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스러운 사이 - 제주 환상숲 숲지기 딸이 들려주는 숲과 사람 이야기
이지영 지음 / 가디언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에 대한 정보 없이 -가령 몇 군데의 TV에 출연했다는 사실 같은 것- 오로지 표지가 주는 매력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환상숲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다음번 제주에 '환상숲곶자왈공원'을 예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버려진 땅을 일군 아버지와 어머니, 평생 인연을 맺은 남편과, 두 아이들의 이야기가 숲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니 다 읽고 한 번 더 책의 숲으로 들어갈 볼만하다.




  내가 안내했던 손님 중 가장 고령의 어르신은 96세 할머님이시다. 이른 새벽 일어나 깨끗한 물을 묻힌 참빗으로 곱게 빗은 듯 정갈하게 묶은 머리는 검은빛이 전혀 없는 은발이었다. 손이나 얼굴의 잔주름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양옆 손자들의 부축에 손사래를 칠 만큼 정정하셨다.

  다행히 그 시간대에 다른 일행에도 어르신들이 많이 참가하셨다. 덕분에 천천히 느긋하게 숲을 둘러보는 시간이 되었다.

  중간쯤 돌았을 때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지팡이 대용으로 사용하시던 칠십대 할머님이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으셨다. 그러고는 당신께서는 더 이상 못 가겠으니 여기서 멈추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96세 할머님께서 나직한 목소리로 꾸짖으셨다.

  "야! 내가 네 나이면 시집을 한 번 더 갔겠다."

  다 함께 깔깔 웃었고, 덕분에 칠십대 할머님 또한 나머지 길을 가뿐하게 걸으셨다. 너무 멋지지 아니한가?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p.30~31)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똑같이 싸우고 있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 둘째가 어찌나 오빠의 성질을 건드리는지, 왜 첫째는 가만있는 둘째를 이유 없이 건드리고 가는지, 왜 똑같은 장난감이 두 개여도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지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갈 때가 없다. 그래도 저렇게 싸우는 시간이 쌓이면, 서로에게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또한 이렇게 많이 싸워본 아이가 다른 자리에 가서도 쉽게 주변 사람들과 맞춰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무도 서로 자리 경쟁을 하며 자랄 때 더욱 크게 자라난다. 그렇다고 마냥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 타협하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면서 본인들의 살아갈 공간을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숲을 이룬다. 갈등이 있기에 고민이 있고 발전이 있고 화목이 생기듯, 부딪히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두 형제를 통해 배운다.


(p.51~52)


  "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 세상입니다. 화려하고, 간단하고, 편리합니다. 저희는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남들은 결혼식 준비를 위해 피부마사지를 받지만, 저희는 꽃을 심고 돌을 나르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조금은 어색하고 서툴고 불완전할 테지만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부터 끝날 때까지를 모두 함께한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지 않을까요?"


(p.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유지혜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시절 나는 여느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손가락이 길어 한 옥타브를 무리 없이 누르고, 숙제도 성실하게 해오는 학생이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 집에 있던 피아노가 어디론가 사라진 뒤에도 학교 음악실이나교회에서 틈나는 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치는 것을꽤 좋아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곡 연습에 돌입했다. 좋아했던 남자애가 피아노를 멋들어지게 잘 쳤기때문이다. 피아노를 잘 쳐서 걔를 좋아했던 건지, 걔가 좋아서 - P21

피아노 치는 모습마저도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를치는 남자에게 반하지 않기란 거의 도전에 가깝다는 사실을그때 알았다. - P22

"좋아한다, 가 사투리로 뭐예요?" (뻔뻔하기도 하지) 그가 웃으며 답했다.

"좋아하맨마씸."

술에 취한 나는 그 말이 잘 외워지지 않아 말하고 또 말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바람 소리를 이길 만큼 억세다고들었다. 강력 접착제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 발음 외국어로 들릴 만큼 이국적이었다. 망설임을 뒤로하고 마침내 내뱉는 청년의 고백처럼 그 말은 단단해 보였다.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가을밤, 닿을 듯 말 듯 젊고 아름다운 기운이 우리를 - P57

에워싸고 있었다. 그와 더 가까워지기 직전, 백지상태의 머릿속에서 여러 호기심이 떠올라 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어떤사람일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까?‘ 그날 우리는 편의점 앞 벤치에서 밤을 새웠고, 다음 날아침 나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좋아하맨마씸.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읽은 조해진작가의 소설이다. 책을 읽는 것도 몇 줄의 후기를 남기는 것도 버거운 시간인데. 소설이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오래전에 읽어 줄거리는 희미하지만, <로기완을 만났다>의 로기완과 <단순한 진심>의 문주를 보면 작가가 쓰고 싶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어떤 것들인지 짐작이 된다.

(책 속에서)

백복순과 백복희를 만나기 전까지, 연희는 대학 시절의 나와 비슷한 질감의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의지와 상관없이 사는 것일 뿐, 근원적인 마음의 끝은 죽음에 닿아 있던 그 암전의 시간 말이다. 그랬으므로, 연희는 아픈 백복순과 백복순이 낳은 백복희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모녀는 연희에게 두 번이나 지켜 주지 못한 생명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다시는, 어떤 생명이든, 차갑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을 테니까. 생명은 연희에게 위로이자 구원이었을 테니까.

-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어느 퇴근길에 선물 같은 순간을 한 번 더 만날 수있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구간인 옥수역과 압구정역 사이에서, 지하철 디제이가 말했다. 한강을 지나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밖을 보시라고, 잠깐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라고,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세상에 다시 없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모든 게 엄청나게 황홀한 우연, 그러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 P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들은 행복해지려면 적어도 10~20만 원은 필요하지않나요? 학교에 다닐 땐 2만 원만 있어도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어른이 된 후로 행복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거죠. 똑같은 기쁨을 얻는 데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는 사탕 하나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어요. 난이런 걸 잃어버렸구나, 싶었습니다. - P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