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성의 변증법> 읽고 나면 김은주 님의 <페미니즘 철학 입문>에서 5장, <성의 변증법> 을 다룬 챕터를 읽어야지 생각했었는데,
<성의 변증법> 읽고 신나서 까먹어버렸던 듯 하다.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확실히 나 혼자 읽을 때보다 방대한 데이터에서 요점을 집어내서 맥락을 연결해주는 글을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중요성을 다시금 느낀 부분이 크게 두 부분인데
하나는 여성을 하나의 성 계급으로 보았다는 부분. 분명 내가 쓴 글을 봐도 그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 <페미니즘 철학 입문> 읽으면서 사실은 내가 자본가, 프롤레타리아, 혹은 그 안의 하위 분류 안에서 각각 남성이 더 우위에 있고 그 아래에 여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걸 깨달았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소유하고 있는 부의 정도 혹은 사회적 지위로 계급을 나눴고, 나는 각 그 계급에서 남성-여성 이렇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 내가 알고 있던 기존의 계급 구조에 여성을 끼워넣었던 거다. 그렇게 되면 여성의 각자 위치에서의 특수성이 부각될 거다. (물론 이건 내가 페미니즘 책을 읽고 모든 여성은 단일한 조건에 있지 않다 라는 것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이 성별, 생식기능에 따라 '성 계급' 이라는 것으로 카테고리화 했을 때 여성은 하나로 묶인다. 여성의 연대를 강조할 때에는 이 개념이 유용할 것이다. 가만, 그러고보니 이건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했던 것인데... 그러니까 역시 보부아르 언니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제2의 성> 읽으면서 <가부장제의 창조>가 여기서 나왔구나! 했었다. 그런데 한참 뒤이더군...
여기서 갑자기 전에 읽은 그림책 생각이 났다. 그 때도 혼자 읽었으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파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여기까지 쓰고 벌떡 일어나서 에어컨을 켰다)
생각난 책은 헬렌 옥슨버리의 1973년 작, Pig Tale (국내 번역본 제목은 <행복한 돼지>) 이다. 헬렌 옥슨버리의 남편 역시 그림책 작가로 유명한 존 버닝햄이다. (서재 분들은 잘 모르실지도) 옥슨버리는 1938년 생으로 원래 무대 디자인 일을 했던 사람이지만 결혼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인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본인 성을 계속 쓴 걸 보면 나름 독립적인 여성이었던 듯. 헬렌 옥슨버리의 그림체도 좋아하고 다른 책도 좋아하지만 처음 읽은 책이 <행복한 돼지> 라서 이 책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다. 내가 계속 관심있던 주제가 들어있기도 하고.
<행복한 돼지>의 줄거리는 농장에서 주는 거 먹고 뒹굴거리며 살던 돼지들이 어쩌다 보물상자를 파내서는, 부자가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인간같은 삶을 살다가 뭐야 예전이 더 좋았어! 하면서 다시 농장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더 생각했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것이고 하나는 독립적인 상태보다 농장에서 사육되는 상태를 동물들이 더 좋아한다고 그렸다는 것. 두 번째는.. 작가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첫 번째에 있어서 작가의 의도는 분명했던 것 같다.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가져옴.. 정말 대충 찍었었구나)
돼지들이 농장에서 살 때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이들의 행동이 성별에 따라 다르지 않았다.
돼지들이 인간처럼 살게 되자, 베르타와 브릭스의 일은 달라졌다.
베르타가 식사를 준비할 때 브릭스는 어슬렁거리고, 신문을 읽는다.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베르타가 밥을 하느라고 바쁜데, 왜 브릭스는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심심해하냐고!
심지어 그렇게 새 차를 몰고 시골길로 나갔다가 차가 망가지는 것이 이 두 돼지가 됐어! 다 귀찮아! 이전으로 돌아갈래! 하는 계기가 된다..
(농장은 70년대 히피들의 삶을 그린 것인가?!)
왜 갑자기 성별에 따라 삶이 달라졌지? 하고 찾아보니
보물상자를 찾은 것은 브릭스였다.
그리고 보물상자를 팔에 낀 브릭스와, 브릭스에게 팔짱을 낀 베르타.
당시에는 70년대가 어떤 시대라는 것을 내가 자세히 몰랐으나, 이 그림책이 1970년대에 나왔다는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선 베르타가 재생산을 하지는 않고, 부를 누가 갖고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그리는 것 같지만. 이 책을 읽은 2016년부터 나는 불만이 많았구나 새삼 느낀다.
너무 옆길로 샜는데... <성의 변증법> 에서 중요성을 다시금 느낀 두번째 부분은 아동의 해방 부분이다. 근대적 가족 개념에 익숙한,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나는 가족을 그리 아름답게만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동을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데... 물론 아이는 보호받고 싶을 때와 자유롭고 싶을 때를 본인이 알아서 넘나들고 있다. 나쁘게 말하면 반항적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기도 한데... 어쨌든 배우자에게 의무감은 별로 느끼지 않으나 아이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낀다.
아동기를 없애자는 건, 아동에 대한 착취를 없앤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성과 아이 사이의 유대도 끊을 수 있는 거죠. (286)
파이어스톤은 여성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착취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양육, 아이와의 정서적 친밀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 같아요. ... 그래서 아동기를 숭배하는 것도 경멸하죠. ... 결국 아동기에 대한 숭배와 가부장제 핵가족의 발달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겁니다. 이 아동기의 숭배를 지탱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여성들의 양육과 모성애라는 신화인 것이죠. 그리고 아동의 순수함과 모성애의 지극함은 결합되어 가부장제를 지탱합니다. (289-290)
지금처럼 가족이기주의, 모성애(?)의 발현이 팽배한 시기에 더욱더 다가오는 문장들이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런데 역시 현재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파이어스톤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겠지. 다만 파이어스톤의 주장이 무정부주의와 같다는 - 그 뒤를 상상할 수 없다는 - 것은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세계를 본 적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지 않는 인간들이 꼭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