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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ㅣ 살림지식총서 168
김성곤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평점 :
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사춘기였을 때 책<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더라면 사춘기 시절을 한결 쉽게 보냈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책<호밀밭의 파수꾼>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체 어떤 책일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남들은 10대에 읽는다는 책을 나는 2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읽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 달리 이 책은 나에게 전혀 흥미롭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그저 유명한 책이라니까 끝까지 읽기위해 겨우겨우 책장을
넘겼을 뿐이었다.
다 읽은 후에도 나에게는 큰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다.
내 지성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왜 이 책이 왜 사춘기 시절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전에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쓴 독서일기를 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왜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다시 읽히며 회자되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이런 나에게 우연찮게 읽게 된 이
책<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책<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이 책을 쓴 작가가 겪었던 시대적 배경과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저 한 편의 소설책으로만 읽었던 나에게 이 책은
책<호밀밭의 파수꾼>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의미를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해보게도
해주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샐린저는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의 입을 빌어,
“정말로 내가 감동하는 책은 말이야.
다 읽고 난 뒤에 그걸 쓴 작가가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란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주는 책은 좀처럼
없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 어느 독자의 접근도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패러독스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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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p6 중에서 -
얼마 전 개봉되어 화제를 뿌렸던 영화<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가 샐린저를 모델로 했다는 세간의
추측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샐린저 역시 포레스터처럼 가짜가 판치는 저속한 세상이
싫어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은둔을 택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포레스터는 우연히 만난 흑인소년을 통해 다시
현실세계로 나오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창작기법을 전수해준다.
그러나 샐린저는 세상과 괴리된 채,
여전히 칩거와 은둔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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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p6 중에서 -
1950년은 드디어 샐러저의 작품이 영화회된 해였다.
그가 <뉴요커>지에 발표했던 <코네티컷의 엉클 위글리 Uncle
Wigglily in Connecticut>가
새뮈얼 골드윈 사에 의해 <나의 어리석은 마음 My
Foolish Heart>라는 제목으로
영화회되었고,
주연으로는 당시 인기 여배우였던 수전 헤이워드나 다나
앤드류스가 출연했다.
그러나 자신의 원작을 크게 훼손했다고 생각한 샐린저는
이후 영화를 싫어하게 되고,
헐리우드와 모든 인연을 끊게 된다.
포크너의 <소음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율 브리너
주연)나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 Seize
the day>(로빈 윌리엄스
주연)
같은 작품도 영화화되었는데,
유독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영화화되지 못한 이유도 샐린저가 영화사에 판권을 넘겨주는 것을 일절 거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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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p34 중에서 -
전문가적인 시각으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가 J.D.
샐린저와 그가 쓴 책<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설명을 보다보니 나는 이 말이 생각났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내가 그저 한 편의 소설로만 읽었던 책에 담긴 다양한
의미들은 내가 책<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한 번 읽었던 책을 웬만해서는 다시 찾아보는 편은
아닌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책<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제목의 책이라도 출판사마다 번역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번역이 보다 잘 되어 있는 번역서를 잘 골라서 다시 읽어봐야지 싶다.
원서로 읽고 작가의 의도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원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려울
듯싶으니 말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다양한 해석이 작가에게 검증을 거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가로부터 보다 심도 있고 명확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이 책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책<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샐린저는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부가적인 설명이나 해석을 전혀 곁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며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 듯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오히려 사람들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작가가 정말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을까 싶은 생각은
든다.
분명 작가가 작품을 쓸 때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려
써내려가기는 했을 테지만 말이다.
어쩌면 작가 샐리저는 자신이 작품에 담은 의도나 의미는
분명하나,
그 해석만큼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 재해석되는
것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생각 또한 내비치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 책에서는 샐린저가 그의 작품이 영화화 되면서 자신의
작품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시키기 못하게 막았다고 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같은 것을 보더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같은 사람이 보더라도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끼기 마련이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도 해석을 다를 수밖에 없고
말이다.
책<호밀밭의 파수꾼>을 정치적인 시각으로 볼 때,
사회적인 시각으로 볼 때,
문학적인 시각으로 볼 때 분명 각기 나름의 다른 해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책<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때,
이 책이 갖고 있던 시대와 상황 모든 것을 배재한 채
그저 한 권의 소설로만 봤을 때 흥미로움을 전혀 느끼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책에 담긴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쓰여졌던 시대와 상황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여지는
잠깐의 행동이 아닌 그 사람의 출생과 성장과정까지도 알고 받아들어야 하는 것처럼,
책도 책이 쓰여졌던 시대와 책을 쓴 작가가 갖고 있던
상황에 대해서도 알고 받아들였을 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가벼운 만남으로 여기고
쉽게 지나쳐버렸던 책<호밀밭의 파수꾼>과 깊이 있는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었는데,
번역본마다 제목이 다르게 붙는 이변을
불러왔다.
예컨대 이태리어 번역은 <한 남자의 인생>이었고,
일본어판의 제목은 <인생의 위험한 순간들>이었으며,
노르웨이 번역본은 <모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악마는 최후 순간을 취한다>였다.
또 스웨덴판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구원자>였고,
덴마크판은 <추방당한 젊은이>였으며,
프랑스판은 <마음의 파수꾼>이었다.
독일어판은 <호밀밭의 남자>였고 네덜란드판은 처음에는 <고독한 방랑자>였다가 나중에는 <사춘기>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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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p36 중에서 -
그러나 이 소설은 신경쇠약에 걸린 홀든이 캘리포니아의 어느 요양소에서 정신과
의사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를 포기하고 결국 서부로 떠나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가 아이들의 ‘순진성’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지키거나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오염된 채 어른들의 경험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지적 편력은 궁극적으로 순진성으로부터 지식과
경험의 세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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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p56 중에서 -
- 연필과 지우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