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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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고인류학의 입문서.
연구분야는 약간씩 다르지만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제이 굴드의 국내출판본을
끙끙거리며 읽어낸 경험으로는
과학동아에 연재된 내용을 책으로 묶어낸
이상희 교수님의 글은 쉽고 흥미진진하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께서 호프 자렌의 ≪랩걸≫과 같은 책의
이상희 버전을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현재 가장 방대한 학문인 생물학의 근간을 이루는 진화론의 중심에 있는 ‘진화‘라는 개념은 사실 아무런 가치(또는방향성)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딱히 옛날보다 더 나아진다는 뜻도, 더좋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학계에서 동의한 진화의 뜻은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난 유전자 빈도의 변화입니다. 진화했다는 뜻은 변했다는 뜻이지 더 나아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291~292쪽)

이 모든 호모속 종 혹은 집단이 현대 인류(호모 사피엔스)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프리카 기원론(Recent African origin of modern humans, 완전 대체론)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보면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0만 년에서 6만 년 전정도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새로운 종이라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새로운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확산하면서 이미 각 지역에서 살고 있던 원주 집단과 하나도 섞이지 않았으며,
(서로 다른 종에 속하므로), 우월한 문화와 언어에 힘입어 원주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겼고, 원주 집단은 전멸했습니다. 최근 발견된 에티오피아의 허토(Herto)에서 나온 화석이 주축으로,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인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Homo sapiens idaltu)로 불립니다. 이 집단이아프리카에서 확산하여 전 세계로 퍼졌으며, 원주 집단과는 연계가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다지역 연계론(Multiregional origin of modern humans, 혹은 다지역 기원론)‘입니다. 다지역 연계론은 현생인류가 한 곳에서 기원한 새로운 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현생인류의 조상이 하나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각 지역의 집단끼리, 그리고 다양한 시점의 집단끼리 계속 문화와 유전자를 교환하면서 200만 년 동안 계속돼 왔다는 관점입니다. 그동안 멸종하거나 새로 발생한 집단들은 종 아래의 분류 단위인 집단일 뿐이지, 새로운 종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307~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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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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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을 잡고 내렸던 시골역 앞에
나란히 왼쪽 오른쪽에 있었던 구멍가게 둘
아버지는 그중에 왼쪽 가게가 단골이셨다. 어린 나는,
오른쪽 가게도 공평하게 들러주었으면 했었다.
(아마 그 가게는 아버지만의 추억이 있었겠지)

이제는 비둘기호도 달리지 않고
승용차로 일년에 한 번이나 들를까 말까한
그 역앞에, 구멍가게 둘은 흔적도 없다.

이미경 작가님의 작업은 사라져 가는 것들을
펜화로 애써 멈추시게 하는 것인데,
그림을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두 자기만의 구멍가게의 추억이 피어오르리라.

우리 시절에는, 구멍가게 보다는 점빵이라고 많이 불렀었는데. ㅎ
튼 손을 벌리며 ‘백원만‘ 달라고 엄마 아빠를 졸랐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겠지.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든 소소한이야기다. 사람 냄새나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138쪽)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 내가 말하는 건축은 그 시대에 살았던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집과 공간이다. 과거의 터전이 낡고오래되었다고 스스로의 터를 죄의식 없이 갈아엎고 부순다면 진짜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과거요, 추억이요, 고향이요, 자아일 수 있다.
반세기 동안 근대화와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낡고 오래된 옛것을우리의 삶에서 지우고 감추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전보다.
따뜻하고 배부른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도 많다.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복원과 보존으로우리 삶의 근본과 맥락을 찾아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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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로부터 시작해보는 글.

2018년 11월의 신문 기사 한 토막. 필리핀 마닐라의 한국대사관 앞에서 현지 환경운동가들이 한국의 ‘쓰레기 수출‘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만다나오섬으로 보낸 컨테이너에 5100톤의 쓰레기가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캐나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필리핀에 쓰레기를 보냈다가 외교 갈등을 빚었다. 더는 버릴 곳을 찾기 힘들어진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에 쓰레기를 보내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바닷가로 떠밀려 온 고래나 물새 뱃속에 쓰레기가 가득 차있다거나, 전자 쓰레기들이 아프리카 빈국으로 향한다는 것은 이젠 새 소식도 아니다. (370~371쪽)

이 책은 큰 틀에서 보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환경오염의 문제를 르포형식으로 보고하고 있지만,
책을 읽어나가면 기자인 저자의 관심사가 ‘쓰레기‘라는 한 가지 현상에만 머물러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있다.

책장을 덮으며 다시 차례로 돌아와 복습해보니,
전쟁이 남긴 폐허나 인간들이 떠난 유령도시,
태평양의 조류에 의해 한군데로 몰리게 되어 쓰레기섬이 되어버린 섬
쓰레기산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빈민들,
줄어드는 열대우림과 사라진 호수, 멸종한 동식물
성노예와 인신매매, 값싸게 쓰이다 버려지는 노동 등 인간의 문제에 이르기 까지
그동안 잘 몰랐거나 알았다하더라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들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이다.

하나의 흠이 있다면, 문단 단위로 국경과 지역을 넘나드니
구글지도를 검색해 가며 매번 살펴보기도 벅찰만큼 멀미가 난다는 점?
그만큼 위기의 현장이 전세계 방방곡곡이라는 뜻.

다음은 띠지를 붙여둔 곳들
...

어디 그 섬뿐일까. 이미 바다는 쓰레기장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제 남성들도 애용하는 각질 제거제의 스크럽 알갱이,
대형 마트에서 파는 여섯 개 묶음 맥주 팩의 비닐 고리, 페트병 뚜껑, 폴리스티렌 포장, 샌드위치를 싼 랩 조각, 검은 비닐봉지, 엉켜서 못 쓰게 된 그물 등 잘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나비닐 따위로 이뤄진 쓰레기가 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 태평양에 모인다. 하와이에서 북동쪽으로 1600킬로미터쯤 떨어진바다 한가운데, 선박업계에서 ‘태평양의 거대 쓰레기장‘ 이라 부르는 쓰레기 섬이 있다. 부유물이 점점 늘어 쓰레기 섬의 크기는 이제 14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고기압 아래 쓰레기 섬에서는 해수면이 시계 방향으로 느리게 돌아가며 소용돌이를 그린다. 태평양 주변을 도는 바닷물의 절반은 해류를 따라 이곳으로 오는데, 이 지점에 이르면 해류가 급격히 느려져 쓰레기가 모인다. 현미경으로 봐야할 만큼 작은 스크럽 알갱이부터 거대한 그물까지, 미국과 캐나다, 아시아 지역에서 오는 모든 쓰레기가 모여 하나의 대륙을 만들고 있다. 쓰레기의 90퍼센트는 플라스틱류다. (113~114쪽)

코스타리카의 강력한 환경보호 정책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다. 민간 토지도 환경보호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땅 주인이 숲을 보호하고 강물을 깨끗이 관리하면 정부가 보상한다. 아마존이나 보르네오를 휩쓰는 삼림 파괴 위험을 완전히 비껴갈 수는 없었지만, 벌목 광풍을 멈출 수는 있었다. 2005년 이 나라는 ‘숲을 잃지 않는 나라‘가 됐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 은 2009년에 경제활동이 생태계에 미치는 비용을 꼼꼼히 따져 개발과 환경의 공존을 추구하고 있는 코스타리카를 21세기형 경제성장 모델로 꼽은 바 있다.
코스타리카는 이미 1990년대부터 산업 활동에 환경 파괴의 비용을 매기는 경제 시스템을 갖추려 노력해 왔다. 환경을 희생하면서 국내총생산을 끌어올리지 않고, 환경 파괴가 불러올 사회적 비용까지 계산해 경제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는 보호구역들을 돌며 ‘악당들‘을 잡아내는 환경행정법원이 따로 있다. 1995년 신설된 환경행정법원의 전문가들은 국토 전역을 돌아다니며 환경 파괴 범죄를 단속한다. 1997년에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모든 경제활동에3.5퍼센트의 탄소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거둬들인 돈은 환경파괴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빈민들을 위해 쓴다.
환경 담당 부서가 경제·산업 담당 부서에 밀리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코스타리카에서는 환경부의 힘이 가장 세다. 환경부가 에너지·광업·수자원 등과 관련된 행정을 총괄하기 때이다. 2004년 동부 해안에서 유전을 발견하고도 정부는 석유 채굴을 금지시켰다. 그 대신 재생가능에너지 개발에 투자해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95퍼센트를 재생에너지에서 얻고 에너지 사용 비율도 세계 1위다. 2007년 코스타리카 정부는 "2021년까지 세계 최초의 탄소 중립국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고, 탄소를 내보내는 양만큼 흡수하도록 삼림을 늘려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상쇄하겠다는 것이다.
결과는 고무적이다. 지구 전체 땅의 0.25퍼센트에 불과한 코스타리카에 세계 생물 종의 5퍼센트가 살고 있다. 이 나라 국토의 25퍼센트는 국립공원이나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면적 대비 자연보호구역의 비중은 세계 1위다. 코르코바도국립공원에는 맥tapir과 흰머리카푸친(꼬리감는원숭이), 다람쥐원숭이 등 희귀종이 서식한다. 토르투게로 국립공원은 이름부터가 ‘거북이가 가득한 곳‘이다. 몬테베르데 클라우드 삼림보호구역은 풀과 나무, 새의 낙원으로 유명하다. (214~216쪽)

중국 양쯔강에는 바이즈라고 불리는 돌고래 기리는 돌고래가 살았다. 돌고래는 대부분 바다에 살지만 아마존강이나 메콩강 등에 일부 민물 돌고래가 살고 있다. 양쯔강에도 돌고래가 있었다. 같은 민물 돌고래라 해도 종은 모두 다르다. 양쯔강돌고래는 한때 ‘양쯔강의 여신‘ 이라 불릴 만큼 사랑받았다. 그러나 중국이 산업화하고 양쯔강 어업과 수송, 수력발전이 늘면서 서식지가 파괴됐다. 이미 1980년대부터 양쯔강돌고래가 멸종되리라는 우려가 있었다. 인간이 멸종시킨 사실이 확인된 첫돌고래종이 되리라고들 했다. (244쪽)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에는 이렇게 불리는 독재 정권의 잔혹한 범죄들이 있었다. 그러나 범죄를 겪은 이들 중에는 이 명칭을 거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1974년부터 1983년 사이, 주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대통령이 재임하던 기간에 벌어진, 군부독재 정권의 시민 탄압과 납치, 구금, 살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실 ‘전쟁‘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대등한 세력간에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군부 정권의 일방적인 범죄였으니 말이다.
그때 실종된 사람들 대부분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살해돼 어딘가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지만, 모두 얼마나 되며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희생자들 중에는 몬토네로스Montoneros라 불리던 좌파 게릴라 조직의 투사들도 있었고, 민주주의를 요구한 시민과 학자, 언론인도 있었다. 1979년 말 국제사면위원회(국제 앰네스티)는 1만 5000~2만 명이 납치 및 실종되었다고 추정했다. 비델라 시절뿐만 아니라 이사벨 페론 대통령 시절부터 반대 세력을 겨냥한 납치 와 살해가 이뤄졌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실종자가 3만 명에이른다는 추측도 있었다. 실종자들Desaparecidos로만 불리는 이들은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가장 깊은 그늘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 작가인 엘사 오소리오의 ≪빛은 내 이름≫(박선영옮김, 북스캔, 2010)은 ‘더러운 전쟁‘ 당시의 ‘도둑맞은 아이들‘
 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소설에 나오는 군부 실력자는 딸(마리아나)이 사산하자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가 수감된 여성의 아기를 데려온다. 사산한 줄 모른 채 그 아기를 친딸로 키우던
‘마리아나는 딸아이가 아직 어릴 때 그 사실을 알았지만 꿈쩍도 않는다(원주민이 아닌 예쁜 백인 혈통의 아이를 가져다준 것은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배려였다.‘고 생각할 뿐이다). (314~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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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4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공터에서>가 생각나네요...

봄날의 언어 2019-01-04 11:48   좋아요 2 | URL
라면을 끓이며,까지 밖에 못 읽어봤는데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

카알벨루치 2019-01-0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핀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흡입력이 대단해 금방 읽혀요 김훈이니^^

쎄인트saint 2019-01-0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뉴스 보니까...필리핀에 간 ‘한국산 쓰레기 6500톤‘ 도로 가져오기로..쓰레기 외유(外遊)후 귀국...

봄날의 언어 2019-01-04 18:38   좋아요 0 | URL
뉴스 찾아보니, 되가져와서 수출업체에 소각비용을 청구한다고 되어있네요. 비용만 청구할 게 아니라 거기에다 과징금?도 먹여야 할 거 같은데...^^;
 

용산을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로 묘사한 이광호의 글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고 느껴져서
용산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겁도 없이 읽어나가서 그런가 보다 싶기도 한데
누군가 용산에 대해 잘 아는 실거주자 북플러가 있으면 읽어보시고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조언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싶음.

이 책을 읽는 내내 예전에 읽었던 황두진 건축가의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를 떠올렸는데,
건축가를 직업으로 하는 분의 인문학적 소양과
건축을 화두로 서울을 따라가보는 내용이 꽤 재미났기 때문.

이광호의 용산도 그런 느낌의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故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를 출판한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여서
손에 잡았는데, 대략 난감하였다.

이 책에서 용산참사를 언급한 부분은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데,
거기서 읽은 문장들을 남겨둔다.

.....
사람들은 왜 망루에 오르고 타워크레인에 올라가는가? 혹은 왜 망루에서 불타 죽어가거나 타워크레인 위의 칼날 같은 바람 속에 혼자 서 있어야 할까? 이곳은 말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장소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다만 작은 한식당과 호프집과 복집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과, 의식주의 공간을 빼앗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철거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마지막까지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망루란 무엇인가? 먼 곳을 보기 위해 세우는 벽이 없는 시설, 감시를 하거나 방어를 하거나 조망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설. 벽이 없는 망루 위에 오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곳으로부터 노출되고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망루에 오르는 것은 무언가를 걸어야 하는 일이다. 망루 위에서 맞이하는 시간이란 언제 아래로 다시 내려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 바람이 몰려오는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결국은 혼자만의 망루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더 갈 데가 없는 시간이다.(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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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시인의 글은 처음인데,
‘밥벌이를 위해 이런저런 글들을 맥락없이 써댔다‘는 프롤로그의 말에 기대지 않아도
꼭지마다 글이 주는 느낌이나 주제가 상이해서
낄낄거리며 책장을 아껴 넘기게 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작가가 하고자하는 말이 무엇인지 가늠이 잘 되지않아
하루 이상을 묵혀서 읽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 시인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나의 독서는 아직 일천하여 그의 시집은 읽지 못했으므로
(읽고도 읽었는 지 기억해내지 못하므로)
다음 그의 글은 산문이 아닌 시를 읽어보려 한다.


2013년 2월 2일 ‘펑크록의 대모‘라 불리는 미국의 록가수 패티 스미스가 내한공연을 했다. 서너 달 전에는 그녀가 직접 자신의 젊은 날을 기술한 ≪저스트 키즈≫(박소울 옮김, 아트북스, 2012)가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그 책은 그녀의 예술적 혈맹‘이자 연인이었던 사진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와의 추억을 중심으로 젊은시절을 돌이키는 내용이다(둘은 1946년생 동갑내기다). 책은 그녀가 록 아티스트로 막 성공을 맛보기 직전에 끝난다. 패티 스미스는 그 책을 씀으로써 메이플소프와의 오래된 약속(메이플소프는1989년 사망하기 직전, 패티 스미스가 자신들의 얘기를 써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을 지켰다. 나름 패티 스미스에게 영혼의 초상‘(민망한 표현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을 확인하기도 하는 나는 저스트키즈」는 읽었지만, 공연은 보지 못했다. 나는 의외로(?) 공연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수년 전 영국의 기타리스트 제프벡이 내한공연 왔을 때, 아는 동생의 손에 이끌려 공연장에 갔다가 공연 시작 삼십 분 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진 적이 있다.
공연이 형편없어서가 아니었다. 장인의 공력이 그대로 느껴지는 연주력에 대한 찬탄도 잠시뿐, 그저 내가 당장 올라가서 공연하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열망에 스스로 질려버린 탓이었다. (148~149쪽)

그들이 나치 추종자들이었다거나 사격게임을 즐겼다는 식의 사후 진단들은 그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자의적 퍼즐게임의 작은 조각에 불과할 뿐, 사건을 설명하는 데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단서들에 필연성을 부연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피범벅이 된 미궁으로부터 탈출하려면 이 모든 것이 눈에 확연한 질서체계 안으로 수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파란 하늘 아래 미궁이 펼쳐지는 걸 원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미궁 속의 주인공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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