비평 혹은 해석하는 자와 대상 텍스트가 만나서 본래의 자기를 지우고 하나의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카프카와 만날 때 벤야민은 그 자신만이 카프카의 천재성과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프루스트와 만날 때 그는 그 자신의 잃어버린 베를린에서의 유년시절을 찾아서 떠나며, 보들레르와 만날 때 그는 그 자신이 산책자가 되어 제2제정기의 파리를 배회한다. 그의 비평 작업은 자신 안에 있던 카프카와 프루스트와 보들레르를 발견하는 것, 철저하게 그들이 되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수천 수만의 작가들, 작품들, 언어들을 발견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고 위치시킴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한다. 그는 그것들을 자기화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들에게로 '이동'시킴으로써 그 자신만의 내재적 표상과 그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 나간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1인칭의 표상 형식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1인칭 형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각시켰다는 것은, 그 자신이 주체의 자의식적 관념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작가 혹은 작품을 자신의 내재적 기준에 의해 표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벤야민이라는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나 기준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글을 쓰는 자들은 '나'라는 작은 단어를 자신의 비상식량처럼 여기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라고. 그가 경계했던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자의식과 1인칭 속에 숨어 있는 무비판적 자기 확신이었다. 벤야민이 1인칭의 글쓰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무수한 인칭들과 대면한다. 그것들은 그가 만나는 작가와 작품, 그리고 세계 전체이다. 때문에 그의 문체는 매번 다른 것이 되고, '그들'의 문체가 된다. 그는 혼자 쓰지만 그의 글쓰기는 '집합적'이다.

_권용선,『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37~39쪽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_미셸 에켐 몽테뉴,『수상록』제 2권 I

__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재인용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_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책』

__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재인용

     

       

      페소아는 페소아가 되었다가 카이에루나 소아르스가 되기도 하며 수많은 얼터에고를 전전하며 살았지만 어쨌든 매 순간, 그 순간의 자신을 인식하며 살았을 것이다. 페소아는 페소아의 글이 자기의 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소아르스는 자기가 써서 페소아에게 전했으니『불안의 책』의 진짜 저자는 페소아가 아니라 자기라고 주장할 것이다. 페소아는 한 개의 붓놀림으로 n개의 획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인용문에 따르면 벤야민의 글은 매 순간 벤야민의 글이 아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또 어떤 누군가의 글이라 한다. 실제로 인용으로만 된 책을 벤야민은 꿈꾸었다. 지우개로 글을 쓰고 있다. 벤야민은 쓰면서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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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샘 2017-05-2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있는데 관련 글들을 찾아들어오다가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러 왔다가 벤야민을 만났네요. 벤야민에 대한 글을 읽으니 다시 보르헤스가 떠오릅니다.

좋은 글 읽고, 더 읽고 싶어 친구 신청하고 갑니다^^

syo 2017-05-29 07: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길샘님.
이 글에서 막상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제목밖에 못 보셨겠어요ㅎㅎㅎ 딱 한 페이지 읽고 멈춰버렸네요;:
 

1.

      문재인의 연설 자리에 난입한 성 소수자의 입장을 옹호했다가 하마터면 10년짜리 우정이 먼지처럼 소멸될 뻔했다. 이번 대선국면에서 내가 정말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문재인이라는 인물은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에게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솔직히 그들에게서 박사모를 본다. 스스로의 정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언젠가 큰 일을 칠 수 있다. 스스로를 특정 정치인에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이들 역시 그 언젠가는 큰 일을 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고루 버무려진 이들이 시청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던 장면을 보며 혀를 찬 것이 채 석달이 지나지 않았다.

 

      내가 심상정을 지지한들, 나는 심상정이 아니다. 문재인이 이룬 업적은 당신들이 이룬 업적이 아니고, 문재인이 저지른 실책 또한 당신들이 책임질 부분이 아닌만큼, 지적당한다고 해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흥분할 일이 아니다.   

 

 

2.

      우상호의 "정의당은 다음에 찍으세요"가 갈팡질팡하던 나로 하여금 "이번에" 정의당을 찍게 만든 것은, 그저 뼛속까지 반골정신이 깃들어 있는 내 개인성향 때문일 뿐, 우상호의 저 말 자체가 정치적(혹은 정략적)으로 못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당의 "될 사람 찍는게 오히려 사표"라는 말 또한 진리와 정략이 반반 잘 버무려진 말이니만큼, 두 당 사이의 알력이 정치적으로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과, 서로의 입장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깔끔하게 이해되는 데가 있다.

 

      그렇다고 쳐도, 심상정 이거 오냐오냐 했더니 어차피 되지도 못할거면서 정권교체에 방해만 되고 있다는 둥, 기껏 비례 대표는 정의당 투표해서 의석 만들어줘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는 둥, 도대체 그런 댓글은 무슨 정신으로 달고 있는지 모르겠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댓글의 당사자들은 지지율 조사에서 단 한번도 5번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것이며, 지난 총선 비례대표 때 정의당에 투표를 하지 않았리라는(늘 말하지만, 해봤자 한 표다. 자기가 172만표를 만들어준 것마냥 은혜 운운하는 것은 꼴불견이다) 것이다.

 

      심상정이 문재인의 표를 빼먹는 것이 아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하니까 장난삼아 심상정 한 번 뽑아 보는 게 아니라, 이제야 원래 찍고 싶었던 심상정을 찍을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심상정으로 향하는 표심의 작은 요동은 찍고 싶은 사람을 찍는 자발적 의지의 물결인 것이고, 결국 민주당은 정권교체의 대의가 중요하니까 이번 만큼은 찍고 싶은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문재인을 선택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빼앗긴 표를 돌려달라는 말이 아니라 표를 빌려달라는 말이 된다. 내가 짜증나는 부분은, 표를 빌려달라는 쪽이 반 협박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심상정이 이렇게 약진하게 된 것은, 홍준표와 문재인의 공동작품이다. 홍준표에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문재인이 심상정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먼저 했었더라면 심상정의 지지율이 두 자리에 육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 주변의 소수자들은 한결 같이 말한다. 솔직히 차별금지법을 미룬 것보다, 토론에서의 그 한 마디에 다친 마음이 지지를 옮기게 만들었다고. 정략적으로 보아도 문재인의 행동은, 성 소수자 및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이탈을 최소화하면서 보수층의 표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아니었다.

 

      걱정이 되면, 국민을 대상으로 으름장을 놓을 것이 아니라 정의당과 협의하면 된다. 심상정과 협의 테이블에 앉으면 된다. 단일화 이야기가 아니라, 심상정이 내놓는 여러 정책들을 문재인 당선 후 협치의 테이블에 제일 먼저 올리겠다는 협의를 해야 한다. 진보는 언제나 목마르고, 심상정의 지지자는 심상정이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심상정의 정책과 어젠다가 실현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우리 누구도 이번에 심상정이 당선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심상정에 투표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심상정이 추구하는 가치에 한 표를 보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심상정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50대 50의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다.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55대 45, 하다못해 51대 49를 만들 수 있다. 니들이 잘못하면 홍준표가 될 수도 있다는 협박은, 문재인이 지고 나서 책임을 돌리는 데는 맞춤하겠지만, 대의를 향해 가는 방법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최선도 아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딱 한 표를 손에 쥐고 있고, 설사 심상정의 득표 때문에 문재인이 탈락한다고 해도, 그 모든 일이 심상정에게 찍은 내 한 표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당근의 타이밍이다. 심상정의 가치를 보고 투표하는 이들에게 문재인이 당선되어도, 그 핵심가치가 지켜질 것이라는 시그널을 보내야 한다. 어차피 대선이 끝나면 그 다음은 협치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 물어뜯는 사이일지 모르지만, 정의당은 원내 그 어느 당보다 민주당과 협치를 이룰 가능성이 크고, 비전이 가장 유사한 당이다.

     

      이러고 나면 또, 역시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만은,

 

      요즘 술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문재인이 집권, 심상정이 그 왼쪽, 유승민이 그 오른쪽에서 굳건히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며 존재감을 표시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최선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어쨌든 그런 나라에 도달하기까지 치워야 할 괴물들은 아직 너무 많고, 우리는 언제나 그 괴물들을 치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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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03 0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바른정당이 흔들리는 상황이 지나가는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선 이후에도 홍준표를 중심으로 한 자유한국당(친박세력)의 결집력이 이어질 것 같아요. 문재인,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면 친박세력들의 견제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syo 2017-05-03 08:59   좋아요 0 | URL
총선이 3년이나 남았다는 것이 통탄할 일입니다. 올해나 내년이었다면 볼만했을텐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5-0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저는 오래전부터 우상호 정말 싫어하는 인간 부류였는데.... 예의도 없고 무능하고.. 좀 띨빵하기도 하고..

나는달걀 2017-05-10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면 그들은 언제나 그래 왔던것 같습니다... 항상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고 그게 해소되면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이번엔 안정적 지지율로 최소한 그소린 안듣나보다 했더니 이번엔 적폐 청산을 하려면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되야 한다니 에혀~~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그리고 왠지 반갑네요~ ^^

syo 2017-05-10 16:2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전 요런 결과가 예상도 되었고 또 가능한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어쩐지 허탈하네요. 달걀님은 어떠신지요.....

나는달걀 2017-05-10 17:15   좋아요 0 | URL
오래 격어 왔지만 저도 많이 허탈하지요 ^^
심이 10% 넘으면 내가 쏜다 했었는데 돈 굳어 좋아해야하는건지 어쩐건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7-05-2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변희재가 원래 소위 진보계열논객으로 행세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어느새 그 빠심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지금의 그가 되었지요. ˝빠˝심이란게 그런 의미에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1. 어차피 이런 하찮은 글은 읽지 않을 당신들께

 

왜 완전 반대하는 홍준표를 냅두고, 차별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해준 고오마운 문재인한테 와서 지랄이냐고? 그 답은 누구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왜 비판의 수준을 넘어 비난에까지 이른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은 놔두고 정의당과 심상정에게 와서 배신이니 뭐니 반협박을 했나. 

 

차별 안한다는데 왜 발광이냐고? 과연 당신들이 그 말을 지킬 수 있을까?

 

당신들은 아마 이럴 것이다. 만약 문재인이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지금의 스탠스를 계속 유지하다, 성 소수자와 성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표가 심상정쪽으로 이탈하고, 그 사이 어찌된 일인지 안철수든 홍준표든 단일화가 되어 오차범위 내에서 거세게 맞붙는다면 당신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게이새끼들 더러운 성욕 때문에 졌다 / 질 뻔했다.

 

당신들은 또 이럴 것이다. 만약 문재인이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지금의 스탠스를 고쳐, 성 소수자와 성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표를 지켜냈지만, 특정 기독교 세력을 비롯해 성 소수자의 권리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표가 이탈하고, 그 사이 어찌된 일인지 안철수든 홍준표든 단일화가 되어 오차범위 내에서 거세게 맞붙는다면 당신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게이새끼들 편들어 주다가 표 다 잃어서 졌다 / 질 뻔했다.

 

차별에는 반대한다고 해 놓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면 차별에는 반대한다는 당신들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나.

 

 

2. 역시 읽지 않겠지만, 자신이 무엇을 반대하고 있는지 모르는 또다른 당신들께

 

인권을 외쳤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사실 인권이 아니다. 인생이다. 당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성 소수자들의 인권이 아니라 인생이다. 돈 좋지. 직업이나 명예 물론 좋고. 그러나 사랑과 섹스, 그리고 결혼(결혼을 통해 생겨나는 가족)은 한 사람의 인생의 거의 대부분이다. 그들이 죄없이 빼앗겼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애초에 가지지 않아야 했던 모든 것이다. 이런 거대한 덩어리를 태어남과 동시에 당연하게 인정받고 부여받아 마치 산소처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반대할 권리"라는 얼토당토 않은 권리를 보장하라며 다른 이의 인생을 반대한다. 

 

당신들의 눈에 더럽게 보인다고 그들이 더러운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당신들이 더러워 보인다고 당신들이 더러운 것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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