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평점 :
작년 이맘때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었다. <여전히 미쳐있는>이 40여년 만에 나와 올해 말 읽게 됐다. 80대에 접어든 저자들이 정정해서, 이 책을 내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를 읽을 때는 안 읽은 작품들을 함께 읽느라 좀 버거웠는데, <여전히 미쳐 있는>에도 물론 안 읽은 작품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한 작품을 깊게 다루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페미니즘의 주된 경향과 작가 작품을 다루느라 짧게 언급해서 읽기가 좀 수월했다. 대신에 읽어보고 싶은 작가와 작품의 긴 목록이 생겼다.
"우리가 여전히 분노로 미쳐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미래를 쌓기 위해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해보기로 했다." (20)
책의 첫 문장, '항의 행진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글을 쓴다.' 를 읽고는 글을 쓰는 건 물론이고 나갈 수 있을 때 시위에도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읽고 공부하긴 했지만 좀 소극적이었고 더 읽고 공부하고 나 자신의 의식도 더 변화시켜서 다른 사람과 좀더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더 읽어보고 싶은 여성 작가가 많이 생겼다.
실비아 플라스.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천재 시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의 우울증은 여느 여성의 상황이 그렇듯 개인적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도 결혼-출산-육아 전에는 나의 상황이 부조리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터라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가 읽어보고 싶어졌다. 분명 읽으며 괴로울 때도 있겠지만, 위로도 많이 받을 것 같다. 플라스의 유고 시집 <에어리얼>도 궁금하다. 에어리얼이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의 에어리얼, 프로스페로에게서 벗어나 날아가는 에어리얼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 궁금해진다. 아빠를 언급하는 그녀의 시도 생각나면서...
강인한 오드리 로드 역시 인상적이어서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12월-1월에 걸쳐 같이 읽기로 했는데 아직 펴보지 못했고 글을 올리지 못했다. 자전적 에세이 <자미>를 먼저 읽으면 더 좋겠지만,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고 <자미>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가 생각보다 훨씬 직설적이라 조금 놀라웠다. 그녀의 삶을 생각하면 그럴 만 하지만, 그런 시를 쓸 수 있을만큼 강인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마거릿 애트우드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할 지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결정하라고 강요하는 보기 드문 책들 중 하나였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당시의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고.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먼저 사두었지만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를 먼저 읽었는데, 시인이라 그런가 산문임에도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읽어야겠다.
르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에 <야자나무 도적>을 링크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 '성공' 의 의미, 남극 대륙을 '그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사와 아이 양육은 투덜거림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언급 등 르귄의 다른 소설보다도 좀더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을 언급한 것 같아 흥미로웠다.
60년대 말의 여성해방운동이 베트남전쟁과 단순히 동시기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잘 몰랐었다. 이 관계를 자세히 몰랐고, 군국주의나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기조가 바람직한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관련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전은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근 읽은 책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에서는 미국 국방정보국의 한 비밀문서를 인용하여 광주 학살의 잔혹성이 "현 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모두 베트남전에서 실전 경험을 얻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희진샘이 페미니즘을 공부하다가 평화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 한국의 군사주의를 공부하게 된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동맹의 풍경> 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성 연대, '자매애' 라는 말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하지만 여성이 각자 처한 상황은 참으로 다양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추구하는 것이 갈등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점을 이제는 이해한다.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이 고민하고 행동한 역사 덕분에 시행착오를 덜 하고 가는 거겠지.. 글로리아 안살두아, 토니 모리슨, 에이드리언 리치, 그리고 갸아트리 스피박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제3세계 여성으로서 제1세계의 페미니즘 고전을 읽고 있는 나. 이제 어느 정도 읽었으면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한국이 식민지 상황에서 근대화된 것, 그것이 한국 남성과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는 것이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 희진샘이 이미 많이 해두셔서 나는 좀더 쉽게 갈 수 있겠지.
이 책 전반에 걸쳐 나온 많은 이름들은 내가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알지 못했던 (그들의 성적 지향 혹은 젠더 정체성에 대해) 이름들이었다. 내가 여성이기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그렇지 않은 여성들도 있지만) 그들의 상황과 그들의 행보는 분리될 수 없고, 어떤 작품을 작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의 주인은 누구인가. 동성애자의 권리는 곧 여성의 권리라고 세즈윅과 버틀러는 이야기했지만, 많은 이론가들조차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떤 이론을 보든 그 이론이 태동하고 서술된 맥락을 정확히 파악해야될 것 같고 그래서 더 어렵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여성과 관련있는 부분만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뻗어나가는 나의 관심사에 놀라면서, 여성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여전히 미쳐있는>을 읽으며 이미 나는 주류일 수 없고 주류의 생각에 공감할 수 없으며 주류가 아닌 다른 것에 공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이 여성이 그 시작이기는 하지만, 여성만을 위한 것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희진샘은 정희진의 글쓰기 5권에서 '다양성을 존중한다' 고 쉽게 말하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했었고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매우 찔렸지만...
그녀는 ...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성이나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위협적인 협박을 거부하고 싶은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의적인 회피에는 그 자체의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은 우리가 ‘평생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을 받아들인다. (45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필요하고, 다만 덮어두고 난 모든 것을 존중해- 하는 태도가 아닌, 공부하고 그 맥락을 알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평생 학습' 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마지막 문단도 참 좋았다.
˝똑같은 깨달음을 체험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 똑같은 주석을 달고, 똑같은 연구 주제로 되돌아가고, 똑같은 정서적 진실을 다시 배우고, 똑같은 책을 거듭해서 쓰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그 사람이 어리석거나 고집스럽거나 변화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같은 일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 삶의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 같아 보이지만 똑같지 않을거라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맥락이 다를 거라고, 그리고 그런 게 삶이라고 믿고 싶다.
마지막 장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낸시 펠로시와 앨릭잰드리아 오카시아코르테스의 이야기를 읽고 나도 언젠가 흰색 바지 정장을 하나 마련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때가 있을까 싶어서… 물론 나를 제외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미국이든 다른 나라든 여성 정치인의 복장을 좀더 유심히 보게 될 것 같다.
언젠가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우리가 여전히 분노로 미쳐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미래를 쌓기 위해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해보기로 했다. - P20
우리는 성공하라고 배웠다. 막상 성공하면 조롱당했다. 우리는 결혼을 재촉당했다. 결혼은 우리의 열망을 방해했다. 우리는 자아를 실현하라고 배웠다. 우리는 남편의 야망을 도우라고 지시받았다. 우리는 진실되게 살기로 결심하고 분장과 세상에 대한 아첨을 잊기로 했다. 우리는 가식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옷을 차려입거나 옷을 잘 입는 사람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성차별주의와 미소지니‘를 경험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우리의 분노를 강하게 억눌렀다. - P35
남성성은 남자다움에 대한 성차별주의적 개념과 동일시될 필요가 없다
- 핸스베리의 작품 <태양 아래 건포도> 중
남성에게 강요된 가장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우월성‘과 ‘권위‘라는 짐은 남성의 인간다움을 모욕하고, 그들이 문명화된 상태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데만 효과가 있다.
- <남성 평등 옹호> 중
참고 견디지 마라. 만족하지 마라. 너 스스로를 구원해라. 다른 사람들이 너를 구원해줄 수 없다.
-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중
반드시 흑인 남성들을 의식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성차별주의와 여성 혐오가 치명적인 역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는 인종차별주의와 동성애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
- 오드리 로드의 말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 오드리 로드의 말
말의 자유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이 되어준다. 그것은 말이 ‘우리 사이의 차이들을 잇는 다리‘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침묵이다. 그리고 깨져야 할 침묵은 너무나 많다.
- 오드리 로드의 말
흑인의 페미니즘은 흑인의 얼굴을 한 백인의 페미니즘이 아니다.
- 오드리 로드의 말 - P378
포스트-젠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 사이보그는 자연과 문화의 구분을 폐기하고, "강력한 융합과 위험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 사이보그는 "정체성이 아니라 유사성"에 기반을 둔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 P406
그녀는 ...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성이나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위협적인 협박을 거부하고 싶은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의적인 회피에는 그 자체의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은 우리가 ‘평생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을 받아들인다. - P452
똑같은 깨달음을 체험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 똑같은 주석을 달고, 똑같은 연구 주제로 되돌아가고, 똑같은 정서적 진실을 다시 배우고, 똑같은 책을 거듭해서 쓰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그 사람이 어리석거나 고집스럽거나 변화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같은 일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 삶의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