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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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봄날을 기억한다. 나는 나이 먹은 학생들 틈에 낀 청강생이었다. 육성회비도 내지 않고, 출석부에 이름도 없었지만, 매일매일 철길을 돌아 학교에 갔다. 내가 살던 고향은 당시 광주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었다. 어른들이야, 어떤 소문에 시달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시절 봄볕은 그저 따사롭기만 했다.

철이 들면서, 그 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막내 동생을 업고 광주 근방을 헤맨 이야기를 했고, 막내 삼촌은 할아버지께 끌려왔다고도 했다. 대학에 와서 학살의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광주 관련 학살자들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

생각해 보면, 황석영의 소설을 읽고 큰 감동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의 완성도나 그 사상의 깊이 때문이 아니라, 정서적인 공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내가 감동한 것은 소설 이외의 글이나, 그의 말이었다. 월북이나 동인문학상 거부 같은 것들. 황석영이 동인문학상을 거부했을 무렵, 내 상황을 돌이켜보면 글쟁이들에 대한 의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90년대 이후 소설은 주방이나 pc방에 갇혀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각종 브랜드 이름 따위가 지겹게 나열된 소설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두고 새로운 소설, 새로운 경향, 일상에의 발견이라도 떠들어댔지만, 소설 속 일상은 내 삶과 조금도 겹쳐지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왜 글을 쓰는지, 무얼 쓰는지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만이 교실 안에 가득했다. 그 때 나에게 동인문학상을 거부하겠다는 황석영의 선언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여전히 소설은 주방과 골방에 갇혀 있다. 소설가들이 달리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뒤늦게야 <오래된 정원>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80년 이후 내 시간들과, 서울의 시간들과, 이 나라의 시간들을 생각했다. 불과 20여 년. 내 기억의 줄을 잡아당기면, 어느 새 당겨 올라오는 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풍광은 생경했다. 소설 속 오현우가 18년 만에 출옥했을 때, 서울의 거리를 보고 이렇게 당황했을까. 긴박하게 전개되는 오현우의 도주 생활이, 미경이의 분신이, 그 젊은이들의 분노와 어른스러움이 나는 어색했다. 그 청춘들이 나라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고백할 때, 보다 정당하게 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도 그러했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우리는 아직 자라지 못했음을. 그 시절 그 청춘들보다 나라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그 청춘들보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그 청춘들보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줄 몰라서가 아니라. 어느 한 순간도 제 시간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순간도 내 앞을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는 오현우와 한윤희의 사랑이, 감상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내 그들의 정원이 부러웠다. 갈뫼라는 이름도, 그 뒤 어딘가에 있다는 저수지도, 그들이 함께 오른 나즈막한 야산도, 장작이 타들어가는 아궁이도, 흔들리는 촛불도, 을씨년스러운 화장실도 부럽기만 했다. 누군가의 의지를 품어주는 여자는 아름다웠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 남자의 마음은 따뜻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꿈꾸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들을 보면서 알았다. 마음 밑바닥에 품고 있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타인과의 관계는 조금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일주일.

나는 남도 어디쯤에 있을 갈뫼라는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신대철 시인의 시에서 '바람부리'라는 말과 마주 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떠나라, 떠나라 한다. 먼 어딘가를 기억하지 말고, 그 곳 갈뫼를 찾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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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죠 2006-11-1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부디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갈뫼만 보시고 돌아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요. 속노랑 고구마 쪄놓고.

선인장 2006-11-1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오즈마님... 늘 어딘가를 떠돌아도, 마음으로는 늘 님이 그리워요.. 잊지 말아요...
 
봉지
김인숙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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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제 나도 젊음을, 청춘을 추억할 나이가 되었다고.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너무 이쁘다고 여겨질 때, 앞으로의 일들보다 과거의 일들에 대해 떠드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요즘 아이들은'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 코미디 프로를 보다가 도대체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써놓은 소설을 읽고 문득문득 기시감을 느낄 때.

이 책을 읽기 전 <워터>라는 일본작품을 읽었다. 고등학교 수영선수들의 어느 여름을 그린 그 소설을 읽으면서, 청춘은 이다지도 찬란하구나, 감탄을 했더랬다. 그들의 설렘과 그들의 다툼과 그들의 첫사랑과 그들의 열정은 맑은 여름 하늘 아래 튀어오르는 수영장의 물방울 같아서, 나는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유쾌하고 즐거웠다. 분명히 즐겁고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유쾌함으로 떠오르지 않는 나의 십대와 비교해 볼 생각도 없이 나는 그들과 노닥거리며 여름 한 나절을 보냈다. 그러면서 문득, 왜 우리의 청춘들은 늘 우울하고, 늘 암울하고, 세상의 모든 고민들을 다 짊어져야 하는지, 안타깝고 아쉬웠다.

김인숙의 소설 <봉지>는 나이트클럽을 출입하고, 다방 구석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날나리 여고생들이 나와도, 우울하고 암울하다. 자전거 체인에 맞아 구멍이 나버린 '봉지'의 청춘은 이리저리 바람에 나부끼는 비닐봉지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부끼다 만나게 된 세상은 가벼운 봉지 안에 우울과 세월의 무게만을 가득 담아놓는다. 고향마을에서의 평온하지만 불온한 삶은 추억하기에 너무 남루하고, 서울에서 겪게 되는 불안하고 무거운 시대는 봉지의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아무 것도 모른 체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한 십대 '봉지'의 마음에 불던 바람은 20대를 지나는 내내 가라앉지 않아 '봉지'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그녀 '봉지'의 청춘을 엿보다, 나는 불쑥 투덜거린다. 왜 우리의 청춘은 이리도 우울하고 서글픈가. 왜 그녀는 등만 보이는 그를 사랑하고, 왜 그녀를 사랑하는 그 녀석은 제대로 된 고백 한 번을 하지 않는 것일까. 어린 시절 결혼한 또 다른 그녀는 아픈 가출을 일삼고, 그녀를 부인으로 된 서른이 넘은 그는 다 자라서도 그토록 서러운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자취방에서 뒹굴며 인터넷 게임이나 하는 청춘의 지리멸렬한 넋두리에 피식거리면서도, 이렇게 삶과 부딪히며 자기의 몸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힘에 겹다. 시대와, 세월과, 시절 대신에 자기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제대로 싸워가며, 이제야 시작된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내는, 그런 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면 안 될까, 우리의 청춘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신작로를 걸어가는 소년의 흰 티셔츠에서 느껴지는 희푸른 셀레임 같으면 안 될까, 우리의 청춘이?

오래된 그날, 그들의 사연이 가슴 답답해, 나는 이제부터라도 달리 살아봐야겠다. 어느 날 지금 이 순간을 청춘으로 기억하게 될 시간이 분명 나에게 찾아올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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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1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순간도 청춘이 되고, 오늘도 오래 전 그날이 되겠죠.
선인장 님. 리뷰가 떠서 무지무지 반가웠어요.

선인장 2006-11-1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랫만이라... 인사하기도 조심스러워요... 빼꼼히 문을 열면 늘 님이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해요...
 
백년여관
임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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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한라산의 단풍이 담긴,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지난 여름 처음으로 올랐던 한라산 자락을 떠올리며, 한낮의 기온이 29도까지 오른 서울 하늘 아래에서 한참이나 그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하루 반 나절을 들고 있던 임철우의 백년여관을 덮고 다시 떠올린 한라산은, 흰 눈이, 연분홍 벚꽃 같은 눈이, 노란 유채꽃 같은 눈이 가득할 것만 같다. 연초록 빛을 발하는 손들이 난분분, 난분분, 눈처럼 날릴 것만 같다. 그 고운 빛깔의 눈이 가득한 한라산을 떠올린다...

모두가 잊어버린 기억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잊어버린 지루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가슴 속에 가득한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생을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런 이들을 만나는 건 불편하고 거북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 새롭지 않아서 흥미가 새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냐고 타박도 하지 못하는 나는, 어서 그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성의 없는 청자이다. 그러나 그들 가슴에 가득한 분노와 울분과 슬픔과 억울함은 전염성이 너무 강해, 성의 없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같은 청자도 그만 마음이 답답해지고 만다. 잊으라고 말하기에는 그 슬픔의 정도를 짐작할 수도 없어서, 지겹다고 말하기에는 그들 마음에 있는 죄책감의 1% 정도의 감정을 나 역시 앓고 있어서, 나는 그만 하라고도 하지 못하고 답답한 가슴을 붙든체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 듣는다.

백 년에 한 번 온다는 개기월식이 일어나던 밤, 영도 앞바다에는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국제항 개막을 축하하는 행사가 끝나고 벌어지는 불꽃놀이는 한 겨울 쩡쩡 얼어버린 밤하늘을 수만 개로 조각낸다. 그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항구의 뒷편 어느 이름 모를 바닷가에서, 그 불꽃보다 더 환한 빛의 수만 개 손들이 지구의 그림자가 삼켜버린 달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본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굳이 임철우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근대사는 직접 살아보지 않은 우리에게도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전쟁은 북과 남 사이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50년 세월 동안 전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땅 곳곳에서, 그 땅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누구는 총에 맞아 피를 흘렸고, 누구는 칼에 맞아 피를 흘렸고, 그들이 흘린 피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지독하게 오래 남을 생채기를 냈다. 그들 가슴에 남은 생채기는 좀처럼 아물지 않아, 누구는 머리에 꽃을 달고 거리를 배회하고, 누구는 알몸으로 한 세상을 떠돌며, 누구는 입을 닫았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병자였고, 모두 죄인이었다.

어느 사이, 우리는 그들을 잊어버렸고, 그들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더 이상 눈여겨 보지 않는다. 역사라는 이름은 그들 모두의 상처를 추상화시켰고, 이제는 용서해야 할 때라는 듣기 좋은 말은 1% 남은 죄책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했다. 산 자들은 잊혀졌고, 죽은 자들은 사라졌다.

다만, 아직도 그들 사이을 배회하는 영혼이 있어, 그 영혼의 목소리에 잠시 시간을 뺏긴 오늘 같은 날은, 나는 산 자들 사이에 서성이는 원통한 영혼에 밤잠을 설치게 된다. 세상은 산 자들만의 것이 아니어서, 이따금 내 방 어느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린 그들과 만나게 되는 날에는 나는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난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의 두근거림은 그러니까, 보아서는 안 되는 영혼을 보아버린 탓이라 치자.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은 들어서는 안 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버린 탓이라 치자. 어느 밤, 지독하게 고단한 내 마음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으로 추락할 때 그 초록의 빛들이 기꺼이 나를 안아 위로해 주리라 믿어버리자. 

저 멀리 영도 바다에서 치뤄진 그 굿판에서 울리던 방울소리가 내 방 구석에 웅크린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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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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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영화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반전이라는 말이 특정한 장르를 지칭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건 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 그래서 나 역시, 도대체 작가가(혹은 감독이) 숨겨놓은 비밀이 뭘까를 짐작하려고 애쓰게 된다. 더구나 대단한 반전이 있는 소설이나 영화라는 평을 미리 들었을 때, 그 작품을 권해준 저마다들이 모두들 속았다고 무릎을 칠 때 내 기대감을 극도에 달한다. 번번히 아쉬워하고 실망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반전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작가가 만들어놓은 트릭에 연연해 그것을 짐작하고자 애쓰며 책을 읽다가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조용히 나루세의 모험담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이 무슨 연관성을 맺고 있는 건지 애매했고, 매력적인 범인은  등장하지도 않고, 주인공의 연애담은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책장은 잘 넘어갔다.  

악행을 일삼는 범인에 대한 적대감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고, 그들을 뒤좇는 나루세에게 반하지도 않는, 평범한 독서였다. 과정은 길었지만, 클라이막스는 짧았고, 사건은 쉽게 해결되었다. 그리고 밝혀지는 건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바로 화자의 정체였다.  

범인의 뒤를 좇는 것이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한 건, 물론 나의 편견이다. 화자가 곧 범인이었던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고 무릎을 쳤던 건 추리에 대한 나의 편견과, 화자에 대한 동일시를 뒤짚는 소설가의 전략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두꺼운 분량 동안 끌어온 주인공의 성격과 삶의 내용을 한꺼번에 뒤짚는 몇 장은 왜 통쾌하지 않았을까? 주인공은 반드시 멋진 청년일꺼라는 나의 편견, 노인 문제에 대한 무관심, 결국 그 반전 이외에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줄거리...  

그렇지만, 이 소설을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꽤 멋진 주인공을 만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지금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삶의 방식을 구현해낸 나루세의 모습은 긍정적이다. 자못 심각해서 무슨 캠페인 같은 느낌이 드는 그의 마지막 진술은 소설적이지 않지만, 그 내용에는 동의하게 된다. 삶의 한 순간순간을 긍정하고, 어떤 때에라도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그래서 몸도 마음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 나루세와 여동생의 모습은 내가 꿈꾸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범인을 좇는 탐정 나루세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지만,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매일매일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애쓰는 인간 나루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결국 나는 모르는 사이 그 '대단한 반전'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의 성격을 이해하는 대신에 범인을 궁금해했고, 이야기의 과정을 따라가는 대신에 결론만을 예측하고 있었던 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아쉽다. 마지막 몇 장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라서 책을 읽고 난 이후의 여운을 반감시킨다. 작가와 나루세의 주장에는 너무나 동의하지만, 그 내용을 인정하면 할수록 소설적 재미는 사라진다. 내가 추리 소설을 읽는 이유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다. 세상에서 소외되어 마음에 독을 품고 사는 악당이나, 조금은 기이한 습관을 가진 남과 다른 탐정, 내 마음속에도 존재하지만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나쁜 기운 따위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정작 현실에서 마주치면 두려워할 사람을 떨리는 가슴으로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 나루세와 같은 인물을 만난다면, 나는 마음을 다해 그를 존경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다시 한번 마주친다면, 그저 힐끗 한번 바라보고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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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3-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점 '사회파 추리소설' 에 매력을 느껴 찾던 중에 읽게 된 책이었는데요, 막상 사회문제 짚어내는건 시시했어요. '13계단'이나 미야베미유키의 '이유' 같은 작품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더라구요.
대놓고 나쁜 기운 따위의 탐정으로 챈들러의 말로우 시리즈는 어떨까요.

hanicare 2006-03-0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추리 소설을 읽는 이유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 마음속에도 존재하지만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나쁜 기운 따위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정작 현실에서 마주치면 두려워할 사람을 떨리는 가슴으로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절묘한 표현에 감탄이 나와요. 실상 내 속에 숨어있는 어둠, 이것을 생각하면 세상에 낯선 악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역시 선인장님. 아주 얇은 고기의 등과 배를 감쪽같이 떠내듯이 마음은 구별하지만 입은 그러지 못하는 부분을 잘도 묘사해 주셨어요. 이런 글을 만나니 떠르르르 마음이 떨리네요. 잘 읽고 갑니다.

물만두 2006-03-0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품도 있고 저런 작품도 있고요^^

선인장 2006-03-0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 어쩌면 제가 나이듦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추리소설을 많이 찾아 읽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나름대로의 기대가 작동한 탓이었겠죠. 13계단이나, 이유는 재미있나요? 챈들러의 작품은 딱 제 취향이죠.^^ (그러고 보니, 첫인사네요. 반갑습니다. 하이드님...)

하이케어님 > 님의 방문, 저도 마음이 떨립니다. 너무 오랫만이에요. 결 고운 님의 글을 보게 되서, 참 반갑습니다.

물만두님 > 역시 오랫만이죠? 맞아야, 이런 작품도 있고, 저런 작품도 있고, 이런 감상도 있고, 저런 감상도 있고, 그래서 책을 읽는 것도,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겁습니다. 봄이 오고 있겠죠? 봄볕이 님을 따뜻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창해 맑은내 소설선 3
이승우 지음 / 창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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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믿지 않을 테지만, 왜냐하면 나도 믿지 않았으니까, 광화문 한복판에 땅굴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땅굴이라는 말이 걸리면 터널이라고 옮겨 들어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땅굴이라고 해야 어감을 제대로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터널이라고 바꿔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대한 광고를 우연히 접했던 날부터 광화문 한복판에 있다는 땅굴의 존재를 믿어버렸다. 땅굴의 모양도, 용도도,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도 모른체, 그저 믿어버렸다. 몇 년 전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으면서 태평양 밑바닥 어디에서 자란다는 나무를 믿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니 나는 소설 속 화자보다 떠 빨리 김소령의 이야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소설보다 먼저 나오는 작가의 말에서 이승우는 이 소설이 힘든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땅속으로 나 있는 길을 소개하는 글이라고 고백한다. 사랑하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문득 사랑에 붙들려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스스로의 몸으로 현실 밖으로 길을 내야 하는 사람들, 열정은 뜨겁지만 착한 사람들, 이 소설은 온전히 그들을 위한 것이라는 고백이다. 작가 스스로 굳이 이런 고백을 하지 않더라고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이승우에게 사랑은 원래 그러한 것이었으니까.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도 <생의 이면>에서는 인물들은 사랑하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에 붙들려 어쩔 줄 몰라 했으니까. 그렇게 몇 편의 소설에서 가련한 사랑을 그려냈던 작가는, 이제 그 가련한 인물들이 사랑할 수 있는 틈 하나를 세상에 만들어주려는 시도를 시작한다, 그것도 광화문 한 복판에.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사랑 이야기는 더디 흘러가고, 땅굴의 정체와 땅굴의 사연은 쉽게 공개되지 않는다. 지독하게 완고한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두근거림과 애절함을 기대했던 나는 그 사랑의 실체를 담담하게 진단하는 작가의 말에 책을 읽는 속도를 빨리 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이중성, 질투의 속성을 짚어내는 작가의 인식에 동의하면 할수록, 내가 품고 있는 사랑 역시 그렇게 냉정하고 명확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어떤 감정이입도 스스로 절제한다. 나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통해 확인했던 그들 사랑의 우연성을 나에게로 확장해, 낭만적이고도 애절한 꿈을 꾸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은 그런 내 의지를 자꾸만 배반한다. 너무나 매혹적일 게 분명한 자신의 사연은 자꾸만 숨기고, 사랑에 대한 냉정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나는 화자의 운명적인 사랑을 포기하는 대신, 정체 모를 김소령에게, 그리고 소현세자와 묘선에게 기대를 건다.

교보문고에서 종로 소방서 근처에 이르는 길을 인물들과 함께 걸으면서, 이제는 다시 흐르는-그러나 왠지 아무 못마땅한-청계천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들의 사연을 상상하며 조바심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내 기대 역시 배반한다. 김소령의 사연은 그의 죽음 이후에, 카페 마담을 통해 너무나 간단히 소개되고, 소현세자와 묘선의 사랑 역시 김소령이 작성한 노트에 담백하게 기술될 뿐이다. 나는 소현세자와 묘선을 사랑을 충분히 짐작하지 못해 언젠가 들었던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풋사랑을 떠올렸고, 김소령의 사연이 너무나 아쉬워 일찍 결혼한 친구 한 명을 오래 마음에 품었던 친구 후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묘선과 아현세자의 목숨과 바꾼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는 가슴에 싸한 아픔을 남겼다. 지하로, 땅속으로, 현실 밖으로 길을 내야만 하는 사랑, 그래야만 겨우 가능해지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인물들이 가슴에 싸한 아픔을 느낄 때, 나는 무감각한 내 자신을 조금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자꾸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떠올린다. <생의 이면>처럼 취화당 일기와 두 인물의 사연과 김소령과 카페 마담의 사연이 조금 더 친절하게 펼쳐졌다면. 이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이 세 가지 사랑 이야기가 이따금 겹치면서 그러나 끝없이 갈라져 세 갈래의 길을 펼쳤다면. 이런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의 보이지 않는 뒤쪽. 우리들 사랑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틈. 일종의 블랙홀. 우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틈을 통해 여기로 들어온 걸 거예요. 김소령은 여기가 우리들을 위한 집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곳은 비현실이고, 어쩌면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몰라요. 모든 게 다 꿈인지 몰라요. 김소령도 취화당도 땅굴로. 심지어 우리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굴, 이 틈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어느 밤 랜턴 하나와 무릎까지 오는 장화 하나를 준비해 광화문 지하 어딘가에 있을 취화당을 찾아 떠날 마음을 먹게 할 정도로. 김소령이 건네 준 열쇠 꾸러미 없이 어찌 들어갈까, 하는 고민을 오래오래 하게 할 정도로. 어느 날인가 사랑에 붙들려 어쩔 줄 몰라 할 때, 어느 누구의 이해도 어느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해 세상 밖으로 길을 내어야 할 때, 내가 만들어내는 길 말고는 어디로도 발을 딛을 수 없을 때, 나에게도 김소령 같은 이 찾아와 세상에 없는 틈, 취화당의 열쇠를 건네 줄까? 그러면 나는 단 한 번 의심도 하지 않고, 취화당을 찾아 땅 밑으로 향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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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0-2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가뭄에 비오듯 찾아오는 선인장 님의 리뷰로군요. 화들짝 반가웠구요. 역시나 촘촘한 글도 숨가쁘게 읽었습니다. <생의 이면> 이후 읽지 않았던 이승우 씨의 소설. 선뜻 집어들기가 두렵습니다.

코코죠 2005-10-25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장님은 펜으로 글을 쓰지 않을 거에요. 아마 당신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지도 않겠지요. 선인장님은

기다란 코바늘 두개만 가지고 있을 거에요. 그래서

온 종일 사유하고 생각한 것들을 길게 풀어내어 그 바늘로 조용 조용히

아주 조용 조용히

오랫동안 천천히 뜨개질을 하는 거에요. 맞죠, 제 말? 깜짝 놀라셨죠? 미안해요, 비밀을 말해버려서. 그런데 저는 밝히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잘 지내셨나요?
저는 무척 그리웠던 거 같아요.



선인장 2005-10-2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 오랜 가뭄에 비오듯, 그렇게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는 아쉽고, 반갑고, 두근거립니다. 화들짝 반가워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해요. 오랫만에 들러도, 늘 안부 물어주시는 님이 있어, 아직은 이 곳이 제 방처럼 느껴집니다.

오즈마님 > 오즈마님이야말로, 늘 촘촘한 뜨개질을 하고 있는 걸요. 오즈마님의 마음 안에서 사람과 사람과 시간과 시간이, 헐거워지지 않고 단단하게 매듭 지어 있는 걸 저는 자주 봅니다. 타인과 몸이 섞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을 내주는 걸 어색해하지 않고, 그래서 모든 것들과 한 몸처럼 짜여지는 오즈마님, 잘 지내고 있죠? 저 역시 그리웠습니다.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