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시를 읽을 때에는 .노래하듯이 운율을 살려서. 재미있는 표현을 찾아가며, 떠오르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읽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나는 "시"라는 것이 아직 어렵다. 나에게 '시'는 자나가다 제목한줄 마음에 들면 그 한줄을 되뇌어 보고 생각해보고 마음에 담아보는 것 뿐. 그 시 전체를 다 이해하고 음미하지는 못했다.
그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눈높이를 한 단계 상승시켜 줄 것이라 기대하며 펴낸 이 책은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찾아서 찾아서 공부를 하듯 시를 읽어야 알게 될 것들을 한편의 시 옆에 친구가 이야기 들려주듯 뒷담화를 들려준다. 그래서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그 시를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위선환 시인의 ' 새떼를 베끼다' 라는 시를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P.59
'맞부닥뜨리다', '관통하다', '비다'라는 세 형용사의 변주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가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도록 만든다. 삶이란 새떼처럼 서로 부딪치기도 하는 것, 부딪친 뒤에는 서로를 관통하는 것, 관통했으나 구멍 나지 않는 것. 굳이 말하자면 '공'의 세계가 아닐까. 당신, 이 시를 읽으며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를 떠올려 봐도 좋겠다.
김준태 시인의 '감꽃'을 두고는 이렇게 설명한다.
P.61
남도의 키 크고 눈매 선한 이 시인은 역사를 천형처럼 짊어지고 시를 토해낸다..... 단 넉줄의 시에 영욕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가 가차없이 압축되어 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딱딱한 시간 구조가 '세다'라는 동사에 실려 명료하게 우리를 찌른다. 여기서 누가 아프지 않겠는가. 여기서 누가 지금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겠는가. 한때는 살육의 전쟁을 수행했고, 지금은 자본의 누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부끄럽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 줄을 읽으며 당신과 나는 오래 침묵해야한다. 당신, 그리고 나는 먼 훗날에 과연 무엇을 세면서 살아온 날을 되돌아볼 것인가?
< 안도현 시인이 노트에 베낀 시>
1부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장편 - 김조삼
백석의 시집에 관한 추억 - 서정춘
밥그릇 - 정호승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파안 - 고재종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수문 양반 왕자지 - 이대흠
봄날 오후 - 김선우
묵죽 - 손택수
찜통 - 박성우
파행 - 이진수
살구꽃 - 문신
2부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돌 하나, 꽃 한송이 - 신경림
새떼를 베끼다 - 위선환
감꽃 - 김준태
태백산행 - 정희성
별빛들을 쓰다 - 오태환
손님 - 백무산
도장골 이야기 - 부레옥잠 - - 김신용
밀물 - 정끝별
부검뿐인 생 - 이정록
불혹, 혹은 부록 - 강윤후
가재미 - 문태준
부부 - 오창렬
3부 마음의 풍경
그 굽은 곡선 - 정현종
들찔레와 향기 - 오규원
이런 시 - 최승자
고니 발을 보다 - 고형렬
고래의 항진 - 박남철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흰뺨검둥오리 - 송재학
호랑나비 돛배 - 고진하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11월 - 최정례
아, 오월 - 김영무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 - 이나명
4부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물 끓이기 - 정양
환한 걸레 - 김혜순
가시 - 남진우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 이문재
만년필 - 송찬호
트렁크 - 김언희
빗방물, 빗방울 - 나희덕
진흙탕에 찍힌 바퀴 자국 - 이윤학
월식 - 강연호
불룩한 봄 - 강미정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절편 - 유홍준
한 부에 12편의 시를 실으며 50여편 정도가 실린 듯 하다.
이런 시들 중에 아는 작가의 아는 시도 있고, 모르는 작가의 아는 시도 있고, 아는 작가의 모르는 시도 있고,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시도 만났다.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시 중에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시가 한편 있어 옮겨 본다.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냐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책의 곳곳에 김기찬(1938~2005)사진 작가의 골목안 풍격들이 실려 있어 감동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