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엔 나무들이 많다. 딱 봐도 수령이 수십 년은 넘었을 엄청난 어르신 나무들. 아래를 지나갈 때면 애들처럼 공손하게 배꼽인사를 올리고 지나가야만 할 것 같은 위엄이 있는 나무들. 그 나무들 아래를 또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다람쥐들, 따뜻한 날에 흔히 볼 수 있는 벌새들, 시도때도 없이 공원을 점령하고 있는 오리들과 기러기들. 사람 따위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 까마귀들... 이렇게 넓고 깨끗하고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마운줄도 모르고 왜때문에 맨날 산더미같은 쓰레기를 그냥 아무렇게나 내다버리는거야, 화를 냈던 오늘 아침 생각났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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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마음에 남고 머리에 남았을 땐 분명히 이유가 있다. 딱 한 군데의 접점에서만 만나고 잊혀지기에는 파고든 흔적이 생각보다 깊게 남았던 것들, 그냥 그런 게 있었지, 왜그랬는지는 모르겠어도 그 책이(영화가) 한참 잊혀지지가 않았어. 그렇게 말하고 덮어두었다가 또 어느날 문득 다른 뭔가를 끄집어낼때 딸려 나온 그것을 보고 "아 맞아 이거 그 때 참 인상깊었었는데" 말하고 또 한참 잊어버리고... 그런 일들을 많이 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이 책에도 (바로 그 순간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이유를 밝혀내거나 감정을 표현하고 정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게으름을 부리는...) 정확히 그런 습성을 짚어낸 대목이 나온다. 


"송우영, 들었지? 잘했다잖아. 네가 꾸물거리다가 편지 줄 타이밍을 놓쳤어 봐. 분명히 너는 다락 깊숙한 곳에다 편지를 넣어 뒀을 거야. 그러곤 시대에 뒤떨어진 뇌를 달고 있는 덕분에, 금방 잊어버렸겠지? 한 10년쯤 지나고 다락 정리를 하다가 편지를 발견하고는 "어, 이게 뭐지? 어머니가 쓴 편지네?" 하고 열어 보면서 펑펑 울 거야. 그러곤 또 넣어 두겠지, 다락 깊숙한 곳에다가. 그때쯤이면 더욱더 시대에 뒤떨어진 뇌가 되어 있을 테니까. 10년 후에 또 그러고, 10년 후에 또 그러고... 그러다가 끝나는 거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감정이나 편지는 다락에 넣어 두는 게 아니야. 무조건 표현하고 전달해야 해. 아무리 표현하려고 애써도 30퍼센트밖에 전달 못 한다니까. 아, 내가 말이 너무 많죠, 미안, 차연 씨."


불과 며칠 전에 인용문으로 한 번 썼던 대목인데 그만큼 확 치고 들어오는 말이어서.

나의 뒤떨어진 뇌는... 글쎄, 아마도 내가 이런 책을 읽었었던가? 이 책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서 여기다 베껴적어놓기까지 했던거지? 이러다가 결국 또 까먹어버리고, 까먹어버리고... 그럴 게 뻔하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이런 식으로라도 적어놓지 않으면 분명히 또 까먹을 거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식의 책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이다. 어떤 책과 만날 때, 사람마다 그 책과 만나는 부분은 다 다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리뷰를 읽어보면 즐겁기도 하고, 가끔은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내가 몰랐던 길로 걸어가 그 책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그 책을 보게 된다. 백 사람이 읽었으면 백 가지의 길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혼자 공상한다. 


엉겅퀴 가시 같은 게 토도도독 뻗어나와 손바닥을 찔러대기도 하고 손바닥이 튀어나와 냅다 머리통을 후려갈기기도 한다. 혹은 그냥 하드커버로 둘러싸인 종이묶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은 한 권의 책이 몽실몽실한 털뭉치처럼 뭉글거리며 무릎에 오래 머물러 있기도 한다. 물론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책이라는 게 어떤 감각을 강하게 환기시킬 때면 조금 충격을 받는다. 그저 텍스트인데 그냥 문자열은 아니구나. 작가들은 다 천재같다.


이 책의 뭐가 그렇게 기억에 오래 머무르게 했는지는 한참 나중에 알았다. 나만 그랬는지 몰라도 이 책을 보다가 굉장히 유명한 어떤 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도 생각했을 것 같다. 분명히 소재면에서의 유사성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이라든가 비아냥(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나)... 이런 것들이 분명히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감수하고서도 '유사한 재료를 썼을지언정 맛은 다르다'라는 확신을 갖고 써내려갈 수 있는 마음,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럴 수 있는 저력.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어떤 뿌리, 끈기, 바탕, 인내심, 힘, 뭐라고 부르든, 그런 것들의 근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항상 좋은 말만 들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도 그냥 계속할 수 있는 힘. 지금 그런 게 필요해서 그런가, 


김중혁 작가에게 계속 쓰게 하는 원동력은 뭘까... 그냥 좋다, 하고 싶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라서... 이런 거 말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참아내서 결국 무엇을 해내고야 마는 걸까. 잘 안 되는 것 같고, 뭘 해도 안 풀리는 것 같고,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안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냥, 계속한다는 것. 될 때에도 안 될 때에도 그저 계속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 


하루가 열리고 닫히는 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제3자마냥 관조하고 있는 순간을 갑자기 제대로 바라보는 순간 발 밑에서 뚫리는 구멍, 그런 것들이 던져오는 흐리멍덩한 회색의 감정들. 항상 뭔가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우울감.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심지어 그 무의미한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시간을 쪼개 빠듯하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수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게 앞뒤가 맞는 말이기는 한 건가 제대로 한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일단 자판을 쳐서 머릿속을 비워내야 좀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지금이 어쩐지 다락에 쑤셔넣는대신 감정을 쏟아내고 있구나... 라는 기분이 드는데 이게 뭔가,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가 전혀 모르겠지만 장맛비속에 양팔을 펄럭이면서 신나게 비 맞은 기분이어서 일단은 좀 상쾌하다. 


덧. 물론 이것도 별로 감정을 '잘' 쏟아내는 방식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덜 유해한 방식이지 싶다. 남에게 피해가 안 가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간혹 뱉어내고, 토해내는 방법도... 잘 가르치고 잘 배우면, 좀 낫지 않을까? 뭐가 나은 거냐고 묻는다면...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에 좀 힘이 덜 든다는 뜻으로 낫다고 하고 싶다.


덧2. 그리고 또 생각난건데, 

우주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러더라).

그런데도 이일영은 계속해서 말한다.

우주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송우영과 강차연과 세미(성이 기억 안난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소리를 우주로 날려 보내기로 한다. 아마도 이 소리들은 만날 수 없을 것이고 그들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실제로는 무의미한 행위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실행에 옮기는 인간의, 대부분의 우리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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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초에 있었던 일로 며칠째 마음이 산란하다.

 

세상에 나만큼 치과에 돈 많이 벌어준 사람이 있을쏘냐, 자부하면서 (별 쓰잘데없는 게 다 자랑스럽다) 산 세월이 꽤 길다. 남들은 그 돈과 시간과 건강을 갖다바치기 전에 이미 정신차리고 이를 열심히 관리하면서 살았는데 나란 인간 뭐하고 산 것인가... 여하튼 그래도 뒤늦게나마 정신차리고 주기적으로 치과를 다니며 관리한답시고 노력은 했는데 이미 망가뜨려 놓은 정도가 심하여서 열심히 챙긴다고 해도 건강하다고 보기는 힘든 범위에 들어갔을 거라고 확신한다. 본디 확신이란 말은 좀 긍정적으로 유인원 포즈로 가슴을 두드리며 써야하는 법인데 이렇게 쭈그리 감성으로 쓰고 있다니 이것 참...

 

여하간.

 

워낙 단기 체류인데다가 출국 직전에 두어 번 다니던 치과에서 마지막 점검도 받고 나와서 정말이지, 다른 건 몰라도 치아에 관해서만큼은 아무 걱정을 않고 있었는데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는다. 아, 진짜 울고 싶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 나라의 의료비는 살인적이다. 꽤 괜찮은 치과보험을 들어놓은 집의 아이가 유치를 빼는 데 든 돈이, 보험처리를 하고도 원화로 5만원 넘어 나왔으니 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이들과는 또 다른 이유로 스트레스가 많았고 체력이 심하게 딸려서(허리가 4인치가 줄었다! 살 빠지면 좋겠다 노래를 불렀어도 이런 식으로 빠지는 건 한 개도 반갑지가 않은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는데 면역력 저하인지 뭔지 원인은 모르겠어도 어느 날부터 잇몸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원래도 염증이 잘 생겼던 위치인지라 별 걱정도 않고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나아지기는 뭐가 나아지나... 양치할 때마다 세면대에 피를 뱉는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소염제를 사다 먹어야 하나, 별로 없네. 민간요법으로 버텨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인도인 친구가 이게 좋다며 클로브를 챙겨다 주는데 하루이틀 지나니 이것도 약발이 다한 것 같고. 하늘 끝까지 솟아오를 기세를 품은 진료비를 감수하며 병원을 가야 돼 말아야 돼 고민하던 어느 날 결국 예약을 잡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한인치과를 갔다. 사람들이 엄청 좋아라하는 서울치대나오신 한국인 원장님은 찾는 분들이 줄을 서셔서 그냥 급한대로 치약광고 모델같은 미소를 짓는 중국인 덴티스트에게 진료를 봤다. 치아가 너무 깨끗하다고!!!! 이렇게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 왜 크라운이 이렇게 많은지 좀 미스터리이긴 하다는 그 쌤에게 제가 정신차린 지 몇 해 안 되었다고 말하긴 느무 민망해서, 뭐 그건 됐고 어금니가 약간 감염증상이 있는 것 같고 욱신거리긴 하는데 통증이 심하지는 않은데 신경이 쓰여서 왔다니까 자기가 엑스레이를 보니까 아주 심각하지는 않은데 혹시 모르니 치주전문의한테 더블체크를 받는 게 좋겠다고 해서 다음 예약을 잡았다.

 

그리하여, 온 김에 딥클리닝을 받고, 물론 엑스레이도 찍긴 했지만- 의사 상담을 했고, 이 비용이 425달러였다는 사실.

ㅋㅋㅋㅋ

원화로 대략 50만원 넘으려나요?

항생제 처방도 받았는데 항생제는 비교적 저렴하게 2만원... ㅠ.ㅠ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항생제 투여가 끝나고 다시 미친듯이 붓기 시작한 잇몸에서 이젠 대놓고 고름이 발생.

때마침 다가온 치주과 담당의 진료예약날을 미뤄야 고민하다가 그냥 갔는데 가지 말 것을 그랬다. 살면서 온갖 의사를 다 만나봤지만 이렇게 의사 안 같은 의사도 처음 봤다. general dentist가 진료한 날의 엑스레이만 보고 (나도 엑스레이 대충 볼 줄 아는데 염증이 뿌리조직까지 간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전에 본 의사도 it looks ok to me... but let's get it double checked for safety 라고까지 말했는데), 툭툭 건드려만 보더니 무조건 뽑아야 한단다. 부가설명 같은 건 일절 없다. 그래도 명색이 어금니인데, 발치하고 뭘 어쩌겠다는 대안은 하나도 없고. 너무 기가 막혀서 안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너 되게 씨리어스한 상황인데 상황파악을 좀 못하는 것 같다, 니가 모르나 본데 너 진짜 큰일나. 지금 당장 빼버려도 균이 옆에 다 퍼져있을 수 있는데 그걸 놔두겠다고? 그러는데... 뭐지, 협박당하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내가 이걸 빼더라도 우리나라 가서 빼고 오지, 여기선 안 뺄거야. 그러니까 비행기 타서 고도가 높아지면 통증이 말도 못하게 심해질 거란다. 아, 진짜 싫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그딴 소리나 들어서 혈압 올랐는데 또 십만 원을 결제해야 했다. 살다살다 이렇게 짜증나는 경험도 참 오랜만이었다.

 

집에 와서 분노의 검색질 끝에 알아낸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나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의 치주질환 환자에게도(사진들을 너무 친절하게;;; 올려놓으셔서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더라) 기본적으로 치아를 살리는 방향으로 치료하더라는 거.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수단까지 써봐도 안 될때 발치를 하지 지금 나처럼 통증도 없고, 시린 증상도 그닥 없고, 그렇다고 치아가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이부터 빼자고 달려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오기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는 당장 빼야 된다고 난리고, 바로 염증제거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하면 최악의 경우에 발치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도 하고, 이러나저러나 결과가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신경 좀 쓰면서 버텨볼 생각.

여기서 염증치료를 받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비용 때문이다!!!!
제대로 해줄 것 같은 병원을 찾아다니는데 드는 비용, 신환등록 하면서 들어갈 기초비용, 이런 거 다 생각하면 정말 수백만원인거다... 정말이지 조기귀국하고 싶어지는 요즈음이다.

 

덧.

막판에 정신차려서 몇 년 좀 신경썼더니 치과의사한테 관리 잘했다고 칭찬받는 착한 어른이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책을 알려드리자면,

 

그니까요! 가능하면 뽑지 말라잖아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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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느닷없이 물었다. 엄마 내가 필력이 많이 딸려? 솔직한 마음으로, 열 넷짜리가 무슨 필력 운운이니, 필력이란 말이 부끄러워서 낱자로 산산히 부서지겠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뇌내대공사중인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수습 불가능한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아 "잘 쓴다고 말하기가 힘들긴 해" 정도로 대답해 주었다. 허니 아이가 다시 엄마 그러면 나 상처받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엄마가 진짜 솔직히 생각하는대로 말해 줘, 내가 어느 정도로 써? 되물어왔다. 살면서 온갖 난감한 질문 자존심 상하는 질문, 행여 대답 잘못해서 관계 틀어질까 저어되는 질문... 나름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다 헛것이었나 싶게 대답이 궁색해져서 한참을 고민했더니 "대답할 말을 못 찾는 걸 보니까 진짜 못 쓰나보다" 한다.

 

맞아, 멘탈이 부분적으로 깨져나가도 할 수 없지만, 재보수할 수 있는 걸 뭐. 솔직히 말해줄게, 엄마 생각엔 딱 3-4학년 수준인 것 같아. 이 말에 철옹성같던 자존감에 금이라도 간 표정으로 아이는 내가 정말 그렇게 못 쓰나... 생각하더니 사실 자기가 한국 떠나오기 직전에 국어쌤하고도 그 문제로 상담을 했단다. 선생님은 필사를 권하셨다고. 무슨 책을 권하시더냐 물어봤더니 스스로의 수준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따로 메모해 오진 않았는데 김유정 작가의 작품들을 필사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단다. 김유정이라...  


한국에서 같았으면야 뭐가 문제일까, 바로 집 옆에 있는 도서관 가서 책 빌려오고 공책 하나 사 주고 자, 그럼 쌤도 권하셨겠다, 이제부터 필사를 시작해보려무나. 이러고 말았겠지. 그러나 이곳은 디 유나이티드 스테잇ㅊ... 아니었던가... 책은 중고로 구해보고, 공책은 한 권 따로 사야하려나 이러다가 문득 나는 이런 걸 발견하고야 만다.



세상 참 좋네.

출판사에 죄송한 이야기지만, 내가 이렇게 격리(...)된 상황이 아니었다면 구매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이 뜻밖의 쇼핑욕구(뭐가 뜻밖이냐, 맨날 머릿속으로 카드번호를 감으며 외웠다 키보드 위에 풀어놓는 게 일상이면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리 없잖은가. 그래도 이왕이면 무료배송 받아야지, 하면서 50달러를 기어코 채운다. 이해는 하면서도 약간 억울한 게 국내판매가와 US판매가가 달라서 사실상 이게 무슨 무료배송이야 배송비 다 받으면서... 주세도 꼬박꼬박 다 떼이는데... 싶지만... 아쉬운 놈이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열심히 구입한다. 세상에 내가 여기 건너와서도 플래티넘 멤버쉽을 유지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도 몰랐는데. 

우스운 건 정확히 1주일이면 물 건너 알라딘 박스가 현관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거다. 아마존 프라임 멤버가 아닌 이상, 같은 미국 안에서 주문한 물건도 일주일이 족히 걸려야 도착할까 말까 하는데 태평양 건너 오는 택배가 더도 덜도 아닌 7일만에(사실 지난번엔 5일만에 도착해서 기함하기도 했다) 온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동시에 좀... 그 짧은 시간안에 도착하게 하려고 애를 썼을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기도 하다. 얘네는 1주일이고 2주일이고 갈 때 되면 가니까 기다려 좀, 이래서 사람을 황당하게 하더니만. 


아무튼 적지 않은 금액의 카드를 긋게 하셨으니 큰 따님, 필사 열심히 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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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책을 바로 손에 들기는 쉽지 않다. 설령 한참 재미나게 읽고 있던 책이 있어도 선택 일순위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집 안에 책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어도 그렇다. 마음 어느 한 구석을 단단하게 조여야 손에 들 수 있는 게 책이다. 적어도 요 며칠은 그렇다. 


참으로 은혜롭게도 개학한 두 달이 되자마자 바로 가을방학을 했다. 일명 fall break. 그것도 무려 2주간이나. 방학 직전에는 학부모 상담주간이라 해서 (한국에서는 정해져 있어도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선생님들이 뭘 굳이 오시냐고 뜯어말리는 그것. 여기서는 꼭 가야 하냐고 물어봤더니 세상 아이에게 관심도 없고 교육에도 무관심한 부모 취급을 받는...) 심지어 수퍼 미니멈데이라고 점심시간 직전에 끝내는 단축수업을 실시했다. 책이 다 뭐냐, 하루종일 간식 찾고 간식 먹고 돌아선 지 얼마나 됐다고 저녁 찾고... 그나마 이른 취침시간인 아홉 시가 지나면 한 숨은 돌리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아니한다. 두통이야... 


최근에 재미나게 읽었던 책들 중 하나였던 <독서모임 꾸리는 법>에서도 몇 번 언급되었고 기억은 안 나지만 다른 책에서도 몇 번은 눈에 밟힌 기억이 있는지라 <제인 오스틴 북클럽>을 읽었다. 감상평을 뭐라 쓸 수가 없다. 너무 멘탈 아웃 상태에서 찔끔거리면서 읽었어서인가 아니면 스토리가 나하고 안 맞는 건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책 뒷면에 걸려있는 수많은 찬사로 미루어 보건대 대체로 내 쪽에 문제가 있었나보다 한다. 아니면 내가 제인 오스틴에 대해 별로 호감이 없는 것일수도 있고. 사실 별로 읽어본 게 없긴 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댔다가 대차게 까이는 별볼일 없는 조연이 하나 나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아무 말이나 막 던지지 말아야지... 아니 정말 재미나게 읽을 수도 있었는데 전반적인 독서환경이 너무 안 받쳐줬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작가의 책들이 대체로 호평이다. 다른 책도 한 번은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안 맞았던 것은 아닌가보다. 갑자기 아주 오래전에 남들이 모두 좋다고 했지만, 나는 읽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었던 책들이 더불어 생각난다. 

아,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멋진 말은 이거다!


진정 신실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실성을 절대로 다른 이에게 팔지 않는다. 진정으로 신실한 사람은 자신에게 그런 특성이 있다는 것조차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인격과 강직성, 정직을 강조하는 선거 운동을 보게 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이 뭘 숨기려고 하는 건지 바로 의심을 품어야 한다. -236쪽



지금 읽어보면 어떨까? 어떤 책들과는 만난 시기가 적절치 못해 안 좋은 인상만을 갖고 헤어지기도 한다. 이 책들도 그랬던 건 아닌가 싶다. 



뭐 그냥 일종의 카달로그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멋대로 넘겨짚으며 구입했던 이 책은, 맙소사 세상에 뭐 이런 괴물같은 작가와 책이 다 있나 하는 일종의 질시섞인 경탄을 흘려가며 조금씩 아껴 읽는다. 메모할 것이 많고 카트에 일단 챙겨넣게 하는 목록이 많아서, 휘리릭 넘겨볼 수가 없다. 이 책을 안 읽었다면 어슐러 르 귄이 한 이 멋진 말을 알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내가 과학소설가로만 불린다면 화를 내고 싸우려고 덤벼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난 그렇지 않다. 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잘 맞지도 않는 그 빌어먹을 칸으로 나를 밀어넣지 말라, 나는 다 넘어버렸으니까. 나의 촉수는 좁은 칸 안에서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63쪽


자기가 관심있는, 이야기하고 싶은 토픽 아래 알려주고 싶은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즐겁게. 그리고 그 옆에는 예쁜 책등을 드러내고 주르륵 쌓여있는 한 무더기의 책들을 그렸다. 책들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서점과 도서관, 작가,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고 싶어 안달이 난 많은 책들을 소개한다. 책벌레라면 지나치지 못할 퀴즈 페이지도 있다. 잘 꾸민 테마파크 같은 책이다. 어쩌면 큐레이팅이 잘 된 갤러리처럼도 보인다. 한 몫이라면 우습지만, 책이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사람들 중 하나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책과, 읽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이 책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래야 우리 모두 서로 지탱할 힘을 얻고 책을 오래도록 살아 버티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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