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판의 문법 - 살아남은 증언자를 매장하는 탈진실의 권력 기술 아우또노미아총서 68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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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증언과 이 증언의 의미를 까판이 묻었다. 이제 까판에 분노해야 할 때다. 그것이 이 책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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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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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치철학서이기도 하지만 "증언문학"이기도 합니다. 고 장자연의 문건은 유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고자 했고, 살기 위해서 문건을 남겼습니다. 그의 증언을 윤지오 님이 지속하였고, 그 두 분의 증언을 정치철학자인 저자가 계속하고 있는 것이 이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건이 유서가 아니라는 증거, 어떻게 유서로 되어서 장자연 님의 죽음이 자살로 둔갑해버렸는지는 『증언혐오』에 수록된 <증언과 신변위협에 대하여> 338쪽 이하 '죽음은 ‘자살’로, 문건은 ‘유서’로, 증거는 ‘인멸’로'라는 소제목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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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nomer 2020-03-16 0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실연대자들은 이 책의 취지에 공감하며 2019년 신한은행 윤지오 & 국민은행 지상의 빛 후원자 그리고 윤지오 증언의 진실을 지지하는 분들의 온라인 서명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www.truthcommoners.net
위 주소를 통해 서명에 참여해주시고, 많이 공유해주세요! 🙌

esmeral 2020-03-16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서명했습니다!! 지지합니다!!
 
역사의 시작 - 가치 투쟁과 전 지구적 자본 아우또노미아총서 65
맛시모 데 안젤리스 지음, 권범철 옮김 / 갈무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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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er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평민이라는 의미는 맞지만, 이 책에서는 ‘평민’과는 조금 다른 의미(‘공통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자 맛시모 데 안젤리스 님이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는 웹진 《The Commoner》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어 보시면 왜 그러한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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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와 자본 축적의 새로운 형태들
#MeToo and the New Forms of Capital Accumulation



실비아 페데리치 강연

김정연 옮김

* 이 글은 2018년 2월 13일 실비아 페데리치가 <연구와 실천 조직가를 위한 새로운 센터>(The New Centre for Research & Practice Organizers)에서 진행한 강연의 녹화 영상을 녹취, 번역한 것이다. 음향 상태 등의 이유로 누락되거나 부정확한 부분이 다수 있다. 객석과 주최 측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35:00부터 본격적인 강연이 시작되며 원본 영상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xSmkeMkU7c&t=2105s ― 옮긴이

35:00~1:21:02

미투 운동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가 목격했듯이 텔레비전 화면, 뉴스는 여성들이 겪은 각종 학대에 대한 고발로 가득 찼습니다.
먼저 이 사건이 중요한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우선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경험한 고통에 대해 침묵하기를 멈추고 목소리를 삼켜 질식하는 대신 고발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또 미투가 어떤 건강한 대화를 열어냈다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 저는 이 대화라는 단어를 정말 싫어합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대화입니다. 투쟁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고 사람들은 “이 대화에 함께하세요. 환영합니다. 또는 ~~에 함께하세요.”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미투 운동은 많은 가정에서 건강한 대화를 촉발했습니다. 또 미투 운동은 성폭력(sexual abuse)이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성폭력이 그저 게임이 아니고 장난스러운 어떤 일이 아니라 실제로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미투 운동이 이것을 정립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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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적어도 지금까지는 많은 남성이, 특히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경계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의 장기적 귀결이 무엇일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가 이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준비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는 신중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고발들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 정말로,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발에 멈추지 않고 그 고발들이 다뤄지는 방식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한계 중 하나는 이런 가해들이 매우 나쁜 일부 남성의 일로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로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행위의 체계적 성격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정도 인식도 없습니다. 일부 나쁜 남성만이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수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는데, 왜 그 사람들은 그토록 조용했을까? 궁금해집니다.
무언가 상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거나 개입할 정도로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가.
또 저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어서 수많은, 수많은 나이 어린 여성들이 예를 들어서 올림픽 코치와 자신을 학대하는 의사들에 대해서 어째서 그 여성들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가.
이런 질문은 전혀 제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정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이 여성들은 어머니에게든 아버지에게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가.
자신이 올림픽에 나간다든지, 성공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가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 어린 여성들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것. 이 경쟁적 경험, 성공해야 할 필요가 너무나 깊숙이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자신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 자신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가족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나 아버지의 꿈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온갖 종류의 학대에 굴복하고 마는 것. 이것도 생각해 볼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속도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성 가해자들에 대한 고발이 있고 나서 그들이 며칠 만에 직장에서 해고되고 직책에서 해임되는 속도. 이와 동일한 신속함과 응징이 거리에서 경찰 총을 맞아 숨진 흑인 젊은이들의 경우에도 적용되었다면 정말, 정말 좋았겠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집니다. 물론 제가 가해자들이 직장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만 그 속도를 다른 환경에서의 제도적 행위와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볼 지점입니다. 또 기업들이 결국은 몇 명을 직책에서 제거하는 그 속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지점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점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전국적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 많은 논의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여성들이 알고 있고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을지라도 경험으로 느끼고 있는 매우 매우 단순한 사실들을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이 사회 시스템이 여성을 학대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는다(set up women to be abused)는 사실은 조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 사회의 노동의 조직화 전체가, 경제(financial) 관계의 조직화 전체가, 여남 관계의 조직화 전체가, 사실은 남성에 의한 성적인 가해에 여성이 노출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경우에, 어떤 의미에서 모든 남성은 어떤 금전적 호의에 대한 대가로 여성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성적 서비스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여러 형태들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된 거래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이 거래가 항상 동일한 형태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많은 다양성이 있었지만 [역사를 관통하는] 특정한 공통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저의 몇몇 작업에서 이 점을 규명하려고 했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노예가 될 운명으로 태어납니다(destined to be slaves of men).
[각 시기마다]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일의 종류가 무엇이든지간에 남성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남성의 시중을 드는 것이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주된 과제입니다.
이것이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바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받아들여만 한다고 이해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종종 지적되었듯이, 임금체계를 통해서 [구성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정 부문들과 자본 간의 소위 사회적 문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적 문화, 성적 거래가 있고, 이 성적 거래를 통해서 남성들이 어떤 종류의 생존조건, 예컨대 결혼 관계를 통해 경제적 지원을 여성들에게 제공하는 대신 여성의 신체에 대해서 [통제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긴 역사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남성들에게 의존하였고, 다른 노동자의 임금에 의존하였고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팔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족이라는 것의 핵심이며, 가사노동의 가정내화(domesticization)의 핵심이며, 더 광범위하게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핵심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 관계가 여성들이 자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살아가는 방식, 여성이 자기 몸, 자기 감정, 자기 자존감과 관계하는 방식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한 세대의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자기 자신의 가치가 매겨진다고 훈련되고, 양육되고,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자존감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남성들이 여성을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너는 특별해”라는 흔한 말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환, 너는 남성에게 봉사해야 하고 남성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이 생각은 매우 도착적인 동역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의 더 광범한 표현은 성매매입니다. 물론 저는 성노동을 비판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혼제도 속에서든 거리에서든 여성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처해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돈, 임금, 금전적 소득과 맺는 관계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임금, 소득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접근하는 출입문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판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돈을 위한 섹스, 돈을 위한 감정적 서비스, 돈을 위한 성적 서비스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의 핵심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저의 세대 여성들에게 더 흔한 경험일 수 있겠고, 우리가 가졌던 것보다 확실히 많은 힘을 갖고 있는 젊은 세대 여성들에게 얼마나 상황이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 .... ] 예를 들어서 우리는 시공간과 관련해서 통금이 있었습니다. 여성이 있을 수 있는 합법적인 시간과 합법적인 공간이 있었고 이런 규칙은 당연히 남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특정 시간 외의 시간에, 밤에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면 남성은 누구든 그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실제로 남성은 당신에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고 몸을 만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방식, 자기 몸과 관계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름다운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름다워야 하는 것, 즐거움을 주어야만 하는 것, 외모를 신경 써야만 하는 것. 그래서 여성들은 자기 몸으로 인해 고통 받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너무 많은 것들이, 오늘날 성적 학대가 다뤄지는 방식에서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성들이 집 밖에서 일을 할 때조차, 임금은 너무나 낮아서 여성들은 항상 생존하기 위해서 성매매나 어떤 종류의 성적 판매를 함께 해야만 했습니다.
그 교환이 직접적이고 가시적이지 않을 때조차도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든 성적 매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면접을 보러 갈 때도 항상 그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남성에게 요구되지 않는 다른 요소가 작동합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것은 우리 자존감, 우리 신체, 우리 섹슈얼리티와 우리가 관계하는 방식에 매우 도착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과거 여성운동에서 우리는 여성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단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다. 우리의 성적 욕망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 모른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을 때 남성을 즐겁게 하는 것만을 생각했을 뿐 우리 자신의 어떤 만족을 찾거나 진정한 소통을 하거나 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성에게 섹스는 노동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성에게 섹스는 노동입니다. 섹스는 여성의 노동일(work day)의 연장입니다. 여성에게 섹스는 노동관계의 일부입니다.
사실 가족 내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도 이러한 것입니다. 1980년대에 와서야 여성운동의 결과로 가정 내에서 강간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립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남편이 아내의 몸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혼 계약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남성이 돈을 벌어오고 지붕을 씌워주고 식탁 위에 음식을 제공하는 대가로 남성은 언제든 원할 때 여성의 몸을 사용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 그래서 남편이 나를 강간했다는 말은 웃음거리나 되었습니다.
또 물론 이것은 남성들의 도착적 권력 관계도 만들어냈습니다.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여성의 몸과 여성의 서비스에 대한 권력을 가진다는 이 관계로 인해서 남성들이 자기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맺는 관계도 도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 성적 만남이 줄 수 있는 에로틱한 쾌락은 권력의 문제와 너무 많이 뒤섞여서 점점 더 섹스의 쾌락은 권력의 쾌락이 되었습니다. 삶의 다른 부문들에서는 복종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남성들, 명령을 따라야 하는 위치에 있는 남성들, 착취당하고 있는 남성들에게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강력한 진정 수단입니다. 저는 『캘리번과 마녀』에서 자본주의가 남성들을 수탈했다고, 땅과 자원을 그들로부터 수탈했다고 썼는데, 대신 그들에게 아내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주어졌습니다.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사람, 이것은 정말로 강력한 진정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무엇이 변하였는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여성운동이 위기에 빠뜨린 모델이 있습니다. [한참 안 들림] 1980년대와 1990년에 재생산노동의 재구조화를 목격한 이유는 사실 그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재생산 형태들을 재창출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운동이 [한참 안 들림]



그래서 이제는 왜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임금노동 영역으로 진출한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제가 앞에서 말한 그 교환, 거래, 복종 관계가 계속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장악, 몸에 대한 통제권의 회복은 삶의 물질적 조건을 바꾸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의 물질적 조건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세대 여성들에게 특징적이었던 남성의 소득에 의존하는 상황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근본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동일한 종류의 거래들이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을 목격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날 집 밖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이 있지만 그들에 대해서 우리는 매일 듣지만, 그럼에도 정말 저임금으로 일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열악한 비공식적인 고용 형태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성적 서비스 교환을 결합해야만 하는 상황이 여전히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남성들의 가해를 폭로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사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들의 폭로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촉발했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수백만 명의 여성들은 이미 이것이 많은 여성들에게 일상적 현실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많은 여성들에게 이것은 일상적 현실입니다. 수십 년간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투쟁이 있어 왔는데 이 사실은 텔레비전에서 전혀 이야기되고 있지 않습니다. 성적 학대들이 마치 새로운 사실인 것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인 것처럼 다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여성들이 최초로 대규모로 임금 노동력의 일부가 된 이후부터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급증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의 조직화를 보면, 예를 들어서 팁으로 먹고사는 웨이트레스들을 생각해 보면, 외모를 사용해서 팁을 높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섹시하게 옷 입고, 섹시하게 행동하라고 지시받는 것은 웨이트레스만이 아닙니다.
고용주로부터 ‘너는 음료만 파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파는 것이다. 고객을 기분 좋게 만들어라. 자신이 백만 달러가치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라’라는 말을 듣는 여성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또 결혼 제도에서 매우 전형적인 교환 관계입니다.
16~17세기에 누가 마녀인지를 판가름 하려고 했던 악마 연구 서적들에서, 그 여성들이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그 여성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를 쓴 서적들에서, 그 서적들에 의하면 여성이 빈털터리 상태일 때 악마가 그녀 앞에 나타나 그녀가 마녀가 된다고 합니다. 여성이 악마에게 돈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악마가 나타나는 전형적 방식입니다. 그러면 악마는 나의 노예가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계약이 이뤄집니다. 악마가 돈을 좀 주고 그 대가로 여성의 몸에 노예라는 표시를 새깁니다. [ .... ]
제가 언제나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악마와 마녀의 관계는 오늘날 결혼 관계의 고전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은 오늘날 집 밖에서 일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팔아야 하고, 직장생활을 계속하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어떤 책에서 매우 불편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웨스트버지니아의 탄광 노동 조직가가 기억하기를 탄광에서 그 누구도, 남성도, 노조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임금이 너무 낮아서 광부 가족이 빚을 갚을 수 없을 때면 부인에게 2층에 와서 새 신발을 구경하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새 신발은 사실은 너의 몸으로 가족의 빚을 갚으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계급관계, 계급투쟁 속에서 여성이 몸으로 지불해온 역사가 있습니다. 착취의 조직화가 노동의 조직화가 여성에게 성적 제공자라는 자리를 어떻게 부여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엇이 변하였는가라는 문제. 내가 우리 세대의 여성, 또는 그전 세대의 여성에 대해 설명한 것과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보면, 오늘날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 한 명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남성, 더 많은 수의 고객에게 봉사합니다. 오늘날 점점 더 가족의 붕괴와 남성 임금의 붕괴와 함께 발견하는 것은 여성이 한 명이 아닌 여려 명의 남성을 위해 요리하는 직업을 갖게 되고, 웨이트레스로 여러 남성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것처럼 그와 유사하게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여러 명의 남성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성적 관계는 사회화되었고 가정 영역을 벗어나 확장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노동의 대량화(massification)를 목격합니다. 황금장소였던 임금 노동이 그나마 제공하던 여러 혜택들과 보장이 사라지고 입에 풀 칠은 할 정도의 임금을 받을 가능성마저 사라지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임금노동으로 진입하였고, 여성들이 신체, 외모, 성적 서비스를 팔아야 할 필요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좀더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그리고 폭력 문제를 그때 더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여기서는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집중했지만 이 문제는 폭력 문제와 아주 유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권력이 다른 두 개인이 만날 때 폭력의 요소는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예를 들어 여성들은 아주 오랫동안 남성과의 성적 관계에서 자기 욕망을 표현할, 자기 필요를 표현할 권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가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폭력 문제를 여기서 많이 다루지 못했고 이후 하고자 하는데,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폭력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대응도 초기적인(primitive)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만들이 고민들이 거기서 해결될 것이라고 법적 시스템 등에만 의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 시스템이 학대의 지속에 공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인식하게 되는 문제들은 정치적으로 우리 세대 여성들이 마주했던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략들과 움직일 방향성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몇 가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대들은 공식적으로 비난받지만, 그럼에도 계속되는 것, 엄청난 양의 면책, 엄청난 양의 공모가 지속되는 이유, 그것은 구조적 체계적 측면들 때문이고, 물질적 조건들 때문입니다. 체계적이라는 말로 제가 의미하는 것은 이 사회의 근본적 구조가 어떠한가라는 문제입니다. 노동의 조직화, 재산관계의 조직화, 우리 삶의 물질적 재생산 조건을 말합니다. 이 물질적 조건들에서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관계, 학대 관계,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 우리가 우리 고용주들과 맺는 관계, 나아가 우리 사이의 관계의 뿌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이의 관계는 고통뿐만 아니라 분할과 우리 투쟁에 있어서는 내적 취약성의 커다란 원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너무나 분명한 것은 남성이 특히 여성들의 몸이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갖는 권력은 남성이 자본가 계급에게 지속적인 복종을 제공한 대가로 얻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집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고, 그녀가 너무 피로해서 원하지 않을 때도 섹스를 강요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특권은 그 남성이 매일매일 특정한 직장에 특정한 시간까지 출근해야만 하는 것, 매일매일 소비하면서 자기를 유지해야 하고, 그리고 언제든 여성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두려워해야 하는 것(왜냐하면 남성은 가정에서 여성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을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변화를 만들 것인가?
저는 변화를 위해서는 성적 학대를 고발하는 것은 강력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학대의 토대, 뿌리, 조건이 되는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화와 물질적 관계의 조직화의 특정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식별하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물질적 조건을 건드리지 않고 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양한 형태의 섹슈얼리티를 생각하고자 하고, 진정한 연대의 조건은 무엇인지 생각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흑인 간에뿐 아니라, 선주민과 정착민들 간에, 여성과 남성 간에 설치한 분할 덕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더 적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 비해서 좀더 많은 특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권력 구조,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힘을 주고 새로운 관계, 새로운 공동체,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 가능성을 열어줄 연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한가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때입니다. (계속) 


* 게시물에 사용된 그림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gipuzkoa/39238800080
https://www.flickr.com/photos/johnnysilvercloud/28476745294
https://mronline.org/wp-content/uploads/2017/11/image-294779-galleryV9-kgzo-294779.jpg
https://www.flickr.com/photos/ross_angus/23935185456
https://www.thenation.com/article/wages-for-houseworks-radical-vision/



* 실비아 페데리치는 여성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로,『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의 저자이다. 1972년에는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와 함께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캠페인을 시작하였으며 반세계화 운동, 사형제 반대운동, 아프리카의 경제 및 교육 시스템 구조조정 반대 활동 등 수십 년간 다양한 국제반자본주의 운동 의제들에 참여하며 그에 관해 다수의 책과 논문을 썼다. 페데리치와 그녀의 사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갈무리 출판사 저자 블로그(https://blog.naver.com/federici_gal)와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 『혁명의 영점』과 『캘리번과 마녀』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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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통치 - 현대 자본주의의 공리계 아우또노미아총서 59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허경 옮김 / 갈무리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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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갈무리 출판사 홈페이지를 비롯하여 여러 인터넷 서점에 달린 한 독자님의 비판에 대한 갈무리 출판사의 답변입니다. 

http://galmuri.elogin.co.kr/discussion_of_reader/575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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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갈무리 출판사입니다.


『부채 통치』를 구입해 주시고 의견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작 『부채인간』의 한글 번역이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부채통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는 출판사에 입고된 번역원고를 프랑스어 원문과 한 줄 한 줄 대조하여 오류와 문제점을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역자님의 검토와 추가 수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부채통치』의 이 한글번역본은 역자와 출판사 사이의 긴밀한 협력작업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저희는 이 책의 번역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저질 번역’으로 평가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슈 독자님의 인터넷 서점 댓글과 갈무리 홈페이지에 올리신 게시글로 인해서,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다른 독자님들이 이 책이 ˝나쁜 번역서˝라는 선입견을 갖게 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로 지적해 주신 부분에 대한 번역 원문대조, 슈 독자님의 번역관, 독자의 역할, 비판과 협력은 어떤 방식으로 취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갈무리 출판사 편집부의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부채 통치』 23쪽 문장의 번역 지적에 대해 


1) 프랑스어 원문입니다.


Elle est aussi et d’abord une crise du modèle subjectif néolibéral incarné par le «capital humain».(p. 12)


2) 한국어판 23쪽의 번역문입니다. 


위기는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적 자본‘의 이름 아래 환생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모델의 위기이다.


3) 슈 독자님의 지적에 대한 답변입니다.


① 첫 번째 지적 :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 같은 말의 중복 사용


가. ˝또한˝과 ˝무엇보다도˝가 같은 말의 중복인가?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또한˝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습니다.


「부사」

「1」 어떤 것을 전제로 하고 그것과 같게. ≒역05(亦)ㆍ역시01(亦是)「1」.

¶ 나 또한 그렇다./주위 환경이 좋으면 마을의 살림살이 또한 풍족할 것이다.


「2」 그 위에 더. 또는 거기에다 더.

¶ 그녀는 마음도 착하고 또한 건강하다.


2- ‘무엇보다도‘는 ˝모르는 사실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정하지 않은 대상이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는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인 ˝무엇˝에 ‘~에 비해서‘의 뜻을 나타내는 격 조사 ‘보다‘와 ˝보통이 아니거나 의외의 경우에, 예외성이나 의외성을 강조하는 데 쓰이는 보조사˝ ‘도‘를 붙여 ˝어떤 불특정한 대상에 비해서도 더˝라는 의미를 띠는 한국어 표현입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조)


3- 원문과의 대조를 통해서, 역자께서 ˝또한˝은 ˝aussi˝의 번역어로, ˝무엇보다도˝는 ˝d‘abord˝의 번역어로 각기 구별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어에서 ˝aussi˝, ˝d‘abord˝는 네이버 프랑스어 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1) aussi : 

1] (비교절) 만큼, 같은 정도로 

2] 역시, 또한, 마찬가지로 


(2) d‘abord : 

1] 우선, 앞서, 먼저 

2] 원래, 본질적으로, 

3] 즉시, 당장에 



나. ˝또한˝과 ˝그리고˝는 같은 말의 중복인가? 


1- 이 문장에서 ˝그리고˝는 부사 ˝또한˝과 ˝무엇보다도˝를 병렬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독자께서 첫눈에 부사 ˝또한˝과 부사 ˝그리고˝가 같은 의미인데 역자나 출판사의 실수로 같은 의미의 단어가 중복되었다고 문장을 읽으셨다 하더라도 문장을 다시 읽으면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가 아니라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로 끊어 읽어야 뜻이 전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따라서 ˝또한˝과 ˝그리고˝ 같은 의미인데 중복해서 썼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지 않습니다.



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가 같은 말의 중복이라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두 번째 지적 : ‘‘인적 자본‘의 이름 아래 환생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모델의 위기이다‘ --> ‘적‘의 부적절한 사용. 위 문장은 그냥 이런 말이다. ˝위기는 인적자본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한 신자유주의의 주체성 모델의 위기이다˝


1- 독자님께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모델˝이라는 표현을 ˝신자유주의의 주체성 모델˝로 수정하셨기에 ˝ ‘적‘의 부적절한 사용˝이라고 생각하신 부분이 ˝신자유주의적˝의 ˝적˝이라고 추정합니다. 


2-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모델˝의 원문은 ˝modèle subjectif néolibéral˝입니다. 


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접사 ˝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일부 명사 또는 명사구 뒤에 붙어))

‘그 성격을 띠는’, ‘그에 관계된’, ‘그 상태로 된’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4- 따라서 이 책의 역자께서 néolibéral이라는 프랑스어 단어를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옮기셨고 이는 접사 ˝적˝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띠는 주체성 모델˝ ˝신자유주의와 관계된 주체성 모델˝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5- 독자께서 남겨주신 짧은 문장을 통해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여러 책과 논문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이라는 표현이 어째서 부적절한 ˝적˝의 사용인지 근거가 없기에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6- 또한, 접사 ˝적˝ 대신 ˝의˝를 사용할 경우의 문제점은 원문의 ˝ incarné par le «capital humain»(‘인적 자본‘의 이름 아래 환생한)˝라는 수식구가 ˝신자유주의˝를 수식하는 것인지 ˝주체성 모델˝을 수식하는 것인지 불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맥락상 이 책에서 ˝ ‘인적 자본‘의 이름 아래 환생한˝ 것은 ˝주체성 모델˝이지 ˝신자유주의˝가 아닙니다.)



③ 세 번째 지적 : 하지만 ‘인적 자본‘이 뭔지, ‘주체성 모델‘이 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1- 모든 개념어를 설명하는 것은 역자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술서의 핵심 개념들은 책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설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좀더 인내심을 가지시고 독서를 끝까지 해보신다면 저자가 ˝인적 자본˝이나 ˝주체성 모델˝을 어떤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인적 자본˝ 같은 경우에는 수년 전부터 일반 기업체나 언론매체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약간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어떤 의미인지를 금세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④ 네 번째 지적 : ˝열번을 정독해도 문맥이 파악 안 되는 저질 문장이다˝


1- 한국어판 번역 : 위기는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적 자본‘의 이름 아래 환생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모델의 위기이다.


2- 슈 독자님의 번역 : 위기는 인적자본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한 신자유주의의 주체성 모델의 위기이다


3- 저희는 현재의 번역이 원문의 취지를 충분히 잘 전달한다고 생각합니다. 


4- 위에도 말씀드렸듯이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에 대한 독자님 지적을 어떤 식으로든 반영한다면 문장의 가독성과 의미전달력은 오히려 떨어지게 됩니다. 


5- 아마 이 문장을 ˝열 번을 정독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느끼신 것은 위의 ③에서 다룬 ˝인적 자본˝ ˝주체성 모델˝ 같은 개념어에 대한 독자님의 낯섦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2. ˝저질 번역 용어 설명˝ ˝번역투 문장이 난무한다˝ ˝저질 번역˝ ˝한글도 제대로 못뗀 자˝ ˝나쁜 번역가˝ 같은 비난에 대해서 


1) 슈 님께서 문제로 지적하신 번역문장은 “한국어 용법”에 맞는 문장입니다. 오히려 번역 대안으로 제시하신 문장이 한국어 용법상에서 모호한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출판사가 한국어 용법에 맞게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댓글의 맥락을 살펴보면 슈 님은 ‘한국어 용법에 맞는 번역’이라는 표현을 통해 어법이나 문법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그 표현을 통해 “번역투 문장”, “외국어를 문장 그대로 직역하는 일”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슈 님은 한국어 문법에 맞아도 번역투이거나 직역투의 문장이면 “한국어 용법에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번역투이거나 직역투의 번역은 우리말 번역이 아니고 잘못된 번역이라는 생각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저희는 이것을 일종의 ‘우리말-이데올로기’라고 이해하며 이러한 생각에 반대합니다. “우리말”-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저자의 원래 생각에 가해지는 ‘의역의 폭력’, ‘윤문의 폭력’은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이것은 의역이나 윤문의 필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답게 만들기 위한 과잉된 의역이나 윤문을 견제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과잉된 의역이나 윤문은 저자의 생각을 단순화시키거나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다른 개념이나 사고로 바꾸는 것을 당연한 것, 혹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저자의 낯선 생각과 독자가 이미 갖고 있는 생각 사이의 간극을 지워버립니다. 즉 독자가 자신의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시공간을 없애버립니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는 독서는 쉽지만 크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위안을 주지만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유의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변형하는 독서는 “우리말”로 매끈하게 다듬어졌지만 저자의 사유라고는 하기 어려운 문장과의 쉬운 어울림 속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저자의 낯선 사유와의 마주침 속에서입니다. 특히 실험적 저자의 책들은 저자의 사유실험과 맞부딪치고 자신의 익숙한 사유와의 간극을 체험하며 그 간극 속에서 독자 자신이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실험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요구합니다. 번역이 이 어려움을 인위적으로 확대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것을 인위적으로 축소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역(正譯)”이 필요합니다. 


외국어는 다른 나라의 언어라기보다 foreign language, 즉 낯선 언어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말이라기보다 familiar language, 즉 친숙한 언어를 의미합니다. 현대의 한국 사람들은 조선 시대의 한문은 물론이려니와 그때의 언문도 낯설게(즉 외국어로)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말”이 고정된 실체가 이나라 유동하는 생명체임을 뜻합니다. 우리말은 낯선 말/글과의 마주침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진화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투 문장이 난무”한다는 느낌이, 이 낯섦을 불필요하게 확대함으로써 나타나는 느낌인지, 필요한 낯섦 앞에서 독자로서의 내가 느끼는 당혹감(=회피의 욕망)인지를 식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책을 던져버릴 이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자라면 책 앞에서 자세를 고쳐잡고 그것과 정면에서 마주치면서 그것과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할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노력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것을 사유할 역량을 지닌 새로운 우리말이 빚어져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2) 23쪽의 문장에 대한 지적이 전체적으로 근거가 없고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이 ˝저질˝이라거나 번역가가 ˝나쁘다˝라고 책과 역자님을 모욕하시는 것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3. 독자는 저역자, 출판사와 협력하여 한 사회의 문화를 일구어 나가는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1) 우선 독자가 있음으로써 책은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책이 출판되더라도 읽는 사람이 없다면 그 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2) 또 독자의 비판과 문제제기를 통해 한국의 학계, 출판계, 보다 넓게는 한국사회의 문화가 성숙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3) 그렇지만 좋은 비판이란 일차적으로 비판의 근거가 있어야 하고 그 근거가 타당해야 할 것입니다. 근거가 갖추어지지 못한 모욕이나 비난이 과연 협력의 기능을 할 수 있을까요? 


4. 이 책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부채 통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인 ˝부채˝ 문제를 심층 탐구하고 있습니다. ˝부채˝가 우리 모두를 옭죄고 우리 미래와 후세의 삶까지도 노예화하는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저희 출판사에서는 이 책의 취지에 깊이 공감하였고, 부채 문제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동의 해법 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책의 출판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님께서도 책의 이런 취지에 공감을 하셨기에 ˝훌륭한 책˝이라는 표현을 쓰고 계시고, 또 그 공감의 정도가 크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한 애정을 가지시고 이렇게 인터넷 서점과 출판사 홈페이지에 직접 오셔서 글을 쓰시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자님, 저희는 책의 이러한 취지에 비추어보아도 독자님께서 취하신 근거 없는 비난의 방법은 출판사에도, 역자님께도, 한국 사회에도 이득이 되지 않으며 생산적인 토론에 기여하기보다는 서로를 갉아먹고 공격하여 결국 모두가 힘이 빠지게 하는 소모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님의 애정과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 책에 대해서, 이 책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또 책의 문제의식이 널리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갈무리 출판사의 책들에 대한 관심과 우애의 독서에 대해서 언제나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록 슈 독자님께서 지적하신 바가 근거가 없고 심지어 잘못되었다고 반비판했지만, 앞으로 근거가 있는 비판을 제기해 주신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수정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이번 지적을 발판 삼아서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좋은 책으로 인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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