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녁 여덟 시경신촌 기차역 뒷골목에 위치한 원룸텔에 침입해 혼자 사는 여성을 성폭행하려던 스물일곱 살의 김 모 씨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여성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두 명의 형사 덕분에 범행은 미수에 그쳤다김 모 씨는 현장에서 달아나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도주했다평소 이쪽 골목을 자주 오갔기 때문에 지리에는 자신이 있었다골목길을 벗어나 번화가 대로변 입구로 달릴 때까지만 해도 두 형사를 따돌렸다고 믿었다그는 골목 입구 근처에 세워놓은 오토바이에 올라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한데 시동을 걸고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두 형사가 앞뒤를 막은 채 서 있었다당황한 김 모 씨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태를 파악했다앞에는 살짝 마른 체격에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여자가 서 있었고뒤에는 다부진 몸집에 연륜 좀 묻어나 보이는 남자가 아니꼽다는 눈빛을 하며 서 있었다

좁은 골목길이다옆에 피할 만한 여유 공간은 없다앞뒤를 번갈아 보던 김 모 씨는 재빨리 결정을 내린 뒤 액셀을 밟았다


저 미친놈이!” 

뒤에 서 있던 남자 형사가 소리쳤다

뒈지기 싫으면 비켜!”


김 모 씨는 소리를 지르며 여자 형사를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오토바이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데도 여자 형사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김 모 씨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김 모 씨는 액셀을 더욱 힘차게 밟았다오토바이는 더욱 커다란 굉음을 토하며 빠르게 여자 형사를 향해 돌진했다여자 형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미친년이 뒈지든 말든 상관없다고김 모 씨는 생각했다오토바이와 여자 형사의 간격이 뻗은 팔 길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갑자기 쾅 소리와 함께 허공에 온갖 오물과 플라스틱 커피 컵이 날아올랐다뭔가에 부딪친 충격이 컸던 탓에 오토바이는 대로변 바닥에 쓰러져 약 십 미터가량 미끄러졌다김 모 씨는 오토바이에서 굴러떨어져 골목 입구에 널브러졌다생존 본능인지질긴 명줄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 모 씨는 사고 직전 뛰어내려 옆으로 굴렀다덕분에 가벼운 뇌진탕 외에는 다친 데가 없었다정신을 차린 순간 철컥 소리가 났다손목에 한기가 돌았다김 모 씨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수갑이 채워져 있었다눈앞에는 방금 전 오토바이로 쳤다고 생각한 여자 형사가 서 있었다여자 형사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귀하는 강간미수 및 주거침입죄를 범한 현행범으로 형사소송법 212조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합니다변호사 선임 및 체포 적부심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뭐야……?”

김 모 씨는 놀라 여자 형사를 위아래로 훑었다피가 돌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 겨울날 춥지도 않은지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와 청바지만 입은 그녀의 모습에는 상처는커녕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귀신이야?”

김 모 씨가 넋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어쭈용케도 우리 한예은 형사 별명을 맞추셨어.” 


남자 형사가 뒤쪽에서 건들대며 걸어왔다그는 납작하게 찌그러진 쓰레기통을 보고는 김 모 씨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너 이 새끼공공기물 파손 죄도 추가.” 


한예은이라 불린 형사는 아무 말 없이 김 모 씨를 끌고 가 경찰차에 태웠다

역시 한귀야.”

남자 형사가 보조석에 올라타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장 선배가 느린 겁니다운동 좀 하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예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동을 걸었다

너 건수 올리라고 뒤로 좀 빠져 있던 거지선배 마음을 이렇게 몰라.”
빛깔 좋은 핑계로 들립니다만.”
내가 누구냐강력반 경력 팔 년 차 장두진이야인마이런 병아리 같은 건수가 뭐 아쉽다고?” 

예은은 대꾸하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저기…….” 


졸지에 이런 병아리 같은 건수가 된 김 모 씨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두진이 돌아보았다.

뭐야?”

김 모 씨는 눈을 끔뻑끔뻑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시면…….”


두진은 따악 소리가 나도록 김 모 씨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네 죄를 네가 몰라 새꺄?”
아니그건 알겠는데……저 형사님이 대체 어떻게 피하셨는지…….”
아아.”

두진이 씨익 미소 지었다
김 모 씨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할 독자를 위해 설명을 조금 보충하자면김 모 씨가 두 형사에게 쫓기던 때로 상황을 되감기 해볼 필요가 있다김 모 씨는 경찰이 왔다는 걸 눈치 채고 곧장 도주했다예은과 두진은 있는 힘껏 뒤쫓았지만능숙하게 골목길을 달리는 김 모 씨를 당해내기 어려웠다예은은 달리기를 멈추고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늘어서 있는 주택들의 높낮이를 살폈다담벼락다세대 건물원룸 옥상 등등형태가 다른 건물들이 다양한 길이와 크기로 존재하고 있었다예은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점프한 뒤팔을 뻗어 담벼락 위로 올라탔다중력이 없어진 것처럼 가뿐하게 올라탄 걸로도 모자라담벼락을 지지대 삼아 바로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넘기도 했다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두진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그저 익숙하게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훨씬 높은 곳에서 골목을 내려다보며 달린 덕에예은은 김 모 씨의 목적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그녀는 두진에게 대로변 쪽 골목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자신은 전속력으로 달려 옥상을 뛰어넘고 가파른 담벼락 위를 달렸다그리고 대로변 쪽에 다다르자낙법으로 굴러 착지해 골목길 입구를 봉쇄했다김 모 씨가 도착한 건 그 다음이었다두진은 마지막으로 도착해 뒤를 막았다당황한 김 모 씨는 속도를 올린 채 예은을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따로 피할 틈이 없는 좁은 골목인 데다가상대는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였다당연히 코앞까지 돌진하면 비명을 지르며 입구 쪽으로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다김 모 씨는 그 틈을 타 대로변을 달려 도주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예은은 오토바이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재빨리 주변을 살폈다골목 입구 쪽에 커다란 쓰레기통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오토바이가 코앞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오토바이 정면에 쓰레기통을 집어던졌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는 쓰레기통 정면을 들이받았다동시에 예은은 허공으로 뛰어올라 백 텀블링을 했다그녀는 우아하게 세 개의 원을 그리고 나서야 착지했다김 모 씨와 오토바이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이로써 상황 종료.

우리 한 형사가 괜히 한귀인 줄 알아?”

벙찐 김 모 씨를 돌아보며 두진이 놀렸다형삿밥을 먹은 지 이제 갓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예은이 마포 경찰서 강력반 2팀에서 한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초반에 
한 형사 사람 맞아귀신이야?’, ‘사람이면 어떻게 저리 움직일 수 있어?’라는 말을 하도 듣다가그게 한귀로 줄어들며 별명으로 굳어진 게 첫 번째 이유

그나저나 선배우리 그 사건.”


웃고 있던 두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찌그러졌다

또 뭐?” 
한 달 전 도화동에서 실종된 강은혜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해이거 진짜 물귀신이라니까저번에도 알아듣게 충분히 이야기했다.”


집요한 예은의 성격이 두 번째 이유다한 번 꽂힌 사건에는 물귀신마냥 끈덕지게 달라붙어 끝까지 쫓아가는 성격

느낌이 안 좋습니다.”
네 감이 귀신 뺨 왕복으로 때릴 만큼 좋은 건 잘 아는데그건 단순 가출이라니까?” 
단순 가출이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됐어일단 지금 잡은 범인부터 처리해사건 해결해놓고도 표정이 그게 뭐야뚱하니.” 

예은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핸들을 확 꺾었다

범인 잡은 게 뭐가 기쁩니까범죄가 아예 없는 게 기쁘지.” 
하여튼 말 섞는 보람이 없어.”


두진은 혀를 쯧쯧 차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어플을 구동하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넘어가는 동작이 꽤 손에 익어 보였다이윽고 화면에 커다란 그림과 글 한 줄이 떠올랐다.

오늘의 운세: 
말띠/78년생/큰 사고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동쪽, 검정색을 조심.


두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은을 쳐다보았다

네 자리 동쪽 창가 아니냐?”
선배님 옆자리잖습니까.”


예은이 검정색 니트 소매를 걷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아씨오늘 당직 느낌 안 좋은데.”

두진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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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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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8-04-1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한예은-이 등장해서 기쁩니다! 매력있는 설정이어서 마음이 가네요

스파이스트리 2018-05-0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남, 운명상담소, 천재에 액션뛰어난 여형사를 보태면 뭐다? 음...이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는
 

이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오늘 낮에 미남당을 찾아왔던 머리 반 벗겨진 아저씨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한준은 아저씨가 미남당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정확하게 맞췄다. 회삿돈을 들고 도망간 내연녀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는 상황을, 아주 귀신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읊어댄 것이다. 당연히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혼비백산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점의 지읒 자도 모르는 한준이 남자가 처한 상황을 어찌 알았느냐? 단서는 이 남자가 전화를 걸어 예약을 요청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고객들은 보통 한준이 있는 점집에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접수는 한준과 연계된 협력업체─라 쓰고 소규모 흥신소라 읽는다─에서 담당한다. 요즘 전화기는 발신자의 전화번호가 뜬다. 그러면 협력업체는 번호를 토대로 신속하게 예약자의 최근 신상을 파악, 혜준에게 단서를 제공한다. 

혜준은 여러 단서들을 토대로 인터넷에 남아 있는 고객의 개인 정보를 수집해오거나 여러 사진, 문서들을 모아 분석한다. 필요하다면 관련 사이트도 아낌없이 해킹한다. 이 정보들을 토대로 한준은 최종 분석을 한다. 그 후 고객의 이름과 기타 문제 등을 달달 외운 뒤, 상황에 맞춰 그럴 듯하게 알아맞히는 연기를 한다. 미남당은 오직 예약제로만 운영하므로 스케줄 조절만 잘 하면 숙지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냥 말만 하면 뭔가 심심하니, 다 된 국에 조미료 넣듯 쌀을 뿌리거나 접신한 것처럼 표정 연기를 하며 점을 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 찾아온 아저씨에게는 특별히 소리를 질러주었다. 남에게 명령 내리는 일이 익숙한 이들은 되레 자기가 호통을 들을 경우 당황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선제압이다.  

이차저차 하여 ‘나는 지난밤에 네놈이 한 일을 알고 있다’적 상황을 만든 뒤, 부적을 쓰라고 강권하여 일주일에서 이 주 정도의 시간 여유를 번다. 오늘처럼 뭔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의 친애하는 파트너인 협력업체 사장에게 의뢰한다. 너무 복잡한 건수일 경우 한준도 함께 움직일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집에 찾아오는 이유는 거의 뻔하다. 저 언제 결혼할까요, 제 반려자가 바람난 것 같아요, 사업이 잘될까요, 어떻게 해야 일이 풀릴까요, 기타 등등. 전부 다 비슷한 이유다. 한준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복잡한 일은 거의 없으므로 그는 주요 VIP에게만 심혈을 기울여 관리를 한다. 

미래에 관한 질문은 어떻게 하느냐. 그 사람에 관해 조사한다. 생활 습관, 어떤 책을 읽는지,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노래는 뭘 듣는 지 등등. 아주 사소한 정보까지 싹 쓸어 모은다.  

어떻게 이런 것들로 미래를 알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사소한 요소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격체와 삶을 형성한다. 세세한 면모들을 잘 파악해두면, 신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한준이나 당신이나 똑같이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타인의 앞날을 예측하고 자신의 기준을 토대로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서 지구상의 모든 이들은 점쟁이인 셈이다. 단지 한준의 분석이 일반인들보다 예리하고 날카로울 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전화번호 하나로 이 모든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기 일쑤니까. 그런 이들에게는 조용히 되묻고 싶다. 중국의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은 피해자의 식구들 이름이나 근무하는 회사명을 무슨 수로 알았을까?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과 미남당 팀원들의 실력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욕이지만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한다.  

그렇다면, 점괘가 틀린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좋은 질문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가, ‘네가 그런 식으로 해서 안 된 거야’라고 면박을 주면 대부분 수긍한다. ‘이렇게 될 거다’라고 이야기해주면 그와 무관한 상황이 발생해도 알아서 점괘에 자신의 사정을 끼워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나름 정당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도출한 결과를 이야기해줄 뿐인데, 혜준은 한준이 하는 일을 싫어했다. 어떤 말로 포장해도 이건 사기라면서. 각종 인터넷 해킹 및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로 일을 도우며 꼬박꼬박 월급을 타가는 혜준이 할 말은 아니라고 한준은 생각했다. 하지만 전에도 이런 식으로 한 번 따졌다가 십 원짜리 한 푼 못 남기고 통장 계좌를 털린 전적이 있으므로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기만 했다.  

혜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씻는다는 개념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한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산을 마무리했다. 장부는 서류 가방에, 돈은 한준의 방에 있는 비밀 금고에. 

대걸레를 가져와 물걸레를 끼운 뒤, 아까 비듬이 쏟아져 내리던 동선을 쫓아 열심히 바닥을 닦았다. 한참을 청소에 열중하고 있노라니, 욕실 문이 열리며 혜준이 나왔다.  

“아침에 청소하지 않았어?” 

혜준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물었다. 방금 전 오븐에서 꺼낸 찜기처럼 몸에서 부연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저녁이잖아.”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사실 아닌가. 왜 저런 질문이 나오는지, 한준은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혜준은 엑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깔끔 떠는 것도 병이야. 결벽증 아니냐?”  

그러고는 휭하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내가 결벽증인 게 아니고 네가 너무 더러운 거다’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한준은 동생을 사랑하는 자상한 오빠이므로 오늘도 참는다. 혜준을 화나게 했다가 힘들게 번 오늘의 수입이 낯선 계좌로 빨려 들어갈까 봐 두려워서 이러는 건 결코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한준은 마른걸레질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후, 쓰레기도 몽땅 내다 버리고 왔다. 집 안에 존재하는 더러운 이물을 용인하느니 눈에 흙을 뿌리고 말겠다는 게 한준의 입장이었다. 내친김에 혜준의 방도 청소하고 싶었지만, 혜준은 자신의 사생활 보안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므로 애써 참았다. 

갈증을 느낀 한준은 냉장고를 열었다. 얼마 전 마트에서 사온 프랑스제 탄산수가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 밑으로 각 잡힌 채 반듯하게 자리한 반찬통들도 보였다. 한 치의 어긋남 없는 깔끔한 정렬들을 보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탄산수를 한 통 꺼내 마시는데, 혜준의 방문이 열렸다. 그쪽으로 흘깃 시선을 던지던 한준은 입에 머금고 있던 액체를 전부 뿜어냈다. 

그곳엔 웬 모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연한 자줏빛 원피스에 진갈색 울 코트 차림이었는데, 소맷단과 치맛자락 끝부분에 달린 주름 장식이 그녀의 우아함을 돋보이게 했다. 깨끗한 흰 피부에 발그레하게 물든 볼, 장밋빛 입술, 이국적으로 느껴질 만큼 투명하고 맑은 갈색 눈동자는 지나가던 이들이 한 번쯤 뒤돌아볼 만큼 화사했다.  

한준은 격하게 두 눈을 부빈 뒤, 여자의 정체를 깨닫고는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또 속을 뻔했네.”  

너무 오랜만에 본 모습이라 혜준의 대외용 얼굴을 잊고 있었다. 혜준은 현관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덧발랐다. 살짝 진하다 싶을 만큼 붉은 입술을 보며 한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 가는데?” 
“데이트.”  
“또 어떤 불쌍한 놈에게 사기를 치려고…….” 

한준은 혀를 쯧쯧 찼다.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저녁 먹어. 늦게 들어온다.” 

혜준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후가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단 말인가. 한준은 한껏 치솟은 닭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렇잖아도 며칠 후에 구의원 한 명이 점을 보러 온다 하니, 사기의 범주를 좀 더 넓히는 법안을 발의해보라고 조언을 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한준은 거실에 놓인 전화기 앞에 섰다. 우리의 친애하는 파트너─흥신소─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약 삼 분가량 고민했다. 흉흉한 이 세상에 여동생이 어떤 놈을 만나고 다니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게 오빠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캐고 다닌다는 걸 알면 통장 계좌 하나 날리는 정도로 끝내지 않을 혜준이었다. 한준은 여동생의 의사를 존중하는 너그러운 오빠이므로 결국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이건 여동생을 걱정해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혜준의 마수에 걸려들 그 순진한 남자가 같은 종족으로서 걱정되어 그럴 뿐이다. 나중에 속았다며 한준 앞에서 울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은가.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한준은 친애하는 파트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동생 데이트 나갔어. 어디서 뭐 하고 사는 놈인지, 혜준이 떡볶이만 먹이고 다닐 놈은 아닌지, 다른 여자는 없는지, 인성은 됐는지, 싹 다 조사해줘.”  

친애하는 파트너는 존중의 의지를 담아 한준에게 말했다.  

─미친 놈, 작작해. 너 그거 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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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에게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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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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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8-04-1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외용얼굴ㅋㅋㅋㅋㅋ현실경험이 녹아있어 즐겁게 몰입할 수 있네요 유쾌한 플롯을 따라 가다보면 금세 결말에 닿아있을 것 같아요

스파이스트리 2018-05-01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차혁명을 이용하다니...이정도면 드라마제작도 시간문제요.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777-17번지에는 빨간 대문 집이 하나 있다. 요사스런 기운을 풍기는 대문 색깔만큼이나 <미남>이라고 쓰인 간판과 주소지 역시 요상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일 찾아오는 이들로 인해 문지방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분주하고 시끌벅적하다. 매일같이 예약이 미어터져 자신의 순번이 돌아오기까지 한 달이 넘는 일도 부지기수이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이곳을 찾아오려고 아우성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창호지가 덧발라진 장지문을 드르륵 열고 방 안에 들어오는 순간. 

“네 이놈, 어딜 감히 부정을 달고 와!”

라고 귀청이 떨어져라 고함을 지르는 이가 있는데, 다짜고짜 욕 들어먹은 당신이 항의할 틈도 없이 일갈이 이어질 것이다. 헌데 그 내용이 기가 막히다. 

딱 보니까 마누라 버리고 딴 년이랑 뒹굴다가 뒤통수 맞았구먼. 그년이 네 돈 먹고 토꼈으면 아이고, 천벌 받았구나, 하고 벽보며 반성할 일이지. 뭘 잘했다고 여길 꾸역꾸역 기어들어와?”

이렇게 상황을 바로 맞춰버리고 마니, 쩍 하고 벌어지는 입을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당신은 어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다. 얼굴을 보자마자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보는 신묘함도 그렇거니와, 일반적으로 박수무당하면 떠오르는 모습과 전혀 상관없는 남자의 차림새 때문이다. 
간혹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분위기가 바뀔 때도 있지만, 종이를 갖다 대면 베일 듯 똑 떨어지는 
맞춤 정장 차림, 머리에는 포마드를 듬뿍 발라 아무나 소화할 수 없다는 8:2 가르마를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밀라노 패션 위크에 참석 중인지 점집에 와 있는지 헷갈리겠지만 점을 보러 온 본래의 목적은 잊지 않도록 한다. 

그의 서늘한 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맞은편 미남자의 용함을 문득 깨달은 당신은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아이고,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 돈 없으면 회사 쓰러집니다.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며 엉엉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여기서 끝나느냐? 아마추어처럼 섭하게 왜 이래. 물론 아니지. 
처음에는 흥흥대며 콧방귀를 줄기차게 뀌어대던 박수무당도 방문객이 간절하게 빌고 또 빌면,

“거, 부적 한 장 쓰고 가봐.”

무심하고 시크하게 한 마디 툭 할 터이니, 이 순간을 대비해 절대적 불문율 하나를 암기하도록 한다. 마음속에서 아니, ? 굳이 부적까지는 필요 없는데?’ 라는 의구심이 오래 삶은 달걀 옆구리처럼 튀어나온다 하더라도 감히 입 밖에 표출해서는 아니 된다. 그딴 말을 해봤자 돌아오는 건

“감히 어디서 부정 타게 왜는 왜야? 돈 찾기 싫은가보지? 썩 안 꺼져?”

라며 박수무당이 들고 있는 쇠방울로 사정없이 정수리를 두드려 맞게 될 테니까. 그깟 방울, 이렇게 치부하지 마시라. 그랬다가는 쇠방울 흔들릴 때 나는 소리가 내면에서도 울리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될 테니.
여기까지 오면, 지금까지 박수무당을 붙잡고 사정한 사람도 당신이거니와 사람 심리가 또 묘해진다.
 ‘아아, 이 사람은 돈 따위가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그래, 내가 지금 중한 게 뭣인데!' 하며 박수무당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게 된다. 허나 이미 심사가 뒤틀린 박수무당은 결코 순순히 부적을 내어주지 않을 터.

그럴수록 당신은 애가 닳겠지. 그게 사람이니까.
당신의 바지 무릎단이 반들반들해질 정도로 바닥에 엎드려 빌어도 부적을 써주고 안 써주고는 박수무당의 마음이니, 괜히 심기 거스르지 말고 부적 쓰고 가랄 때 냉큼 
, 알겠습니다 해야만 한다는 걸 명심하도록.

“일주일 후 다시 와.”

이 말을 듣는 데 성공했다면?
냉큼 현찰을 꺼내 복채를 지불한 뒤 썩 물러가라. 참고로 여기 복채는 평균 오만 원하는 다른 점집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니, 돈 없고 현찰 없으면 애초에 이 집 근처도 오지 마시라
카드도 돼요?” 라든가 요즘 카드 안 되는 데가 어디 있어요?” 따위의 토는 꿈속에서도 달지 말 것. 얼굴 어딘가에 방울 하나 박힌 채 쫓겨날 테니까.

이 불문율만 잘 지킨다면, 일주일 후 당신이 운영하는 회삿돈 들고 튄 내연녀가 어디서 딴 놈과 빌붙어 먹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이런 각고의 인내의 시간을 거쳐 당신은 이 박수무당을 거쳐 간 수많은 이가 그러했듯 . . 의 길로 들어설 게 뻔하다. 정장이 잘 어울리는 차갑고 도시적인 남자,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던 전무후무한 스타일리쉬한 무당! 바로 그가 연남동의 명물 남한준이다. 

나이는 청춘과 성숙이 동시에 무르익어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는 서른 넷. 키는 행운의 숫자인 백 칠십칠인데다 눈도 똘망똘망하고 신수도 훤하다. 좋아하는 건 인테리어 분위기 죽이는 레스토랑에서 비싸고 고급지고 양 적은 음식 먹기, 달달한 디저트, 예쁜 아가씨, 신사임당이 그려진 
현찰. 특히 <현찰> 부분은 고딕 이탤릭체로 진하게 표기 후 밑줄을 쳐둘 것. 

싫어하는 건 매운 음식, 화장실 더러운 식당, 왜 카드 안 되냐고 난리 피우는 진상 손님. 취미는  핫 플레이스 찾아가기며 이상형은 숏 단발이 잘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이목구비에 허리는 쏙 들어가고 골반 넓은 고양이 상의 여자다. 그의 신묘한 점괘에 반해 쫓아다니는 미인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는 일에만 몰두하는 프로페셔널한 사람이고 눈은 저 하늘에 달려 있어 웬만한 여자에게는 흔들리지 않는다. 고로 김치국은 각자의 집에서 마시도록. 

, 여기서 질문이 하나 나올 법하다. 연남동 박수무당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느냐고?
그거야 쉬운 일이지. 그 박수무당

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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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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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구슬 2018-04-14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타일리시한 박수무당의 사건수첩이라니 흥미가 생긴다. 유쾌한 추리물이길 기대해봄

[그장소] 2018-04-14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꾸 , 들려요 . ( 응?) ㅋㅋㅋ 신들린 연기자가 자꾸 보여요. ㅎㅎㅎ

2018-04-18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8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민경 2018-04-14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기대하던 작품인데 책으로 출간된다니 기뻐요! 꼭 읽어보고 싶네요.

chloe 2018-04-14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이끌려서 눌렀다가 금세 빠져들었네요! 출간되면 꼭 읽어보고 싶어요 기대합니다

ansoy7 2018-04-14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색다른 박수무당 기대되요

whwngud0306 2018-04-15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란 페이지에서 읽었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완결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그래도 추리소설 좋아하는데 소재도 신선하고 인물들도 다 매력있어서 꼭 소장하려구요! 다른 나라 작가님들 작품만 읽다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추리소설도 매력 있다는걸 깨달았어요!

오월 2018-04-16 0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대되는 소설입니다. 줄거리 자체도 너무 흥미진진해서 빨리 읽고 싶네요~

먼지 2018-04-1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내 작가가 쓴 추리소설 이라는 것만으로도 끌리는 책! 게다가 미남 박수무당이라니 안 볼 수가 없잖아요~

rose 2018-04-17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카오에서 신선한 제목에 끌려 막 보기 시작한 작품이네요! 웹툰같기도한 표지에 자기객관화가 퍽 잘된?듯한 주인공이 어떤 내용을 들려줄지 책출간 기대됩니다^^

박미정 2018-04-17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장르를 좋아하는데 신간이 요렇게 나오다니 좋네용~

김태희 2018-04-1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린듯이글을 보게 되었는데 기대돼요

2018-04-19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 찾아가볼라고 했었네

2018-04-19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시율 2018-04-20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순식간에 이 프롤로그 이야기에 빠져들었어요! 정말 이건 읽어보고싶네요 :-D 출간되면 꼭 사서볼께요!!

eunoo73 2018-04-2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재 따라가다 못참고 구매완료!

pises03 2018-04-25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어체가 아니 구어체로 제가 읽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말해주는 것 같아요. 빨리 출간해주셔야겠어요. 완전 내스타일 ~~

조은님 2018-04-27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술 읽히는 내용이네요.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 팍팍

스파이스트리 2018-05-0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오늘에서야 프롤로그를 봤다는...응원합니다^^

cbcbqk 2018-05-03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카오스토리에서 소재가 기발해서 봤는데..넘 재밌더라구요. 드라마도 나왔음 좋겠어요~^^

dbwjd1234 2018-05-1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소재도 흥미롭고 재밌어요:)
 


“괜찮네. 지금 이건 참신하게 미친 거라 봐줄만 해.” 

사람의 목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지금 들려온 건 갓 출소해 복수를 시작하려는 악당 심보만큼이나 시커먼 색이 틀림없다. 한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일 인터뷰 있어서 연습 좀 했다.” 
“그래봤자 구(區) 지역 신문이잖아. 그거 누가 보냐?” 


어쩌면 저리 용기를 북돋는 말만 골라서 해줄까. 독설이라면 어디 가
서 져본 적 없는 한준이건만, 저 귀신같은 음성의 주인공에게는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굳이 지금 설명할 필요 없다. 지켜보고 있노라면 바로 답 나오니까.  
한준은 이를 꽉 다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어디 나갔다 왔…….” 

한준은 뒷말을 삼켰다. 입은 지 족히 일주일은 넘은 듯한 검정색 트레이닝복, 마지막으로 머리 감은 날이 바로 저 옷을 입은 날일 거라고 생각되는 떡진 머리, 방금 전 일어났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퉁퉁 부은 얼굴이 모든 상황을 단박에 설명하고 있었다.  

“너 라면 먹고 잤니?” 
“조금밖에 안 먹었는데.” 


한준은 재빨리 부엌으로 가 찬장을 열었다. 엊그제 사다놓은 라면 개수를 세어보니, 두 개가 빈다. 한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혜준아.” 
“왜?” 


혜준, 한준의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머리 자르면 안 되냐?” 
“포니테일과 짧은 머리는 신성한 존재이니 제발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혜준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풍성하게 흩날리는 혜준의 비듬이 발코니 너머 눈구름이 잔뜩 낀 회색빛 하늘과 겹쳐지며 함박눈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눈구름이 많아지면 내리는 눈의 양이 많아지듯, 혜준의 저 풍성하고 탐스러운 머리칼이 길수록 자체 생산되는 비듬과 머릿기름의 양도 늘어날 것이다. 한준은 열심히 대출금을 갚고 있는 이 소중한 38평짜리 아파트 바닥을 그런 것들로 매끄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뭐야? 말하다 말고 왜 인상 써?” 

정작 인상을 쓰고 있는 건 혜준 본인임을 자각 못 하는 게 분명했다. 한준은 애써 미소 지었다.  

“요즘 트렌드가 숏 커트래. 너 얼굴 작으니까 잘 어울릴걸.” 
“웃기시네. 지금 오빠 말투, 난민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내 이웃으로는 둘 수 없다는 사람들처럼 완전 가식 쩔었어. 갑자기 머리는 왜 자르라는 건데?”  


한준은 매일 밤마다 전 세계 네티즌들과 댓글로 설전을 벌이며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두는 저 걸물을 말로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한준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다. 거실 구석에 놓인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 속 영웅들의 피규어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외로이 쓰러져 있는 FBI 출입 카드였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준의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 방년 26세의 남혜준은 초등학교 시절 기하학과 함수를 깔짝대 카이스트 학생들을 가볍게 누르는 기염을 토했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히게 한 그 비범함은 혜준이 중학교에 입학한 뒤 피시방을 떡볶이 집 다니듯 드나들게 되면서 점차 잠잠해졌다. 하지만 애가 끽해야 게임밖에 더 하겠느냐며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몇 달 후, 한준의 집에 정장을 차려입은 외국인 세 명이 방문했다. 외국인이 찾아올 일이라고는 사이비 종교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쫓아내려던 찰나, 한준은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FBI에서 왔습니다.”  

처음에는 몰래 카메라인 줄 알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들의 방문 목적을 듣고 난 뒤, 처음에 했던 말은 귀여운 예고편에 불과했음을 알았다. 한준은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얼마 전, 당신의 여동생이 FBI의 주요 기밀 파일을 해킹했습니다.”  

한준은 물론이거니와, 한평생 성실하게 직장을 다니며 범죄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부모님은 혼절 직전 상황까지 갔다. 혜준을 다그친 결과, 걸작 같은 대답이 나왔다.  

“입단 시험 치르느라 그랬어.”  

혜준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
치는 세계적 해킹 집단에 가입하기 위해 입단 시험의 제물로 FBI를 선택했다고 했다. 작업 장소는 피시방이었다.  

“나 최연소 합격자래.”  

혜준은 FBI를 해킹해서 FBI를 찾아오게 만든 주제에,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해맑았다. 혜준은 FBI의 조사를 받게 됐고, 결국 FBI 본사까지 동행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준은 눈물을 꾹 삼키며 여동생의 손을 잡았다.  

“너 IMO대상 상금, 내가 유용하게 쓸게.”  
“아, 그 시시한 대회.”  


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부모님의 절규를 뒤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얼마 후, FBI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몇 년 형인가요?”  

부모님은 벌벌 떨며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형기가 아니라 FBI 사이버 수사국 스카우트 제의였다. 본래 FBI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국 시민권이 필요하지만, 혜준은 특별 케이스니 시민권이고 나발이고는 본사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파격 제안까지 덧붙였다. 사건 당사자인 혜준은 FBI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상관없었다. 혜준에게 중요한 건 블리자드 본사를 마음껏 투어할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물론, 한준이 여동생을 걸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천재적인 면모 때문만은 아니다.  
혜준은 FBI 근무 2년 차에 잘렸다. 당연히 업무 태만이나 부족한 업무 처리 능력이 사유였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혜준은 열여섯 살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 자체는 완벽하게 수행했다. 단지 사고를 딱 한 번 쳤다.  

“말하다 말고 뭐야? 바보같이 입 쩍 벌리고.”  

갑작스레 들려온 혜준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한준의 의식을 깨웠다.  

“아, 잠깐 지난 일 생각하고 있었어.”  
“지난 일? 뭐?”  
“너 FBI에서 사고 친 거.” 
 

아─ 혜준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프로 게임단 창단?” 

그렇다.  
어릴 때부터 세계적 천재로 주목받았으며 세계적 유명 해킹 집단의 최연소 멤버이자 FBI 사이버 수사국의 최연소 직원이었던 남혜준은 직장 내에서 프로 게임단을 창단하려다가 잘렸다. 당시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사건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면, 다음과 같다. 혜준은 일을 굉장히 열심히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최대한 집중해서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게임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근 및 불필요한 잔업이 있으면 안 됐다. 동료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업무 능력을 보이는 혜준에게 점점 매료되었다. 혜준은 친구들을 모아놓고 대한민국의 게임 문화를 전파했다. 원래부터 컴퓨터를 다루는 일에 익숙했던 이들이었던지라, 적응은 금방이었다. 혜준은 팀원들의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그냥 느끼기만 하고 자기 갈 길 갔으면 좋았을 텐데, 문제는 여동생이 원대한 꿈을 꾸었다는 데 있었다.  

─실력을 썩히기 아까워. 프로 게임단을 목표로 삼자.  
혜준의 말은 기름이 되어 팀원들의 열정을 더 크게 불태웠다.  

하지만 그들은─FBI에게 이런 말을 하기 어색하지만, 어쨌든 혜준과 비교했을 때─보통 사람들이었다. 혜준처럼 일하고 게임을 한다는 건 무리였다. 팀원들은 혜준의 실력을 따라잡기 위해 점점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혜준의 뛰어난 전술(?)과 실력에 감화된 요원들 중 진정한 프로 게이머로 거듭나기 위해 FBI를 그만두고 연습에 매진하는 이도 생겼다. 집중력이 저하되자, 사이버 수사국 업무에 허술한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졌다고 판단한 수뇌부는 대책 회의를 열었다.  

혜준은 ‘
역시 게임은 코리아’라는 이미지를 남긴 채 책상을 빼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삼 개월 정도 공부하고 수능 쳐서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에 들어갔고, 삼 년 만에 자퇴했다.  
걸물도 이런 걸물이 또 없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라는 명언을 온몸으로 절감하며 살아온 한준이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봉은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야, 그나저나 양심 안 찔리냐?” 


혜준이 물었다. 한준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여전히 바닥에 흩뿌려지는 비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뭘?”  
“오늘 낮에 온 아저씨한테 후려친 부적 값. 심했어.” 


혜준은 떨떠름해하는 목소리였다.  
잠시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준과 혜준은 한 팀이다. 단순히 가족이기 때문에 쓰는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준과 함께 ‘일’을 한다. 미남당 2층에는 벽면 한가득 모니터가 설치된 혜준의 작업실이 있다. 업무상의 이유로 종종 거기에 틀어박혀 한준이 점을 보는 광경을 지켜보는데, 오늘따라 뭔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또 시작이다. 이 장사 한두 번 해?” 

한준은 손을 휙휙 내저었다.  

“돈 그만큼 모았으면 됐지. 작작 좀 하셔.” 
“아직 멀었어. 이걸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어.” 


한준은 어깨를 으쓱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혜준이 뒤따라오며 뭐라고 욕을 해댔지만 한준은 혜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서류 가방에서 장부와 오늘 번 돈다발을 꺼냈다. 돈을 셀 때는 최대한 신속하게 손을 놀려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한준은 집중했다. 정산을 시작한 지 삼 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손이 착, 소리를 내며 마지막 지폐를 튕겨냈다. 절반으로 접혀 있던 지폐가 일자로 쫙 펴지면서 한 뭉치의 돈다발이 완성되었다. 오늘의 매출 순익은 이백만 원. 한준은 눈부시게 빛나는 돈다발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혜준이 그런 한준을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사기꾼.”  

뜬금없는 혜준의 말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들이 제법 있을 줄로 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들어준 독자들에게 답례로 
한 가지 고백을 하고자 한다.  

사실, 한준은 점을 전혀 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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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스트리 2018-05-0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거라 생각했다 ^^ 양적은 고급짐을 사랑하는 미남이 점까지 치믄 쓰것소~~
 



테러 발생 3시간 08분 경과 
2호선 강남역 부근



귀를 때리는 폭음과 함께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포탄이 연이어 날아왔다. 우리는 아예 바닥에 엎드렸다. 포탄은 우리 뒤편, 역삼역 방향에서 진격해 오는 괴물들에게 날아가 꽂혔다. 괴물들에게서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포탄이 날아온 쪽을 보자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우리가 있는 강남역 승강장으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교대역 방향에서 나타난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을 보자 일순 마음이 놓였다. 얼마 만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인가! 

그러나 군부대의 공격은 괴물들을 더욱 흉포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괴물들은 여태껏 들은 것 중 가장 크게 포효하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무섭게 달려왔다. 괴물들은 쿵쿵대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뛰어왔다. 강남역 선로에 엎드려 있는 우리는 괴물 군단과 군부대 사이에 낀 형세가 되었다.  

우리가 바닥에서 일어나 군인들 쪽으로 도망가려고 하는데, 날개가 달린 괴물들이 키에에에엑! 괴성을 지르며 벽과 천장을 타고 날아 단번에 우리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괴물들은 천장에서 뚝 떨어지듯 군부대 위를 덮쳤다. 군인들은 깜짝 놀라 날개 달린 괴물들에게 기관총을 갈겨댔다. 소낙비처럼 총탄이 쏟아져 나왔지만 괴물이 아닌 동료 군인들이 맞고 쓰러졌다. 날개 달린 괴물들은 날쌘 짐승처럼 군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대오를 흐트러트렸다. 어떤 군인은 겁에 질려 달아나다가 괴물에게 머리를 물어 뜯겨 죽었다. 질서정연하던 군부대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니 거인 같은 괴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우리가 있는 강남역 승강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대오가 완전히 흐트러진 군부대는 다급해져선 마구잡이로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엎드려 있는 우리 위로 굉음을 내며 포탄이 날아가더니 괴물뿐만 아니라 터널 벽과 천장에 꽂혔다. 터널 곳곳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화약과 터널 붕괴로 인해 피어 오른 매캐한 연기와 먼지가 코와 입속에 밀려 들어와 기침이 터졌다.  
나는 강남역 선로에 엎드린 채 어떻게 이 아수라장을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옆쪽에 딱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동그란 구멍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동그란 구멍 안쪽으로 비상시에 대피할 수 있는 승강장 아래 빈 공간이 보였다. 일단 저곳에 들어가 몸을 숨겨야겠다!  

“저기 저 안으로 들어가자! 셋까지 세고 나서 다 같이 일어나서 달리는 거야!” 

나는 승강장 아래 동그란 구멍을 가리키며 옆에 엎드려 있는 연아와 지태에게 소리쳤다. 둘은 내가 가리킨 구멍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두울! 셋!” 

외치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동그란 구멍을 향해 달렸다. 내 뒤로 지태와 연아가 따라왔다. 그때 갑자기 퍼퍼퍼펑! 하는 폭발 소리와 함께 옆쪽에서 뜨거운 바람이 확 밀려왔다. 우리는 거센 바람에 밀려 순간 공중에 붕 떴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동시에 나의 귀는 청각 능력을 상실한 듯 삐— 소리만 들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폭발이 일어난 뒤쪽을 돌아봤다. 신분당선 개구멍이 있던 벽이 완전히 폭파되어 무너져 있었다. 개구멍에 몰려들어 아귀다툼을 벌이던 사람들은 팔다리가 잘려 나가 괴로워했다.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라진 개구멍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하지만 그들의 방황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터널 천장이 무너지며 그들을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내 교복 옷깃을 잡아끌었다. 지태였다. 나를 보며 뭐라고 소리치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선 여전히 이명만 날카롭게 울렸다. 귀가 고장나버린 것 같았다. 지태 옆에서 연아가 나에게 빨리 일어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우리는 승강장 아래 동그란 구멍 속으로 서둘러 뛰어 들어갔다. 구멍 안쪽 공간은 어두웠다. 하지만 동그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승강장의 불빛으로 공간의 구조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공간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우리 앞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중간중간 옆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어 바깥의 불빛이 들어왔다. 이 공간을 따라 계속 가다가 제일 끝에 있는 구멍으로 나가면 강남역 승강장을 지나 교대역으로 가는 터널이 바로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천장이 낮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이동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뒤로 몇몇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다. 우리가 구멍 속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 따라온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밀치고 공간 앞쪽으로 달려갔다. 우리도 뒤따라 달려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또 구멍으로 들어와 우리를 밀쳤다. 기찬이와 주댕이, 헐크였다. 나를 보면서 뭐라고 소리치는데, 귀가 고장난 탓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 엄마와 통화한 이후엔 기찬이 패거리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우리를 쫓아오는거지? 

기찬이 일행 뒤로도 계속 사람들이 들어와서 우린 서둘러 공간 앞쪽으로 이동했다. 낮은 천장에 맞춰 상체를 잔뜩 수그리고 달렸다. 목표 지점은 제일 끝에 있는 구멍이다. 귀에선 계속 이명만 날카롭게 울릴 뿐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중간중간 옆쪽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 승강장의 상황을 살폈다. 군인들과 괴물들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마치 음소거한 전쟁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앞의 동그란 구멍에서 무언가가 휙 들어오더니 앞쪽에서 달려가던 남자를 낚아챘다. 남자는 손 쓸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낚아채져 짓이겨지듯 몸이 접이면서 작은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빨려 나가듯 사라졌다. 깜짝 놀란 우리는 구멍을 통해 바깥을 봤다. 괴물이 남자의 몸통을 물어뜯고 있었다. 괴물이 구멍에 길쭉한 팔을 넣어 남자를 낚아채 간 것이다.  

그 광경을 본 구멍 안쪽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미친 듯이 제일 끝에 있는 구멍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도 뒤따라 달리려는데 또 괴물의 길쭉한 팔이 구멍 안으로 들어와 앞에서 달려가던 여자를 낚아채 갔다. 여자는 순식간에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내 바로 뒤쪽에서도 누군가가 괴물의 길쭉한 팔에 붙잡혀 구멍 바깥으로 빨려 나갔다. 마치 두더지 게임을 하듯, 괴물들이 구멍들 속으로 손을 넣어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에 접착제를 붙여놓은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구멍 옆을 지나가다가 괴물에게 잡힐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쿵쾅거렸다. 옆에서 지태와 연아, 기찬이, 헐크, 주댕이가 서로 쳐다보면서 뭐라고 소리치더니 동시에 앞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신호를 주고받은 것 같은데 내 귀에선 여전히 이명만 울려서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한 박자 늦게 아이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때 내 바로 앞에 있는 구멍에 괴물의 길쭉한 팔이 들어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며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멈춰서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괴물의 손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앞을 스쳐 지나가며 나 대신 바로 앞에서 달리던 주댕이의 허리를 낚아챘다. 주댕이는 구멍으로 빨려가듯 날아가면서 나를 향해 살려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내가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몸이 접히면서 작은 구멍 바깥으로 튕겨 나가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주댕이를 보면서 두뇌회로가 정지된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단아!” 

어디선가 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아의 목소리가 뾰족한 창처럼 내 귀에 꽂혔다. 동시에 끊임없이 귓속에서 울리던 이명이 걷히고, 갑자기 TV 볼륨을 올린 것처럼 포탄 소리, 비명 소리 등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빨리 와!” 

연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제일 끝에 있는 구멍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주댕이가 잡혀 나간 구멍만 지나면 제일 끝에 있는 구멍에 닿는다. 괴물은 주댕이를 뜯어 먹느라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연아를 향해 달렸다. 연아는 구멍 밖으로 나가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연아의 손을 잡고 구멍을 빠져 나갔다.  

예상대로 강남역 승강장 끄트머리로 나왔다. 지태와 기찬이, 헐크 모두 이미 빠져나와 있었다. 바로 앞에 교대역으로 향하는 지하 터널이 펼쳐졌다. 강남역 승강장에선 군부대와 괴물들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뒤늦게 주댕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된 기찬이는 주댕이의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며 달려가려고 했지만, 헐크가 말렸다. 주댕이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관뒀다. 지태는 계속 빨리 도망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실랑이를 벌이는 기찬이와 헐크를 놔두고 지태, 연아와 함께 교대역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퍼퍼퍼펑! 우리 바로 뒤쪽에서 또 다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뜨거운 바람이 우리 등을 때렸다. 우린 또 한 번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대체 몇 번째 폭발인가. 군인들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몸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옆쪽에 연아가 힘겹게 일어나고 있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나는 연아를 일으키며 물었다.  

“괜찮아. 너무 많이 굴렀더니 정신이 없네.” 

연아가 대답했다. 연아의 얼굴이 지쳐 보였다.  

“빨리 와! 얼른!” 

벌써 일어난 지태가 앞쪽에서 소리치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연아의 손을 잡고 지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단아! 잠깐만! 잠깐만!” 

연아가 나를 멈춰 세웠다. 연아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달리려는데, 연아가 내 손을 놔버렸다. 나는 연아에게 소리쳤다. 

“왜 그래? 여기서 죽고 싶어?” 
“아니, 저기…….” 

연아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할 수 없이 연아가 가리킨 곳을 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개 달린 괴물이 누군가를 뜯어 먹고 있었다. 헐크였다. 조금 전의 주댕이처럼 온몸이 뜯겨 죽어가는 중이었다. 구하기엔 이미 늦었다. 지금 구하러 갔다간 나까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연아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헐크 옆쪽이었다. 기찬이가 서 있었다. 기찬이가 뜯어 먹히는 헐크를 구하려는 것인지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양손에는 커다란 콘크리트 조각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저 자식, 설마 저걸로 괴물과 싸우려는 건가? 자세히 보니 기찬이는 두 눈의 동공이 풀린 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찬이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둘 다 뭐해! 죽고 싶어?” 

지태가 달려와 나와 연아를 붙잡고 소리쳤다.  

“아니, 저 새끼…….” 

내가 기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새끼 뭐? 그냥 내버려둬!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우리가 뭐 저 새끼랑 챙겨주는 사이였냐? 너희들도 저 꼴 나고 싶어?” 

지태가 괴물에게 물어 뜯기는 헐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래. 지태 말이 맞다.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우리가 저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냥 가자. 어차피 기찬이랑 친한 것도 아니다. 내 알 바 아니다. 그냥 가자, 그냥 가! 

나와 연아, 지태는 다시 교대역 방향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나는 몇 발짝 가지 않아 멈춰 섰다. 연아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태는 제발,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미안. 나 저 새끼 두고 그냥 못 가겠다.” 

나는 뒤돌아 기찬이에게 달려갔다. 더 이상 내 주위의 누군가가 죽어가는 걸 방치할 수 없었다. 뒤에서 지태가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찬이는 여전히 벌벌 떨면서 헐크를 뜯어 먹는 괴물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기찬이 뒤로 달려들어 목을 감아 끌고 왔다. 놀란 기찬이가 끌려오면서 손에서 콘크리트 조각을 떨어뜨렸다.  

“뭐, 뭐야? 이거 놔! 놔, 이 새끼야!” 

기찬이가 나를 거칠게 밀치며 소리쳤다. 나는 기찬이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미친 새끼! 짜증나게 하지 말고 따라와! 죽으려고 환장했냐!” 
“이 씨발 놈이! 헐크 데려가야 된다고! 너희들은 너희들 갈 길이나 가!” 
“아까부터 보고 있었어! 새끼, 겁나서 덤비지도 못하고 있던게 어디서 개소리야!” 
“이 새끼가! 내가 지금 바로 저 괴물 새끼 밟…….” 
“야, 야! 잠깐만! 잠깐만!” 

기찬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태가 우리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나와 기찬이는 지태를 봤다. 지태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 뒤쪽에 있는 괴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새끼…… 헐크 다 먹었어. 가만히 있어.” 

지태가 말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우리는 얼음이 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찬이도 방금 전까진 괴물에게 바로 덤벼들 것처럼 허세를 부리더니 숨도 못 쉬고 가만히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아가 손으로 입을 막고 우리 셋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태가 조심조심 뒷걸음질 쳤다. 천천히, 천천히. 괴물을 도발하지 않을 조용한 발걸음으로. 나와 기찬이도 천천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지태를 따라갔다. 차마 뒤돌아볼 순 없었다. 우리를 마주하고 뒷걸음질 치는 지태의 표정에서 내 뒤통수 너머의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지태가 뒷걸음질을 멈추더니 말 
했다. 

“망했다. 저 새끼, 고개 돌렸어.” 
“뭐?”  
“튀어!” 

지태가 소리쳤다.  
나와 지태, 기찬이는 총알같이 달려갔다. 연아도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넷은 교대역 방향으로 죽어라 달렸다. 바로 뒤에서 괴물이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으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괴물의 포효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제기랄! 대체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거야!  
으아악! 비명이 들리더니 멍청한 기찬이 새끼가 넘어져서 바닥을 뒹굴었다. 이 새끼는 왜 또 넘어지고 지랄이야!  

나와 지태는 어쩔 수 없이 달리다가 멈춰서서 서둘러 기찬이를 일으켰다. 덕분에 뒤에서 쫓아오던 괴물을 보게 됐다. 놈과의 거리는 불과 10미터 남짓! 너무 가깝다. 이대론 잡히고 말 것이다! 

“으아아아! 빠, 빨리!” 

나와 지태, 기찬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 놈이 있었다. 텅. 텅. 텅. 텅. 놈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이 달려오고 있다. 이 거리에 이 정도 속도면 곧 붙잡힐 것이다. 안 된다……!    

그때 앞쪽에 갑자기 꼬맹이가 나타났다. 꼬맹이는 터널 벽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저쪽! 저쪽!” 

꼬맹이가 가리킨 곳엔 자그마한 쪽문이 있었다. 그야말로 개구멍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릴 법한 문이었다. 기껏해야 무릎 높이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가장 앞서 가고 있던 연아가 방향을 틀어 쪽문을 향해 달렸다. 가장 먼저 쪽문에 도착한 연아가 뒤를 돌아봤다.   

“빨리 들어가!” 

꼬맹이가 연아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나도 달리면서 연아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어디로 가는 문인지는 몰라도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쪽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다음엔 내가, 그다음엔 지태, 그리고 기찬이가 차례로 쪽문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꼬맹이가 들어와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괴물이 주둥이를 들이미는 바람에 닫을 수 없었다.   

콰쾅! 쾅! 쾅! 쾅! 괴물이 쪽문 안으로 들어오려고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괴물이 들어오기엔 쪽문이 너무 작았다. 놈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우리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좁고 어두운 통로로 끝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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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do 2017-10-26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화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잘 보았습니다.

박지은 2017-10-3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어서 순식간에 다 읽었습니다! 얼른 뒷내용도 읽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