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를 다녀왔다. <불국사 마르크스 연등제> 준비차 답사 간 것은 아니고, 경주에 일이 있었던 여친과 함께 갔다가 그녀가 업무를 보는 세 시간 동안 혼자 불국사를 배회한 것이다. 혼자는 아니었다. 마르크스 평전과 볼빨간 사춘기의 신보와 함께 불국사의 이곳 저곳을 훑다 돌아왔다.
탑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높은 것은 탑 꼭대기에 걸린 하늘이었다. 아무리 고개를 꺾어봐도 꼭지를 찾아낼 수 없는 푸른 하늘이 두 개의 탑을 깔고 있었다. 하루 종일 보고 있으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파랑이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탑을 놓았을 것이다. 한없이 하늘만 바라보다 하늘로 날아가 버릴까봐 하늘을 쿡 찔러 구멍을 내려 했을 것이다. 파란 구멍이 흘리는 하얀 눈물처럼 탑은 섰다. 가을의 불국사는 하늘의 눈물 흐르는 자리, 하늘의 볼이었다.
방수 바지를 입은 아저씨가 연못 안에 들어가 웃자란 풀을 잘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대빗자루를 든 할아버지가 작지만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랑곳 않고 연못 가에 앉아 먹이를 던지고 모여드는 잉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잉어가 만드는 낮은 물고랑 사이로 들락날락하던 햇살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얼굴도 들렀다 간다. 눈부실 것 없는 정경들이 순간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앞서 걷는 두 사람의 손등이 닿을 듯 말 듯 애꿎은 공간만 움켜쥐고 있다. 그 두 손등이 스치기를, 찌릿한 순간이 찾아와 어쩌면 오늘 하려고 준비했을 어떤 말들이 세상에 나오기를, 그 말들이 두 사람의 손을 뒤집어 손등이 손바닥이 되는 조용한 기적을 만들기를 우리 모두가 응원하고 있다. 바람도 그 사이로 들지 않을 것이다. 햇살도 비켜가고 그림자는 저희 먼저 온몸을 겹쳐 볼 것이다. 세상의 눈에는 티끌같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대한 기억의 한 장면이 될 그 순간에 미지근한 미소 하나 보태어 보겠다고, 나도 계속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을 것이다.
굵은 나무 둥치 옆에 너른 돌 하나가 누웠기에, 그 위에 앉아 본다. 책을 꺼내 든다. 사람들이 두렁두렁 이야기와 그림자를 굴리며 지나가고 나는 책장을 넘긴다. 스르륵, 책장 넘기는 소리가 지나는 사람들의 뒷꿈치에 묻는다. 내가 던진 이야기들을 자기도 몰래 몸에 싣고,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투명한 소리 한 자락 업은 채 세상 구석구석으로 흩어질 것이다. 딱 그만치, 몇 줄의 이야기가, 책장을 넘기는 가벼운 소리가, 세상을 아주 조금 더 부자로 만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안경을 벗고 나뭇잎들을 바라보면, 그냥 하나의 초록이다. 경계를 빛으로 짤랑짤랑 녹여먹고, 커다란 하나의 녹색이 된다. 하나가 나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크다. 다들, 큰 절을 다 돌았는데 마음이 아직 비어 있다면 이 광막한 초록이나 한 근씩 끊어 가시기를. 오늘 저녁상은 초록으로 배부르겠네.
170923-170930 : 31권
문학 : 8권
1.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2.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책장은 작은데 책이 많아서, 한 덩어리 집어 내서 정독한 다음 팔아버릴 생각으로 둘러보았다. 이제 무라카미를 떠날 때가 온 것 같다. 소설은 끝끝내 팔지 않겠지만, 솔직히 무라카미의 에세이는 대부분 팔아도 양심에 찔릴만큼은 아니다. 나한테는 책장에 꽂아 놓고 일생 몇 번씩 반복해서 읽을 만하지는 않다.
3. 꿈의 꿈
: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선택한 것에 안토니오 타부키의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 들은 것 같다. 나도 지금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아, 타부키가 쓴 말로 타부키가 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4. 인도 야상곡
: 삶의 국면 국면마다 내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력을 휘둘러 나를 전작주의로 잡아끄는 작가들이 늘상 있었다. 그들은 치명적으로 왔다가 몇 년 뜨겁게 머물고 조용히 떠났다. 김용, 파울로 코엘료,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 지금 제일 길게 앓는 중이니 결국 가장 이르게 떠날 것 같은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이고, 이제 막 앓기 시작했으니 결국 가장 오래 머물다 갈 것 같은 작가가 이 사람, 안토니오 타부키다.
5.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4
6.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5
7.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
8.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
: 책을 사랑하는 사람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책 사랑 사랑 책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책과 사랑이로군요.
붉은 얼굴 마르크스 일당 : 4권
9.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 우리 나라도 좋은 나라라 할 만한 것이, 이제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마르크스 책들도 꽤 된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 몫을 다 읽고 나면 바로 다음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책이라 하겠다.
10.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 어떻게든 읽어냈지만, 결국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많은 맑스주의 철학자들을 각개격파하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질 기억, 잊혀져 갈 추억일 뿐이다.
1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사회주의에 대한 저자의 열망이야 높이 산다. 그러나, 택도 없는 말을 내세우면서 페미니스트들은 본인들이 주장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정할뿐더러, 그걸 사회주의는 해결할 수 있다며, 그 논거로 꼴랑 엥겔스의 저작 두어 개와, 마르크스가 '원시 사회'에는 남녀가 평등했음을 주장했다는 점을 대는 것이다. 이윽고 해결책이라고 내 놓은 게 결국은 맨날 말하는 그 계급혁명이다. 계급혁명만 되면 다 된단다. 한숨이 다 나온다. 아이고 이 양반아......
12.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 좋은 책이고 쉬운 책이다. 추천하고 다녔을 것이다. 김수행 선생님의 <자본론 공부>가 없었더라면. 아, 하늘이여, 주유를 세상에 내고 왜 또 제갈량을 내셨나이까.....
검은 얼굴 프로이트 일당 : 5권
13. 트라우마 이후의 삶
: 정말 이렇게까지 설명을 잘 할 수도 있는 것인가? 과연 정신분석 분야의 두 믿을맨, 혜성같은 쌍현, 맹정현과 백상현의 책은 손에 들면 절대 후회할 일이 없다.
14. 다시 프로이트, 내 마음의 상처를 읽다
: 가벼운 책이다. 저자의 임상 경험을 사례로 제시하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프로이트 입문서를 더도 말고 딱 두 권 읽는 순간, 이 책은 더 이상 효용이 없다.
15. 프로이트
: 얕다. 분량을 할애하는 방식이 의아하다. 이 책으로는 안 된다.
16. 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 김석 선생님의 글은 참 희한한 게, 알아 듣겠는데 모르겠다. 라캉이 그랬다는 건 알겠는데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이 지식은 날아가는 것이다. 이 선생님 정말 아는 거 많아 보였는데,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나서야 감탄할 수 있는 책이려나?
17. 라캉 읽기
: 라캉 개론서 역시 참 희한한 게, 같은 개념을 다루는데도 책마다 내용이 다른 것 같다! 완전히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관점의 차이라고 치부하고 말기에는 좀 더 다르달까. 그런 고로, 한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들끼리 상호보완적 독서망을 구성한다. 신기한 것들일세.
철학 / 읽기 : 4권
18. 현대철학의 광장
: 700페이지나 되는 책이다. 전체를 읽지 못했다. 그저 지금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중인 철학자들의 챕터만 읽다보니 절반 정도 보고 반납한 셈이 됐다. 내가 읽은 한에서는 설명이 쉽고 이해가 편했다. 조광제 선생님 다른 책은 어려웠었는데...... 언제고 다시 만날 책이다.
19.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
: 업과 무관하게 독서하는 사람 치고는 꽤 많은 책을 읽어왔고 또 읽고 있지만, 어려운 책들은 요리조리 잘도 피해왔다! 주변 사람들이 하도 책을 안 읽어가지고 이거로도 충분히 잘난 척, 깨친 척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짓도 이제 슬슬 질렸나 봐. 어려운 책을 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다니. 역시, 책 많이 읽으면 사람이 되긴 되나 봐. 이제와서 사람이 되다니....
20. 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삶을 바꾼다"는 거창한 제목을 감당할만 한 읽기책을 만들 수 있는 사람 몇 안 된다. 이 사람은 된다.
21.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읽다 보니 그렇지가 않은데다, 설령 헛소리라 한들 이 정도로 찰지게 구성하면 받아들여줄 만도 한 거 아닌가 싶다. 음, 그러니까, 나를 위해 읽고, 나를 위해서라면 읽지 않고도 말하고, 필요하다면 내용까지도 새로 구성할 수도 있는 일인 것을, 거꾸로 책이 나에게 읽는 노동을 명령하도록 두지 말라는 뜻 같기도 하다.
정치 / 경제 / 사회 : 3권
22. 30분 경제학
: 쉽게 읽으면 쉽게 날아가는 법이다. 이제 두꺼운 이론서를 겁내지 말자.
23. 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
: 본격 애들 책.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나 애들 책. 읽을 만하나 애들 책.
24. 여혐, 여자가 뭘 어쨌다고
: 이 책을 읽게 해주신 멘토님의 말씀에, 여자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라 좀 아쉬운 데가 있다고 하셨다. 내 눈에도 일견 그랬다. 그러나 이 당연함은 그저 당연함만으로 끝나지는 않고, 아마 당연함과 그렇지 않음 사이에 서서 양쪽에 한 발씩을 올린 채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인력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인물 : 4권
25. 내가 사랑한 여자
: 읽을 책 목록을 대폭 늘리는 데 사람 이야기 만한 것이 없다. 일이 점점 커진다. 아아.....
26. 마키아벨리
: 훌륭하다. 이 시리즈의 책을 읽다가 감동하는 일이 생길 줄이야.....
27.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사상
: 몇년 전 읽었을 때는 왜 몰랐을까. 마르크스도 마르크스지만 이사야 벌린이라는 이 걸출한 사상사가의 고품격 하이크라스 글빨을.
28. 별★종의 기원
: 표지부터 이미 비범하다. 살짝 풀린 오른쪽 눈. 난 그동안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마어마하게 훌륭하고 고귀하고 존경스럽고 멋있고 잘 생긴 사람이었다.
기타 : 3권
29. ENGLISH IS NOT EASY
30. 영어 리딩 무작정 따라하기
31. 시사인 524
.......
후일담을 적고 싶은데, 왠지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얼마나 피곤한가 하면, "김동리와 박목월의 서재를 재현한 곳 사진을 찍었는데 피곤해서 못 올리겠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써 놓고 보니 "박동리와 김목월의 서재를....."로 되어 있었다.
연휴 첫 날인데,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올해 6월부터 본격 독서를 시작했는데, 한 권도 읽지 못한 날은 처음이다. 연휴는 이제 아홉날 남았고, 읽을 책은 스물두 권이다. 앞이 노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