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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워낙 요란한 수식이 많이 붙어 있는 책이라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다. 저자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최근에 나온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 나오는 포레스터의 모델이며, 존 레논의 암살범인 마크 채프먼이란 자가 이 책을 탐독하였다는 사실, 게다가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라는 것까지. 정말이지 이 책을 둘러싼 이야기는 소설만큼이나 흥미롭다.

여하튼 뒤늦게나마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고, 금세 콜필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만약 내게 그런 동생이 있다면,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의 순수한 영혼이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봐 주고 보듬어 주고픈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소설 그 자체는 그처럼 화려한 수식과 찬사를 버거워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대의 고전'이니, '최고의 문제작'이니 하는 육중하고도 가식적인 수사는 콜필드를 질식시켜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여행길에 우연히 동행하게 된 한 권의 책이었다거나,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걷던 중 특이한 제목으로 인해 나의 발길을 붙잡은 책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운명처럼 발견한 나만의 보석으로 남을 수 있었다면,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처음 나온 50년 전의 뉴요커들에게 이 책은 그러한 의미로 발견되었겠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청소년시기에 읽었더라면 더더욱 열광했을 것이다. 어쩌면 콜필드처럼 낙제라도 받고 싶어 안달이 났거나, 짐을 싸서 가출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꽉 막힌 일상과 허위로 가득찬 어른들의 세계에서 난 나름대로 예민하고 냉소적인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대학교 1,2학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부잣집 도련님의 방랑기 쯤으로 치부해버렸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의 고민이란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공원의 호수가 얼어붙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한심한 질문들…

왜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냉소하고 의심하면서도, 자신은 좋은 진짜 가죽 가방을 들고 다니는데, 친구는 낡은 비닐 가방을 들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는 걸까? 그가 품은 좋은 생각들이란 기껏해야 싸구려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뭐, 이런 식의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대견해 했겠지.^^;

아무튼 이십대 중반의 끝을 향하는 지금에야 난 이 책을 읽었고, 나름대로 괜찮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일상에 찌들어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나에게 잊혀졌던 버릇 하나를 일깨워주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순수한 것'과 '때묻은 것'의 영역으로 나누는 경직된 이분법. 한동안 난 이 이분법을 쓰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난 세상의 사물 혹은 사람을 '강한 것'과 '약한 것'으로 나누었다. 어쩌다 책을 읽거나 토론을 하게 되면, 세상을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세상을 '순수'와 '때'의 영역으로 나누는 일은 어렵고도 의미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은 적당히 때묻었고, 타락하였으며, 나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수포로 돌아갈 것이고, 난 역시 '순수한 건 이제 남아있지 않아'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콜필드처럼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상상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마지막 남은 순수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떠날 채비를 하는 용기도 부려보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난 오늘, '가식'이 살아가는 능력이 되고, '위선'이 자신을 그럴듯하게 가리는 포장이 되는 세상에서 콜필드의 고집스런 이분법을 가슴에 되새긴다. 일관성을 지키겠노라는 약속은 차마 하지 못하지만, 영원히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순수'를 가슴 한 켠에 품고 있겠노라고 남몰래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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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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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보다가 우연히 아래분이 쓰신 서평을 읽게 되었습니다. 남성의 입장에서 이 책을 대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나 의구심이 잘 드러나 있더군요. 제가 대단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아래분이 쓰신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관한 '냉소적인 평가' 혹은 '남성중심적 발언'에 대해 반론을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남성의 성기와 여성이 성기가 똑같이 대우받지 못해온 현실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성기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한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부분도 큽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성의 성기는 공공연히 자랑스러운 것으로 떠받들어지지요. 어른들은 '우리 고추~'를 운운하며 남아들의 성기를 그대로 내놓은 채 키우잖아요? 여아들을 그렇게 키우진 않죠. 오죽하면 남근중심주의란 말이 있겠어요.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면 성교육을 시킵니다. 대표적으로는 구성애의 '아우성'을 보아도 그렇고, 남자 아이들의 성욕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되죠. 그래서 사랑스런 아들을 위해 좋은 티슈를 사주라거나 하는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여자 아이들의 성욕은 아예 없는 것 혹은 음탕한 것으로 치부되죠. 보통 여자아이들에게는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키라거나,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여자의 성은 수동적이거나, 은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성의 성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완전 금기시 되고, 그곳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곳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도 비정상인 것처럼 몰아세우게 되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여성의 성이 은폐되고, 죄악시되는 것과는 반대로 여성 자체는 늘 성적 대상으로밖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담론과 환경이 여성들에게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번에 불거진 이영자씨의 다이어트 사건이나 온갖 종류의 미인 선발대회, 일상적인 성희롱, 성폭행 모두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책은 이와 같이 여성이 자연스럽게 타고난 '성'은 숨기려하고,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성'만을 부각시키는 왜곡된 사회의 통념에 당당히 반기를 드는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보지'를 이야기해도 말하는 주체에 따라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타인의 음흉한 시선에 비춰지기보다는 나의 입으로 나의 성을, 나의 성기를 직접 말하겠다는 의지이니까요. 노상 '버자이너'에 자신의 '페니스'를 꽂을 궁리만 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은 '보지'라는 말을 백 번 듣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이 책은 무조건 '보지'를 말하기 위해 '보지'를 입에 올리진 않습니다. 그보다는 보지가 가진 욕망과 남성중심 사회를 살면서 보지가 겪어야 했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만약 보지가 그 소중함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면 이를 바로잡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왔다면 이에 가해진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겠죠. 그리고 이를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그것 자체에 대해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흡하긴 하지만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바로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론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암튼 아래의 서평이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의견이 있다면 올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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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4-2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텔레비젼에서 넘버3를 해 줄 때였습니다.그당시 기준으로는 최민식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한 욕설 해대는 영화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가족들 다 보는 주말의 명화 시간대 방영해서 그런지 교묘하게 대사 처리를 했더군요. 마동팔 검사(최민식)이 입에 달고 사는 '좆같다'는 말을 그 음절만 들어내서 '뭣같다'로 처리를 했습니다. '좆'이 들어가는 모든 대사를요. 고생도 가지가지들 한다 시니컬하게 영화를 끝까지 봤는데, 어느 한 장면에서 확 깼습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 일본 야쿠자들과 한석규의 조직이 룸싸롱에서 단합을 다지며 멍게를 시키는 장면, 룸싸롱 조리사가 여기까지와서 멍게 시킨다고 투덜대며 말하죠 "씹새끼들" '좆'은 편집하고 '씹'은 나두는 편집기술에 비한다면, 송강호의 불사파 연기는 아주 우스운 것이더군요. -_-;

sunnyside 2004-04-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한국의 방송기술이 대단하군요. 기술이 아니라, 노가다의 문제인가요? ^^;

hanicare 2004-05-1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 나면 앞말이 뒷말에 걸려 넘어져버리고 정작 했어야 할 말을 못해준게 억울해 삼박 사일 속을 끓이는데,써니 싸이드님의 명쾌한 글 읽고 내 속이 다 시원해졌습니다.이거 어울릴지 모르지만...화이팅!(사족;닉네임이 자꾸 달걀후라이를 연상시킵니다^^;)

sunnyside 2004-05-1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hanicare 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저는 아주 달걀 후라이를 좋아한답니다. ^^

비로그인 2004-05-3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반론입니다. 제 생각에는 일종의 보호본능도 작용을 했으리라고 봅니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보호라는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도 보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반대로 여성보다 강하다고 해서 성적으로 자유스럽다는것은 보호한다는 구실속에 내팽겨쳐지는 반대급부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성적 대상이라는 전제는 남녀가 존재하는 이성 사회에서는 반반의 책임이고 반반의 몫일 따름인데 이상하게도 여성만 호기심이나 성적대상이 되고 은폐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은밀하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에 구태어 까발림이 속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만 그렇지 성에 있어서의 동등성은 인정이 되고 있는것들이고 다만, 남녀의 역할론에 비중을 두어야 할것 같습니다. 잠시 들렀습니다...
 
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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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는 모처럼 약속 없는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이 책을 읽었죠. 오늘 뒷부분을 마저 읽어야 하지만요.

읽으면서 한숨이 나더군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야말로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해서 피해야 할 오류와 함정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은 일본의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가 썼는데요.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 위안부 문제에 얽힌 민족주의 문제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바라본 저술이랍니다.)

명칭부터 보세요. ‘위안부’라뇨, 누가 누구에게 ‘위안’을 준단 말입니까?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이 ‘위안’이라는 고상하기 짝이 없는 목적을 위해 전쟁터 이곳 저곳을 끌려다니며 성을 착취당했단 말입니까? 그게 무슨 봉사 활동이었습니까? 강간이고 폭력이었지… (그래서 시종일관 저자는 ‘위안부’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이고 있습니다. 소위 위안부라 불렸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정신대’란 말도 함부로 쓸 게 못되겠죠. 황국 병사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식민지 여성들이 봉사한 게 되니까요. 돈 있는 사람 돈으로, 힘 있는 사람 힘으로, 그리고 몸뚱아리 밖에 없는 여성들은 그 물화된 육체를 ‘신성한’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바쳤단 그 말이 되겠죠.

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구도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게 맞겠군요. -_-; ) 그래서 이 책을 던져주는 문제의식에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죠.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은 단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가 양국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나, 민족주의의 대결 양상으로 가선 안 된다는 것이죠.

문제의 핵심은 엄연히 ‘성 착취(혹은 성 노예 …)’이며, 이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보편적 인권의 잣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한국의 가부장들이, ‘우리 처녀들의 정조를 빼앗아간 일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으로 나온다면, 위안부 문제는 순간 한일 양국 가부장들의 재산권 싸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에노는 이 책에서 ‘정조’란 순전히 남성들의 재산권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가부장제이기도 한 것이죠. 그리고 이를 위해 연대해야 할 대상은 오늘도 곳곳에서 성 폭력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의 여성들일 것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이 꼭 읽어보셨으면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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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미소 - 김소진 유작산문집
김소진 지음 / 솔출판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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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과 역시 어린 그의 누이가 산동네의 풍경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나보다. 반듯한 앞머리에 두 손을 가지런히 바지 섶에 붙인 흑백 사진 속의 소년, 마치 오랜 시간을 만나지 못한 나의 형제, 피붙이인양 가슴을 저미게 하는 그는 김소진이다.

서민들의 질박한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언어들을 다듬고 어루만져 우리 앞에 그려냈던 故김소진의 유작 산문집 <아버지의 미소>는 1997년 위암으로 마감해야했던 서른 다섯 그의 짧은 생애를 기리는 추모의 뜻으로 간행되었다. 책은 그의 대학시절 학회지에 실렸던 습작들로부터 죽음 직전까지 쓴 산문들로 이루어져 있고 형식은 소설, 시, 책글, 인물글, 대담글, 편지글 등으로 다양하다. 조각난 퍼즐들을 끼워 맞추듯 짤막한 여러 산문들을 통해 그의 성장과 상처,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겨진 화해의 몸짓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독자들에게 행운이며 동시에 짐이다.

작가 스스로 밝힌 바처럼 김소진의 작품은 거의가 과거형이다. 작품 하나를 끝마쳤다는 것은 그에게 기억 하나를 복원해냈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축농증 때문에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사주셨던 '달보드레한' 빵냄새를 기억해내기 위해 그는 얼마나 깊은 과거 속으로 침잠하였을까? 한 여름 땡볕에서 일하다 돌아온 어머니의 등물을 쳐줄 때 후끈 달아오른 땀냄새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또….

남과 북에 처자를 따로 둔 분단 역사의 희생자이며, 경제적으로는 무능력자에 가까웠던 그의 아버지와 '여성'을 잃어버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가난 때문에 배움을 접고 노동자로 살다가 그보다 3년 먼저 저 세상으로 간 김소진의 형. 이렇게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와 그가 살았던 산동네 풍경은 그의 작품의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걷을 수 없이 어두운 그림자만이 기억의 전부는 아니다. 세월이 곱게 채색한 낭만도 있고 그리움과 애틋함도 묻어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내가 있다. 우는 내가 있고 웃는 내가 있고, 똥 싸고 먹고 속임수 치고, 싸구려 사탕을 허벌나게 빨아대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나를 닮은 아버지가 거기 있다. 거기를 갔다 오지 않고서는 앞을 향한 어떤 여행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는 작품을 통해 쉬 아물지 않은 생채기와 같은 유년의 기억들과 하나하나 화해하고 싶었나보다. 김소진은 자신의 기억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진정한 어른이 되는 통과제의처럼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혼돈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했던 유년의 기억을 덮어둔 채 살아가고 있을 때 김소진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에서 한 발짝 나아가 민중을 끌어안고 그 삶을 보듬는다. 비둘기호 기차 모양으로 생긴 집에서 올망졸망 살았던 아홉 가구(장석조네 사람들) 이야기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한국현대사의 무대에서 소외된 다수의 민중이 그의 작품에서는 떳떳한 주인공의 자리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낮은 곳의 땀냄새와 걸진 입담들이 그의 작품이 나아간 여정의 출발점이며 종착지였다는 것을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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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의 암소 - ...한줌의 부도덕
진중권 지음 / 다우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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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중권의 글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이번 책 – <시칠리아의 암소>를 사지는 않았다. 책의 목차를 훑어보니 이미 내가 읽은 글들도 많이 있었고,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찾을 수 있겠다 싶은 글들이다. 그가 출판사의 어떤 감언이설에 넘어가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소 그의 지론으로 추측하건대, 몇 푼의 인세 때문에 자신의 책을 사지 않는 ‘팬’을 타박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진중권의 글은 ‘흔하게’ 널려있다. 이런저런 진보적 매체에 활발히 기고하고, 인터넷 사이트를 종횡무진하며 게시판에 글을 남긴다. 요즘은 심지어 조선일보 독자마당에까지 진출한 모양이다. 물론 다 좋은 글들만 남기는 것은 아니다. 뻔뻔함이 지나쳐 자만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유로움이 지나쳐 방종해 보이기도 한다. 가끔은 넘쳐나는 지식을 주체하지 못해 결코 향기롭지 않은 현학적인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중권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 점이다. 지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하지 않고(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글쓰기 행태로 적을 만들거나, 지식인의 반열에서 끌려 내려와 폄하되기 일쑤이다) 지식을 밑천으로 떼돈 벌 생각을 하지 않는다(그가 쏟아내는 엄청난 글들의 대부분은 돈이 되지 않는다). 철저히 지식을 자신의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 글쎄… 그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극우세력 왕따 만들기를 위한 대중선전, 선동쯤이 되지 않을까.

오늘도 그는 안티조선운동의 당위와 박정희 우상화 반대, 지역감정 타파, 근대 완성, 포스트모던 범람 반대 등 주제를 넘나들며 무수히 많은 담론을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를 아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저러다 고갈되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지칠 듯, 밑천이 떨어질 듯 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촌철살인의 기지를 보여주는 그를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사학위 취득도 때려치우고 고국에 돌아와 전투력 최고의 진보진영 논객이 된 진중권. 그의 지식은 진정 낮은 곳에 임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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