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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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11은 그 질량이 너무도 거대해 일단 문학에 등장하면 다른 모든 서사를 빨아들인다. 설령 작가가 최대한 무감각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루려 애써 본들, 독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모든 부정적 감정이 그곳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쳐 나오고, 모든 긍정적 감정이 그곳으로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그 막대한 요동의 출처는 사실 책이 아니라 기억이다. 작품 속에 있는 모든 9/11들은 작품 속에 있지 않다. 작품을 읽는 이들의 기억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지만, 9/11이 독자의, 관객의, 시청자의 가슴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불에 덴 듯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가까스로 헤치고 나온(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 영향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감정의 두터운 중력을 우리는 4/16이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처음 내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들은 하나같이 9/11을 중심에 놓고 저희들끼리 북적거렸다. 9/11을 기점으로 주인공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나.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재정렬되나. 9/11은 주인공에게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손에 쥐어주었나. 그 모든 것을 주인공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의 사랑은 도대체 왜 이렇게 주제의 축에서 겉도나.

 

 

2

 

그러나 이 소설이 정치적인 것에만 관심을 할애하는 건 결코 아니다. 작가는 정치만을 다루는 게 부담이었던지, 사랑의 이야기를 그 속에 풀어놓음으로써 의미와 구도의 균형추를 맞추러 햐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의 장점은 정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낸 작가의 빼어난 수완에 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찬게즈와 에리카의 사랑은 표면적으로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사랑이지만, 국적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남녀 사이의 사랑이며 그 과정이 순탄하지도 않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도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을 넘어 뭔가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_166p 옮긴이의 말 中

 

저 대목을 읽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최소한 내겐' 더 크고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랑을 알레고리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상실과 그 뒤를 따르는 나의 상실을 가리기 위해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림막으로 쓰는 무모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랑이 겉도는 것이 아니라 9/11이, 거대한 담론이 사랑의 주변을 맴도는 당돌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렇게 시점을 전환하는 순간, 모든 서사들이 오차없이 맞물려 돌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거대 담론을 해독하는 것을 뼈대로 삼고 사랑 같은 사적인 감정들을 장식적 요소로 배치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 스스로의 무신경함에 얕은 구역질이 났다.

 

왜? 왜 그래야 하나. 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은 "더 크고 넓은 것"을 위한 알레고리여야만 하나. 왜 항상 작은 것은 큰 것을 위해 복무해야 하나. 그리고 개인적인 것은 왜 항상 더 작은 것인가.

 

어떤 억압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왜 우리는 더 "중요한" 혹은 더 "시급한" 뭔가를 위하여 탁현민의 "작은" 허물을 눈감아야 하나. 그 "더 크고 넓은 것"은 누가 정하나. 그것을 정하는 방식이 공정하다면, 왜 항상 눈감아도 좋을 허물들의 종류는 정해져 있나. 왜 전에 참아야 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그리고 다음에도 참아야만 하나.

 

더 큰 관점에 집중하는 방식은 종종 폭력적으로 소수의 팔다리를 자르고 해석과 정의를 독점하려는 경향을 띤다. 그러므로 더욱, 이 책은 순수하게 사랑 이야기라고 하자. 당신의 눈에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작가가 직접 그렇게 쓰지 않았다고 선언하더라도, 나는 그렇다고 우기고 싶다. 그리고 독자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예술은 분기(分岐)하고 차이를 생성한다던데.

 

 

3

 

증거는 많다. 찬게즈가 고향으로 눈을 돌리고 미국의 어두움을 느끼는 순간들은 에리카와의 사랑이 허물어져 가는 궤적에 그림자처럼 접붙어 있다. 미국시민, 상류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쌓아나가며 뉴욕을 누비던 찬게즈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파키스탄인으로 돌아가는 시점은 쌍둥이 빌딩이 넘어지던 날이 아니다. 사랑하는 에리카와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인식한 순간이다. 찬게즈의 감정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지점 역시 9/11이나, 고국에 펼쳐지는 엄혹한 현실에 대한 소식을 접한 때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에리카의 마음 속에서 몰아낼 수 없는 죽은 크리스의 그림자에 무릎 꿇고, 나를 크리스라고 생각해보라는 비참한 부탁에야 겨우 열리는 에리카의 몸을 안고 난 이후다. 9/11이 지나고 나서도 그 슬픈 밤이 오기 전까지는, 찬게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옮긴이는 9/11을 보며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는 서술을 통해 전사로서의 찬게즈를 읽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모든 사건이 이미 끝난 후 파키스탄에 돌아와 과거를 전하고 있는 현재의 찬게즈 입에서 나온 것이다. 찬게즈는 사랑을 한 뼘 더 잃어갈 때마다 한 뼘 더 미국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에리카를 마침내 잃었을 때, 그때서야 찬게즈는 미국을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지금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과정의 일관성과 대의를 주장하고 싶어한다. 에리카와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졌다면, 그래도 찬게즈가 미국을 버렸을까? 그래서 나는 찬게즈가 전사라고(혹은 처음부터 전사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랑의 전장에서 전사한 패배자일 뿐이다. 한 번쯤은 그 전장에서 전사해 본 경험이 있을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4

 

그녀는 메모장을 연필과 함께 나한테 주며 말했어요. "당신네 글씨가 어떻게 생겼죠?" "우르두어는 아랍어와 비슷해요. 그런데 글자 수가 더 많죠." "나한테 보여 줘요." 그래서 나는 보여 줬죠. 그녀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아름답네요. 무슨 뜻이에요?" "이건 당신 이름이에요. 밑에 것은 내 이름이고요."

_29p

그때,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니 옆구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더군요. 문득 그녀도 한때 그 자리에 멍이 들었었다는 게 떠오르더군요. 나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내 살갗에 손을 대어 봤어요. 결국 없어지겠지만 그 멍이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_151 152p

나는 그녀에게 물었어요. "초조해요?" "초조하다기보다는 불안해요. 내가 꼭 조개 같아요. 날카로운 작은 조각을 오랫동안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더 편안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천천히 그 조각을 진주로 만들었어요. 이제, 그것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그게 나오면, 뒤에 틈이 남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이 있던 자리에 틈이 남겠죠. 그래서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붙들고 있고 싶어요."

 _ 49p

 

이 책이 좋은 책인 이유는, 어떤 이에게 거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알레고리 역할을 하며 균형을 잡아주는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거대 담론이 사랑에 복무하는 역전적 방식으로 읽힐 여지 또한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알레고리 장치의 스위치를 끄고 읽었을 때 독자의 가슴에 더 맑게 울리는 순수한 사랑의 문장들이 곳곳에 별자리처럼 박혀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라면 누구든 손에 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읽어도 뜻깊겠으나, 한 번 정도는 사랑의 좁은 자리에 앉아 큰 것과 넓은 것을 돌려세우고 문장과 문장 사이를 조용히, 사적으로, 비밀스럽게 거니는 방식도 권하고 싶다. 최소한 이 책에서만큼은, 그 방식이 결코 손해 나는 독법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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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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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야기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지금부터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별 것도 아닌 내 표현력이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별 이야기나 되는 것처럼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음 커피 한 잔 가져다 놓고 쓴다.

 

 

1.

 

          사회주의는 실패한 이론일까?

 

          소련 망한거 봐라, 사회주의 그거 똥이다- 라는 공격을, 그거 진짜 사회주의 아니다, 스탈린 지 맘대로 한거지. 맑스는 그렇게 말한 적 없거든- 으로 받는다. 사회주의에 뭘 넣고 뭘 빼며,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짝퉁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이 아직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그들은 '현실'사회주의는 소련의 패망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는 정도의 워딩으로 합의점을 찍고 또 다른 전장에서 으르렁거리기로 한다. 과연 사회주의의 범주는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자들? 그것도 아니면, 맑스가 불지옥에서 돌아와 울타리를 쳐줘야 하나?

 

          맑스/베른슈타인/스탈린/트로츠키가 주장하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모두 사회주의자이므로,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내부 모순된 이론으로 봐야 할까? 통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주의의 카테고리를 조금 더 세분화해 변증법적 유물론/사회민주주의/스탈린주의/트로츠키주의의 경합으로 해석한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2.

 

          읽은 페미니즘 책 수가 늘어날수록 할 수 없는 행동이 늘어난다. 부끄러움이 늘어난다. 내가 싸질러 놓은 과거에서 풍기는 썩은내가 현재까지 침투해, 거울 속에서 머저리를 발견하고 인상 찌푸리는 빈도가 늘어난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이 모든 변화가, 특정한 사상을 0만큼 알고 있다가 10, 20만큼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다. 매번 조금씩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페미니즘은 책에서도 오고 밖에서도 온다. 높은 곳에도 있고 낮은 곳에도 있다. 거시에서도 피고 미시에서도 핀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성 소수자들은 물론 일정 수의 남성들 또한) 언어나 시선, 물리력, 사회압력에서 오는 젠더 폭력의 사례를 머릿속으로 구체화할 때,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한 장면에서 상황을 빌려와 주인공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볼 필요가 없다. 그저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 지난 주 밤에 겪었던 일, 지난 해 입사 원서를 넣으러 다니던 일들을 다이렉트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의 자리에서 페미니즘이 온다. 그래서, syo가 페미니스트라고 치고, 정희진의 모든 책, 모든 글에 100% 동의한다 해도 syo의 페미니즘은 정희진의 페미니즘과 닮았을지언정 같지는 않다. 나는 정희진을 읽을 수 있을 뿐, 정희진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사상을 지니고 syo의 바깥과 마주하며 만들어지는 페미니즘은 오롯이 syo의 것이 된다. 

 

          얼마나 많은 페미니즘들이 경합해 왔으며, 지금도 때로는 어깨를 겯고, 때로는 어깨를 부딪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 다양성의 별자리를 헤고 있다보면 까무룩해질 때가 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가 단순해 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지는 스펙트럼.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없애야 하는가, 무엇이 가장 나쁜가, 어디부터 적인가, 어디까지가 동지인가, 칼인가, 아니면 펜인가, 도대체 끝판 대장은 누구인가. 이 모든 문제에서 사상과 삶이 뒤엉키며 각자가 품는 답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왜, 누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끊어내고 추상적으로 묶어내, 하나의 사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걸까?

 

 

3.

 

하나의 전체 혹은 '복수의 전체'를 집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집합은 닫혀 있고, 닫혀 있는 것은 모두 인공적으로 닫혀 있다. 집합이란 언제나 여러 부분들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전체가 부분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특별한 의미에서 부분을 가지는 데 불과하다. 전체는 분할의 각 단계에서 본성을 바꾸는 일 없이 분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실의 전체는 정말로 분할 불가능한 연속성일 것이다."

_ 질 들뢰즈, <시네마 I>, 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45쪽에서 재인용

         집합은 두 가지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이 가야 할 길을 막을 수 있다.

 

         집합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 날카로운 칼이다. 포함의 뒷면은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다. 안과 밖이 작은 연못의 헤게모니를 잡겠다고 피터지게 싸우게 만들고 당신은 유유히 바다로 가라. "divide and conquer"는 모든 제국/자본/기득권자들이 수 천년동안 즐겨 사용함으로써 역사를 통해 그 효용을 증명한 기가 막힌 전략이며 여전히 잘 작동한다. 

 

         집합이 닫혀 있으므로 집합 안의 원소들은 얌전하다. "3 이하 자연수들의 집합" 속의 1, 2, 3은 그저 1, 2, 3으로 존재할 뿐, 서로 연산하고 연산되며 상호작용을 통해 변용될 수 없다. 여성은 또한 노동자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으며, 레즈비언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기에, 어떠한 여성도 단순히 '여성'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여러 입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용하는 1의 페미니즘은 자연히 2, 3의 페미니즘과 차이가 있다. 페미니즘은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의 연대를 통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거의 페미니즘의 운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합은 원소들간의 연대를 무참히 박탈한다.

 

 

4.

 

          훌륭한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많다. 페미니즘의 영토에는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렵고 심오한 사상들이 즐비하지만, 누구도 그 영토의 독재적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사상은 연장이다. 세상을 고치기 위해 그 연장을 손에 든 이는 페미니스트 개인이다. 많은 것들을 연대하여 함께 해결해야 하겠지만,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나의 고유한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물결처럼 '우리'가 되어 흐르는 날 가운데서도, 그 '우리'가 나와 다른 나와 또다른 n개의 나로 이루어진 '나들'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나의 연장통을 채우는 것. 이게 syo가 2017년 7월 5일 현재 지니고 있는 페미니즘이다.

 

          나는 이 책이 페미니스트 '모두'를 하나의 실로 꿰어넣을 수 있는 페미니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벨 훅스의 페미니즘이 내 연장통에 꽤 큼직한 망치와 톱을 넣어줬으므로, 다른 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다양한 연장 하나쯤 쥐어 주리라 상상하며, 이 책에 녹아 있는 그녀의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다는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5.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 더 말하려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말을 말기로 했다. 긴 말 했지만, 긴 말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일기냐 리뷰나 잠깐 고민했지만, 내 리뷰는 원래 일기였다. 그리고 그건 잠깐 고민하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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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0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씨... 뭔가 내가 횡설수설 써놓은 글을 쇼님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 같네요. 자존심 상해... 히힛(왜웃지?)

syo 2017-07-06 06:50   좋아요 0 | URL
제가 읽어보니까 다락방님, 제 글에는 그냥 012345가 붙어있을 뿐, 횡설수설은 너나 할것 없이 ㅎ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7-0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만가지가 연상되어 곱씹게 되는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이 참 좋은 글이라 생각듭니다. ^^

syo 2017-07-06 06:5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 칭찬은 황송합니다.
사실 저는 북다님의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글이요. 전 그냥 일기장에 쓴 글을 공개하는 수준이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군요, 전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선명하게 다가오더군요. 페미니즘을 읽을수록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진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syo 2017-07-06 10:14   좋아요 0 | URL
앗 곰발님 주최 이달의 당선작됐다. 짱이다!!!

cyrus 2017-07-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진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합의되지 못한 상황‘으로 이해합니다. 이를 근거로 내세워서 페미니즘의 학문적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yamoo 2017-07-06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주창하는 단 하나는 인간해방이더군요. 근데 이상하게도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세상은 이분화되는 듯합니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아닌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투쟁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을 한다? 전 이게 다분히 ‘프로파간다‘처럼 보입니다. 가만보면 ‘페미지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매우 공격적으로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 자체가 인간해방하고는 거리가 먼데....어쨌거나 인간해방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해 나가야 할 듯한데....제가 이 분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지라...더이상 언급하는 건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듯합니다.^^;;

저도 쇼님이 생각하시는 부분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리된 글로 보니, 좋네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syo 2017-07-06 21:41   좋아요 1 | URL
항상 읽고 정성껏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yamoo님 ㅎㅎㅎ

시작부터 모두가 쓱 납득하고 함께 착착 나아갈 수 있는 사상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무래도 없죠 그런 거. 심지어 자유 평등 뭐 이런 당연한 것들조차 얻기까지 진통이 있었으니까요. yamoo님이 우려하시는 부분들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yamoo님처럼 독보적이다 못해 독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가 제겐 없다보니 맨날 일기나 씁니다 ㅎㅎㅎ

쇼코 2017-08-0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써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사실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이 책 저 책 찾아가며 읽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아직 관련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제가 쇼님의 리뷰를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공감가는 부분이 퍽 많더라고요.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진다는 말씀도, 집합에서 포함의 반대는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씀도, 사상은 연장이라는 말씀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어요.
특히 사상이 연장이 된다는 부분은 저도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라 더 공감이 갔습니다. 젠더 위계의 하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자에게 페미니즘이란 그저 한 발 물러서 관조할 수 있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이 책이 저만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거겠지요.
표현이 서툴러서 제 생각을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서툴지만 꼭 표현하고 싶었어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리뷰로 좋은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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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기준으로 책을 두 가지 질문을 통해 분류하곤 한다. 지식을 전하는가/지혜를 전하는가. 지혜를 전한다면, 질문을 던지는가/답을 던지는가.



2.

            지혜와 지식의 경계는 대체로 자의적이거나 모호하며, 어떤 책은 질문과 답이 모두 있거나, 질문도 답도 없거나, 질문 같은 답, 답 같은 질문이 있거나 하므로, 저런 분류가 나이브하고 종종 폭력적이라는 것은 인정. 그럼에도 저런 분류방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세상에는 책이 너무도 많고, 읽을 시간은 너무도 모자라고, 대놓고 답을 던지는 책은 너무도 별로고(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거를 책을 고르는 데는 너무도 충분한 '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3.

            이 책은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는 척, 풀이방법만을 알려준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주는 척, 자신이 세상을 다르게 '본 법'만을 자랑한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읽었어요. 어때요. 몰랐죠? 멋지죠? 심지어 그것은 박웅현의 '풀이'일 뿐, '정답'도, 심지어 '해답'도 되지 못한다. 


            박웅현이 이철수 화백의 판화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두부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있다.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유전자 변형이 유해하지 무해한지, 그런 걱정, 주부님의 몫이 아닙니다." 사전에 따르면 주부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주인'이고 안주인은 '집안의 여자 주인'이다. 저 문구는,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는 역할을 특정 성에 한정시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남성이 밖에서 일을 하고,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구도를 아무런 고찰없이 진술한다. 더 중립적인 단어(이를테면 고객님)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주 타겟인 '주부님'들에게 가족의 건강을 고려하는 헌신, 유전자 변형의 유해성을 따져보는 지성 같은 훌륭한 가치들을 부여하여 제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 책에 별 두개를 매기기 위해, 젠더의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없다. 실제로 저건 지엽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떡하니 책 뒷편에 써 놓은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도끼- 라는 선전 문구를 보며, 문학적/예술적 감수성 말고도 인권/젠더/인종 감수성도 생각해 봐야 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가 박웅현에게 도끼로 작용했겠지만, 그 도끼가 그의 모든 얼음을 깰 수 있는 만능 도끼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물론 완전히 무용한 책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눈 앞의 얼어붙은 바다를 도끼로 깨뜨렸다고(혹은 깨뜨릴 도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쭙고 싶다.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새로움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발견한 새로움들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혹시 김훈의 책을 읽으며 박웅현이 제시하는 것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를 갖게 되셨나요. 더 나은 사람이 되셨나요. 만약 그러시다면, 그것이 진짜 이 책 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책이 제공하는 얄팍한 지적 포만감은 어떤 이들을 더 깊고 더 넓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만큼, 또 다른 어떤 이들을 그 자리에서 배 두드리며 늘어지게 한 잠 자도록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더 나아갈 이들은 배가 부르든 고프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이 책 위에 텐트를 치고 당당히 머문다. 나, 이런 좋은 책도 읽는 사람이야. 비슷한 책들을 서가에 계속 꽂아 넣으며 지적/감성적 죄책감을 자가치유한다.  



5.

            5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도 참 좋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읽어보며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을 다시 읽을 때 상실하고,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흠결을 다시 읽을 때 발견하며, 처음 읽고 꽂아 놓았던 서가에 두 번째 읽고는 다시 꽂지 않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그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기꺼이 이 책을 버리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저자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 

            주부라는 단어가 못마땅한 것이 내 과민반응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 스스로를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는 어떤 멘토께 저 문장이 문제가 있을까요- 하고 여쭈었는데, 주부라는 단어 자체가 특별히 걸리적거리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지엽적인 문제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의 단점으로 젠더 편향 문제를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그다지 문제되는 부분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아예 말하지 말까 하다가 그냥 한번 찌끄려 본다. 


            만약 저 광고 멘트를 쓴 사람이 마트에서 두부 시식코너를 맡았다고 해 보자. 여성이 카트를 끌고 다가왔을 때, "주부님(보통 고객님이라고 부르겠지만 한번 가정해보자),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라고 그/그녀가 말했다고 하자. 카트를 끌고 온 여성이 맛있게 먹고 돌아갔는데, 저쪽에서 카트를 끈 아저씨 한 사람이 두부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그때 시식코너의 그/그녀는 그 아저씨에게도 "주부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할까? 


           " ......경제활동의 단위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결혼한 여성이 여전히 가사노동과 양육의 일차적 책임자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족 안에서 갖는 돌봄노동의 책임은 반대로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원인이 되기도한다. 여성은 가족 내 주부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노동시장에서는 이차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성차별적 관념과 관행 때문이다." _<젠더와 사회> 308쪽, 허민숙과 신경아의 글


            여류 작가라는 말이 멸칭이듯, 남자 주부라는 말도 멸칭으로 작용하는 사회다. 여류 작가에서는 '여류'가, 남자 주부에서는 '주부'가 멸칭적 요소라는 것을 보면, 두 용어는 완전히 동일한 사태를 지칭한다. 직업의 위계와 젠더의 위계가 버무려져 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앞의 것은 멸칭적 요소를 제거하면 바로 쓸 수 있지만, 뒤의 용어는 멸칭적 요소를 제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주부를 대체할 새로운 용어, 용어 자체에 성별이 포함되지 않는 중립적 용어가 생기면 좋겠다고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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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28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번과 5번이 인상깊습니다. 저 역시 박웅현의 책을 서점에서 훑어보고 얄팍한 지식으로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그가 나름 이름 석자를 알린 계기가 광고계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라는 건데요...자본의 충실한 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 잘난척은 참 오지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인문학계에서 전문가를 알아주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인문 운운하며 책을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마는..

어쨌거나 오지게 공감합니다요!

syo 2017-06-28 21:35   좋아요 1 | URL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고=창의성 이라는 등식을 시도때도 없이 들이밀더라구요. 그 등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목적은 자본을 보필하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 창의성을 휘두르는 거면서 창의성이라는 단어의 긍정적 아우라만 뒤집어쓰려는 모습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책만 놓고 보자면 결국은 박웅현이나 이지성이나 같은 목표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독자들에게 책을 읽히리라-일지, 독자들에게 책을 팔리라-일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읽고 좋은 이아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바.. 이렇게 거침없이, 쉼표없이 스트레이트 잽을 시원하게 날리시니 읽는 맛이 납니다..

syo 2017-06-29 06:53   좋아요 0 | URL
더욱 용맹정진하여, 훅에 어퍼컷도 익히겠습니다.
 
문학의 기쁨
금정연.정지돈 지음 / 루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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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 더 높은 산에 올라 다른 낮은 산을 바라보거나, 밤의 비내리는 숲이나 바람에 쓸리는 갈대밭의 울음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와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에 대해 쓰기 위해 기억을 되짚다가 만약 "공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면, 공허했노라고 기록해도 될까? 내가 그 단어를 부릴 수 있을까? 그 단어가 저를 모르는 내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까?

 

            그러니까, 무언가 마주쳤을 때 어떤 거대하고 추상적인 말이 떠올랐다면, 이를테면 공허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내게로 왔다고 하면, 아, 이것이 바로 공허한 정경이구나, 하고 단언하는 그 오만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시, 내가 그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 그렇다면 내가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2.

 

            내게 내 글은 적확하지 않다. 무책임하다. 그 무책임이 의식되지 않는, 그러니까 내 글을 믿는 날들을 건강한 날이라고 불러보면, 나는 꽤 자주 앓는다.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 쓰기는 종종 무섭다. 그 누군가가 나 혼자라도 여전히 그렇다. 자신에게 비난받지 않는 글로 하루를 남기고 싶다. 몇 년을 품고 있는 작지만 큰 바람이다.

 

 

 

3.

 

            그렇다면, 읽어도 알 수 없는 타인의 글을 만났을 때 어떤 모호한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확보하지 못했다면,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4.

 

            누군가는 그들이 미래라 하고, 좀 더 매서운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현재라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는 과거가 된다. 원래 그렇다. 과거란, 특별히 지은 죄 없이 그저 우물쭈물하다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과거는 미래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미래를 겨냥한 과거의 모든 말은 실패한다. 과거에게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고,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중은 내게 오지 않은 것이고, 그들의 방식은 내게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역시 그들에 대해 쓰기를 실패한다. 

 

            끝내 그들은 내가 닿지 못할 미래로, 내게 오지 않는 현재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도 슬퍼하지 않고, 무엇도 알게 된 척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기쁨이 아닌 그들이더라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겐 기쁨일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멀찍이 내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그들과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추는 기쁨의 춤을 묵묵히 응시할 것이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떠나지 않았고, 아마 나는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5.

 

          이 글을 리뷰와 페이퍼 중 뭘로 쓸지 잠깐 고민해보았지만, 그냥 리뷰로 쓰기로 한다. 어차피 무언가 더 알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이보다 더 나은 리뷰를 쓸 깜냥이 나중에라도 생길 것 같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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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모든 죽음의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가 뒤돌아 선 모습이라고 생각해 본다. 

 

 

2.

      죽음에 대해 상상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식은 자살이었다. 

 

      그런 이미지는 오래 앓았던 중2병 때문에 시작되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중2가 지나고, 고2가 지나고, 대2가 지나고, 예비군2년차가 지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상 면도칼, 수면제, 한남대교 같은 이미지들이 따라 붙는다. 삶이 힘들었는가 하면 그럴 일도 별로 없었고, 부와 명예와 사랑을 모두 갖지 못했어도 그 중 하나는 꼭 쥐고 산다. 우는 일이 많지만 울고 나면 늘 웃고, 웃고 나면 우는 일이 두렵지 않다. 행복하냐고 물어오면 행복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해 조금 더 소담한 말이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해 보지만 아니라고 대답하지는 않는, 그런 삶을 조용히 살고 있다.

 

 

3.

     『올리브 키터리지』에 실린 13개의 이야기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밀물」은 요약하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이후 광기에 사로잡힌 수많은 사람들을 스치며 조금씩 마모되던 케빈이 마침내 어머니와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머니가 죽은 곳으로 찾아들었다가 그곳에서 7학년 때 수학을 배웠던 올리브를 만나 잠깐동안 죽음이 지연되던 중에, 폭풍처럼 몰아친 어떤 사건을 겪으며 단 한 순간에 다시금 삶을 부여잡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더 줄여보면, 느리고 길게 죽음의 노래를 부르다가 마지막 순간 짠! 내가 사실은 삶이었어, 하며 뒤돌아 웃는 이야기이다.

 

 

4.

      어쩌면 나의 죽음이 계속해서 자살로 그려지는 이유는 되려 죽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 생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힘이 오롯이 나에게 있다면, 한 번의 기회에도, 하나의 희망에도 기꺼이 죽음을 포기하고 또 한 번 다시 살아가자고 마음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5.

소용돌이 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 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 널 놓지 않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 86쪽

      케빈이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서는 짧은 순간을 보면, 마치 그가 그런 순간을 기다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삶이 내미는 손을 덥썩 움켜쥔다는 느낌이다. '널 놓지 않을게'는 '날 놓지 않을게'로 읽히고, 몇 분 전 버리려 했던 삶을 꼭 붙잡은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6.

      삶이 무거워 슬쩍 놓친 듯 놓고 싶어질 때, 우리를 구원해주는 손길이 어디서부터 뻗어 나오는지 알려주는 밀물같은 이야기였다. 누군가 살라고 내밀어 주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살리려 내미는 내 손에서 삶을 찾을 수 있고, 계기는 밖에서 찾아 올 수 있어도 씨앗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 어찌 보면 뻔하고 흔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에게 한 번 더, 딱 한 줌의 희망이 모자라 모든 불빛이 꺼져버린 세상을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 같은 날을 한 번 더 살아 지나가도 좋겠다는 희망을 건넨다. 건조하게 따뜻하고, 섬세하게 쓸쓸한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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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6-05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진한 감상평은 어찌 가능한지 항상 궁금하며 부럽습니다. ^^

syo 2017-06-05 22:55   좋아요 0 | URL
네?? 무슨말씀이세요 ㅎㅎㅎㅎ 북다이제스터님 리뷰가 항상 부러운 사람입니다. 저는 그만한 깜냥이 안 돼서 느낌이나 주어섬길 뿐인걸요.

다락방 2017-06-0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좋아요 :)

syo 2017-06-05 23:57   좋아요 0 | URL
작품에 민폐예요. 어마어마했어요

다락방 2017-06-05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님 감정 풍부해서 넘 좋아요. 헤헷.

syo 2017-06-06 00:04   좋아요 0 | URL
제 감정이요? 왜 이러세요 감정왕 다락방님이 여기서ㅎㅎ

yamoo 2017-06-0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자살 하면...저는 북한산 바위 자락이 생각납니다. 제가 자살하면 그 장소를 택할 것입니다요..ㅎㅎ

6. 짧은 리뷰가 좋네욤^^ 다락방 님 말씀마따나 짧지만 감정이 참 풍부합니다그려~^^

syo 2017-06-08 21:41   좋아요 1 | URL
고시계에는 이런 농담이 돌아다닙니다. 시험 망하면 서성한이나 가자고. 통상의 서성한은 서울에 있는 3군데 사립대학의 앞글자를 딴 용어지만, 이 사람들이 말하는 서성한은 서강대교 성수대교 한남대교라는군요ㅎ 웃을일인지 모르겠지만 웃기더라구요.

칭찬 감사합니다. 근데 막상 저는 잘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감정이 풍부한 글이었군요.....

AgalmA 2017-06-1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170614Wed 글도 그렇고 이 글도 감정 풍부한 글이라는 거 저도 동감입니다/

syo 2017-06-14 22:55   좋아요 1 | URL
한번 하고 말 이불킥을 두 번 하게 만드시는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