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사거리 5

 

 

 

밤에 들으면 좋을 목소리. 밤을 쫓는 듯하다가 이내 꿈을 부르는 듯한 소리의 무늬.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걸어온 사람들처럼 노곤해 하다가도 그렇게 도착한 곳이 처음 있었던 바로 그 자리라서 기쁘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 여름에 같이 있으면 좋을 목소리. 어차피 더운 것을 덥히는 탄성과 어차피 젖을 곳을 비처럼 두드리는 파문, 어차피와 어차피들.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목소리.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잖아- 하면 서운해하는 순진함. 여름에 준비하는 겨울처럼, 겨울에 되짚어보는 여름처럼, 소나기를 피하는 작은 동물처럼, 무심한 눈빛으로 유심히 바라보느라 갸웃대는 고개처럼, 이유처럼, 결과처럼, 당연히 도착하면 좋을 목소리.

 

 

 

--- 읽은 ---



220. 조각가

스콧 맥클라우드 지음 / 김마림 옮김 / 미메시스 / 2017

 

많이들 읽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나 쫌 감동받음…….

 

  - 그 말 사실이야? 돌로 어떤 사람을 조각한다는 건…… 그 사람이 아닌 부분을 다 깎아 내는 거란 말.

  - 이 책 읽고 있었니?

  - 아마도.

  - 이거 열 살짜리들이 읽는 책인 건 알지?

  - 미카엘라가 어제 두고 갔어. 너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 보라더라. 정말 궁금해. 그게 정말 조각가들이 하는 일이야?

  - 한 종류의 조각을 보는 한 가지 관점은 될 수 있지.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 말은 어떤 의미도 될 수 있어. 패션, 헤어, 오브제 투르베…… 예술에는 아주 많은 전통적 표현 방법들이 있지. 여기 자코메티도 그래. 처음에는 철사 줄로 시작해서, 거기에 젖은 석고 반죽을 붙이고, 청동 주물로 완성해.

  - 그럼 이 사람은 깎아 내는 게 아니라 붙여 가네?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난 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 알아, 데이비드. 마치 내 주변의 공기를 깎아 내듯.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듯. 난 끌로 깎이거나 축소되고 싶지 않아. 나란 존재 위에 계속 덧붙이고 싶어. 네가 날 이해하고 싶다면 너도 계속 붙여 나가야 해.

_ 스콧 맥클라우드, 조각가

 

 

 


221. 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 이경식 옮김 / 북스토리 / 2017

 

죽은 애덤 스미스가 해럴드 아저씨의 몸에 빙의되었다. 방식은 좀 독특하다. 일단 스미스가 해럴드 아저씨의 머리 속에서 자꾸 소리를 지른다. 이 양심도 도덕도 없는 신자유주의로부터 이 사회를 지켜야 해! 내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경제학자를 만나! 해럴드 아저씨는 빡치겠고 미치겠지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주인공 리치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잠깐 기다려 봐- 하고는 스미스한테 의식을 양보한다. 그러면 스미스가 뿅 하고 등장한다. 이제 두 주인공이 경제학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애기들 보는 책에 이런 것들 많다. 죽은 철학자나 과학자 아저씨가 등장해서 어린이들에게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전해주는 구성. 크게 보면 이 책도 그렇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암살 시도, 음모, 그리고 엇갈리다 마침내 이어지는 사랑 같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다지 스릴도 없고 큰 재미도 없다……. 캐릭터들은 평면적이고 스미스는 스미스의 사상을 직접 때려 박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장면과 스토리 진행은 다소 겉돈다. 그냥 애덤 스미스 개론서와 쫄깃한 스릴러물을 한 권씩 따로 읽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 한번 봅시다. 제도라는 것은 단지 잘 작동한다고 해서 존속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잘 작동해도 존속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도는 사회의 제반 환경을 반영하며, 사회의 저변을 관통하는 도덕적 지지가 있기에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존속되는 겁니다. 미국이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굳건히 유지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몽테스키외도 공화국의 정신은 도덕이라고 일찍이 강조하면서 경고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러자 캐럴이 끼어들었다.

  “시민적 양심이죠.”

  그러자 스미스가 포크를 흔들며 열변을 토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이 두 가지가 사회의 지도자들이 계몽주의적 이상에 도취해 있던 18세기이 비로소 나타났다는 게 논리적이지 않을까요? ‘개인주의적이라는 어휘에는 상호 권리, 책임, 그리고 의무라는 개념이 녹아 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덕적 개념들은 개인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연결성까지도 함께 인정했던 겁니다. 만약 인류가 도덕적 규칙들을 전반적으로 우러러 받들지 않는다면 사회는 결국 소멸해버릴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장과 민주주의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요.”

  스미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피로해보였지만 그 피로가 오히려 더욱 힘을 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중요한 듯 힘주어 말했다.

  “시장은 인간 본성의 기본적 요소들에 의해 돌아갑니다. 여기에다 자비심과 정의를 보태서 균형을 맞춰야 비로소 문명화된 시민사회가 형성되지요.”

_ 조나단 B. 와이트, 애덤 스미스 구하기

 


 


222. 마션

앤디 위어 지음 /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2021

 

SF를 쓸 때, 있지도 않은 과학기술을 있는 것처럼 쓰면 조금 수월하겠다. 어차피 없는 거라서, 워프 항법으로 공간을 접어가며 우주를 날아다니는 비행체가 달걀 모양이라고 쓰든 접시 모양이라고 쓰든 뭐라고 하기가 어려우니까. , 맞다. SF란 원래부터 허망한 소리를 하는 장르였지- 하고 대충 넘어가게 된다. 이런 게 누군가에게는 SF의 매력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SF를 읽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쳤다. 왜냐하면 이 Science Fiction에서 Fiction스러운 거라고는 우주인 중 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혼자 화성에 남겨진다면? 이라는 가정 딱 하나뿐이고, 그 이후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완전히 Science이기 때문이다. SF가 기계라면, 당신은 이 책에서 볼트와 너트 단위까지 핍진하게 설계된 정교한 기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레알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와트니 겁나 유쾌함.

 

[11:18] 제트추진연구소: 마크, 벤카트 커푸어다. 우린 49화성일째부터 쭉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어. 전 세계가 자네를 주목하고 있네. 정말 대단해. 패스파인더를 찾아오다니. 지금 구출 계획을 짜고 있어.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아레서 4 MDV가 잠깐의 육상 비행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하고 있네. 그것으로 자네를 태운 다음 스키아파렐리로 데려가게 할 생각이야. 아레스4가 도착할 때까지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급 방법도 연구하고 있어.


  [11:29] 와트니: 기쁜 소식이네요. 정말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대원들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잘문 하나만.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대원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리고 참, “엄마, 저예요!”


  [11:41] 제트추진연구소: ‘농작물얘기 좀 해봐. 우리 계산에 따르면, 현재 갖고 있는 식량은 한 끼를 4분의 3으로 제한할 경우 400화성일째까지 버틸 수 있더군. 농작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 질문에 답하자면, 자네가 살아 있다는 얘긴 대원들에게 하지 않았네. 지구로 귀환하는 데 집중하게 하려고 말이야.


  [11:52] 와트니: 농작물은 감자예요. 추수감사절에 요리하려고 가져온 감자를 재배하고 있어요. 잘 자라고 있긴 한데,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이용가능한 농지가 부족해요. 900화성일째쯤이면 식량이 떨어질 거예요. 추신. 대원들한테 제가 살아 있다고 얘기하세요!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12:04] 제트추진연구소: 식물학자들을 섭외해 자네의 농사에 대한 상세한 자문을 구하고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군. 목숨이 걸린 일이니 확실하게 해야지. 900화성일째까지 버틸 수 있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야. 좀 더 시간을 갖고 보급 계획을 마련할 수 있겠어. 그리고 말 가려서 해. 자네 메시지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거든.


  [12:15] 와트니: 보세요! 젖탱이에요! -->(.Y.)

_ 앤디 위어, 마션

 

 

 


223. 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

홍세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

 

유머 코드가 처음에는 깨알처럼 느껴지지만 페이지 숫자가 커지면서 익숙함도 조금씩 커지고 웃음도 함께 커진다. 그렇지만 그렇게 커지고 커져도 마지막 페이지에 빵터짐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역사책이 이만하면 할 만큼 한 것. 먼나라 이웃나라 웃을 데 없었던 것 생각하면…….

 


 

 


224. 나 혼자 회의한다

야마자키 타쿠미 지음 / 양혜윤 옮김 / BOOKULOVE / 2021

 

회의는 정말 하기 싫었다. 회의會議. 사전적으로 그것은 모은다-뜻을이라는 의미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대체로 모여라-내 뜻에라는 용법으로 쓰인다. 그래서 회의는 100명이 모여도 최대 한 사람만 만족하는, 까딱 재수 없으면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백해무익/백해일익한 기묘한 활동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회의에 회의적이 될 수밖에. 가뜩이나 그런 회의를, 이제 심지어 나 혼자서도 하라고? 희의적이었다.

 

하지만 100명이 하는 회의가 100해무익/1001익의 선택지를 낳는다면, 혼자서 하는 회의에서는 그 ‘11이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확률이 꽤 높은 게임이다. 잘만 하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시길.

 

딱히 큰 기대는 마시길.

 

스스로에게 미래를 더 희망적으로 만들기 위한 질문을 해보라. 그리고 그 답을 말이나 문자로 표현해보라. 중요한 것은, 마음속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종이에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선언)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서 예상하고 있던 답을 쓰거나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쓰거나 말하는 순간,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난다. 이번에는 새로이 생겨나는 감정까지도 말이나 문자로 표현해보라.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의 겉껍질(감정)이 한 장 스르륵 벗겨진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또 다른 새로운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감정 역시, 그대로 다시 써보자. 그럼 또 하나의 감정이 스르륵 벗겨지고, 새로운 감정이 점점 진짜 자신의 감정 속으로 안내하게 된다.

_ 야마자키 타쿠미, 나 혼자 회의한다

 

 

 

--- 읽는 ---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 수전 티베르기앵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 성일권

7일 공부법 / 스즈키 히데아키

상표전쟁 / 신무연 외

쉽게 배우는 통계학 / 구로세 나오코

나의 첫 파이썬 / 에릭 마테스

아무도 아닌 / 황정은

단어의 배신 / 박산호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 야마구치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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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25 2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우리 초 사이오 님은 읽은/읽는/읽을 책이 저하고 조금씩 핀트가 맞지 않아요. ㅋㅋㅋㅋ

syo 2021-06-25 20:42   좋아요 3 | URL
그래서 제 입장에서도 폴스타프님은 겁나 신비로운 사람인 것입니다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25 2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 전에 마션 읽으면서 제일 감명 깊었던 건 그 무한한 긍정, 혼자 남아서도 농담치는 그 무사태평. 과학이 살린 게 아니라 긍정이 살린 거야 쟤는..했어융. 마션 좋아서 아르테미스도 봤는데 그건 후졌음 ㅋㅋㅋ

syo 2021-06-25 21:06   좋아요 3 | URL
아르테미스도 읽어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근데 어차피 지금 리스트에 올려놔도 이번 여름에 읽을 수나 있을지......
그러다 시간 지나면 약발 다 떨어지면서 안 읽게 되겠지.....

반유행열반인 2021-06-25 21:11   좋아요 2 | URL
시간 남아 돌고 심심하고 그런데 읽을 건 없고 하면 읽는 대도 안 말리지만… 남는 건 욕 뿐이에요. 진짜 좆나빌어미친젠장 이런 욕이 나온다니까?! 영어로 찾아보니 funt (아마 fxck cxnt )이런 신조욕 가득ㅋㅋㅋ) fusumitch(fxck sxck bxtch )이런거 섞은 거… 그때 번역보고 너무 궁금해서 몇날 며칠 원서 구글링해봄 ㅋㅋㅋㅋ마션은 영화도 그럭저럭 좋았습니당

새파랑 2021-06-25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은 책을 동시에 읽는다는게 언제나 신기하네요~! 파이썬과 통계학을 보면 공대출신 이신거 같은데~ 다른책들 보면 작가같기도 하고...

syo 2021-06-29 14:13   좋아요 1 | URL
요즘은 공대 출신 아니어도 파이썬이나 통계학 책 읽는 일이 예전보다 많겠지만,
네, 공대 출신 맞습니다 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06-25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젖탱이 부분 읽다가 나도 빵터져서 페이퍼 썼던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몰리 2021-06-26 06:29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에 빵터짐.
저 그 페이퍼 읽은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26 08:3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29 14:13   좋아요 0 | URL
저런 유쾌한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ㅂ^

레삭매냐 2021-06-25 2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앤디 위어의 달나라판
삼시세끼, 책으로 만나봐야
하는데...

syo 2021-06-29 14:14   좋아요 0 | URL
책이라는 것이 진짜 많긴 많군요.
매냐님의 사정권 바깥에도 책이 있다니....

공쟝쟝 2021-06-25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션 ㅋ 영화 존잼이었는데 책으로도 읽으면 더 꿀잼이겠다 생각했는데 역싀 읽어야겠다요!!

syo 2021-06-29 14:15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우주복이니 우주선이니 하는 과학적 얼씨구절씨구들은 이과생 읽으라고 주고 나서도 재미있는!
 

 

stomatitis

 

 

 

읽은 책에 대해서 쓰고 나서 다시 보니 오늘은 아쉬운 말만 잔뜩 한 것 같다. 입맛과 함께 독서 의욕이 떨어지고 있는 중.

 

의욕이 떨어진다고 해서 딱히 읽는 양이 줄지는 않는다. 시큰둥하게 읽고, 20분 이상은 못 읽고, 자꾸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그 다른 책이 뭔가 딱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결국은 다른 책을 손에 든 즉시 이 책이 되면서 다시 또 다른 책을 향한 욕심만 무한히 이어진다. 딱히 뭘 읽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읽기 싫다는 말을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말로 바꿔서 하고 있는 중인 건가?

 

특별한 이유 없이 컴퓨터를 포맷하고 이것저것 새로 설치하면서 시간을 썼다. 에버노트에 따 놓은 인용문들의 70%를 날렸다. 언젠가 리뷰를 써야지 하고 대충 휘갈겨 놓은 단상들을 몽땅 지웠다. 읽던 것들, 읽지도 않은 것들을 포함해서 빌려온 책 전부를 싹 다 반납하고 다른 것들을 빌려왔다. 사실 갈아엎고 싶은 건 나 자신인데, 아무래도 그럴 용기가 없어서 애꿎은 것들만 리셋하고 있는 것 같다.

 

 

 

 

--- 읽은 ---



214. 밤을 걷는 밤

유희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

 

모든 걸음은 개인의 것이다. 누군가 걸은 길을 그 사람이 걸었던 방식으로 따라 걷는다고 해서 그가 느꼈던 것들까지 따라 느낄 수는 없다. 길은 길을 걷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길이다. 걷는 사람은 그 사람이 과거에 걸었던 모든 길까지 포함해서 걷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길은 이 길을 포함한 세상 모든 길이고, 같은 이유로 그 길은 세상에 딱 하나 있는 길이다. 누가 길 걷고 쓴 책은 누가 책 읽고 쓴 책처럼 내게 그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까지 하면 다 한 것. 이제는 그 길을 걸어야 하고,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도 그 길을 걷는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거기서부터는 책의 일이 아니라 신발의 일이다.

 

나쁘지 않았으나 함량은 아쉽다. 나는 아직도 책이라는 물건에 요구하는 게 많은 편.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삶의 풍경이 너무 많다. 아득한 풀벌레 소리, 수묵으로 그려 넣은 듯한 밤의 능선……. 어두워져야만 듣고 볼 수 있는 자연의 풍경. 밤의 거리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하루의 끝자락이 문득 쓸쓸하다면 무작정 외투만 걸치고 거리로 나서보기를. 익숙하고 가까운 동네를 나풀나풀 한 바퀴 걸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밤은 언제나 뜻밖의 풍경을 준비해둘 테니.

_ 유희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밤을 걷는 밤

 

 

 


215.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

해달별 지음 / 달무리 / 2020

 

요약하자면,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 물질적 안정감을 다소 포기하면서도 튼튼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책이다. 디지털 노마드가 된다고 직장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도 된다. 그저 일하는 순간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잘 하는 일로 돈을 버는 것, (일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하고 싶은 시간에 일하고 쉬는 시간에 쉴 수 있도록 일의 통제권을 쥐는 것. 이 책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짧다. 그래서 부족하다. ‘모든 것이라는 제목은 호기에 그쳤다.

 

나는 무작정 노트를 펼쳐 내가 가진 고민들을 적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규명했던 대부분이 시간과 돈만 있으면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고, 나머지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거리에 불과했다. 그 문제들을 실천할 수 있는 것들로 다시 한번 걸러내니 내가 진짜 해야 할 일할 수 있는 일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

  삶의 변화를 앞둔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고, 내가 가장 원하는 것도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 나 자신을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시간. 시간적 여유에서 오는 마음의 여유. 여유로운 마음에서 생기는 내면의 안정감. 저녁이 있는 삶. 얽매이지 않는 삶. 그래서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로.

_ 해달별,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

 

 

 


216. 쟁은 끝났어요

곽재식 외 / 요다 / 2019

 

작가님들을 모아 놓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두 개 중 하나를 배당하여 그 풍경을 그리는 글을 받았나 보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대로, 디스토피아는 디스토피아대로 각기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는데, 이 책은 유토피아 편이다. 그런데 SF 소설의 유토피아는 그 어느 곳도 진짜 유토피아 같은 유토피아가 없다. 몇 세기 만에 인간은 희망을 완전히 잃었고, 이제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유토피아 함량이 70%를 넘는 세상을 그릴 만큼 뻔뻔스럽지가 못하다.

 

구한나리 선생님의 무한의 시작은 좋게 말하면 단순하고 조용하다. 나쁘게 말하면 단조롭고 식상하다.

 

곽재식 선생님의 로보타 코메디아는 재기가 돋보이지만 재기를 보여주겠다는 욕망이 더 돋보인다.

 

김초엽 선생님의 순례자는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선생님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맨 앞쪽에 배치된 바로 그 단편이다. 그 책에서는 그 단편이 제일 별로였다.

 

김주영 선생님의 프레스톨라티오의 악몽은 조금 더 긴 구성의, 최소 중편 분량의 작품으로 다뤘으면 좋을 뻔했다. 전반부에서 긴장감을 축적하는 힘은 좋았는데, 그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연소시키기에 단편은 짧았다.

 

이산화 선생님의 전쟁은 끝났어요는 과연 표제작답다. 이게 표제작이 아니었으면 의아했을 것.

 

악은 분자다. 7만 년 동안 분자들이 사탄을 구성하였고 사탄은 분자들을 지배했다.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메뚜기 무리처럼 아프리카를 떠나기 시작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폭력을 행사했다. 같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전쟁의 역사를 쉬지 않고 써 내려갔다. 117번 발굴장소로부터 세미나실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스위치가 꺼져 있었기 때문에, 안심시켜줄 동족이 모두 죽어 사라졌기 때문에. 하지만 고작해야 7만 년, 생명의 역사에서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시간. 늦지 않았다. 스위치는 다시 켜면 된다. 작용제가 뇌세포 속으로 퍼져간다. 거울 속 사탄이 빛 속으로 조금씩 녹아 사라진다. 7만 년 동안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_ 이산화, 전쟁은 끝났어요

 

 

 


217.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

 

언제 한 번 가슴 속에 들어온 적이 있어야 잊어도 잊는다. 완전히 암송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구절 정도는 심장 근처에 박아놓고 되뇔 때마다 혈관을 따라 비슷한 감정이 피돌이하는, 다시 읽고 아껴 읽은 시가 하나쯤 있는 사람이어야 잊어도 잊는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고,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말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말고, 그러니까 시험에 나오는 방식으로 칼질을 맞아 해체되고 조리된 시체들 말고, 이게 뭐라고 내가 울었던, 이게 뭐라고 내 피부가 전율했던, 이게 뭐라고 네게 그렇게도 읽어주고 싶던, 짧은 순간만이라도 다시 그때로 모든 것을 되돌리는.

 

허나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다가도, 그렁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_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218. 황금 당나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 장 드 보쉐르 그림 /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

 

지나친 호기심 때문에 사서 개고생하는 인생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야하다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앞부분에 바짝 그랬을 뿐, 뒤로 가면 마법 덕분에 당나귀가 된 어리석은 루키우스가 이런저런 이유로 얻어터지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1세기 당시에 인간의 흉이라고 취급받았을 다양한 악덕이 등장하고, 그 모든 악덕의 화신들이 일단 루키우스를 패고 난 다음 포르투나 여신에게 얻어터지는 그런 구성이다. 뒤로 갈수록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뭐 앞부분도 딱히 촘촘하고 말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설렁설렁 읽어진다. 재미? ‘전쟁같은 사랑이 난무하는 앞쪽까지는 썩 괜찮았다.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지들은 진심 절박한데다 비장하기까지 한데, 읽는 입장에서는 도무지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나를 어여삐 여겨 줘. 가능한 한 빨리 내 욕망을 채워줘. 너도 보다시피 전쟁 문서 절차를 이행하지도 않고 선포한 전쟁에서, 나는 무자비하게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오늘 아침, 잔인한 쿠피도의 첫 번째 화살을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맞은 이후, 지금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어. , 내가 완전히 만족할 수 있게 머리를 풀고, 풀어헤친 머리칼로 나를 사랑스럽게 애무해 줘.”

  그녀가 옷을 모두 벗고, 그 옷을 음식 접시 옆에 차곡차곡 개어 놓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친 다음, 고개를 흔들며 머릿결을 마구 흩날렸다. 그러자 그곳에 서 있던 그녀는 바다로 들어가고 있는 완벽한 베누스의 형상으로 변했으며, 어느 순간 그녀는 달아오른 손으로 베누스의 숲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베누스 여신상과 마찬기자로 창피해서라기보다는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이제 온 힘을 다해 싸우세요. 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등을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남자라면 얼굴을 맞대고 정면으로 싸우세요. 하지만 신중하게 공격하세요. , 이제 나를 공격하세요. 나를 죽이세요. 이 전쟁에서 절대로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이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침대로 올라와 한쪽 다리를 누워있던 내 등에 올려놓앗다. 그리고 레슬링 선수처럼 웅크리고 앉아 허벅지로 재빠르게 공격을 하면서 나긋나긋한 엉덩이를 뜨겁게 흔들었다. 그러자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의 사과가 내 위를 오르내리는 것과 같았다.

_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219. 빅데이터 전문가 마스터플랜

theD마스터플랜연구소 지음 / 더디퍼런스 / 2020

 

마스터플랜이라구요? …….

 

정리가 좀 덜 된 구성. 특별한 것 없는 조언. 다 아는 통찰.

 

 

--- 읽는 ---

마션 / 앤디 위어

글 쓰는 삶을 위한 일 년 / 수전 티베르기앵

무자비한 알고리즘 / 카타리나 츠바이크

나 혼자 회의한다 / 야마자키 타쿠미

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 / 홍세훈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목련정전 / 최은미

이 짧은 시간 동안 / 정호승

이토록 쉬운 딥러닝을 위한 기초수학 with 파이썬 / 마스이 도시카츠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조나단 B. 와이트

맑스와 자본 / 조현수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윌리엄 데이비스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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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23 14: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제법 읽고 계신거 같은데 의욕 생길 땐 얼마나 읽으실지 무섭네용ㅋㅋㅋㅋ(의욕 떨어져 만화 두 권 읽은 미미)

syo 2021-06-23 15:03   좋아요 5 | URL
의욕 없을 때도 읽는 양이 줄지 않듯이, 의욕이 생겨도 읽는 양이 늘지는 않습니다.
대신 한 권을 더 오래, 똑바로 읽겠지요? 요즘은 그냥 설렁설렁 대충대추우우우우웅...... 🥱

독서괭 2021-06-23 14: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황금당나귀.. 전쟁씬 대화 참.. 진짜로 저런 대화를 하려는 사람이 옛날에는 있었던 걸까요?
아 저 정말 좋아하던 시가 있었는데 지금 얘기하려고 보니 생각이 안 나요 ㅜㅜ 한 구절이라도 정확히 외우고 있어야 검색이 될텐데 으아아 답답해 ㅜㅜ
‘의욕이 떨어진다고 해서 딱히 읽는 양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니 놀랍네요.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신 시점인가 봅니다.

다락방 2021-06-23 14:42   좋아요 6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저거 써먹어도 좋을것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쟁씬 대화 말입니다.

˝이제 온 힘을 다해 싸워! 나는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23 15:05   좋아요 5 | URL
대사도 대사지만, 저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동작 묘사를 아무리 잘 궁리해봐도 어떤 상태인지 그림이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등에 한쪽 다리를 올렸는데 웅크렸어? 웅크렸는데 허벅지로 공격을 했어? 정신을 잃었어? 뭐지?

다락방 2021-06-23 15:29   좋아요 2 | URL
맞아요. 나는 마지막에 사과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

잠자냥 2021-06-23 14: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황금 당나귀>가 그런 책이군요! 눈이 동그랗게 떠지다가 금방 감겼어요. 저 인용문 보니 ㅋㅋㅋㅋ 에라이... ㅋㅋㅋㅋ

syo 2021-06-23 15:05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라틴어 사용자 놈들 하여간......

새파랑 2021-06-23 14: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쓰신 <황금당나귀>에 여전히 관심이 가는군요 ㅎㅎ syo님 독서의욕 감소했어도 여전히 많은 독서 목록이네요. 저의 2배 이상이신거 같아요👍

syo 2021-06-23 15:07   좋아요 5 | URL
한 번 직접 읽어보시지요. 딱히 권할 필요까지 있겠나 싶지만, 파랑님이 유독 맹렬한 관심을 표하시니 ㅎㅎㅎㅎ
목록의 수는 언제나 의욕과 무관합니다. 밀도가 문제지요. 😕

잠자냥 2021-06-23 15:18   좋아요 4 | URL
*유독* 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6-23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굴은 갈아엎지 마세요~😉

syo 2021-06-23 20: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르네쌍수 여진이 아직 남아있군요.

반유행열반인 2021-06-23 18: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중계를 하라니까 그냥 뚝딱 인용을…김빠졌어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어…개놈아…개그치는 놈아…

syo 2021-06-23 20:51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날로 먹으려 드시다니 😛

반유행열반인 2021-06-23 21:52   좋아요 0 | URL
으아니 무릎방지위원회 무급 상근직인데 이정도도 요구 못합니까ㅏㅏㅏ!!!

syo 2021-06-24 13: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커피 사드릴게요 커피 ㅋㅋㅋㅋ
 

 

1 2 온도 차 무엇

 

 

 

1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듯이

_ 문태준,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부분

 

우연히 만난 시가 퍽 아름답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뜻이다. 꾸준히 시집을 읽으며 절반은 놓쳐도 나머지 절반에는 붙들린다면, 내 삶이 그래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책장에 줄 세워놓은 저 나침반들. 저 쨍한 거울들.

 

 

 

2



정말 뜬금없는 이유로 자기가 묵고 있는 집의 하녀 포티스에게 음심을 품은 여행자 루키우스.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아주 씩씩하게 부엌으로 돌진, 요리중인 포티스를 발견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나의 귀여운 포티스만이 주인을 위해 군침 도는 냄새를 풍기며 싱싱한 쇠고기와 순대로 맛좋은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리넨 옷을 입고서 발간 천으로 가슴 주위를 동여매고 있었다. 그녀는 꽃다운 손으로 냄비 안을 휘저으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팔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엉덩이도 부드럽게 요동치면서 몸 전체가 관능적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서 나는 멍하니 선 채 정신없이 감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_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 무려 1세기의 작업 기술을 한번 감상해보자.


"안녕, 포티스. 냄비를 젓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야. 또 엉덩이가 움직이는 모습도 아름다워. 그러니 당신의 고기 수프는 얼마나 맛있겠어! 당신의 고기 수프에 손가락을 적실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하고 축복받은 사람일 거야.“

_ 같은 책


통하겠냐?

 

그러자 예쁘고 괄괄한 포티스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아궁이에서 떨어지세요. 아무리 약한 불이라도 불똥이 튀면 당신은 화상을 입을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불꽃을 끌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요.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요? 물론이죠. 어떻게 요리해야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는지 잘 알죠. 사람들의 입맛을 잘 알죠. 그리고 부엌 아궁이뿐만 아니라, 침대 시트 속에서도 어떻게 뜨겁게 달구는지도…….

_ 같은 책

 

통했다?!

 

물론 이건 저따위 고기 수프에 손가락 적시는 헛소리로만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고, 처음 루키우스가 이 집에 묵으러 왔던 날 자리를 봐주던 포티스에게서 이미 시그널을 확인했던 것그리고 그 이후에는 머리칼 페티시가 있는 루키우스의 머리칼 찬양 드립이 길게 이어지다가 이렇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포티스는 노련하게 머리를 치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자연 그대로의 생머리였지만, 그것만큼 매력있는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길고 진한 머리칼을 땋아 목덜미 위에서 리본으로 동여맨 다음 목까지 느슨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근질거리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머리칼을 머리 위쪽으로 땋아 올린 부분에 열정적인 키스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곁눈으로 나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왜 이래요, 어린애같이! 지금 당장은 달콤하지만, 씁쓸한 뒷맛은 생각 못하네요. 조심하세요. 오늘은 꿀맛을 보았지만, 머지않아 씁쓸한 맛을 삼키게 될지도 몰라요.“

_ 같은 책

 

포티스, 침대 시트 달구는 멘트로 훅 땅기더니 이번에는 확 밀기 스킬 시전. 루키우스는 환장.

 

, 아름다운 내 사랑이여! 그렇게 아름다운 입에서 조심하라는 말이 나오다니……. 당신의 키스만 있으면 나는 당장 당신의 불에 구워질 준비가 되어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그녀가 항복할 때까지 키스를 퍼부었다.

_ 같은 책

 

아, 루키우스 선수, 나는 불고기가 될 거예요 어택 들어가네요. 포티스 선수는 과연 이 막무가내 몸통박치기 공격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지?

 

그러자 그녀는 내 포옹에 화답하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숨소리에서는 계피 향내가 났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갖다 대고서 자기 혀를 슬쩍 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_ 같은 책

 

네, 포티스 선수, 대담한 반격입니다. 루키우스 선수 지금 그로기 상태에 빠졌는데요.

 

마침내 서로의 혀가 섞여 나오는 천상의 음료를 맛보자,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 포티스! 죽을 것 같소. 당신이 나를 어여삐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죽은 목숨과 다름없어.

_ 같은 책

 

아아아, 루키우스 선수 비굴한 기술을 선보이는데요. 자고로, 네가 지금 어찌저찌 해주지 않으면 나는 죽어버릴 테야- 하는 남자는 추후에 쓰레기로 밝혀지는 경우가 잦단 말이지요. 루키우스 선수, 자충수를 둔 것일까요? 자살폭탄 테러에 포티스 선수는 어떻게 반응할지?

 

그러자 그녀는 내게 숨막히게 키스를 퍼부으면서 대답했다.

  ”죽는 것 따위는 무서워하지 말아요. 당신이 조금 더 버틴다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내 모든 영혼을 받쳐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당신을 사랑해요. 난 완전히 당신의 여자가 되었어요. 이제 이런 우리의 흥분을 더 이상 미루지 말아요. 횃불을 켤 시간이 되면 당신 침실로 가겠어요. 그러니 방으로 가서 오늘 밤에 벌어질 전쟁에 대비하세요. 밤새도록 당신과 격렬한 길고 즐거운 전쟁을 벌일 거예요.“

_ 같은 책

 

, 그게 또 먹힙니다아아아아! 어제 처음 본 사람에게 모든 영혼을 받쳐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포티스 선수네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오늘 밤에 전쟁이 벌어지긴 벌어질 모양입니다. 선수들 최선을 다하시길. 오늘의 중계는 여기서 마치며 끝 곡으로 임재범의 <너를 위해> 띄워드립니다. 지금까지 해설에 syo, 중계에 syo였습니다. 여러분, 전쟁에 대비하시길.

 

내 거친 생각과(당신의 고기 수프는 얼마나 맛있겠어!)

불안한 눈빛과(, 포티스! 죽을 것 같소)

그걸 지켜보는 너으어으어(당신이 조금 더 버틴다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난 밤새도록 당신과 격렬한 길고 즐거운 전쟁을 벌일 거예요)

 

전쟁 양상에 대한 충실한 묘사도 있더라구요. 세심하다 후후후.

 

 

 

--- 읽은 ---



211. 서평 쓰는 법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

 

- 일독(1708xx)

- 재독(210619)


서평가로서 책 속의 정보를 대할 때에는 언제나 그 정보의 본질, 배경, 맥락, 함의 등이 얼마나 잘 소개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 책에 대해 서평을 쓰려 한다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확실하지 않거나 의혹이 생긴다면 관련된 자료를 대조해 가며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장된 인식을 가지고 서평을 써야 잠재 독자가 그 책을 읽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_ 이원석, 서평 쓰는 법

 

자료 대조. 저런 대목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일독할 당시, cyrus님과 오프라인 왕래가 없었던 syo이원석cyrus 님의 필명인가 했다. 당연히 아니었지만. 재독을 해봐도 그런 오해를 할 법했구나 싶다. 서평에 대한 관점도 문체도, 이원석 선생님과 cyrus 님은 좀 닮은 것 같다. 알라딘에서 짬 좀 찬 사람이라면 알라딘의 서평 기계 하면 바로 cyrus 님을 떠올릴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보면 정말 만든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서평을 써내시거든.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cyrus식 머신 서평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인가?

 

물론 syo는 그 길을 가지 않을/못할 것이다. 이번 생은 너무 멀리 돌아왔다…….

 

그나저나 cyrus님 요즘 뜸하군. 돌아와요.

 

 

 


212. 사생활들

김설 / 꿈꾸는 인생 / 2021

 

참은 고통이 있었고 누른 울분이 있었던 것 같다. 전자는 글쓰기의 연료가 되고 후자는 엔진이 되어 작가 김설 선생님이 탄생한 듯. 자기 글쓰기의 연료와 엔진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오래 쓴다. 반대로 말하면 오래 쓰는 사람은 자신을 되짚는 과정을 한 번은 반드시 거치는 것. 어느 순간부터 나는 왜 쓰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자주하기 시작했다면, 지금 알이 흔들리는 중인 것. , 하고 껍질이 깨지면, 그 안에서 쓰는 내가 노란 부리를 내민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빛나는 문장을 만나는 순간이 나는 너무나도 좋다. 그런 문장은 마치 "당신의 삶이 지금은 바닥을 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테니 잘 참고 견디라"고 나에게 해 주는 응원 같다. 어려서부터 책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책을 읽으면 속이 든든해졌으니 나에게 책은 밥이었다. 가난한 내게 허락된 유일한 사치는 책을 읽는 시간이었고. 버릇처럼 끼고 잠들었고 서점에 들르게 되면 뭐라도 들고 나왔다.

_ 김설, 사생활들

 

 

 


213. 다시 시작하는 독서

박홍순 지음 / 바이북 / 2016


- 일독(1703xx)

- 재독(210620)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해로운 책인가? 새로운 발상이 없거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사실상 없다면 해로운 책에 속한다. 옹호든 반박이든, 즉 나의 생각과 일치하든 안 하든 의미 있는 발상이 있거나 논의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음란한' 성행위를 매개로 하든 폭력을 매개로 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형식이 소설이든 논문이든, 문장과 표현이 쉽든 어렵든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_ 박홍순, 다시 시작하는 독서

 

syo는 박홍순 선생님을 참 좋아하지만 이 선생님은 가끔 사람을 숨 막히게 하실 때가 있다- 로 시작하는 리뷰를 쓰는 중이다. 확실히 좋은 책이긴 하다. 이런 책을 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옳고 좋은 말들은 빠짐없이 잔뜩 들어 있는 책인건 분명한데, 이런 책을 내야겠다는 마음을 왜 먹으셨는지, syo는 늘 그게 궁금하다.

 

 

 

--- 읽는 ---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조나단 B. 와이트

조각가 / 스콧 맥클라우드

마션 / 앤디 위어

시를 잊은 그대에게 / 정재찬

전쟁은 끝났어요 / 곽재식 외

밤을 걷는 밤 / 유희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무자비한 알고리즘 / 카타리나 츠바이크

처음 회계 / 편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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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6-20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뭔놈의 연애가중계인가 생생한데 웃겼어…안녕 오랜만이다 개놈아 너 안 죽었었구나??

syo 2021-06-20 17:51   좋아요 2 | URL
저 책이 다 했지요. 전쟁씬 들어가면 더 웃깁니다 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20 18:35   좋아요 1 | URL
전쟁 씬도 중계해 주시나요?🥺

syo 2021-06-21 14:39   좋아요 1 | URL
심의라는 게 있으니까요..... 😳

반유행열반인 2021-06-21 19:07   좋아요 0 | URL
어이 개놈아 언제부터 자체검열했니? (여러분 저는 syo님을 욕한 게 아니라 syo의 분신 글로 개그치는 놈을 일컫는 거여요 자매품 중놈이도 있습니당)

syo 2021-06-21 19:2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그러고보니 개놈은 욕이네요?
내가 개놈이한테 너무했구나..... 그런 이름을 지어주다니...

새파랑 2021-06-20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금당나귀>가 재미있는건지 syo님이 재미있게 쓴건지~ 둘 다 이겠지만 어쨋든 저책은 읽고 싶어 지는군요^^

syo 2021-06-21 14:39   좋아요 1 | URL
야하다는 평이어서 신나가지고 보기 시작한건데 뒤로 가니까 주인공 얻어터지기만 하네요... 😦

독서괭 2021-06-2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전쟁씬이 참으로 궁금하군요ㅋㅋㅋ syo님은 재독도 많이 하시네요. 전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재독한 책이 한손에 꼽을 정도인 것 같은데..

syo 2021-06-21 14:4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한 번 읽고 괜찮았던 애들이 다시 손에 들기 쉽지요. 같은 책 시간 지나서 다시 읽으면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기도 좋구요 ㅎㅎㅎㅎ

전쟁 씬을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 중입니다 🤒

공쟝쟝 2021-06-2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세기 작업의 기술.. 대환장... 포티스 ㅋㅋ읽을 생각은 없는 데 전쟁양상만 좀 공유해주시죠.

syo 2021-06-25 20:4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다들 전쟁에만 관심이 있어
 

 

르네상스 놈들은 쌍꺼풀에 진심인 편

   


 

1

 

코로나가 터지고 제일 귀찮은 일 중 하나는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코로나가 터지고 제일 즐거운 일 중 하나는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까, syo 포함,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씩 더 아름다워진다. 가릴수록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란 이렇게 역설적인 것.

 

 

 

2

 

요즘 유행하는 놀이를 해보았다. 알라딘에서 발붙이고 살려면 이걸 해야 하는 분위기다.



왼쪽 상단이 실물과 가장 가깝다. 왜냐하면 실물이기 때문이다.

 

무쌍으로 살아온 인생 이제 곧 40. 40년은 긴 세월이라 이제는 쌍꺼풀을 단 내 얼굴을 보니 헛구역질이 다 난다. 기괴함 그 너머의 기괴함. 쟤네들 다 정상은 아니지만 20세기 쟤는 동공 면적이 내 꺼 4배는 되겠다. 


그래도 쌍수는 역시 르네쌍수. 잘 보면 배경도 깨알같이 모나리자 식으로 바꿔준다. 오토바이 탄 아저씨는 바위처럼 보인다. 그 시절에는 오토바이 탄 아저씨 같은 건 없었어서 그런가.

 

 

 

3



역시 왼쪽 상단이 실물과 가장 가깝다. 실물인데 실물과 가장 가깝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당연히 마스크 때문이다.

 

syo는 프로 마기꾼으로서, 저 마스크 안쪽으로 아무리 제초해도 박멸되지 않는 얼굴 털들을 숨겨놓았다. 그걸 가리고 다니니 어쩐지 문명인 같아 보여서 좋다. 스무 살에는 재수를 했었는데, 아침에 면도하고 학원에 가면 점심 먹을 때쯤 다시 수염이 돋아나 있었기에, 점심때나 얼굴 보는 다른 반 친구들은 syo에게 세상에는 면도라는 활동이 있음을 자꾸만 알려주었다. 몰랐겠냐. 모닝 얼굴을 매일 확인하는 같은 반 친구는 그런 게 아니라고, 쟤 얼굴에 수염 없는 꼴을 보려면 하루 세 번 칫솔질 대신 면도칼질을 시켜야 한다며 내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자기들의 털이 보통 털이라면 내 털은 한 단계 위의 털이므로 같은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며, 내 털에 털 그 이상의 털이라는 뜻으로 터락션Turactio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발음기호는 [춰롹↑ㅋ션ㄴ]

 

내 눈은 꼬리가 처진 편인데, 이놈들 눈은 다 왜 이래. 눈알은 세 배가 되었고.

  

 

 

--- 읽은 ---



208. 호빗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 이미애 / arte / 2021

 

신화나 동화를 보면 신이나 영웅들의 승과 패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아니 쟤는 저 동네에서는 지금 적보다 훨씬 막강한 애를 맨주먹으로 때려 잡아놓고 왜 여기 와서는 저 허접한 애한테 쥐어터지고 앉았냐. 아니 저 신이라는 작자는 세상 못할 일이 없다고 해놓고 왜 여기서는 등신같이 쥐로 변해서 고양이한테 쫓기고 비둘기로 변해서 독수리한테 쫓기고 지랄이야 아예 그냥 처음부터 번개를 던지든가 산을 집어던지든가 하면 되잖아, 이게 말이 돼? 이건 일본 소년만화에 길들여진 탓. 걔네는 랭킹이 확실해서, 기연을 만나거나 노력하거나 아니면 뜻밖의 상성 문제로 랭킹이 엎어지는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AB한테 이겼는데 BC한테 이기면 AC한테 이긴다. 그런 관점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폐해도 크다.

 

사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만화가 먼저가 아니라 신화와 동화가 먼저다. 판타지 소설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는데 그건 뭔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과정에서 과학적이지 않은 일들이 수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발생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본령은 그런 것. 그러니까, 이게 뭐야? 이게 납득이 돼? 하는 지점이 나오면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조용히 들여다보면 된다. 판타지는 그런 맛으로도 본다.

 

바로 그 때문에 용의 관심을 끌었던 거야. 잘 알다시피 용이란 놈들은 인간과 요정과 난쟁이들에게서 황금과 보석을 훔치는데, 어디서건 가리지 않고 발견하는 족족 훔치거든. 그리고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에는 약탈한 물건들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고 간직한다네. 그런데 용이란 놈들은 살해를 당하지 않는 한 영원히 사니까 실제로는 그 보물을 영원히 소유한다고 할 수 있지. 그놈들은 그냥 소유만 할 뿐, 놋쇠 반지 하나도 즐길 줄 몰라. 사실 그놈들은 지김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은 잘 알지만, 훌륭한 물건과 조야한 물건도 구별할 줄 모른다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 줄 모르고 심지어는 갑옷 비늘이 조금 헐거워져도 고칠 줄 몰라.

_ 존 로날드 로웰 톨킨, 호빗

 

 

 



209. 두 글자로 깨치는 불교

가섭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

 

쉬울 줄 알았는데 뜻밖에 어렵다! 나는 불교 학교를 6년이나 다녔는데! 심지어 반야심경도 외울 줄 아는데!

 

그건 아무래도 체계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 두 글자 짜리 불교 용어(?)들을 사전식으로 풀어놓은 책인데, 내용 자체가 부실한 느낌은 절대 아니지만,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사전을 펴놓고 순서대로 외우는 느낌의 뭔가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얼핏 보면 현상들은 모두 둘로 나뉘어 존재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인해 항상 대립하고 갈등한다. 이러한 분별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욕망이 되어 마음의 틀을 이룬다. 둘 사이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나누어 인식하는 습관은 상대를 경쟁과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결과를 낳는다.

  현대문명을 한계점으로 몰아온 분리 ­ 경쟁 ­ 정복 ­ 지배의 논리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불이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불이는 현상적 차별에 대하여 분별이 없는 것, 또한 온갖 분별을 초월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치르 현상적 모습은 독립적인 고정된 실체를 갖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기적 관계로 이해한다.

  그래서 불이는 발생론적인 측면보다는 관계론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불이사상은 이 우주 안 모든 것들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의미하며,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허물어야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다.

_ 가섭, 두 글자로 깨치는 불교

 

 

 


210. 데이터사이언스 입문

타케무라 아키미치 지음 / 황석형 외 옮김 / 인피니티북스 / 2020

 

사전과 개론서의 짬뽕 느낌인데, 개론서 수준의 사전은 약하고 사전 같은 개론서는 재미없는 법이다.

 

 

 

--- 읽는 ---

사생활들 / 김설

시를 잊은 그대에게 / 정재찬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조나단 B. 와이트

황금 당나귀 /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 김범준

흥미로운 베이지안 통계 / 윌 커트

전쟁은 끝났어요 / 곽재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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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6-19 14: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르네쌍수 괜찮은데요 ㅎㅎㅎ 뭐, 쌍수를 추천하는 건 아닙니다^^

syo 2021-06-19 15:01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사이의 가치관 차이는 메울 수 없겠습니다.....

미미 2021-06-19 14: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저희 도장 사범님인줄 알고 너무 놀랐습니다!(똑닮ㅋㅋ)혹시 운동도좀 하시나요? 배경은 왜 점점 매드맥스화 되는지 syo님 추측도 일리있지만 제 생각엔 마스크 땜 미세먼지 설정화 된건가 싶기도해요ㅋㅋㅋ르네쌍수도너무나 잘어울리시는데 왜그러세요ㅋㅋ저 좀 더 웃어도 되죠?😆 다른 분들도 제발다 올려주시길!

syo 2021-06-19 15:02   좋아요 4 | URL
저는 아저씨를 바위로 만들었는데 미미님은 아저씨를 미세먼지로 만드셨네요.
누가 더 악당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

제발 다 올려달라는 표현은 틀렸어요.
언급했듯이, 알라딘에서 활동하려면 기본적으로 다 올려야 하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부탁은 필요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얄라알라 2021-06-19 15: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실물 공개 사진에 눈이 먼저 가고, 활자는 나중이네요^^: 미미님 말씀하시는 매드맥스 배경은 저 이륜차 때문?^^

syo 2021-06-19 15:08   좋아요 3 | URL
이래저래 오토바이 아저씨만 안됐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6-19 15: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가장 마지막 사진 눈알 흘러내려요…더워서 녹았나 우는 건가…

syo 2021-06-19 15:09   좋아요 4 | URL
마스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얼굴에 부당한 하얀 것이 있어서 알고리즘이 어버버버한듯.

수이 2021-06-19 15: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곧 마흔이 왜 곧 스물처럼 나왔나요? 사기입니다!!!!!!!!!!!!!!!!!!!!!!!!!!!!!!!!!!!!!!!!

syo 2021-06-19 15:08   좋아요 3 | URL
사기가 아니라 마스크님이 역사하사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6-19 15:0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5세기 르네상스 버전은 눈병 걸렸어요 혹시 일 년 전 르네상스인가…

syo 2021-06-19 15:10   좋아요 4 | URL
저 시절 눈알은 대체로 저렇습니다. 모나리자 각막염....

페넬로페 2021-06-19 15: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syo님!
무슨 아이돌입니까?
왜이리 잘 생겼나요?
르네상스 쌍꺼풀도 괜찮은데 아시잖아요!
실제로는 저렇게 될수 없다는 거 ㅎㅎ^^
저의 남편도 오후되면 수북하게 수염이 자라는 사람이라 그 고충을 잘 알지요~~
오늘부터 춰롹 션이라 불러야겠어요^^

syo 2021-06-19 15:12   좋아요 4 | URL
수직선의 한쪽 끝에 아이돌을 놓고 반대쪽 끝에 돌아이를 놓으면 syo는 반대쪽으로 열심히 달려갑니다.
르네쌍스 쌍꺼풀이 괜찮다니 ㅋㅋㅋㅋ 다들 농담도 잘하신다.

춰롹션은 발음이 중요합니다. 롹을 거의 멍멍이가 ‘왕!‘하고 짖듯이 발음해줘야 합니다. [춰롹!ㅋ션ㄴ]

얄라알라 2021-06-19 15: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수연님 말씀 동감, 그러고 보니 40 언저리의 1/2의 실물이신데요?

syo 2021-06-19 15:30   좋아요 3 | URL
걱정하지 마세요.
마스크 내리면 바로 30되고,
핸드폰 사진 보정빨 빼면 광대뼈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까지 더해져서 40을 완성합니다^-^

새파랑 2021-06-19 15: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syo님은 글도 잘쓰고 책도 잘읽고 잘생기시기 까지 하군요.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군요~!!!

syo 2021-06-19 15:58   좋아요 4 | URL
말씀하신 모든 게 진실도 아니거니와, 진실이라 하더라도 텅텅 빈 제 통장 잔고가 그 모든 불공평을 공평하게 만듭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말씀하신 모든 게 진실이 아닌데다 통장까지 텅장이니, 이건 진짜 불공평하군요.....

잠자냥 2021-06-19 18:12   좋아요 2 | URL
아 새파랑님 이런 말 하면 안된다니까욬ㅋㅋㅋㅋ 다부장님도 그렇고 미녀 미남 소리 들을라고 올린 거라니까! 낚였네, 낚였어! ㅋㅋㅋㅋ

syo 2021-06-19 18:4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님,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하셔야죠, 왜 참고 계세요. 그저 낚이지 않겠다는 의미없는 강박에 휩싸여서 욕망을 억누르지 마시고, 마음껏 말씀하세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21 10:12   좋아요 0 | URL
아 개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저 낚이지 않겠다는 의미없는 강박에 휩싸여서 욕망을 억누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잠자냥 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다이제스터 2021-06-19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예상과 달리 실물 사진이 미남이세요. ㅋㅋㅋㅋㅋ

syo 2021-06-19 18:2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실물 사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실물 실물은 아마 예상하신대로일 겁니다 ㅋㅋㅋ

난티나무 2021-06-19 16: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왜 자꾸 얼굴 공개하시는 거예요 다들! 물어내요. 내 환상 다 깨짐!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6-19 18:13   좋아요 1 | URL
전 사실 폴스타프 님 르네쌍수가 젤 궁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19 18:31   좋아요 3 | URL
난티나무 님 // 아름다운 환상은 깨고,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셔야지요. 원래 현실은 차갑고 건조한 법입니다......

잠자냥 님 // 폴스타프 님 몰이 한 번 해볼까요 우리? 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6-19 18:46   좋아요 2 | URL
내 환상이 아름다웠다고는 말 안 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6-19 20:06   좋아요 1 | URL
사실 전..... 천연 상태에서 쌍풀.....입.니.다.

잠자냥 2021-06-19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숙취로 고생 중인
토요일 오후에 진짜 큰 웃음 터졌어욬ㅋㅋㅋㅋㅋㅋㅋ 즤집 고양이들이 다 어리둥절해서 쳐다 봄 ㅋㅋㅋㅋ 이달의 빅웃음상 쇼!

syo 2021-06-19 18:31   좋아요 2 | URL
왜 남의 얼굴 보고 함부로 터지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거울 보고 가끔 터지니까 흔쾌히 봐 드리는 겁니다.

잠자냥 2021-06-19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4세기(왼쪽 상단) 사진이 젤 마음에 드는군요. ㅋㅋㅋㅋㅋㅋ 어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더니! 아니 이럴 수가 우리 초딩 조카 닮았어요! ㅋㅋㅋㅋㅋ

syo 2021-06-19 18:33   좋아요 2 | URL
제가 무려 초딩 조카 님을 닮았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혹시 초딩 조카님이 미미 님 동네에서 도장 사범으로 근무하시는지 여쭤봐주세요.

잠자냥 2021-06-19 18:34   좋아요 1 | URL
쇼님 귀요미상이네요. ㅋㅋㅋㅋㅋ

syo 2021-06-19 18:41   좋아요 1 | URL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좀 그런 편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6-19 2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저 진짜 syo님은 영원히 상상 속에 남겨두고 싶었는데, 실물 공개로 이제
.
.
.
.
더 좋아져 버려따!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19 21:39   좋아요 1 | URL
꿀꿀 붉은돼지일 줄 알았는데 말이죠…

syo 2021-06-20 00:5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ㅎ 붉지는 않지만 뱃속에 돼지 한 마리 품고 있는 건 사실이지요 🐷

scott 2021-06-19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댓글 달려고 왔다고 끊임없이 스크롤을 주르륵
관상 이야기 할려다고 입 만 벌리고
가여 ㅋㅋㅋㅋㅋㅋ

소요님 아이도루 ㅋㅋㅋㅋ

syo 2021-06-20 01:00   좋아요 1 | URL
댓글 수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보다 파장이 크네요.

공쟝쟝 2021-06-19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아 18세기 쇼님 아이도루 데뷔하자 남방계 상으로다가 ㅋㅋㅋ

syo 2021-06-20 01:01   좋아요 0 | URL
내 꺼풀에 손 대지 마라.... 나는 무쌍이 좋아요 ㅎㅎㅎㅎ

독서괭 2021-06-20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syo님까지 하시다니… 난티나무님 위 댓글에 공감합니다. 제가 상상한 syo님 이미지랑 너무 다른데요? 제 환상이 아름다웠던 건 아닌 것도 마찬가지 ㅋㅋㅋ 살 많이 쪘다고 맨날 그러던 것도 다 거짓부렁이였던 것…
하지만 syo님 덕에 실물과 어플보정컷이 매우 다르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ㅎㅎ

syo 2021-06-20 17:44   좋아요 1 | URL
1. 저 사진에는 얼굴만 나왔기 때문에
2. 자기 뭄무게를 다는 저울은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사진과 별개로 숨겨진 돼지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번에 몇 개의 환상을 박살낸 것에 대해서는 뿌듯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2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거 언제 올렸어요. 나 왜 이거 놓쳤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쌍수 하자니까? 18세기 봐봐요. 얼마나 분위기 있어. 우수에 찬 눈망울...꽃사슴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21 14:3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뭐야 내 미감만 이상한가?? ㅋㅋㅋㅋ 내 18세기는 18세끼급이야 ㅋㅋㅋㅋㅋㅋ

2021-06-30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6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7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말의 거처

 

 

 

1

 

도저히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크나큰 말들, 인간이 지닌/지녀야 할 것들 중에서 차마 그 처분을 결정하기 가장 어려운 것들을 둘러싼 거대한 말들 앞에 섰을 때, 그간 말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진정 말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말이 아닌 것들만 말하면서 말인 것들을 말하고 산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동물일 것이다. 진짜 말 앞에서 크게 한 번 침묵했던 사람들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곳에서 나올 말들.



 

그가 유키코에게 마음을 고백한 장소도 그곳이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그 앞에서 만나 샌드위치를 나눠 먹고 있을 때였다. 배가 고팠는지 한창 열중해서 먹던 유키코가 멀리 보이는 교내의 숲과 지금 그들의 발 앞에 놓인 땅을 손가락으로 이으며, 날아온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심지 않아도 저 숲에서 자라는 것들이 날아와 여기에 자리 잡는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흘에 한번씩 뒤엎고 갈아가며 필요 이상의 개간 작업을 한 공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언가들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날아와서, 행로와 목적도 없이 날아와서 여기에.

  그러니 그날의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살아 있는 것들의 이동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_ 김금희, 마지막 이기성

 

 

 

2

 

남의 큰 아픔보다는 나의 작은 아픔이 오래 기억에 남고, 또 나의 작은 아픔보다는 나의 큰 아픔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어떤 작은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겪었던 고통보다 더 오래 남기도 하고, 또 내게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남의 티끌 같은 불행이 내가 오래 앓아오고 있는 잔병보다는 더 크고 긴 아픔으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아픔의 생명력은 그 크기나 거리와 비례관계가 없다. 아픔은 가끔 생물이다. 그게 우리 곁에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지, 어떻게 다시 생각나는지, 혹은 잊히는지, 그런 건 종종 우리 소관을 벗어난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_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

 

다가서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가갈 수밖에 없는 사랑과, 다가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다가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랑이 번갈아 일어날 때, 우리가 사랑에게 하는 것들과 사랑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들.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있어도 그 쾌감은 자족(自足)을 위해 체계를 만들며, 그 맛의 긍지 속에서 궁지(窮地)로 졸아든다. '질투'스러운 감정들이 변명 없이 증명해주는 것처럼, 욕망은 점()(占性)으로 치닫고, 그래서 점성(黏性)으로 무장한다. 물론 리비도(libido)의 자폐적 순환을 막는 방법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른바 리비도의 그 악명 높은 점착성(Klebrigkeit) 탓에 사태는 자주 혼란스러워지고 악순환의 고리 또한 여간 성가셔 보이지 않는다. 애착은 생명의 진화사 일반에서 어떤 자리와 방향을 차지하고 있을까?

_ 김영민, 집중과 영혼

 

 

 

4

 

그냥 그대로 되어가는 것들이 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는데 저절로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마음들이다.



 

나는 그날 콘라딘이 내게 무슨 말을 했고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우리가 젊은 두 연인처럼 한 시간쯤 길을 따라 오르내렸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며 서로를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이 겨우 시작일 뿐이며 이제부터는 내 삶이 더 이상 공허하거나 따분하지 않고 우리 둘 모두에 대한 희망과 풍요로 가득차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_ 프레드 울만, 동급생

 

 

 

5

 

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은 사실 뱉기 전에 돌이킬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던 말일 확률이 높다. 그런 말은 전조 없이 단번에 탄생하지 않는다. 단지 내 마음이 그 말을 빚으러 가는 걸음걸음을 내가 몰랐거나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너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며 헤어졌지만 후에 돌이켜보면 나를 잘 안다고 믿었기에 헤어진 것이었을 때가 많은 것도 실은 같은 이야기다.



 

"당신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두죠."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압니다. 내게 필요한 건 우정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는 단 하나의 행복만이 가능합니다. 그건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요, 사랑……입니다."

  "사랑……." 그녀는 천천히 마음속으로 반복해보았다. 그리고 문득 레이스를 풀어낸 그때, 덧붙여 말했다. "그 말이 내게 너무나 많은 걸 의미하기 때문에,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의미하기 때문에, 그말을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_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6

 

지금 이 순간 우리더러 보라고 머나먼 자리에서 빛을 쏘아대던 저 별의 십억 년 동안 이어진 노력을 생각하듯이, 나란히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실은 몇만 광년을 걸어 여기에 도착했음을 늘 알아야 한다.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_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부분

 

 

 

--- 읽은 ---



205. 그러라 그래

양희은 지음 / 김영사 / 2021

 

나의 하루 속에 내게 아무것도 아니며 나를 위한 그 무엇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하다가 아찔해지곤 한다. 생은 짧고, 아무리 늘여도 부족할 것이고, 책은 많고, 아무리 읽어도 넘쳐날 것이라서, 맥없이 낭비한 시간들이 마른 가랑잎처럼 과거를 굴러다니다 바스라지는 모습을 보면 아, 벌써 내 인생도 가을인가, 한겨울에 후회하기 싫으면 이제라도 슬슬 이파리 관리 좀 들어가야 하나, , 이번 생은 너무 늦었나, 아닌가, 아직 할 만한가, 막 이러면서 고뇌한다. 하지만 고뇌하는 중에 청소기는 밀어야 하고, 그릇은 닦아야 하며, 쓰봉은 내놓아야만 한다. 이럴 시간 없는데, 이럴 시간 없는데…….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마침내 알게 되는가 보다. 청소기를 미는 동작 하나, 수세미로 그릇을 훔치는 방향에 관한 미세한 습관 하나가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매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는 매일의 사소하고 소소한 일거리들이 내게 무엇이 되어 주는지를.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니까,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하니까.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와 창틀에 쌓인 먼지를 훔쳤다.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내 부엌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밥을 해 먹는 일, 제철 채소를 사다가 나물을 무치고, 맑은 국을 끓이고 제철 생선 두어 마리를 맛나게 굽는 일. 그게 무슨 대수냐고 웃을지는 몰라도 내게는 중요하다. 일 바깥의 일상을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내 일의 비결이다.

_ 양희은, 그러라 그래

 

 

 


206. 백의 그림자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

- 일독(롱타임노씨)

- 재독(210618)

 

이 누나는 왜 맨날 사람을 울리고 그래. 진짜. 에이. 어른 남자가 막 울고 그럼 안 되는 건데.

안 되나요.

안 되지 않을까요.

안 되는군요.

안 되면 안 울 건가요.

안 우는 것도 마음대로 안 돼요.

안 되면 그냥 울어버려요.

울면요.

우는 거죠.

우는 거구나.

, 하고 내가 말했다.

울면 우는 거죠.

그러네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계속 걸었다.

  이따금 발밑에서 축축한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무재 씨, 하고 내가 말했다.

  섹스 말인데요, 그게 그렇게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좋을까요.

  좋으니까 아이를 몇이나 낳는 부부도 있는 거고.

  글쎄 좋을지.

  궁금해요?

  그냥 궁금해서요.

  여기서 나가면 해 볼까요.

  나갈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고 숲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은데요.

  좋아하면 되지요.

  누구를요.

  나를요.

  글쎄요.

  나는 좋아합니다.

  누구를요.

  은교 씨를요.

  농담하지 마세요.

  아니요. 좋아해요. 은교 씨를 좋아합니다.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207. 프로페셔널 스튜던트

용섭 지음 / 퍼블리온 / 2021

 

전문성을 쌓고 대체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라. 이게 핵심이다. 그런데 그게 핵심이 아닌 자기계발책도 있었던가. 코로나도 때리고 AI도 때리고 시대는 이렇게 막 변하는데, 그때마다 이 새로운시대, ‘전례 없는위기를 넘기는 법을 알려준다고 나서는 책들이 언제나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면, 대체 자기계발서는 왜 필요한 거고, 나는 왜 잊을 만하면 이 장르를 읽고 그러는 걸까?

 

뻔해서 어딜 가져와도 구구절절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한 대목 가져와보자.

 

당신의 10년 후, 아니 당신의 1년 후 어떤 기회가 올지 어떤 위기가 올지 모른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변수도 많아져서 더 이상 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피해가는 건 불가능하다. 위기를 피해가는 게 아니라 이젠 위기를 맞더라도 빨리 대응해서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결국 새로운 전문지식을 계속 배우는 능력과 함께, 위기대응력, 순발력, 생존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프로페셔널 스튜던트의 태도다.

_ 김용섭, 프로페셔녈 스튜던트

 

 

 

--- 읽는 ---

호빗 / 존 로날드 로웰 톨킨

두 글자로 깨치는 불교 / 가섭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다시 시작하는 독서 / 박홍순

황금 당나귀 /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서평 쓰는 법 / 이원석

데이터사이언스 입문 / 타케무라 아키미치 외

미분방정식 / 남영만, 김종규

상표전쟁 / 신무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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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6-18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되는 건 아닌데 울지 말아요 ㅎㅎㅎ나도 읽어야지 황정은 킵해 놓은 게 많아 야금야금 빼 먹을 수 있는 건 좋네요. syo님도 디디의 우산 책등만 그만 보고 책장도 보시죠 ㅎㅎㅎ

syo 2021-06-18 19:03   좋아요 2 | URL
디디의 시간이 도래했군요.
책장 옆 책 더미에 올려놓았습니다. 책상 위의 책들이 사라지는 족족 하나씩 하나씩 책상 위로 올려놓을 테니 조만간 책상 위의 디디를 만나겠네요.

그렇지만 책상 위에 책이 백만 권이라고 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6-18 19:07   좋아요 1 | URL
아이참 철학 책 이런 거 졸린 거 집어치우고 후다닥 읽으실 거 잖아요 ㅎㅎ심지어 책이 빨간색이야 외면할 수가 없잖아요

syo 2021-06-18 19:26   좋아요 2 | URL
맛있는 건 아껴먹는 습관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아껴도 너무 아꼈네. 출간과 동시에 사놓고 아직 안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