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읽은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생각난다.
물론 다시 찾아서 읽어본다면 열아홉의 내가 읽었던 정호승의 감흥과
전혀 별개의 시들로 읽힐 것이므로 애써 그런 수고는 덮어두고 싶다.

이후로 몇편의 시집과 산문을 거쳐 오랜만에 읽은 정호승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어로 세상에 둘 없는 국어사전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 몸보다 수십배는 큰 암석에 부처를 새기는 석공이나
죽음에 으르는 순간까지 예수의 모습을 그리는 화가와 같이.

말하자면 정호승은 정호승이었는데, 작년에 출간된 이 시집에서 어느 순간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다잡고 읽은 시들이 있다.
일흔이 된 시인의 시편 앞에서 정신이 맑아지는 밤이다.

...............
싸락눈


나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내가 늘 기다리는 사람과 함께 내리는
내가 늘 그리워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내리는
내가 미워한 사람도 이별한 사람도
꼭 한사람씩 데리고 내리는
어떤 때는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과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과 함께 내리는
싸락눈도 너무 아프다

...............
두물머리


해 질 무렵
양평 두물머리 강가에 다다른 진흙소가
강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강을 건너간다
나는 고요히 연꽃 한송이 들고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진흙소를 따라
당신에게 가는 강을 건너간다
수종사 저녁 종소리가 들린다

...............
종지기


마음속에 작은 시골 교회 하나 지어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처럼
새벽마다 종을 치는 종지기가 되어야지
하늘의 종을 치는 종지기가 되어
종소리마다 함박눈으로 펑펑 내리게 해야지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푸른 별들의 종소리를 울리며
함박눈을 맞으며
그리운 당신을 만나러 가야지

...............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대를 만나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그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직 선로가 없어도
오늘은 그대를 만나러 간다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한배를 타고 하늘로 가는 길이 멀지 않느냐
혹시 배는 고프지 않느냐
엄마는 신발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아빠는 아픈 가슴에서 그리움의 면발을 뽑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어주었는데
친구들이랑 맛있게 먹긴 먹었느냐

그대는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인지
왜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볼 수 없는 세계인지
그대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

팽목항의 갈매기들이 날지 못하고
팽목항의 등대마저 밤마다 꺼져가도
나는 오늘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봄이 가도 그대를 잊은 적 없고
별이 져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쓸쓸히


아흔 노모의
벌레 먹은 낙엽 같은 손을 잡는다
새벽에 혼자 화장실 가시다가 꼬꾸라져
아침이 올 때까지
변기에 머리를 기대고 쓰러져 있었던 어머니
호승아
아무리 불러도 문간방에 잠든 아들은 오지 않고
오늘이 아버지 기일인데
기일은 오지 않고
오늘따라 바람은 강하게 불어온다
새들이 검은 비닐봉지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나는 밤늦게까지 어머니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를 홀로 두고
쓸쓸히 물이나 한잔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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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으로 집짓기 - 마흔 이후, 여덟 가구가 모여 평생 살 집을 짓다
홍새라 지음 / 휴(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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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이 생협과 같은 협동조합을 가능하게 했다면
그것 만큼이나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인 집에 대한 대안찾기가
협동조합이라는 형태로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발상인 것 같다.

여덟 가구가 모여 협동조합의 형태로 집을 짓는 과정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을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이런 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왜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를 떠나 이런 대안을 찾게 되었는지,
단독주택을 짓는 것과 다세대주택을 짓는 것은
어떤 효율과, 반대급부의 어려움이 따르는지 간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

어차피 콘크리트 집합건물이라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고민하고 집과 삶을 디자인해나가는 모습이
재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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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한국사회 -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박인석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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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마디로 ‘기승전발-코니‘의 관점에서 쓰여졌으며
대한민국 아파트 단지의 문제점을 다양한 자료와 통계를 근거로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한국인의 대다수가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에 살고 있지만,
건축분야에 종사하거나 관련한 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네 발코니(흔히들 베란다 라고 부르는)가 현재처럼
외부로 돌출된 준사적공간의 형태가 아닌
전국 어느 단지를 둘러보아도 샤시로 막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확장을 통해 전용공간화 하고 있는 것을
저자는 문제시하고 있다.

확장을 통해 넓은 공간을 살 수 있는게 집주인의 당연한 권리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이면에
건축법상의 맹점을 이용하는 건설사나
도시환경적인 측면에서의 문제점 등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한 저자는 아파트 ‘단지‘가 문제라는 문제제기를 하는데,
입주자 입장에서는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이냐?
생활의 편리와 안전한 생활,
특정한 곳에 산다는 자부심 내지는 아이덴디티
아울러 가장 투자가치가 있는 부동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게
아파트 단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저자의 반론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펴쳐보시라.

서울에서 내 집 한 채 마련하기가 요원한 젊은이들을 애석해 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살고있는 아파트 값은 올라가길 기원하는
나같은 위선자들을 뜨끔하게 하는 책이다.
(집값이 오른다고 해서 일주택 소유자에게 좋을 일은 대체로 없다)



"한국은 땅이 좁아서 고밀개발이 불가피하고 고밀개발하려니 고층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거짓말이다.
첫째, 한국은 땅이 좁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 도시들은에서 유럽의 유수한 문화도시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다. 서울과 수도권 몇몇 도시가 높은 인구밀도를 갖는 도시에 속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 몇몇 도시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에서 고밀개발이 횡행하는 이유로 ‘땅이 좁다‘를 내세우는 것은 거짓말이다.
 둘째, 땅값이 비싸서 고밀개발이 불가피하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오히려 고밀개발을 하기 때문에 땅값이 비싸진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인구밀도가 낮고 땅값도 싼 도시에 막상 신도시가 들어서면 땅값이 서울만큼 비싸지는 이상한 현상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고밀도로 개발하기 때문에 땅값이 오르는 것이다.
 셋째, 고밀개발을 하려면 고층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중저층으로도 높은 밀도로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층화의 진짜이유는 고밀도가 아니다. 고층화는 도시가 제공하지 못하는 녹지와 오픈스페이스를 아파트 단지 안에서 최대한 확보하려는 노력의 산물일뿐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땅이 좁아서가 아니라 일부 땅을 집중적으로 고밀도로 개발하기 때문에 땅값이 오르는 것이다. 집중적인 고밀개발을하는 이유는 기반시설 투자비를 가급적 줄이기 위한 것이다. 신도시개발이 전형적인 본보기다. 미개발지 한가운데에 도로와 전철을 연장하고 고밀도 아파트 단지들을 마치 포도송이 매달 개발한다. 물론 가급적 고밀도로 매달아야 한다. (87~88쪽)

 두한족열(頭寒足熱). 머리는 차갑고 발은 따뜻하게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미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얼마 전 열풍이 부었던 반신욕 역시 같은 원리의 건강법이다. 온돌방에서 생활하는 한국사람들은 항상 반신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온돌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이 한국인만 알고 있는 비밀 건강법일 리가 없다. 온돌 난방의 장점이전 세계에 퍼진 지 오래다. 당연히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온돌 난방이 인기다. 인터넷에서 바닥 난방(floor heating)을 검색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돌 난방을 고급스러운 주택의 대명사처럼 내세우는 광고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온돌은 좌식생활 못지않게 입식생활과도 궁합 이 잘 맞는 전천후 난방 방식인 것이다.
(214쪽)

준사적 공간을 통해 개인의 생활 내용이 표출되는 것이야말로커뮤니티 창출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서로 다른 개인들의 생활이 묻어나는, 다양성이 숨 쉬는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걷고 머무는 시간이 많아 지게 마련이다. 각자의 준사적 공간에서 생활하는(화초에 물을 주거나 앉아 서 신문을 본다든가 하는) 주민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한 교류를 자극하는빈도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아파트 대부분이 획일적으로 느껴 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준사적 공간이 빈곤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코니 새시와 철제 현관문으로 차단된 집들은 사적 생활내용을 외부에 시각적으로 드러낼 만한 준사적 공간들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이는 각 집들이 모두 동일해 보이는 획일적이고 삭막한 풍경으로 이어진다. (327~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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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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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고인류학의 입문서.
연구분야는 약간씩 다르지만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제이 굴드의 국내출판본을
끙끙거리며 읽어낸 경험으로는
과학동아에 연재된 내용을 책으로 묶어낸
이상희 교수님의 글은 쉽고 흥미진진하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께서 호프 자렌의 ≪랩걸≫과 같은 책의
이상희 버전을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현재 가장 방대한 학문인 생물학의 근간을 이루는 진화론의 중심에 있는 ‘진화‘라는 개념은 사실 아무런 가치(또는방향성)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딱히 옛날보다 더 나아진다는 뜻도, 더좋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학계에서 동의한 진화의 뜻은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난 유전자 빈도의 변화입니다. 진화했다는 뜻은 변했다는 뜻이지 더 나아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291~292쪽)

이 모든 호모속 종 혹은 집단이 현대 인류(호모 사피엔스)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프리카 기원론(Recent African origin of modern humans, 완전 대체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보면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0만 년에서 6만 년 전정도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새로운 종이라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새로운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확산하면서 이미 각 지역에서 살고 있던 원주 집단과 하나도 섞이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종에 속하므로), 우월한 문화와 언어에 힘입어 원주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겼고, 원주 집단은 전멸했습니다. 최근 발견된 에티오피아의 허토(Herto)에서 나온 화석이 주축으로,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인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Homo sapiens idaltu)로 불립니다. 이 집단이아프리카에서 확산하여 전 세계로 퍼졌으며, 원주 집단과는 연계가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다지역 연계론(Multiregional origin of modern humans, 혹은 다지역 기원론)‘입니다. 다지역 연계론은 현생인류가 한 곳에서 기원한 새로운 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현생인류의 조상이 하나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각 지역의 집단끼리, 그리고 다양한 시점의 집단끼리 계속 문화와 유전자를 교환하면서 200만 년 동안 계속돼 왔다는 관점입니다. 그동안 멸종하거나 새로 발생한 집단들은 종 아래의 분류 단위인 집단일 뿐이지, 새로운 종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307~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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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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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을 잡고 내렸던 시골역 앞에
나란히 왼쪽 오른쪽에 있었던 구멍가게 둘
아버지는 그중에 왼쪽 가게가 단골이셨다. 어린 나는,
오른쪽 가게도 공평하게 들러주었으면 했었다.
(아마 그 가게는 아버지만의 추억이 있었겠지)

이제는 비둘기호도 달리지 않고
승용차로 일년에 한 번이나 들를까 말까한
그 역앞에, 구멍가게 둘은 흔적도 없다.

이미경 작가님의 작업은 사라져 가는 것들을
펜화로 애써 멈추시게 하는 것인데,
그림을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두 자기만의 구멍가게의 추억이 피어오르리라.

우리 시절에는, 구멍가게 보다는 점빵이라고 많이 불렀었는데. ㅎ
튼 손을 벌리며 ‘백원만‘ 달라고 엄마 아빠를 졸랐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겠지.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든 소소한이야기다. 사람 냄새나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138쪽)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 내가 말하는 건축은 그 시대에 살았던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집과 공간이다. 과거의 터전이 낡고오래되었다고 스스로의 터를 죄의식 없이 갈아엎고 부순다면 진짜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과거요, 추억이요, 고향이요, 자아일 수 있다.
반세기 동안 근대화와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낡고 오래된 옛것을우리의 삶에서 지우고 감추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전보다.
따뜻하고 배부른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도 많다.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복원과 보존으로우리 삶의 근본과 맥락을 찾아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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