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지중해식이라니, 이름 한번 거창하다.
하지만 별 거 아니다. 이름은 그냥 요새 트렌드에 맞춰 내가 지어낸 것 뿐.

요새 야채를 별로 못 먹은 것 같다고 투덜댔더니 엄마가 작정하고 야채를 이것저것 한 꾸러미 사오셨다. 그리고 무조건 오븐에 구워 먹어야 한단다. 그럼 구워야지 뭐. 내가 힘 있나.
애호박, 초록 피망, 빨간 파프리카, 양송이, 가지, 당근, 양파 등을 적당한 크기(참 난해한 단어다. 하지만 말 그래도 '적당한' 크기로 썰면 된다. 오븐에서 구웠을 때 너무 타거나 너무 설익지 않을 것 같은 정도의 크기)로 썬다.
알루미늄 호일을 깐 오븐팬에 야채를 푸짐하게 담아 넓게 펴주고 소금, 후추를 약간 뿌리고 이탈리안 드레싱을 듬뿍 뿌린 후, 손으로 휘적휘적 저어 양념이 모든 야채에 고루 묻도록 한다. (고루 묻지 않아도 큰 지장은 없다)
오븐을 200도(어제 사실 150도에서 시작했다가 180도로 200도로 계속 높여갔다) 정도로 예열한 후 야채를 넣고 30분 이상 충분히 굽는다(또 난해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충분히'. 젠장 한국어란.. 야채가 노릇노릇 맛있어 보이고 씹어서 맛난 즙이 배어 나올 정도면 '충분히' 구워진 것이다). 사실 원래 예정은 파프리카와 피망을 까~맣게 태운 후 껍질을 벗기고 달콤한 속살만 먹는다..였는데, 그 지경이 되도록 구우려면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아서 중도에 포기했다. 아, 그리고 지중해 삘을 내기 위해 우리 집에 생존해 있는 유일한 허브(다른 건 다 아빠가 말려 죽였다)인 로즈마리 잎을 뚝뚝 잘라 야채 위에 뿌려 함께 구웠다.

야채가 구워지는 동안 그릴에서는 고기를 구웠다.
부위는 잘 모르겠지만 얇게 펴서 칼집을 송송 넣은 돼지고기였다. 물론 양파와 마늘을 듬뿍 곁들여 같이 굽는 건 필수. 고기가 얇으니까 금세 잘 익어 좋았고, 양파와 마늘도 약간 탄 듯하면서 너무 맛나게 구워져 어제의 하이라이트를 이루었다.
게다가 아래 오븐에서 구워지던 로즈마리 향기가 그릴 쪽으로 뻗어 올라와 돼지고기가 완전히 허브 돼지가 되어버렸다. (향이 다 위로만 올라가서 그런지 야채에선 거의 로즈마리 향을 맡을 수 없었지만)
고기와 마늘, 양파 + 노릇하게 구워진 각종 야채들 + 빵굼터의 감자빵 + 집에서 담근 모과주
훌륭한 조합이었고 냄새 또한 끝내줬다. 퇴근하던 동생이 군침을 한 바가지나 흘릴 정도로. 하지만 다이어트 중이라며 절대 저녁을 먹지 않는, 답지 않은 독한 면모를 과시했다. -_-

거기까진 아주 좋았는데, 한껏 고무된 엄마가 다음날 반찬이라며 고등어를 그릴에서 굽기 시작했다. 생선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지만, 뭐 늘 있는 일이니까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갑자기 오븐 뒤쪽에서 치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 헉뜨! 급히 그릴을 열어보니 배어나온 고등어 기름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 마이 가뜨! 입으로 불어 끄려 했으나 화재 현장 규모가 만만치 않아 오히려 더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애처로이 엄마를 불러대니, 출동한 엄마 소방대원. 나보다 훨씬 강한 입김을 동원하여 후후 불어 끄셨다. 역시, 엄마는 장하시다. -_-
덕분에 생선 탄내가 온 집안에 배어 이것은 거의...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엄마와 나의 역작 덕분에 온 집안에 향긋하게 감돌던 냄새는 생선 비린내와 탄내 때문에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져 버리고, 어제 기온도 떨어져 쌀쌀한 와중에 온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열어제껴줘야 했다.
그래도 그 고등어, 오늘 먹어보니 어찌나 잘 구워졌던지.. 엄마랑 연신 '야, 이게 바로 고갈비다, 고갈비'라면서 어제의 악몽은 씻은 듯이 잊고 마구 손에 들고 뜯어댔다.

요새 쫌 요리 삘인데, 이럴 때 이것저것 해줘야 하는데..
근데 여전히 겔름병이 도를 더해가고 있어 무리인 듯도 싶다.
생강빵이나 생강과자는 꼭 구워 먹고 싶은데.. 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