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우주의 건축가와 함께 나란히 걷고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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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힘없이 내 손을 부여잡으며 남긴 말씀을 종종 생각한다. 데이비드 오빠의 이름을 따서 네 이름을 짓는 게 아니었는데. 데이비드는 헨리 삼촌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 우리 세대가 태어났을 때 삼촌은 이미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지만,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이 콩코드의 아름다운 들과 호수를 이리저리 들쑤시며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에 삼촌의 이름은 데이비드 헨리였다. 엄마 세대는 헨리 삼촌을 데이비드라고 불렀다. 엄마가 다른 누구보다 헨리 삼촌을 사랑했으므로 삼촌의 이름은 나의 이름이 되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어려서 삼촌을 사랑했고, 삼촌이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조용히 지내던 시절이나, 불복종과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세상을-매사추세츠 주를-종횡무진 다니던 시절이나 그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엄마가 내게 삼촌의 이름을 붙여 준 것을 후회하며 눈을 감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엘리자베스와의 약혼이 깨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파혼의 까닭에 헨리 삼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이미 짐작한 눈치였다. 헨리 삼촌은 엄마에게 자부심과 불안이 한데 엉겨 자라는 선인장 화분 같은 존재였다.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끌어안으면 따가운, 삼촌은 엄마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나는 내 영혼에 칠해진 헨리 삼촌의 색깔을 그저 사랑하며 스물다섯 해를 살아왔고, 그날 애덤스 저택에서의 만찬 이전까지는 삼촌이 내 심장에 부어준 것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족쇄가 될 수도 있음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프게 깨닫고 난 후 이어진 고뇌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끝내 헨리 삼촌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삼촌의 손을 잡고 거닐던 콩코드의 들판에서는 여전히 향기가 피어오르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개울들은 쉼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월든 호수, , 수천만 조각으로 흩뿌려진 햇살들이 조용히 바스러지는 그 찬란한 은반을, 그곳을 둘러싸고, 혹은 그곳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물새들, 양서류들, 애벌레들, 윌귤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비롯한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생물들의 심포니를 어떻게 본체만체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법을 내게 알려준 헨리 삼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삼촌이 손수 지은 이 호숫가 작은 오두막에 들어와, 몇 달째 나는 엄마가 남긴 마지막 퀴즈를 풀어내려 애쓰고 있지만, 이 집 곳곳에 깃든 삼촌의 흔적이 끈질기게 방해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엄마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삼촌의 오두막에 가거든 지하실 벽을 두드려보렴. 네 삼촌의 집에, 그 지하실 바로 옆으로 분명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지나갈 거야. 분명히 그 흑인 노예들을 캐나다로 실어 나르는 기차에 네 삼촌의 지분이 있을 걸. 지하철도 콩코드 역의 역장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게 네 삼촌이 숨기고 있는 진짜 정체지. 엄마는 생을 마칠 때까지 지하철도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서 콩코드의 무른 땅 밑으로 흑인 노예를 잔뜩 실은 기차가 달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다 가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짐작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헨리 삼촌이 책에다 자기가 캐나다로 흑인 노예 몇을 데려갔다고 써 놓았으니까. 실제 지하철도의 콩코드 역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헨리 삼촌은 기인이었다. 남이 보기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쩡한 거주지를 박차고 나와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22개월을 혼자 사는 남자. 완벽한 고립을 추구한 것은 또 아니라, 거의 매일 저녁 친지와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에 끼어드는 객식구. 세금을 내지 않아 유치장에 갇혔는데, 누군가 대신 세금을 내 줬다며 석방을 알려오는 보안관에게 왜 자신의 저항운동을 방해하느냐며 되레 역정을 내는 괴짜 사상가. 집안 내력인 매부리코와 덥수룩한 수염 탓에 다들 접근을 꺼리지만, 한번 말을 트고 나면 도저히 감탄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촌철살인의 재담가. 마치 전설속의 인디언 추장처럼, 말 못하는 무수한 생명들과 영혼의 교감을 나누고 그 이야기를 글로 엮어내는 다정하고 마술적인 작가. 헨리 삼촌을 표현하는 이처럼 다양한 이름들이 적혀 있는 명함 맨 아래에 지하철도의 역장이라는 한 줄을 더 붙인들 어색할 게 뭐가 있을까. 사실, 아직 삼촌이 살아 있던 내 어린 시절에, 그 오두막을 찾아가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실에 내려가 이곳저곳을 두드려 보고 귀도 대어 보기도 했으나 역시 경적 소리 같은 건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조카의 약혼이 행복의 꼭대기지점에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데 자신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저 세상의 삼촌이 안다면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날, 나와 엘리자베스를 애덤스 가문의 저택으로 실어간 마차는 부러 멀리 빙빙 돌아 애덤스 가의 흑인 노예들이 목화를 따고 있는 목화밭 사잇길을 밟으며 천천히 달렸다. 마차가 지나가자 노예들은 일손을 멈추고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 시선을 마차 바닥에 고정한 채 옆자리에서 엘리자베스가 종알대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마차는 지독히도 천천히 나아갔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비난받는 듯한 시간이 영원처럼 내려앉았다. 그 길고긴 시간을 뚫고 마침내 마차가 애덤스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리는데 이미 정원의 모든 흑인 노예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광경을 마주하고 나는 발을 헛디딜 뻔 했다. 등 뒤에서 엘리자베스가 높은 음역으로 짧게 웃었다.

 

데이브, 아버지께 드릴 선물로 뭘 가져왔나요? 흑인 하녀의 손에 머리칼을 맡긴 엘리자베스가 미소를 띠며 물어왔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와인이라오. 보잘 것 없는 선물이라 오히려 아버님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오. 잘 했어요, 데이브. 아버지가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지만 다른 걸 가져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죠. 그게 뭔지 알아요? 그게 뭔가요, 리지? 엘리자베스가 슬쩍 웃더니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소리 높여 말했다. 그건 바로 자유, 평등, 박애랍니다! 항상 아버지는 말씀하시죠. 자유, 평등, 박애야말로 프랑스의 최고급 수출품이라고. , 내 이름도 엘리자마히가 될 뻔 했다는 거, 이야기 한 적 없었나요? 어머, 아자리, 아버지가 새로 사다주신 백금 목걸이 좀 가져다주겠어? 사파이어가 걸려있는 목걸이야. , 아가씨. 아자리라 불린 흑인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작은 방으로 사라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리지, 내게 미리 귀띔을 해줬더라면 자유, 평등, 박애 가운데 하나라도 오늘 가져왔을 텐데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괜찮다니까요, 데이브, 사실 자유, 평등, 박애는 이미 이 집에 넘치고 흘러 더는 필요하지 않거든요. 둘러보세요. 이 영지와 저택의 모든 곳에서 프랑스 최고 수출품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요? 나는 적당히 주위를 둘러보는 척을 하고 맞장구를 치려했으나, 마차를 타고 이 저택까지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갑자기 떠올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목걸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아자리가 역시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아자리? 내 말이 맞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아자리는 잠깐 당혹스런 눈빛을 보이더니, 그 눈빛을 들킬세라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아가씨. 아가씨 말씀이 다 맞아요. 맞고 말구요.

 

만찬은 의외로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지는 듯 했다. 애덤스 씨는 내가 선물한 와인을 마음에 들어 했고(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유, 평등, 박애의 요술 주문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식탁 위의 대화는 암초를 만나지 않고 순항했다. 그랬던 그날의 저녁 만찬이 결국 엘리자베스와 나의 항해를 파혼이라는 기항지로 몰고 간 것은 돌이켜보면 아마도 애덤스 씨의 이 말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매사추세츠 주의 흑인 사업은 전망이 좀 어떤가. 북쪽으로 캐나다 자치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흑인들이 쉽게 달아난다고 들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애덤스 씨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얼마 전 그곳의 농장주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참 훌륭한 신사인데도 자꾸만 달아나는 흑인들 때문에 정당한 사업을 망치고 있었어. 매사추세츠는 정말 사업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지.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나는 그것이 매사추세츠가 캐나다와 맞붙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네. 자네도 그곳에 산다니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애덤스 씨는 손을 턱에 대고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달리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애덤스 씨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리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이름에도 데이비드가 들어가는구먼. 그곳에서는 참 흔한 이름인가보군. 이봐, 자네 혹시, 몇 해 전에 죽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이름의 선동가를 아는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차마 입으로 대답을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애덤스 씨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악마 같은 작자는 흑인들을 꾀어내어 그들이 우리 인간(그는 분명히 인간이라고 말했다)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가르쳤지. 게다가 인간들에게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납부해야 할 세금조차 내지 말라며 선동했다네. 흑인 사업이 옳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정부에는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거야! 세상에, 그런 자의 목숨까지 지켜주려고 이 나라가 공정한 사업을 하는 이들의 주머니에서 세금을 걷어가는 거야. 그가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것도 다 공정한 사업을 하는 이들이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불복종이라니. 불족종이라니! 책 이름은 또 얼마나 거만한가. 그 지옥불로 태워 없애야 할 책의 제목은 시민 불복종의 의무라고 한다네. 의무라니. 누구 마음대로 의무야. 그렇지 않은가? 자네도 매사추세츠 사람이니 그자의 더러운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았겠지? 나는 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저 그 자리를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애덤스 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쪽 벽 그늘 속에 조용히 서 있던 흑인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 내 집무실에 가서 책을 가져 오도록 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자리에서 태워버릴 수 있도록 성냥도 가져 오고. 주인님, 저는 글을 몰라서 말씀하신 책이 어떤 책인지 찾을 수가.....어디서 말대답을! 이 멍청한 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 글도 모르는 너 같은 짐승이 우리 인간과 같다는 말을 했던 그 악마에게 신의 벌이 있기를! 그 책은 내 책상 한 가운데 펼쳐진 채로 놓여 있으니 그걸 가져 오란 말이다, 이 벌레 같은 놈아! 하인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다 재빨리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헨리 삼촌의 이야기를 했던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만약 했다면, 애덤스 씨는 지금 내가 저 지옥불로 태워 없애야 할 책, 시민 불복종의 의무, 그에 못지않게 사악한 책 월든을 쓴 사람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역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갔을 거네. 주님은 결코 그런 자들을 건져 주시지 않지. 애덤스 씨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뒤에 이어질 그림들과, 지어내야 할 변명 혹은 병명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인이 책을 한 권 들고 돌아왔다. 제발 글을 모르는 그가 다른 책을 가져오기를, 그리하여 주인의 벼락같은 분노를 뒤집어쓰고 새카맣게 타서 죽어버리더라도 제발 다른 책을 가져오기를 기도했지만, 그가 내려놓은 책 표지에는 내가 사랑하는 삼촌의 이름이 대문자로 당당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감했던 시험의 순간이 왔다. 애덤스 씨는 아무 의도도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한 번 태워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매사추세츠 사람이 이 책을 태우는 것이 그자를 지옥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데려가지 않겠는가? 그가 내게 성냥을 내밀었다. 나는 성냥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내려다 볼 뿐이었다. 아마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팔꿈치로 건드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잔이 산산 조각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아자리, 이 못된 것, 어디서 이런 미끄러운 잔을 가지고 온 거야. 내 새 드레스에 와인을 흘려 못쓰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 대답해, 어서 대답해 이 벌레 같은 것아! 그러나 쉼 없이 거친 말을 쏟아 붓는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자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빌고 있었지만, 진짜로 사죄하라는 청구서를 받은 사람은 아자리가 아니라 사실 나임을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구원의 밧줄을 던진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줄을 잡으라고, 네게 이름을 물려 준 야만인의 시체를 발로 차 지옥 구덩이에 밀어 넣고, ‘우리 인간의 울타리로 들어오라고, 지금 이 손만 잡으면 전부 아름답게 흘러갈 거라고, 이 자유, 평화, 박애가 넘치는 저택에서 정당한 흑인 사업을 통해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지금 그녀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아자리, 너 같은 짐승은 정말 대접받을 가치가 없어. 그렇지 않아요? , , 맞습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말이 다 맞아요. 닥쳐, 너에게 물은 게 아니야. 데이브, 대답을 해 봐요. 이 노예가 내 드레스를 망치려 했다구요. 이 검은 짐승에게 우리가 무슨 벌을 주어야 할까요?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애덤스 씨, 엘리자베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아자리까지. 그러나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은 헨리 삼촌이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삼촌의 책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책 표지에 박혀 있는 헨리라는 이름이 왼쪽 눈이 되고,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오른쪽 눈이 되어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영원의 시간이 찾아왔다. 모든 눈들이 외치고 있었다. 대답해요. 대답하게. 대답하라구요. 대답을 하시게. 대답. 대답. 대답을. 조카야, 대답하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쥔 성냥은 나도 모르게 이미 부러뜨린 뒤였다.




 

엘리자베스로부터 긴 편지를 받았다.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 글로 안타까움을 말하고,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글로 슬픔을 말하는 긴 편지였다. 그러나 그 긴 편지도 이별을 말하기에는 짧았다. 짧아도 들어 있을 이별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세 번 다시 읽었다. 그러나 그 편지 어디에도 아자리, 흑인, 삼촌의 책,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오늘 밤도 엄마의 퀴즈를 생각한다. 엄마가 후회했던 것은 무엇일까. 내게 삼촌의 이름을 붙이고, 삼촌의 태양 아래 키워내 마침내 삼촌의 이름과 영향력이 내 결혼을 망치게 만들었다는 탄식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세상에 빛을 던지고 떠난 삼촌의 훌륭한 이름을 나 같은 용기 없고 나약한 멍청이에게 붙여 욕되게 만들고 말았다는 죄책감이었을까? 나는 오늘도 삼촌의 오두막에 기어들어가 지하실의 벽을 두드려보기도 하며 하루를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버린 날들이 쌓이자, 조금씩 희미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윤곽밖에 드러나지 않아 무엇의 윤곽인지조차 말할 수 없는 그런 징조가. 삼촌은 월든, 어느 겨울 꽁꽁 언 월든 호수의 얼음을 잘라내 가져간 얼음 장사꾼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들이 가져간 얼음은 어디선가 녹아 물이 되었을 것이고, 월든은 제 품에서 그만큼의 물을 도둑맞은 것이다. 그 후로도 겨울이면 많은 물을 잃었을 월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면 충만하게 가득 차 출렁인다. 그 물은 어디서 왔을까. 멀리 떠난 물들이 하늘과 땅을 밟아 다시 월든으로 돌아온 걸까? 헨리 삼촌은 아마 그 대답을 찾으려 이곳에서 22개월 하고도 2일을 보냈을 것이다. 삼촌이 오두막을 나간 것은 그 답을 찾았기 때문일까? 내겐 아직 모든 것이 어렵고 세상은 모를 일투성이다. 나는 저 물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반년을 혼자 지내는 동안, 저 물들이 온다는 것을, 결국은 월든 호수가 다시 가득 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수백 개의 낮과 밤이 월든 호수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침내 22개월 2일을 채우고, 나는 이 오두막을 나설 것이다. 그때 내가 손에 얼마나 많은 대답들을 움켜쥐고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밑천이 될 것이다.



 

나는 삼촌과 나란히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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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1-1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비난받는 듯한 시간이 영원처럼 내려앉았다.


이 문장, 쇼님이 쓴거죠? 와- 진짜 명문장이에요. 이 글도 그렇고요.

syo 2017-11-15 09:59   좋아요 0 | URL
앗, 칭찬 ㅎㅎㅎ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닌 글인데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사실 열심히 썼어요...

다락방 2017-11-15 10:11   좋아요 0 | URL
저는 월든 사놨지만 읽기 싫었었는데, 이 리뷰 보니까 읽어야겠다 생각하게 되네요.

그건그렇고, 그 뭐더라, [우아한 인생]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거기 남자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때문에 월든 을 읽게 되거든요. 여주가 좋아한다고 해서요. 그리고 읽고는 그 책이 너무 좋아서 항상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책 읽고 월든을 샀었어요. 크- 그 생각 나네요.

syo 2017-11-15 10: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그야말로 제 인생책이라, 저는 매년 한 번은 꼭 읽고 있어요. 자꾸 혼내는 데도 어쩐지 힘이 많이 되는 책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1-1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재미있어요^^

syo 2017-11-15 1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재미씩이나!

프리즘메이커 2017-11-1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저랑 독서취향이 비슷하신거죠?

syo 2017-11-15 14:53   좋아요 1 | URL
프메님이랑 인생 행로가 좀 비슷하더라구요. 제가 좀 더 철없이 인생 탕진하면서 살긴 했지만요. 아마도 그래서?? ㅎ

AgalmA 2017-11-19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니라 소설이 되자! 제 모토를 만족시켜주는 글이네요^^ 역시 syo님이얌^-^b

syo 2017-11-19 09:46   좋아요 0 | URL
(^-^)> ㅎㅎ

- 2021-06-1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syo 2021-06-17 18: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시이소오님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리뷰를 읽고 쓰는 글이 맞지만, 시이소오님의 견해를 지적하거나 반박할 의사가 없습니다. 첫째, 시이소오님은 syo가 깔 수 있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분이 절대 아니고, 둘째, syo는 시이소오님의 글을 깔 수 없을만큼 어쭙잖은 말을 하는 놈이고, 셋째, 설령 미라클적으로 앞의 두 조건이 모두 만족된다 하더라도, 시이소오님의 말씀처럼 아직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 되는 곳이 이 나라 이 땅이기 때문이겠다. 시이소오님이 그렇듯 syo도 남성이며,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위험한 마당에 페미니즘에 대한 발언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듀얼코어로 멍청한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심한 syo가 언제나 그랬듯, 지금 놀이터 한 구석에 숨어서 바닥에다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난 항상 혼자 놀지. 친구가 없거든. 지금 난 그림을 그리고 있어. 혼자 그리고 있지. 뭐, 와서 보라고 그리는 건 아냐. 그렇지만 본다고 해도 말리진 않을게. 혹시 내가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나를 때리지는 않을 거지?


위의 글을 어디 적어놓고 앞으로 쓸 일 있을 때마다 ctrl+c, ctrl+v 해야 되겠다.


syo는 <집적회로소자> 과목이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은 처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적분을 처음 배울 때, 물리2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그랬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미분적분학>,<일반물리학>,<디지털논리설계>,<현대물리학>,<전자기학>,<회로이론>,<데이터구조>가 쉬웠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 후로도 <전자회로>,<반도체소자공학>,<수치해석>,<알고리즘>,<디스플레이구동설계>..... 그 많고 복잡한 수식들과, 무뚝뚝한 공학적 서술들과, 이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요정도는 당연히 배우고 올라왔으리라는 잔인한 가정과..... 이 모든 악랄한 것들이 전부 실리콘밸리든 어디든 syo는 가지도 못하며 평생 부러워만 해야하는 곳으로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꾹꾹 눌러 4년을 마치자 syo는 "지금부터 아주 잘만하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만들 수도 있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디스플레이, 프로세서, 배터리, 그리고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각각 syo같은 먼지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수학 할아버지와 과학 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기괴하고 야릇한 이름의 과목들을 헤쳐나오는 데 고등학교 이과 2년, 대학 4+n년, 최소 6년을 오롯이 바쳐 겨우 '먼지'가 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졸업즈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 먼지들아 반갑다, 나는 '찌꺼기'라고 해, 너희들도 나처럼 대학원에 들어와 석사 2년을 마치고 나면, 당당한 '찌꺼기'가 될 수 있단다!


그 먼지들이 찌꺼기가 되고, 찌꺼기가 덩어리가 되는데 거의 10년이다. 그러나 여러 곳의 덩어리들이 한데 뭉쳐 가까스로 만들어 낸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몇가지 손가락 기술, 항시 와이파이를 켤 것, 기기묘묘한 패턴을 만들 것, 안되면 껐다 켜볼 것, 과 같은 아주 단순한 기능 뿐이다. 그러나 전자공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도 스마트폰을 더 잘 쓰기 위해 전자공학이 더 쉬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syo도 그렇다. 전자공학 연구가 어려워지고, 복잡해지고, 고도화될수록,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많아진다.


물론 syo도 페미니즘이 쉬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욕심일 뿐이지,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자체가 syo의 이해선상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이다. 물론 버틀러는 뒤지게 어렵게 쓴다. 이리가레는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많다고 들었다. 스피박은 본 적도 없는데 이미 죽은 견해라는 이야기도 어디서 주워 들은 것 같다. 페미니즘 이론 계보상 저어어어어 꼭대기에 있으니 그나마 괜찮겠지 싶어서 읽기 시작한 보부아르의『제2의 성』조차 지금 몇 주째 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다. 쉬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좀 더 쉬울 수는 있어도, 겨우 얇은 책 10권 정도 읽어 본 syo가 확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쉬울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이라면, 한 줌의 이론에 무너질 얄팍한 기반에 근거해 이리저리 여성들을 착취해 온 남성의 보잘 것 없는 역사가 한껏 더 보잘 것 없어지겠다.


페미니즘이 스마트폰처럼 우리의 생활을 바꾸기 위한 학문이라 해도, 그 저변에는 난해한 이론들이 깔려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혀 과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서점에는 이미, 밀어서 잠금 해제 수준으로 학문을 배제하고 생활에 밀착시킨 페미니즘 책들이 많다. syo의 눈에는 오히려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로 보인다. 페미니즘의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그저 여성이 쓴 에세이일 뿐인 그런 책. 


표면과 심층 사이의 그 깊은 간극, syo는 그 간극이 더 벌어졌으면 좋겠다. 다만 밑바닥까지 밟아 내려갈 수 있는 계단 같은 책들이 좀 더 단계적으로 나왔으면 한다. 이건 뭐, 밑바닥 볼려면 무조건 다이빙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페미니즘에 생업을 건 것도 아닌 입장에서 그냥 물장구만 퐁당퐁당 치고 말아야 하는 형국이긴 하다. 


벨 훅스의 책을 읽으면서 syo는 그런 생각을 했다. 페미니즘을 점점 어렵게 하는 학자들의 담론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들이 담론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다른 페미니즘 연구자나 활동가의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을 고성능하이클라스특급쓰레기라고 불러야 되겠다고. 우리가 더 좋은 스마트폰을 사용해 더 다양한 생활의 편의를 구현하려면 전자공학의 담론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공학 박사학위자가 일반인들에게 당신들이 쓰는 방식은 틀렸소, 스마트폰은 이렇게 써야 하오, 나는 박사요, 내 말을 들으시오, 거기 당신은 스마트폰을 쓸 자격이 없으니 내일부터 폴더폰을 쓰시오, 나보다 스마트폰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이런 결정을 할 자격이 있소, 당신들이 쓰는 것은 스마트폰이 아니오, 그러므로 당신은 스마트하지 않소. 뭐 이따위의 발언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연구자가 아닌 일상의 페미니스트들이나,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사항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주의를 주거나 경고를 할 수 있다. 아무리 방수가 된다지만 스마트폰을 물에 빠뜨리는 것은 좋지 않아, 배터리는 소모품이니까 1년의 무상 A/S 기간 안에 갈아주는 것이 좋아, 데이터를 함부로 쓰면 요금 폭탄을 맞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진동으로 바꾸는 게 어때. 그러나,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개인이 법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임의로 타인의 스마트폰을 빼앗거나 사용할 자격을 박탈할 수는 없다. 타인의 페미니즘을 함부로 짓밟지 맙시다.




뜬금없지만 171101-171111 32권



1. 파씨의 입문

: 아프고, 슬프고, 부질없는 것들의 반복을 앞에서, 곁에서, 안에서 바라보는 눈. 언제 돌아올지 모를 다음 파도를 기다리며, 바닥이 없는 긴 구멍 속을 한없이 함께 낙하하는 눈.


2. 괴물과 함께 살기

: 사회철학에 대한 재빠른 일별. 두꺼운 책들이 눈을 부릅뜨고 기다린다.


3. 웃는 남자

: 만족 만족. 읽는 사람이 세상을 마주해 열린 관심을 가질수록, 소설의 기능과 가치는 더 선명하게 빛나는 법이다.


4. 다이어트는 운동 1할, 식사 9할

: 될까? 뭐든 열심히 안 하는 syo에게 살 빼는 일이야 열심히 안 먹으면 되니까 쉽지만, 건강하게 살 빼는 일은 뭘 열심히 해야 하므로 어렵다.




5. 시사인 528


6. 민주주의의 정원

: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호모 폴리티쿠스를 죽이고, 애덤 스미스와 찰스 다윈을 제 입맛에 맞게 교접한 우리의 오래된 기계적 세계관을 깨고 나오자!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모든 학문 분야들이 전부 정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라고 써놓고 보니 이 책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작지만 훌륭한 경제사회 팸플릿 같다.


7. 루쉰

: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 루쉰이 유학하던 시절의 일본상을 명확히 그리기도 하고, 일본의 루쉰 수용사를 비중있게 다루기도 한다. 같은 분량의 다른 평전들에 비해 루쉰의 개인사를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도 있다. 전체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평전은 아니겠다.


8. 니체씨, 긍정은 어떤 힘이 있나요?

: 삼촌, 니체가 뭐하는 사람이야? 라고 조카가 물어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은데 조카가 없다.




9.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 헌법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1조를 다시 읽는다. 어느 순간 철학과 관념의 평면으로 점프했다가 다시 정치와 권력의 평면으로 내려오는데, 두 개의 평면 위에서 놀 때는 능수능란한 반면, 평면 간의 이동이 갑작스럽거나 다소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는 느낌이 있다. 헌법 1조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충분히 놀라운 책이다.


10. 고전으로 철학하기

: 읽을만 한 인문독서기록이다. 의견의 대립이 있는 부분에서는 양비론, 중용, 도덕책 속의 예쁜 말로 결론을 맺는 경향이 없진 않은데, 깔 때는 까 주고 말할 게 있을 때는 촥촥 내지르다보니 그렇게 눈에 밟히지는 않는다. 빨강이의 냄새가 난다. 아이 좋아라.


11. 약탈정치

: 한 권으로 끝내는 이명박근혜.


12.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 <군주론>의 임팩트가 막강한 것은 전쟁터가 우리네 사는 마당 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입장에서는 득인 동시에 실이다. 명성을 얻었으나 그 명성이 악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군주론>을 다 읽고는 이제 마키아벨리를 다 씹어먹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런 경우 고작 1/4의 마키아벨리를 알았을 뿐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서한집>과 <외교문서집>을 한 덩어리로 시작해, <군주론>, <로마사논고>, <피렌체사> 의 큰 네 덩어리로 끊는다. 군주론 하나 읽고 깝치지 말라는 이야기 같다.




13.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상물정 아는데 알아야 하는 것이 이리도 많으니 게으르게 살아가지고는 답이 없겠다. 어휴.


14. 헌법의 발견

: 헌법의 대표적 조항들을 둘러싼 정치/철학/사회학적 지식들의 향연이다. 박홍순 선생님의 인문학 책 스타일을 실하게 보여주는 좋은 책. 다만 좀 재미가 없고, syo의 경우 이런 나열식 발췌 지식 사전 같은 형식의 책에서 얻은 것들은 빨리 휘발되고, 결국 책에서 언급된 문헌들을 하나씩 읽어가야 남는 게 있더라.


15. 종의 기원을 읽다

: 양자오는 무섭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아는 사람. 책도 좋다. 그러나 양자오의 책은 양자오처럼 무섭거나 어마어마하게 괜찮지는 않다. 쉽고 재미있다는 사실은 반박불가다.


16. 문제적 과학책

: 36권의 과학책을 결점으로 해서 꿰어나가는 과학사. 어렵진 않지만 딱히 재미가 있지도 않은, 무난한 과학사 책이겠다. 철학사도 그렇지만 과학사 역시 구슬 서 말을 꿰어 보배를 만드는 데 쓰는 끈이므로, 초심자가 과학 공부를 과학사 책으로 시작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공산이 크다. 근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 걸까.



17. 풍경 소리

: 구효서 선생님 회춘 소식을 전합니다. 만세. 이것은 구력이 없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인데, 상큼한 문체와 만나 이제껏 없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18. 맹자를 읽다

: 양자오는 맹자를 투사로 본다. 논변의 투사. 그런 관점에서 맹자를 읽는 것은 과연 효력이 있다. syo가 보는 맹자는 분노와 혁명의 사상가다. 사람들은 자꾸 택도 없는 질문으로 맹자를 괴롭히고 그 덕에 맹자는 항상 화가 나 있다. 공자보다 맹자가 더 잘 듣는 약이 되는 시대다.


19. 한겨레21 1185


20. 베를린 일기

: 빵 터지면  별 다섯 개 원칙대로 별 다섯 개. 오십다섯 개.



21. 지금 당신에겐 시 한 편이 필요합니다

: 그 동안 시를 읽는다고 읽었지만, syo는 읽은 게 아니라 읽은 개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2.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윤고은.


23. 리영희 프리즘

: 리영희를 빌려와 오늘날(2010)을 조명하는 책. 리영희를 지식이 아닌 방법론으로 보는 셈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방법론으로 기능할만 한 지식인이 과연 얼마나 더 있을까.


24.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 제목부터가 딱 정지돈이다. 정지돈의 <정지돈> 이런 느낌이다. 단편도 장편 같고 장편도 단편 같다. 읽어보면 여지없이 정지돈이다.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할 것이다. syo는 그저, 정지돈은 정지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25. 다른 사람

: 많은 말을 하려고, 많은 글을 썼는데 모두 지워버렸다. 작가가 글을 너무도 선명하게 써서, 나도 이 모든 아픔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 이해라는 것이 여전히 세상에 크고 작은 아픔과 슬픔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입에서 종종 나오는 '이해'라는 단어와 얼마나 다른지 확신이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뱉을 수 있는 말이 줄어드는 책들이 있다. 나는 부채감과 분노가 만드는 교집합의 어느 지점 위에서 그저 침묵만 거듭한다.


26. 즐거운 시 읽기

: 이 책을 보고 있자니 중고등학생이 시를 싫어하게 되는 이유를 잘 알겠는데도, '즐거운' 시 읽기 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야말로 반어법에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려는 살신성인의 태도겠거니.


27. 문단 아이돌론

: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이미 있는데 못 보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얼른 눈 앞에 나타나라구요.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28. 21세기 다윈 혁명

: 다양한 학문 분야에 다윈을 끌어들여 아전인수식으로 다윈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책. 진짜 위대해 보이긴 한다. 19명의 저자가 짧은 글 한두 꼭지씩을 기고한 것인데, 글만 놓고 보면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



29. 이해 없이 당분간

: 아 재미지다. 흥미로운 작가들도 몇몇 발견. 아, 읽을 책이 또 늘었다. 깔려죽겠네.


30. 시사인 529


31. 그림으로 배우는 알고리즘

: 애기들 보는 애긔애긔 귀여운 책.


32. 알고리즘 행성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 어려운 책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은 기술서가 아니라 인문학 / 철학서이기 때문이다. 공학도와 공학도가 아닌 이들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공히 어려운 책이겠다. 




그간의 길었던 백수생활을 청산할 필요성을 느끼고 가족 및 준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인데, 그들은 모두 syo가 이제라도 뭔가 생활력을 갖겠다는 데는 하나같이 찬성하였지만, 취업 전선에 나가겠다는 말에는 또 하나같이 반대를 하였다. 평생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아직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니가 뭘 할 수 있겠냐며, 그냥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되 책만 바꾸어 보기를 강권한다.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청회를 가진 것도 아닌데, 마치 배후에 무슨 세력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이렇게 다들 똑같은 말들을 한단 말인가. 두어 명 정도는 동의를 해 줘야 마이 웨이 가겠다고 우겨라도 볼텐데. 이건 마치 덤벼라 세상아 하는 기분이라 찍소리 못하고 납득. 내일부터는 사랑스러운 책들 대신 끔찍하게 생긴 몇 가지 법서와, 요약서, 문제집 같은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아, 책은 갔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세 권 기세로 읽는 짓도 이제 끝이 난 것입니다. 앞으로 딱 250일만, 하루 10시간만 공부하기로 약정하였고, 위약하면 위약금으로 인생을 내놓을 판이라, 이제 한 달에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syo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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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1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ookholic 2017-11-1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합니다~

syo 2017-11-12 19: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

2017-11-1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11-1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곧 자본주의에 착취 당하시겠군요. ㅠㅠ
무척 애석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좋은 글 많이 남겨 주세요. ^^ 화이팅~~~^^

syo 2017-11-12 19:4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자본가의 밑을 닦아주러 가야 하다니.....syo도 역시 무슨 용빼는 재주는 없는지라 ㅎ

그러나 syo도 북다님처럼 열심히 투쟁하겠습니다.
화이팅은 잘먹겠습니다^^

2017-11-12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7-11-12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으로선 어려운 페미니즘이든 쉬운 페미니즘이든 그 어떤 페미니즘도 소중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20년후에는 주디스 버틀러를 까야겠지만 지금으로선 제 무지를 돌아보는걸로 만족해야겠죠.
그나저나 syo님은 로쟈님의 계승자이면서 이제보니 마태우스님의 계승자이기도 하십니다. 돌려까끼에도 일가견이 ㅎ 당했습니다 ~~ 의문의 1패입니다^^;;



syo 2017-11-12 21:09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ㅎ 저는 1승을 한 적이 없는데 어디서 1패를 당하셨어요ㅎㅎㅎ

돌려까기라고 느끼셨다면 그것은 오로지 syo의 표현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뭐라도 돌려 깔 깜냥이 된다면 syo역시 주디스 버틀러를 까고 싶습니다.시이소오님이 아니라요.



졔졔 2017-11-12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를린 일기에 저는 오백오십다섯개의 별풍...아니 별을 주겠어요.
저는 여자인데도 페미니즘이란게 어렵습니다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여성이기에 거부감이 없는건 확실하더라구요.

syo 2017-11-12 21:25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저는 오천오백오십오개를.... ㅎ 하여간 정말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페미니즘 책도 그만큼 재미있으면 참 좋을텐데요.

sprenown 2017-11-1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네요.. 취업을 위해 무슨 공부,어떤 시험을 준비하는지는 모르지만 월등한 성적으로 합격할 거예요!

syo 2017-11-12 21: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월등˝한 성적이라는 말이 힘을 엄청 북돋아 줍니다....

원더북 2017-11-12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헛;;;; 제가 조용히 애정하고 있는 시이소오님과 syo님이 남성이십니까??? 저는 여태 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서부터 저의 오독이 시작된 걸까요 하하핳;;;

syo 2017-11-12 22:09   좋아요 1 | URL
아하하하.
그것은 원더북님께서 ‘조용히‘ 애정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때론 격한 애정만이 진실을 가져다주는 법입니다^-^

원더북 2017-11-1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글을 읽으면 뭔가 기분이 업! 되어서 책 수다 상대로 넘나 좋으신 분들일 것 같다고 생각하다 보니 당연히 저랑 같은 여성인 줄 알았어요. 이제부터 격한 애정을 가져보겠습니다 ㅎㅎ

syo 2017-11-12 22:32   좋아요 0 | URL
책 수다 상대로 시이소오님이 좋겠습니다. syo는 아직 내공 부족이라 ㅎㅎㅎ

그러나 어쨌든 syo 역시 격한 애정으로 보답하겠습니다 ㅎㅎㅎ

아무개 2017-11-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틀러의 책은 저도 읽다가 포기했어요. 정말 어렵더라구요.
syo님 말씀처럼 남을 입닥치게하려는 잘난척만을 위한 어려운 페미니즘은 쓰레기가 맞을껍니다. 그건 다른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일테구요.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과 현실운동으로써의 페미니즘은 달라야겠지요. 쉬운 벨 훅스나 정희진으로 시작할순 있지만 거기에서만 머물러서도 안되기에 학문적 성과를 기대할수 있을 만한 한국판 페미니즘 철학서를 고대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가벼운 에세이들도 많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질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나의 언어 없이 살아왔던 수많은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더 많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디폴트이고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은 성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syo님은 어쩜 이렇게 재치만점의 좋은 글을 잘쓰시는지 매우 심히 격하게 부럽습니다^^

syo 2017-11-13 20:25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습니다. 허허, 줏대 없는 syo입니다.
글은 아무개님께 상찬받을 만한 건 못 됩니다^^ 내용은 없고 별 거 아닌 이야기를 중언부언 하느라 길게 썼을 뿐이예요ㅎㅎ

psyche 2017-11-15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준비인지는 모르지만 응원합니다! 그래도 계속 좋은 글은 쓰실거죠?

syo 2017-11-16 06: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글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뭐라도 쓰려고 애써보려구요 ㅎㅎ

chaeg 2017-11-1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자오의 책을 두권이나 소개해주셨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하시는 준비 잘 되길 바랍니다!

syo 2017-11-18 01: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 토큰님^^

AgalmA 2017-11-19 0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취업하면 이런 보석(...아니 원석인가)같은 페이퍼 못 볼 거 같으니 다른 분들처럼 많이 아쉽네요. 자기 시간이 나는 job을 잡으시길 기대할 밖에^^;

syo 2017-11-19 09:48   좋아요 1 | URL
보석도 원석도 어렵겠으나 요로결석 같은 페이퍼는 아주 가끔 보실 수 있겠습니다. 그런 건 자주 보면 안 되지요^^
 


오늘 읽은 책에서 1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뇌세포 수가 적기 때문인지(일본인 뇌 무게의 평균치는 남자 1372.9그렘, 여자 1242.8 그램) 천박함과 어리석음을 그 바탕으로 하며, 또 그것이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천박함과 어리석음이 이렇게까지 심해지면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된다. 

_ 다치바나 다카시,「시대와 상황의 병리학」,『문명의 역설』에 수록



우먼 리브는 일부일처제가 여자의 성적 욕구를 봉쇄한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그녀들이 정신적 불구임을 공표하는 것과 같다. 정상적인 여성의 성 심리에서는 여성 스스로가 일부일처를 원한다는 사실이 모든 심리학적 데이터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 음란한 여자, 여러 남자를 원하는 여자는 예외 없이 냉감증, 불감증이다. 오르가슴 부전이 님포마니아와 우먼 리브를 낳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되길 원한다면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를 하루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_ 다치바나 다카시, 위의 책


와, 아무리 옛날 글이라지만, 다치바나 다카시 진짜 개실망...... 후에 문고판으로 재발매 될 때도 전혀 개정이나 삭제를 하지 않았다는군요.




오늘 읽은 책에서 2




남성 우월주의는 어떠한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다윈주의를 남성 우월주의의 일종이라고 비난해 왔다. 다윈 이래 생물학자들은 암컷과 수컷의 차이를 강조하고 이를 토대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합당한 논의와 '오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다윈주의는 규범적 입장이 이념과 무관하다. 더구나 준거점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 수컷이 암컷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체적인 기능을 제시하지 않으면 평가적인 언명도 자기 선호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잘났다."고 말하는 것이나, "난 남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주의가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엉렵다. 다만 그것이 전적으로 다윈 탓인지는 의문이다. ....(중략)..... 하지만 성선택 이론을 수컷 우월주의로 착각하는 일부 때문에 다윈주의를 남녀 차별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 입장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핵전쟁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때문이라고 질책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다윈주의자와, 다윈주의를 빌미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그는 구문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_정연교,「윤리의 세방화를 촉진시킨 다윈과 다윈주의」


이런 글을 보면 눈쌀이 찌푸려지는 것이 syo 뿐입니까. 다윈주의자와 다윈주의를 빙자하는 이데올로그를 왜 구분하지 못하냐고, 그 책임을 페미니스트에게 따져 묻는 것이 전적으로 온당한 일인가?


이 판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글쓴이가 주장하는 순수한 정통 다윈주의자 A, 다윈주의를 빌미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한다는 '착각하는 일부' B, 그리고 다윈주의도 잘 모르면서 남성 우월주의의 일종이라고 비난하는 페미니스트 C. 


그러니까 글쓴이의 말은, B가 다윈주의라는 객관적이과 과학적인 학문을 비틀어 C를 공격했고, C는 A와 B를 구분하지 않고 욕하고 있다는 건데, 이 말만 들어도 저자가 얼마나 젠더 문제를 방관하고 있으며 학문적 고고함만 지키려 하는지 눈에 선명히 보인다. 세상 어느 B가 자신이 B라고 하며 C를 공격하겠는가. 자기가 A라고 하며 공격해 오는 B를 보며, 얻어맞는 C가 너는 A가 아니라 B야, 하고 다정하게 정정을 해주면서 얻어맞아야 한다는 말인가. 글쓴이가 A로써, 정말 진정한 다윈주의를 오염시키는 세태를 바로잡고 싶다면, C에게 눈을 뜨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B를 축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게 아닌가. 다윈주의에 똥물을 타고 있는 것은 C가 아니라 B인데. B가 모조리 없어지면 C가 다윈주의를 오해할 일이 없겠으나, C가 모조리 없어진다 한들 B가 남아 있다면 진정한 다윈주의를 향한 A의 꿈은 이룰 수 없는 게 아닌가?


첫번째 문단에서 글쓴이는 B를 공격한 척 하는데, 눈가리고 아웅도 정도껏이다. 글쓴이의 눈에 B가 하는 짓은 잘못이 아니라 '오버'일 뿐이다. 글쓴이는 '준거점을 언급하지 않고' 깝치는 B를 욕하는 척 하지만, 실제 그런 B는 없고, 있어도 C가 알아서 거른다. 문제가 되는 B들은 진화심리학이든 뭐든 가져와 자신의 주장에 맞게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법으로 근거를 만들곤 한다. 그러나 글쓴이는 그런 B를 경계하는 태도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후드러 패면서 객관성을 확보한 척 할만큼 약삭빠른 것인지, 아니면 저래 놓고 정말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할만큼 순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글쓴이는 '가치 다윈주의'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가치 다윈주의가 자리잡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예쁘지만 허망한 조건을 제시하는데, 정말 옳다. 핵공감.


"우선 가치와 진리가 분리되어야 한다. 가치의 원천을 하늘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다윈주의라는 진리의 고결함을 수호하겠다고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고 귀를 막는 일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둘째, 이성에 대한 편집증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이나 윤리가 고매한 이성을 갈고닦아 발견할 수 있는 진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준거점'이나 '구체적인 기능' 같은 진리의 보조장치들을 휘둘러대며 무언가를 합리화 하려는 시도는 말아주시기를.


"셋째, 문화와 가치의 기능을 효용에서 찾아야 한다. 문화와 가치가 생존 기제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상이한 습속과 전통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젠더 형성 과정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말아달라는 목소리에 지금처럼 힘을 실어주시기를.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문화나 가치가 갖추고 있는 공통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형평과 효율, 배려와 사익, 규율과 자율이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을 경우 어떤 가치나 문화도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정말 그렇다. 부디, 형평보다 효율에, 배려보다 사익에 더 큰 무게추를 실으면서도 그것이 적절한 배분이라고 우기는 학자는 되지 말아 주시기를.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사람은 핵폭탄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그 날 이후 남은 평생 내내 핵폭탄 제조를 독려하는 편지를 보낸 일을 후회하며 살다 갔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던져진 전제와 근거에 따라 추론하는 것에 머물 때, 우리는 '기계 부품'에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때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 '감히 알려 하고', '감히 문제 삼으로 하는'태도라고 할 수 있다.

_ 고병권 외,『리영희 프리즘』 


진보를 믿는 것, 그것은 진보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_ 프란츠 카프카,「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만약 당신의 그 권위 있는 비평이 우리가 모르는 것를 알려준다면, 왜 세상은 계속 침묵할까요? 왜 우리에게 진실과 돌이킬 수 없는 법을 말해주지 않을까요? 비평이 그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주었을 테고,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을 겁니다.

_ 안톤 체호프 


실상 탈맥락적 보편이란 말은 허구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위치에서, 말하고 사고하고 행위한다. 철학적 사유는 자신이 거주하는 시간과 공간을 표시하고 말해야 한다. 예전에 만들어진 개념은 당연하게도 새로운 개념과 이론에 의해 비판되며 수정되고 새로 쓰인다. 개념은 그 흔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_ 김은주,『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모든 진리는 자기 확장적이다. 어떤 관념이 자기를 진리라고 믿을 때, 그것은 맹렬하게 팽창한다. 주먹만하게 줄어들었다가 크게 폭발한 우주처럼. 그러나 그 우주에도 끝은 있다.

_ 김현,『행복한 책읽기』


눈치 없이 혼자 느긋한 이유는 달리 없습니다. 느긋해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긋한 채로 살 수 있는.쪽과 그렇지 못한 쪽이 정해져 있어서 문재가 되는 상황에서는, 본인이 팔자가 좋다는 걸 드러내지 않는게 예의입니다.

_ 이민경,『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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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놀이 2017-11-0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살 찌푸려지는 것에 대해 참으로 논리적으로 잘 대응하시는구나 감탄합니다! A와 B와 C를 따라가다보니 이해가 쏙쏙됩니다.

syo 2017-11-10 00:18   좋아요 0 | URL
빡쳐서 썼더니 문장이 엄청 투박하고 유아적이네요.... 흥분을 가라앉히는 법을 배워야 될 텐데요ㅠ

풀꽃놀이 2017-11-10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신에 그 때문에 글에 생기가 돌기도 하는걸요. 학술적인 글이나 보도문이 아닌 이상 조금은 흥분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syo 2017-11-10 06:47   좋아요 1 | URL
사실 프로필 이미지부터가 냉정을 상실한 인간형을 보여줍니다.....

다락방 2017-11-1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정을 상실한 프로필 이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치바나 다카시라면 저도 읽은 건 없지만 그 이름은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데, 하하하하, 진짜,


개빻았네요.

--^

syo 2017-11-10 09:29   좋아요 0 | URL
저 정도로 당당하니까 외려 더 말문이 막히네요.

독서괭 2017-11-1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다치바나 다카시 저도 읽은 건 없지만 알고는 있는 인간인데 우와~~ 존스타인벡을 향한 다락방님의 일침이 떠오르네요. “젖도 없는 놈이...” 이거.ㅋㅋ - 다치바나야, 니가 오르가즘을 아니?
ABC 비유 명쾌하고 좋아요! 그런데 ABC라고 써 놓고 보니 지난 페이퍼에서 쓰셨던 “ABC초콜렛은 초콜렛도 아니지 라는 말을 목전에서 들은 ABC초콜렛의 마음”이라는 표현이 떠올라 웃음이.. ㅋㅋㅋㅋ

다락방 2017-11-10 17:2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1-10 17:32   좋아요 0 | URL
아 그 ABC초콜렛 표현은 그 책 <베를린 일기>에 스무 번은 더 나오는 형식을 패러디 한 거였어요. 창작자가 최민석 작가님이지요. 변주도 얼마나 기가막히게 하는지, 제가 흉내낸 건 게중 재미없는 수준입니다 ㅋㅋㅋ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


황정은이 쓴『백의 그림자』를 처음 읽고 어찌나 울었는지 눈물로, 어찌나 칭찬하고 다녔는지 침과 땀으로 전신의 수분을 너무 많이 소비했던 거라, 건표고버섯처럼 메말라 한동안 시름시름 앓았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 정도 과장해도 또 어떠리 싶을 만큼 황정은은 좋았다. 최초로 syo의 한국소설가 빠리스트(빠List)에 안착한 이후 오랫동안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던 김연수의 곁에 든든한 후배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여간 너무 좋아서 처음 황정은을 추천한 눈 밝은 친구에게 또 누구 없냐고 채근했지만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 김금희도 아직 뜨기 전, 최은영은 등단도 하기 전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syo가 아니었으므로, 구글링을 통해 어디선가 황정은-윤고은-손보미를 트로이카로 묶는 글을 발견했다. 윤고은과 손보미렸다.


그렇게 윤고은의『알로하』와 손보미의『그들에게 린디합을』을 읽고 어찌나 욕했는지 syo는 성대를, 소설이라고는 염상섭의 삼대 이후로 읽은 적이 없는 처지임에도 강제로 욕받이 역할을 맡아야 했던 친구 三은 고막을 잃고 말았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 정도 과장해도 또 어떠리 싶을 만큼 당시에 syo는 열이 받아 있었다. 원래 덕질이 그런 법이라는 변명을 붙이고 싶다. 누군가 자신의 덕으로 내 덕을 깔거나 그와 맞먹으려 들 때, 내 덕을 지키기 위해 피와 비명을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덕도이므로, 좀 부당하다 싶을 만큼 윤고은과 손보미를 낮추어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하여간 당시 syo의 눈에 황정은과 나머지 둘 사이에는 넘사벽이 놓여 있었기에, 윤고은과 손보미가 문단에서 승승장구하며 쑥쑥 자라는 것은 무언가 어둡고 끈적끈적한 비밀을 지시하는 징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참 알차게 미친 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오늘, 이제 사죄와 정정의 시간이 왔다. 당신들은 몰랐고, 몰랐든 알았든 인생 행로에 하등의 걸림돌이 아니었겠으나, syo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런 걸 눈이라고 달고 다녔더라구요. 허허허.


『알로하』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작들을 모아 놓은『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읽은 것이지만, 그간 맹목이었음을 충분히 인정할만큼 괜찮은 책이었다. 솔직히 황정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은 여전히 빠심이 인정할 수가 없고, 또 아래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김금희와 최은영의 추격도 견뎌내야 하겠지만, 윤고은은 참신하고 명민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지어내며 자기 자리를 선명하게 선언하는 훌륭한 소설가다. 


리뷰나 페이퍼에서 줄거리를 언급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syo지만, 사죄 정정 특집이므로 미흡하지만 짧게나마 읊어보자.


● 된장이 된 : 등록금 하게 오랜 빚 1000만원을 받아오라고 보내 놨더니 어디서 된장 50리터를 짊어지고 온 아버지. 그런데 아니 글쎄, 알고 봤더니 이 양반이....


● 불타는 작품 : 다 그린 그림을 태우는 조건으로 화가를 먹이고 입히는 후원자가 알고 보니 말하는 개. 그런데 아니 글쎄, 이 말하는 개후원자식이 내 작품에다가......


● 전설적인 존재 : 이렇게 꼴랑 달력작가로 빌빌댈 줄 알았으면 소설가 같은 거 꿈도 안 꾸는 건데, 하던 찰나에 내 앞에 나타난 학창시절의 문학천재. 그런데 아니 글쎄, 이 잡놈이 술 쳐먹고 한다는 이야기가.....


● Y-ray : 몸 속에 있지도 않은 가위, 두루마리 휴지, 폭죽 종이 같은 걸 막 찍어대는 신기한 기계. 이 기계를 통해 내부에 물건을 품고 있다고 진단 받은 이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리고. 그런데 아니 글쎄, 이 몹쓸 병이 자꾸만.....


● 책상 : 지하철을 타고 잃어버린 말들을 찾아 헤매는 작가비서. 책상을 들고 만원 지하철에 타는 남자를 맞닥뜨리는데. 그런데 아니 글쎄, 이 지하철 민폐남이 알고 보니 오래 전......


● 다옥정 7번지 : 뜻밖의 타임슬립으로 현재의 서울에 떨어져버린 나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작가 박태원. 먹고 살기 위해 구한 일자리는 웃기게도 '박태원' 이고. 그런데 아니 글쎄, 난 내가 박태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 오두막 : 제주에서 우연히 만나 막 사랑이 싹트던 두 연인. 그러다 우연히 엄청난 사건의 목격자가 되면서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아니 글쎄, 그 사건으로부터 도망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알고 보니 여전히......


●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아, 이제 못하겠다. 지쳤다. 그런데 아니 글쎄, 못하겠다 싶은 것이 하필 표제작인데.....



다음은 요것들








지금 당신에겐 시 한 편이 필요합니다

이은직 지음 / 휴먼큐브 / 2016


syo는 이과지만 언어영역이 강점인 희한한 자식이었다. 이과 주제에 수리영역 점수가 자꾸 언어영역의 1/3이라서 그렇지. 1교시 언어영역이 끝나면 문과에서 날고 기는 애들이 찾아와 이번 시험의 난이도랄지, 자기는 3번을 찍었는데 syo는 몇 번을 찍었는지 따위를 묻는 일이 모의고사 날 종종 있는 그림이었다. 어느 국어선생님이 한 번은 심심했던지 애들과 같이 문제를 풀었는데 117점을 받았다. syo가 118점을 받은 시험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 선생님의 도전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적은 어슷비슷했다. 한쪽이 안 틀리거나, 둘 다 하나씩 틀리되 한 명은 2점, 한 명은 3점짜리를 틀려 줘야 승부가 나는 게임이었다. 몇 번 하다보니 양상이 보였다. 시. 시가 어렵게 나온 날이면 거의 100% syo의 패배로 결말이 났다. 


시란 정말 아무리 공부해도 못 맞히겠고, 또 어떨 땐 공부 안 해도 맞히게 되는 변덕 심하고 고집 센 놈이었다. 더 큰 문제는 유명하고 해석이 너무도 명백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해석이 syo의 생각과 자꾸자꾸 빗나가는 거라, 도저히 시는 아니라는 결론만 자꾸 재확인하는 것이 수업의 유일한 기능인 셈이었다. 마침내, 시를 읽어주는 책을 싫어하면서 좋아하는 양가적 감정이 생겼다. '시'를 읽어줘서 싫은데, 시를 '읽어줘서' 좋은. 결국 '시 읽는 책'은 syo에게 모 아니면 도인 셈이다.


이 책은 최초의 걸 또는 윷이다. 저자는 20년 넘게 국어를 가르친 강사라고 하는데, 업계종사자답게 시어의 의미를 윽박지르는 경향도 있다. 종종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말 하나의 수능 강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가 아닌 것은, 시의 주름 속에 접혀져 쉽게 발각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장점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추억에서 / 박재삼


진주(晉州)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 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닿는 한(恨)이던가.

울 엄매야 울 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晉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 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유명한 시고, 그리는 그림도 선명하다. 울 엄매는 진주 장터로 나가 생어물을 팔고, 우리 오누이는 울 엄매가 늦은 밤 별빛을 맞으며 돌아올 때까지 골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떨며 기다린다. 진주 남강은 맑고 아름답지만, 울 엄매는 새벽같이 나갔다 별이 뜬 밤에 돌아오므로 그 아름다움은 보지도 못하고,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은 눈물만 흘리며 설웁게 오명 가명한다.


일반적인 해석에서 4연 5행의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은 같은 연 6행의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는" 눈물을 빗대는 표현 정도로 짚고 넘어간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서 syo를 울렸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화자는 손 시리게 떨며 어머니를 기다리는 골방 속 오누이 중 한 명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화자는 어떻게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옹기전은 어머니가 생선을 파는 시장에 있고, 달빛을 받았다는 것은 시장이 파하는 저녁을 말하는 것인데, 골방에서 떨고 있었을 아이들이 어떻게 그 옹기를 본 것일까. 혹시 오누이가 어두운 밤 혼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올 울 옴매를 위해 밤길을 걸어 울 엄매가 있는 생어물전까지 마중을 나간 것은 아닐까? 혼자 옹기같은 눈물을 흘리고 돌아왔을 울 엄매와 손 시리게 떨던 오누이가, 어느 날은, 적어도 하루만큼은, 함께 손 잡고 어두워 채 보이지도 않는 진주 남강길을 웃으며 되짚어 왔던 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의 다정하고 촘촘한 눈썰미가,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를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물론 그것은 작은 변화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아주 큰 힘이 되는 작은 변화다.








베를린 일기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6


이 책을 읽는 순간, syo는 존재의 기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때 무모하게 꿈꾸었던 시, 소설, 평론, 마지막엔 서평. 그 모든 분야에서 가열차게 쫓겨나 이제 내게 남은 건 일기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왔는데, 이 장르에도 번듯한 양민학살자가 있었다니.....


사실 돌이켜보면, 애초에 syo는 재미있는 글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통파 일기스트로서 아침에 똥 싼 이야기, 점심 먹고 한 번 더 시도했더니 또 나와서 의아했던 이야기, 저녁 먹고 또 일을 치르며 이거 도대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고민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도 일단 경험했다면 여과없이 기록했을 뿐.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차피 남들 읽을 거 다 알고 쓰는 거니까 조금 더 찰지게 쓰자는 욕심이 승하여 일을 그르치기 시작했다.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고 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재미있는 일을 찾아 해메고, 결국 오늘 하루는 재미있는 일이 1도 없었다 싶으면 극도로 우울해져 중2병 걸린 글을 난사한다. 그 와중에 또 뇌는 청순하여 저녁에 치킨 먹고 일찍 자면 다음날 일어나 또 싱글벙글 웃으며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최민석은 슬픈 일로 웃기고 웃긴 일로 슬프게 할 줄도 알지만, 무엇보다 매일매일 일기를 쓴 걸 보면 아주 지독한 사람이다. 그것도 이런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안 읽어봤지만 소설도 잘 쓰겠지. 칼국수 잘하는 집이 수제비도 잘하는 이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추노꾼한테 쫓기듯 칼국수 안 돼서 수제비, 수제비 안 돼서 잔치 국수, 잔치 국수 안 돼서 마침내 떡라면에까지 쫓겨 온 도망노비, syo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고디바를 먹고 나면 ABC 초콜릿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목전에서 들은 ABC 초콜릿만이 syo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ABC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이웃들에게 권하고 싶지가 않다...... 


이런 것이 또 나왔다고 한다. 아, 어쩔거야, 제목이랑 표지만 봐도 벌써 웃기잖아. 아놔. 아주 작정했네, 이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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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7-11-0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씀하신 윤고은의 소설집은 읽지 못했지만 <1인용 식탁>을 좋아해요. 최근에 장편소설도 나왔죠. 읽고 싶은 신간은 많고 속도는 느리고. 아, 이건 제 이야기입니다. ㅎ

syo 2017-11-08 16:47   좋아요 0 | URL
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전작을 시도하는 중이어서, <알로하>가 끝나면 바로 <1인용 식탁>을 읽어보겠습니다.

최근 손보미가 대산문학상도 받았던데, 늦기 전에 얼른 사죄해야 되겠어요.....

단발머리 2017-11-08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햐~~~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 마친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달리십니까.
김연수에서 시작해 황정은-윤고은-손보미라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황정은 사랑이 무척 흐뭇합니다. 아, 물론 저는 황정은 작품은 단편 하나랑 또 하나, 뭐더라.... 암튼 두어개 밖에 못 읽어봤지만요.
잘 읽고 갑니다, 역시나!!!

syo 2017-11-08 20:23   좋아요 0 | URL
황누나는 사랑입니다. 더이상 말이 필요치 안타....

단발머리 2017-11-08 20:25   좋아요 0 | URL
syo님 무~~~~척 어리군요.
황정은이 누나라니^^ 아니면 그냥 애칭인가요? ㅋㅋㅋㅋㅋ

syo 2017-11-08 20:2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은 황누나보다 연상이셨군요. 전 저보다 한두 살쯤 많으셔서 여차하면 말도 놓을 수 있는 정도일거라 혼자 생각했었는데~ ㅎㅎㅎㅎ

단발머리 2017-11-08 20:33   좋아요 0 | URL
지금 황정은 나이 찾아봤어요~~ 이도 저도 아니지만.... syo님은 저한테 단발머리 언니라고 부르심 되겠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1-08 20:3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언니 접수했습니닿ㅎㅎㅎㅎ
그러고보니 단발머리 언니하고 이러고 있으면 다락방님이 나타나시던데?!

풀꽃놀이 2017-11-0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라면에도 쫓기신 syo님! ㅎㅎ 최민석 몰랐던 분인데 땡기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syo 2017-11-08 22:28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셔요. 웃겨서 복근생겼어요. 다 읽고 바로 다음날 사라졌지만.

풀꽃놀이 2017-11-0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몸일으키기 대신 사용하면 좋은 작가인가요?? ㅎㅎ
참, 김연수 팬인것도 반갑습니다.^^ 다음주 광화문 교보에서 강연 하시더군요.

syo 2017-11-08 22:40   좋아요 0 | URL
소중한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대구 교보가 아니어서 슬프네요....ㅠ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퀜틴 스키너 지음 / 강정인, 김현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


나, 철학이라는 걸 한 번 공부해보려고 해. 10년지기 친구에게 syo가 말했다. 물론 전자과를 관두고 철학과로 옮기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알 건 다 아는 스물한 살이었다. 친구가 대답했다. 그래,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자기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 그 옆에 있던 7년지기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인생철학이 확고한 사람이 참 멋있더라고. syo는 우리의 대화가 삑사리났음을 내색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앞에 놓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젠장, 잔이 비어 있었다. 야, 이 양반들아, 그 철학 말고. 친구들은 이 새끼가 결국 취하고 말았군, 하는 표정으로 syo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철학, 철학 말야, 플라톤, 응? 아리스토텔레스, 응? 알겠어? 아, 그 철학? 플라톤 그거, 아리스...토...그거? 당연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친구가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그걸 왜?


syo가 철학에 관심을 두기 전 살아왔던 인생은 저런 양상이었다. 오로지 미분적분확률통계수열급수행렬벡터로 끈적거리던 이과의 길. 그 길을 걷는 자들에게 철학이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알지 말아야 할 것에 가까웠다.『수학의 정석』은 있었지만 딱 한 글자 다른『철학의 정석』은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특히 이과생들은 철학에 관심을 둘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 삭막하고 기계적인 교육과정을 뚫고 공대에 입학한 syo 역시, 친구들에 비해 나을 게 1도 없었다. 철학, 철학 말야, 플라톤, 응? 아리스토텔레스, 응? 이 다음에 몇 명 더 갖다 붙이고 싶었는데 아는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하이....하이 뭐라는 애 있었는데, 하이마트는 아니고,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고, 하이.....그레? 하아. 솔직히 그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리스토 텔레스"인줄 알았다. 텔레스 집안의 애교많은 막내 아리스토.


그런 syo가 철학책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읽어보겠다며 읽을 책을 좀 골라달라고 부탁했을 때, 어린 날 syo의 한없이 순수했을 눈동자를 보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버트런드 러셀의『서양철학사』를 권했던 그 몹쓸 사이코패스의 앞길에 빅똥이 있기를! 그 작자 덕분에 철학은 플라톤에서 시작해야만 되는 줄 알고, 플라톤만 보다가 마침내는 학을 떼고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던 슬픈 젊은날이 아른거린다. 젠장, 플라톤 다 주우우욱가라 그래!


그로부터 10년, 아직도 철학의 길 초입에서 관광안내도나 기웃거리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했고, 읽다보면 어쩐지 칭송을 받든 엿을 먹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작자들 책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공부의 끝에 밥벌이가 있는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 그저 syo처럼 쫄레쫄레 나타나 몇 권 읽고 또 다른 곳으로 쫄레쫄레 가는 식으로 하는 공부라면, 그 분야의 발원지에 시작점을 찍고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는 방법을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그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는 않았는지, 작년 여름쯤 정치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디선가 현대 정치학의 시작점으로 마키아벨리를 짚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해서 읽었다. 물론 그 동네에서도 제대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결국 깡패 지존 플라톤과 다시 맞닥뜨릴 수밖에는 없겠지만, 이제 그 이데아 덕후 영감은 정말이지 꼴도 보기 싫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는 프사부터가 어쩐지 쉽게 곁을 내줄 것처럼 다정하게 생겼다. 아이고, 호락호락할 것 같은 저 미소 좀 보라지. 그리하여 한 계절,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역시 syo가 늘상 그렇듯이 입문서 위주로 쓸데 없이 중복으로. 그 결과 두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시중에 도는 마키아벨리 책의 절반이『군주론』한 권을 다루고 있는 지극히 편향된 현실과, 그런 의미에서 진짜 마키아벨리의 사상 전반을 아우르는 입문서 중 맨 처음 볼만한 책은 바로 이『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이라는 것.


우리가 마키아벨리를 잔혹한 사이코패스나, 하다 못해 지옥에서 유치원을 다닌 사람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오롯이『군주론』때문인데, 실제 마키아벨리는 악당보다는 입신양명에 목숨을 건 인간 쪽에 가까워 보인다. 전체 저작을 통해 보면 마키아벨리는 골수 공화주의자고, 아무래도 그 점이 마키아벨리를 현대 정치학 공부의 시작점으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인 것 같다.『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은 그의 저작을 크게 네 덩어리로 나누어 네 명의 마키아벨리를 독자 앞에 세워 놓는다. 『서한집』과『외교문서집』의 외교관,『군주론』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군주의 졸개, 그와 완전 상반되는『로마사논고』의 공화주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피렌체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역사가로서의 마키아벨리.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가 잘 모르는 3/4의 마키아벨리를 채워넣고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들더라구요.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반적인 기본서


1. 'How To Read' 가 등장하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시리즈는 절대 쉽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래도 해석이 전형적이지만은 않고, 깊이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2. 세창의『마키아벨리 읽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다른 책을 기준으로 판단하건데, 일독의 가치는 보장받았을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무방한지 아닌지 읽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요즘 읽을 책이 너무 많다.....


3. 하룻밤의 지식여행『마키아벨리』는 syo가 읽은 이 시리즈의 책 가운데 정말 알차다는 생각이 든 유일한 책이다. 삽화도 어쩐지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이다.



군주론


1. 강정인, 김경희가 옮긴『군주론』이 가장 널리 읽히는 듯하다. syo도 꼬꼬마 시절 처음 읽었던 군주론이 이 책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무난하다는 이야기겠다.


2. 박상훈이 옮긴『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은 최장집 선생님의 빼어난 서문이 달려 있다는 것으로 가치를 더했다. 솔직히 말해서, 최장집 선생님이 쓴 글만 꼼꼼히 읽고 본문은 설렁설렁 읽었다. 그렇다고 평을 못할 일도 아닌 것이, 지금 시점에서 기억이 잘 안나는 건 서문도 본문도 마찬가지라.....


3. 세 번째『군주론』을 옮긴 곽차섭은 그 이름만으로 책에 무게를 싣기에 충분한 마키아벨리 연구자다. 이탈리아어 원문 대역에다가, 비록 가격 때문에 욕을 먹지만 함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길 출판사의 코기토 총서로 나왔다는 점도 신뢰를 드높인다.


4. 신동준이 옮긴『마키아벨리 군주론』은 표지에서부터 스스로 완역 결정판임을 자부하고 있다. 신동준 선생님의 책이 다 그렇듯, 어쩐지 넘치는 패기를 읽을 수 있다. 군주에게 간택받고자 저술한 군주론의 특성상 다른 역자들은 거진 다 존댓말로 옮겼지만 신동준 선생님만은 반말로 넘치는 호연지기를 보여주신다. syo가 가지고 있는 책이다.


5. 이남석이 옮긴『군주론』은 그야말로 발군이다. 45500원에 달하는 가격에, 단연 압도적인 880페이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리보기만 열어봐도 정말 알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한 구조도 하며, 지도 하며,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군주론은 읽다보면 600년도 더 전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읽는 이가 당연히 안다는 듯 설명하는 부분이 많은데, 대체로 주석이 달려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이 책은 그런 것 없다. 아, 정말 갖고 싶은 책이다. 핵비싸서 그렇지.....


6.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 출간된 이종인 번역의『군주론 / 만드라골라 /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꼽아본다. 아직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추천에 올리는 이유로, 우선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키아벨리의 희곡 '만드라골라'와 영웅담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덤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역자다. 번역자 이종인이라면 더 말이 필요한가? 다만 분량으로 미루어보면 해제가 듬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군주론 입문서 / 개설서



1.『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은 청소년이 읽는 수준의 평이한 입문서다. 쉽다는 것 이외에 특별한 장점은 엿보이지 않는다.

2.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는 입문서로는 적당하지 않지만, 하나의 저작을 다른 다양한 사상가의 눈을 빌려 새롭게 풀어내는 컨셉의 훌륭한 책들의 모임이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에도 스피노자, 마르크스, 그람시, 알튀세르, 들뢰즈를 만날 수 있는데, 이렇게 다른 누군가 읽고 공부해 준 책은 내용 자체는 물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참 소중하다.

3.『그람시의 군주론』은 정확히 말하면 그람시 책에 가깝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주의의 다음 스텝을 위해 마키아벨리를 연구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 김종법 선생님은 그람시에 관한 책을 간간히 출간하여 한국에서 그람시의 명맥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그람시 없이 마키아벨리만 가지고 읽을 책은 아니겠다.

4. 이 카테고리에서 한 권을 추천한다면 단연『지배와 비지배』겠다. 더 말이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이 책 있으면 정작『군주론』을 안 사도 되겠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배를 집어삼킨 배꼽이다. 



로마사논고



『로마사 논고』(로마사론, 리비우스 강연 등등으로 불린다)만 되어도 번역된 종수가 확 떨어진다. 심지어『피렌체사』는 없는 건지 찾질 못하는 건지 하여간 그렇다. 이 저작 역시『군주론』처럼 강정인 번역이 시기적으로 선점했다. 그런데 그것만 읽지를 못해서 할 말이 없다. 동서문화사 책은 가성비가 있지만, 그 가성비 탓에 어쩐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시리즈 안에 발번역으로 이름 드높은 책이 몇 권 있어서 함부로 권했다가 욕 먹는다. 그런 핑계를 대며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일단 있다는 것이라도 알리기 위해 이렇게 리스트에 올린다. 읽어 보신 분의 조언을 구합니다.


이종인 번역의『로마사론』은 보유하고 있고, 박홍규 선생님의『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는 사실 번역이 아니라 박홍규 선생님의 색깔이 듬뿍듬뿍 들어있는 '저작'이다. 결국 syo는 이 저작에 와서는『로마사론』한 권만 읽은 것인데, 그래도 호기롭게 한 번 추천해 본다. 


마키아벨리의 진짜 가치는 역시 이 책에서 드러난다. 이걸 읽어야 마키아벨리 형아가 적그리스도의 졸개가 아니었으며, 저 순박하고 호구로운 미소 역시 가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권 합쳐 1000페이지 가량 되는 이 책을 정복한다면, 웃으며 마키아벨리와 석별의 정을 나눌 수 있겠다. syo 역시 과녁에 매달아 놓고 긴 세월 이리저리 조준만 하고 있지 쉽사리 화살을 날리지 못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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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11-0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클라스...퀜틴 스키너와 김종법의 그람시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가 들어있는 것만으로도 본 리뷰는 넘치는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웃음이 가득합니다

syo 2017-11-07 20:50   좋아요 0 | URL
퀜틴 스키너 저서가 맞긴 한데, 다른 것들이랑은 수준이 다릅니다.

제 기억에 저 책은 그 옥스포드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의 마키아벨리를 번역한 거였던 것 같고, 그렇다면 퀜틴 스키너가 심심풀이로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1-07 20:54   좋아요 0 | URL
심심풀이로 썼던게 맞을겁니다. 그러나 저 책은 제목이 하드캐리라... 정치학과 교수들조차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라고 하면 허튼소리라고 하는 작자들이 넘쳐나거든요..

syo 2017-11-07 21:02   좋아요 0 | URL
실제 정치학계판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군요. 무서워라. 대충 읽고 깝치지 말아야겠네요....

그러고보면 읽은지 너무 오래되서 좀 가물가물하지만, 김경희 선생님이랑 곽준혁 선생님의 입장이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1-07 21:04   좋아요 1 | URL
보수적인 성향의 학자들은 마키아벨리를 공화주의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내부자로 관찰한 결과..그것은 교수들의 지적 게으름 때문이지만요..ㅎ

짜라투스트라 2017-11-0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syo 2017-11-07 21:02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ㅎㅎ

짜라투스트라 2017-11-07 21:16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진짜 멋져요!!

syo 2017-11-07 21:19   좋아요 0 | URL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받겠습니다. 하하하하하.

독서괭 2017-11-07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입문서의 대가 syo님..(최고) 그러나 사실은 입문서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책까지 은근슬쩍 읽은 syo님..(최고)(최고)

syo 2017-11-07 21:15   좋아요 0 | URL
어이구, 터무니없이 이런 과한 칭찬 하시는 괭님이나, 거기에 대고 또 좋아요 누르시는 프메님이나 두 분 다 사랑합니다.

시이소오 2017-11-07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 살을 다 발라서 남은 뼈까지 갈아 드시는군요. syo님 점점 무서워집니다. 로쟈님과 사이러스님을 추월하실듯.
로쟈님이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없다고 한탄하시던데
syo님이 차세대로쟈가 되실듯^^

syo 2017-11-07 21:32   좋아요 1 | URL
와, 예전에 제가 어느 글에서 ˝로쟈님과 사이러스님만 있으면 리뷰 갈증은 거의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라고 썼을 때, 사이러스님이 몸둘 바를 몰라하셨는데,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이러스님의 그 마음을 오늘 syo가 완전히 알겠네요.....

저한테 한 300년 정도 주시면 추월은 힘들더라도 로쟈님 사이러스님 근처로 어느 정도는 다가가겠습니다...

풀꽃놀이 2017-11-07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런 분이셨네요. 무시무시하지만 꽤 도움이 될 것 같은 글을 써주시는군요^^

syo 2017-11-07 21:34   좋아요 0 | URL
절반만 정답이십니다. 꽤 도움이 될만한 글은 쓰지 못하는 이런 놈이었습니다 ㅎ

잘 보시면 이 긴 글을 아무리 읽어도 마키아벨리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거예요.....ㅠ 길고 허망한 글.

수이 2017-11-07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이소오님 의견에 동의해요. 로쟈님과 사이러스 다음으로 syo님이 좋아졌어요!

syo 2017-11-07 21:41   좋아요 0 | URL
와, 과한 칭찬 말씀에 손사래는 쳐야되지, 그 와중에 또 칭찬 받아서 흥은 오르지, 살짝 정신분열을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야나님께서 아주 용 눈알에 점을 찍으셨네요. 오늘은 그낭 신나는 날로 해야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0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것이 왔군요. 알라디너의 커밍아웃. 알라딘 3대장은 시이소오, 쇼, 로자. 그리고 100자평의 최고수는 수다맨 님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07 23:05   좋아요 0 | URL
아, 오타... 시이소오 님이 아니라 사이러스 님(요즘 시이소오 님은 뜸해서... ) ㅎㅎㅎㅎㅎㅎㅎㅎ
시이소오 님 용서해 주세요..

syo 2017-11-07 23:08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을 뺄게 아니라 syo를 빼고 그 자리에 사이러스님이 들어가면 곰발님이 용서를 구할 일도 없을 텐데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로쟈님이나 사이러스님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혀를 차실까요.....

2017-11-07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7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1-07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마? ㅎㅎㅎㅎ

나와같다면 2017-11-08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공학도가 교양과목으로 철학을 선택해서 듣는다는게 분위기상 좀 힘들지 않으셨어요..?

syo 2017-11-08 13:13   좋아요 2 | URL
정말입니다.

단지 교양일 뿐인데도, 첫 주에 교수님이 출석부에서 제 전공을 확인하시더니 출석 부르다가 한 2분 정도 저한테 막 질문을 쏟아부으셨어요. 왜 왔니, 왜 듣니, 왜 사니.....

그러고 나니까 첫날부터 뭔가 이상한 놈으로 찍혔는지, 다들 뭐지 이 변태는, 하는 눈빛으로 저를....

그러고 나서 전공시간에 과 동기들한테 이 이야기 하니까, 이번에는 이 동기들도 그러니까 뭐지 이 변태는, 하는 눈빛으로 저를.....

결국 첫 주 마치고 바로 수강 취소해서, 그 수업은 못 들었어요. <사랑과 문학>이라는 좀 더 말랑말랑한 걸로 바꾸었지요.

cyrus 2017-11-08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syo님의 글빨이 물이 올랐고, syo님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요. 다양한 분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syo님의 독서 습관이 마음에 듭니다. ^^

syo 2017-11-08 16:45   좋아요 0 | URL
것 참,

윗분들은 다 짜고 syo를 놀리려고 저러신다는 느낌도 없지 않은데, 사이러스님은 언제나 그렇듯 나는 장난 없다는 느낌이라서 syo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집니다. ㅎ

단발머리 2017-11-08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 있으면서 책소개도 해주시고, 사이사이 감동도 주는 페이퍼라면....
syo님 랭킹에 아무런 의심이 없습니다. *^^*

특히 마키아벨리라면 읽고 싶지 않은 얼굴인데(전, 그렇게 해석합니다) syo님 페이퍼 읽고나니 다른 건 몰라도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은 읽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나저나 전에 찍어둔 빠알간~~ 마르크스 책 아직 시작도 못 했네요.

syo 2017-11-08 20:26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는 syo의 책장에 나란히 꽂혀있지요. 마씨 집안의 형아 동생처럼 다정하게 나란히.

yamoo 2017-11-29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게 잘 읽었어요..ㅎ 마키아벨리가 현대정치학의 시조가 된 건 아마도 현실정치를 최초로 다룬 학자여서 그런 듯합니다. 그 전까지는 거의가 정치철학의 일환으로 정치학을 연구하는 경향이 강해서, 주로 도와 덕의 연장선에서 정치를 연구했지요. 하지만 군주론을 읽어보셔서 잘 알겠지만 마킼아벨리는 모사의 현실정치 그대로를 연구했지요.아주 강력한 처세의 지점이지요. 그래서 처세술의 원조로까지 회자되는 듯합니다. 정치학의 고전이 처세의 지점을 가르쳐주니 수많은 판본이 있어왔듯합니다.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 군주론은 입문서를 읽을 필요가 없을 듯해요. 원저가 워낙 분량이 적고 평이한 편이라 원저를 3-4회독 읽는 것이 장땡인 듯합니다.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뉘앙스를 본문에서 직감적으로 인지하는게 군주론 독해의 핵심인 듯해서요.

저도 위에 열거하신 4권의 입문서는 다 봤습니다만, 퀜틴 스키너의 저서가 마키아벨리 사상을 가장 잘 개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군주로 자체의 입문은 위 3권도 좋지만, 갑중의 갑은 김영사에서 출간한 서울대 고전시리즈 중 한 권인 <군주론>인 듯합니다. 이 만화는 진짜 군주론을 초등학생도 이해시킬 정도로 쉽고 알차게 군주론의 책 내용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에요. 혹시 안 보셨다면 이 만화책도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나저나 사이러스 님 지적처럼 정말 글빨의 물이 올랐네요~ ^^

syo 2017-11-29 19:05   좋아요 0 | URL
역시 yamoo님. 돌아오시자마자 존재감 작렬!! 많이 배웠습니다.

북깨비 2020-05-2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한테 책을 추천해 달라 부탁했더니 마키아벨리가 쓴 책들부터 언급을 하더이다.. 아 난 이 정도 난이도의 책을 추천을 바란게 아닌데.. 내가 이 정도 레벨을 이해하려면 강산이 한 번은 더 바뀌어야 할 거 같은데.. 하고 지금 난감해 하면서 이곳저곳 리뷰를 기웃거리고 있어요.. 역시 syo님도, cyrus님도 여기 벌써 레벨 클리어 하고 다녀가셨네요. 👍

syo 2020-05-24 18:55   좋아요 0 | URL
이미 마키아벨리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안납니다....
뜨내기처럼 여기 왔다 저기 갔다 하는 독서찌끄러기의 한계인가봐요.
말씀하신 것처럼 뭔가 ‘클리어‘ 처럼 한 번 정복하고 나면 계속 남아 있고 그러면 좋겠어요....

북깨비 2020-05-24 23:30   좋아요 0 | URL
😂 며칠 전에 읽은 문학의 건망증이 생각납니다. 저희도 있는 힘을 다해 레테의 물살을 버티어 봅시다. 😅 다 어려워 보이지만 지배와 비지배를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