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그의 시대를 보내며


                                                         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고전비극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보다 우월한 인간, 즉 왕이나 장군, 반인반신의 용사들인데, 이들은 타고난 운명의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외디푸스왕이나 햄릿 왕자, 발렌쉬타인 장군은 모두 고귀한 신분과 준수한 용모, 고매한 인품,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맹을 타고났으나 한 순간에 영광의 절정에서 치욕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러한 추락의 낙차가 클수록 관객이 느끼는 공포와 연민의 강도는 증가한다.

비극의 주인공들이 자아내는 미적 정서는 흔히 숭고미와 비장미로 규정된다. 이상의 세계를 향하여 비상하다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추락하는 주인공은 외경과 감동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리고 이러한 숭고미와 비장미는 역사적 인물들의 죽음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사한 이순신과 관운장은 ‘성웅’과 ‘군신’으로 추앙되고,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전봉준과 스파르타쿠스는 비운의 혁명가로 미화된다.


그의 비극적 죽음, 시대의 야만성을 증명

그렇지만 노무현의 죽음은 이러한 숭고하고 비장한 영웅들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고전비극의 주인공처럼 왕이나 장군, 귀족도 아니고 반인반신의 용사도 아니었다. 강철같은 의지를 가진 혁명가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지도자, 신출귀몰한 책략가도 아니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으나,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고집 때문에, 인권 변호사로, 바보 정치인으로, 대중의 자발적 지지에 의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농민으로 돌아온지 1년만에 절벽에서 몸을 던진 어수룩한 촌놈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비극적이되 그 추락의 낙차는 크지 않다. 왜냐하면 노무현은 결코 신비로운 만년설로 빛나는 절대권력의 봉우리에 올라간 적이 없었고 그저 해발 백 미터의 야트막한 뒷산에 올랐다가 부엉이바위에서 사십 미터 아래 골짜기로 떨어졌을 뿐이니까.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기는 했으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휘두를 수도 없었으니까. 기득권 세력은 탄핵으로 그를 무력화시켰고 재벌의 앞잡이인 수구족벌언론은 집요하고 야비하게 그를 씹어댔다. 이제 권력은 청와대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대통령 노무현의 탄식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진단이었다. 그는 시장의 힘에 떠밀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함으로써 지지층으로부터 고립되었고, 퇴임 직전 힘겹게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의 영광도 그의 뒤를 이은 이명박 정권의 무조건적인 ‘거꾸로/뒤집기정책’으로 원천무효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뒤늦게서야 그의 비극적인 추락이 4·19와 5·18, 6·10으로 얻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과에 안주했던 우리 모두의 탐욕과 나태와 위선의 결과임을 깨닫는다. 한때 그에게 열광하고 박수를 보내던 서민 대중은 주식과 대운하, 뉴타운으로 떼돈을 벌어볼 욕심에, 이른바 386세대의 중산층은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어 출세시키기 위해, 등을 돌렸다. 민주시민과 노동자, 지식인들은 반대세력을 모질게 짓밟지 못하는 촌놈 노무현의 무력함과, 속내를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는 투박한 언행을 나무라며 현실정치를 외면하고 한탄만 하다가, 허황한 경제살리기 747공약을 내세운 수구기득권세력에게 민주주의를 헌납하고 말았다.


사냥개들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았던 개같은 시대

노무현의 죽음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야만성을 증명한다. 온갖 풍파에도 끄떡없이 버텨온 세련되고 영악한 기득권세력은 재산도 학벌도 없는 시골 출신 대통령의 우직한 정의감을 비웃고 왕따시키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가 낙향한 고향 마을까지 따라와 처자식과 친구, 후배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끝장을 볼 때까지 괴롭혔다. 물고 뜯고 짓밟고 조롱했다.

약삭빠른 수구족벌신문과 방송은 권력에 빌붙어 알량한 잇속을 챙기려고 온갖 거짓말과 욕지거리를 끝없이 쏟아냈다. 심지어는 소박한 촌집이 ‘아방궁’으로 왜곡되고, 봉하마을을 찾는 버스에 30만원씩 돈을 준다는 헛소문까지 나돌았다. (나는 1980년대에 전라도 주유소에서는 ‘김대중 선생 만세’를 외치치 않으면 기름을 팔지 않는다는 유언비어를 대학 교수휴게실에서 들은 적이 있다.) 줄을 풀어준 너그러운 주인한테 버릇없이 대들던 검찰과 경찰은 강퍅한 새 주인이 ‘물어라 쉭’ 하고 줄을 당기자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전 주인이건 누구건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정적을 역적이라고 모함하여 유배를 보내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3족을 멸하여 씨를 말리던 왕조시대의 잔혹한 정치보복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토끼몰이를 당하는 고통이 오죽했으면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도 없다”고 비명을 질렀을까. 그들이 악에 바쳐 부르짖던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는, 민주화의 대세에 밀려 빼앗겼던 기득권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되찾아 다시는 내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과연, 그들은 ‘촛불’로 흔들리는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언론과 집회와 표현의 자유, 남북화해, 양극화 해소 등 보편적 가치와 상식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와 경멸을 불사함으로써 우리시대를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내팽개친 ‘야만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이 기막힌 퇴행과 모욕에 맞서 힘없는 농민 노무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 동안 추구해왔던 가치를 온몸을 내던져 지켜내는 투신뿐이었으리라.


잘 가시오, 벗이여!

야만의 시대에 우리는 고통을 견디고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남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했던 노무현은 너무도 우직한 촌놈이었기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삶과 죽음이 한 조각인 자연”으로 돌아갔다.

1946년 병술(丙戌)생 개띠. 그가 기득권세력의 사냥개들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았던 개같은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탐욕으로 파헤쳐지고 남북분단과 지역주의로 갈갈이 찢긴 산하를 장엄하고 처절한 낙조로 물들이며.

잘 가시오, 벗이여! 같이 태어나 같은 길을 걷다가 먼저 간 동갑내기 도반들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본다. 화가 오윤, 시인 김남주, 음악가 문호근, 변호사 조영래 그리고 바보 촌놈 대통령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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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지창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전 민예총대구지회장
· 저서: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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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9-06-0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가슴에 불을 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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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
[매거진 esc] 두번 만나 노무현에게 반했던 김어준, 책상 위에 담배 한갑을 올리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 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
 

1. 그날은 재수학원 대신 당구장에서 종일을 보내던 중이었다. 청문회가 한창이었지만 그 시절 그 신세의 그 또래에게, 5공의 의미는 쿠션 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순전히 우연이라 하는 게 옳겠다. 수구 앞에 섰더니 하필이면 티브이와 정면이었으니까. 사연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웬 새마을운동 읍네 지부장 같이 생긴 이가 눈에 들어 왔다. 그가 누군지 알 리 없어 무심하게 시선을 되돌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다시 등을 폈다. 어, 정주영이네. 거물이다. 호, 재밌겠다. 타임을 외치고 티브이로 달렸다.

 일해 성금의 강제성 여부를 묻는 질의에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 답함으로써 스스로를 군사정권의 일방적 피해자로 둔갑시키며 모두에게 공손히 ‘회장님’ 대접을 받고 있던 당대의 거물을, 그 촌뜨기만은 대차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몇 놈이 터트리는 탄성. “와, 말 잘 한다.” 그러나 내게는 달변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경제권력 앞에서 모두가 자세를 낮출 때, 그만은 정면으로 그 힘을 상대하고 있었다. 참으로, 씩씩했다. 그건 가르치거나 흉내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를 알았다.

 

 2. 이후, 난 그를 두 번 만났다. 부산에서 또 실패한 직후인 2000년 봄, 백수가 된 그를 후줄근한 와룡동 사무실에서 만난 게 처음이었다. 낙선 사무실 특유의 적막감 속에 팔꿈치에 힘을 줄 때마다 들썩이는 싸구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때 오갔던 말들은 다 잊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기억나는 건, 담배가 수북했던 모조 크리스털 재떨이, 인스턴트 커피의 밍밍한 맛, 그리고 한 문장뿐이다.

 

 “역사 앞에서, 목숨을 던질 만하면 던질 수 있지요.”  


 앞뒤 이야기가 뭔지, 왜 그 말이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말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그의 웃음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저만의 레토릭이 있다. 난 그런 수사가 싫다. 같잖아서. 저 하나 제대로 건사해도 다행인 게 인간이다. 역사는 무슨. 주제넘게. 너나 잘하셔. 그런 속내. 그가 그때 적당히 결연한 표정만 지어줬어도, 그 말도 필시 잊고 말았을 게다. 정치인들은 그런 말을 웃으며 하지 않는 법이다. 비장한 자기연출의 타이밍이니까. 그런데 그는 웃으며 그 말을 했다. 그것도 촌뜨기처럼 씩씩하게. 참 희한하게도 그게 정치적 자아도취 따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내게 전해진 건, 순전히 그 웃음 때문이었다. 난 그때 그렇게, 그에게 반했다.  

두 번째 만남은 그 이듬해 충정로 해양수산부 장관실에서 대선후보 인터뷰로 이뤄졌다. 그 날 대화 역시 잊었다. 기억나는 건 이번엔 진짜 크리스털이었다는 거, 질문은 야박하게 했다는 거 - 그게 그에게 어울리는 대접이라 여겼다. 사심으로 물렁한 건 꼴불견이니까. 그런 건 그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 그리고 이 대목이다.

 

 “시오니즘은 국수주의다. 인류공존에 방해가 되는 사고다.”

 

 놀랐다. 그 생각이 아니라 그걸 말로 해버렸단 사실에. 정치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전하지 않은 건 눙치고 간다. 그런데 그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게 현실 정치인에게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닌데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통쾌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이런 남자가 내 대통령이면 좋겠다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그 후 대통령으로 내린 판단 중 지지할 수 없는 결정들, 적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씩씩한 남자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같은 기준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난 그를 정치인이 아니라, 그렇게 한 사람의 남자로서, 진심으로 좋아했다.

 

 3. 그래서 그의 투신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가장 시답잖은 자들에게 가장 씩씩한 남자가 당하고 말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억울하건만, 투신이라니. 그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일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담배 한 대를 찾았다는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에이 씨바… 왜 담배가 하필 그 순간에 없었어. 담배도 없이, 경호원도 없이,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혼자가 되어, 그렇게 가버렸다. 그 씩씩한 남자를 그렇게 마지막 예도 갖춰주지 못하고 혼자 보내버렸다는 게, 그게 너무 속이 상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러다 어느 신문이 그의 죽음을 사거라 한 대목을 읽다 웃음이 터졌다. 박정희의 죽음을 서거라 하고 그의 죽음을 사거라 했다. 푸하하. 눈물을 단 채, 웃었다. 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졸렬함이라니. 그 옹졸함을 그렇게 자백하는 꼴이 가소로워 한참이나 웃었다. 맞다. 니들은 딱 그 정도였지. 그래 니들은 끝까지 그렇게 살다 뒤지겠지.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4. 내가 예외가 없다 믿는 법칙은 단 하나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거. 그가 외롭게 던진 목숨은, 내게 어떻게든 되돌아올 것이다. 그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만한 남자는, 내 생애 다시 없을 거라는 거.

 

 이제 그를 보낸다.

 잘 가요, 촌뜨기 노무현.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PS - 사진 한 장 출력해 붙이고 작은 상 위에 담배 한 갑 올려놨다. 언제 한번 부엉이 바위에 올라 저 담뱃갑을 놓고 오련다.

글 김어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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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대 직장 남성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통해, '당신의 인생이 가령 4,5시간밖에 안 남았다고 해보자. 그럼 제일 해보고 싶은 일이 뭔가?'라고 물었다. 1위를 차지한 대답이 '얼른 집에 택시타고 가서 PC에 있는 야동을 삭제한다'이다.
'죽으면 끝이지'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죽으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남긴 모든 흔적을 남은 사람들이 볼 것이고, 특히 내가 삶 안에서 유지하고 지탱해 온 이미지에 관해 염려를 하며, 자기 이름에 흠이 갈 만한 흔적이 남는 것을 사람들은 거부한다. 즉, 죽은 다음에 유지될 될 나의 삶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강력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신은 무의식이다
신에 대한 라깡의 '신은 없다'는 무신론자들의 공식이 아니라 '신은 무의식'이라고 말해야 함이 옳다. 어떻게 보면 끝까지 신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앎에 대해 다가가기 위해서 각성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그러면서 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성은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거야, 질서에 따라서 행동하는 거야'라는 식의 이성이 아니라, 이 이성은(사람들이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이라고 지젝이 자주 쓰는데) 일종의 실재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성이고, 상징화되지 않는 것, 대답할 수 없는 것과 끊임없이 맞서는 정신활동이다.
말할 수 없는 걸 끊임없이 말하려고 애쓰는 예술가들, 특히 시인들의 노력과 상당히 비슷한 이성 활동이다. 그 이성은 정신이나 사유의 활동이다.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거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살고 있다. 이런 믿음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사회를 사는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분리해서 사고할 수 있을까가 정신학계의 과제이다. 또한 신이라는 환상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어떻게 벗어날까 와의 싸움이다.

이런 싸움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창동 감동의 <밀양>이라는 영화이다.






<밀양>을 지젝의 사랑과 믿음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주인공은 남편을 잃었다. 결혼을 통해, 남편과 아내는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하겠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상징적인 계약을 맺는다. 그로 인해 상징적인 계약과 그 계약에 대한 상상적인 믿음을 형성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내가 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이 사랑을 줄거야...사랑을 받을거야...다짐하면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 상징은 깨져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는데, 옆자리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죽은 남편의 애인이었음을 영화는 암시한다. 남동생이 와서 이런 사실을 인정하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하며 주인공은 자신의 상징계가 깨진걸 알면서도 부인한다.

제2의 삶을 살려고 남편의 고향으로 가는데 이것 또한 의미가 있다. 남편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남편과 맺었던 상징적인 계약에 관한 자기의 헌신이나 충실성, 정조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걸 지킬 수 있는 근거가 아들, 아빠를 닮은 아들이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납치 되서 죽는다.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을 보존해주는 실체를 가까이 두고 있어야하는데, 신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가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페티시(fetish)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여자에게는 세계가 완전히 허물어진다. 아무것도 안 남는 상태에 처한 인간, '호모 사케르'가 되는 것이다. 아무런 개선이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상징계 안에서 끊임없이 출몰하면서 자신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이 여자가 첫 번째로 무조건적으로 기대는 게 있는데 그게 신이다. 주인공은 교회에 가기 전에 아들 사망신고를 한다고 동사무소에 간다. 여자는 주민등록증을 꺼내다가 다 떨어뜨리고 공무원이 "아줌마 이름이 뭐예요?"라고 묻은데 대답을 못한다. 신분증을 다 떨어뜨리고 자신의 신분증명을 못하는 그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이 여자가 현실세계 내에서 아무런 위치도 파악되지 않는, 살아있다는 것조차 실감이 안 되는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 이 여자가 보는 것이 '신명대부흥회'라는 큰 플랜카드이다. 거기에 가서 기도를 하며 막 운다. 내용을 가지고 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울음이 터져 나와서 몸을 부르르 떤다. 그걸 누가 진정 시켜주느냐면 목사이다. 울고 있는 그 여자에게 손이 하나 쑥 내려와서 머리를 누른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 여자의 삶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처음에 연애할 때와, 말하자면 남편과 결혼 할 때, 혹은 애를 낳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놓았던 세계 자체가 처음 시작될 때의 지점으로 돌아간다.

영화 속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계속해서 하는 말이 '애까지 죽은 여자가 왜 저렇게 행복할까?'이다. 여자는 답한다. '연애에 빠진 것 같다'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갑작스럽게 광신도처럼 변한 여주인공의 상태를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지탱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삶이라도 유지하려면 저런 식의 믿음이라도 절실한 법이다.






상징계가 깨어졌을 때, 신이 실재의 모습으로 주인공에 나타나서 얘기하고, 신과 사랑에 빠진 것일까?

영화 후반부에 여자가 신을 만나서 조화로운 자신의 세계를 증명이라도 할 수 있듯이, 아들을 죽인 납치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다. 가서 이 여자가 무엇을 만나냐면, 바로 신을 만난다. 납치범과 마주 앉았는데 납치범은 너무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 평화로운 미소가 이 영화에서는 끔찍한 장면이다. 여자가 용서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남자가 자기는 지금 마음이 너무 편하다고. 여기에 들어와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신을 만나서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려고 갔는데 신이 와서 미리 용서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가 믿은 신이 나의 이전 세계를 무너뜨렸던 납치범의 신과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느냐의 문제와 만난 것이다.

영화 표면상으로는 여자의 믿음은 그 이후 회복되지 않는다. 그 다음부터 보여주는 여자의 행동은 무신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형형인 무신론자의 태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 신에 강박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 영화 뒤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첫 번째가 자기를 처음 교회로 데려가려고 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약사를 유혹해서 외도를 하게 만든다. 타락시키려고.
이 여자가 눈을 뜨고 밑에서는 바지를 벗기고 정사를 하려고 하는데, 이 여자가 정면을 보면서 즉, 하늘을 보면서 '보여?보이냐고'라고 말한다. 나의 신과 납치범의 신으로 쪼개졌던 충격을 신에 대한 모욕의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한 축은 이 여자를 짝사랑하는 한 남자가 나온다. 이 남자는 이 여자가 교회에 다니니까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회에 나간다.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영화 내내 맴돌면서 도와주고 있다.

여자의 남동생이 나타나서 처음에는 이 남자에게 당신은 절대 우리 누나가 좋아할 스타일이 아니니까 일찌감치 포기해라고 했는데 마치 새 매형처럼 인정하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여전히 교회를 다니시네요?"라는 남동생이 묻자 이 남자는 "하도 다니다 보니까 습관이 됫서요"라고 말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있던 사람이 아닌데 교회에 다니다가 신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습관이 돼서요, 다니다보니 마음도 편해지고'라는 식으로 아주 대수롭지 않게 그 얘기를 하면서 넘어간다.

이 영화 후반부에 여주인공이 새 출발을 하려고 미용실에 갔을 때 자기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는 여자가 납치범의 딸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머리를 자르다가 그 딸이 무슨 죄가 있나 싶어서 참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머리를 반만 자르고 나와 버린다. 계속 자기를 따라다니는 신에 대해 투덜거리면서.

그리고 그 중간에 동네 아줌마들을 다시 만나는데, 옛날에 교회 나오라 전도할 때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지만 또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지낸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나머지 머리 반을 자를 때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 남자가 거울을 대주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장면에 마른 풀 하나가 흔들리고 있다.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정신병에 걸렸다가 나와서 이어지는 장면들은 지젝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걸 이해할 때 접목되는 부분이 있다.

아우슈비츠의 호모 사케르들은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상태에 있다가 자멸하듯이 죽는데, 이 여자는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계속 삶을 이어간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 수다도 떨면서.

어떻게 그런 일 이 가능한가? '밀양''숨은 빛' (secret sunshine)이라는 뜻이 있다. 신이라는 것이 처음에 이 여자가 밖에 내다놓고 믿었던 위에서 내 머리를 눌러주는 신이 아니라 그냥 습관적이고 평범한 공동체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여자는 더 이상 신을 믿지도 않고, 신은 여전히 변용된 형태로 자신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어져 가는 삶. 자기를 도와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남자의 존재를 이제 인정한다. 이웃과 습관적으로라도 신을 따르는 사람을 긍정하면서 삶이 계속 이어진다.

영화 처음 장면에서는 하늘이 나오고 차 전면 유리를 비추는 강한 빛이 나온다.
대조적으로 마지막 장면에도 빛이 나오는데, 태양이 안 보이고 말라 죽어가는 풀들 사이로 은은한 빛과 그림자가 같이 나온다. 신의 위치가 어떻게 달라져야하는지, 공동체 안으로 신이 어떻게 들어와야 되는지 보여준다.

공동체 안에서 습관적으로 혹은 일상처럼 타인, 이웃과 평범한 삶처럼 ,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 들어와 있는......말하자면 공동체 안에 드디어 우상이 아닌 형태로 절대자가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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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의 종말을 애도함- 김상봉>

그가 마을 뒷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바로 우리 시대였다. 누구도 그처럼 치열하게 자기를 시대 속에 던져 시대와 하나 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보여준 숭고, 그가 넘지 못한 한계 그리고 비극적 종말이 모두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숭고였으며, 우리 자신의 한계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의 이 비극적인 종말은 시대가 길을 잃고 낭떠러지에서 추락한 것이 아닌가? 1979년 부마항쟁으로 장전되고, 80년 광주항쟁을 통해 발사된 시대, 모든 불의한 것들에 대한 광기 어린 분노가 총알처럼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던 시대가 불러낸 사나이가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는 광주항쟁 이듬해 이른바 부림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된 부산의 대학생들을 변호사로서 만나면서 처음 역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불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순수한 공감이 아무 걱정 없던 세무 전문 변호사를 역사의 가시밭길로 불러내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역사의 부름에 언제나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치열하게 응답했던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치열함이 우리를 감동시켰고, 그 감동이 그를 끝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밀어올렸다. 그것은 그의 명예이기 이전에 한 시대가 보여줄 수 있는 치솟은 숭고였으니, 그는 우리의 자랑이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나는 역사가 이렇게 한 걸음 더 진보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5년 뒤 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짐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청와대를 떠날 때, 내겐 더 이상 그에게 실망하고 분노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고향마을에 큰 집을 지어 이사하는 것을 보고, 잠깐 그 많은 공사비가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을 뿐.

그런데 그가 고향 뒷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왜 이렇게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워지는가. 그는 자기를 던졌는데 나는 왜 구차하게 살아 있는가? 그의 시대는 나의 시대이기도 했으며, 그의 실패는 나의 실패이기도 했는데, 왜 그만 가고, 나는 여기 남아 있는가.

내가 그에게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는 치열했다. 이를테면 그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깊이 좌절하고 실망했으나, 생각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한계였다. 자본이 절대 권력이 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 앞에서 변절하거나, 세치 혀로 한계를 넘어갈 때, 그는 자기 방식으로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혔고, 결국 좌절했다. 그가 곧 한 시대였으니 시대의 좌절이 그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돌아온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라, 한때 우리의 사랑을 받았던 소설가가 다른 것도 아니고 광주를 팔아 노벨상을 구걸하고 있을 때, 노무현은 모욕과 멸시 속에서 구차하고 더럽게 살기보다 깨끗이 파멸을 선택함으로써, 우리 시대가 비록 실패한 시대이기는 했으나, 적어도 비겁한 시대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우리 시대가 오월 광주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듯이, 모든 새로운 시대는 죽음 위에서 잉태된다.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으니 머지않아 운명의 여신은 그 핏값을 받기 위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이 그에게 적용했던 그 엄격한 도덕적 잣대로 그들을 그리고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그 심판을 피하려면 우리 자신이 정화되어야 할 것이니, 역사는 그렇게 쇄신되는 것이다.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내가 미워했던 마음의 벗이여, 잘 가오. 그대 영전에 오래 참았던 울음 우노니, 그대 나 대신 죽어,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

- 2009. 5. 26. 김상봉.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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