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기쁨
금정연.정지돈 지음 / 루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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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 더 높은 산에 올라 다른 낮은 산을 바라보거나, 밤의 비내리는 숲이나 바람에 쓸리는 갈대밭의 울음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와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에 대해 쓰기 위해 기억을 되짚다가 만약 "공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면, 공허했노라고 기록해도 될까? 내가 그 단어를 부릴 수 있을까? 그 단어가 저를 모르는 내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까?

 

            그러니까, 무언가 마주쳤을 때 어떤 거대하고 추상적인 말이 떠올랐다면, 이를테면 공허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내게로 왔다고 하면, 아, 이것이 바로 공허한 정경이구나, 하고 단언하는 그 오만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시, 내가 그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 그렇다면 내가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2.

 

            내게 내 글은 적확하지 않다. 무책임하다. 그 무책임이 의식되지 않는, 그러니까 내 글을 믿는 날들을 건강한 날이라고 불러보면, 나는 꽤 자주 앓는다.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 쓰기는 종종 무섭다. 그 누군가가 나 혼자라도 여전히 그렇다. 자신에게 비난받지 않는 글로 하루를 남기고 싶다. 몇 년을 품고 있는 작지만 큰 바람이다.

 

 

 

3.

 

            그렇다면, 읽어도 알 수 없는 타인의 글을 만났을 때 어떤 모호한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확보하지 못했다면,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4.

 

            누군가는 그들이 미래라 하고, 좀 더 매서운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현재라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는 과거가 된다. 원래 그렇다. 과거란, 특별히 지은 죄 없이 그저 우물쭈물하다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과거는 미래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미래를 겨냥한 과거의 모든 말은 실패한다. 과거에게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고,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중은 내게 오지 않은 것이고, 그들의 방식은 내게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역시 그들에 대해 쓰기를 실패한다. 

 

            끝내 그들은 내가 닿지 못할 미래로, 내게 오지 않는 현재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도 슬퍼하지 않고, 무엇도 알게 된 척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기쁨이 아닌 그들이더라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겐 기쁨일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멀찍이 내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그들과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추는 기쁨의 춤을 묵묵히 응시할 것이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떠나지 않았고, 아마 나는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5.

 

          이 글을 리뷰와 페이퍼 중 뭘로 쓸지 잠깐 고민해보았지만, 그냥 리뷰로 쓰기로 한다. 어차피 무언가 더 알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이보다 더 나은 리뷰를 쓸 깜냥이 나중에라도 생길 것 같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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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모든 죽음의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가 뒤돌아 선 모습이라고 생각해 본다. 

 

 

2.

      죽음에 대해 상상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식은 자살이었다. 

 

      그런 이미지는 오래 앓았던 중2병 때문에 시작되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중2가 지나고, 고2가 지나고, 대2가 지나고, 예비군2년차가 지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상 면도칼, 수면제, 한남대교 같은 이미지들이 따라 붙는다. 삶이 힘들었는가 하면 그럴 일도 별로 없었고, 부와 명예와 사랑을 모두 갖지 못했어도 그 중 하나는 꼭 쥐고 산다. 우는 일이 많지만 울고 나면 늘 웃고, 웃고 나면 우는 일이 두렵지 않다. 행복하냐고 물어오면 행복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해 조금 더 소담한 말이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해 보지만 아니라고 대답하지는 않는, 그런 삶을 조용히 살고 있다.

 

 

3.

     『올리브 키터리지』에 실린 13개의 이야기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밀물」은 요약하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이후 광기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들을 스치며 조금씩 마모되던 케빈이 마침내 어머니와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머니가 죽은 곳으로 찾아들었다가 그곳에서 7학년 때 수학을 배웠던 올리브를 만나 잠깐동안 죽음이 지연되던 중에, 폭풍처럼 몰아친 어떤 사건을 겪으며 단 한 순간에 다시금 삶을 부여잡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더 줄여보면, 느리고 길게 죽음의 노래를 부르다가 마지막 순간 짠! 내가 사실은 삶이었어, 하며 뒤돌아 웃는 이야기이다.

 

 

4.

      어쩌면 나의 죽음이 계속해서 자살로 그려지는 이유는 되려 죽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 생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힘이 오롯이 나에게 있다면, 한 번의 기회에도, 하나의 희망에도 기꺼이 죽음을 포기하고 또 한 번 다시 살아가자고 마음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5.

소용돌이 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 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널 놓지 않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 86쪽

      케빈이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서는 짧은 순간을 보면, 마치 그가 그런 순간을 기다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삶이 내미는 손을 덥썩 움켜쥔다는 느낌이다. '널 놓지 않을게'는 '날 놓지 않을게'로 읽히고, 몇 분 전 버리려 했던 삶을 꼭 붙잡은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6.

      삶이 무거워 슬쩍 놓친 듯 놓고 싶어질 때, 우리를 구원해주는 손길이 어디서부터 뻗어 나오는지 알려주는 밀물같은 이야기였다. 누군가 살라고 내밀어 주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살리려 내미는 내 손에서 삶을 찾을 수 있고, 계기는 밖에서 찾아 올 수 있어도 씨앗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 어찌 보면 뻔하고 흔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에게 한 번 더, 딱 한 줌의 희망이 모자라 모든 불빛이 꺼져버린 세상을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 같은 날을 한 번 더 살아 지나가도 좋겠다는 희망을 건넨다. 건조하게 따뜻하고, 섬세하게 쓸쓸한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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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6-05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진한 감상평은 어찌 가능한지 항상 궁금하며 부럽습니다. ^^

syo 2017-06-05 22:55   좋아요 0 | URL
네?? 무슨말씀이세요 ㅎㅎㅎㅎ 북다이제스터님 리뷰가 항상 부러운 사람입니다. 저는 그만한 깜냥이 안 돼서 느낌이나 주어섬길 뿐인걸요.

다락방 2017-06-0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좋아요 :)

syo 2017-06-05 23:57   좋아요 0 | URL
작품에 민폐예요. 어마어마했어요

다락방 2017-06-05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감정 풍부해서 넘 좋아요. 헤헷.

syo 2017-06-06 00:04   좋아요 0 | URL
제 감정이요? 왜 이러세요 감정왕 다락방님이 여기서ㅎㅎ

yamoo 2017-06-0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자살 하면...저는 북한산 바위 자락이 생각납니다. 제가 자살하면 그 장소를 택할 것입니다요..ㅎㅎ

6. 짧은 리뷰가 좋네욤^^ 다락방 님 말씀마따나 짧지만 감정이 참 풍부합니다그려~^^

syo 2017-06-08 21:41   좋아요 1 | URL
고시계에는 이런 농담이 돌아다닙니다. 시험 망하면 서성한이나 가자고. 통상의 서성한은 서울에 있는 3군데 사립대학의 앞글자를 딴 용어지만, 이 사람들이 말하는 서성한은 서강대교 성수대교 한남대교라는군요ㅎ 웃을일인지 모르겠지만 웃기더라구요.

칭찬 감사합니다. 근데 막상 저는 잘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감정이 풍부한 글이었군요.....

AgalmA 2017-06-1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170614Wed 글도 그렇고 이 글도 감정 풍부한 글이라는 거 저도 동감입니다/

syo 2017-06-14 22:55   좋아요 1 | URL
한번 하고 말 이불킥을 두 번 하게 만드시는 말씀 감사합니다^^......
 
이성의 명암과 건축이론 현대철학과 건축이론 시리즈 1
임기택 지음 / 스페이스타임(시공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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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이 책은 쓰레기는 아닙니다-라는 말도 저자에게는 이 책은 쓰레기입니다-와 진배없이 들리겠지만, 더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으니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는 마음도 그리 편치만은 않다. 그래도 이 책은 쓰레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책도 아닙니다.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대려고 하는데,

 

 

2.

      우선, 너무 후려친다.

 

      후려침은 입문서나 개론서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태생적인 단점이므로 독자는 그 점을 고려하여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는 것이 상도의겠으나, 어떤 독자는 마음이 좁다. 좁은 마음은 그 독자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태생적인 단점이므로 저자는 그 점을 고려하여 이 비판을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는 것이 또한 상도의겠다.

 

      본문에 언급된 철학자들의 저작 중 국내 번역된 것은 거의 모두 참고문헌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솔직히 입문서 하나씩만 가지고 와도 이 책보다 훨씬 풍성하게 서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둘째로, 서술의 난해함이나 압축 정도가 너무 불균질하다.

     

      친절한 곳은 과하게 친절하다. 헤겔의 정반합을 설명하면서 자전거가 자동차로, 자동차가 비행기로 발전해 나가는 그림을 첨부한 것은 의미없는 과잉친절이다. 그 그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본문이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이런 부분도 있다.

 

      (1)가치판단은 지배층의 위계구조를 대변하는 것이다. (2)언어와 의미만 무효화시키면 물질만 남게 된다. (3)'가치구조'는 우리가 만든 것이다. (4)단어를 응시한다고 했을 때, 모든 것을 제거하면 '글자 자체'만 남게 된다. (5)도시 역시 물리적 구조를 제거하고 보면 그 이면의 그림자와 찌꺼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134쪽, 괄호숫자는 임의로 붙였다)

 

      저 문단은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골치가 아프다. (1)과 (3)이 제 짝이고, (2), (4)가 한 짝, 그리고 (5)가 이어진다. 직 (1)-(3)-(2)-(4)-(5)로 서술했어야 온당할 문단이다. 

 

      내용 서술 또한 부주의하다. 문단 전체의 논지에 의하면 (1)의 '가치판단'과 (3)의 '가치구조'는 무효화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일한 맥락의 단어인데, (1)에서는 '지배층', (3)에서는 '우리'라는 주체를 들이밀다보니 그들의 가치판단-우리의 가치구조처럼 서로 대항하는 개념처럼 느껴진다. 또한 (2)와 (4)는 중언부언이다. 그리고 (2)=(4)와 (5) 사이에는 비약이 느껴진다. (2)에서 '물질'은 남고 (5)에서 '물리'적 구조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독자는 작가가 이해와 오해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4.

      무엇보다도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한 쪽에서도 몇 개씩 발견되는 엉망진창 문장들이다. '극히' 일부만 옮겨 본다.

 

      - 메시아가 도래하는 순간은 인간세계의 신화적 열정, 감정pathos가 극대화될 때 분출되는 것이다(130) : 주술호응이 맞지 않다. 뭔가 다른 문장을 써놓고 고치다 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 글에서는 감정'가' 극대화 될 수는 없다.

      - 이렇게 진보적 사고관이 그릇된 윤리의 사고와 결합될 때의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왔음을 인류는 이미 경험했다(131) : 고등학교 1학년의 논술답안지에서나 등장하여 빨간 줄 죽죽 그일 표현이다.

      - 모던시대에 역사적 추동력은 더이상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진보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이끌어나가는 추동력이었고 그런 것이 우세한 시대였다(131) : 이것은 다름아닌 박근혜의 말이다.

      - 그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는 착취와 잉여가치를 통해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대부분 빼앗아가는 체계이다(132) : 잉여가치를 '통해' 잉여가치를 빼앗지 않는다. 착취라는 단어는 중언부언이다. 이 짧은 문장에 이게 뭐하는 짓일까.

      -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과정을 더해 가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132) : 박사까지 받은 사람의 글이 이따위라니 이제는 화가 날 지경이다.

      - 백지와 부여된 의미와 가치체계 대상은 의미가 부정되고 무효화된 것을 의미한다(134) : 저자가 한국사람인데, 왜 구글 번역기가 번역한 글이 나왔지? 

      - 사실과 진리는 같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는데 사실과 진리와 관계가 있을때 symbol이 되고 사실과 진리가 전혀 관계가 없을 때 알레고리가 되기도 한다(139) : 이 책은 만 원이다.

 

      그러니까 글을 쓸 때는, 내용이 중요하니까 일단 문장이 되든 말든 주욱 써 놓고 나중에 고쳐나가자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글은 100번의 교정과정을 거쳐도 100% 완벽하게 교정되지 않는다. 그럴진대 심지어 이 책에서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편집자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게 편집자의 손을 거친 글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공포다. 그 사람이 편집자라면 박근혜도 대통령이겠다.

 

 

5.

      장점도 있다. 이 책은 철학적 사고가 건축에 함유되어 드러나는 대목을 꼼꼼하게 알려주고 있다. 약간 어거지같지만, 이 철학사상이 건축으로 표현되면 이런 건물이 튀어나오는구나-하는 감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6.

      총 8권까지 있는 듯하다. 1권을 구매할 때 2권도 같이 구매했다.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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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6-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번 읽고 아이쿠야... 했어요 orz

syo 2017-06-01 23:38   좋아요 0 | URL
이 늦은 밤에 어쩐 일이세요 ㅎㅎ

다락방 2017-06-01 23:39   좋아요 0 | URL
운동하고 집에와서 침대에 누웠고요 ㅋㅋㅋㅋㅋ 스마트폰 ㅋㅋㅋㅋㅋㅋ 세상 편한 스마트폰 ㅋㅋㅋㅋㅋ

cyrus 2017-06-0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속권이 너무 늦게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1권만 산 것이 후회됩니다. 그래서 저는 세트 다 나오면 삽니다. ^^;;

syo 2017-06-02 07:2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세트 다 나온것 같아요. 8권까지 다 샀다면 아마 두 권 산 지금의 4배는 후회했을것 같습니다..
 

 

1.

      처음 보는 순간 벼락처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겠구나 단번에 알게 되는 사랑이 있다. 한편,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비 듣는 소리를 듣다가, 찌개에 넣어먹을 감자를 타박타박 썰다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슬며시 알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다.

 

 

2.

      당신은 어떤 경험이 더 많았습니까? 

 

 

3.

      고종석은 마르크스주의가 망한 이유로, 그 이론 속에 인간의 마음, 정서, 욕망 같은 것들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짚는다. 완전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사회가 오면, 과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축적의 욕망, 타인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이 일거에 사라질까? 이론적으로 가능한 그 세상이 정서적으로도 가능할까?

 

      거의 같은 이유로, 나는 내 연애관을 공산주의 연애관이라고 즐겨 부르는데, 연애사에 펼쳐질 수 있는 굵직큼직한 사건들에 대해 이론적 대처방안이 거의 완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며, 또 <공산당선언>처럼 몇 개의 강령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공산주의 연애강령 1 : 너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한 모든 우호적 감정은 죄다 사랑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2 : 모든 사랑은 복합감정이다

      공산주의 연애강령 3 : 네가 하는 모든 사랑은 제각기 다 다른 사랑이다

      .......

      공산주의 연애강령 부칙 : 이 강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니 사랑은 그대로 폭망이다

 

 

5.

      늘 타던 가락이 무서운 가락이고, 놀던 물에 물드는 것이 인간이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하기보다 하던대로 하기를 선호한다. 사랑할 때 익숙한 방식을 선호하는 일은 때론 운 좋게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대체로 망하거나, 불필요하게 파손된 상태로 사랑을 시작하게 한다.

 

      연애를 망하게 하는 여러가지 태도는 새롭게 사랑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은 <옛날걔는나한테안그랬는데>. 지난 사랑의 그림자에 직접적으로 묶여 있는 경우 되시겠다. 더 나아가, 꼭 깨지고 나서 아, 그게 다 내 욕심이었어, 나도 노력했어야 했는데, 하는 부질없는 후회로 귀결되기 마련인 <있는그대로의나를받아들여주는게진짜사랑아니야?>도 있다. 이런 경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가 되어 결국 잘 해봐야 쌍방과실이다.

 

 

6.

      우리는 모두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장님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관계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코끼리다. 더듬어야 한다. 더듬는 것 말고는 이 코끼리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알 길이 없으므로, 적극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더듬어야 한다. 그러다 내 손끝이 마주 더듬어 오고 있는 다른 장님의 손끝과 맞닿아 찌릿-하는 순간 우리는 이 코끼리가 어제까지의 모든 코끼리와 다른 오늘의, 오늘만의 코끼리임을 직감한다.

 

 

7.

      남자와 여자는 메일을 주고 받으며 조금씩 드러나는 자신들의 새로운 코끼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과거의 코끼리들이, 혹은 사회가 입력하는 표준 양식 코끼리들이 끼어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찾고 싶었던 부분은, 처음에는 새로운 형태였던 그들의 관계가 진부한, 그러니까 절절하긴 해도 결국은 기존의 사랑의 문법에 매인 예측가능한 형식의 사랑으로 바뀐 그 지점이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만나야 해. 사랑이라면 당연히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 머릿결이 일으키는 바람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야 해. 어쩌면 그 모든 "당연히"는 어제까지의 사랑에만 통용되는 문법일 수도 있는데? 

 

      사실 잠깐이나마 그들에게도 실제로 만나지 않고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고, 필요한 감정을 충만하게 채워주던 지점이 있었다. 서로를 궁금해하긴 했지만 서로의 실체를 교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서로를 잃기는 싫었지만 서로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그런 지점이. 그 때 만약 그들이, 그들의 코끼리가 완전히 새로운 코끼리이며, 그 코끼리를 위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완전히 새로운 집을 지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당연한" 사랑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만을 가져다 놓는 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는데 합의했다면 어땠을까. 기존의 사랑은 기존의 사랑의 자리에 맞추어 따로 운영하면서, 그들은 딱 처음의 좋았던 시절에 멈추어 한발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선을 지키며 그들만의 독특하고 유익한 사랑을 유지한다면,

 

 

8.

      그랬으면 이 책은 아마 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다. 사랑이 무슨 알파고 바둑 두는 것도 아니고, 뭔 수로 선을 지키냐고. 다른 사람을 향해 치닫는 마음이 조절이 되면 우리는 그를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다. 붓다라고 부르지.

 

 

9.

      그들의 마음이 선을 넘고 서로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내달리는 그 한순간이 어딘지 우리는 결코 짚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지개의 한쪽 끝부터 짚어가며 연두색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처럼 알쏭달쏭하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처럼, 그런 사랑의 그라데이션에다 기적이나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지만, 운명은 그저 사랑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거나 지난한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부적, 메마른 사랑에 부어주는 영양제일 뿐이다. 사랑은 운명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운명이 사랑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지금 이 순간 격하게, 

 

      내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다.......우주의 모든 중2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10.

      그들의 이 다음 순간을 읽기를 즐거이 기다리고 있다. 손발이 마침내 없어지기 전에 어서 등록하기 버튼을 누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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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9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싸~ (올라와서 읽을 수 있다는 기쁨에서 오는 환호 ㅋㅋㅋㅋㅋ)


‘이론적 대처방안이 거의 완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 -> 오, 현명하십니다. 저는 몰랐어요. 저는 제가 남들과 똑같이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지랄, 발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남들은 다 그래도 저는 안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던지요. 저는 무슨 제가 강철로 만들어진 인간인줄로만 알았어요. 저도 그냥, 보통 사람인데 말입니다. 쇼님은 그런데, 이미 알고 계셨군요. 그런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현명하십니다.


‘이 강령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순간 니 사랑은 그대로 폭망이다‘ (끄덕끄덕)
아, 제가 뭔가 이 나이에 연애에 대해 또 새롭게 배우는 기분입니다.


우주의 모든 중2의 기운이 모여들었습니까? ㅋㅋㅋㅋㅋ 좋은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지간에 곧! 다음 순간을 읽도록 합시다. 딱 대기하고 있어요!!

syo 2017-05-29 15:09   좋아요 0 | URL
스스로도 손발이 좀 오그라드는 이런 글 쓰면,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옛날에 제 글 읽어주던 친구놈이 생각나요. 저한테 그랬거든요. ˝양산형 알랭 드 보통˝같은 글 쓰지 말라고. 그 대머리가 지만 할수 있는 글 가지고 깜냥도 안 되는 사람 여럿 버려 놨다고. 사실 저도 그 친구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1년 뒤쯤 다시 읽으면 사라지고 싶을거에요, 아마.

그나저나,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그 개새끼는ㅋㅋㅋㅋ

2017-05-29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5-29 15:59   좋아요 2 | URL
맞아요 맞아요.
어느 상대방을 몰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나를 잘 모르는 것과 다른 사람을 잘 모르는 것이 뒤섞여 가지고 관계가 안드로메다시궁창으로 가는 일이 허다하지요.

2017-05-29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5-2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파멜라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다락방 2017-05-29 18:07   좋아요 0 | URL
심장 아파요 ㅠㅠ

2017-05-29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9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짧은 문장이 나는 불안하다. 한 줄을 썼는데 두 개 이상의 마침표가 찍히면 삼각형을 거꾸로 세워놓은 느낌이 든다. 세상 거의 모든 글쓰기 책들이 이어진 문장을 끊으라고 주문하지만, 주섬주섬 나는 또 끊어진 문장을 깁는다. 문장은 화장이 두터워지듯 자꾸 길어진다. 길이는 사실 부끄러움에서 태어난다. 얕음을 어떻게든 감춰보려는 꾀죄죄한 욕구가 가뜩 실팍하지 못한 문장을 모루 위에 놓고 길게 두들겨 편다. 짧지만 무거운 문장, 짧지만 긴 문장을 보고 감탄하는 눈이 내게도 있지만, 언제나 내 손은 꼬리가 길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길고 복잡한 문장만 만들다가 묘비명도 중문이나 복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날 테지만, 그럼 또 어때. 이러나저러나 생긴대로 사는 것이고 사는대로 생기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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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6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생각하는대로, 쓰고 싶은대로 글 쓰는 마음을 유지하는 자세가 훨씬 글쓰기를 편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syo 2016-12-06 14:1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어차피 남들이 다 맞다하는 방식으로 써보려고 애면글면 해봐도 결국은 늘 내가 쓰던 글이 나오는 걸 뭐하러 아등바등 하겠어요.

cyrus 2016-12-06 14:1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지고, 금방 싫증이 생길 겁니다.

북프리쿠키 2016-12-06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 글쓰기 자세의 바이블이 된 책이네요. 솔직한 글쓰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 줬습니다^^

syo 2016-12-06 16:28   좋아요 2 | URL
북프리쿠키님 안녕하세요.
저도 배운게 많았습니다. 느낀 것도 많았구요. 제 글과 글을 둘러싼 것들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12-09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짧은 문장은 왠지 어색하네요. syo님의 문장은 길어도 술술 읽히고 매끄럽습니다ㅋ

syo 2016-12-09 17:10   좋아요 1 | URL
하하하하. 언제나 힘이 되는 빈소리 감사합니다! 역시 라됴님은 착한사람? ㅎㅎ

책한엄마 2016-12-23 2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안에 나온 ‘프로스트를 찾아서‘ 글도 길지만 유려하다고 하잖아요.^^각자마다 개성있는 문체가 있는 것 같아요.데미안이란 책도 결국 헤세 문체가 들통나서 익명 책이 강제 커밍아웃됐다고 하잖아요.에밀 아자르가 독특했던 거겠죠?죽을 때까지 몰랐다니-글은 나름 개성인 것 같아요.즐기면서 글 쓰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했어요.메리크리스마스!!^^

syo 2016-12-23 23:17   좋아요 1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시한번 메리크리스마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