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아 2006-09-06
아프지 마세요 외경읽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위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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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제게 주신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어찌 제 마음을 이리 잘 아실까 싶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거나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라 모르고 맙니다. 제 세포 하나하나가, 제 눈물들이, 제 꿈조차 그렇다고 하면 그때 끄덕이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들은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편안해 집니다. 살아 있는 것들 속에는 저도 있으니까요. 저도 누군가에게 제가 가진 여백을 더해 여백을 남길까요? 어쩌면 잊혀지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잊는 것도 어려운데, 타인이 날 잊는 것을 어찌할 수 있을까요? 큰언니 꿈에 나타난 작은 언니가, 이누아가 내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어, 라고 했다고. 슬플 때 슬퍼하지 않으면 병이 됩니다. 슬픔이 지나치면 병이 되듯이. 슬퍼하세요.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너무 아파하면 사라진 사람은 잊혀지고 싶나 봅니다. 아프지 마세요, 수녀님도 잊혀지고 싶지 않게. 텅 빈 자리가 생기고, 거기에서 슬픔이 쏟아지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쓸쓸함이 남습니다. 그저 여백이 하나 남는 것이겠지요. 아프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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