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희고 고운 손(2)

 

 

마셔봐요.”


남자가 잔을 순이에게 슬며시 밀었다. 순이는 남자를 노려보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부르르 떨릴 만큼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음료가 긴장으로 말라붙은 입안을 촉촉하게 적셨다.


어때요? 맛있죠?”


남자가 빙글빙글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날 어떻게 압니까?”

콜롬비아 어때요?”


남자가 말을 돌렸다.


전 이 나라가 싫어요. 온 지 두 달 됐는데 아직도 시차적응이 안 됐어요. 가끔 아침인가 싶어서 눈을 뜨면 온 사방이 깜깜하고 조용해요. 게다가 해가 지면 거리에 아무도 없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럼 남조선으로 돌아가시죠?”


순이가 쏘아붙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거기서 태어나긴 했는데, 영 마음이 가지 않네요.”


나도 같은 신세인데. 순이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남은 음료를 모두 삼키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보는 남자와 더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덕분에 잘 마셨습니다.”


그녀가 등을 돌리려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I-122.”


남자의 입에서 익숙한 코드 넘버가 튀어나왔다.


선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죠. 순이 씨에게는 뻐꾸기 122’가 더 익숙할까요?”


순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아직 빨대가 들려 있었다.


그 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으셨죠?”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순이가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남자가 본론을 끄집어냈다. 순이의 눈에 남자는 훈련받은 요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 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순이가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쟁반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던 웨이트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웨이트리스는 걸음을 멈췄다. 남자를 죽이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진다. 남자의 정체가 불분명 하다는 점도 찝찝했다. 순이는 몸을 돌려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남자를 떼어내고 싶었다.


잠깐만요!”


남자는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순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순이의 피부를 감쌌다.


도와드리려는 겁니다.”


남자는 손을 잡았을 때처럼 부드럽게 순이를 돌려세우더니 손에 명함 한 장을 쥐어주었다.

 

콜롬비아 대한민국 대사관

외무관 장덕진

 

외교관이었어? 순이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의 인상은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량 같으면서도 또렷하고 묵직한 두 눈은 신중하고 차분했다.


그 배에서 발견된 여자애들……. 그 불쌍한 애들에 관해서 뭔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순이는 자신의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순이 씨를 도울 수 있습니다.”

돕긴 뭘 돕습니까?”


순이가 물었다.


일하고 계시죠? 무슨 파파야 농장이라고 하던데……. 머무시는 동안만이라도 종종 뵙고 싶은데요.”


남자는 호의를 보이는 척하면서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일없습니다.”


순이는 차갑게 돌아섰다. 등 뒤로 덕진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함에 제 호출기 번호가 있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명함을 구겨 바닥에 집어 던졌다.



 

순이는 보고타 시내를 쏘다니다가 다시 볼리바르 광장으로 돌아왔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 곧 에두아르도가 픽업트럭을 몰고 광장으로 올 것이다. 덕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순이가 먹던 음료수 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새 웨이트리스가 일을 때려치우기라도 한 것일까? 빈 음료수 잔 옆에는 4000페소가 놓여 있었다. 순이는 그제야 음료 값도 내지 않고 도망치듯 떠났던 것을 기억해냈다.


지폐 아래 뭔가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지폐를 치우자 아래 깔려 있던 덕진의 명함이 보였다. 그녀가 구겨버린 명함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펴놓았다.


장덕진……. 뭐하는 놈이지……?’


생각은 픽업트럭에 올라탄 후에도 계속됐다. 에스메랄다는 순이 옆에 딱 붙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다. 옷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본 이야기, 웬 잘생긴 남자가 자꾸만 추파를 보내더란 이야기. 순이는 그녀의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면서 장덕진이라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남자와 엮여서 좋을 일은 없다. 게다가 그녀가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은 4개월 전 사건을 끄집어낸 남자다. 순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겨진 명함을 꺼내들었다.


순이를 태운 트럭은 보고타를 빠져나와 시원하게 뚫린 국도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냥 밖으로 명함을 집어 던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덕진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났다. 정말 외교관일까? 어떻게 내가 콜롬비아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았을까? 문득 그의 얼굴과 목덜미, 희고 고운 손이 떠올랐다.


뭐야, 이건? 명함이잖아?”


에스메랄다가 불쑥 손을 뻗어 명함을 빼앗았다. 상념에 젖어 있던 순이가 깜짝 놀라 명함을 도로 가져왔다.


이거 수상한데……. 남자가 준 거 아냐?”


에스메랄다가 순이를 놀렸다. 순이는 얼굴이 벌게진 채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순이는 적어도 덕진의 정체와 목적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명함을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 그의 손은 순이의 공격을 감당하기에 너무 가냘프고 연약해 보였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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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영 2017-08-23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열대라는 책을 처음 접해보았는데 진짜루ㅠㅠㅠㅜ완전 짱인거 같아요❤내용도 깔끔하고 읽기좋은것같아서 너무 잘 읽고있습니다! 이렇게 출간전에 약간연재하시니까 책 을고를때도 도움이 많이되는것같아요!.❤❤👍👍👍진짜 짱 입니다!👊👊😙

김주은 2017-08-31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열대....연재를 보니까 제목이 왜 슬픈열대인지 그리고 더 많은 내용들이 궁금해져요~^^❤️😻얼른사탸겠어요!
 

#10_희고 고운 손(1)

 

 

시간은 오후 330분을 지나고 있었다. 볼리바르 광장은 한산했다. 시청, 의회, 대법원, 대통령 궁 등 중요한 기관들이 모여 있는 이 광장은 흔히 보고타의 심장이라 불린다. 평일이었다면 바쁘게 오가는 공무원과 직장인들로 가득했을 테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사람들은 성당 미사에 참석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기며 1주일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일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주말에는 일터에 나올 필요가 없다는 점은 순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장점 중 하나였다. 순이는 멍하니 텅 빈 볼리바르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노천카페 맨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볼리바르 광장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시야 확보와 그것을 위한 자리 선점. 군인으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순이의 몸에 자연스럽게 밴 습관이었다.


그녀는 일요일마다 동물농장 식구들과 함께 보고타로 나왔다. 동물농장이 있는 엘 카르멘과 보고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이지만 두 지역 사이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서너 대밖에 없었다. 동물농장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요일마다 픽업트럭을 운행했다. 운전사는 에두아르도였다. 일종의 직원 복지인 셈이다.


에스메랄다는 일요일을 쇼핑하는 날로 점찍어두었다. 그녀는 순이에게 함께 가자고 집요하게 매달렸지만, 순이는 매번 거절했다. 오늘도 에스메랄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쇼핑센터로 떠났고 순이는 매주 찾는 이 카페에 왔다.


순이도 한 번 옷가게가 즐비한 거리에 들른 적이 있다. 그녀를 보던 콜롬비아 사람들의 시선이 똑똑히 기억났다. 멸종 위기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낯선 피부색에 대한 호기심과 거부감이 뒤섞인 묘한 눈길들. 마치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고? 언제까지 낯선 남의 나라에 머물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순이는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극동아시아의 공산주의 국가가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4개월 전 침몰하는 배와 함께 조국을 떠나보냈다. 그들은 순이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할까…….’


순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군인이었다. 한때는 조선인민군 육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지난 몇 년간은 35호실에서 복무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게 자신과 가족,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니다. 4개월 전까지는.


이제 그녀는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일 뿐이다. 지금도 꼬박꼬박 봉급을 받고 있지만 이 돈을 모아서 뭘 해야 할지, 아니 뭘 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라는 개념조차 낯설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허락된 돈은 오로지 공작에 필요한 자금뿐이었다.




순이는 눈앞에 놓여 있는 음료를 바라보았다. 직접 번 돈으로 자유롭게 소비한 결과다. 이것조차 낯설었다. 누굴 감시하거나 미행하려고 카페에 온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안 마시면 안 되나 하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몇 페소 하지도 않는 커피 한 잔조차 이렇게 껄끄럽다.


그때였다.


권순이?”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순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순이는 저도 모르게 음료에 꽂힌 빨대를 뽑아들었다. 테이블 아래 손을 숨기고 빨대를 구부려 끝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요동치기 시작했다. 권순이라는 이름 석 자. 들어본 지 오래됐다. 그동안 그녀는 집에서는 첫째’, 군에서는 권 소좌’, 이곳에서는 이라고 불렸다. 자신도 잊고 있던 이름 석 자를 누군가가 불렀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자. 아마도 나를 죽이러 온 자일 것이다. 발음을 들어보니 한국 놈이다. 조선노동당, 아니면 남한의 안전기획부에서 온 놈이겠지.’


순이는 각오를 단단히 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그 남자가 있었다. 키는 순이보다 머리 하나 정도 훌쩍 컸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시커멓고 커다란 눈동자가 순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권순이 씨…… 맞죠?”


남자가 소리쳤다. 그는 광장을 가로질러 순이에게 다가왔다. 거리는 충분하다. 여기에서 놈을 제압할 수도, 등을 돌려 달아날 수도 있다. 죽이자. 그렇게 다짐했다. 상대의 소속이 어디든 자신을 죽이러 왔다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도망치는데 성공하더라도 자신을 끝까지 쫓아올 것이다. 그녀는 적이 많았다. 그녀가 35호실에 몸담았을 때 했던 수많은 일들 때문이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십니까?”


순이 맞은편까지 다가온 남자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초면인데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친근한 말투였다. 순이는 남자의 목울대를 노리기로 했다. 이 빨대 끝으로 한 방에 구멍을 낸다. 남자는 피를 쏟아내며 목울대를 움켜쥐겠지. 그때 발목에 차고 있는 단도를 꺼내서……. 순이의 머릿속에서 살인 계획이 차근차근 세워지고 있을 무렵,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목덜미에 굳은 듯 고정됐다. 가늘고 고운 목선, 툭 튀어나온 둥그런 울대가 이상하리만치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 판국에 뭐가 귀여워? 미쳤나?’


순이가 자신을 엄중히 꾸짖었다.


므리오 프리오(Mlio Frio).”


남자기 실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


순이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남자가 순이 맞은편의 의자를 빼고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걸쳤다. 순이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지금까지 상대한 남자들과 달랐다. 목선만큼이나 얼굴선도 가늘고 갸름했다. 맹해 보이는 두 눈에선 살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되게 쓰지 않던가요?”


남자가 물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곱게 놓여 있던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순이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남자를 후려치는 대신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죽이러 온 요원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살인을 앞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티스푼을 천천히 저어 음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처럼 티스푼을 골고루 섬세하게 휘둘러 음료를 고루 섞었다. 순이는 그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희고 곱고 가는 다섯 손가락. 자잘한 상처 하나 없는 멀끔한 손등. 여인에게 어울릴 것 같은 손이다. 그동안 순이가 보고 겪어온 남자들의 손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의 손은 투박하고 무쇠 같았다. 총이나 칼, 삽자루가 더 어울리는 손이었다. 이 남자의 손에는 티스푼이 더 어울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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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Cho 2017-07-1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인건가요? 연재가 계속될 수록 00였고, 조국을 위해 살아왔던 순이가 멀리 떨어진 이국땅에 와(타의와 자의가 합쳐진)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무엇을 배워나갈지 매우 기대가 되요. 다음 연재도, 본 책도 하루 빨리 보고 싶네요

2017-07-18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9_연금술사


 

 

요즘 파블로는 어떻게 지내요?”


디에고 모레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뚱뚱한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구운 닭고기를 썰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두꺼운 입술이 닭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나도 몰라. 우리보단 잘 지내겠지, 언제나처럼.”


사내는 게걸스럽게 닭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축 늘어진 볼살이 좌우로 흔들렸다. 퍽퍽해 보이는 흰 피부에 잔주름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 세상에 연금술사가 모르는 것도 있어요?”


연금술사라 불린 사내, 에르난도 가차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파블로한테 위치 추적기라도 붙여놓은 줄 알아? 그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그는 현재 카르텔의 보스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연락이 닿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현상수배범인 파블로는 호화로운 도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연금술사에게 카르텔의 재정 현황을 보고받고, 그를 통해 휘하의 조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연락 받은 게 언제예요?”

“3주 정도 됐어. 몬테리아에 있다더군. 서핑이나 하면서 좀 쉬고 있겠대. 현상수배범이 서핑이라니, 웃기지 않아?”


디에고가 피식 웃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현상수배범이라는 것도 웃기지만, 현상수배범이 된 경위도 만만치 않게 웃겼다. 모든 건 라 카테드랄(La Catedral, 대성당)에서 시작됐다. 라 카테드랄은 파블레 에스코바르가 자신을 위해 만든 감옥이다.


경쟁 조직인 칼리 카르텔과 격렬한 전쟁을 치른 메데인 카르텔은 전쟁을 승리로 장식했다. 두 조직은 강화 협정을 맺었고, 칼리 카르텔은 본거지인 콜롬비아 남부의 칼리로 쫓겨났다. 메데인 카르텔은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와 제2의 도시 메데인을 장악하고 사실상 유일무이한 거대 마약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콜롬비아 정부조차 메데인 카르텔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세사르 가리비아 대통령은 미국과 콜롬비아 양국간에 범죄자 인도 조약을 체결해 메데인 카르텔의 수뇌부를 처리하려고 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외세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미국 법정에 서게 되면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비롯한 카르텔 수뇌부는 빼도 박도 못하고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미국 법정은 콜롬비아처럼 돈으로 매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데인 카르텔은 정부를 상대로 결렬한 저항을 시작했다. 한동안 콜롬비아 전역에서 암살, 납치, 폭탄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도 반격에 나섰다. 경찰특공대 서치 블록(Search Bloc)을 결성해 마약상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여의치 않으면 현장에서 사살했다.


혼란이 가중될수록 죄 없는 민간인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가리비아 대통령은 미국과의 범죄자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도, 메데인 카르텔을 힘으로 찍어 누르지도 못한 채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결국 가리비아 대통령은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협상을 맺었다. 도처에서 자행되는 테러를 멈추는 대신, 파블로가 스스로 설계한 대궐 같은 감독에서 몇 년간 수감 생활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라 카테드랄이었다. 이 건물은 감옥이라기보다는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휴가를 보내는 별장에 가까웠다. 라 카테드랄에는 주기적으로 술과 음식, 창녀들이 제공되고 부하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카르텔의 사업에 관해 의논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감옥에 앉아서 여전히 메데인 카르텔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라 카테드랄에 들어간 후, 카르텔의 수입을 조금씩 빼돌리는 쥐새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수감이기는 하지만 보스가 감옥에 들어갔으니 그 틈을 타 비행을 저질러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감옥 안에서도 카르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콜롬비아 전역에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정보원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쥐새끼들을 라 카테드랄로 유인해 손수 처단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그들을 은밀히 암매장했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콜롬비아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가리비아 대통령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그는 라 카테드랄에 군대를 보냈다. 어떻게든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체포해 미국에 보내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양측의 교전이 벌어졌고,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유유히 탈옥했다. 그에게 매수된 군부의 유력 인사가 퇴로를 알려주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렇게 해서 탈옥수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현상수배범이 됐다.


디에고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재개발이 한창인 구시가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와 에르난도는 오래된 호텔 카사 메디나 보고타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 있었다. 근방에 있는 건물 중 가장 높았기 때문에 이곳에 서면 보고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뭐가 보이나?”


에르난도가 물었다.


폐허가 보이네요.”


디에고가 말했다. 부서진 건물들과 파헤쳐진 도로. 공포영화에 나오는 괴물처럼 뿌연 분진 속을 서성이는 포크레인과 불도저. 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폐허가 유일했다. 에르난도는 못마땅한 듯 포크로 접시를 툭툭 쳤다.


폐허라니. 저건 희망이야 희망.”


에르난도는 이 폐허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환갑이 지날 무렵, 그는 카르텔의 일선에서 물러나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약 산업에서 손 떼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내가 왜 이 맛없는 레스토랑에 왜 만날 죽치고 있는지 아나? 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어서 그래.”


에르난도가 기름기 묻은 나이프로 폐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 눈엔 그냥 폐허일 뿐이에요. 재개발이니 뭐니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제가 관심 있는 건 그 늑대라는 놈뿐입니다.”


디에고의 말에 에르난도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수소문해봤지만 건진 게 없어. 늑대라는 단어 하나 가지고는 곤란해. 뒷골목 양아치 새끼들도 제가 보고타의 늑대니 뭐니 하면서 폼 잡는다고. 정보가 더 필요해.”


웨이터가 접시를 치우고 음료를 내왔다. 디에고는 차가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에르난도가 커피잔을 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늑대란 놈은 자네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 자네도 알다시피 동물농장에 대해 아는 건 나와 파블로, 자네…….”

, 저도 알아요. 우리 셋뿐이죠.”

더 있지.”


에르난도가 말했다.


우리 조직원들을 의심하는 겁니까?”


디에고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로마가 왜 무너졌는지 아나? 외세의 침입 때문이 아니야. 스스로 망한 거야.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갔거든.”


에르난도는 무심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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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do 2017-07-1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하게 읽어보니 재미있네요. 곧 출간이군요.

믹스 2017-07-1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벌써 출간이라니 기대가 되네요! 제목이랑 글 분위기가 잘 어울려요 뒷내용이 궁금해집니다
 

#8_혼자

 

 

순이는 문을 열고 다락방으로 들어섰다. 리타가 누워 있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순이가 여길 나설 때만 해도 리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의 일이다. 소녀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제 발로 걸어 나갈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가 창고 밖으로 나서자 빈 상자를 의자 삼아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는 인부들이 보였다. 얼마 전에 실려 온 여자애를 못 봤느냐고 묻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누가 데려갔으면 그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결국 제 발로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체구가 작고 나뭇가지처럼 깡말랐으니 인부들도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귀찮게스리…….”


순이가 조선말로 중얼거렸다. 대단한 계집애다.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 텐데. 에스메랄다는 천막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농땡이를 치고 있었다. 순이는 그녀를 붙잡고 리타가 사라졌다고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동물농장 안을 헤매고 다니며 리타를 찾았다. 창고에서 동물농장 외부로 통하는 입구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차로 이동하면 금방이지만 걸어가면 15분 정도 걸린다. 어디까지나 어른 걸음일 때의 이야기다. 몸이 아픈 데다 이곳 지리도 모르는 아이가 동물농장 밖으로 나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참을 찾아다녔지만 소득이 없었다. 하늘은 어느새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었다.


난 작업장 쪽을 한 번 더 돌아볼게. 너는 저택 뒤편으로 가봐.”


에스메랄다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순이는 그녀의 말대로 저택 뒤편으로 달려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뻗은 갈대밭이 그녀를 맞이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사람 하나를 죽이고 가출한 여자애를 찾으러 다녔다. 그녀는 허기를 참으며 갈대 밭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갈대를 헤치며 리타의 모습을 찾던 순이의 귓가에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갈대밭 한편에 리타가 주저앉아 있었다. 보기에도 안쓰러운 알몸을 잔뜩 웅크린 채 제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울고 있었다.


뭐해?”


순이는 리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누런 콧물을 거칠게 빨아들이며 순이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좀 살 만한가 보지?”


리타는 울먹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순이는 리타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집에 가려고?”


순이가 물었다.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갈 만한 곳이란 뻔하다. 학교 아니면 집이겠지.


너희 집 없어. 다 불탔다.”


순이가 말했다.

리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저 표정. 익숙했다. 순이는 리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리타처럼 집을 잃었다. 다만, 불이 아니라 무너져내리는 산이 집을 삼켰고, 그 안에 머물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매장시켰다.




순이는 열일곱 살 때 입대했다. 자원입대였다.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가족은 함경북도 풍계리 집단농장에서 감자와 옥수수를 일궜다. 그녀가 어렸을 때만 해도 수확량이 나쁘지 않았다. 농작물을 관리하는 당국에서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수확량이 줄더니 흉작이 이어졌다. 당국에서는 농부들이 게으른 탓이라고 질타하며 떨어진 수확량만큼 식량과 생필품 배급을 줄였다. 그러나 흉작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자연의 조화일 뿐이었다.


군에 입대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유난히 장마가 길게 이어졌다. 여름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가을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고향 마을에 산사태가 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을 위쪽에는 텅스텐과 구리가 매장된 탄광이 있었다. 그곳이 진원지였다. 굴착하다가 산을 잘못 건드린 것이다. 연일 내리는 비로 약해진 지반은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순이가 휴가를 얻어 고향 마을을 찾았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흙으로 뒤덮인 민둥산뿐이었다. 수십 명의 인부가 중장비도 없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서 시체를 캐내고 있었다. 순이는 온몸에 진흙을 두른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동생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울 수조차 없었다. 그저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에겐 더 이상 가족이 없었다. 집도 없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였다. 눈앞에 있는 리타도 그때의 순이와 같은 처지였다.


이제 세상에 믿을 건 너 자신뿐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


순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럴 때 위로의 말을 건네겠지만, 순이는 누굴 위로하는데 영 소질이 없었다. 리타는 콧물을 빨아들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냉정한 태도에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일까. 순이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해가 저물고, 동물농장에 밤이 찾아왔다. 순이는 리타를 데리고 창고로 향했다. 멀리서 에스메랄다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대체 어딜 갔던 거야? 몸은 괜찮아?”


에스메랄다는 리타를 붙들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폈다. 그러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가죽만 남은 리타의 몸에 걸쳐주었다. 리타는 다락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에스메랄다가 이불을 덮어주자 눈을 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낮은 코골이 속에 피로가 가득 묻어났다.


아무튼 살아서 다행이다, 그치?”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살아서 다행일까?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육신에 남은 상처는 시간이 가면 회복되기 마련이다. 마음에 남은 상처는 그렇지 않다. 안으로 계속 곪아들어가며 사람을 괴롭힌다. 순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살면서 받은 크고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전전긍긍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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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명에게는<슬픈열대 사인본과 뱃지>  드립니다.
  ( 발표: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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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2017-07-1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모르게 설레이는 문장과 장면 넘좋아요^^ 책으로 출간될때 대박♥♥기대가 됩니다
 

#7_늑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사내는 눈을 감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큼지막한 드라이버 하나가 박혀 있었다. 


“계속 그렇게 기도나 하고 있을 거야?”


카를로스가 물었다. 당장이라도 혀를 잘라버리고 싶지만 꾹 참았다. 사내에게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너희한테 돈하고 그 지도를 준 새끼가 누구냐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인가?”


사내는 못 들은 척 계속 주기도문을 외웠다. 똑같은 기도문 계속 반복하기 기네스 신기록이라도 세우려고 결심한 모양이다. 카를로스는 사내의 어깨에 꽂혀 있던 드라이버를 뽑았다.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와 사내의 굵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은 전갈 문신이 진득한 피로 번들거렸다. 사내의 입에서 기도문 대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를로스는 나르코(마약 밀매상을 뜻하는 에스파냐어 속어)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새끼 마약상으로 시작해서 나름대로 자기 사업을 꾸려가다가 디에고 모레노를 만났다. 동물농장에 가담한 후에는 조직의 사업을 관리하며 좀 더 큰물에서 놀 수 있었다. 평생을 나르코로 살면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카를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꽤 많은 사람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팼고, 때론 죽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고문해본 경험은 별로 없었다. 원하는 정보가 있으면 돈을 주고 샀다. 지금까지는 그걸로 충분했다.




난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독실한 크리스천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낼 수 있을까? 카를로스는 초주검이 된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택 지하실에서 전갈 문신을 데리고 난리굿을 친 지 벌써 세 시간째다. 벽 한쪽에 세워놓은 기다란 망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말이 안 통하면 두들겨 패고, 그래도 안 통하면 찍고 째고, 그것도 안 통하면 깨부수는 수밖에. 카를로스는 두 손으로 망치를 들고 사내 앞에 섰다.


“불어. 그럼 살려줄게.”


사내의 눈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드디어 먹힌 건가? 카를로스가 회심의 미소를 띠는 순간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원하시옵소서…….”

“이런 개새끼가!”


카를로스는 자제력을 잃고 망치를 한껏 치켜들었다. 성질 같아서는 그대로 사내의 정수리를 박살내버리고 싶었다.


“도와줄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이였다. 그녀는 1층에서 지하실로 내려오는 계단 중간에 앉아서 카를로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앉아 있었던 걸까? 카를로스는 순이를 쳐다보며 슬며시 망치 대가리를 내렸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순이는 카를로스에게 다가왔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나 보군.”


그녀가 물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네.”


카를로스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피로는 가시지 않았다. 순이는 사내에게 다가가 유심히 상태를 살피더니 잡동사니로 가득한 지하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초짜들은 함부로 손을 대다가 죽여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지.”


그녀는 지하실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캐비닛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먼지바람이 뿌옇게 일어났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캐비닛 안을 뒤적거리다 꼬치를 구울 때 쓰는 가늘고 긴 꼬챙이를 끄집어냈다. 순이는 꼬챙이를 손에 쥐고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직도 주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내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통증에 넋이 나간 듯, 사내의 표정이 한순간 멍해졌다.


“잡아.”


순이가 꼬치로 사내의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뭐하려고?”


카를로스가 물었다. 순이는 대답 대신 사내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일까? 이 녀석을 어떻게 요리할지 구상 중인 걸까? 카를로스는 순이가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그는 망치를 땅에 던지고 사내의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알고 싶은 게 뭐지?”


순이가 물었다.


“이놈은 이미 알고 있어. 자기가 뭘 말해야 하는지.”


카를로스가 말을 끝내자마자 순이가 우악스럽게 사내의 왼쪽 눈꺼풀을 벌렸다. 그리고 꼬챙이 가운데를 손에 쥐고 그대로 내리찍었다.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를로스도 숨을 삼켰다. 꼬챙이의 날카로운 끝이 사내의 눈동자에서 1센티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순이의 손에는 약간의 떨림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로봇처럼 정확하게 멈췄다. 


“말해.”


순이가 말했다. 사내는 침만 꿀꺽 삼켰다. 꼬챙이를 든 손이 다시 치켜 올라갔다. 


“밤새도록 할 수도 있어. 원한다면.”


사내는 대답 대신 꿀꺽 침을 삼켰다. 순이가 다시 꼬챙이를 내리찍었다. 꼬챙이 끝은 또 다시 사내의 눈동자를 겨눈 채 바로 위에서 멈춰 섰다. 전보다 거리가 더 줄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세한 차이지만 사내에게는 달랐다. 그에게는 꼬챙이가 각막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멈춰 선 것처럼 느껴졌다. 순이가 조금만 손을 떨어도 꼬챙이가 눈을 파고들 것 같았다. 극한의 공포가 사내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어디선가 역겨운 냄새가 피어올라왔다. 카를로스가 냄새를 쫓아 고개를 돌려보니, 흘러내린 피로 물들어 있던 사내의 바짓가랑이가 대소변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로…… 로보(Lobo)!”


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순이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를로스가 영어로 번역해주었다.


“늑대(wolf).”


순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가 뭐 어쨌다는 거야? 제대로 말해!”


카를로스가 사내의 귓가에다 윽박질렀다.


“늑대 문신을 하고 있었어. 메…… 멕시코 놈이었고…….”

“확실해?”

“인사하는데…… 네타 그라시아스(Neta gracias)라고 하더라고…….”


네타(Neta). ‘정말’을 뜻하는 멕시코 은어다. 이 사내는 상대방의 억양을 바탕으로 그가 멕시코 출신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 새끼 이름이 뭐야? 소속은?”

“몰라.”

“그것도 모르면서 의뢰를 받아?”

“정말 그거밖에 몰라…….”


사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래……, 얼굴은 기억나?”


카를로스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사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어.”

“눈 색깔은?”

“갈색! 갈색이었어.”


갈색 눈동자를 가진 멕시코 사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녀석을 더 족쳐봤자 쓸 만한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소변과 함께 뱉어낸, 늑대 문신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카를로스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정보일 터였다. 카를로스는 뒤춤에 차고 있던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뭐야 씨발! 불면 살려준다며?”


사내가 고함을 질러댔다. 카를로스는 탄창을 열고 총알을 하나씩 채워 넣으며 말했다.


“뻥이야.”


그 한마디에 사내는 무너져내렸다. 저항할 힘도 다 빠져나갔는지 물에 젖은 짚단처럼 축 늘어졌다.


“조카뻘 되는 애한테 그런 짓거리를 한 새끼를 살려둘 것 같아?”


카를로스가 사내의 머리통에 총을 겨눴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사내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서 물어? 너랑 같이 있던 그 여자애 말이야.”


카를로스가 윽박질렀다.


“아…… 걔 말하는 거야? 씨발, 그건 그냥 전리품이었다고…….”


사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쓰레기 같은 놈.”


카를로스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때 망치가 번개처럼 날아와 사내의 주둥아리를 파고들었다. 사내의 턱뼈가 으스러지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둔중한 쇳덩어리가 그대로 사내의 혀를 짓이기고 목울대를 부숴버렸다.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내며 사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의 아래턱은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망치의 궤적을 따라 함몰된 얼굴은 피로 물들어 형체를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카를로스가 경악한 얼굴로 순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내를 발로 툭 차서 죽은 것을 확인한 후 망치를 내려놓았다.


“총알이 아깝다.”


순이가 손에 묻은 피를 바지에 닦으며 말했다.








 <슬픈열대>

  7월 14일 출간예정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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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표: 7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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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7-07-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리 전개 상 잔인한 장면은 어쩔 수 없는 거죠ㅠㅠ 미드 보는 것 같아요!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