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빛 그림자 2005-12-19  

언니,
언니,(저, 언니 동생할래요. 동생시켜 주세요.)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이 공간이, 그리고 언니가 참 그리웠어요 편지를 할까 하다가 일주일이나 걸리는 그 시간이 아까워서 그러지 않네요.. 제가 꿍얼꿍얼거리는 이 말들을 언니가 지금 들어줬으면 싶어서요. 근데 이 공간에 언니가 영 없는 건 아닐까,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어요. 뭐 어떡해요, 아무 응답이 없으면, 먼 거리도 아닌데, 직접 찾아가지요. (이런 사람을 스토커라고 하는 거지요? 헤헤.) 며칠 전에 아는 선배가 보낸 카드를 받았어요. 뜯어보니까, 이런 말이 들어있더라고요. ‘여름 성탄절을 보내겠구나, 신나겠다!’ 저는 이 말이 걸려서 멀뚱멀뚱해 있었어요. 새삼스럽게 달력을 보니까 12월이더라고요, 거짓말같이. 종종 시간이 저를 성큼성큼 앞질러가는 느낌이 들어요. 뚱하니 뒤쳐져 있다가 누군가가 꾹 찔러서 알려주면 그제야 번쩍하고 알아채고 놀라고요. 이런 말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뱉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얼마나 외지에서 적응을 잘 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냐고, 기특해하면서도 서운해(혹은 서운해하는 척)해요. 하지만, 그들의 말은 제 바람일 뿐이었지 사실이 아니었던 걸요. 저는 뭔가에 몰두해 있어서 다른 일에 시선 둘 틈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도 없었어요. 이 공간에서 제가 보낸 시간들이 가치가 있었네 없었네 하면서 저울질을 하려는 건 아니고요, 이렇게 시간은 흐르는데, 혼자 그 시간에 끼여서 같이 흐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저는 이상하고 의아해요. 흐르지 못하고 고여있던 그 시간들을 저는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이곳에 오기 전에 이곳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학원을 다닌다거나 교환 학생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육개월을 머물겠다고 했을 때, 제 주변의 사람들은 저를 용감하고 대단하다고 그러더라고요. 타지에서 외로울까봐 아플까봐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새가 장사밑천이랑 배짱이랑 두둑한 장사꾼처럼 보인다고요. 그때 실실 웃고만 있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비빌 언덕도, 저를 보호할 울타리도 없어보이는 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말이에요. 무식하면 욕감해진다고, 큰 기대도 뜨거운 열정도 없어서, 그래서 그럴 수 있었다고요. 언니. 몰랐어요, 저는. 사람 사는 일은 어디서나 다 똑같다고,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 사귈 것이고 그러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가진 천연덕스러움이 사람을 금방 사귀는 데 도움이 될거라고 의심하지도 않았고요. 사실 외국에 나가서 한국의 공간이 사람들이 그립다고 그래서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밉상스럽지는) 않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몰라요. 이해하는 척했지만 그들이 겪는 마음의 정도를 저는 상상만 할 수 있었지 직접 겪어보진 못했으니까요. 고등학교를 그리고 대학을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곳에서 다녔다는 것, 이것이 저는 혼자서도 척척 잘해나가는 사람으로 상대에게 보여지고 저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했을 거고요. 그런데 그런 것과는 또 다를 수 있었다는 걸, 하얗게 몰랐어요. 무슨 일을 겪을지 몰라서 그래서 순간 용감해진 마음이 있었어요, 이곳에 온 건요. 그리고 다른 한켠에는 열정이나 기대의 부족이요. 의욕적으로 뭔가를 얻어보겠다는 그런 마음이었다면 이곳 저곳 꼼꼼하게 알아보고 준비를 제대로 했을 거에요. 저는 목적이 없었어요. 다른 곳에 가고 싶다는 가볍고 얕은 마음말고는 말이에요. 마음을 움직였던 건 바깥에서 부는 바람만이 아니어서 속을 헛헛하게 만드는 안에서 부는 그 바람(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게 만드는 바람)이었으니까요. 그랬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아서 모든 일들이 저를 괴롭히는 것마냥 돌아가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너무 서럽고 외롭고 아파서 저는 차라리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겁다가 가볍다가 기준도 없는 마음의 변덕스러움이, 그리고 그 마음들이 만드는 저의 행동들이, 하나 하나 이제야 호되게 벌을 받고 있다고요. 사람사는 모양이야 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빛 그림자 2005-12-19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했지만 소소하게 다른 일들이 유별나게 다르게 다가오고, 그걸 반응하는 저 자신이 낯설어서 저는 서럽고 아파야만 했었어요. 그러니까 신호등의 불이 바뀔 때의 심장 박동까지도 빠르게 만드는 그 요란한 소리, 욕실 바닥이 젖지 않게 신경써야하는 수채구멍이 없는 욕실의 바닥, 세제를 푼 뜨거운 물에 솔로 쓱쓱 문지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설거지법, 옆에 책이라도 갖다놓고 간간이 읽으면서 인터넷 웹페이지 열릴 때가지 기다려야하는 느린 인터넷 속도, 딱히 영어식 이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렇다고 한국어 제 이름도 아닌 어색한 두 음절의 새로운 이름, 입안에서 맴돌다가 한참 후에야 간신히 뱉어내던 다른 언어---. 이런 것들이 절 아프게 했어요. 그런데 저, 씩씩한 척했어요. 벌받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표는 못냈거든요. 그러니까 더 끙끙 마음을 앓고 몸을 앓고 그랬어요. 지난 일 끄집어내서 상대를 괴롭히더라도 어떻게든 하고픈 말은 하고마는 고약한 저는 더더욱요. 힘들다고 느낄 만한 일들의 반복이었고, 게다가 다들 제 상황에서 비자 연장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하니까 오기가 생겨버렸어요. 그 오기가 예정해 놓은 육개월에다 석달을 더 있겠다고 결정하

빛 그림자 2005-12-19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 결국 여러 사람 귀찮게 하고 도움을 받아가면서 이곳에 1월 말까지 있을 수 있다고 허락을 받았어요.

다르다는 사실이 지금은 처음만큼 아프지 않아요, 다른 건 그저 다르다는 걸로 다가오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제게 한국에서와 같은 일상이 생겼거든요. 쑥스러워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엄마라고 아빠라고 부르는 뉴질랜드 가족이 있고, 한 자리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고 또 메일을 주고 받는 끄적이는 국적도 제각각인 친구들이 있고, 그들의 모임에 같이 끼여서 같이 어울리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아무게나 말을 붙일 수 있는 기질이 이제는 맘껏 발휘할 수 있고 그래요. 다시 저다워졌다는 것을 저는 일상이라고 부르고 있네요. 말이 되나요? 헤헤. 그리고 되도록이면 깊어지지 않으려고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저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을 하려다가, 어디를 가서 무얼하나 변하지 않는 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을 하려다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실감하네요.

언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다 말해내지 못하겠어요. 제가 언니에게 하려던 말들을 말이에요. 그래도 언니는 짐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그

빛 그림자 2005-12-19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렇다고 믿을래요. 저요, 1월 23일에 시드니를 가서 열흘간 머물다가 그리고 한국 돌아가요.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거, 그거 참 좋은 거네요. 한국가면 좀더 편하게 연락할 수 있을 거에요. 참, 저 이곳으로 떠나오면서 열두시간 뉴질랜드행 비행기 기다리던 시드니 공항에서 언니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제 메일 주소의 계정의 모든 메일들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지워져버려서,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지만요. 이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건강하고, 건강하고, 건강하라는. 아프고 힘들고 서러운 일들이 많아서였나요? 그 말이 내내 가슴에 남아있었어요. 고마워요, 언니. 언니도 건강하고 건강하고 건강하길 바라요.

12월 19일 밤 11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연,
 


blowup 2005-09-07  

오래 전부터...
선인장님 서재를 들리곤 했는데... 오랜만에 올라온 글 보고 반가워서 덜컥 인사드립니다. 선인장 님 방명록을 보다 웃음이 나왔습니다. 뭐랄까... 평소에 까불던 사람들도 이곳에선 조근조근해지는 기분이랄까. 드문드문이라도 글 써주세요.
 
 
선인장 2005-09-07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반갑습니다. 저조차 오랫만에 들린 방에, 인사를 남겨주셔서 반가워요.

이 방 분위기가 좀 그렇죠? 가끔은 저 역시도 좀 웃음이 나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 방은 나와 아주 다른 분위기가 되어버렸거든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드문드문, 그래요, 자주는 아니어도 드문드문. 이 방은 아주 오래 비우지는 않을게요.
 


바람구두 2005-08-10  

8월 염천에 떠난 남도에서 연꽃을 보았다.
이젠 그대 얼굴이 기억나질 않아. 하긴 단 한 번 보았는데, 기억력에 의존하기 보단 상상력에 의존하는 편이 빠르겠지. 8월 염천에 떠난 남도에서 연꽃을 보았다. 연꽃도 막바지다. 여름도 막바지란 뜻이지. 곧 가을이 올 거다. 그 때까지 잘 지내길... - 선배가...
 
 
 


펭귄씨 2005-07-18  

안녕?
안녕? 이따가 보자! 근데 왜 게시판이 이것밖에 없어?
 
 
 


레고 2005-07-06  

우리 혹시 아는 사이 아닌가요?
혹 제가 아는 선인장 님 아니신가 해서 글 남깁니다. 2년 전까지 한 소설가의 홈피에서 만난,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서로에 대해 알 것 같았던... 혹 아니시라면 할 수 없지만, 만약 제가 아는 그 분이라면 안부 전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잘 지내시죠? 참 좋은 서재입니다.
 
 
선인장 2005-07-06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락거리면서 글을 남긴 소설가의 방이라면 딱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이라면 저 역시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님이 그 분일까, 잠시 고민해 봅니다. 님이 아는 이가 나일까, 내가 아는 분이 님일까?

그 곳이 소설가 이승우 선생님의 방이 맞다면, 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절 기억해 주셔서, 그리고 안부 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님도 잘 지내시나요?

레고 2005-07-0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군요. 선인장님. 인연이란 뭔가 새삼 생각해봅니다.
우리 한 번 만난 적 없는데 다만 같은 소설을 읽고 그 세계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근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인연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저는 여전히 그곳에 다니고 있습니다. 만 4년이니 퍽 오래다닌 셈이지요. 그동안 아가도 하나 낳았구요. 그러고 보니 소식 전한 지 참 오래되었네요.
금방 소설가로 만날 줄 알았는데 아직.. 이신 건가요? 혹 이 언저리에 오시게 된다면(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든, 아니든) 꼭 연락주세요.

가끔 들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