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박일환 시인을 모르던 시절에 아이는 초등학생이었어요. 겨울날 방바닥에 누워 둘이 같이 발바닥을 부비며 읽던 동시집이 있었어요. 아이가 한 편을 읽으면(동화책에 나오는 마귀할멈들아,/우리 집에 빗자루 많다./엄마 몰래 와서/다 타고 가 버려라.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다음은 내가 아무 곳이나 펼쳐 읽고(엄마 차 타고 가는데/갑자기/택시가 옆에서 끼어들자/엄마가 욕을 했다./나도 옆에서/한마디 거들었더니/엄마 얼굴이 굳어졌다./“그런 말 하면 못써./어른에게 저 새끼가 뭐야?”/시무룩한 표정으로/“저 택시라고 한 건데…”/순간,/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그 다음은 아이가 읽고.
-나도 그런 적 있는데. 내가 할머니랑 전화하면서 고향이 어쩌구 하니까 네가 끼어들어서 “할머니, 엄마가 고양이 키우면 안 된대요” 하고 일렀었어.
-이씨, 내가 고향이랑 고양이도 모르냐.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러다 둘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말장난하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박일환 시인의 동시집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창비, 2013)은 그렇게 겨울날 이불장난하며 펼쳐본 추억의 책이 되었지요.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박일환 시인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한테 자랑하듯 말했던 기억도 나요.
-나, 그 시인 만났다. 그 저새끼 시인 있잖아.
-ㅋㅋ 그새끼.
또 한참을 낄낄거리며 그때는 『학교는 입이 크다』(한티재, 2014)를 펼쳐 책놀이를 했었지요. 그러다 아이도 크면서 내 책상에 있던 『바다로 간 별들』(우리학교, 2017)과 『덮지 못한 출석부』(나라말, 2017)는 내가 읽기도 전에 아이가 가져갔고, 아이도 그만큼 자라 세월호의 아이들을, 진도 앞바다에서 부르는 출석부를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동시를 읽던 아이가 소설을, 아픈 시들을 읽어나가는 나이가 된 거지요.
올해 고등학생이 되고 학기 초에 아이는 자율동아리를 하나 만들었어요. ‘씀’이라는 이름의 동아리인데 말 그대로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는 동아리예요. 가끔 내게 조언을 구하면 책을 소개해주곤 했는데 그것 말고도 아이들이 선정한 책들이 어마무시하더군요. 어느 날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읽는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읽겠다고 덤비다가, 가을이 시작될 땐 랭보도 읽고 이상도 읽더군요. 책도 읽고 소설도 쓰고 시도 쓴다고는 했지만 뭐 대충 하겠거니 했는데, 어느 날은 쉬운 시론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이 책을 주었지요. 주면서 “이 선생님이 처음 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학생들이랑 눈도 못 마주쳤대. 그래서 창밖만 보며 수업하곤 했는데 그러다 만난 학생이 지금은 출판사를 차려서 거기에서 첫 책으로 이 책을 냈다네. 재밌지?” 뭐 이런 에피소드도 들려주었지요.
-엇, 이 선생님은 빗자루, 출석부 맞지?
아이는 시인의 이름을 책으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아이는 이렇게 선생님의 동시집과 소설과 시집과 이번에는 『청소년을 위한 시쓰기 공부』(지노, 2018)를 보며 초등학생을 지나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 말로는 다른 시론집을 하나 보았는데 이 책이 동아리 친구들이 같이 읽기에 힘들지 않고 시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어서 좋았대요. 그리고 그 동아리는 1년을 마무리하며 자율동아리 대상을 받았다는 훈훈한 자랑질을 합니다. ^^ 다 같이 1년 동안 한달에 두 번씩 모여 좌충우돌 책을 찾고 읽고 수다 떨고 그걸 글로 쓴 결과물이 선생님들이 보기에도 흐뭇했던 모양이에요. 일환 선생님, 선생님의 책들이 아이를 이만큼 키웠답니다. 여섯 명이 같이 받은 상이어서 아주 즐겁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