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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빛의 노래
유병찬 지음 / 만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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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확인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짝꿍애가 도대체 넌 왜 그렇게 국을 흘리냐고 물어왔다. 진짜였다. 엄청 흘리고 있었다. 숟가락에 국물을 가득 적재하면 여지없이 줄줄 흘리는 것이다. 미세하지만 명백하게, 나는 손을 떨고 있었다. 국물을 숟가락 절반 분량으로 연속 두 번 떠 먹는 공법을 도입하자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헤아렸다. 나는 수술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의사를 포기했다(나중에 안 바, 진짜 문제는 성적에 있었다.) 나는 조준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군인을 포기했다(이 결정은 2년여의 군 생활 + 3번의 예비군훈련을 통틀어 쏜 수백발의 총알 중 표적에 통산 열 네발을 집어넣음으로써 잘한 선택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사진사가 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취미로는 찍을 수 있겠지. 너무 많은 것을 잃은 건 아닐거야. 집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눈물이 다 말라 있었으므로, 엄마 아빠는 어린 나의 여린 맘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냄새도 맡지 못했을 것이다.


사달은 다음 해에 났다. 졸업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현상해봤는데 모든 사진 속의 모든 인물들이 진동하고 있었다. 뭐야 이놈들은, 것 참 가만히 있질 못하고- 라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럴리가 없잖아.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는 졸업여행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먼지처럼 사라졌으므로,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그대로 올라타고 안방으로 쳐들어 간다. 엄마, 나를 왜 이렇게 사진도 못 찍는 빙신으로 낳았어! 아빠,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아빠가 그렇게 허구헌날 술을 마시니까! 이것 좀 보라고, 내 손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잖아! 으아아아아 아아아앙. 그리고 펑펑 울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빠는 잠시 나를 지켜보는 것 같더니, 이내 내 뒷통수를 후려 갈겼다. 그리고 한마디를 남기고는 방에서 나갔다. 야, 너 내일부터 아빠한테 존댓말 해. 정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2


삶이란 대체로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다양한 가능성들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뿐 대개는 그냥 스쳐지나가고, 내 손에 쥐어지는 거라곤 내가 좀 더 잘 했더라면, 아니지, 우리 아빠가 좀 더 잘했더라면, 것도 아니지, 우리 할아버지가 좀 더 잘했더라면, 하는 식의 회한과 원망뿐이었다. 포기를 배우는 일은 내리막에서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점차 맹렬히 쉬워졌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을 자꾸 주워올리는 일만 반복하다가 정신차려보니 대학에 와 있었고, 학생증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칙칙한 회색 인간이 되어 칙칙한 회색 인간들 속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칙칙한 회색인간들이 싸이월드라는 세계속에서는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결은 사진, 사진이었다. "곱창집에서 내 영혼의 동반자들과 함께. 새끼들아, 반가웠다. 사랑한다." "크림 파스타 with 오빠. 아, 행복이란 이렇게 작고 소소한 데서 오는 걸까?" "내가 가는 이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이따위 똥글들도 사진만 하나 떡 걸어놓으면 다 멋있어 보였다. 아, 학생 식당에서 2800원 짜리 돈가스를 먹어도 사진만 있다면, 사진기만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스테이크 하우스가 되는 마법이라니.


그러나, 과거를 잊은 인간에게 미래는 없었다. 없는 살림 쪼개서 무리하게 디카를 하나 사 봤지만 멋진 신세계는 열리지 않았다. 다 이놈의 손 때문이었다. 사진이 제 아무리 돈가스를 스테이크로 바꾸는 요술을 부린다 해도, <돈가스>를 찍으면 <도ㄴㄱ ㅏ스스스스스스>가 나오는 경우에는 별 도리가 없는 듯 했다. 결국 사진은 다시 질시와 부러움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고, 신입생의 밤은 술과 술과 술로 젖어만 갔다.



3


살다 보니 사진을 만날 일이 많았다. 좋은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화가가 될 필요는 없듯, 사진 한 방 제대로 못 찍는 놈도 좋은 사진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받기는 다반사였다. 그러나, 사진을 대하는 근본적인 마음가짐이 질투와 좌절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아, 이 사진 아름답다.' 보다는 '아, 이 사진 잘 찍었다.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아주 가끔 사진집을 본다거나, SNS에 도는 좋은 사진들을 만날 때면, 사진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사진 뒤에 숨어 있을 촬영자를 소환해 찬탄과 부러움을 쏟아붓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과 나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점점 팽창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흔들린 사진이 있었다. 흐르는 사진이 아니라, 흔들린 사진이. 표지를 넘기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사진. 책의 제호와 작가의 이름이 써 있는 그 공간 옆에 작게, 윤곽이 번져나가 어떤 식물의 줄기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말할 필요도 없는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이 있는 곳을 찾아 훌쩍 페이지를 넘겼고, 76쪽에서 이런 글을 만났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떨리지 않는 것은 없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없다.


움직이지 않고, 떨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울 자격이 없다.


운다는 것은 내 영혼이 떨리기 때문이다.

운다는 것은 내 영혼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운다는 것은 내 영혼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흔들린다고 두려워 마라.

비로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줄기>를 <ㅈㅜ우우우우ㄹ기이이이이>로 찍었는데 <흔들리는 줄기>로 읽히는, 나아가 <흔들리는 사람>으로도 읽게 되는 근사한 사진과 글의 앙상블이었다.



4


한 페이지를 앞에 놓고 묵묵히 생각해본다. 아, 흔들리지 않는 피사체를 내가 흔들리게 찍었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나를 있는 그대로 찍은 거라고 여길 줄은 왜 몰랐을까? 어쩌면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하는 척, 실은 흔들리는 내 자신을 온당하게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이유가 사진을 흔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흔들린 사진을 사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사진에 움직임이 필요하다면, 움직이지 않는 사진으로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방법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움직이는 사진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는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을 전체로 치환해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유기한 것은 온전히 자신만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5


그렇다고 바로 "이제는 사진이다!" 라며 들로 산으로 떠날 엄두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사진을 찍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내가 흔들어 놓은 사진을 미워하지 않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 서른을 넘기고 나서 이 책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진작 이 사진을 만났더라면, 아마 스무살의 나는 싸이월드에 사진을 찍어 올리며 "내 사진 흔들리는 거, 나도 알아. 인정할게. 하지만 새끼들아, 산다는 건 원래 흔들리는 거야." 등등의 같잖은 지랄글을 반드시 쓰고야 말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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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02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너무나도 재미나게 리뷰 읽었습니다..대박!~~~(이거 정말 감사하네요 ㅎㅎㅎㅎ이런 리뷰 1년만에 보는듯 ㅋㅋㅋ)

syo 2016-09-02 13:32   좋아요 2 | URL
아, 굉장한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독후감인지라 이번에는 한번 멋진 글을 써 보리라 했는데, 결국은 또 책 이야기는 거의 못하고 제 이야기만 하고 말았네요....

yureka01 2016-09-02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자신과 연관지어서 책 이야기가 더 재미났습니다..ㅎㅎㅎㅎ

syo 2016-09-02 13:42   좋아요 2 | URL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사실 다른 책들이야 내키는대로 읽고 리뷰를 써도 저자님들이 보실 것도 아니니까 부담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으니까요.

겨울호랑이 2016-09-02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는 에세이를 읽어도 syo님 같은 감성이 안 나오네요..ㅜㅜ 그리고 yureka01님이 책쓰신지 오늘에야 알았네요.ㅠㅠ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syo 2016-09-02 14:18   좋아요 2 | URL
하하하 저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발견하고 책날개를 열었는데 yureka님 저 프로필 그림이 있어서 깜짝 놀랬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9-0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니 오랮 전에 읽었던 << 파카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가 생각나네요. 그 유명한 파카의 전쟁 사진..
총 맞아 죽는 스페인 병사의 찰나를 담은 사진인데(나중에 조작으로 밝혀졌음 -_- ) 그때 사진가가 덜떨 떨면서
사진을 찍는 바람에 포커스 나갑니다. 하지만그게 더 생생한 거죠... 쇼님은 종군사진가가 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아 ~

또 이런 시 구절도 생각나네요. 화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 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그렸다고..



쇼님 이야기꾸미는 솜씨가 꽤 훌륭한데요... 재미있게 잘읽었씁니다... 소설가도 권해드립니다..

syo 2016-09-02 14:21   좋아요 0 | URL
아 그렇다면 전 종군기자가 될 필요가 없겠어요. 제가 사진 찍는 거기가 바로 덜덜 떨리는 전쟁터가 되버리니까요......

ㅎㅎㅎ 소설가 말씀은 기분좋게 한 번 웃고 지나갑니다. 안 믿어요 저 그런 거.

고양이라디오 2016-09-02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나 위기철의 <아홉살 인생>의 냄새가 납니다. syo님도 인생이야기 한 번 써주세요ㅎ 제목은 <떨리는 인생> 어떤가요ㅎ??

p.s 제가 생각해도 제목이 별로네요. 죄송합니다. 좀 더 좋은 제목을 생각해두겠습니다.

syo 2016-09-02 16:57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ㅎ
솔직히 제목은 별로지만 제 인생이 더 별로라서 괜찮습니다. 충분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6-09-02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로 작가님을 모시고 막걸리 한사발 하는겁니다. 니빠앙

syo 2016-09-02 17:57   좋아요 1 | URL
아, 니빠앙이 뭘지 너무 궁금합니다......

시이소오 2016-09-02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 재밌어요. 역시 인풋은 무시할수 없어요. 한달 백권의 독서가 아웃풋에서 발현되는 케이스.

사사키가 인풋한거 다 불태워서 아웃풋하라고 하던데 계속 불사르시길 ^^

syo 2016-09-02 18:00   좋아요 1 | URL
인풋과 아웃풋이 연관이 있더래도,
시이소오님이 쓰시는 리뷰를 제가 쓰려면 아마 전 한달에 천 권을 읽어야 될 거예요......

만화애니비평 2016-09-02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kist12.egloos.com/v/3293485 여기에 가시면 그 진실의 오덕력을 알 수 있습니다 제 블로그는 아니지만

syo 2016-09-02 18:25   좋아요 1 | URL
새롭고 아름다운 세상의 문이 스르륵 열리려는 찰나 후딱 닫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살았어요......

만화애니비평 2016-09-02 18:26   좋아요 1 | URL
오덕의 세계는 깊고 심오하며 위험합니다

syo 2016-09-02 18:33   좋아요 1 | URL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겠지요?
 
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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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 9쪽



2.

      결혼을 잘 해야 한다고 엄마는 이십 년째 말한다. 엄마는 느그 아빠 같은 인간 만나가 사는 기 사는 기 아이드라, 느그만 보고 하루하루 버틴기라, 느그는 시집 장가를 잘 가야 된데이. 결혼을 잘 해야 한다고 아버지 역시 이십 년쯤 말하다가 갔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되는기라, 손발이 맞아야 뭐가 되도 된다카이, 니는 난중에 절대로 느그 엄마 같은 여자랑은 결혼하지 말그레이, 알긋나?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던 부부가 자식들한테는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 웃긴데, 마냥 웃지만도 못할 것이, 두 사람이 제시하는 이유도 똑같기 때문이다. 느그 아빠/엄마가 먼저 그랬다이까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 네가 먼저 잘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그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너는 못마땅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다 네가 뿌린 씨앗이다. 


      쌍방이 저런 주장을 하기 때문에 연애문제는 보통 교착상태deadlock다. 운영체제론에서는 두 개의 프로세스(Process, Ctrl + Shift + ESC를 누르면 실행중인 놈들의 확인이 가능하다)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1. 둘 중 하나, 혹은 두 프로세스 모두를 종료시키거나, 2. 일단 강제로 자원을 한쪽에 선점시키는 방식의 해결책을 권한다. 즉, 우리의 연애가 교착상태에 빠지면 둘 중 한 명을 제거하거나 동반자살을 하는 방법(좀 더 온건하게 그냥 헤어질 수도 있고)과 일단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해 상대방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준 다음,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제거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두 번째 방법도 그리 현명한 것은 못되는데, 프로세스는 자기 임무를 완수하면 군소리 없이 자원을 뱉어놓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해주고 해주면 끊임없이 해다오 해다오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그렇다. 


      보통 내가 '단군의 저주'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니가 이랬잖아. 그 전에 니가 이렇게 해서 그런거지. 그건 그 전에 니가 저렇게 해서 그런거고. 아니 그건 니가 그 전에 요렇게 해서 내가 저렇게 한 거지, 와 같은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태어난 탓, 부모가 낳아 준 탓, 조상탓으로 시작해 겨레의 반만년 역사를 산란기 연어마냥 거침없이 역류하다 마침내는 이 모든 게 단군 할아버지가 터잡으셔서 벌어진 일로 소급된다. 이런 문제들은 정말 풀기 힘들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은 주변 환경이나 상대방이 넣어주는 input에 크게 좌우되는 output을 내놓기 때문에, 모든 일에는 어느 정도 남 탓이 있다는 말도 완전 개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길고 긴 만성다툼의 시발점이 누구의 입이나 손끝에서 터져나온 Big Bang인지 대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책임소재는 늘상 불분명하다. 설사 기록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봐 이봐, 니가 그랬잖아? 내 말이 맞았지? 제발 우기지 좀 말란 말이야, 와 같은 행동양식을 동반하기 마련인 증거확인 절차가 과연 문제를 유효적절하게 해결해 줄까? 


      결국 교착상태는 안 만드는 게 답이다. 뭔가 꼬인다 싶을 때 일 키우지 말고 재빨리 끊어내야 된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역사서를 읽을 필요가 없도록.



3.

      그렇지만 교착상태와 단군의 저주는 쓰기에 따라서는 연애 사업에 막강한 자양강장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 시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나는 거침없이 그녀에게 빠져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깊이,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어서 다 지고 나올 수가 없다. 나오려면 내려 놓아야 한다. 바로 이 타이밍에, 귀신같이 그녀가 나의 뺨을 열고 들어온다. 봄비처럼 SS--G 들어온다. 나는 고요히 파문을 기다리고 있다. 시는 여기서 맺었지만, 그 다음 스토리를 덧붙이자면 아마 이런식이리라 본다. 파문이 잔잔해지면, 나는 내 안에 들어온 그녀를 다시 열고 들어간다. 지쳐 쓰러질때까지 훔치고 때로는 또 채우기도 하면서 그녀가 다시 나를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때가 되면 그녀는 다시 나를 열고 들어온다. 그 다음은 다시 나의 차례, 또 그녀의 차례.......


      어느 날, 문득 우리가 왜,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질 때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끝없이 끝없이 사랑의 역사를 되짚을 것이다.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봐도 어느 시점에서나 나는 사랑받고 있었고 또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고는 답이 없다. 원래 단군의 저주는 노답이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의 사랑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찾느라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짓을 포기하고, 마침내 모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꿈꾸어 마지 않는 결론, 아, 우린 운명인가 봐,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무한히 열고 열려가며 내일 또 내일을 짜맞춰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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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1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부드럽게 넘어가는 문장이 참으로 좋네요 ㅎ 게다가 대문 사진은 이말년의 와장창이라니 ㅋㅋㅋㅋ

시를 좋아하시나봐요? 전 시 쪽은 정말 바보라 ㅋ 좋아하는 시인도 좋아하는 구절도 없네요. 뭐랄까 생각이 어떤 확장이랄까 그러니까 시를 읽으면 그것이 구체화되면서 확장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게 뭐지, 왜 여기서 끝이지 그러면서 헤매이는 것 같아요. @.@

항상 시는 어려워요. ㅋ

`단군의 저주` 정말 공감합니다. ㅋㅋㅋㅋ

syo 2016-07-13 00:07   좋아요 0 | URL
잘은 모르겠는데, 주성치인가요? 이말년서유기 가지고는 주성치한테 어림도 없죠! 심지어 눈탱이밤탱이주성치라니.....

시는 좋아하는데, 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좋아해주면 세상 살기가 얼마나 쉬울까요.
맨날 시집 한 권에 채 5편도 제대로 못읽어내면서 게 중 제일 쉬운 시로 골라다가 택도 없는 글을 리뷰랍시고 쓰고 앉았답니다ㅎ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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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날 거대한 바다처럼 엉망진창인 내 인생이 과연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을 역추적해보면 멍청하게도 이과에 진학했다는 지점에서 폭망의 작은 샘물이 발원했음이 명백하다. 내가 이과를 고른 계기는 2000년대 초, 두 얼간이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막 고등학생이 된 당시 나의 꿈은 소박하게 우주 정복이었는데, 그 또래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보는 평범한 꿈이었다. 슬슬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될 무렵, 발바닥 사탕으로 혓바닥 염색하던 꼬꼬마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에게 조언을 구해 보았다. "우주 정복할라면 이과야, 문과야?" 정말 답도 없는 질문이었다. "이과." 그런데 답이 있었다! "이과라고?" 답이 시답잖아서 되물었다. "우주 정복이라매. 우주잖아 우주. 우주는 이과, 임마."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답 없는 청춘이었다. 만약 내가 골드문트처럼 사랑스럽고 주야장천 반짝거리는 캐릭터였다면, 친구놈이 나르치스처럼 사람의 내부에 심어져 있는 씨앗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야 큰 나무가 될지를 꿰뚫어보는 지혜를 가졌었다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까?


      내가 수학에 소질이 1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당시 수능은 언어영역 120점, 수리영역 80점 배점이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모의고사를 치면 보통 수리 성적이 언어 성적의 1/3에 가깝게 형성되는 수학병신이었지만 꼴에 또 수포자는 아니었다. 당당하게 이과 가겠다고 진학조사설문지(정식 명칭을 모르겠다)의 이과란에 빨간색 네임펜으로 거대한 V자를 그려 제출했는데, 한 시간도 채 못되어 교무실에서 방송으로 나를 호출했다. 그날 야자 감독이던 국어선생님이 청룡언월도를 꼬나들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가, 내가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달려들어 왜 이과를 지망했는지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내 목을 날려버리겠노라고 으르렁대시었다. "선생님, 저는 어릴적부터 우주 정복을 꿈꾸어 왔습니다. 드넓은 우주는 이과의 영역이 아니겠어요? 그리하여 저는 이과를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등신이라고 다 미친 놈은 아니었기 때문에. 국어선생님은 나를 앉혀놓고서는 과연 국어선생님답게 4D급 실감나는 내러티브를 동원하여 내가 이과를 가면 내 인생이 어떻게 망할 것인가를 그림처럼 선명하게 일러주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소오오오름돋는 선견지명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나란 놈은 그 피같은 예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가면서 속으로 이럴 시간에 정석을 푸는 게 낫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합 부분만 새까매진 정석의 바로 그 집합 부분을 검게, 더 검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 나는 나르치스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골드문트는 되지 못하고 꼴드문트가 되고 만 셈이다.


      어찌어찌 2학년이 되고 이과생이 되고 유명한 수학 병신이 되고 인생이 고되고 그러던 시절, 나는 인간의 소질이 참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하루 공부의 9할을 수학에 투자하지만, 보통 정도의 수학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자기 공부량의 절반만 수학에 투자해도 나는 그 아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만약 수학에 재능이 있는 친구라면 자기 공부량의 1할만 수학에 집어넣고도 나를 손쉽게 능욕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천재론을 신봉하게 되었다.



2.

      나는 "천재가 예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천재'는' 예술을 해야 한다"와 "천재'만' 예술을 해야 한다"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한 믿음인데, 꼭 예술이 아닌 다른 분야라도 기록적인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능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지금부터 하루 20시간씩 10년 축구해도 오늘의 호날두보다 축구를 잘 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운이 좋아서 오늘의 호날두보다 나아진다 해도, 호날두도 10년 동안 노는 것은 아니다.


      재능이 빚어내는 것은 성취뿐만이 아니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아니면 스포츠가 됐든, 인간의 모든 활동은 경제적 보상과는 별도로, 그 활동의 주체에게 세계를 해석하고 조직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00년 전이었으면 정말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었을 축구의 재능이 큰 돈이 되는 시대에 태어난 것은 그의 행운이겠지만, 그와 별개로 호날두의 축구는, 피카소의 그림과 박정현의 노래와 헤세의 소설은 그들 각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다루는 데 쓰는 총알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축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나르치스는 나르치스의 방법으로, 골드문트는 골드문트의 방법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뻘짓으로 보내는 나라도, 만약 내가 뻘짓의 천재라면, 나는 뻘짓을 가지고 내 세계를 해석해야 한다. 그게 가장 멀리, 가장 높이 갈 수 있는 길이다.



3.

      이 책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한국에 『지知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들어온 과거가 있다. 확실히 나르치스의 이성 vs 골드문트의 감성 구도는 예술과 지성에 대해 천착하길 즐겨하던 헤세가 의도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성과 감성을 양쪽에 놓고 대립시킨다거나 결국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야말로 진짜배기라는 식의 이분법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로 주제를 축소시키고 나면 오히려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획득할 수 없다. 이분법이 아니라, 천분법 만분법, 무한분법의 삶의 방식과 그 중 자신에게 걸맞는 방식을 택하여 치열하게 살아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지혜, 사랑.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런 것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책을 펼치기 전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만, 다 읽은 책을 덮고 나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나』가 되기를 바라며 권합니다.



160707 一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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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7-08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알라딘에서 다시 만나는군요. 젊을 때 읽었을 땐 정말 감동적인 소설이었는데 요즘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너무 궁금한 책이기도 합니다..
http://blog.aladin.co.kr/oren/5403834

syo 2016-07-08 23:26   좋아요 1 | URL
한참 재밌어지는 마당에 다음호에 계속이군요! ㅠ

저도 조만간 다시 한번 더 읽으려고 합니다. 분명히 많은 것들을 놓쳤을 것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7-09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지와 사랑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같은 소설이었단 말입니까 ? 몰랐네요... ㅎㅎ

syo 2016-07-09 10:45   좋아요 0 | URL
어쩐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 『지와 사랑』을 읽으신 분들이 더 많거나 혹은 더 진하게 감동 받으셨거나 그런 것 같아요.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요?

- 2017-04-29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지와 사랑,으로 읽었습니다.
스무 살 때 이책 읽다가 마지막 몇 장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왜 그리 눈이 붓도록 울 수밖에 없었는지... 잘 읽고 갑니다.
 
자라는 돌 창비시선 331
송진권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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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울리는 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랑해요, 아빠 엄마 우리 이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요." 라고 가사를 지으면 아무리 애타는 곡조에 얹어 노래해 본들 듣는 이의 마음자리를 요동시킬 힘이 모자라고, 그런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가수는 노래의 첫머리를 이렇게 가져 갈 것이다. "우리 집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taxi driver,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듣는 이의 경험, 현재의 기분, 그가 선호하는 장르 등 다양한 요인들이 뒤섞여 마침내 가수의 시도는 성공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가사에 울지 않는 사람이 첫 번째 가사를 듣고 눈물바람이 날까?


펄펄 끓는 감정이란 틈만 나면 정상과 광기의 경계를 전복시키려 음모를 꾸미는 내란선동세력이므로, 상징계에 부역하는 말들은 우리가 그 말을 통해 주고받으려 한 펄펄 끓는 감정을 차갑게 식혀 정상의 틀 안에 박제로 놓고 누구라도 만질 수 있도록 전시하려 한다. 당신의 감정을 겨냥해 내가 날린 화살의 경로를 비틀어 내 말이 오직 사건이나 사태를 지시하도록 만든다. 사랑, 사랑해, 사랑하는 당신. 이런 표현들은 당신에게 온통 뜬눈으로 지샌 나의 수많은 밤들이나, 어둠이 끈적한 국물이 되어 방 바닥에 고일 때까지 얼어붙은 밤을 녹이던 내 뜨거운 갈망, 그 빈자리를 오직 당신의 이름을 천만번 부름으로써 메우느라 쉬어버린 나의 성대 같은 것들을 당신에게 하나도 알려주지 못한다. 심지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매끄럽게 전해지지 않는다. 당신이 확신하게 되는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사건 뿐이다. 그리고 꼭 당신이 아닌 누구라도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당신이 얻은 확신과 거의 같은 양과 질의 확신을 얻는다. A가 B를 사랑한다고 말하는군. 나는 내 '사랑'을 '당신'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화살을 쏘지만, 화살이 꽂힌 과녁은 '사랑'도 아니고 '당신의 과녁'도 아니게 된다.


물론 때로는 사태를 전하는 말만으로도 감정이 움직인다. 결국 그 배에서 아무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단순하게 표현해도 우리를 울린다. 뭣이 중헌지도 몰르는지 구조작업에 전념해도 모자랄 해경에 보고, 보고, VIP께 실시간 보고를 외쳐대는 청와대 비서실이나, 이럴 때일수록 정부와 언론이 하나로 똘똘 뭉쳐 해결해 나가야 한다며 기사를 넣으라 마라 해댄 어느 자전거 탄 국회의원의 이야기는 별다른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내 입에서 욕지거리를 너끈하게 뽑아낸다. 그러나 나의 사랑이나 그리움 따위야, 내겐 태산일지라도 다른 이에겐 티끌같은 사건일 뿐이라서, 나는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것을 말 해내는 방법을 알기 위해 매일 밤 시를 읽고 있다. 그리고 오늘, 또 좋은 방법 한 가지 찾게 되어 이 자리에 새겨 놓는다.




달 속의 할머니

- 뭇골1


  가을걷이 끝나고 마실 가는 할머닐 따라 성새미네 집엘 가면 동구나무 그림자 발꿈치에 눌어붙곤 했는데요 나무에 깃들였던 귀신이며 달별들도 따라붙곤 했는데요 우리가 지나온 길이 스르르 몸을 풀며 가뭇없이 어둠속으로 잠겨들고 웅크린 산들이 거멓게 일어서는 기척에 나는 자꾸 길섶 풀벌레 울음소리에도 웅크리며 할머니 치마꼬리에 엉겨붙곤 했는데요 어둠속에 묻힌 길이 이무기처럼 희게 희게 배를 뒤집고 떠오르면 꺼칠한 할머니 손 힘주어 잡은 내 손에도 어느새 땀이 배어나곤 했는데요 아귀아귀 달빛에 파먹힌 어둠을 따라 할머니 머리에 인 고구마넌출 내 목덜미에 늘어져 저 축축한 어디 먼 데 사는 귀신의 혓바닥일지도 몰라 오스스 무서리가 목덜미를 따라 내릴 때면 성새미네 처마에 켜놓은 백열등은 아귀의 눈처럼 희미하게 눈을 뜨고 흔들렸습니다.


  할머니들 고구마줄거리며 얼갈이배추를 다듬을 때 잎사귀 갈피갈피 성춘향이 쑥대머리 귀신형용이 포개지구요 승천 못한 이무기가 처녀 하나 잡아먹고 스르르 또아리 틀며 제 굴 속으로 들어가면 살풋 잠 깬 난 여기가 어느 큰 짐승의 뱃속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는데요 꽉 절은 담배 연기에 눈 못 뜨고 갈비뼈 같은 서까래 세어보다가 할머니가 나를 깨워 업고 머리까지 할머니 옷에 들씌워진 채 툇마루에 나왔을 적엔 귀뚜라미 여치 우는 소리가 씀벅씀벅 마당에 꽉 절었는데요 신발에 든 귀뚜라미 털어내고 신을 신고 돌아올 때는 우리가 초저녁에 걸어온 길이 허물 벗은 뱀같이 말갛게 떠오르곤 했습니다 꼬꼬닭도 검둥개도 울지 않은 할머니 등에 귀를 대고 뜨듯한 소리의 울림에 까뭇까뭇 잠들었는데요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스르르 몸을 숨기고 어디만치 왔나 차돌멩이 돌았다 모새방 지났다 어디만치 왔나 나를 내려놓은 할머니가 둥근 달무리의 문을 열고 가뭇없이 달 속에 들어가 앉으시고 할머닐 쳐다보며 시악을 쓰고 울어도 할머닌 다시 나오시질 않고 할머니가 풀어내놓은 고구마줄거리 넌출넌출 길게 난 길을 쫓아 여기까지 온 나는 시방 쪼그리고 앉아 사방천지 이무기가 뿜어내놓은 독 같은 부연 세상에 혼자 마냥 패악을 떨며 돌팔매나 던지는 것인데요 장지문 삐걱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디만치 왔나 어디만치 왔나 불러도 대답도 없이 어여 가거라 아가 어여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가라고 가라고 홰홰 손을 저으시는 것입니다.

- 5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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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 플라톤.벤야민.들뢰즈.보드리야르의 이미지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박치완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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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이미지가 서식하는 고도가 어디쯤인지 오히려 더 모르게 되었다. 이 책이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에만 국한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이것은 그저 지엽적인 의문일 뿐이겠지만, 과연 이미지는 예술과 어떤 관계일까? 저자는 거대한 이미지라는 신이 있고 그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다양한 양태 가운데 하나로 예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예술이라는 것은 이미지를 담지할 뿐, 우리가 예술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하고 또 읽어 내고 싶어하는 진선미는 예술의 기능이 아니라 이미지의 기능이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책은 플라톤을 비평하고 들뢰즈를 비판하고 보드리야르를 비난하며, 드보르에 조응하며 벤야민에 조심하고 있는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학자들에 관해 문 밖에 있거나 끽해야 문틀에 올라선 정도의 소양밖에 없으니 저자의 관점을 비평하거나 비판하거나 비난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조응하거나 조심히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확실히 알겠다. 열정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지만.


5장에서 저자는 벤야민의 이론이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예술작품은 언제나 복제가 가능하였다는 벤야민의 선언이 틀렸다는 것을 근거로 댄다. 벤야민의 이론을 우리 시대에 맞춰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변형과 재창조가 필요하다는 점은 나도 같은 생각이지만, 그 근거로 예술작품이 근본적으로 복제가 불가능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벤야민은 모방의 양태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 중 '예술가 본인이 재생산한 것'이 복제인지 아닌지에 대한 나의 의견은 저자와 다르다. 저자는 194페이지에서, 예술가 본인에 의해 재생산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원본과 결코 동일한 작품이 아니라 단지 닮은, 유사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술을 보는 관점에 따라 충분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아야만 같은 작품이라고 보는 것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 1.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동일하고, 2. 말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기 위해 드러낸 이미지가 극히 유사해 몇 군데의 소소한 기계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고, 3. 관객이 같은 바를 느꼈다면, 두 작품을 같은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차피 상대적인 관점을 극단으로 몰고가면, 어떤 작품도 그 작품을 보는 관객이 누군인지, 또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기분을 가지고 보는지에 따라서 그때그때 미묘하게라도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완성이 예술가-작품-관객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견지에서 본다면, 이는 모든 작품은 하나의 작품인 동시에 서로 다른 복수의 작품이 되는 셈이다. 이런 마당에, 어떤 두 작품의 동일성 여부를 작품 자체의 외형에만 치중하여 판단하는 방식은 예술작품의 표면에만 너무 집착하는 관점이 아닐까? 


같은 장소에서 연이틀 벌어지는 같은 공연이 있다고 하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주했다고 할까. 같은 지휘자, 같은 연주자들이 같은 악보를 들고 연주한다. 평소 운명 교향곡이라면 환장하는 나는 바이올린을 맡은 친구가 준 티켓으로 1, 2회를 다 듣게 된다.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능숙함 때문인지, 나는 두 연주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 둘째날 공연을 마친 그 친구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데 친구가 부끄러운 듯이 말한다. 사실은 오늘 2악장에서 딱 한 부분, 틀린 음을 연주하고 말았다고.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 친구를 향해, 너 때문에 나는 다른 두 개의 작품을 듣고 말았다고, 2회차 연주는 내가 듣고 싶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아니라 다른 작품이었다고, 원본의 아우라를 모두 상실한 한낱 복제품일 뿐이었다고 비난해야 할까? 


아, 예술의 본체는 당최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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