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마저 먹자

 

 

 

새벽 내내 엄마는 잠 못 들고 뒤척인다. 뒤척이면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그러면 나는 부스스 일어나 감은 눈으로 엄마 다리를 주무른다. 얼음을 갖다 대면 통증은 조금 더 빨리 가라앉는다. 통증이 썰물처럼 밀려가면 엄마는 갯벌처럼 답답하다. 나는 그저 다독일밖에. 답답해. 답답해 미치겠어. 아니야엄만 안 미칠 거야. 사람 미치는 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더라고. 엄마는 다시 뒤척인다. 뒤척이면 아프다. 아프다, 아파. 이 다리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다리를 주무르며 내가 말한다. 식칼 가져와서 확 잘라버릴까? 엄마가 웃는다. 헤헤


그런 새벽이 꿈처럼 지나가면 한낮에도 우리는 좀처럼 깨지 않는 꿈속에 나란히 누운 사람들 같다. 우리는 지쳤다. 몽롱하다. 한여름이다. 나는 덥고, 엄마는 추웠다가 더웠다가 한다.

 

과일 트럭이 지나가는 듯했다. 자두 한 소쿠리 삼천 원, 사과가 오천 원. 자두 먹고 싶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엄마가 말했다. 엄마, 어차피 못 먹잖아. 다 토하잖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가 대답했다. 자두 한 소쿠리 삼천 원, 사과가 오천 원. 자두 먹고 싶어. 토하면 엄마가 힘들잖아. 그래도 괜찮겠어? 나는 꼼짝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내 귀찮음에다가 엄마 걱정이라는 가면을 씌우고 이게 다 당신 탓이라는 시그널을 던졌다. 하지만 엄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두를 사서, 끓는 물에 삶아서, 껍질 벗기고, 갈아서, 빨대로 마시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밤새 당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투정을 받아내느라 이렇게 뻗어있는데 아무리 환자라지만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자기 생각만 할까. 어차피 먹지도 못할 자두를. 그러는 동안 트럭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어느덧 자두까지는 들리는데 사과가 들리지 않는 거리. , 자두 먹고 싶어. 엄마는 앵무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나 지갑을 챙기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는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골목을 돌아 나가는 트럭을 붙잡고 자두 한 봉지를 샀다. 자두는 노랗게 덜 익었고 크기도 고르지 않아 맛이 없어 보였다. 침도 고이지 않았다


가스레인지를 켜고, 물을 끓이고, 자두 다섯 개를 돌돌 삶아내고, 도마 위에서 껍질을 벗기고, 칼로 과육만 저며내어 믹서기에 갈았다. 갈아 놓으니 색이 예쁜 한 컵 분량의 걸쭉한 자두 주스가 만들어졌다. 엄마는 누운 채로 내가 이 자두 주스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장만 보던 사람의 눈동자가 내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숟가락으로 떠서 천천히 입에 넣어주고 한 술 넘길 때마다 심호흡 두 번과 얕은 호흡 두 번을 시켰더니 토하지도 않고 반 컵을 잘 마셨다. 토할 것처럼 기침을 시작하면 가슴을 쓸어주며, 아니야, 아니야, 그냥 기침이야, 토할 필요 없어, 아니야, 했다. 남은 반 컵은 이따가 저녁에 마저 먹자. 엄마는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다시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기분이 좋은지 어릴 적 방학마다 놀러 갔다던 김천 큰아버지 댁을 이야기했다. 맑은 물이며, 빽빽이 헤엄치는 고기며, 물레방아며, 대구에서 김천까지 두 살 어린 동생과 단둘이 찾아갔던 열 살 그 시절의 기억 같은 것들을 줄줄이 읊으며, 다 나으면 다시 꼭 가봐야지, 했다. 나으면. 개구리랑 메뚜기 같은 것도 막 잡아먹고 그랬나? 나는 괜히 말을 돌렸다. ‘나으면으로부터 야비하게 도망쳤다.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였다.

 

별다른 기별도 없이 갑작스레 엄마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말이 어눌해졌다. 급히 재 본 혈압은 220이었다. 나는 119에 전화를 했고, 동생은 엄마를 달랬다. 엄마, 지금 너무 위험한 것 같으니까 일단 구급차 불러서 병원에 갔다 오자. 엄마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입으로 말을 뱉었다. -- 아니야, 갔다가 괜찮아지면 바로 다시 집에 올 거야. 병원에 입원하는 거 아니야. 이제는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엄마는 간신히 말소리를 만들어냈다. ----

 

그게 우리가 들은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다.

 

구급차에서, 그리고 응급실 침대 위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거칠게 헐떡이던 엄마는 그렇게 두 시간 남짓 숨을 쉬다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남매는 그 자리에서 두 시간을 더 울고 식어가는 엄마를 만지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다가 돌아왔다. 밤이 늦어서 분향소는 다음 날부터 모시기로 하고 엄마는 안치실로, 우리는 집으로,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는데, 노랗고 걸쭉한 자두 주스가 반 컵, 남아 있었다. 만약 그때 자두를 사러 나가지 않았더라면(그 마음은 정말 순간적인 변덕에 가까웠다) 아마도 나는,

 

어제 삼우三虞를 마쳤다. 다음에 엄마를 보러 갈 때는 원색의 꽃 몇 송이 사야겠다. 엄마의 손이 닿으면 쉽게 시드는 화분이 없었다.

 

 

 

--- 읽은 ---


 

247. 응답하는 사회학

정수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

 

정수복 선생님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것들은 파리 생활에 대한 책이거나 책에 대한 책이었다. 그래서 syo에게 선생님은 에세이스트였다. 공저인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속 좌담 꼭지에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시는 것을 보고서야 선생님이 사실 사회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선생님에 대해 뭔가를 더 알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선생님은 더 흐릿해졌다. 사회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가 사실은 사회학자였다는 정보는 왜 그 사람을 덜 선명하게 만드는가.

 

선생님 역시 유사한 고민을 하셨던 것이다. 대중에게 사회학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며 또 무엇일 수 있으며 또 그 무엇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류 학계 바깥을 떠돌던 선생님의 인생은 저 질문에 대해 자신의 몸과 삶으로 하는 대답 그 자체였던 듯. 그리고 이 책은 그 대답의 요약본에 가깝다.

 

구성은 이렇다.

 

1: 사회 구성원과 괴리된 강단 사회학의 대안으로 예술로서의 사회학을 제안

2: 그런 대안을 만들어내기까지 사회학자로서 살아온 스스로의 삶에 대한 사회학적 자기분석

3: 이미 새로운 사회학의 가능성을 스스로 열어내고 있는 세 명의 사회학자에 대한 분석

 

다소 길지만, 일독 여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예술로서의 사회학이 어떤 개념인지 제시하는 대목을 인용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삶이 앎의 근거가 되는 사회학, 학문의 숙성과 인간적 성숙이 함께 가는 사회학, 개성이 드러나는 자기만의 사회학, 감동을 주며 마음을 위로하는 사회학,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학, 타인의 삶을 깊이 이해하는 사회학, 삶의 고통과 환희, 좌절과 역경에 귀 기울이는 사회학,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와 평등, 진리와 정의가 살아 있게 만드는 사회학을 하고 싶었다. 그런 사회학을 '과학으로서의 사회학'과 대비시켜 '예술로서의 사회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예술로서의 사회학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학을 말하는가? 예술로서의 사회학은 우선 문학, 예술과 대화하는 사회학이다. 소설이나 시, 그림이나 조각작품, 사진이나 영화처럼 보통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삶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게 하는 사회학이다. 사회학은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런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어떻게 짜여 있으며 지금보다 더 나은 삶,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모색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사회학은 문학 · 예술과 대화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문학과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회학은 현실을 설명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을 넘어서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학이 되어야 한다.

_ 정수복, 응답하는 사회학

 

 

 


248.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지음 / 열림원 / 2020

 

옮겨적어 놓겠다고 따 놓은 대목이 50군데 정도 되었으니, 시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선생님의 산문 역시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 읽고 덮어 놓은지 스무 날이 지난 지금, 이 책에 대해 무슨 말을 하기로 했었는지 곰곰 생각하는 중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스무 명이 스무 편의 시를 낭독했다. 태어나서 처음 시를 쓴 사람도 있었고 이미 유명한 시인들도 있었다. 평등하게 섞여 자신의 시를 읽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학예회처럼 설렜다. 그 작품들이, 떨리던 목소리들이 정물화처럼 내 가슴에 놓여 있다. 심정 아프게 하는 시가 많았다. 일상의 괴로움을 안고 시를 지으며 달랬으려니. 모든 사람의 혈관에는 시어가 흐르고 있다.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는 시인이라는 징표가 새겨져 있다. 손금을 찬찬히 보면 ''라고 적혀 있다.

_ 김이듬,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249. 모르면 호구되는 경제 상식

이현우 지음 / 한즈미디어 / 2019

 

250. 재무제표 처음공부

대럴 멀리스, 주디스 올로프 지음 / 백승우 옮김 / 신현식 감수 / 이레미디어 / 2018

 

 

 

--- 읽는 ---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 / 윤태영

도시를 걷는 문장들 / 강병융

프로이트 : 20세기의 해몽가 / 피에르바뱅

사조영웅전 1 / 김용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 리디어 더그데일

왜 읽을 수 없는가 / 지비원

논어에 반하다 / 김석

나의 사랑, 매기 / 김금희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 서양 고대 철학 편 / 김재훈, 서정욱

Chaeg 2021. 6 / (월간지)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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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8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30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inema Paradiso 2021-07-28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틀 전에 냉장고에 있던 마지막 자두를 먹었는데.. 먹먹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yo 2021-07-30 14:03   좋아요 0 | URL
저도 이제 앞으로 만날 모든 자두에다 기억을 칠해 놨네요.
시네마님 감사합니다^-^

stella.K 2021-07-28 19: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동안 안 보여서 좋은 일 있으신가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했는데 그새 어머니를 보내드렸군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건 슬픈 일이지만 아드님이 갈아 준 자두 주스
마시고 돌아가셨으니 여한은 없으셨을 것 같네요.
그리고 언제나 간단 리뷰를 이렇게 올리고 계신 걸 보면
스요님은 앞으로도 흔들림없이 잘 사실 거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평안히 안식하고 계실 거예요.
지금 어머님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당신이 없어도 꿋꿋하게 잘 시는
스요님의 모습일 겁니다. 힘내십쇼.
저도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syo 2021-07-30 14:04   좋아요 1 | URL
저는 늘 그렇듯, 주변에 계신 많은 분들의 위로와 걱정에 힘입어 씩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엄마는 엄마 있는 데서, 저는 제가 있는 데서 열심히 행복해야지요.

스텔라님 감사합니다^-^

거북이독서 2021-07-2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자녀분들 내려다 보시며 편히 계실거에요
마음 잘 추스르시고,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syo 2021-07-30 14:04   좋아요 0 | URL
거북이독서 님 감사합니다.
힘 내겠습니다^-^

단편선 2021-07-29 0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참 무심한 사람이라, 그 탓에 syo님의 블로그에 찾아와 자주 글을 읽으면서도 댓글 한 번 남길줄을 몰랐네요. 매사 무심한 탓에 울지 않은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울컥해버렸네요. 감히 무슨 마음인지 짐작하진 않으려 합니다. 다만 응원한다고,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있는지도 몰랐던 알라딘 비밀번호까지 찾아서 로그인해버렸습니다. 저 혼자 syo님의 글을 읽다 내적 친밀감을 쌓아버렸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꼭 위로를 전하고 싶은데 서투른 마음과 말주변 때문에 쉽지 않네요. 언제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슬픔은 슬픔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잘 간직하시고 또 syo님만의 방식대로 힘내실거라고 믿겠습니다. 아 참, 늘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syo 2021-07-30 14:06   좋아요 0 | URL
번거롭게 로그인까지 하시게 만들었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게 딱 제 마음입니다. 슬픔은 슬픔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syo는 syo의 방식대로.
제 맘을 들여다보신 것처럼 격려해주셔서 신기했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비종 2021-07-29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아침에 읽고 점심에 또 읽고 저녁에도 읽고. 자기 전에 누워있는 지금도 읽습니다. ‘읽은‘이후에 쓰신 글이 빠른 배경처럼 휙 지나갑니다.
제가 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문장을 쓰고 싶은데 몇 번을 읽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봅니다. 읽을 때마다 눈이 시리고 목구멍이 아파오고 가슴속이 따끔거립니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드리고 싶은데 일렁이는 말들이 꺼내어지지 않네요...그래서....이렇다구요..

syo 2021-07-30 14:07   좋아요 1 | URL
슬픔을 전염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서 죄송스럽기도 하면서,
또 감사하기도 합니다.
따뜻한 말을 고르기 위해 애쓰셨다는 그 말씀이 가장 따뜻한 문장입니다.
고맙습니다^-^

2021-07-29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30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psyche 2021-07-29 14: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머님께서 이제는 고통없는 곳에서 평화를 누리고 계실거에요.
작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때가 생각나서 마음이 더 아프네요. syo 님 힘내세요.

syo 2021-07-30 14: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너무 많은 격려와 염려를 받아서, 하루가 다르게 마음이 회복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독서괭 2021-07-30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syo님 지난 글 읽고 나서 안 보이시기에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제가 휴가내고 육아하느라 서재를 잘 둘러보지 못하는 사이 이 글이 올라온 걸 이제야 알았네요..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실은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으며 syo님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이 책과 어머님의 자두 이야기가 연결되어 떠오를 것 같아요. 이를 악물고 자두 사러 일어났던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하셨던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어머님께서도 아들이 정성스레 갈아준 자두주스를 드실 수 있으셔서 얼마나 마음이 기쁘셨을지…
저는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데, 언젠가 닥쳐올 그 순간에 syo님의 글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고, 힘들어도 건강 잘 챙기시길 빌어요.

syo 2021-08-03 08:41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루하루 기하급수적으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습격하듯 덤벼드는 슬픔이 있겠지만 그것은 그때 문제고 일단 지금은 좋습니다. 많은 서친분들의 격려 덕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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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therapy

 

 

 

이제 남은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비로소 우리를 남을 사람으로 만들었다. 남은 시간에 대해 물었다. 그저 평범한 대답이었다.

 

나는 무엇을 했느냐 하면, 빨래를 했다. 우유를 개수대에 붓고,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내놓고, 빌려 놓은 책을 모조리 반납했다. 현금을 조금 찾아두었다. 기차표를 예매했다 취소했다. 휠체어와 호스피스에 대해 알아보았고 몇 개의 수기를 읽었다. 최대한 웅크린 채로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을 몇 번 내뱉어 보아도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엄마는 아직 모른다. 곧 알게 될 것이다. 통증이 알려줄 것이다.

 

 

 

--- 읽은 ---



242.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

안정희 지음 / 중앙books / 2015

 

한 바닥의 감상, 한 장의 사진, 간혹 한 구절의 소설 인용. 그렇게 두세 가지 구성요소를 세트로 하여 80군데의 여행지에 대해 서술한 책.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 깨달은 것들이 대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정작 '사색''도시'도 부족하여 '좋은'에 도달하기에도 조금 부족한 책 같다. 참 여기저기 다녀 좋겠구나 싶으면서도 이 정도가 엑기스라면 그렇게 다닐 것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여행이란 모든 익숙한 것들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도시에 사는 사람에겐 번지가 중요하지만, 세상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제 글에는 번지 없이 길 위를 떠도는 사람들의 향기가 배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이 향기를 따라 길을 떠날 수 있길 바랍니다. 길 위에 서면 새로운 풍경이 보이고 새로운 길이 열리니까요.

_ 안정희, 사색하기 쉬운 도시에서

 

, 어느 여행책에나 다 있는, 그래서 이 책에도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인, 이제는 전국민의 일반상식인 여행의 효용이 또.

 

 

 


243. 여성, 타자의 은유

김애령 지음 / 그린비 / 2012

 

얼마 안 되는 부피지만, 얼마 안 되는 책은 아니다. 발췌를 위해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거의 책 한 권을 통째로 옮겨적게 생겼다. 선생님의 다음 책은 은유의 도서관이다. 다음 책을 읽고 다시 돌아온다면,

 

주체가 자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주체는 우선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언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를 말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이야기하는 주체의 가능성은 열린다. 주체의 파편화된 시간 경험을 그러모으고, 자기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능력을 통해, 주체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다. 그렇게 주체는 변화와 다름의 계기들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된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이야기 안에서, 오뒷세우스가 모험 중에 만난 수많은 타자들은 언어도 이야기도 갖지 못했다. 단지 주체가 된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오뒷세우스가 전하는 대로 표상된 타자로서만 우리에게 기억될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타자의 모습은 오직 주체가 전하는 대로만 남겨져야 하는가? 타자의 참된 이야기, 대신 이야기된 것이 아닌 타자로부터의 이야기는 어디에 떠돌고 있는가?

_ 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

 

 

 


244. Do it! 파이썬 생활 프로그래밍

김창현 지음 / 이지스퍼블리싱 / 2020

 

쉽긴 한데, 결국 다른 책들을 볼 수밖에 없다.

 

 

 


245. 평등을 넘어 공정으로

박지향 지음 / 김영사 / 2021

 

정치적 관점이야 개인의 것이므로 나와 차이가 있다고 해서 딱히 말을 엮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서술 방식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이 책은 자체적으로 그다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평등을 까고 싶으셨던 거라. '기회의 평등'을 당신이 주장하는 '공정'이라는 가치에 부여한 다음 남은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라며 매도한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완전히 하나하나 모든 걸 다 똑같이 만들자고 말한다고. 그렇게 평등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왜소하게 만든 다음 사망 선고를 내리면서 평등은 자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 공정은 그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건 뭐랄까, 한 명의 온전한 인간에게 갑자기 넌 니가 아니라 너의 왼발이라고 주장한 다음, 이 술집은 인간들에게 술을 파는 곳이지 왼발에게 술을 파는 곳이 아니므로 지금 당장 그 술잔을 내려놓고 가게 바깥으로 꺼지라고 하는 느낌이다.

 

그러고는 '공정'이라는 것을 페어플레이에 비유하시는데 거기서부터는 아, 이 책을 좋게 읽기는 틀렸구나 싶었다. 공정한 사회라는 것은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선수 개개인의 페어플레이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심판의 공정한 경기 운영에 달린 것이다. 페어플레이라는 건 선수들이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 선생님의 공정은 니들이 이런저런 부정과 반칙 저지르지 말고 하라는 것.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정과 정정당당 사이의 미묘하지만 의미 있는 차이를 스리슬쩍 뭉개면서 책임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권력 자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은 무조건 억제해야 한다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는다. 반면 민주주의는 권력이 많고 적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다수에게 있는지 소수에게 있는지에 집중한다. 즉 자유주의는 어떤 권력이든 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권력을 제한하려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권력을 다수가 지니고 있다면 그 권력의 속성이 무엇인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또 다른 차이점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시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라 주장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한다. 이를테면 자유주의는 어떤 인위적인 장애도 없는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해 최고의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이념이다. 한편 민주주의는 과도한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많은 사람과 좋은 이웃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이념이다.

_ 박지향, 평등을 넘어 공정으로

 

이런 대목에 도달하면 후려치기와 이분법적 사고가 동시에 버무려진 책을 읽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 공정/정정당당하지 않은 서술이다. 대놓고 그렇다고는 하지 않지만, 문장의 구도로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립 개념처럼 배치, 주장한다. 그리고 저 극단성. 선생님 당신께서 몸 담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권력을 제한한다는, 그러니까 조정의 여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는 다수가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syo 역시 결과적으로 봤을 때 틀렸다고 해도 될 만한 다수의 결정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다수를 이루는 개개인들이 무언가를 지지할 때는 그 속성이 무엇인지 따져본 다음 이해득실과 도덕정의관념을 저울질 혹은 버무려가며 선택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삭제하고, 그냥 커다란 덩어리로서의 다수의 결정에 대해 나이브하게 서술하신 것.

 

사실 이런 후려치기는 자유주의의 속성에 대한 서술에도 있다. 자유주의는 어떤권력이든 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권력을 제한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자유주의자들이 과연 자신의 권력도 제한하려 할까? 그들이 그렇게 알아서 착착 자기 권력을 제한할 줄 알았다면, 국가가 독점금지법 같은 걸 들고 나와서 그들의 권력을 제한할 일도 없었겠지. 그쪽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면서요. 누군가 나와 자기 권력을 제한하려 시도하는 순간 그 시도야말로 권력이라고 말하며 제한하려 들기는 하겠지만, 자기 권력이란 뭐 아무리 모으고 모아도 무한히 부족해서 우주의 끝날까지도 영원히 부족한 상태겠지요.

 

 



246. 처음부터 물리가 이렇게 쉬웠다면

사마키 다케오 지음 / 신희원 옮김 / 강남화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21

 

중학교 수준. 여기도 고양이가 등장한다. 쉬운 수학/과학책에는 고양이. 이거슨 일본국의 풍조인가?

 

 

 

--- 읽는 ---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젠더 트러블 / 주디스 버틀러

나의 첫 머신러닝/딥러닝 / 허민석

이 짧은 시간 동안 / 정호승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사조영웅전 1 / 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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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7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7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7-07 13: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누군지 주어는 생략하고) 역사 다루신 저 교수님, 저희 어머니가 돌보던 아기 사는 집 가사도우미님이 저분 집에도 다니셨는데 엄청 넓은 집 핸디형 충전 청소기만 건네고(그러니까 물걸레질 무릎꿇고 치라고) 여하간에 노동자에게 가혹한 분으로 들었답니다….더 할말은 줄임 ㅋㅋㅋㅋ

syo 2021-07-07 13:42   좋아요 4 | URL
굉장히 정합적입니다...... 끄덕하게 되어버리는군요.

독서괭 2021-07-07 13:4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속시원하게 까주시네요. 이런 리뷰 넘 좋습니다.
syo님, 감히 위로를 건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위로를 건넵니다...

syo 2021-07-07 13:5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되어가는 정황이 어쩌면.... 싶었던게 오래인지라 세상 무너지는 충격은 아니었지만.....

난티나무 2021-07-07 14:15   좋아요 3 | URL
저도요…syo님

페넬로페 2021-07-07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내내 어머니의 소식이 궁금했어요
누군가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힘내라는 말도 너무 힘든 사람에겐 힘든 말이라고요.
다시 곰곰 생각했어요
그럼 어떤 말을 해야할까?
그래도 전 그냥 힘내라고 하고 싶어요
힘 낼 수 있는 사람이 힘을 내야만 하니까요~~
또 힘들어도 힘을 내면 어느 순간에 신기하게도 힘이 나더라고요^^

syo 2021-07-07 17:39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허허허허.
조금씩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겠지요.
힘 내라는 말씀 감사합니다. 힘 내야죠 ㅎㅎ

붕붕툐툐 2021-07-07 14: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한 번은 누구나 다 경험해야할텐데.. 그럼에도 언제나 이런 상황은 놀랍고 두렵네요. 더 많이 함께하시길 매 순간이 찬란하시길..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을 위로랍시고 전합니다.

syo 2021-07-07 17:40   좋아요 1 | URL
후회거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해나가야겠다 싶어요.
툐툐님 감사합니다^-^

수이 2021-07-07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힘내 라고 하면 뻔한 소리인데 뻔한 소리밖에 할 게 없네. 힘내 친구야

syo 2021-07-07 17:4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아직까지는 괜찮으니, 꾸준히 괜찮을 수 있게 엄마가 천천히 안 아프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scott 2021-07-07 16: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쇼님 힘내세요
저도 오늘 부모님 모시고 병원 다녀왔지만
희망과 긍정의 힘으로!
이말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syo 2021-07-07 17:4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사실 뭐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태긴 한데.... 정신 바짝 차려야겠지요.

2021-07-18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벽독서


 

 

흐릿하게 비에 이긴 빛이 유리를 넘지 못하고 다만 두드린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아서 비로소 모든 소리가 들리는 시간, 더벅머리 남자가 아직 책 앞에 앉아 있다. 묵독한다. 묵독에 특히 잘 녹는 새벽이 있다. 남자가 새벽을 녹인 활자를 들이켠다. 중력이 없는 활자는 마실수록 가벼워져서, 남자의 질량은 한없이 새벽으로 수렴해간다. 빗줄기가 식히는 것은 이 세상의 밑창. 낙하하는 것들의 착하고 꾸준한 음성이 거들면 읽기는 한결 수월하다. 왜일까.

 

수십억 년 전, 끓어 요동하는 지구를 식힌 많은 물들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있어 천천히 굳는 지구를 차근차근 읽으며 바다와 대륙을 짚어 최초의 이름을 말해 보았을 것이다. 아직 우주는 새벽,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을 달리는 광자들이 빛의 속도로 그 소식을 전한다. 어느 은하 어느 항성의 작은 행성에 최초의 활자가 태어났대, 동시에 최초의 독자가 태어났대, 그래서 최초의 독서가 있었대, 우리는 기록한다, 우리는 전한다, 아직 우주는 새벽, 최초의 독서는 새벽에 있었어, 이제부터 무한대의 새벽이 올 것이고, 더 큰 무한대의 독서가 올 거야, 독서하는 이들이 어느 새벽에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거야,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새벽에 깨어 읽어야 해, 새벽에 읽어야 해, 새벽은 읽기 좋은 시간이야.

 

새벽은 읽기 위해 태어났어.

 



책을 읽으면 삶이 나아질까. 여기에는 "꽤 그럴 것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삶에 있어서 '농도''밀도'는 중요한데, 내 경우 그 밀도를 책을 읽거나 쓴 사람들과의 만남, 혹은 책을 둘러싼 수많은 내용을 통해 채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책 한 가지만 이야기하며 마치 책 바깥의 삶은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싫어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책이 바로 그런 세계다.

_ 이은혜, 읽는 직업

 

책 읽기는 물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강을 건널 때는 온몸이 젖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개천을 건널 때는 물방을 튀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깊은 강을 건너다가는 몹시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작은 개울이라도 물이 불었을 때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어느 물가를 건너더라도 온몸이 다 젖을 것이다.

_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독서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이 장대하고 가능할 성싶지 않은 독서 계획이 우리 앞에 줄지어 있는 한, 우리는 숨을 거둘 수 없다. 나는 아직 빌레트를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에게 나중에 다시 오라 전하라. 거기에는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나 믿노니, 이것이 책이 인류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모든 생은, 최고의 생조차도, 끝은 슬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우리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영원히 멈춰버린다. 책은 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제인은 로체스터와 결혼할 것이다. 엘리자는 사악한 노예주 사이먼을 저지할 것이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이겨낼 것이다. 핍은 에스텔라의 짝이 될 것이다. 악한 이는 나가 떨어지고 정의로운 이는 번창하리라. 우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책들이 있는 한, 아직은 배를 돌려 안전한 항구를 찾을 기회가 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그저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_ 조 퀴넌,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읽은 ---


238. 사람의 씨앗

전호근 지음 / 메멘토 / 2021


슬픈 것들은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워서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아름답지 않아서 아름답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운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쓸데없이 밝은 아이였다. 세상이 꽤 밝았다. 모든 것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름다웠으므로, 모든 것을 가지고 시를 쓸 수 있었다. 시라는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누구나 사랑할 수 있었고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었고 많이 썼다. 사람들을 울렸고 사람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이제 슬픈 것들은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이 뭔지 내게 알려준 것들을 적잖이 만났다. 더이상 시를 쓰지 않고, 못 읽는 책이 늘었다. 돈은 벌지 않는다. 그래서 적게 쓴다. 울리지 않고 울지 않는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모든 것이 아름답던 시절의 내 잔해가 고개를 든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 잊을 수 없는 것, 버릴 수 없는 것으로 내 안에 심어놓은 씨앗 같다. 사람의 씨앗을 심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만난 슬픔들,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은 것들, 시들, 사람들, 울린 사람과 울리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씨앗이 되는 시기. 그리고 책. 가장 값싸고, 그런데도 가치가 크고, 그런데도 사랑받지 못하는 우리의 씨앗.

 

읽어야 할 책은 언제 읽어도 좋지만 어떤 시기에 읽으면 더욱 좋다. 인간의 인생 모든 국면에서 동등한 크기의 가치를 가지지는 않지만, 특정 시기에 읽기에는 좋은, 가치의 그래프가 어느 지점에서 송곳처럼 솟아오르는 책들이 있다.

 

사람의 씨앗을 심으면 사람이 난다. 사람이 뭘까. 세상에 여러 씨앗이 있을 건데, 그중 어떤 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싹틔우는 씨앗일까. 전호근 선생님은 동양철학자다.

 

리뷰를 쓸까 하다가 그만한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아서 토막글을 써갈겼더니 아, 엉망진창이다.

 

내가 몇 달 동안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한 번씩 보았는데 마치 바늘이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았고 잠이 확 꺠는 것 같았다.”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글의 한 구절인데, 그가 선현의 글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가 활동했던 때는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화와 당쟁이 격화되어 탁류가 도도히 흐르는 암흑의 시대였다. 하지만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그는 그토록 어두운 시대에 자신을 수양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에 드러났다.

  책을 읽다가 바늘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아직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이다.

_ 전호근, 사람의 씨앗

 

 

 


239. 오후의 글쓰기

이은경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

 

놀리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지합니다. 글솜씨를 타고나지 않은 우리는 매우 여유롭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점점 더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이를 악물고 쓰거나 잘 써야겠다고 불타오르는 만큼 잘 쓸 수 있다면 주먹을 힘껏 쥐어야 마땅하겠지만 글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최대한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쏟아 성실하게 뚜벅뚜벅 다가가야 해요.

  잘 쓰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잘 쓰고 못 쓰고에 신경 쓰지 마세요. 잘 쓰려고 노력하는 순간 힘이 들어가고, 며칠 못 가 그만두게 됩니다. 무언가를 글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에 뿌듯함을 느끼세요. 완성한 글을 꼼꼼히 다시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아 하거나 가까운 누군가에게 보여줘 괜한 핀잔과 지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오늘도 다짐대로 쓰긴 썼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 칭찬하세요. 그래야 잘 쓸 수 있어요. 잘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 매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빠른 길이에요.

_ 이은경, 오후의 글쓰기

 

컴퓨터라면 286이라는 물건부터 쓰기 시작헀으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지낸 세월이 30년을 거진 다 채웠다. 그렇게 오래 치면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분당 800타는 두드리게 된다. 1초에 키 13개 이상을 누른다는 뜻이니까, 초당 4글자 정도를 만드는 속도다. 그렇다면 1분에 240, 10분이면 2,400, 한 시간이면 14,400자를 찍어낼 수 있다. 에누리해서 14,000자를 생산한다 쳐도, 200자 원고지 70장이다. 오타 고치고 뭐 어쩌고 해서 대략 20% 날린다고 봐도 55장이다. 하지만 시간당 55장 속도로 글자를 찍는 syo, 실제로 한 시간 동안 만들어내는 글은 15장이 채 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효율.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는 한 문장이 나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처음에 그건 한 문장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건/그건에서 그건을 골랐고, ‘그것은/그건에서 다시 그건을 골랐고, ‘그건뒤에 쉼표를 찍을까 말까를 고민하다 찍지 않았다, ‘한 문장에/문장에서에서 한 문장에를 골랐다가 이내 문장마다로 아예 고쳤다. ‘문장마다앞에 내가를 넣어서 그건 내가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보니 그건을 빼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니 내가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치웠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뒤에 있는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를 고쳐 생각해 볼 힘이 고갈되었다. 따라서 저 한 문장은 최종적으로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로 결정되었다. 만약 앞 문단과 저 문장 사이에 한 줄의 공백을 넣지 않았다면, ‘문장마다앞에 접속사 하나를 넣기로 결정했을 거고, 그걸 위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접속사들을 뒤져 하나씩 넣어보고 입말로 발음도 해봤을 것이다.

 

모든 문장이 이런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장이 저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글이 느리다.

 

syo는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둔재에 가깝다. 다 만들어진 문장의 나열을 관람하는 분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우선 나는 한 문장을 써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기 때문에 천재가 아니다. 그리고 문장마다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껏 애를 써서 만들어 낸 문장들도 대체로 평범함의 범주에 갇힌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 없는 둔재다. 그리하여 매일 쓰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럼에도 이은경 선생님의 말씀은 따를 수가 없겠다. 그럴 마음도 없다. 나는 저렇게는 글솜씨를 키울 수가 없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 글쓰기 태도에 대한 책은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울 게 없어서가 아니라 배울 수 있는 게 없어서.

 

 

 


240. 모두의 데이터분석 with 파이썬

송석리, 이현아 지음 / 길벗 / 2019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라고 세 번째 쓰고 있는데, 이제 조금씩 뭔가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241. 마르크스의 자본론읽기

최형익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

 

상품, 화폐, 시초축적, 임금노동, 잉여가치, 자본의 유기적 구성,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 최형익 선생님은 여러 개념들 중 이 일곱 가지를 자본론을 관통하는 동시에 초심자가 알아둘 만한 것들로 생각하시는 듯하다. 보시다시피 세창출판사의 이 읽기시리즈는 작은 판형의 소책자라서, 소책자의 기능만 한다. 지나가야 한다. 지나가려고 읽는 책이다.

 

 

 

--- 읽는 ---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여성, 타자의 은유 / 김애령

Do it! 파이썬 생활 프로그래밍 / 김창현

젠더 트러블 / 주디스 버틀러

마르크스 캐피탈 리딩 인트로 / 에르네스트 만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데이터 분석을 떠받치는 수학 / 손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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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7-05 0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전 왠지 syo님은 문득 영감이 오면 슈루룩 써내려가는 스타일일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면 이 독서량과 쓰기량이 설명이 안 된다..) 한땀한땀 수놓는 노력파였군요. 저도 문장마다 더 공들여 읽겠습니다.

syo 2021-07-05 17:20   좋아요 3 | URL
딱히 더 공들여 읽으실 필요까지요 ㅎㅎㅎㅎ
공을 들이고 말고가 아니라 퀄리티가 문제인 것이지요.....

유부만두 2021-07-05 05: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읽어야 예의일 것 같아서, 이른 아침에, 두 번 읽었습니다. (전호근 저자의 책 담아가고요)

syo 2021-07-05 17:37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ㅎ 아닙니다. 스크롤 휙휙 내리면서 드르륵 읽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 동방예의지국..

그렇게혜윰 2021-07-05 13: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도 시절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syo 2021-07-05 17:38   좋아요 4 | URL
그러게요. 좋은 때 좋은 책 만나는 것 정말 좋은 일이지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5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도 자본론을 읽는 사람이 있군요. 마르크스는 불멸?? ㅋ
글구요, syo님 책 제목 낳으셨네. <새벽은 읽기 위해 태어났어> 가즈아~~~~^^

syo 2021-07-07 11:0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마르크스 관련된 책은 아직도 꾸준히 나온답니다.
수염쟁이 맑선성님은 개론서나 연구서 같은 게 가장 활발히 나오고 있는 철학자 중 한명이지요.

scott 2021-08-06 15: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요님 이달의 당선 추카!!

소요님 새벽 독서 책들 모조리 장바구니 속으로~@@

syo 2021-08-08 12: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6: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syo 2021-08-08 12:22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 님도 축하합니다^-^

새파랑 2021-08-06 16: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표본! Syo님 완전 축하드려요^^

syo 2021-08-08 12:22   좋아요 1 | URL
페이퍼와 리뷰 둘 다의 표본 새파랑님도 축하합니다ㅎㅎㅎ

독서괭 2021-08-06 17: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축하드려요^^

syo 2021-08-08 12:2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늘 고맙습니다 독서괭님^-^

초란공 2021-08-06 17: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축하드립니다~ 이과도 문과도 적성이 안맞아라고... 당황한 저는 그냥 책을 안읽어서 어디 끼어넣을 데가 없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어요 ㅋㅋㅋ 그래서 책을 읽어보자 했는데 이제 노안이와서 ㅋㅋㅋ 문과와 이과 어디에도 안맞는 생으로 만족해야 할까봐요... 이제 syo님께 물어봐야겠네요. 대개 두 가지 질문이겠네요. 그 책 야합니까? 아니면 활자 큰가요? ㅋㅋ

syo 2021-08-08 12:25   좋아요 0 | URL
이과와 문과의 범주를 초월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초란공 님께서 하신 질문이 어떤 책에 대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초란공 2021-08-08 12:49   좋아요 0 | URL
아^^ 책소개를 많이 해주셔서 syo님께 물어보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ㅋ

초딩 2021-08-06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이달의 당선 페이퍼 축하드립니다~

syo 2021-08-08 12:25   좋아요 1 | URL
아유 초딩님도 축하드립니다.
축하 분위기 영 어색하네요 ㅎㅎㅎ

초딩 2021-08-08 20:05   좋아요 0 | URL
어색해야 새롭지 않겠습니까 ㅋㅋ

이하라 2021-08-06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syo 2021-08-08 12: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서니데이 2021-08-0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syo 2021-08-08 12:26   좋아요 1 | URL
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ㅎㅎㅎ

황후화 2021-08-06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

syo 2021-08-08 12:26   좋아요 2 | URL
아유 ㅎㅎㅎㅎ 감사해요 황후화 님^-^
 

 

리슨 투 더 파프리카

 

 

 

꿈을 꾼 건 오랜만이다.

 

꿈속의 나는 아는 사람 조금과 함께 모르는 사람 다수가 떠드는 공간에서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말을 참 잘했는데, 그건 그들에게 그런 것들을 말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꿈속의 나는 알 수 있었다. 단단한 성격의 A는 단호하게 말하지만 그 단단함과 단호함은 모두 무르고 들큼한 상처를 오래 눌러서 만들어 낸 것이지. 저토록 차분하게 말하는 B는 그 기적 같은 공감 능력으로 다른 마음을 넘나들며 얼마나 큰 파도들을 제 안에 눅여 왔을까. 도무지 실수하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C는 한 권을 읽어도 그 책의 모든 문장이 제 문장이 될 때까지 좌초하지 않고 되풀어 읽는다던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면 티끌만 한 누락도 보아 넘기지 않는 D의 촘촘한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 그럼 다음은 내 차롄데…….

 

머쓱한 표정으로(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을 열었을 때,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파프리카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란 파프리카였다. 바닥을 구르는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할 수 있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사람들은 태연하고도 다정한 눈빛으로 내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지 파프리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린 파프리카였다. 그것이 여름날 마법의 콩나무 줄기처럼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손짓 발짓을 동원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파프리카를 뱉는 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파프리카는 물에서 나오는 물고기처럼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표정을 하고 간혹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내 파프리카를 들었다. 할 수 있는 말을 겨우 찾았는데 그 모든 말이 고작 파프리카가 되고 보니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입을 닫았다. 이제 다시 이 입을 열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할 텐데, 그게 다른 무엇일 수는 있어도 파프리카일 수는 없을 텐데, 그럼에도 파프리카라면 이번에는 정말 슬플 텐데, 빨간 파프리카라 해도 참을 수 없이 외로울 텐데. 공간은 괴괴하고 내 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떨림이 없었다. 쏟아진 노랗고 파란 파프리카들은 자기들끼리 줄을 맞추더니 소리도 없이 계단 아래로 제 몸을 굴려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할 수 있는 말들과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늦은 장마가 온다고 해서,”

 


 

 

이처럼 아끼며 간직했던 많은 것을 내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이 해변에서 손가락으로 그려준 상자 안에 세상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나는 문 앞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밤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_ 김이듬,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매일 밤 꿈에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크고 굉장하며 아름다운 조각들을 봐요.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너무나 선명해요. 제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데, 꿈은 점점 자라나요. 마치 그것들이 제게 <만들어 줘, 보여 줘, 존재하고 싶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단 하나도 못 만들까 봐 두려워요.

_ 스콧 맥클라우드, 조각가

 

방으로 돌아가서는 이불로 배를 덮고 누웠다. 오후가 되어서 무더웠는데도 발가락이 싸늘했다. 발을 북쪽에 두고 누웠기 때문인가 싶어서 발을 동쪽으로 머리를 서쪽으로 조금 움직여 두었다. 그렇게 누운 방향이 익숙하지 않아 다시 움직였다가 또다시 움직였다. 움직이길 계속하다 보니 본래 누웠던 방향으로 돌아와서도 어딘가 익숙지 않았다. 나침반의 바늘처럼 허리 부근에서 몸이 들린 채로 부들부들 흔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핏 잠들었다가 깼다가 하면서 두서없이 이것저것을 생각했다.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 읽은 ---



233.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야하기 나오키 지음 / 이정은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

 

의사들은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면 이렇게 문진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야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병원을 찾은 환자 자신이 치료의 답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이런 일이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습니다. 나 혼자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상황과 필요를 먼저 물어보는 태도 말입니다.

  상대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일단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환자가 그렇듯이 그 사람이 스스로 문제 해결의 답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갈등은 남에게 상처를 주어 고통스럽게 하면 반드시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인정하면 그것이 나에게 그대로 돌아오고, 내가 남을 배척하면 그 또한 나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_ 야하기 나오키,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런 뻔하디 뻔한 이야기만 잔뜩 쓰여있는 책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 모르는 이야기 좀 해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요런 식상한 이야기들 말고.

 

 

 


234. 상표전쟁

신무연 외 지음 / 이담북스 / 2020

 

갑자기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왜 든 것일까? 허허허. 좋은 책인지 아닌지 판단할 역량도 관심도 없어서 이번 독서는 이러구러 망한 것이다…….

 

 

 


235. 1년 만에 교포로 오해받은 김아란의 영어 정복기

김아란 지음 / 시대인 / 2019

 

Q4.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A. 슬럼프라는 건 없었습니다.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헤엄쳐 나와야 하는 사람에게 슬럼프에 빠질 여유가 있을까요? 저는 물에 빠져 헤엄쳐 나와야 하는 사람처럼,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하고 강렬했습니다. 세상에 제가 보고 싶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제가 영어를 잘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슬럼프에 빠질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슬럼프는 사치입니다. 나약한 의지와 귀찮은 감정에 대한 구실 좋은 핑계일 뿐입니다. 슬럼프가 왔다고 느낀다면, 애초에 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지 그 목적을 생각하세요.

_ 김아란, 1년 만에 교포로 오해받은 김아란의 영어 정복기

 

대단히 노력해서 대단한 성과를 만든 대단한 사람이 쓴 대단한 책. 맨날 슬럼프니 뭐니 징징거리기 바쁜 syo는 얻어터지는 심정으로 일독함. 인용한 부분이 하필 이래서, 많이 비판받는 자기계발 담론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체로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 그리고 선한 영향력을 퍼트리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말하더라. 선한 영향력. 세상에 변화를. 훌륭하고 멋진 말들이지만 그래서 때로 무섭다. 슬럼프는 사치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하는 호통과 섞이면 더욱 무섭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슬럼프 경험이 없었다는 사람이 슬럼프는 사치고 의지박약이라는 말을 저렇게 단호하게 해도 되는 걸까?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이 겪은, 자신은 겪어보지 않은 경험에 대해서도 단정할 자격이 생기는 걸까? 나는 아직 뭔가를 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236. 처음 회계

편도선 지음 / 좋은땅 / 2019

 

이 책의 특징은 후반에 세법 관련 내용이 몇 쪽 있다는 것. 친구와 함께 떡볶이집을 운영하기로 한 청년이 회계학 교수인 엄마의 도움을 받아 영업에 필요한 이런저런 회계 지식을 익힌다는 컨셉이다. 주인공이 사업자다보니 세무관련 지식도 조금은 필요하다고 본 듯. 그 부분은 외삼촌이 맡는다. 든든한 집안. 회계 분야는 처음’ ‘’ ‘처음이지?’ 유형의 책들이 꽤 많다. 다들 어슷비슷해서, 이제는 그냥 본격 회계원리 교재를 한 권 파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다.

 

 

 


237. 나의 첫 파이썬

에릭 마테스 지음 / 한선용 옮김 / 한빛미디어 / 2020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 읽는 ---


사람의 씨앗 / 전호근

AI 최강의 수업 / 김진형

오후의 글쓰기 / 이은경

모두의 데이터 분석 with 파이썬 / 송석리, 이현아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여성, 타자의 은유 / 김애령

이 짧은 시간 동안 / 정호승

살인자의 건강법 / 아멜리 노통브

데이터 분석을 떠받치는 수학 / 손민규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마르크스의 자본론읽기 / 최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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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7-03 16: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파프리카는 아주 비싼 환금성 작물입니다. syo님은 입만 여세요. 제가 다 팔아 올게요. 안 팔린 건 내가 다 먹는다…아삭바삭와삭

syo 2021-07-03 17:07   좋아요 3 | URL
입 벌리면 나방 나오는 사오정 된 기분이었습니다. 파프리카아아아아아아아~

반유행열반인 2021-07-03 17:24   좋아요 3 | URL
손형 왜 우리엄마 욕해써어? 뭐 이런 캐릭터가 생각났어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7-03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입이 얼마나 커야 파프리카가 나올수 있는건가요? ㅎㅎ 이래서 장마가 무섭나 봅니다~~!!

syo 2021-07-05 01: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뭐지? 별로 재미없는 것 같은데 갑작스런 현웃 ㅋㅋㅋㅋㅋㅋ
파랑님 뭔가 설명하기 굉장히 미묘한 농담 센스를 지니셨네요? 매력있음 ㅎㅎ 😀

붕붕툐툐 2021-07-03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쇼님~ 말 몇마디만 해주십쇼~ 파프리카 먹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빨간 파프리카가 좋은데.. 그럼 욕을 하셔야 하나?ㅎㅎ

syo 2021-07-05 01:51   좋아요 1 | URL
🤬🤬🤬🤬🤬🤬🤬🤬🤬
잔뜩 드렸습니다.

난티나무 2021-07-03 2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꿈도 기똥차게 멋지게 꾸시는 syo님.^^
여성, 타자의 은유 덥석 집어갑니다.

syo 2021-07-05 01:51   좋아요 1 | URL
좋은 책입니다.
데리다 이야기에서는 살짝 어렵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재미있는 책이었어요^-^

2021-07-04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5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5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5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족

 

 

 

엄마는 큰 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생은 세 가족 사는 집에 큰 솥은 둬서 어디 쓸 거냐고 말했다

나는 이 말들을 적어 시를 쓸 거라고 말했다

 

 

 

--- 읽은 ---



225.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수전 티베르기앵 지음 / 김성훈 옮김 / 책세상 / 2016

 

글쓰기 책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읽어도 읽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글쓰기라는 영역이 글쓰기 책 열 권 정도 읽는다고 알 수 있는 만만한 영역이면 이만한 양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을 것인데.

 

요즘은 글 쓰는 책보다 글 쓰는 삶에 대한 책에 더 관심이 가는데, 글 쓰는 책을 써놓고 글 쓰는 삶에 대한 책인양 제목을 달아놓은 책들에 자꾸 낚인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그게 그거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찾는 글 쓰는 삶이라는 건 글 쓰는 이지 글 쓰는 방법이 아니다. 또한, ‘글 쓰는삶이라는 건 작가로서의삶도 아니다. 나도 가끔은 내가 뭘 찾고 있는지 헷갈리긴 한다.

 

로마 신화에서 헤스티아는 베스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로마의 고대 광장 포럼에 자신의 사원을 갖고 있었다. 로마와 모든 로마인의 상징적 화로인 그 원형의 사원 안에서는 영원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 불꽃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헤스티아는 중심성과 전체성의 원형이다. 그녀의 상징은 원이다. 헤스티아를 찬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체성과 우주의 전체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일기를 쓰거나, 낮 시간에 단편소설이나 에세이, 또는 긴 픽션이나 논픽션 등 글쓰기 작업을 하는 것은 곧 자신의 화로를 돌보며 그 잉걸불을 세상의 화로로 가져가는 행위다. 당신의 글은 개인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_ 수전 티베르기앵, 글쓰는 삶을 위한 일 년

 

 

 


226.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제이컵 솔 지/ 정해영 옮김 / 메멘토 / 2016

 

 

회계에 관심이 없는 독자가 읽으면 다소 따분한 느낌이 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로 봐도 훌륭하다. 역사적 사건 자체보다 그 배후에서 사건을 추동하는 에너지들을 설명하는 근래 흥미로운 역사서들의 옆에 나란히, 아니 맨 앞줄에 설 수도 있겠다. 푸거 가의 축재와 그를 둘러싼 역사적 정황에 대해 그려놓은 그레그 스타인메츠의 자본가의 탄생과 느낌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푸거는 죽었지만 회계는 영원하다는 점에서 이 책이 좀 더 낫지 않을까. 그러니까 인간은 재현될 수 없고 된다고 해도 내가 그 인간이 될 수는 없는 반면, 비인간 동력은 지금도 역사에 작용하고 있으므로 오늘날 읽기에 훨씬 도움이 된다. 그런 효용을 차치하고서라도, 좋은 책 맞다. 저자의 다른 책도 번역되어 들어오면 좋겠다.

 

자본주의와 정부는 재무적 책임성이 제대로 기능하는, 드물고 제한된 기간에만 큰 위기 없이 번영을 누린 듯하다. 사람들은 거의 천 년 동안 건전한 회계를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많은 금융 기관과 금융 제도는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성공적인 사회는 회계와 상거래 문화가 풍부한 사회일 뿐 아니라, 회계를 무시하고 날조하고 등한시하는 인간의 습성에 대처하기 위해 견고한 도덕적 · 문화적 틀을 구축하는 데 노력해온 사회다.

_ 제이컵 솔,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하는가

 

 



227.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성일권 지음 / 르몽드코리아 / 2020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정치적 글쓰기의 위대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이후, 정치적 글쓰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때로 그런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나 부채감을 지니는 반면, 정치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글이 설령 미학적이거나 역사적이지 못하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글이 사실은 정치적 글임을 오웰도 (당연히) 알았을 것이나 선명하게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웰의 경지까지 (당연히) 도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글과 비정치적 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글은 정치적이다. 그러나 어떤 글은 더욱 정치적이다.”와 같은 생각 방식을 택한다. 그런 방식으로서의 정치적 글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런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 제자리에서 각자의 정치를 하고, 각자의 글로 그것에 대해 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정치 말고 정말 그 정치정치에 대한 글이 불필요한 것도 아니고, 경원시하는 대상이 되는 것도 옳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정치하는 사람들도 사전적 의미로서 정치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에 대한 글을 읽고 배우고 토론하고 반박하고 재구성하는 일들을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니까.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는 카페 없는 소사이어티만큼이나 슬플 수 있다.

 

불행한 과거의 단절은 과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과거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과거가 없는 사람이란 뿌리를 상실한 사람이며, 그는 언제든 현재에서 자아를 상실할 수 있다. 기억 없이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으며, 사회적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존재일 뿐이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의 차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의 잔혹한 광경을 생각할 때 어떻게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죽은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을 망각해버리는 것은 두 번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할 의무는 하나의 명령어처럼 다가온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공동의 미래를 준비하는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_ 성일권, 소사이어티 없는 카페

 

 

 


228. 게 배우는 통계학

구로세 나오코 지음 / 이강덕, 김선숙 옮김 / 성안당 / 2020

 

통계학 책 표지에 웬 고양이냐 싶겠지만 무려 서술자가 고양이다. 쉽긴 한데, 읽다 보면 이게 통계책인지 고양이 책인지 고양이에 관한 통계 책인지 아리까리해진다. 일단 귀여우면 장땡이긴 한데 그건 syo의 사정이지…….


귀엽긴 겁나 귀엽다 🤣🤣

 

 

 


229.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김범준 지/ 21세기북스 / 2021

 

물리는 아름답다. 이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하고 싶다. 그러지 못하는 건 그저 syo가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에 얻어맞고, , 이게 진짜 아름다운 거였구나-라는 글자를 내 뼈에 새겨 놓은 것이 둘 있는데, 하나는 수학-물리 연속체고 나머지 하나는 언어-문학 복합체다. 둘 중 어느 하나에만 능숙했어도 나는 아름다움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이런 아쉬움은 문장을 갖춘 물리학자와 물리학을 갖춘 문장가를 찾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많다. 분명 10여년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그 두 영역은 화해 불가능하며 아주 가끔 기이할 정도로 특출난 사람이 있어 두 영역을 아우르며 존재감을 뽐내는 정도었다. 그런데 군대 가고 백수 생활 잠깐(잠깐이라고?) 하는 동안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요즘은 아름다운 과학을 아름답게 쓰는 사람이 정말 많다. 뭐랄까, 이런 건 이기기 어렵지 않나 싶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은 종종 아름답지 못한 것들(인간 같은 것들)에 대해 쓰면서도 아름다움을 빚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원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쓴다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

 

우주의 티끌이 만들어낸 티끌 같은 존재인 인간이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본다. 반짝이는 별로 가득한 밤하늘은 정말 아름답다. 우리 인간이 탄생한 고향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 모두는 그리움을 느낀다. 밤하늘 아름다움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鄕愁. 시간이 흘러 티끌처럼 사소한 인간의 이성이 모여 과학이 되었다. 티끌로 이루어진 티끌 같은 인간이 티끌 같은 이성으로 자신이 이 거대한 우주에서 어떤 티끌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빅뱅에서 탄생한 물질이 모인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 138억 년의 긴 여정이 필요했다.

_ 김범준,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230. 7일 공부

스즈키 히데아키 지음 / 안혜은 옮김 / 전효진 감수 / 21세기북스 / 2018

 

“7일이면 모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알아서 “7일이면 (7일 만에 합격할 수 있는) 모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라고 읽어주는 정도의 여유가 있어도 좋겠다. 어차피 물리적으로 안 되는 거 있는 법.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남은 시간을 다 쏟아부어서 그냥 주교재 한 번씩 독서하는 데만 7일이 걸리는 그런 시험을 이 책으로 이길 수 없는 건 당연지사. 알아서 유두리있게 읽으면 하하호호 재미있군 할 정도는 된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을 가지고 1년에 자격증 50개씩은 딴다고 한다. 1년이 52주가 아니라 100주였으면 100개 땄을 거라는 식이다.

 

 

 


231.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야마구치 슈 지음 /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 / 2019

 

사회의 특정 조직 내부에 천재와 재인의 밀도를 어느 정도로 유지할 수 있는가, 즉 이것은 엔트로피의 문제이다.

  엔트로피라는 열역학 상의 개념을 조직에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자연계의법칙과 메커니즘이 대부분 사회와 조직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대자연의 법칙으로써 열적 손실이라는 불가역적이고 일방적인 진행 과정이 있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다양한 시스템과 조직에서도 같은 법칙이 적용될 것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많아진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 무질서를 낳는다. 이에 대해 인간의 몸이 동적 평형을 이루며 적응해 가듯이 기업 조직도 엔트로피 증가에 대항하며 생명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에게는 유한한 수명이 전제되지만 기업 조직의 수명은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기업 조직은 이 지속성을 긍정적인 요소로써 추구하고 있다.

_ 야마구치 슈, 쇠퇴하는 아저씨 사회의 처방전

 

자꾸 철학이나 과학의 개념들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자기계발 영역에 비비는 버릇. 야마구치 슈나 오가와 히토시 같은 사람들은 이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syo 보기에 이미 늦었다. 이건 버릇 수준을 넘어서 거의 정체성이라고 봐야 한다.

 

자연계의 법칙과 메커니즘이 대부분 사회와 조직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엔트로피 개념을 조직에 적용하는 근거라고 든 이 문장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증명해야 할 것 투성이라서 지금 다른 주장의 근거 역할을 해줄 처지가 못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은 달리 말하자면, “, 엔트로피는 대자연의 법칙인데 우리가 만들어낸 것도 어차피 대자연의 일부 아니냐?”인데, 이런 식이면 참 할 말이 없다. 심지어 마지막 문단과 모순된다. 기업은 무한하다고? 이 대자연에 무한한 게 있단 말인가!

 

열린 계에서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있다. 방문을 닫아 놓은 방에 세 살짜리 아들내미를 넣어놓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방은 한없이 무질서해지겠지만, 아빠가 주기적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정리를 하고 나오면 질서가 회복된다. 그러니까 저 문장은, 조직을 어떤 계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특정 관점, 조직 내의 인간 역량을 다른 무엇도 아닌 계의 에너지 상태에 빗대겠다는 저자의 선택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쓸모 있는 비유다. 그러니까 이 문장들은 정확히 말하면 엔트로피의 법칙이 조직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저자가 자기 주장의 틀에다 끼워 맞추기 위해 자연법칙의 많은 요소들을 쳐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법칙이라고 불리는 과학 개념은 그 자체가 해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저 사실만을 지시한다. 그 법칙을 말로, 글로 표현할 때부터 인간의 해석이 개입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긴 하다. 그 해석 개입의 의도적이면서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려고 과학 개념을 임의차용하는 방식이다. 나쁜 일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무책임해지기 쉬운 일이다.

 

 

 


232. 이토록 쉬운 딥러닝을 위한 기초수학 with 파이썬

마스이 도시카츠 지음 / 이중민 옮김 / 루비페이퍼 / 2019

 

소멸한 지 벌써 10년도 더 된 공대생 야성을 회복하고자 최근 코딩 책을 좀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책이 뭐 어떻다 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는 책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대사를 복붙할 예정입니다.

 

 

 

--- 읽는 ---


상표전쟁 / 신무연 외

아무도 아닌 / 황정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연습 / 야하기 나오키

체지방 / 츠치다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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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6-29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회계, 그러니까 복식부기도 물리 만큼 아름답습니다.
물리는 대학 가려고 열심히 해서 일찌감치 아름답다는 걸 안 반면에,
복식부기는 회사 다니면서 먹고 살기 위해 저절로 배웠는데 그게, 아이고 깜짝이야! 놀랍더라고요.

syo 2021-06-29 14:25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그 아름다움을 조금 배워 볼까요.
아름다운 건 좋은 거니까!

Falstaff 2021-06-29 14:29   좋아요 3 | URL
빨리 배우시려면, 선배나 상사 새끼들한테 허벌 깨지면서 배우는 게 장땡입니다. ㅋㅋㅋㅋㅋ

syo 2021-06-29 14:31   좋아요 3 | URL
역시 세상 만물이 저마다 의미가 있다더니만, 선배나 상사새끼들도 다 써먹을 때가 있군요! ㅋㅋㅋㅋㅋㅋ

초란공 2021-06-29 16:13   좋아요 1 | URL
라마르크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말했을 때 틀림없이 과롭히는 선배나 상사들로부터 깨달은 바가 많았을 듯도 싶습니다. 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9:47   좋아요 3 | URL
아. 역시 폴스타프님 댓글은 웃음 유발 제조기^^

syo 2021-06-29 20:2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폴스타프님도 누군가의 선배 상사이실 거라는 것이 바로 제가 아는 폴스타프식 웃음 포인트입니다.

Falstaff 2021-06-29 20:49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 은퇴할 때까지 누군가의 선배, 상사일 수 있는 봉급쟁이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입니다. 전 정상인이라서 그런 예외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6-29 15: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제 회계학 서적도 고양이로 낚는답니까! 고양이들 너무 피곤하겠다..(아놔 이노므 인기..난 왜 쓸데없이 귀여운거야..) / 음 이번 책들 중 그러니까, 229번이 추천할만한 책인 거죠? 일단 담습니다.

잠자냥 2021-06-29 15:5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 댓글 느무 귀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고양이가 낚는 건 통계학인뎁쇼... 회계가 아니라 ㅋㅋㅋㅋㅋㅋ 역시 고양이라 약간 멍충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6-29 16:09   좋아요 3 | URL
부랴부랴 사진을 하나 첨부해보았습니다. 귀여운 고양이들.....
늘 말씀드리지만, 즉시 구매로 이어지는 추천은 조심스럽습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6-29 16:16   좋아요 3 | URL
이럴수가...O.0;;;; 그림 보니까 넘 귀여워요. 통계고 회계고 물리고 뭐고; 저 고양이들이라면 다 정복 가능해 보입니다...@_@

독서괭 2021-06-29 16:28   좋아요 2 | URL
앗 통계학이었군요! 이 페이퍼에 회계학 책도 있어서 헷갈렸나봐요. 통계학이든 회계학이든 난 안 읽겠다는 마음가짐이었나 봅니다.. ㅋㅋㅋ
그림 보니 본격 고양이만화네요? 아이고 읽고 싶어진다…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9:46   좋아요 3 | URL
지두 닉넴 바꿀까요? 독서괭이로 ㅋ

syo 2021-06-29 20:20   좋아요 1 | URL
고양이 진짜 짱귀엽습니다. 저 온몸으로 갸웃하는 거 좀 보소.....

Cinema Paradiso 2021-06-29 1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공대생이셨군요 ㅋㅋㅋ 반갑습니다 :)

syo 2021-06-29 20:21   좋아요 1 | URL
아 ㅋㅋㅋㅋㅋㅋ 시네마님 공대출신이신 거 저는 알았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1-06-29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의 의미가 솥이었군요? ㅎㅎ 솥에관한 시가 궁금해지네요^^

syo 2021-06-29 20:22   좋아요 3 | URL
놀랍게도, 저 위의 세 줄이 바로 그 시입니다..... 진짜 놀랍지요....?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미 시를 썼구만유. syo님은 글쓰기 책 진짜 꾸준히 읽으신다. 하긴 독서 영역이 워낙 전천후라. 지는 귀여움보다 아름다움에 혹해 229번 챙겨감요. 근데 6월에 232권입니까. 아으. 진짜. 여기도 AI

syo 2021-06-29 20:23   좋아요 3 | URL
역시 시 읽기의 달인 읽기님, 바로 알아채셨네요. 저게 바로 그 시라고 찌끄린 거라는 것을......
아름답다고 했지만, 시종일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아름다운 것은 또 아니어서, 부분부분 좋았던 거라 막 추천하기는 그렇습니다.

붕붕툐툐 2021-06-30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30번은 그냥 미친놈 정도로 읽고 싶은 제 마음.. 흙흙....(떨어진 시험 다수)

syo 2021-06-30 11:0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대단하긴 하던데요? 자기가 그렇게 해서 자격증 수백 개 땄다고 하니 뭐 딴죽을 걸기도 어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