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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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에 사 두었던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글을 묶어낸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철지난 기사에서 이미 헤어진 커플의 열애 사실을 확인하는 것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형철의 산문집을 이제서야 읽은 이유이다.

 

처음 몇 장을 읽다가, 펜을 들고 수첩을 펼쳤다. 형광펜과 연필을 번갈아 들어가며 열심히 밑줄을 쳤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들.

 

 

- 진실은, 그것이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함부로 진실을 진술하기보다는 진실이 거주하는 고도의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시는 진실이 표현되(면서 훼손되)는 장소가 아니라 은닉되(면서 보존되)는 장소다.

 

- 희망을 말하는 시에 마음을 내어준 적이 별로 없다. 크게 부르짖는 희망은 미학적 파탄을 가져오기 쉽고, 낮게 읊조리는 희망에는 어딘가 타협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문학이 희망을 줄 수도 있을까. 문학은 절망적인 세계 앞에서 사력을 다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은가.

 

- 저의 괴벽인지 모르나 시인의 반성에 흔들려본 적 많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반성은 서정의 버릇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인들은 혹시 가벼운 죄를 반성하면서 진정 무거운 죄는 영영 봉인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고약한 의심을 해보기도 합니다.

 

- 젊은 시인들은 신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과 대화하기보다는 신을 모독하려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길입니다. 신과의 대화는 우리 시대 큰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참혹에 눈물을 흘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엉망인 세계를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고 신을 향해 말할 때'투쟁하는 형이상학'이 시작될 것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중간중간 멈춰야했다. 신형철이 언급했던 시집을 뒤적이고, 생략된 부분들을 마저 읽고, 시에 대해 공부를 하듯이 2부를 읽어나갔다. 어떤 시집에서, 어떤 시를 찾아읽어도 원고지 스무 장 남짓한 신형철의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펜을 내리고, 수첩을 덮었다. 그의 문장들이 아무리 큰 깨달음을 주어도, 이건 신형철의 깨달음이다. 밑줄을 긋고, 수첩에 그의 문장들을 옮겨 적어도 그것들이 나의 깨달음이 될 수는 없었다. 그저 습관적인 행위로 문학에 대한 열망 따위 남아 있다고 위안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런 부질없는 위안의 도구로 쓰기에 부끄러울 만큼 깊은 사유와 문학에 대한 반듯한 열정이 그 짧은 글들 곳곳에 담겨 있었다.

 

신형철은 모든 글에서 시와 언어의 본질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또 모든 글에서 지금 우리에게 문학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답한다. 어쩌면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포기해 버렸을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이 시대에 걸맞는 유의미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많은 시들을 통해 그 답들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나도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답을 찾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말이다. 또한 여기 실린 모든 글에서 신형철은 그의 사유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예술의 언어가 무엇인지 두 번 이해했다. 그가 언급한 시들을 통해서, 그 시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의 문장들을 통해서. 결국 그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문학의 본질을, 자신의 글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깊은 내면과 단단하고 좋은 문장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문학을 향한 그의 지극한 순정이다. 김연수의 어떤 소설들을 읽으며 문득 들었던 이런 느낌을 이 평론가의 글에서 더 절박하게 느낀다. 책머리에 스스로 고백한 바, 문학을 사랑할수록 그는 문학과 더 많이 싸울 것이고, 그 싸움에서 번번히 질 것이라고 했다. 사랑으로 인한 싸움에서 먼저 미안하다도 말하는 이는 잘못한 쪽이 아니라 더 그리워한 쪽이므로. 이토록 지극한 순정을 바치는 남자라니. 대체로 사랑에 목숨을 거는 남자는 찌질하다. 그들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곤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상대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순정을 바치는 남자라니, 참으로 근사하다. 때로 그 남자의 순정이 그 대상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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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12-02-17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책은 김현 이후로 제가 오랫만에 구입한 평론집입니다.
지극한 순정
이 말 참 좋군요.
선인장님 글을 다시 읽게 되어서 더 좋구요.


선인장 2012-02-17 20:31   좋아요 0 | URL
사랑 타령 하는 남자 정말로 매력없다고 생각하는데, 신형철의 글들을 읽다 보면, 자꾸만 "순정을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하고" 뭐 어쩌고 하는 노래가 생각하는 거에요. 며칠 전에는 기어이 그 노래 제목을 알아내서, 한참을 듣기도 하고 말이지요. 자꾸만 어떤 글을 읽고 사랑에 빠져서 큰 일이에요, 저는... 나이만 먹지, 아직도 철이 안 들어요, 저는...
 
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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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 아니 인복은 떠났다. 모란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진생이 또다시 녹슨 아코디언을 내왔다. 모란의 흐느낌 사이사이로 진생의 구슬픈 아코디언 소리가 측백나무 숲 속에서 울렸다.
"우리 딸이 어려서 울 때 내가 이것을 연주해 주면 울음을 딱 끈치곤 했지."
모란이 어려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진생이 모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것뿐이었다. 아코디언 건반을 누르는 진생의 눈에 눈물이 어리고 있음을 정섭은 알았다. 정섭의 가슴도 찢어지고 있었다. 딸을 달래기 위해 손끝이 닳아져라 낡은 악기를 연주하는 늙은 아비가 정섭을 울렸다. 모란이 울고 정섭이 울었다. 늙은 진생이 울고 낡은 아코디언이 울었다. 나그네 설움, 울고 넘는 박달재,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 울었다.
아코디언 소리가 잦아질 무렵, 모란이 부스스 부은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진생이 연주를 딱 멈추고 묻는다.
"악아, 뭣 묵고 잡냐?"
모란의 몸짓이 말하는 음식이 무엇임을 금방 알아낸 진생이 활짝 웃는다.
"짜장면?"
진생이 웃고 모란이 웃는데 어쩌자고 정섭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는가. 이제 정섭의 눈물 감추기는 영영 글러버린 일이 된 것 같았다.  

- 공선옥, <영란>, 2010

 느닷없이 누군가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두려워,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이별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늘 이별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들 때문에 나는 조금 행복했다고,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부탁한다고, 비록 누추하지만 내 소중한 물건들을 이렇게 처리해 달라고, 당신들 때문에 나는 조금 더 행복했다고, 인사를 하고 사람들과 작별하고 싶었다. 그러나 죽어서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든, 살아있지만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든, 내 곁을 떠났던 사람들은 나에게 그런 인사를 남기지 못했다. 누군가와 헤어지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고 준비된 이별의 인사를 하고 그 이별을 번복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준비된 이별도 언제나 느닷없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다가온 이별 앞에서 나는 대체로 슬퍼할 줄 몰랐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서 늙은 아비 진생처럼 구슬픈 아코디언을 연주해 주었다면, 악아 뭣이 뭇고 잡냐 물어주었다면, 나는 너무나 딱딱해진 내 마음을 확인하며 허전해하는 오늘을 피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내게 그러하듯, 영란에게도, 이정섭에게도, 모란이나 장, 완규, 인자, 태숙, 영대, 숙영에게도, 하물며 어린 유나나 수한이에게도 이별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별의 흔적은 감지하지 못해 이별의 순간을 영원처럼 겪어야 하는 영란이나 절망과 분노의 패악질로 이별을 독촉했던 숙영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혹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해도, 이별이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영란은 넝쿨 장미가 곱게 피던 집 속에서 쓰레기처럼 쳐박혔고, 완규는 밤새 유달산을 달리며 허허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누군가는 집을 나갔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짜 이별은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별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이유는, 사랑했던 누군가와 재회를 기대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했던 한 시절의 나와 단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 이전의 나와 이별 이후의 내가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이별을 감당하는 방식은 죽거나, 새로이 태어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처럼 돌아온 집에 치매 걸린 어머니를 남겨 두고 다시 떠나야했던 인자와 자신이 준 상처를 스스로 용납하지 못해 낯선 도시에 몸을 부려야 했던 이정섭, 학교도 그만 두고 유달산과 바닷가를 배회했던 수옥 모두에게 이별 이후의 시간들은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은 차마 토해내지 못한 사람들의 울음을 받아주고, 바다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연들을 품어주었다. 밤마다 산에 올라 죽은 듯 누워있는 정 선생의 고뇌를 유달산 한 자락이 숨겨주고, 정 선생은 이정섭의 눈물을 감춰주고, 이정섭은 형을 잃은 호영의 응석을 받아주고, 호영은 영대의 사연을 외면하지 않았다. 영대 엄마는 쌀이 떨어진 인자와 영란에게 기꺼이 바닷요리의 진수를 전수해주고, 영란은 아비도 없는 인자의 생명을 기꺼이 보듬어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에 반응하고, 누군가의 반응으로 인해 눈물을 쏟으면서 길었던 이별의 시간이 지나갔다. 온전히 슬퍼하고, 온전히 이별하고, 조금씩 애쓰는 동안 죽음의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한연희가 이정섭에게 보낸 메일은 그들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새로운 만남을 축복해 달라는, 이제는 당신과 이별할 수 있다는, 기차에서 만났던 그 연인들처럼 최선을 다해 이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정성 어린 이별의 인사.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사랑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자학해야만 뒤늦게 전할 수 있는 따뜻한 이별의 인사. 그들과 함께 했던 내 시간들이, 그들 없이 살아야 하는 앞으로의 내 시간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인사. 온전한 작별의 인사.  

그렇게 이별의 시간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뒤에 남아 항구 도시 목포를 떠올린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내 마음 속에도 슬픔이 차오르기를
그렇게 가득 차 오른 슬픔이 어느 날 당신 앞에서
눈물이 되어 터져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런 날이 오면 정 선생이 이정섭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 어깨를 안아주기를.
그런 날이 오면 진생이 모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낡은 아코디언으로라도 나를 위로해 주기를.
그런 날이 오면 순임이 영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무엇도 묻지 않고 여기 있으라고 말해 주기를. 
 

내가 당신에게 그리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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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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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재씨,
그날 제주에는 한낮에 폭우가 쏟아졌어요. 예정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한 제주 공항, 커피숍에 자리를 잡아두고, 나는 당신과 은교씨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지요. 오전에 말짱하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어요. 커피숍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창밖을 보며 소란을 피웠지만, 내 귀에는 거침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도, 빗소리에 발이 묶인 사람들의 소란도 들리지 않았어요. 너무 고즈넉하고, 너무 고요하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곳 전자상가 어디쯤에 있었을 수리실 한 구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 혹은 당신과 은교씨가 오래된 차를 두고 걸었던 그 섬의 어딘가를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지요. 도시로 돌아가면 나도 누군가와 그런 대화를 하고 싶다고. 무재씨와 은교씨처럼 나란히 앉아서 오늘 섬에 갑자기 내린 비가 잠시 무서웠다고, 그 비때문에 또 누군가가 사고를 당했다고, 나는 요새 차를 타는 것도, 도로 위를 걷는 것도, 비행기를 타는 것도 조금씩 두려워진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저에게 묻겠지요.

무섭나요?
네, 무서워요.
그리고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 그러면 오무사 이야기를.
오무사?
무재 씨는 오무사를 모르나요?
네.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이십 개를 사면 이십일 개, 사십 개를 사면 사십일 개, 오십 개를 사면 오십일 개, 백 개를 사면 백한 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 뿐이지만 반드시 하나 더, 가 반복되다 보니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 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구요. 뭔가 잘못 물었나 보다, 하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러다 한참 만에 말씀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가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무재 씨도 그런 것을 사 본 적 있나요.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그래요, 무재씨,
도시에서 섬으로, 섬에서 다시 도시로 바삐 돌아다니다 보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딱딱해져요. 그리고 이 길 어딘가에서 느닷없는 사고가 일어날까, 나는 조금 무섭거든요. 오늘까지 존재했던 오래된 것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버리는 이 도시에서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위험이잖아요. 아무튼, 그런 날이요, 유난히 어깨가 딱딱한 그런 날, 나도 누군가와 무재씨와 은교씨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나의 무서움을 덜어주기 위해 슬픈 노래를 참으면서 불러주고, 그의 고단함을 덜어주기 위해 따뜻하고 귀한 덤을 떠올리며 속삭여주고. 그렇게 은교씨와 무재씨의 대화를 흉내내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딱딱해진 어깨가 말랑말랑해지고, 단단해진 심장에도 피가 돌고, 그래서 온통 위험뿐인 도시라 하더라도, 다시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나는요, 무재씨,
서른 해 가깝게 이 도시에서 살았어요. 이 시간 동안 열 다섯 번이 넘도록 이사를 다녔지요. 스무 살이 넘고부터는, 서너 해에 한 번씩, 내가 살았던 집들을 찾아보곤 했어요. 내가 계획한 것처럼 살아지지 않을 때,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 혹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을 때, 그런 날이면 고가 도로 옆 낡은 아파트부터, 개천 옆 반지하 방까지 헤매고 다녔지요. 지금의 나보다 가련한 여자 아이를 만나기도 했고, 앞으로의 시간을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총명한 아이를 만나기도 했어요.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사라져버린 집터에 새로 생긴 아파트와 높다란 빌딩만 올려다보는 시간이 많아졌지요. 낡은 아파트가 사라지고, 쥐가 마당을 누비던 단층집이 없어지고, 몸 누일 자리만 전기가 들어오던 명동의 이층집이 무너졌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다시 힘을 내 살아보고 싶은 순간에도 찾아갈 어딘가가 없어졌지요. 애써 이 도시를 견디던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되는 일도 없어졌지요. 그리고 허망해졌어요. 내 과거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테니까요. 사라져가는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는 이 도시에서는 말이지요.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존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는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그래서요, 무재씨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요. 당신과 함께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오무사의 할아버지와 은교씨가 일하는 수리실의 여씨 아저씨, 그리고 유곤씨까지 모두 모여서요. 유곤씨가 알아냈다는 그 복권의 법칙을 전수 받아, 나에게 얼마의 돈이 생기면 당신들에게 나누어주겠어요, 우스개소리도 하면서요. 그러면 우리는 배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아낙이 슬퍼도,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는 사연이 슬퍼도, 따뜻하게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무재씨, 낡은 전자 상가가 사라지고 공원이 생겼다고, 도시가 훤해지고 깨끗해졌다고 좋아하던 어느 날이 생각났어요. 저 낡은 빌딩들이 도시의 경관을 해친다고, 함부로 말했던 날들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찾아간 전자상가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누군가에 눈살을 찌푸리던 내가 떠올랐어요. 혹 그 누군가의 옆에 순대를 먹던 아이 하나 앉아 있어, 혹 울음을 터뜨린 건 아니었는지, 그 생각을 하니 얼굴을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이 뜨거워졌지요. 내가 외면한 건, 돈에 휘둘리는 자본의 욕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활과, 그의 아이와, 그를 위협하는 그림자였으니까요. 

아버지는 여기서 난로를 팔았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나 누나들하고 와 보면 멀리서부터 그가 가게 앞에 의자를 내어 두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우리가 오면 그는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나타나선 신문지에 싼 순대를 먹으라고 내주곤 했어요. 나는 아버지 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길게 자른 순대를 베어 먹었고요. 손에 기름이 밴다고 순대 밑동에 신문지를 감아서 내어 주던 모습이나, 집으로 돌아갈 때 동전 몇 개를 쥐여주던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한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장사를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말도 서툴고 여러모로 서툰 점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함께 순대를 먹으며 앉아 있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슬쩍 일어나서 무엇을 찾느냐고, 뭐가 필요하냐고 말을 걸곤 했어요. 어린 마음에도 나는 이렇게 호객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당황스럽고, 사람들이 그가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지나가는 것이 싫어서 종종 울었거든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우니까 못됐다고 혼도 많이 났지만 나는 그냥 속이 상했을 뿐이었고요. 그런 속을 모르고 혼을 내니까 더 속이 상해서 더 울고 더 혼이 나고, 하다 보면 아버지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로부터 고래를 돌리고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되고 보면 나는 더 울 수가 없어서 아버지 곁에 그냥 서 있었고요. 돌아가신 지가 오래라 그런 기억이란 희미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아서, 가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나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무재씨,
그래도 나는, 당분간 차를 타는 것도, 도로 위를 걷는 것도 무서울 거에요. 어떤 날은 아무런 슬픔 없이 새로 생긴 공원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겠지요. 개발의 이익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그 개발로 인해 피해를 입지만 않는다면, 나는 아무런 낡은 전자상가의 시간과 그곳에서의 삶을 까맣게 잊어버릴 거에요. 그러다 문득 또다시 열 몇 군데의 옛집을 헤매다 사라져버린 집을 찾지 못해 허둥댈 때, 혹은 나도 모르게 일어나 버린 내 그림자를 따라 살이 내리는 것도 모르고 거리를 떠돌 때, 당신과 은교씨, 여씨 아저씨와 오무사 할아버지를 떠올릴 거에요.

그렇게 당신과, 은교씨가
내 삶을 위로하고
나를 각성시킬 테지요.

그러니 부디,
당신과 은교씨가 오래 헤매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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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6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7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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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한 평론가는 말했다. 문학은 써 먹지 못하기 때문에, 써 먹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쓸모 없는 문학은 그 쓸모 없음으로 인해 인간을 억압하지 않아서, 쓸모 있어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반성하게 하고, 되돌아보게 한다고. 그것이 바로 돈도 되지 않고, 밥도 되지 않지만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그가 죽고, 세기가 바뀌었다. 그 사이 문학은 일부 거대한 권력이 되었고, 일부 음흉한 자본이 되기도 했다. 권력을 비판함으로써 더 높은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자본의 모순을 말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 일부는 비루하고 쓸모 없는 넋두리나 자조적인 한탄이기도 했다. 소통되지 않는 취향의 공유를 강요하거나, 자기 위안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지난 세기 쓸모 없음의 쓸모로서의 문학은 그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21세기의 서울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아직 문학이 우리는 억압하는 것들을 반성하게 할 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을 가장 어여쁜 나이로 살아갔던 아이들이 있었다. 해금이, 경애, 수경이, 정신이, 승규, 태용이, 만영이, 진만이, 그리고 환이. 그렇게 평범한 이름을 가졌지만, 누구나 그렇듯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아이들이 청춘의 한 시절을 살아갔다. 가장 예뻤을 그들의 한때에는, 그러나 사람이 숱하게 죽어나갔다. 누구는 그 시절을 힘겹게 통과했고, 누구는 영원히 나이 먹지 않고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가장 예뻤을 모습으로.

태어날 때부터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을 가졌지만, 음악다방에서 우정을 나누고 고적대 단원으로 미모를 뽐내던 아이들이었다. 서울대 진학으로 촌동네 마을 어귀에 플래카드를 걸게 만들었고, 자기 힘으로 동생을 먹이던 야무지고 씩씩한 아이이기도 했다. 포악한 권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힘겨움을 심드렁한 대화로 위로할 줄도 알고, 첩질하는 아버지 밑에서 팍팍하게 살았지만 엄마에 대한 연민도 가득한 아이였다. 사랑에 실패해 좌절하기도 하고, 한순간 비뚤어진 양아치질에 몰두하며 다리를 떨던 아이였다. 그저 언젠가는 머리도 벗겨지고 뱃살도 두둑해져 아파트 평수나 승진 문제 따위를 입에 올리는 남루한 어른이 될지라도, 그 시절 청춘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고달프고, 충분히 외롭고, 충분히 가슴 벅차했을 아이들. 그러나 한 도시의 시민을 폭도로 만들어버렸던 80년대의 포악한 권력은 그 어어쁜 아이들이 남루한 어른으로 자연스럽게 자라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통과의례처럼 지나치는 청춘의 터널 속에서 그 아이들은 오래 머물러 있어야 했다. 누군가는 영원히 그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장의 부도덕한 행태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분노보다 어떤 무섬증이 몰려왔다. 인간의 양심이란 것이 사실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느껴지는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조금 힘이 세다고, 조금 더 가졌다고, 자신보다 약하거나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을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그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막막함 같은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부도덕한 행태를 묵묵히 용인하고, 수긍하고, 혹은 부도덕한 삶을 자신도 모르게 살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약하거나 덜 가진 사람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그 마음을 나에게서 발견하는 순간, 나는 어른이 된 것이리라. 그래서 마음 아프지만, 나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친구를 목도하게 된 순간, 수경이에게 세상은 이상해져버렸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사과하지 않고, 되려 아픈 사람들이 서로에게 죄인이 되어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이상한 세상을 수경이는 견딜 수 없었다. "사는 게 죄는 아닌게로 울지" 말라고, 승희 엄마는 해금이를 다독였지만, 수경이가 세상을 견딜 수 없어서 해금이는 죄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승규도, 정신이도 캠퍼스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최루탄 가득한 거리에 서야 했고, 신분을 속이고 현장에 숨어 들어야 했다.

그들이 그 시절 가장 예뻤던 이유는 싱그러운 이팔청춘의 나이여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죄스러웠고, 자신들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이 부끄러웠다. 다달이 주어지는 용돈이, 따뜻한 밥을 해 놓고 기다리는 부모가, 어쩌면 당연하게 찾아올 안정된 미래가 견딜 수 없었다.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들, 청춘은 어떤 나이가 아니라 바로 그 견딜 수 없음에 다른 이름일 뿐이다. 

5월이 가고 6월이 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변한 것은 없다. 무엇인가 변할지도 모르지만,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예측하는 것도 어렵다. 이 혼돈의 시절에 책 한 권 겨우 읽어내고, 그저 멍하니 계절이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조금 더 힘이 세다고, 조금 더 가졌다고 자기보다 약하거나 없는 자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무시해 버린다. 그러니 경애와 수경이와 승규가 붙들려 있는 그 시대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현실을 이상해 하는 친구들조차 없으니 그 시절로부터 너무나 많이 변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불행에 관심을 두는 것조차도 우스운 자기 위안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스물 몇 해 가슴에 품었던 친구들과 이제야 이별하는 작가의 마음이 조금은 아파서, 나는 내가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 버렸다. 그들과 함께 청춘의 한 시절을 살았다. 그러니 문학이 그 쓸모 없음조차도 쓸모 없어졌다는 생각은 잠시 유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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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9-06-1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만이에요.
살아 계셨군요.
요즘 들어 초창기 알라딘의 서재가 생각나고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 세월을 견디는 게 벅찬데
오랜 서재에서 새 글을 보니 꿈같고
반 가 와 요.

선인장 2009-06-1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해 주셔서 고마워요. 의식하지 못했는데, 살아있는지 궁금할 만큼 시간이 흘러버렸네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사람들이 많네요. 저 역시...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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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여기에 있는가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2007, 문학동네
 

아무래도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구체적인 줄거리는 거의 머리 속에서 지워져버렸지만, 그 소설 속 세계에 내가 얼마나 매혹되었는지. 암수를 한몸에 가진 생명체와 애꾸눈과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존재들이 펼치는 활극에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그래서 천명관에 대한 부정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또다른 세계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기다림이 길어지면, 부질없는 기대가 높아진다. 그리고 높아진 기대는 독서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대체로 그렇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라는 표제작때문에, 나는 다시 <고래>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상상에 조금 들떴을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등장한 서간체의 문장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소설의 줄거리는 그닥 흥미롭지도 않았지만, 나는 뭔가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토마스, 그가 떠난 여행지는 생트로페 항구란 말이다. 나의 기대감이 커지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물론 이 소설 앞에는 <프랭크와 나>가 있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등단작이라지 않는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천명관의 세계가 펼쳐질꺼다, 라는 믿음은 몇 편의 소설이 끝나면서 어이없이 사라졌다. <고래>의 황당해서 그지 없이 유쾌했던 그 세계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 세계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실망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금방 천명관이 그려내는 이 현실의 세계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소설의 공간에 익숙해짐과 동시에, 내가 앉아 있는 익숙한 내 방이 낯설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왜 나는 이 곳에 있는 것이지? 내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최선을 다해 자기의 생을 산다. 중상층의 평범한 생을 영위하기 위하여 제 삶의 목적 따위 고민할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농장의 일요일, 세일링),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모진 소리를 들어가면서 드라마 작가로 성공한다(비행기). 시대의 변화와 가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프랑스혁명사), 실직한 남편이 언젠가 캐나다에서 랍스타를 수입해올 날을 기다리며 마트 점원의 고된 나날들을 견뎌낸다(프랭크와 나). 그들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세상에 특별히 냉소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위험한 욕망을 가졌다거나 불온한 존재들이 아니다. 불온한 것은 시간이고, 세상이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위험하고 불온하다. 이 세상은 죽은 고양이가 살아오기도 하고, 믿었던 남편이 동생과 바람을 피기도 한다. 자신이 쓴 드라마 대본과 실제의 삶은 어이없이 섞여 버려서 삶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가 되는가 하면 그렇게도 동경했던 디제이형은 어설픈 양아치일 뿐이다. 그리고 이 불온한 세상은 이들이 꿈꾸는 일상에 이따금 린치를 가한다. 그때마다 이들은 어리둥절하다. 아프다,는 비명보다 먼저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되었지? 겨울날 잠옷차림으로 달린 도로 위에서, 아버지의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위에서, 아이들과 골프공을 주우러 찾아간 호숫가에서 이들은 생이 날리는 주먹을 맞고, 어리둥절해 할 뿐이다. 이유도 없이 한 방 얻어맞고, 답도 없는 질문에 머리 속이 뒤엉킨다. 그저 자고 나니, 나는 여기에 있을 뿐인데. 그제서야 우리의 가여운 주인공들은 세상에 주먹질을 해보지만, 그건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숟가락 구부리기에 불과한 것이다. 겨우겨우 성공해도 쌀도 안 나오고, 돈도 안 나오는, 숟가락 구부리기와 같은 것.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대학생이었다. 유학을 했다 복학한 그해, 가을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한 선배의 심부름으로 교정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여기저기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문득 동기들 무리가 내 옆을 지나간다. 너희들 어디 가? 내 물음에 동기 중 하나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수업 들어가지, 가긴 어딜 가. 그제서야 나는 수업 시간임을 깨닫는다. 할 일이 많은데, 여기 저기 뛰어다녀야 하는데. 그러나 상황은 보다 심각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반이 훨씬 지났지만, 나는 수업을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거다. 그 순간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도대체 나는 무얼 하러 뛰어나니고 있는 거지? 왜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지? 나는 왜 한번도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던 거지?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려 했지만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니, 그 이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더욱 막막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내 꿈의 세계와 내 현실의 세계와 천명관 소설의 세계가 겹쳐져 머리 속은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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