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완전히 동동 떠서 갈피를 못 잡고 방랑하는 와중이라 책은 읽어도 눈으로 읽고 마음까지 머리까지 타고 올라오는 경우가 많이 없다. 슬프다. 시간은 시간대로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다 투입하고 본전도 못 찾는 느낌. 로맨스 소설을 즐겨읽지는 않지만(삐딱한 심성 반영이랄까. 그래 그땐 세상 모든 게 다 긍정적이고 러블리하겠지. 로맨스가 지나가고 나면 남는 건 현타뿐... ㅋㅋㅋ 그렇다고 연애반대주의자는 아니에요 핏 뭐 나도 한때는 그런 시절 있었으니까 -_-;), 가끔 쉬어가는 기분으로 책과 책 사이에 끼워 읽곤 한다. 일종의 리프레쉬먼트. 

한 번에 여러 권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읽는 몹쓸 습관 덕분에 모드 전환을 위해서 가운데에는 꼭 청소년 소설 또는 어린이 문학, 내지는 잡지...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종종 읽는데 이렇게 피곤한 로맨스 소설 세상 오랜만이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진 않은데 너무 마음이 피곤합니다(감정이입 잘하는 독자주의보). 


왜 남주와 여주가 다시 만나 해피엔딩을 이루기까지 이토록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소모되어야 하는걸까. 모르겠고요...


제목 그대로 12월의 어느 날 피곤에 찌들대로 찌든 우리의 여주인공은 관광객에게는 런던의 명물이자 일반 시민에게는 피로도 가중의 원인이기도 한 2층 버스에서 어떤 남자를 우연히 발견한다. 잠깐 멈춰 선 정류장에서, 2층에서 남자를 내려다 본 여자와 문득 고개를 든 남자의 시선이 얽히고 둘의 머릿속에선 아마도 만화스러운 번개 아이콘과 함께 계시적인 깨달음이 온다. 여자는 마음 속으로 남자에게 당장 이 버스에 올라타요, 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아뿔싸, 남자가 버스에 올라타서 그녀를 붙잡기 전에 버스는 떠나버리고 그들의 인연은 여기서 이만 쫑. 

하면 소설이 안 되니까


작가는 그로부터 대략 1년 남짓 후 남자를 여자의 절친의 남친으로 만들어 데려온다. 나빴습니다. 잔인하고 세속적인 설정... 재미와 더불어 굉장히 앞으로 이야기의 여정이 힘들어질 것이 너무나 비디오다. 

여주인공의 천진난만하고 구김살없는 절친은 그와 여주인공이 아주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난감한 바람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여주인공은 절친에게 너의 남친이 일년 전 나를 미치게 했던 바로 그 버스보이야... 라는 말은 내가 죽어도 못해! 안할거야! 라고 맹세하며 바야흐로 스토리는 난감함의 끝판왕을 만나러 산을 탄다... 


아무튼, 뭐, 로맨스 소설의 결말이 대략 그러하듯 장르가 이미 스포일러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까닭에 어찌 흘러갈지 방향성은 보이지 않습니까. 될놈될, 만날사람만날... 이런 천연덕스러운 멘트가 어울리는 내용이라는 게 민망쩍을 정도로. 대략 모두가 행복해지는 설정이어서 괜찮다. 누군가 지독히 불행해짐으로써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는 관계망은 너무나 피곤해(나이 탓이다...)


사건의 배경이야 크리스마스 직전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불과 며칠 전에 지나간 밸런타인 데이와도 꽤 잘 어울린다. 풍파를 몇 번씩이나 겪는 커플의 이야기지만 로맨스라면 환영이예요! 라는 분들께 추천. 그런데 또 사실 역경이 없는 로맨스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너무 어린애들 얘기 같아서 좀 풋내 나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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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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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소설이란 말 정말 예쁘지 않은가요.

엽편소설이라 부르는 이 장르는 단편보다도 훨씬 짧아 나뭇잎에 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짤막한 이야기를 부르는 말입니다. 저는 처음 작가의 전작(맞는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에서 처음 만났어요. 해원의 이모와 책방지기 은섭이 나뭇잎 소설 배틀을 벌이죠. 세상에 뭐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결투가 다 있나 싶은 그런 배틀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도우 작가의 산문도 좋지만 갈래 갈래 꽂아 바싹, 납작하게 잘 마른 나뭇잎들처럼 박혀있는 나뭇잎 소설들이 백미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짧디짧은 몇 페이지의 이야기가 전부인데 그 안에서도 계단을 올라가고 언제 내려가야하나 조마조마하다가 시원하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그 잔재미가 다 살아있다는 게 참 재미있어요. 이야기의 재미는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천천히 놓아주는 순간에 전신에 퍼지는 안도의 한숨과 같이 번져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져요.

화분을 배달하려고 전화를 건 기사가 알아볼 만한 지형지물을 알려달라고 하자 느닷없이 큰 나무의 나뭇가지, 꼼짝않고 서 있을 어떤 트럭 등을 나름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하여 설명하며 허둥지둥하는 주인공에게 과연 화분이 제대로 배달될 것인지,
소설 속 주인공이 불렀던 노래를 직접 만들어 본 독자는 이제 이 노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깨질 것 같은 분위기의 독서모임에서 매니저 대신 분위기를 쇄신해보고자 하는 회원이 올린 이달의 글감은 무엇일지.
책집사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어쩌면 이 작은 이야깃거리 하나가 밑그림이 되어 나중에 길고 풍성한 이야기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합니다.

여름과 가을보다 봄과 겨울에, 마음을 여미거나 풀어놓기 시작하는 그 때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딱 그 정도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글들이라, 여름엔 녹아버릴 것 같고 가을엔 그냥 바람에 휩쓸려 갈 것 같거든요. 


그날의 경험 탓인지 같은 풍경을 다른 버전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다양한 사람과 번갈아 나누는 대화보다 한 사람과 여러 번 반복해서 나누는 대화가 그렇지 않을까. 같은 위치와 각도에서 낮과 밤 사진을, 여름과 겨울 사진을 꾸준히 찍다 보면 어느새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소설을 쓰는 건 그래서인 것 같다. 정든 대상을 혼자서 보고 느끼기엔 아쉬워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 기왕 들려준다면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우리 마을에 작고 아담한, 무슨 사연이 숨은 듯한 폐가가 있습니다. 그 폐가를 어떤 청년이 빌려서 책방을 열었습니다.'라고 쓰고 싶었다.

내게 살아가는 일은 늘 혼자 정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빈 시골집과 사귀고 영하로 떨어지면 나타나는 논두렁 스케이트장과 사귀지만, 그들은 나를 알 리 없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 존재들이라 실연당할 일도 없다. 아무도 모르는 그 짝사랑을 글로 옮겨서 고백하는 건 역시 같이 정들었으면 하는 마음 탓인가 보다. -27쪽


방대한 영토가 필요한 세계는 영화가 아니라면 구현하기 어렵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빵집이나 세탁소, 책방 같은 공간은 같은 간판을 달고 우리 동네 골목에 나타나도 그리 이상할 건 없다. 비슷한 상상을 하는 이들과 독서 모임 하듯 둘러앉아 실제로 방문하고 싶은 책 속 가게들의 리스트들 적어본다면 즐거울 것 같다. 검색하면 전화번호와 위치가 뜨는 가상의 어플을 만들어도 재밌겠고, 가게 모습이 팝업처럼 솟아오르는 그림책이 있어도 소장하고 싶다. -189쪽


때로는 한정된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무런 방해나 한계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옥중에 몇십 년을 갇혀있어도 기어이 시와 산문을, 책을 쓰는 이들이 있듯이. 조지 오웰이 말했듯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208쪽


좋은 시절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말 지겨운 나날이고 사는 게 엉망진창이라고 투덜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때가 지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돌아보니 참 좋은 날들이었구나, 그땐 왜 몰랐을까 라고. 좋았던 시절은 그 무렵엔 느낄 수가 없지만, 한 시절에 이별을 고하려는 순간 새삼 좋은 날이었음을 알려주어 고맙고 서글프게 한다. -288쪽


언젠가 지쳤구나 싶을 때 은퇴를 하고, 가진 것을 팔아 작은 트럭을 장만해 바닷가 마을로 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뭇잎 소설 라이팅 트럭'이라 쓴 간판이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반갑게 커피도 따라주고, 주문받은 짧은 이야기를 써서 종이를 돌돌 말아 리본으로 묶어 건네고 싶다. 답례는 조그만 라탄 바구니에 넣으면 된다.
어쩌면 나는 그들에게 '제시어'를 달라고 청할지도 모른다. -249~250쪽 


뱀발! 소설집이 아니라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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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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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아는 모든 '지인'의 범주에 드는 읽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라고 느닷없이 권유를 했다. 고맙게도 내가 권하는 책을 꼬박 읽고 감상을 전해주는 이가 하나 있는데, 이렇게 물었다. 


"물론 괜찮긴 했는데, 어떤 점에서 이걸 그렇게 마음에 들어했는지 진짜 궁금했거든. 왜 좋았어?" 


이 질문에 어떤 명쾌한 대답을 주진 못했다. 애시당초 무 자르듯 한두 마디로 재단할 수 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일 수 있을까? 다만 내게, 최근에 읽은 그 어떤 소설도 이만큼의 결과 깊이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훌륭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소설이다. 어떤 인물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선하지 않다. 세상을 나눠살고 있는 우리들처럼. 


미혼모이면서 예술가인(포토콜라주를 주로 작업하는 듯한) 미아가 10대 딸을 데리고 리처드슨 부인의 세입자로 등장한다. 리처드슨 부인은, 지루할 정도로 흔하게 볼 수 있는 극도로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미아 모녀를 규정짓는다. 엘리너 리처드슨은 자신을 '베푸는 자', 미아를 '수혜자'로 정의한다. 미아는 엘리너의 속을 훤히 꿰뚫어보지만, 모르는 척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아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정의, 믿음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미아의 정신적 척추를 위협하는 제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까짓 자선가 놀음, 맞춰주면 그만이지. 아마도 그게 미아의 본심일 것이다. 엘리너는 자신이 있는 자로서 너그럽게 처신했다는 허영심에 충분히 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위선적인 평온이 흐르는 이 거리의 풍경은 그럭저럭 유지됐을 거다.


미아의 딸은 자신의 모녀가정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적 풍요로 채워진 리처드슨 가에 매혹되고 리처드슨 가의 아이들은 비자본주의적 풍요를 누리는 미아와 펄의 집에 흐르는 분위기에 매료된다. 그러나 초반의 이 화기애애한 풍경이 흐르는 동안에도 읽는 이들은 마음이 답답해지고 초조해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가 군데군데 흩뿌려지고 있는 것이 행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반부쯤 가면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있기가 쉽지 않다.


이제 티딕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한 아주 미미한 불씨지만, 모두가 여기에 기름을 끼얹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속도를 내어 갈등의 봉우리로 달린다.

엘리너의 친구 부부가 버려진 중국인 아기를 입양하려는 절차를 시작하면서, 미아는 우연한 기회에 그 아기가 자신의 중국인 동료가 되찾고 싶어하는, 그녀의 아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아의 개인적 신념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미아에게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못할 자신이 믿는 정의가 있다. 그 믿음을 위협하는 이는 누구라도 미아의 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기를 입양하려 하는 친구의 편에 선 엘리너와 아기를 엄마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믿는 미아는 적이 되어 마주보지 않을 수 없다. 


미아와 엘리너가 빚는 갈등의 원인은 밝혀보면 극히 단순하다. 내가 옳다는 믿음. 그런데 그 믿음의 근거는 뭐지?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절대적 정의라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는 행위가 불러 일으키는 문제들이 점점 커지는데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감정이 생각의 구역을 침범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정신 승리의 영역에 들어가 버린다.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비구름처럼 감정이 증폭되면 대개 감정은 부정적으로 발산된다. 이성적 시스템은 통제구역을 통솔할 능력을 상실하기 일보직전에 놓인다. 이쯤 오면 스파이더맨의 그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하고 싶어진다. Great power always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강력한 믿음에는 강력한 회의가 필요하다. 


정리.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면서 어디에도 취하지 않고 명료한 사고를 유지하기를 요구하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그게 내가 많은 책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했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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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
루스 호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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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책을 읽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둘째가 완전히 제대로 꽂힌 시리즈가 있는데, 이 책은 알라딘에서 취급을 안 해서 (시리즈 중에 몇 권은 있기도 하더라만 너무 비싸...) 다른 곳에서 주문하곤 합니다.. 타이틀 The Keeper of Lost (Cities)를 입력하려고 하는데 lost까지 입력하고 나니 자동검색으로 뜨는 목록 중에 이 책 The Keeper of Lost Things 이 있더란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리뷰가 좋았... 표지도 예뻤어요(표지에 잘 낚이는 1인). 물론 원서와 번역서 표지는 좀 다르긴 하지만 번역서 표지도 예쁘긴 하고요. 잃어버린 뭔가를 지키는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많은가... 새로 등장한 출판계의 클랜인가 (이쯤 해둬야겠). 같은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고요. 


제목을 입력하고 잠시 기다려보니 역시나 번역서가 있습니다. 가끔 읽고 싶지만 원서를 읽기가 귀찮아서 (읽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걸 어쩌겠어요) 있을까 궁금한 손가락을 두드려보면 놀랍게도 상당히 많은 책들이 번역돼 있는 걸 발견하게 돼요. 안타깝게도 얼마 못 가 절판이 되고요. 그 많은 책들은 어디에 묻히게 될까... 잊혀진 책들의 지킴이는 없을까... 아, 상상이 망상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코 앞이라 그만둬야겠습니다. 


아무튼- 


주인공일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초반에 황망(하지는 않고 뭐 정황상 예상은 됩니다만)하게 책 속 세상을 떠나버리고 조연인 줄 알았던 실제 주인공이 쭈뼛거리면서 중앙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소설가인 앤서니 퍼듀는 약혼자가 일찌감치 세상을 뜬 뒤 혼자만의 삶을 이어갑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취미랄지 기행이랄지... 를 갖고 있어요. 누군가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주워 보관하죠. 물건을 발견한 장소와 날짜, 시간을 메모한 노트를 덧붙여서 거대한 분실물들의 박물관과 같은 곳을 만든 셈입니다. 앤서니에게는 이 곳이 성소와도 같습니다. 그에게는 이 기행이 각별할 수 밖에 없는 가슴 아픈 이유가 있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앤서니는 그의 작업과 생활 전반을 보조하던 비서 로라에게 그의 전재산을 상속합니다. 그의 손에 들어온 분실물들을 주인에게 찾아달라는 무거운 부탁과 함께. 누군가에게는 그 물건을 되찾는 것이 오랫동안 망가져 있던 심장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생명력으로 가득했는데 그걸 빼앗겼지. 나에겐 삶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죽은 삶을 택했고. 그녀는 아마 격분했을 거야. 그리고 마음 아파했을 거라고 로버트는 말했지. 나는 걷기 시작하고, 다시 세상을 건드리기 시작했어. 그러던 어느 날 장갑을 한 짝 발견했지. 여성용이고, 파란색 가죽에 오른손용이었어. 난 그걸 집에 가져와서 꼬리표를 달았지. 그게 뭐고, 어디서 발견했는지 써서 말이야. 그렇게 내 분실물 수집이 시작되었어. 어쩌면 내가 발견한 모든 분실물들을 구출하면, 누군가가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아끼는 것을 구출해 줄 거라고, 그래서 언젠가는 그걸 돌려받고 깨진 약속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네. 다른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모으는 걸 멈추지 않았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그 조그만 삶의 조각들이 나에게 이야기의 영감을 줘서 다시 글을 쓰게 만들었지.


대부분의 물건들은 별 가치가 없고 돌려받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자네가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이 잃어버린 걸 되찾아줘서 단 하나의 부서진 심장이라도 고쳐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거야. -108쪽


로라와 함께 이야기의 다른 축을 지탱하는 다른 주인공의 인생사에서도 사람을 사람과 엮는 많은 관계의 모습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인지하는 범위 바깥에도 다른 형태의 삶의 동반자의 모습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논픽션과 달리 소설은 살아가는 모습의 다양성과 내가 미처 몰랐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갖고 있는 감정의 수많은 결들을 더듬어보게 합니다. 감정은 손길이 닿았던 물건과 환경에 녹아 스며들어 소유주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좋은 사물, 느낌이 좋은 공간이라는 말이 그냥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고.


어떤 이야기건, 이야기의 종류에 상관없이. 그것이 꼭 뭐라고 이름붙여 분석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세상에 이런 것을 느끼고 이렇고 저런 마음들에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르고는 분명히 다를 테니까요. 세상이, 시스템이 너무나 똑똑해지고 있으니 인간은 굳이 똑같이 기계처럼 똑똑해지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인간다움을 더 연마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차별화가 별 건가요, 뭐... 


여기까지 쓰고 지금까지 살면서 잃어버린 수많은 물건들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봤는데 십수년 전에 남편 처음 만났던 날 두르고 나갔던 블랙워치 패턴의 캐시미어 머플러가 되게 기억나네요. 무려 에딘버러에서 사 온 건데, 아저씨, 남의 편, 아니면 그대 원하는대로 so called 오라버니, 내 머플러 도로 사 줘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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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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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우시고 소심하신 투덜이 번역가 선생님.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았거나에 관계없이 한 분야에서 대표로 이름을 걸 만한 높이에 도달한 분들은 사적인 글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세상 천지에 누가 나한테 관심이나 있겠나 싶은 사람(물론 마이너스적 관심조차도 기꺼이 즐기시는 %가 분명 존재하지만서도)도 공개적으로 구시렁대는 흔적을 남겨 놓고서는 한참을 아 괜히 말했나, 괜히 썼나, 고민하게 마련인데 이 정도 네임 밸류가 있으신 분은 오죽할까요. 그것도 마음 속 방이 유난히 작은 사람들에게는 몇 날 몇 일의 이불킥을 예약하고도 남을텐데. 예전에 노지양 번역가의 에세이를 읽을 때도 약간 그런 기분이 들긴 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속으로 많이도 오래도 삭히셨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마음 속 한 자리에 발효기를 달고 사는 사람들은 힘들어요. 진짜. 에세이를 읽다 보면 난 이 마음 너무 잘 알겠다, 그러면 좀 지나치게 감정이입돼서 읽기 힘들어질 수도 있을 법 한데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는 없구요. 나도 이런 사람 걸려본 적 있는데 진짜 짜증나지, 그러고 웃으면서 넘어가는 정도. 


다른 에세이들과 차별화되는 점이라면 작가의 전문분야 덕분에 들을 수 있는 곁 이야기가 흥미로워요. 그 작가에게 유별난 관심이 있어서 따로 찾아보거나 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뒷이야기(라고 쓰면 뒷담화 같아서 좀 별로인데 딱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를 듣는 건 아주 재미있네요. 


저는 개인사를 듣는 걸 아주 좋아해요. 그래서 에세이나 인터뷰집을 좋아합니다. 


한 권의 에세이나 인터뷰를 통해 듣는 압축되거나 부분적으로 과장되고 또 생략되기도 하지만 어디에나 빛나는 구석이 있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세계를 담고 있는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으니까요. 소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내게 동시대성을 느끼게 한다는 것 정도일 것 같고요. 매력 없는 에세이는 딱 그거죠, 시종일관 교조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들. 뭐라는 거야 정말, 종이뭉치 앞에 무릎꿇고 사죄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없.


완전히 대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타깃은 아마도 작가와 가장 비슷한 정체성을 두르고 계신 분들이겠지만서도,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부분 조금쯤은 공유하면서 사는데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이어도 이해할 수 있는 공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요즘은 분실하신 분들이 좀 많은 것 같긴 하지만) 가진 종족이니, 웃고 싶을 때라면 언제든 추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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