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을 훤히 다 꿰어 기억하리라는 기대 같은 건 애저녁에 접어 넣었고, 하다못해 제목이라도 제대로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하는 일들. 그러다 조금 힘이 남아돌면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두어줄만 더 적어놓고. 이 정도가 연초의 계획이었는데 연말 책결산하기 전에 요것부터 결산(?)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요 정도 갯수의 노트가 있다.



다 펼쳐놓고 찍어보니 되게 빽빽해 보이는 것이 뭔가 엄청 열심히 한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고...



드디어 한 권을 다 채운 QUOTE 노트. 읽은 책들을 다 리뷰를 적어두는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부지런함을 떨치는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아이 셋을 거둬먹이는 아줌마는 그렇게까지 할 여력이 없그든요... 감상문 적어둘 여력은 없지만 괜찮았던 책들은 딱 하나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을 선별해서 이렇게 베껴둔다. 나름의 요약(책 전반에서 느낀 것을 포함해서) 해시태그를 세 개로 압축해서 달아두고.



이건 어쩌면 제대로 길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를 책들. 말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담고 있는데 잊어버리면 손해니까 일단 열심히 튀어올랐던 생각들을 두서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펜으로 뱉어놓고 보는 노트라서 이름도 그냥 reading log v.2다. 버전 원은... 뭘까... 왜 2라고 붙였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 



이건 log v.2보다는 좀 더 길고 자세하고... 요약도 들어가 있고 인용문도 나름 충실하게 베껴(두려고 노력하...)진 리뷰노트. 근데 확실히 좀 성의있게 기록해놔야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이 아닌가 싶다) 하는 노트라 그런지 좀 덜 쓰게 되는 예상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이런 도전 과제!! 도 종종 들어가 있어서 쓰는 재미가 있는 노트



그리고 이건 아이들에게도 종종 쓰기를 강요하는 리딩로그

각자 따로 쓰라고 하면 절대 안 쓸 것이 너무나 뻔하므로. 그냥 늬들 가끔 생각나면 적어줘, 라고 처음엔 좋게 말했지만 요즘은 종종 강요조로 말한다. 자율적으로 안 해주면 강제로 다 각자 따로 만들어주고 쓰게 시킬거야. 그러면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아 엄마~~~!! 부르짖는다. 왜, 뭐. 왜! 



형식은 자유라고 했더니 이러는 놈도 있다.



공개할까말까 했는데 혼자 보기 너무 아까운 둘째 아이의 드로잉북(그림리뷰). 

그림책이나 그래픽 노블은 등장 캐릭터들을 따와서 재구성해 그리는 경우도 있고 일반 소설은 자기가 상상해서 그릴 때도 있고. 표지의 그림을 응용해 그릴 때도 있다. 



형식이 뭐가 됐든... 아웃풋은 진짜 중요하다는 거. 시간이 빨리 가는 건 정말 너무 아쉬운데, 시간이 흘러간 흔적을 어떻게든 이렇게 쌓아 만지고 넘겨볼 수 있는 형태를 지닌 것들로 남겨놓을 수 있는 건 참 좋다. 마음을 채워준 이야기들이 어떻게 내게 남아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로 남는 것은 더 좋다. 그러니까 읽고 뭐라도 쓰고 (그리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요, 소심한 제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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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8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영 2021-01-28 15:1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변변찮은 기록들인데 기꺼이 봐주셔서 감사하고요. 책은... 그냥 오랜 습관이 들어서 이렇게 되었지 싶습니다. 인스타그램이 있기는 한데 정말정말 너무 변방의 기록물이라 좀 남부끄럽구요 ㅎㅎ 가끔 쓰는 책이야기가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2021-01-29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학을 굉장히 싫어하면서도, 수학을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는 대충 알겠다는 희한한 애 하나, 수학감을 (나는 아니고 제 아빠 닮아서) 좀 타고 난 것 같은 애도 하나 키우고 있는 바람에 수학에 대해 얘기하는 책을 본의 아니게 많이 본다. 지금껏 본 것들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조 볼러 교수의 <스탠퍼드 수학공부법> 이다(서점에서 제목만 봤으면 절대 안 읽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순전히 믿을 만한 루트로 추천받았기 때문에 읽었...). 여하간 이런저런 분들이 '쉽게' 썼다고 자신하시는 책들을 한 번 주르륵 도장깨기해 보고 싶다는 욕심은 있다. 진짜 쉬운지 안 쉬운지 수포자 출신 1인으로서 말해주마, 뭐 이런 식으로(실현 가능성 대단히 낮...).



투병중인 윤지회 작가님 생각하면 마음이 그냥 참... 그렇다. 잘 버티고 계신것도 대단한데 책을 내셨다는 건, 정말, 일종의 직업적 소명의식과, 아이에 대한 절절함이 없고서는 한없이 실현불가능한 일일 것만 같은데. 사랑하는 마음이란 뭘까 다시 생각해 본다. 



이십여 년 남짓 가내수공업의 대표주자라 할 만한 일들에 마음과 시간을 많이 쏟았던 사람이니만큼 같은 일에 마음을 썼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건,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 마음과 좀 비슷하다. 



비슷한 습관(?)을 갖고 있어서 목차를 살펴본다. 비슷하다고 해야할지는 모르겠는데 인간적으로 사는 걸 좀 업그레이드해보잡시고, 매일매일 이건 고치자... 이걸 습관에 더해보자, 이런 느낌으로 적는 노트가 있다. 주1회씩 실천이 되긴 됐는지, 말로 끝났는지, 실로 미미한 횟수지만 실천은 했는지... 평가해 보기도 하는데 그런 게 의외로 흐물흐물 흩어지려고 하는 마음과 태도를 다시 삶에 단단히 붙들어 묶는 그런 효과가 있다. 



이런 책들 정말 좋다. 선배들이 짚어주는, well being guide 같은 그런 느낌이다. 너한테 필요한 건 이런 거지, 사는 게 원래 그래.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지. 나한테도 이런 게 필요했고,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사피엔스를 읽히고 싶었는데 나도 읽기 힘들었던 걸 중딩더러 읽으라고 할 수가... ㅎㅎㅎ 그러던 차에 이런 게 나왔다. 세상 참 좋네. 



우주에 완전히 제대로 꽂힌 애가 하나 있다. 자기가 아는 건 몽땅 다 말해주고 자기 생각에 동의를 구하고 싶어서 환장 지경에 이르렀달까... 솔직히 나는 이 분야에는 완전히 일자무식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대화상대가 되어줄 순 없고 조용히 책만 물어다 준다. 한편으로 자기의 관심사를 돌돌돌 뭉쳐가는 아이를 보는 게 재미있기도 하다. 



작가를 책으로 먼저 안 게 아니고 인스타그램으로 먼저 알았다는 웃지못할 뒷이야기가 있지만서도... 

그는 정말 독자들과의 소통에 열심이고 아이들을 몹시 좋아한다. 물론 그러니까 그림책을 만들겠지만서도 뭔가 생동감이 막 솟구쳐오르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특히 그의 Big Book 시리즈가 아주 좋을 것 같다. 



우리 집에 좀 바닥부터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몇 분 계셔서, -_- ... 이론서 좀 읽어보고 한 번 실행에 옮겨볼 생각이 되게 진지하게 있다. 될 것인가! 



이렇게 밑도끝도없이 뭔 소리야 싶은 책들은 그 불일치성, 부조화에서 오는 재미가 쏠쏠하게 있더라. 작가의 유명세가 보통이 아닌데 지금까지 한 권도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다. 가볍게 머리 털어내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관심목록에 올려놓고 봄.



이사 횟수가 남들보다 현저히 적다고는 해도 이사 거리로는 어디가서 빠지지 않을 것 같다. 그 거리들 사이에 곳곳에 떨어트려 놓은 집들과, 거기에 얽혀 있는 지난 시절의 기억들을 불러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립기도 하고 돌아가고 싶기도 한, 그런 기억들도 벌써부터 떠오른다. 지금의 집이, 훗날 노년이 되었을 때 어떻게 내 마음에 가라앉을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이 집의 책꽂이엔 모두의 취향이 공정하게 고려되어야만 한다. 히스토리컬 팬터지, 이런 거 엄청 좋아하는 애 우리 집에 하나 서식하고 있지. ㅎ



우리 집 책꽂이가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앞선 명제에 따라 요즘 예뻤다가 별로 안 예뻤다가 오락가락하는 남의 편이 좋아하는 소설(그 분은 전자책을 선호하시지만서도)이 눈에 띈다. 음, 내가 이 책을 읽어보고 말을 건네면 좋아는 하겠지만, 나는 요즘 별로 아무하고도 말을 안 하고 싶은 그런 페이즈를 지나는 중이라 글쎄올시다지만, 가끔 동거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들여다보고 관심갖고 싶기는 하다. 



사실 이건 10대 시절의 내게 보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실제 어떤 소설(이 되기나 할지는 알 수 없지만)의 초반부를 마음 내킬때마다 집필하시는 얼리 사춘기에 찌들어 나를 3시간 단위로 고문중이신 2호시끼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하지만 하도 괘씸해서, 생각만 해봤다는 사실. 



솔직히 내가 읽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크지 않은데, 문제집 주문한다고 알라딘 들어왔다가 중딩이가 이걸 보고 "와우 히가시노 게이고 또 새 책 썼네... 와나 진짜... @#()@#..." 하고 자체 말줄임표 써버린 게 너무 웃겼다. 걔가 속으로 삼킨 말은 도대체 뭐였을까?



아직 '우리 이거 읽어볼까?'가 먹히는 초2 막내에게는 먹히겠지. :) 열심히 읽고 열심히 머릿속에 저장하는 건 좋은데, 좋은데!! 저장하기 위해 엄마에게 소리내어 모든 걸 프리젠테이션해야만 하는 우리 어린이... 니가 언젠가 똑똑해지고 머리가 커지면 너 혼자 알아서 잘나진 줄 알겠지. 아니거든. 그 모든 지루하고 또 지루한 정보들을 계속 들어주고 열심히 질문도 해주고(사실 하기 싫었어) 피드백을 주면서 함께 머릿속에 개켜넣어준 엄마의 역할이 몹시 컸다는 사실을 니넘은 잊어선 아니 된다 이거야. 



제목 진짜 재미있다. 안 읽어볼 수 없게 만드는, 책을 기어코 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제목. 그러게 누가 네 이름을 그렇게 지었대니. 나도 모르겠어.



요것도 제목보고 대폭소. 어쩐지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를 떠올리게 하는데, 어떨까? 

사실 우린 모두 누군가에겐 빌런이지 않나... 갑자기 한숨이... 


책은 실컷 사서 쟁여놓고 막상 읽는 것들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다. 뭔가 좀 이상해. 이상한데 딱히 뭘 고쳐야할지는 모르겠고(외면) 안 그래도 괴로운 일들이 산적한 시절인데 도피처라도 많아야하지 않나, 그런 생각들로 자기위안을 삼는 나날들의 연속. 책이나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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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08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편식 안하려 노력하는 편인데, 라영님 서재와보니, 와우!! 정말 다양하게 읽으시네요. 환타지 문학, 고발 문학!

라영 2021-02-08 16:09   좋아요 0 | URL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읽으려고 읽을 책 리스트를 빵빵하게 채워놓고요,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죽어라 쫓아가는 중이죠 뭐.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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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소설이란 말 정말 예쁘지 않은가요.

엽편소설이라 부르는 이 장르는 단편보다도 훨씬 짧아 나뭇잎에 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짤막한 이야기를 부르는 말입니다. 저는 처음 작가의 전작(맞는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에서 처음 만났어요. 해원의 이모와 책방지기 은섭이 나뭇잎 소설 배틀을 벌이죠. 세상에 뭐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결투가 다 있나 싶은 그런 배틀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도우 작가의 산문도 좋지만 갈래 갈래 꽂아 바싹, 납작하게 잘 마른 나뭇잎들처럼 박혀있는 나뭇잎 소설들이 백미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짧디짧은 몇 페이지의 이야기가 전부인데 그 안에서도 계단을 올라가고 언제 내려가야하나 조마조마하다가 시원하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그 잔재미가 다 살아있다는 게 참 재미있어요. 이야기의 재미는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천천히 놓아주는 순간에 전신에 퍼지는 안도의 한숨과 같이 번져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져요.

화분을 배달하려고 전화를 건 기사가 알아볼 만한 지형지물을 알려달라고 하자 느닷없이 큰 나무의 나뭇가지, 꼼짝않고 서 있을 어떤 트럭 등을 나름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하여 설명하며 허둥지둥하는 주인공에게 과연 화분이 제대로 배달될 것인지,
소설 속 주인공이 불렀던 노래를 직접 만들어 본 독자는 이제 이 노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깨질 것 같은 분위기의 독서모임에서 매니저 대신 분위기를 쇄신해보고자 하는 회원이 올린 이달의 글감은 무엇일지.
책집사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어쩌면 이 작은 이야깃거리 하나가 밑그림이 되어 나중에 길고 풍성한 이야기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합니다.

여름과 가을보다 봄과 겨울에, 마음을 여미거나 풀어놓기 시작하는 그 때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딱 그 정도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글들이라, 여름엔 녹아버릴 것 같고 가을엔 그냥 바람에 휩쓸려 갈 것 같거든요. 


그날의 경험 탓인지 같은 풍경을 다른 버전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다양한 사람과 번갈아 나누는 대화보다 한 사람과 여러 번 반복해서 나누는 대화가 그렇지 않을까. 같은 위치와 각도에서 낮과 밤 사진을, 여름과 겨울 사진을 꾸준히 찍다 보면 어느새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소설을 쓰는 건 그래서인 것 같다. 정든 대상을 혼자서 보고 느끼기엔 아쉬워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 기왕 들려준다면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우리 마을에 작고 아담한, 무슨 사연이 숨은 듯한 폐가가 있습니다. 그 폐가를 어떤 청년이 빌려서 책방을 열었습니다.'라고 쓰고 싶었다.

내게 살아가는 일은 늘 혼자 정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빈 시골집과 사귀고 영하로 떨어지면 나타나는 논두렁 스케이트장과 사귀지만, 그들은 나를 알 리 없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 존재들이라 실연당할 일도 없다. 아무도 모르는 그 짝사랑을 글로 옮겨서 고백하는 건 역시 같이 정들었으면 하는 마음 탓인가 보다. -27쪽


방대한 영토가 필요한 세계는 영화가 아니라면 구현하기 어렵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빵집이나 세탁소, 책방 같은 공간은 같은 간판을 달고 우리 동네 골목에 나타나도 그리 이상할 건 없다. 비슷한 상상을 하는 이들과 독서 모임 하듯 둘러앉아 실제로 방문하고 싶은 책 속 가게들의 리스트들 적어본다면 즐거울 것 같다. 검색하면 전화번호와 위치가 뜨는 가상의 어플을 만들어도 재밌겠고, 가게 모습이 팝업처럼 솟아오르는 그림책이 있어도 소장하고 싶다. -189쪽


때로는 한정된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무런 방해나 한계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옥중에 몇십 년을 갇혀있어도 기어이 시와 산문을, 책을 쓰는 이들이 있듯이. 조지 오웰이 말했듯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208쪽


좋은 시절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말 지겨운 나날이고 사는 게 엉망진창이라고 투덜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때가 지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돌아보니 참 좋은 날들이었구나, 그땐 왜 몰랐을까 라고. 좋았던 시절은 그 무렵엔 느낄 수가 없지만, 한 시절에 이별을 고하려는 순간 새삼 좋은 날이었음을 알려주어 고맙고 서글프게 한다. -288쪽


언젠가 지쳤구나 싶을 때 은퇴를 하고, 가진 것을 팔아 작은 트럭을 장만해 바닷가 마을로 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뭇잎 소설 라이팅 트럭'이라 쓴 간판이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반갑게 커피도 따라주고, 주문받은 짧은 이야기를 써서 종이를 돌돌 말아 리본으로 묶어 건네고 싶다. 답례는 조그만 라탄 바구니에 넣으면 된다.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제시어'를 달라고 청할지도 모른다. -249~250쪽 


뱀발! 소설집이 아니라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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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정혜윤PD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요즘에야 꽤 열심히 독서기록장을 써 두지만, 말 그대로 요즘 와서다.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 마지막 장을 덮기가 무섭게 잊기 시작했다. 아주 인상적인 몇 권이 아니고서야 망각의 바다로 사라지는 것도 운명이지 뇌까리면서(별로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혜윤의 이름 석 자를 마음 속 어딘가에 강하게 새기게 한 책은 지금도 알고 있다. 



이 책이 좋아서, 정말 너무 좋아서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을 모두 기억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얼마나 훌륭한지,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 할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만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실패해서 밤새 이불을 걷어찬 경험이 없을 사람은 없을 듯하니까, 내가 왜 말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이 책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그리고 아래에서 언급할 다른 책은 또 왜 그렇게 좋았는지를 곰곰 생각하다가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자기 목소리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글쓴이의 자아가 비대하게 튀어나온 책은 껄끄럽고 불편하다. 꼭 읽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땐 네에네에 하고 읽지만, 뭐 어쩌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그런데 정혜윤의 책들은 희한케도 그런 톤이 없다. 그렇다고 글쓴이의 정체성이 없는가하면 그런 건 아닌데, 그림자처럼 행간에서 조용히 문장과 문장을 바느질해 이어붙이는 정도의 존재감만 있다. 줄여 말하자면 겸손하다. 그건 아마 그녀의 직업과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정혜윤은 기본적으로 타인과 그의 이야기를 존중하고 경청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거기서 중요한 것을 건져 보기좋게 손질할 줄 아는 사람인 까닭에 정혜윤의 글들은 조용해도 힘이 있다. 정혜윤이 담은 타인들의 목소리가 책을 떠받치는 뿌리여서. 


질문은 같아도 대답은 다양하더라는 말이 아니야. 질문은 같아도 예상을 벗어나는 말은 늘 있었어. 우리의 타인에 대한 상상력은 늘 우리를 배신해. 타인은 우리의 상상력보다 클 수 있어. 나는 예측할 수 없음에 열광하게 되었어. -23쪽


우리는 끝없이 자신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지. 프로그램으로 기획력으로 청취율로. 아마 다들 사정이 비슷할 거야. 각종 인사고과 평가가 있고 각종 자격증이 요구되고. 이런 세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설명하고 자신을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지. 그러나 증명이 우리를 끝없이 강박적으로 만든다면 반대로 우리를 끝없이 풍요롭게 만드는 세계가 있어. 그건 '발견'이야.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할 때가 있어. -53~54쪽


우리는 어떤 가능성의 사람들일까?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우리는 누구일 수 있었을까? 혹시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또 하나의 모차르트일 수도 있었을까? 기회를 갖지 못한 셰익스피어나 링컨일 수도 있었을까? 확실한 것은 말이야.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천국과도 같이 대단한 일일 거란 거야. 누군가에게 천국 한 채를 지어주는 거지-68쪽


그분은 이렇게 물었어요. '정 피디, 브람스 좋아해요?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 변주만 서른 번에 이르는 4악장. 파사칼리아의 무한한 변주. 정 피디는 정 피디 인생의 중요한 모티프를 서른 번 변주할 수 있나요?' -182쪽


우울증을 이겨낸 두 번쨰 방법은 동화책을 읽는 거예요. 어려서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것들을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어린애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엄마의 마음이 다시 찾아와요. 동화책 읽을 때 제 자식 잘못되라고 읽어주는 사람 없잖아요. 제 자식 잘되길 바라는 사람은 자기 삶도 대충 살지 않잖아요. 내가 이러면 안 되잖아 생각하잖아요. 피곤해도 힘내잖아요. 그 마음이 살아나더라고요. -293쪽



이슬아는 그의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에서 이 책의 어떤 페이지를 통째로 외웠다고 말했다. 그 부분이 너무 좋아서(그게 뭔지는 당연히 책에 나온다) 그렇게 했다고 한다. 사실「마술 라디오」에도 비슷한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프롤로그 부분에 나오기는 한다. 

정혜윤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몇 가지 핵심 낱말들이 있는데, 정혜윤이 살아내는 낱말들의 목록의 최상위단에 올라있는 게 틀림없다. 그 중 다른 하나는 확장이다. 인간을 한 두마디의 낱말로 축소시키지 말자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음을 말한다. 타인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싶어한다. 타인도 나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열심히 설득하려 한다.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말자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타인과 타인에게 존재하는 나를 잊지 말자고. 


그래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닮아가는 거야. 우리 자신이 보고싶은 미래 자체가 되어가는 거지. 그래서 내가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내 마음속의 생각은 우리가 변화해야만 그날이 온다는 것이었어. 우리가 변화해야만 세상이 아름답게 바뀐다는 말이었어. 이것이 희망을 이 사이에 넣어둔다는 말이야. 희망은 별처럼 먼 곳에 있지만 그 별을 입으로 옮겨놓는 거야.

하지만 글이 여기서 종료된 것은 아니야. 아직도 할 말이 많아. 죽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연결하는 우편배달부 역할을 했던 존 버거는 내게 영감을 줬어. 나는 '살고 싶어 하는 자'와 '살고 싶어 하는 자'를 연결하는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어. 우리는 아직은 오지 않은 아름다운 미래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24쪽


해마다 우린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을 하지.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그런 결단으로 다시 듣고 보고 행해보자는 말이야. '다시'라는 말 아름답지? 아름다움의 역사에 가장 먼저 포함시킬 만한 단어야. 우린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거야.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힘 있게. 우리가 맺는 관계가 바뀐다면, 혹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꾼다면, 세상도 바뀌어, 이건 진리야.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눈을 뜨게 하는 관계로, 서로 쉼터가 되는관계로, 서로 안고 있는, 서로 팔베개를 해주는 관계로 존재한다면 그 미래는단지 미래뿐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까지도 바꿔놓을 거야.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미래를 가리키는 화살표, 이정표가 될 거야. -30쪽


그런데 이 말은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나에게는 수많은 눈이 있다. 그래서 외로울 틈이 없다'라고 고쳐도 됩니다. 수많은 눈이 있다는 것은 근심 걱정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진짜 외로운 것은 나 말고 달리 걱정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나처럼 걱정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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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맞을텐데-


책을 읽는 내내 존재하지 않는 설계도를 그려가며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서는 도무지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윤회랄지... 인생2막이랄지... 아무튼 아주 비슷한 느낌으로 읽히는 책들인데 난해하기로는 앳킨슨의 책이 더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적어도 2권을 덮고 나니 느낌표 백 개가 머리 위로 우르르 쏟아지는 듯했는데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고 나서도 예, 그러니까 말씀하시는 바가? 싶어... 추운날 쨍하게 시린 딱 그 느낌으로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집이라도 찾아 읽고 싶어진다. 


안 그래도 달리는 머리가 고생했으니 보상차원에서 나도 청소년책 읽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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