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가 저자의 이른 죽음과 더불어 엄청나게 화제가 됐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은 이랬다. 아무리 인기가 있고 아무리 재미가 있고 아무리 대작이 될 뻔한 자질(?)이 있었으면 뭐 하냐, 작가가 죽었는데. 이 시리즈는 이제 이대로 끝난 건데. 이다혜 작가가 어디선가 언급했듯 스티그 라르손은 본의 아니게 전세계를 욕구불만에 빠트리고 말았는데, 굳이 뭘 읽어서 셀프고문을 하나. 


사람은 역시 함부로 입을 놀리면 못 쓴다. 


첫 책이 도대체 무슨 경로로 내 손에 들어왔는지는 기억도 안 나는데(즉 내가 산 건 아니란 뜻), 그리고 어쩐지 으스스하니 소름이 돋는 표지여서(장르를 생각하면 엄청 잘 만든 표지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늘 그렇듯 그 앞줄은 또 다른 책들을 주르륵 꽂아놓는 통에 존재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가 우연히 지난주에 툭,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Aㅏ 너도 우리집에 있었냐... 이렇게 멋적은 소리를 하며 책을 펼치고 말았지요 orz


그리고 어제 하루를 통째로 들이부어 2권을 끝내고 나니 이게 심히 고민스러운거다. 계속 이 층계를 올라가서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봐야 할까 이제라도 발걸음을 돌려 내려가야 할까.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스티그 라르손이 원래 본인이 기획했던대로 10부작으로, 쓰려고 했던 이야기를 썼다면 망설이지 않고 끝까지 갔을 것이다. 


작가가 자신을 투사해 만든 것 같은 미카엘도, 예사롭지 않은 과거를 가진, 셜록과 비슷한 고기능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가진 리스베트도 그 정도의 매력과 끝까지 파 보고 싶은 스토리가 있는 인물인데다 작가가 이 시리즈를 통해 그의 인생에서 쭈욱 추구해 온, 그에게 중요했던 이슈들을 아낌없이 터뜨리려고 했다는 걸 앞의 두 권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의 때이른 사망이 아쉽고, 공식적으로 지명된 후속 작가이기는 하지만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스티그 라르손이 원래 썼어야 했던 폭발력 있는(있다못해 분명 터졌을 거다, 밀레니엄을 읽었으면 누구라도 이 생각 하지 않았을까) 클라이막스를 과연 만들었을까... 를 생각해 보면, 고개가 좀 비뚜름해진다. 끝까지 다 읽은 분들의 리뷰를 읽어보면 예상이 과히 틀리지 않은 것 같고. 


하여, 결론은 아쉽지만 여기서 덮는다는 것. 


그건 그렇고 옛날부터 참 궁금했는데, 왜 이런 스릴러 소설들의 주인공들 앞에선 여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맥을 못 추는 거죠? 대체 이 근본없는(?) 캐릭터 전통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어쩐지 돈 없고 싹싹한 여주인공 앞에선 돈이 많거나 인물이 출중한 남자들이 눈빛이 흐물흐물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도 같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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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6-15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이 시리즈 3권까지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작가가 사망했다고 해서 좌절했었어요ㅜㅜ 기획했던대로 10부작 완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다른 작가가 이어서 썼다고 하지만 어떨지 모르겠어서 손이 안 가네요.

라영 2021-06-15 13:07   좋아요 2 | URL
아 정말 동감 백번이요. 저도 그래서 그냥 여기서 포기하기로 했어요. 물론 그 분 입장에서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으며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야 없었겠지만, 그건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을 때 보는 방향이고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좀(많이) 아쉬울테고 그렇고 저렇고 한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거죠... 이 책의 운명이려니 해도 좀 안타깝긴 해요.
 
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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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인데 읽는 데 오래 걸린다. 책등을 세워 엎어둔 채 자꾸 앞 베란다 창을 통해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흐리멍덩한 날에는 산의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때도 있고, 그나마도 안 보일 때도 있는데, 유난히 맑고 쨍한 날에는 신기하게도 지독한 난근시에 시달리는 내 눈에조차 산에 빽빽하게 심긴 나무들의 실루엣이 도돌도돌하니 엠보싱 무늬처럼 들어와 박히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 딱 그렇게, '갈 만한 짓을 했으니 갔겠지' 하며 한데 생각 속에 모아 생각했던 소년원 아이들이 제각각 심겨 있는 별개의 한 그루 나무처럼 도드라져 읽힌다. 글을 쓰신 선생님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질문이 내게서는 계속 떠나지 않는다. 하나하나는 이렇게 순한 마음이 여전한 아이들인데, 왜 이 아이들은 거기에 가 있을까. 


비슷한 때에 기획은 다르지만 어쨌건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었던 경험을 쓴 책이 출간이 됐었는데 그 책은 상당히 실망스러웠었다. 책에서 내가 기대하는 기본적인 몇 가지 잣대가 있는데 그 중 어떤 것도 충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책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앎을 가져다 주었고, 아마도 나의 인간성 어딘가에 바닥에 묻혀 있기는 있을 감정들을 흔들어 깨웠고, 우리가 뭔가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인 공감대와 이슈를 형성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했다. 어떤 면에서는 희망도 주었고. 그러니까 혹시 이 책을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활자가 주는 여러 종류의 재미를 경험하게 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웃음, 슬픔, 안타까움, 분노를 느끼는 것,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는 것, 아이들이 이 모두를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살다가 심심할 때, 마음이 힘들 때, 외로울때, 무언가에 대한 지식을 더 알고 싶어질 때도 책을 펴게 되지 않을까. -44쪽


의도를 지닌 이야기였다. 그렇게 짐작되었다. 소년의 마음에 '하고 싶은 일'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 의도.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무작정 방치하지 않는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돈을 모으든 공부를 하든, 어떤 노력이건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길 안의 삶'을 살게 된다. 박찬일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슬쩍, 작은 일 하나 보여주고 "이거 하고 싶지 않니?"라는 말을 가만히 건넨다. 그 일 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이 소년들에게 맑은 물로 스미고 있다. -54쪽 


"아, 그러면 나는 처음으로 민우에게 책을 읽어준 사람이 된 거야? 17년 만에?"

"예, 그렇습니다."

"우아! 영광이야." 

민우는 생애 17년 만에 첫 번째인 일이 두 가지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미있는 책을 만났고, 자신만을 위해 책을 읽어준 최초의 어른이 생겼다. 이 사실이, 나는 눈물겹다. -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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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6-0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이 책 너무 좋았아요!

라영 2021-06-09 16: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사실 마음이 아파서 쭉 읽기는 힘들었는데 정말 읽은 보람이 있더라고요.
 
해피엔딩보다 더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 지음, 차윤진 옮김 / 나무의철학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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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와우. 이 책을 사 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일 년만에 읽었는데, 안 읽고 묻었으면 아까웠겠네, 싶었다. 


시작이 너무 웹소설 풍이어서, 이거 뭘까... 계속 읽을까 말까 고민이 슬슬 되는데 여주인공의 남편이 4페이지만에 교통사고로 급사해 버린다. 그럼 이 소설 전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심지어 여주와 남주는 띨렁 6개월을 교제하고, 결혼한 지는 9일인가 10일밖에 안 되었다. 그냥 가볍게 드라마처럼 흘러간다면 이것은 죽은 남편과 몹시 닮은 남자가 어느 순간 나타나서 여주인공은 내가 이러지 말아야지 내지는 설마 그럴리가 없는데, 하며 새로운 남주 후보에게 빠져드는... 그런 싸구려 전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그렇게 김이 새지는 아니하고, 다만 양가 부모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결혼을 번갯불에 콩볶아먹는 프로세스로 해치운 덕분에 만날 일이 없었던 시어머니를 남편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는 공포와 경악의 크로스같은 상황에 놓이고 만다. 

당연히 시어머니가 되는 수잔은 여주인공 엘시와 마찬가지로, 갈래는 조금 다르지만 만만찮은 경악스럽고 황당무계한 슬픔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남편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죽은 아들 말고는 다른 자식이 없었으니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던 아들 벤이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소식도 기가 막힌데 그 아들이 자기 몰래 결혼을 했단다.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부부이며, 내가 그의 직계 가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판국에 수잔은 어떻게 이성을 챙겨야 하는 걸까. 

발만 조금 잘못 디뎌도 막장드라마가 될 소지가 다분한 이 이야기감은, 놀랍게도 비탄과 상실을 극복하는 유대의 서사가 된다. 더불어 가족의 죽음을 겪은 이들이 (아마도) 공통적으로 겪는 전형적인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것도 이 소설의 좋은 점 중 하나겠다. 자신을 비난하고 종종 학대하기까지 하는 이유까지도. 남이나 다름없었던 사람과 가족으로서 고통을 나누며 상처를 보듬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상실에서 애도로 넘어가는 기간에 당사자의 마음에서 불어닥치는 후폭풍이 있겠거니 짐작하는 것과 실제 일어나는 감정사의 규모의 간극에 숨을 삼킬 수밖에. 
다만 개인적으로 짧은 시간에 인생을 통째로 갖다바치고 싶어지는 절절한 사랑을 하느냐마느냐 이런 이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편이어서 그게 좀 마이너스. 

덧. 제일 좋았던 캐릭터는 미스터 조지 캘러핸. 부지런하고, 솔직하고, 위트있고, 친절하고, 그리고 필요할 때는 자기 감정에 충실히 빠져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도서관에 출근하듯 방문하는 것으로 매일 삶의 닻을 삼고 있다는 점이...

"부모님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부모님은 당신들 바람대로 행동하실 거고 그건 엘시에게 필요한 것과는 아주 다르니까. 그래서 말인데,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말아요. 내가 무슨 전문가라도 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스티븐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내게 해주려는 것과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바가 아주 다르다고 깨달았어요. 사람들은 우리 입장이 되는 게 너무 두려워서 언어능력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흘려들어요." -242쪽 

"그런데 나를 들여보내줄까?"
그가 말한다. 그렇게 우스운 이야기도 아닌데 우리는 둘 다 웃는다. 사소하게라도 미소지을 만한 일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독특하고 터프해도, 세상은 반드시 우리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는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버티기다.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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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맨스 북클럽 브로맨스 북클럽 1
리사 케이 애덤스 지음, 최설희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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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목만 보면 오해를 잔뜩 할 수 있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요?)


예전에 어디선가도 이 비슷한 말을 본 적이 있는데, 로맨스야말로 제일가는 판타지 장르의 한 갈래라고. 적극 동의한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딨어? 이혼하자는 아내의 마음을 돌리려고 (플러스, 미혼은 여자친구)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여자가 정말 바라는 게 뭔지를 공부하는 남자들의 북클럽이라니, 내가 엄연히 세상의 많고 많은 판타지 매니아 중 한 사람이지만, 이것만큼 판타지스러운 설정이 없겠다. 차라리 오늘 해질녘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무르타트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다리는 게 더 현실적이야... (쓰고서도 흠칫했다, 몇 년만에 다시 떠올린 이름인지) 네, 삐딱선은 이 정도로만 타기로 하고.


메이저리거인 개빈은 난데없이 아내의 이혼하자는 말에 일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들 사이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라는 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그의 생각이고, 사실 문제는 쌓이고 쌓인 불쏘시개가 되어 언제든 잿더미가 되도록 불살라질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 그런데 뭐,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그나마 이 커플은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주인공이라도 있지, 그냥 그렇게 말이 안 통해서 악을 쓰면서 싸우다가, 어느 순간 말해봤자 들어먹지도 않는데, 포기하고 그냥 무감한 상태로 이래저래 사는듯 마는듯 그렇게 하우스메이트처럼... 살면 슬플 것 같기도 하고 되게 속시원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개빈은 이대로 결혼 생활을 쫑낼 생각이 1도 없고, 세아는 결혼을 지속할 생각이 당연 없는데 개빈은 유예기간을 달라고 요청한다. 대신 기한이 끝나면 집이고 양육비고 달라는 대로 다 준다는 조건으로. 세아로서는 (짜증은 나도) 이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게임같은 이 요상한 밀당이 벌어진다.


진짜 핵심은 할리퀸 로맨스 같은 그 소설 속 로맨스 소설이, 개빈이 실제로 탐독하며 실습하는 교재로 사용하는 그 소설을 우리도 읽어볼 수 있다는 거다. 열 몇살의 철딱서니없이 세상의 남자가 다 그런 줄 알고 망상에 젖어 살던 시절이 생각나서 재미있었지만, 지금와서 보니 애들이 뭘 안다고 그렇게 수위높은 텍스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읽었던 건지 새삼 소름이 돋는다. 


"언제 어디가 됐든 우리는 그동안의 경험이 합쳐 이루어진 존재야.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로맨스 소설에서도 그렇잖아. 책이 시작되기 전에 주인공이 겪었던 일이 결국은 책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지."

"근데 우린 지금 내 진짜 삶을 얘기하는 거잖아, 책이 아니라." 

"똑같은 원리야." 맬컴이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설에 공감하는 거야.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해주니까." -139쪽


"아들, 누군가와 결혼해서 30년 가까이 함꼐 살면서 한두 번 지옥을 경험하지 않을 수는 없단다. 네 엄마한테 물어보면, 혼자서 너희 두 녀석을 키울 수가 없어서 날 떠나지 않았던 게 몇 번이나 된다고 말할 거다. 내가 이걸 아는 건, 네 엄마가 내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해서고." -214쪽


나만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적나라한 묘사가 들어있는 책은 불편하고 힘들다. 좋다고 눈을 빛내면서 이런 문장들을 삼킬듯이 읽을 수 있는 것도 10대 20대의 특권일지도? ㅎㅎㅎ 로맨스가 피곤해서 드라마도 안 보는 난데 왜 책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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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갇히다 -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러지
김성일 외 지음 / 구픽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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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상상력 끝내준다. 


세상에 없는 신선한 방식으로 찬탄하는 말을 하고 싶어도, 표현력도 달리거니와 그저 모두가 오, 진짜? 정도로 수긍 공감할 수 있게 단순히 감상을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으까... 라고 쓰는 순간, 아마도 하지현 선생님 책에서 본 것 같긴 한데 '헐' '열여덟*나' 로 모든 의사소통이 다 되던 젊은냥반들의 에피소드가 떠오르면서 손이 오그라붙었다. 아... 그나마 '상상력 끝내준다'를 붙여놔서 다행일지. 저는 그 랭귀지패밀리에 끼기엔 좀 연식이 그러한지라.


아무튼...


읽을 책을 고를 때의 내 모습을 머릿속에 재생해 보면 대강 이렇다. 대체로 일단 '읽어야 할 책들' 칸에 꽂아둔 책들을 주욱 눈으로 쓸어본다. 여기서 먼저 골라 읽는 게 맞는데, 이쪽 칸에서 뽑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럼 여긴 왜 사다 메워놓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게 의문이네요. 아마도 비어보이면 좀 쓸쓸하니까...?


그 TBR(To Be Read)칸을 지나 90도로 꺾어지게 놓인 책꽂이로 옮겨오면 이미 안쪽에 꽂아둔 책들은 책등의 존재조차 보이지 않게 사라진 지 오래고 그 앞으로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책들이 빽빽하게 몸을 누이고 있다. 아이고 보는 내가 다 불편하고 좀이 쑤시네. 미안. 도서관 책들은, 당연하게도 대출기한이 있으므로 먼저 손이 닿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인생, 뭐가 됐든 마감이 없으면 진도가 안 나가요. 휴...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달인가 아니면 그 전인가, 신간 프리뷰 적을 때 '오 읽고 싶어!!' 하고 핀해 둔 것인데 마침 도서관의 신간서가에 꽂혀 있더라. 이상하게 내가 읽고는 싶지만 새 책은 그만 좀 사들여야하지 않겠어? 하고 결심하고 난 뒤로(물론 결심은 깨기 위해서 하는 거고)상당히 많은 수의 관심신간들이 우리 도서관에 들어왔다. 

어머 이거슨 웬 우연. 나의 지독한 공상과 기대의 헛발질이지만, 어쨌건 간에 굉장히 땡큐한 마음으로 잔뜩 빌려다는 놓습니다만, 어떤 것들은 허겁지겁 읽고 어떤 것들은 열 페이지 남짓 읽다가 도로 반납하고... 어째 식생활을 이런 식으로 했으면 소화불량에 위염 걸리기 딱 좋은데. 그런 불량한 독서생활을 지속 중이다. 이것도 무슨 큰 병이나 지독한 슬럼프라도 오지 않는 이상 쉽게 낫지 않을 중병 같아 보인다. 


이게 다 무슨 횡설수설인지, 또 각설을 한 번 더 하고 


<책에 갇히다>는 개중 끝까지 다 챙겨 읽었고 재미도 쏠쏠하니 챙겼다. 실속 있는 독서였다고나 할까. 앤솔로지는 늘 카달로그처럼 읽는다.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저는 카달로그를 그 옛날 영단어 공부하듯 집중 정독하면서 읽는 스따일입니다. *-_-* 

상품 카달로그가 그렇듯 어머 이건 사야해(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야겠다), 괜찮지만 내 스타일 아니네(이걸로 끝), ... 그리고 뭐 기타등등, 그런 것이다(잔인한 말은 무조건 생략해야한다). 


책과 서점 그리고 이야기에 대해 쓴 이야기들은,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무조건 읽을 수밖에 없다. 이건 나한테만 있는 병은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좀 유난히 혹독하게 걸린 것은 맞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발군이다. 특히 우리가 고전의 반열에 올린 작품들이 부족 탄생 설화가 되어있는 세계의 이야기, 종이책 대신 살아있는 책이 되어 인권이란 게 없는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인간책의 이야기, VR책의 주인공 실종사건 이야기. 이 단편들은 기막힌 아이디어의 승리였고 물개박수를 쳐줄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마음을 준 이야기는 <켠>이었다. 나는 헌책방 이야기도 좋아하고 우리가 흔히 별 자각없이 아무렇게나 쓰는 말들에 뽀얗게 쌓인 먼지를 닦아 반질반질하니 윤을 내고 원래의 색을 입혀주는 단어발굴가(누가 사전덕후 아니랄까봐)를 발견하면, 그냥 막 마음이 다 노글노글해진다. 


이런 책들은 번역돼서 지구상의 적고적은 우리 동족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지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이야기에 이르러서 이건 안되겠구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다. 이 미묘한 말과 뜻의 맛을 살리는 건, 이건 번역이 안 되겠지. 앨리스나 팬텀 톨부스가 우리말로 번역됐을때 니맛도 내맛도 아닌 밍숭맹숭한 텍스트가 되어버린 것과 똑같겠... 


뱀발_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 텍스트를 그대로 카피해다 파파고에 한 번 넣어보았다. 파파고의 영작 실력은 50점 주고 싶었... 

조승연 작가가 오래전에 어디 방송에서였나, '번역기 성능이 좋아진대도 우리가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뭐 이 비슷한 강의를 했었는데, 맞는 말이다. ㅋㅋㅋㅋ 오밤중에 포복절도했음. 특히 'nyangba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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