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하루
-새벽 세 시로부터, 보다
종달새를 보라
아버지 가시는 날 아침은 흐렸고, 다급한 종다리새 울음이 전깃줄을 타고 흘렀습니다. 창을 열었는데도 종다리는 날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울어댔어요. 옥상 지붕 틈에 지어놓은 둥지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어요. 그리고 조금 지나 유월의 하늘에 눈이 내렸습니다. 어린 새들의 깃털이 종다리의 울음과 함께 사방에서 눈처럼 흩날렸어요. 깃털이 가라앉자 세상은 잠시 종다리만 남겨놓고 정적이 흐르는 그림이 되었지요. 그날의 종다리 울음을 이제 나는 아빠의 목소리로 기억합니다. 정과 외로움이 많았고, 술 드시면 자주 우시며 세상을 비웃으시던 아빠의 가난한 삶을 되짚어보게 되지요.
아빠는 삶에 정직하셨어요. 고독하지 않으려고 우회하지 않았고, 외롭지 않으려고 사람을 이용하지도 않으셨지요. 그러다 보니 아빠가 가시는 날에는 일가 친척 외에 부를 수 있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요. 아빠는 스스로 고립되어 반생은 가족에게, 또 반생은 세상을 욕하며 평생의 벗 하나 만나지 못하셨어요. 답답할 정도로 결벽한 아빠의 경제관은 안 벌고 안 쓰는 거였어요. 안 쓰기 위해 아빠는 고물을 고치고, 책을 모으며 친구의 빈 자리를 채우셨나봐요. 집 정리를 하며 하늘색의 마라톤 타자기와 70년대 평민사에서 나온 에리꼬 베리씨무의 장편소설 『들에 핀 백합을 보라Olhai os Lirlos do campo』를 그리고 아빠가 마지막으로 일하셨던 아파트의 경비 이름표를 담아왔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키지 못한 자식이 그리운 것이 한둘일까요.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땀 냄새와 라일락 담배 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 없다는 건 후각을 잃은 것처럼 세상을 맹물로 만들어버리곤 했어요. 사람의 몸에서 가장 나중 늙는 게 땀이라고 했던 어느 소설의 문장이 진심으로 아픈 문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나이까지 기다려주느라, 아빠는 그리도 살아보려고 애를 썼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탈상을 마치고 옥상에 올라와 백일홍 한 그루 심었습니다. 아빠의 냄새가 날 거라 믿어버리며 흙을 덮었지요. 그리고 내려와 아빠의 머리맡에 1년 동안 있었던 에우제니오와 올리비아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읽었어요. 아빠는 왜 이 책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가셨을까, 유언처럼 책에 있는 글자를 더듬었습니다.
돈과 권력을 쫓아 사랑하는 여인을 버렸던 에우제니오는 올리비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그녀의 주변을 살핍니다. 상을 마친 후에도 짧은 사랑이 만든 그녀의 아이와 호숫가에서 오리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며 과거를, 혹은 미래를 짜마추느라 고뇌에 차 있지요. 그때 안나마리아가 그의 소매를 열심히 잡아당깁니다. 그러면서 말하지요.
―아빠, 바보! 아빠, 바보! 아빠, 바아아보!
에우제니오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딸 아이를 내려다봅니다.
―응?
―빨리 가봐, 응, 오리들이 배고프단 말야.
―아…….
생각은 추억 속에 있고 추억은 현실 속에 있다는 이 ‘아……’라는 하나의 감탄사를 통해 이 긴 장편은 마지막 한 줄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아빠와 딸은 손을 맞잡고, 태양을 향해 걸어나갔다.’ 추억이 현실 속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작가는 예수의 산상설교 중 한 구절을 소설 속에서 재해석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 그들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도 저 새 하나를, 저 꽃 하나를 넘지 못하느니라.’
아빠는 가시는 길, 제게 오래도록 읽을 수 있는 소설 하나를 두고 가신 셈입니다. 예수의 산상설교와 태양을 향해 걸어가게 하는 ‘아……’처럼 보라고,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저 새 하나를, 저 꽃 하나를 넘지 못하는 솔로몬의 영광 따위 집어치우고 공중에 나는 새를,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생각하여 보라(considerar)’가 아니라 그저 ‘보라(olhar)’고, 보기라도 하라고 유언을 남기신 거였지요. 소설을 쓰는 일이, 소설을 읽는 일이 지루하고 답답할 때 저는 창 밖을 봅니다. 보기 위해서는 나를 가두었던 방 문을 열고 어디든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내 창 안에 갇혀 있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해 아빠는 내가 볼 수 있게 머리맡에 1년 동안 이 책을 놓아두셨던 거지요.
아빠가 가신 후 다시 쓰여진 소설이 이번에 전태일문학상을 받게 된 『나무에게서 온 편지』(원제는 『패륜아들』)입니다. 3년 동안 쓴 글을 엎어버리고 다시 써야 했지요. 1년 동안 아이와 남편이 잠들면 집을 나서서 카페에 앉아 글을 썼어요. 그리고 아침밥을 지으러 첫 지하철이 움직이는 때에 집으로 돌아왔지요. 새벽 카페에는 밤 동안 여관에도 갈 수 없는 돈 없는 아이들이 죽치고 앉아 개와 좆으로 시작해 좆과 개로 끝나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술꾼들이 해장 대신 커피를 시키고 앉아 잠이 깨기를 기다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낮에 일자리가 없는 학생들이 밤새 카페를 지키고 앉아 새벽 청소를 마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방금 헤어진 애인을 붙잡고 3류 드라마보다 더 통속적인 막장이 펼쳐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직접 보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뭘 쓰지 고민했던 생각들이 낱장으로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 생각들은 버리고 다시 써야 하는 거였지요. 소설보다 현실이 더 참혹한데 도대체 소설을 써서 뭐하나 하는 퇴폐의 생각을 버려야 했어요.
저녁 늦게부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시와 진실』을 찾다가, 새벽까지 책장을 뒤집다가 이사야 벌린에 깔린 괴테를 드디어 찾은 때는 새벽 세 시예요. 뒤집어놓은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한쪽으로 안 보는 책들이 가로로 쌓이게 되더군요. 그런데 역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소설들이었어요. 소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보지 않을 소설을 지어도 되는 걸까 곰곰 생각하는데 아빠가 주고 가신 마라톤 타자기가 보이더군요.
밤과 노란배
남편이 사다놓은 먹끈을 끼우니 글자가 찍혔어요. 백해서 쉽게 지우는 거 말고,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타자와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잠깐 생각했어요. 아직 타자기로 완성한 소설은 무리겠지만, 시는, 편지는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연필에서 타자기로 컴퓨터 자판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던 노동은 힘의 조절이 다릅니다. 생각의 속도도 다르고, 문장이 길어지지도 않아요. 앞 문장을 놓칠까봐 얼른 마침표를 찍게 되거든요. 틀리면 다시 한 장을 갈아 끼우려니까 아주 긴장하게 돼요. 온전히 한 사람에게 몰두하게 되지요. 밤마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처음으로 완성한 편지글은 고등학교 때 만나 지금은 수녀가 된 친구에게 보내는 「밤」이었어요.
“밤은 어쩌다 밤이 되었을까. 새로 산 매트리스 위에 배를 깔고 뒤집어져 두 발바닥을 치며 지난 여름을 보다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밤은 언제부터 밤이었을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생가시에 껍질을 두 겹이나 두르고, 하나보다는 두셋이 꽉 끼어 부둥켜안고 있는 방 한 칸을 왜 굳이 ‘밤’이라고 불렀을까. 가을밤 빗소리가 여름밤을 끌어오는 이유 같은 것이었을까.”
친구에게는 아직 답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밤의 수수께끼를 공유하게 될 겁니다. 두 번째로 보내는 편지는 영월에서 아이들을 이끌고 수학여행을 다녀와야 하는 선생님인 한 선배에게 보내는 「노란배」였어요.
“아침에 아이 학교 보내고 일주일 만에 방청소를 하다가 아이가 그려놓은 툰을 보았지요. 83개의 작은 종이에 그려진 툰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미술시간에 부채를 나눠주신 선생님이 그러셨대요.
―그 안에 너희들이 그리고 싶은 걸 마음대로 그려라!
아이는 아무것도 없는 부채 안에 노란배를 그려넣었대요. 아이들이 노란배가 예쁘다고 했대요. 하지만 그게 세월호라는 건 잘 모르는 것 같았대요. 아이는 배 옆에 글자를 적었대요. 잊지 않겠다고 꾹꾹 눌러 썼대요. 그때서야 반 친구들이 노란배를 알아봤대요.
그런데요, 선생님의 반응은 아이에게 좀 충격이었나봐요. 반 친구들에게 잘 그렸다고 생각하는 그림에 스티커를 붙이라는 한 마디뿐이었다는군요. 잘 그렸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아이는 스티커가 많아질수록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였대요. 몇 마디라도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해주길 바랐나봐요, 아이는.
선생님이 시큰둥하니 점차 친구들도 아이를 좀 별난 애로 보는 것 같았대요. 그게 계속 슬펐대요. 선생님이 한 마디라도 해주지……. 잘 그린 그림보다 우리에게 노란배는 참 슬프다고 한 마디 공감이라도 해주지. 아이는 마지막 종이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를 그려놓았더군요. 교육도 사회의 딱 그만큼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며칠 있으면 아이도 초등학교 마지막 졸업여행을 갑니다. 벌써부터 들떠 있는 아이를 보며 생각합니다.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예쁜 게 어디 있을라고요. 고민은 어른의 몫이고 아이들은 너무 놀아서 지쳐 1분 만에 잠에 빠질 정도로 웃어야지요. 그 웃음도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버티나요. 아이들 데리고 가는 선배의 여정이 무겁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면 좋겠어요.”
타자의 편지
편지를 보내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올해부터 읽기 시작한 중화서국에서 나온 10권짜리 『사기』의 원서를 읽으러 수지에 있는 문탁 네트워크로 가는 날이거든요. 버스는 한강을 지나고, 서울을 벗어나고, 버스 안에서 이탈리아 민화를 펼치고, 큰글씨가 좋고, 첫문장은 확 좋았어요.
"옛날 훼데리코 2세 시절 시칠리아에 니콜라 페셰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물고기라고 불렀습니다."
첫 문장이 좋아 나는 버스 안에서 이렇게 메모해놓았어요.
‘이탈리아 민화도 낯설지만, 최승자 시인의 옛날 번역도 오랜만이지만, 저 물고기 소년이 무슨 용기를 냈을까, 버스에서 내리면 나는 물고기 소년의 용기를 갖을 수도 있겠다. 나는 물고기 이야기가 왜 이렇게 좋을까. 집에 가면 물을 한 잔 마시듯 어느새 밀로라드 파비치의「물고기비늘로 만든 모자」를 찾아 읽고 있을 것이다.’
저는 정말 돌아오는 길에는 물고기 소년의 용기를 갖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민화를 끝까지 다 읽지 못한 채, 『사기』의 130편 중 가장 문학적인 색채가 짙은 「항우본기」의 홍문연 장면을 읽었지요. 사마천이 항우를 본기의 역사에 넣은 것도 흥미롭지만, 이 편의 홍문연 장면은 정말 압권이더군요. 사마천은 이 장면에서 함곡관에 먼저 입성한 유방, 거록대전을 통해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스물둘의 항우, 항우의 막내 작은아버지이지만 친구 장량을 살리기 위해 유방을 떠나라고 비밀을 누설하는 향백, 비밀결사를 단행하기 위해 유방을 처단하라고 계속해서 항우에게 눈짓을 보내는 장량,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번쾌를 등장시킵니다. 홍문연에는 서로를 죽이려는 눈짓과 심리를 숨기려는 칼춤과 서로 이해가 얽혀 있는 갈등과 언제 거사를 단행할지를 엿보는 숨막힘이 감돌지요. 이때 갑자기 등장한 번쾌는 천하의 장수들이 모두 때를 기다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개백정 출신임에도 가장 세련된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번쾌는 이후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이미지로, 평민 출신 영웅호걸의 대명사가 됩니다. 이 장면만으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압축된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 갈등 구조가 무척 세련된 현대극 같았어요. 이후 영화 〈초한지〉가 만들어졌고, 회왕을 죽인 항우를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초나라의 한탄의 노래〔四面楚歌〕는 사랑하는 우미인을 지켜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항우의 ‘해하가(垓下歌)’에 실려 이후 〈패왕별희〉를 낳게 되지요. 돌아오는 길, 나는 버스를 타고 갈 때 적어놓았던 것처럼 물고기 소년의 용기를 얻었을까요? 나는 집에 돌아와 「물고기비늘로 만든 모자」를 찾아 읽는 대신 타자기를 앞에 두고 이렇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이래서 단언을 하면 안 되는 거였어. 물고기 소년의 용기를 갖으려면 바다 속에서 불을 훔쳐와야 하는 거였어.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 속에 불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지. 그러기 위해서 물고기 소년은 불 속에 손을 넣어 불에 데인 자리를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고 했어. 소년은 다시 바다 속으로 뛰어들지. 물 속의 불을 가져오려다 물고기 소년은 세계의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 걸 봤어. 어떻게 했을 것 같니? 그 불을 가져가야 좋아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믿게 할 수 있는데.
여기까지 읽고 나는 항우의 스물둘 청년 모습을 상상했어. 거록전투에서의 대승은 청년을 항왕의 지위로 올려놓지. 항우는 어린시절 진시황의 행차를 본 이후 작은아버지에게 큰소리쳤었어. 저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자신이 대신할 수 있다고. 그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에서 내려와 천하를 경영하는 법은 모르고 있었지. 인재를 모으지도 않았고, 거록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함곡관에 늦게 도착한 것이 실수였다는 것도 몰랐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지. 그런데 정말 몰랐을까? 물고기소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스물둘의 항우가 대왕들의 역사인 본기에 들어간 이유는 그가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더 정확하게는 알아야 한다는 용기가 없었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초나라 회왕을 죽이면서 민심을 잃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항우는 음릉에 사는 보잘것없는 농부에게 자기가 갈 방향을 묻지. 농부는 천하를 호령했던 항우를 놀려먹어. 말도 없이 손가락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거지. 그런데도 항우는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지 전투에서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몇 남지도 않은 병사들에게 소리치지.
반면에 물고기소년은 불을 포기해. 세계의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데 자신이 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무너지고 있는 기둥을 대신해 세계를 받치는 길을 선택해. 포기하는 것이 용기라는 것을 이렇게 단백하게 일러주는 동화도 있구나. 사마천도 그랬을 거야. 성공한 제왕들의 역사만 역사가 아니다. 역사란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우연과 선택과 괜히 미운 눈짓 하나로도 바뀔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아. 농부가 항우에게 다른 길을 알려준 것처럼 말이지. ‘용기’란 이런 것일지도 몰라. 물고기가 숨 쉴 수 있는 물도 아니고, 있을 수 없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물 속의 불도 아니고, ‘본 것을 안 본 것으로 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그것이 세계를 받치는 기둥이고 용기일지도 몰라.
우리는 4.16 이후 무너지고 있는 세계에 살아가고 있어. 얼마 전에 김종철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났어. 선생님 또한 20년 동안 잡지를 만들어왔지만 『녹색평론』 독자 모임에는 처음 나오셨다고 했어. 선생님은 그 첫 만남에서 호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 펼치셨어. 지난 문인 집회에서 낭독된 김해자 시인의 글이라고, 다음호에 실을 거라 원본 그대로 뺏어왔다고 하셨어. 그리고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삶이 거짓말처럼 참혹할 때 죽음이 더 삶답다고, 우리가 공동으로 만든 이 세계는 도처에서 죽음과 오류를 낳을 뿐 생명을 살리는 데 실패했다고, 이것은 명백히 학살이라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죽는 줄도 모르고 스러져간 무고한 생명들 앞에서 희망과 회복을 말하지 말라고, 유일한 위로는 진실이라고, 단 하나, 오직 진실만이 위로가 된다”고 꾹꾹 글자를 눌러 읽으셨지. 물 없는 파도가 일렁였고, 물이 없는데도 불 같은 울음이 터졌어. 진실만이 위로가 된다는 시인의 말을 믿고 싶은 용기가 생기는 거야. 시대의 격문과 같은 곧은 언어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 밀려왔어. 20년간 한 번도 독자모임에 나오지 않으셨다는 김종철 선생님이 직접 독자를 만나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바로 지금, 이 시를 전달해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 생중계로 우리가 만들어놓은 그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되었어. 목격한 것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덮일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다 지켜보아야 했지. 이러한 때에 침묵은 학살자의 무기가 된다고, 울음을 그치고 써야겠어.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칠 수 없어.”
누구에겐지 모르는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이 참혹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본 것들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우리가 본 것들을 안 본 것으로 할 수 없다고, 나는 타자기의 자판을 꾹꾹 눌렀습니다. 부디 당신에게도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문학사상> 201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