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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두 아기의 보라카이 힐링 여행
한민숙 지음 / 여행마인드(TBJ여행정론) / 2012년 12월
평점 :
언제가 가 볼 나라 중에 필리핀을 꼽고는 있었지만, 보라카이를 가고 싶은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보라카이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지만, 갈 때 즈음 찾아보면 되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바로 꺼내 보게 되었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엄마와 두 아기’라는 글자였다. 나도 가게 된다면 두 아이와 함께일 텐데, 장소야 어디든 간에 두 아기와 함께 여행을 한 엄마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조금만 읽어야지 하며 든 이 책을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요즘은 이런 여행 책자 뿐 아니라, 인터넷 상으로도 많은 여행기를 읽어볼 수가 있다. 그것이 종이로 된 책으로 되어 있든 인터넷 상에 있는 글이든 간에, 그것은 개인적인 여행기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씩 아이와 함께 한 여행기를 보다보면 좋았던 점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며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읽는 입장에서 보면 과시용으로 보여 지는 글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겪게 되는 희로애락을 담백하게 써내려가고 있었다. 여행 자체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과감했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온종일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졸졸 따라다니는 두 아이들 때문에 하루 24시간 중 단 한 시간도 온전히 나를 위해 내어줄 수 없는, 혼자서 동네 슈퍼마켓에 과자 한 봉지 사러 가는 것조차 큰마음 먹고 나서야 하는 그런 처지인 걸.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지금껏 나에게 제대로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면 의례히 아이를 갖는 것이고, 그저 막연히 “우리 사랑의 결정체는 참 예쁠 거야!”라는 기대를 하며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나갔던 것뿐이었다. 물론 우리가 낳은 아이는 참 예뻤다. 그러나 항상 예쁘진 않았다.
오히려 순간순간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기 위해선 늘 끊임없는 희생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30여 년간 쌓아온 ‘나’란 존재를 무수히 지우고 또 지워야만 했다.
일단 시작한 이상, 아이가 없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둘째를 임신하고선 내 손으로 직접 두 아이 모두를 잘 키워보겠단 심정으로 다니던 직장을 쉬고는 아예 집에 들어앉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음처럼 쉽진 않았다. 어린 아이는 틈만 나면 젖을 찾아 빽빽 울어댔고,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큰 아이는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불안하고도 복잡한 감정들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늘 잠이 부족하고 피곤했던 나는 두통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모름지기 엄마는 강해야 한다지만, 피로에 쪄든 나는 몸도 마음도 점점 무기력해져만 갔다.
<엄마와 두 아기의 보라카이 힐링 여행> p5 중에서 -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도 되기도 전에 나는 이 책에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혔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토로는 나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많은 것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래도 더 이상 내려놓을 것이 없을 때가 왔을 때, 나도 나를 세상에서 내려놓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더 이상 내 삶이 없는 이 세상에서 왜 이렇게 힘겹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살다 죽을 거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다 매한가지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살 거 그냥 삶을 내려놓으면 편할 것만 같았다. 근데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아무리 못난 엄마라도 아이들에게 엄마는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새 엄마를 만난다 해도 새 엄마는 새 엄마일 뿐 절대 친 엄마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그냥 못난 엄마로라도 아이들 곁에 있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버텼다.
그러면서 다들 이렇게 사나 싶었다. 왜 유독 나만 이렇게 힘들까 싶었다. 왜 이렇게 나만 힘들어 죽을 것 같고, 답답해 미칠 것 같을까. 내가 다른 아기 엄마들에 비해 조금 힘든 상황이기는 하지만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엄마들도 분명 있으니, 아무리 힘들다 한들 나만 너무 힘들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은 또 아니다. 그렇다보니 내가 이상한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나만 힘든 게 아니야. 육아란 게 원래 힘든 거야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난 늘 지쳐 찌들어만 갔고, 대화상대가 없어 늘 외로웠다. 양복을 쫙 차려입고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은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 같아 보이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펑퍼짐한 몸매에 죽죽 늘어진 싸구려 티 쪼가리... 영락없는 아줌마의 모습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며 때로는 혼자 한숨짓고, 혼자 눈물 흘린 적도 많았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눈물마저 말랐는지, 웬만한 것엔 눈물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엄마와 두 아기의 보라카이 힐링 여행> p272 중에서 -
그렇게 위로 받은 뒤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 읽을수록 참 대단하다 싶었다. 나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두 아이들을 데리고는 동네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데, 이 엄마는 혼자 두 아이들을 데리고 15일 동안 보라카이에서 지내다 왔다니. 두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 타는 것도 힘든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여행은 고생을 해야 제 맛이라지만, 난 개고생을 하면서까지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이미 충분히 힘드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얼마나 답답했으면,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찡했다. 곁에 있다면 손 한번 잡아주고, 등 한 번 쓸어 내려주고 싶었다. ‘힘들지요’라고 말하며...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다. 똑같이 두 아이를 키운다 해도 그 힘겨움은 각기 다르다. 아이들의 나이에 따라, 아이들의 성별에 따라, 아이들의 성격에 따라, 아이들의 터울에 따라 말이다. 거기에 신랑의 출퇴근 시간과 주변에 부모님의 거주여부에 따라서도 아주 큰 차이가 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힘겨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하지만 아기 엄마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엄마들끼리 공감하게 되는 힘겨움이 있다. 친한 엄마들끼리 나눌 수 있는 솔직한 힘겨움. 이 책이 엄마인 나에게 큰 공감을 주는 이유도 솔직한 육아의 힘겨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경치 좋고 아름다운 곳에서의 생활이란... 우린 이것이 부러워 이곳으로 여행을 왔지만, 이 생활도 일 년 365일 반복된다면 그 또한 마냥 즐겁고 아름답기만 할까?’
여 사장의 다소 우울해 보이는 얼굴 이면에 깃든 사연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지켜워 이곳으로 떠나왔지만, 그들은 이곳의 생활이 지겨우면 한국으로 간다는 그녀의 말이 내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결국 사람은 어떤 것에도 100% 만족하지 못하며 늘 현재와는 다른 모습의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두 아기의 보라카이 힐링 여행> p319 중에서 -
또한 그가 말한 내용이 지금의 나의 심정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으로 여행을 오기 전, 한국에서의 나의 모습과는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늘 똑같은 일상, ‘나’라는 존재는 철저히 배제당한, 아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루, 함께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이 늘 외롭고 힘들기만 했던 나날들... 그때마다 남편이 나를 조금이라도 더 보듬어주길 바랬지만(그래, 좋은 남편인 거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함께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엄마와 두 아기의 보라카이 힐링 여행> p325 중에서 -
엄마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내 삶을 다 내려놔야 하는 것인 줄 알았더라면 난 과연 엄마가 되었을까. 나이가 들면 결혼, 출산, 육아를 거쳐 엄마라는 이름을 당연히 가져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요즘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닌 선택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이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여겼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가끔씩 많이 외롭고, 괴롭고, 힘들고, 지친다. 그냥 뛰쳐나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동안 난 내가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 책은 나에게 보라카이 여행책자가 아니라, 두 아이 엄마의 에세이였다. 꼭 내가 미쳤나 싶었을 때 의사가 와서 ‘당신은 미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웃는 엄마와 화난 엄마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갔다 하면서 이러다 내가 미치는 거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나이 때의 기억은 크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돈 아깝게 뭐하려 데려가? 그 돈 모았다가 더 크면 데려가지...”
그러나 감히, 나는 그러한 주장에 반박하고 싶다. 어른들 눈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조금도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이겠지만, 아이들이 경험한 모든 것은 아이들의 일부가 되어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을수록 아이들의 가슴 속은 아름다움으로 가득찰 것이라고...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시야를 더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혹 어른이 되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을 쏟아주면 그것이 곧 아이의 정서와 인격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어 아이들을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와주리라 믿는다.
우리가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그 모든 것은 아이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아이들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해줄 거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엄마와 두 아기의 보라카이 힐링 여행> p476 중에서 -
내 자신이 위로받고 나자, 나도 아이들에게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생겨났다. 그렇지만 그 마음이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떠날 정도는 아니었다. 신랑이랑 같이 라면 모를까, 혼자서는 더더욱. 한 번 그럴까 싶다가도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다보면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가 버리곤 했다. 아이들은 해외여행을 가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가격대비로 본다면 아직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에 나가는 것에 조금 회의적이다.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게 해주는 게 좋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만 말이다. 아직 국내 여행도 아이들을 데리고는 멀리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국내부터 시작해야지 싶다. 그러다 정말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생긴다면, 아이들과도 해외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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