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가는 길
-이야기가 있는 풍경
가령 아주 먼 곳을 땅이라고 하지 않고 얼음이라고 해본다. 술래가 나를 잡으려고 할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이 모두 얼음일 때,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하다 술래의 손끝이 내 몸에 닿기 전, 구원자임을 포기해야 하는 찰라, 그때를 아주 먼 곳, “얼음”이라고 발음해본다. 땅은 어쩌면 땡에서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춥고 척박한 땅을 우리는 얼음이라고 배웠다. 얼음의 땅에 씨앗을 심으려면 여름을 훔쳐 와야 하고 여름을 여름답게 하려면 겨울이 필요하다는 균형감을 이야기를 통해 전달해내는 어른들이 있는 땅. 가령 그곳을 숲이라고 발음한다면 그 숲은 얼마나 오래되고 깊을까.
올 봄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같은 길을 지나갔다. 갈 때는 성수역에서 신설동행 전철을 갈아타고 오른쪽 문에 기대어 중랑천에 부서지는 저녁 햇살을 바라보았다. 지하철 2호선의 창에는 저녁의 풍경이 걸려 있었다. 아차산이 있고, 중랑천이 있으며 여러 방향의 철로가 뻗어 있는 지하철의 집, 차량기지도 있다. 성수에서 신설동을 왔다갔다하는 이 구간을 지날 때면 파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 구간에서는 앉아 있기 지겨워질 때까지 책을 보거나 헤어진 옛 애인을 생각해도 좋고, 해결하지 못한 고민들을 짚어보아도 좋다. 전철은 신설동에서 후진해 어느새 출발한 곳으로 다시 와 있을 테니 말이다. 자정이 넘으면 2호선 전철은 기지로 들어와 쉰다. 그 철로가 반짝이는 여러 물결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신설동에서 내려 1호선을 갈아타고 두 정거장을 더 가서 예전엔 언덕이었던 곳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창신동 골목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길에서 몇 달 동안 글을 쓰고 싶어하는 분들을 만났다. 지역 분들을 대상으로 전태일재단에서 준비한 글쓰기 강좌였다. 총 8강을 통해 한 편의 글을 완성해보는〈내 삶의 글쓰기〉 첫 날은 각자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를 꺼내놓는 날이었다. 둘째 날은 쓰고 싶은 그것을 한 문단이라도 써서 쓴 글을 낭독하는 날이었다. 셋째 날은 두 번째 문단으로 넘어가고, 넷째 날은 글의 목소리를 집어넣고, 다섯째 날은 써야 할 것들보다 쓰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가지치고, 여섯째 날은 글의 마무리로 정말 쓰고 싶은 글을 썼는지, 다 쓰지 못한 말들은 행간에 남겨 두었는지를 살폈으며, 일곱째 날은 지금까지 쓴 글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지,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첫날 스무 명이 넘는 수강생들은 점점 줄어들어 10여 명이 되었고, 마지막 날에는 여덟 분이 각자 생의 첫 글을 한 편씩 완성했다.
그중 당신은 글을 잘 쓰는 것은 필요 없다, 다만 살면서 늘 뭔가를 쓰고 싶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왔다고 고백한 한 분은 매일 조금씩 노트에 쓴 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손자에게 “느그집 시원하냐?”고 묻다가 덜컥 에어컨을 할부로 사버린 할머니인 당신의 이야기. 이분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듣는 분이었다. 다른 분들이 창신동에 대한 글을 발표할 때, 이분은 결혼하고 미싱 일을 하며 30여 년 살았던 제2의 고향인 창신동 윗동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창신동 꼭대기에는 조기 말리는 할마시들이 많았어요. 집집마다 조기를 사다가 말려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조기팔이를 했는데 그게 돈이 좀 됐거든요. 창신동 언덕이 조기 말리기에 좋았던 것 같아요. 이분들은 낮에는 조기를 팔고 밤이면 잣을 깠는데 깐 잣을 잣공장에 가져다주는 부업도 했어요. 이건 봉투붙이기보다 수입이 더 좋아서 윗동네 사람들만 비밀로 하던 부업이었어요.”
이분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전철에서 내려 시장 골목으로 이어지는 창신동 꼭대기 집들이 이전처럼 그냥 집만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 묻어두었던 어릴 적 살았던 동네에 왔던 조기팔이 할머니도 되살아났다. 잣 껍데기를 깔고 조기를 말리는 언덕의 풍경도 그려졌다. 어느새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시간, 추억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골목마다 증기를 내뿜으며 문을 열어놓은 가내수공업 공장들이 있고, 창문을 열면 들리는 미싱 돌아가는 소리들과 그 사이를 조기 바구니를 이고 내려왔을 윗동네 사람들. 잣을 깐다는 걸 숨기던 첩보와 같은 정보들을 공유하던 동네의 마당들. 동네의 풍경에 이야기가 들어오니 그분의 글도, 창신동이라는 동네의 풍경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글이란 이런 숨어 있는 기억들, 조각들이 시간을 넘어 종이 위에 집을 짓고 사라진 사람들을 불러와 이야기를 나누는 길이 아닐까.
이누이트들은 자신들을 ‘이누이트’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누이트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이다.” 얼마나 투박한 단어인가. 얼마나 넓은 단어인가. 얼마나 깊은 단어인가. 그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이야기라고 한다. 사람들의 작은 무리가 흩어져 살아가다 한 해가 지나기 전 흩어졌던 강줄기로 다시 모이는 때, 그들은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다른 영토의 사위와 딸들이 돌아오고, 아들과 손자들이 돌아오고, 딸들과 어머니들이 모여 자신들이 보고 겪은 이야기를 전달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털실 삼아 모자를 짜듯 이야기를 엮어서 들려준다고 한다.
레미 사바르의 『살아 있는 숲』에는 하늘이 내린 고아 차카페슈가 사냥꾼의 생활을 접고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하늘다리(은하수)를 만들어 달이 된 이야기, 버려진 아이가 미스타페우 할아버지를 만나 울음으로 여름사냥을 독려하는 이야기, 여름의 끝에 흩어진 가족들이 만나 이야기를 만드는 축제 우에파타우취히카트, 여름아이들과 겨울아이들이 나누어 힘자랑을 하는 이야기, 늙은 부모를 버리자 늙은이가 점차로 젊어져 손녀를 아내로 삼았으나 말라빠진 고추와 다 빠진 이빨 때문에 들통이 나는 심술 맞은 이야기, 하늘로 올라간 동생이 누나를 먼저 올라가라고 하고 밑에서 치마 속을 훔쳐보는 이야기, 하루라도 빨리 축제에 참석하고 싶어 어린 아이를 양말도 안 신기고 얼음 땅에 버리고 도망치는 부모 이야기, 여름을 훔치고 달아나다 여름 무리에게 잡혀 겨울을 나눠주고 여름을 얻기 위해 딱따구리의 발가락을 보고 여름을 여섯 달로 정한 이야기, 버려진 아이의 피를 빨아먹는 머릿니를 모두 잡지 않고 머릿니 가족인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서캐까지 다섯 개는 남겨놓은 이야기들이 있다. 언젠가 얼음의 땅에 숲이 사라지더라도 이야기가 있으면 숲은 되살아날 수 있다는 듯 이야기는 이야기를 통해 자라고 퍼진다. 이야기의 숲은 얼음의 땅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존재방식인 것이다.
강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글을 쓰고 싶어할까를 생각하다 가방 속의 책을 뒤적였다. 책 속의 이야기와 단어들을 따라 발음해본다. 가령 봄을 봄이라고 하지 않고 ‘쉬쿠안’이라고 해본다. 여름을 여름이라고 하지 않고 ‘니핀’이라고 해본다. 가을을 가을이라고 하지 않고 ‘타쿠아췬’이라고 해본다. 겨울을 겨울이라 하지 않고 ‘피푼’이라고 해본다. 아프리카 어느 곳에 열세 번째 달이 있듯 피푼과 타쿠아췬 사이 초록이 돌아오는 다섯 번째 계절 ‘미니슈카마우’를 넣어본다. 타쿠아췬과 피푼 사이에는 초록이 돌아가는 여섯 번째 계절 ‘피취피푼’을 넣어본다. 꽃을 ‘우아피쿤’이라고 해본다. 이제 아주 먼 나라의 깊은 단어들을 천천히 발음해본다.
저녁이 부서지던 강물에 달빛이 닿고 어둠이 내리는 동안 창신동으로 가고 오는 이 길에는 얼마나 간절한 이야기들이 쌓였던가. 한 번도 꺼내놓지 못한 그 이야기들이 글이 되던 순간 수강자들은 얼마나 놀라워했던가. 풍경은 풍경에만 있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와 단어들을 통해 더 깊어진다. 그것이 사람들이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풍경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으므로, 추억이 있으므로 그것을 풀어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창신동에서 돌아오는 길은 덥고 습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분들의 목소리는 이미 하나의 의미이며 삶의 표현이 되었다. 이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야기가 없는 풍경은 그림일 뿐, 그곳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미고 시간이 쌓이면 철거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이야기의 숲이 된다. 살아 있는 숲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만든다고.(<작은책> 2018. 9월호)
<사진 1> 창신동으로 가는 길
<사진 2> 창신동 골목
<사진 3> 살아 있는 숲, 레미 사바르(검둥소, 2008)
<사진 4, 5> 수강자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