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_소녀



콰콰콰쾅! 어마어마한 폭음이 순이의 고막을 때렸다. 조타실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박살난 계기판에서는 연신 불똥이 튀었다. 선체가 기울어지면서 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 위로 온갖 집기가 쏟아졌다. 어디선가 치이익- 가스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을 지나가던 파이프 관에서 하얀 가스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폭발이 임박했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또 한 차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등을 송두리째 태워버릴 것 같은 강렬한 열기와 강한 압력이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튕겨 나오다시피 복도 위를 굴렀다. 이미 선체는 45도로 기울어졌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누이!”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허성훈 대위가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순이를 부르고 있었다. 밑에서부터 차오른 바닷물은 그의 두 다리를 집어삼키고 허리까지 밀려 올라왔다.


“잡아라!”


순이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두 사람의 손끝은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치고 말았다. 복도 왼편 벽을 무너트리며 밀려온 바닷물 때문이었다. 


“권 소좌……, 누이!”


밀려든 바닷물은 성훈을 집어삼키고 여세를 몰아 순이를 덮쳤다. 사방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살려주세요…….”


귓가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순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물 속에 잠겨 있었다. 맞은편에는 육중한 철장이 있었다. 철장 너머는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살려주세요…….”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원망으로 가득 찬 눈길. 흐릿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얼굴의 윤곽들. 왜 우릴 버리고 갔느냐는 한 맺힌 목소리. 


순이는 질끈 눈을 감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눈을 떴다. 곰팡이가 피어 있는 익숙한 천장과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에 비친 뿌연 먼지 입자가 눈에 들어왔다.


“권! 안에 있어?”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이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꿈속인 듯 정신이 몽롱했다. 문을 열자 중절모를 쓴 초로의 신사와 함께 서 있는 카를로스가 보였다.


“어제 말했던 의사야. 아이를 봐줄 거야.”


의사는 탁자에 가방을 올려놓고 그 안에서 청진기며 손전등 따위를 꺼내놓았다. 소녀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이불을 걷어내고 소녀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저 애의 이름은 리타. 리타 몬테너야. 쿠바의 유명한 가수랑 이름이 같지. 올해 열세 살이라더군.”


카를로스가 말했다. 

리타……. 순이는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았다.


“연락할 만한 가족이 있나 알아봤는데 아무도 없더군. 몇 안 되는 친척도 죄다 죽거나 행방불명된 상태야. 친가고 외가고 전부 FARC(콜롬비아 무장혁명군)와 엮였다나 봐.”


순이는 콜롬비아 무장 혁명군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정부군과 대립 중인 좌파 무장혁명조직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정부군, 우익 게릴라 조직들을 상대로 수시로 교전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말인데…… 권, 당분간 저 아이를 좀 맡아줘야겠어.”


카를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싫다.”


순이는 무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 맡아달라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만.”

“처음엔 딱 하루라며?”


순이가 카를로스를 쏘아봤다.


“아니 애가 저렇게 오늘내일 하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카를로스가 인정에 호소했다. 순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총잡이로 온 거지 보모로 고용된 게 아니다. 전문 간병인을 구해.”

“따지고 보면 카르텔 간의 항쟁에 말려든 아이잖아. 그런 애를 돌봐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괜히 불똥이 튀어서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난감했다. 순이는 리타와 최대한 빨리 헤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 방에 데리고 있는 것도 불편한데 아예 보모 노릇까지 하라니. 순이가 재차 거절하려는데 의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항생제를 좀 놨어. 급한 상처도 일단 처치해뒀고. 하루 정도 지나면 알 수 있을 거야, 살아날 수 있을지 없을지…….”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성적 고문도 있었던 것 같아. 참혹하더군.”


의사는 항생제가 들어 있는 봉투와 상처에 바를 치료약을 건네고는 다락방을 떠났다. 


“그럼 부탁 좀 할게!”


카를로스가 두 손을 모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잽싸게 의사를 따라 나섰다. 순이가 계속 거부하리란 걸 짐작하고 꽁무니를 빼버린 것이다.


“비겁한 간나새끼…….”


순이는 모국어로 욕설을 내뱉으며 소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때려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욱하는 마음 한편으로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건 쉬울까? 하는 우려가 찾아들었다. 무엇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눈과 귀가 없는, 그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일터가 필요했다. 그녀는 한때 충성을 바쳤던 조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그들과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동물농장은 순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었다. 콜롬비아는 공화국의 관심 밖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는 일에 비해 봉급이 높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짜증이 밀려왔다. 결국 이 귀찮은 짐 덩어리를 맡아줄 수밖에 없는 건가.


순이는 물끄러미 누워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리타 몬테너. 열세 살. 겨우 열세 살. 순이는 그 나이 때 고등중학교를 다녔다. 한창 그림에 빠져 있을 때다. 화가가 되는 게 그녀의 꿈이었다. 그때 순이는 순진했다. 나라의 인정을 받는 공훈 예술가가 된 미래의 자신을 그려보곤 했다. 하지만 집단농장 노동자의 딸인 순이는 공훈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순이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할 만큼 어렸다. 같은 나이에 이 소녀는 성 고문의 희생자가 됐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위독한 처지에 놓여 있다. 


연민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순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타인에 대한 쓸데없는 연민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결국 다 주어진 팔자대로 살고 죽는 거다. 나와는 상관없다. 순이는 죽어가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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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ycoffee 2017-07-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실감나네요. 긴박감도 있고요.
 

#5_선전포고

 

 

식탁 위는 온갖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구운 감자를 곁들인 돼지고기 바비큐, 푹 끓인 닭 육수에 옥수수와 콩을 넣어 만든 수프, 바나나를 곁들인 샐러드, 산탄데르에서 공수해 온 스페인식 소시지까지. 늦은 저녁 치고는 호화로운 상차림이었다. 카를로스는 선뜻 포크를 들지 못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보스의 눈치를 살폈다.


디에고 모레노. 동물농장의 주인인 그는 가정부들이 음식을 내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개자식은 어디 있나?”


한참 만에 디에고의 입이 열렸다. 그는 카를로스가 잡아온 포로의 행방을 묻고 있었다.


일단 가둬놨습니다.”

의뢰인이 누군지 불었나?”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죽지는 않을 겁니다. 상태가 좀 호전되면 이것저것 캐 볼 작정입니다.”


디에고는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카를로스는 보스의 눈치를 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다. 으깬 감자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메말라 있던 식도가 욱신거렸다.


꼭 알아내야 해. 누가, 어떻게 우리 농장의 위치를 알아냈는지.”


디에고가 돼지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1주일 전. 비야비센시오에 있는 농장에서 큰 불이 났다. 그 농장은 코카 잎을 재배하는 곳으로, 동물농장의 소유였다. 불은 농장을 송두리째 태워버리고야 간신히 진화됐다. 수백 평에 달하는 밭은 어떤 작물도 심을 수 없는 죽은 땅이 되어버렸다.


관할서 경찰관들은 잿더미가 된 오두막 안에서 머리가 잘려 나간 알몸뚱이 시체 두 구를 발견했다. 농장주 부부였다. 단순 화재가 아니라 방화였던 것이다. 농장주의 머리는 근처 야산에서 발견됐다. 배고픈 코요테들에 의해 얼굴의 절반이 뜯겨 나간 후였다. 부인의 머리는 근처 개울가에서 퉁퉁 불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발견됐다.


디에고 모레노는 동물농장의 보스가 된 후 한 번도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동물농장은 콜롬비아 전역을 호령하는 남미 최대의 마약 조직, 메데인 카르텔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메데인 카르텔의 조직원조차 동물농장에 대해 알지 못했다.


메데인 카르텔에서 동물농장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메데인 카르텔의 고문인 마약업계의 원로 에르난도 가차, 나머지 한 명은 메데인 카르텔을 지배하는 보스 파블로 에스코바르였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동물농장을 베일 속에 감춰둔 장본인이다. 그는 호시탐탐 메데인 카르텔을 노리는 정부와 경쟁 조직들이 모르는 자신만의 돈줄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동물농장이 그 돈줄이었다. 디에고는 수익금의 70퍼센트를 파블로에게 바쳤다. 그는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꾸준히 사업을 성장시켜왔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적들이 디에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동물농장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디에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미증유의 습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코카 잎 농장을 습격한 조직이 콜롬비아 방위 결사대라는 우익 게릴라 조직이라는 것이다. 정보를 전해준 이는 에르난도 가차였다. ‘연금술사라 불리는 그는 마약 제조 공정에 정통한 인물로, 메데인 카르텔의 마약 레시피를 개발한 인물이다. 메데인 카르텔의 설립을 함께 한 창립 멤버로 충분히 신뢰할 만한 인물이다. 디에고도 그의 정보라면 전적으로 신뢰했다.


콜롬비아 방위 결사대는 원래 정치색을 띤 게릴라 조직이었지만, 지금은 돈에 움직이는 용병집단에 불과했다. 디에고는 카를로스를 시켜 보복공격을 감행하는 한편, 그들을 움직인 의뢰인이 누군지를 알아내고자 오늘의 습격을 계획했다.


이런 걸 찾았습니다.”


카를로스는 식사를 마치고 난 후, 깨끗이 치워진 식탁에 지도 한 장을 올려놓았다. 콜롬비아 방위 결사대 아지트에서 발견한 지도였다. 동물농장이 자리 잡은 엘 카르멘과 보고타, 비야비센시오 일대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지도 위에는 여러 개의 동그라미와 한 개의 ×자가 그려져 있었다. ×로 표시된 곳은 일주일 전 불타버린, 소녀의 부모가 목숨을 잃은 바로 그 코카 잎 농장이었다. 디에고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하나씩 짚었다. 모두 그가 소유한 코카 잎 농장과 마약 보관 창고가 있는 장소였다.


의뢰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만만한 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 거점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별짓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멀쩡한 트럭 기사를 일주일마다 갈아치우고, 물건 운송 루트도 수시로 바꾸고요.”


카를로스가 말했다.

디에고는 라이터를 꺼내 지도에 불을 붙였다. 그는 타들어가는 종잇조각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판 붙어보자 이건가?”

모든 거점에 경비원들을 더 배치해야겠어요.”


카를로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경계를 강화한다고 막을 수 있을까? 불길한 예감이 디에고를 엄습했다. 메데인 카르텔은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경쟁 조직인 칼리 카르텔은 콜롬비아 변방으로 쫓아냈다. 정부와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지만 일단락된 지 오래다.


메데인 카르텔을 지배하는 콜롬비아 마약상들의 보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현상수배범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어디까지나 시늉일 뿐이다. 그는 콜롬비아 전역에 수십 개에 달하는 자기 소유의 별장을 오가며 자유로운 도피 생활을 즐겼다. 자신의 위치를 함부로 노출하지는 않았지만, 경찰도 굳이 그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정재계, 경찰, 검찰, 법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뿌려 둔 뇌물 덕분이었다. 쫓는 자는 의욕이 없고 쫓기는 자는 여유로운 기묘한 추격전 속에서 콜롬비아 정부는 사실상 메데인 카르텔을 방치했다. 그들과 전쟁을 벌일 여력도, 의욕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묘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코카 잎 농장을 불태운 습격자들은 이제 호시절은 끝났다고 선포라도 하듯이 난폭한 방식으로 농장주 부부를 처형했다. 일종의 선전포고인 셈이다.


옛날에는 모든 조직에 총잡이들이 득시글거렸지. 지금은 어딜 가도 인부들뿐이야.”


디에고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싸울 일이 없었으니까요. 양키 놈들 약 빠는 속도에 맞춰서 물건을 보내려면 같은 인건비로 인부들을 쓰는 게 이득 아닙니까.”

카를로스가 말했다. 동물농장도 같은 이유로 총잡이들의 숫자를 줄이고 인부들을 늘려왔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그전에 우릴 건드린 게 누군지 알아내서 속전속결로 해치워야죠.”


카를로스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디에고를 사로잡은 불길한 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 정보를 모아보자고. 오늘 수고했어.”


카를로스가 꾸벅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가 막 현관문을 나서려 할 때쯤, 디에고가 불러 세웠다.


…… 그 농장주 부부한테 딸이 하나 있지 않았나?”

안 그래도 놈들의 본거지에서 어린 여자애 하나를 구조했습니다. 인질로 잡혀갔던 모양이에요. 위독한 상태입니다. 날이 밝는 대로 의사를 부르려고 합니다.”

잘 돌봐줘.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자고.”


카를로스가 저택을 떠났다. 디에고는 창가에 서서 시가에 불을 붙였다. 먹구름처럼 뿌연 담배 연기가 허공에 뿜어져 나왔다. 창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동물농장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아빠…….”


어둠 저편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긴 너무 춥고 어두워요……, 아빠…….”


수시로 되풀이되는 환청이다.


왜 우리만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죠? 아빠는 언제까지 거기에 계실 거예요?”


디에고는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공기를 헤치며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느린 속도로 흐느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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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2017-07-05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회가 궁금하네요! 속도감이 좋아요.

샤오와 2017-07-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을 간직한 북한 공작원 권순이의 사연이 궁금하네요.
뭔가 더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도 맘에 듭니다.
출간이 기대되요!!

2017-07-18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4_동물농장(2)

 


 

순이와 에스메랄다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좁은 계단을 올랐다. 닫혀 있던 문을 열자 침대와 작은 탁자, 옷걸이가 전부인 썰렁한 방 풍경이 들여다보였다. 순이는 침대에 소녀를 눕혔다. 소녀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어?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애를…….”


에스메랄다는 젖은 수건으로 소녀의 몸을 닦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피가 닦여 나갈 때마다 가려져 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찢긴 피부 너머로 빨간 생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에스메랄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순이는 불을 붙여주었다. 에스메랄다는 동물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7시까지 속옷 차림으로 크랙을 작은 비닐봉지에 포장하는 일을 한다. 동물농장의 여자들 중에서 에스메랄다는 젊은 축에 속했다. 대부분 사십을 훌쩍 넘긴 애 엄마들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순이가 동물농장에 들어오자 금세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가 콜롬비아에서 보기 힘든 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또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는 수다였다. 쉬는 시간이면 순이 주변을 배회하면서 자신에 대해 주절거렸다.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취미는 뭔지, 집에 가면 뭘 하는지, 첫 키스와 첫 섹스는 언제였는지. 천일야화처럼 이어지는 수다를 들으며 순이가 보이는 반응이라고는 ……” “……” “……” “그렇구나……가 전부였다. 성의 없는 반응에도 에스메랄다는 떠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오빠 얘기를 했나?”


에스메랄다가 물었다. 그 이야기만 세 번째였다. 순이는 지적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묵묵히 에스메랄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빠를 처음 발견했을 때 꼭 이런 모습이었어. 발 한쪽이 잘려 나간 것만 빼면. 온몸이 칼자국에 피투성이였지.”


그녀의 친오빠는 어느 작은 마약 조직에 몸담았다가 상대 조직에게 습격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콜롬비아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겠지? 그 애가 저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끔찍하지 않니?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애를 키우겠어.”


에스메랄다가 진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순이는 이것보다 더 끔찍하게 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더러는 순이가 그런 지경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아이가 이런 일을 당할 경우는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순이에게는 결혼도, 출산도 모두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 서른 살이 되도록 그녀의 유일한 인생 목표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오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중요할 뿐, 그녀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후, 해가 저물었다. 창 너머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밤이 찾아오자 온 사방이 고요해졌다. 멀리서 풀벌레 소리만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순이는 소녀와 단 둘이 다락방에 남았다. 소녀의 호흡은 전보다 한층 더 거칠어졌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소녀는 순이가 발견했을 때 이미 많은 피를 흘린 상태였다.


어렸을 때, 순이도 소녀처럼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때가 있었다. 돼기(홍역의 북한말)에 걸려 며칠간 몸져눕고 물똥을 쌌다. 미음도 토해낼 정도로 속이 뒤집어졌고, 열이 펄펄 끓었다. 그녀의 고향, 평안남도 덕천군의 작은 시골 마을에는 변변한 의원이 없었다. 홍역 같은 돌림병에 걸리면 그저 아이가 잘 버텨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밤이 오면 어머니는 잠들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는 순이 곁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밤은 캄캄 깊어도 잠 잘 자거라…… 백두산에 큰 별님 밝게 웃을 때…… 너를 지켜준단다…….”


이상하게도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몸을 가득 채운 열기가 식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순이는 저도 모르게 그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졸음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납덩이 같은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오랜만에 치른 실전이었다.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순이는 스스로 부른 자장가에 취해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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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동물농장(1)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평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트럭은 평원을 가로지르며 이어진 50번 국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엘 카르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푯말이 스쳐 지나갔다. 순이는 사내들과 함께 트럭 짐칸에 앉아 있었다. 에두아르도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기절해 있던 그가 깨어났을 때, 상황은 모두 종료되어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토악질을 하면서도 가브리엘의 시신을 수습해 마대 자루에 담았다. 그 마대 자루는 지금 짐칸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채, 차의 흔들림에 박자를 맞춰 좌우로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제프는 눈을 감고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랍어였다. 순이는 열 가지가 넘는 언어를 쓰고, 읽고, 말할 수 있지만 그중에 아랍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파티하(Fatiha)라는 거야. 코란에 나오는 기도문이지.”


제프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이를 의식하며 말했다.


알라께 가브의 영혼을 잘 거둬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어.”

신을 믿나?”


순이가 물었다. 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기도하지?”


순이의 질문에 제프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믿었거든. 그러니까…… 군대 초년병 시절에는 말이야. 그때는 내 동기들도 대부분 신을 믿었어. 우리는 신을 위해 전쟁터에 목숨을 바치는 거라고 믿었지.” 제프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전역할 때쯤 되니 신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 다들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힌 후였어. 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다들 깨달아버렸지.”

그런데 왜 기도하고 있지?”


순이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글쎄……. 죽은 사람을 위해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혹시 알아? 신이 진짜로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내 기도를 듣고 죽은 가브리엘의 영혼을 구원해줄지도 모르지.”


제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순이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눈을 감고 한 숨, 한 숨, 힘겹게 내쉬고 있다. 호흡이 이어질 때마다 앙상한 갈비뼈가 위아래로 들썩거린다. 금방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위태로워 보인다. 이 소녀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죽어가는 소녀는 순이로 하여금 그녀가 구하지 못한 수십 명의 소녀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하얗게 질려가던 소녀들의 얼굴과 도와달라고 아우성치던 목소리.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정해진 길로 나아가는 듯했던 순이의 운명은 갑자기 노선을 이탈해 난폭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날, 순이가 탄 군함은 멕시코 시날로아 연안을 지나고 있었다.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배에는 수많은 소녀가 타고 있었다. 소녀들은 바닷물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 순간에도 순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살려주세요!”


수십 명의 소녀가 동시에 아우성쳤다. 순이는 그녀들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구하기는커녕 겨우겨우 혼자 살아남았다.


살려달라는 말 때문일까? 몇 시간 전, 오두막에서 소녀를 처음 봤을 때 그날이 생각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소녀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누군가 서서히 목을 옥죄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호흡이 가빠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4개월 전의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찾아오는 증상이다. 병원에 가보진 않았지만 트라우마 증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이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평원 저편에서 불어오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이는 흘러가는 바람이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된 끔찍한 기억들을 함께 가져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트럭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통해 50번 국도를 빠져나갔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가자 좁은 언덕길이 나타났다. 길의 끄트머리, 그러니까 언덕 맨 위에 유럽의 고성(古城)을 떠올리게 하는 저택이 한 채 서 있었다.


저택은 원을 그리며 이어진 높은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담장 한가운데는 뻥 뚫려 있고, 문 대신 바리게이트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리게이트 양 끄트머리에 소총을 둘러메고 서 있던 경비원들이 트럭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바리게이트 안쪽은 저택의 마당이었다. 말이 마당이지 운동장처럼 넓었다. 마당 오른편에는 거대한 흰색 천막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드럼통이 여러 개 실려 있는 수레를 인부들이 천막 안으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트럭은 천막 옆에 멈춰 섰다. 순이와 사내들은 짐칸에서 우르르 내렸다.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서 내린 카를로스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다 새잖아!”


바닥에는 수레가 굴러 온 궤적을 따라 흰 가루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크랙(Crack). 코카인과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만든 저비용 고효율의 합성 마약이었다.


코카 잎을 가공해 코카인으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크랙으로 뻥튀기하는 마약 공장. 그것이 이 저택의 정체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기를 동물농장이라고 불렀다. 대외적으로는 파파야 농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부에도 그렇게 등록되어 있다고 했다. 순이는 여기 취직한 이후 식사시간 말고는 파파야를 본 적 없었다.


인부들이 몰려와 땅에 떨어진 마약 가루를 보고 혀를 찼다. 카를로스는 그들에게 드럼통이 제대로 밀봉되어 있는지 다시 확인하라고 지시한 뒤 순이에게 다가왔다.


저 애를 좀 맡아줘야겠어.”


달갑지 않은 부탁이었다. 순이가 카를로스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딱 하루만 돌봐줘.”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순이가 말했다. 트럭에 오르기 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보스는 오늘 일이 밖에 새어나가는 걸 원치 않아. 우리랑 거래하는 왕진의사가 있어.”


카를로스는 순이에게 덜컥 아이를 맡기고는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순이는 불러 세워서 따질까 하다가 꾹 참았다. 어쨌거나 카를로스는 고용주이고 순이는 피고용자였다. 그녀는 매주 현금으로 지급되는 봉급을 떠올리며 정신을 잃은 소녀를 둘러업었다. 더럽지만 돈으로 맺어지는 갑을 관계에 적응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공화국의 인민이 아니다. 오갈 데 없는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다.


순이는 천막을 떠나 저택 왼편에 있는 커다란 창고로 향했다. 창고 지붕에 둥그런 유리창이 보였다. 거기가 순이가 머무는 다락방이었다. 늘씬한 아가씨 하나가 속옷만 걸친 채 창고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따금 순이의 말동무가 되어주곤 하는 에스메랄다였다. 그녀는 순이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어.”

좀 도와줘야겠어.”


에스메랄다는 순이의 등에 업힌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슬픈열대가 연재되는 동안 기대평을 덧글 로 남겨주세요! 
  10명에게 <슬픈열대 금속뱃지>
  3명에게는<슬픈열대 사인본과 뱃지>  드립니다.
  ( 발표: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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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습격(2)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카를로스 앞에 서 있었다. 피로 목욕이라도 한 것 같은 몰골이었다.그녀의 두 손에는 피 묻은 AK47 한 정이 들려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토카레프는 바지 앞 춤에 꽂혀 있었다.

여자는 어떻게 사지를 헤쳐 나온 것일까? 저 소총은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조금 전 산 정상에서 들은 총성은 누가 울린 것일까? 설마 저 여자가 매복한 적들을 다 죽인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를로스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여자는 오두막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카를로스와 제프가 뒤를 따랐다. 뿌연 연기와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실 한복판에는 피떡이 된 사내 하나가 누워 있었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옆으로 늘어뜨렸다. 숨을 거둔 모양이었다.

여자와 카를로스, 제프는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큼지막한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총성과 폭음으로 요란했던 집 안은 다시 고요 속에 휩싸였다.


엄호해.”


여자는 짧게 말하고는 기어서 소파의 측면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오두막 안쪽에 있는 주방을 응시했다. 연기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아 주방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소총의 총구를 움직여 마룻바닥을 톡 쳤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주방에서 총성과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소파에 달라붙어 있는 카를로스의 등짝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총알이 소파에 틀어박히며 발생한 충격이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다.


여자는 차분한 얼굴로 주방 쪽을 겨누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주방을 가로막은 기다란 바(Bar) 위로 시커먼 형체 하나가 축 늘어졌다. 이어서 머리통 두 개가 주방 위로 불쑥 올라왔다. 숨어서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던 녀석들이 동료의 죽음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모양이다.

여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시 한 방 쏘았다. 머리통 하나가 움찔 하더니 뒤통수에서 핏물을 뿜어냈다. 남은 한 놈이 여자를 향해 AK47을 겨눴다. 여자가 한 박자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또 한 방. 남은 한 놈도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 발에 한 명씩. 여자는 그렇게 순식간에 세 사람을 해치웠다. 그녀의 솜씨는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처럼 침착하고 날카롭고 정확했다.


권순이……. 발음하기조차 힘든 여자의 이름이 카를로스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그제야 브로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카를로스가 지금까지 본 총잡이들과는 격이 달랐다. 최정상급 용병이라는 소개는 과장이 아니었다.

 

순이는 우두커니 서서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상대로 총을 쏜 건 4개월 만이었다. 조금 쉬었던 것 치고는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잠깐!”


제프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닥을 가리켰다. 순이가 귀를 기울여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밑에 지하실이 있고, 거기에 적들이 숨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세 사람은 흩어져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았다. 순이는 운동화를 통해 느껴지는 바닥의 감촉에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거실을 걸어 다녔다. 싸구려 카펫 위로 발을 딛자, 방금 전과 달리 생소한 감촉이 느껴졌다. 카펫을 걷어내자 정사각형 모양의 문이 드러났다. 카를로스와 제프가 순이 곁으로 다가왔다. 세 사람은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문 아래쪽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잠시 후, 벌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사람 머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세 사람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사내는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벌집이 됐다. 시체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좁은 계단을 올라오던 사내 두 명이 시체에 부딪쳐 지하실로 굴러 떨어졌다. 세 사람은 탄창이 빌 때까지 쉴 새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지하실 아래에서 피와 화약 냄새가 뒤섞인 진한 악취가 풍겨왔다. 순이는 빈 탄창을 뽑고 적에게 노획한 새 탄창을 꽂아 넣었다. 그녀는 소총을 치켜든 채 신중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다. 카를로스와 제프가 뒤를 따랐다. 누런 회중전등 하나가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흔들리는 불빛이 지하실 안을 비췄다. 총알에 갈갈이 찢겨 걸레짝처럼 되어버린 시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순이는 바닥에 쏟아진 뇌수와 핏덩어리, 뼛조각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지하실 안은 대충 쌓아 놓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에는 AK47 수십 정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고, 다발로 묶인 다이너마이트가 무방비 상태로 나뒹굴고 있었다. 군용 탄띠와 취급주의 경고문이 커다랗게 박혀 있는 빈 상자도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에는 흰 페인트로 콜롬비아 방위 결사대(Colombian Defense Corps)’라 쓰여 있었다. 그 옆에는 큼지막한 콜롬비아 국기가 걸려 있었다.


순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지하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커다란 마대 자루였다. 뭔가에 씌워 놓은 것처럼 부피감이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마대 자루 뒤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 하나가 튀어 나왔다. 그가 총구를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가까이 오면 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순이의 AK47이 불을 뿜었다. 그녀가 쏜 총알이 사내가 들고 있던 리볼버의 총구를 파고들었다. 총열을 박살내며 리볼버 깊숙이 파고든 총알은 장전되어 있던 탄창을 강한 힘으로 두드렸다. 탄창이 폭발하며 불꽃이 리볼버를 휘어감았다.


으악!”


사내는 총을 떨어뜨렸다. 그의 손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순이는 사내를 쏴버리려다 카를로스를 힐끔 쳐다봤다.


죽이면 안 돼.”


카를로스가 말했다. 순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카를로스가 달려가 사내의 손을 군홧발로 짓밟아서 불을 껐다. 그의 팔뚝에 선명하게 새겨진 전갈 문신이 전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이게 전부인가…….”


제프가 중얼거렸다. 지하실 안에서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호레 포르 파보르(Ahorre por favor)…….”


실낱같이 희미한 목소리가 순이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기억해내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아호레 포르 파보르…….”


목소리는 순이가 쳐다보았던 마대 자루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이는 포대를 쥐고 천천히 벗겨냈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역한 냄새가 왈칵 풍겨왔다. 포대 자루 속에 사람이 있었다. 알몸인 채 한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절대 우연히 생길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들. 벌어진 살 틈새에는 구더기가 들끓었다. 오랜 기간 제대로 먹지 못한 듯 갈비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소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순이를 바라보았다. 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호레 포르 파보르…….."


순이는 그제야 그 말의 뜻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살려주세요.”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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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명에게는<슬픈열대 사인본과 뱃지>  드립니다.
  ( 발표: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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