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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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이 읽고 싶었다. 읽어야 할 책들이 정해져 있고, 이어지는 일에 치이다 보니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꺼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읽고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가 생각이 났고, 마침 신간이 출간된 터라 동네 서점에 문의를 해 보았지만 없었다. 책이란 게 당장 읽고 싶을 때 펼치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치는 법이라(저자의 신간을 구입해놓곤 아직도 읽지 않고 있다), 동네서점에 주문을 해 놓고 돌아오는 길에 책장을 살펴보았다. 아직 읽지 않은 저자의 책이 세 권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두꺼운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일본문학이 낯설었던 20대에 저자의 작품 중에서 나름대로 가장 좋았던『암리타』와 두께와 분위기가 닮아 있다는 이유로 꺼내들었는데, 두 호흡 만에 읽을 정도로 오랜만에 저자만의 분위기에 함몰되었다.


개인적으로 저자를 완전히 좋아하게 된 작품은『막다른 골목의 추억』때부터였다. 저자의 여러 작품을 만나왔지만 이 작품이 발판이 되어 작품 속의 본질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죽음이 등장하고, 죽음은 삶 가까이에 산재해 있는데 먼 얘기라 치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알려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나 보여 이후 출간되는 저자의 작품을 무조건 읽겠노라 다짐했다.『서커스 나이트』도 그런 느낌의 연장선이라 달게 읽었는지도 모른다.


호빵맨처럼, 사람이란 결혼하면 남편과 몸을 나누고,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와도 자신의 일부를 연결해서 살아가는 거네. 60쪽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멀리 두지 않는 저자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인식의 차이도 곧잘 허물어버리는 내용들을 만날 수 있다. 가령 남편과 사별 후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주택의 2층에서 딸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사야카에게 전 남자친구 이치로의 편지가 도착하는 소설의 시작 부분이 그렇다. 시부모님 앞으로 온 편지를 우연히 사야카가 먼저 읽게 되지만 편지의 목적이란 것도 ‘그 집 마당의 담장 밑에 소중한 것을 묻었으니 가능하면 되찾아 오라’는 어머님의 유언에 따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소설을 많이 읽어 온 독자라면 이후에 이어질 몇 가지 막장을 떠올릴 수도 있고,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피로한 몇몇 장면들이 연출될 거라 짐작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저자는 그런 피로함과 막장(?)의 추측을 과감히 깨버리고, 감정의 섬세함과 거리낌 없는 솔직함에 뻔하디뻔한 인식의 벽을 만들지 않는다.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고집과 착각이 있고, 그것에 얼마나 얽매여 있는지는 편견이 없는 사람을 접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법이죠. 150쪽

사야카가 시어머니에게 이 편지에 대해 바로 알리고, 이치로를 만나 담장 밑에 묻힌 소중한 것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직접 파내 이치로에게 전달하고, 그 모든 과정을 시어머니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고민하며 더불어 사야카와 이치로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말하는 모습에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많은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예의는 갖추되 가식 없는 인물들을 보며 우리는 때로 마음속에 담긴 말 한마디를 아무런 목적 없이 있는 그대로 뱉어내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 곁에 있어 달라는 말 등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 수많은 벽을 치느라 피로함에 오히려 반대로 뱉어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 주위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나쁘지만,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틀린 거야.

272~273쪽

말에 스스럼이 없는 인물들은 그렇게 말에 걸리지 않고, 끊겼던 시간과 과거의 일을 통해 현재를 더 빛나게,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야카가 이치로의 가족을 구하다 굽어버린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담장 밑에 묻혀 있던 것도 다시 제대로 묻고, 이치로와의 만남도, 사야카의 고향 같은 발리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준 이다 씨에게 ‘이 손이 오래도록 잘 움직이지 않은 것은 슬픔 탓이었어.’ 라는 말을 듣고 사야카가 이제는 마음껏 걱정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슬픔을 이겨냈음을 확인 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사야카의 말처럼 애당초 담장 밑에 소중히 묻혀 있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만남과 치유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치로는 어머니를, 사야카는 부모님과 남편 사토루를, 사야카의 딸 미치루는 아빠를 잃은 사람들이 함께 뭉쳐 있던 발리에서의 모습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뭉클했다. 과거의 남편이었고 미치루의 아빠이며 시부모님께 소중한 아들이었던 사토루를 기억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응원해주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슬픔을 이렇게 기억되고,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별 것 아닌 것에 아등바등했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부끄럽기도 했다. ‘나를 인간으로 대해 주는 사람과 있어야 해요.’ 라고 말했던 이치로의 전 여자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어쩌면 삶의 목적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가 전부가 아닐까? 이 소설속의 모든 솔직함과 낯섦과 기이하고 생경한 일들이,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되짚어 보는 일 모두가 결국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삶의 목표를 이런 의미로 재배치해보면 조금 더 너그러워 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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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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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쏟아지는 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차를 홀짝이며 노트북을 타닥타닥 두드리고 이 순간이 나름 평안해 보인다. 그런데 나의 이런 행동은 물론이고 나의 생각, 내가 쓰고 있는 글씨까지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과연 그런 상태의 나를 온전한 자아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생각을 지닌 존재지만 이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감시당해야 한다면 나를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신어의 완전한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려는 데 있다는 걸 자넨 모르겠나? 결국에 가서는 사상죄도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해자는 걸세. 왜냐하면 그걸 나타낼 낱말이 없으니까 말이야. 68~69쪽

그간 써 왔던 ‘정상적인 언어’는 ‘구어’가 되고, 사고의 폭을 좁히기 위해 ‘신어’를 제작하고 실제로 ‘낱말들을 매일같이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씩 폐기’ 하는 ‘언어를 뼈만 남기고 깎아내는’ 작업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내가 원하는 말을 단 한 마디도 쓸 수 없고, 쓸 필요도 없을 때 이미 사고도 자동적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면, 인간성을 지닌 마지막 인간이라고 평해지는 윈스턴 스미스의 고민과 결말은 그야 말로 더 끔찍하다. 윈스턴이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인간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계란으로 바위치기일지라도 그의 저항이 파문이 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길 바랐다. 혹은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윈스턴 스미스가 한 일이 전설로 남아 인간됨을 잊지 않길 바랐다. 그게 너무 큰 바람이었음을,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이 소설을 보며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소설 속의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3대 초강대국으로 나뉘어 의미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승리도 패배도 없는, 전면전도 종전도 없는’ 전쟁 가운데 윈스턴 스미스가 속해 있는 곳은 오세아니아이다. 총 4부의 행정부로 나뉘어 있는데, 평화부는 군사, 애정부는 사상, 풍부부는 물자, 진리부는 선전을 맡아 통치해 가며 이 모든 행정부를 관리하는 것이 ‘당’ 이다. ‘당이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거대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의지에 반해 알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사전 예고 없이 몇 초 만에 수억만 명의 생명을 죽이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이라는 당의 슬로건 아래 자의적으로 2분 증오가 행해지고, 부모의 잠꼬대까지도 사상경찰에 고발하는 자녀들, 어느 곳이나 사람들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과 산과 야외를 감시하는 마이크로폰은 ‘당’에서 요구하는 인간으로 살게끔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인물은 ‘빅 브라더’로 실재하는지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권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빅 브라더’의 감시 아래 그를 찬양하며 종속되지만, 이를 거부한 윈스턴 스미스는 이 세계에서 한낱 소소한 저항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비밀 일기장을 몰래 구입해 방안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일기를 쓰는 행위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1984년 4월 4일에 첫 일기가 시작되고, 그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언제 들킬까 불안감이 내내 잠재해 있었다. 그가 진리부 소속이기 때문에 이런 행위에 대해 좀 더 용이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이런 위험한 행동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조차 슬퍼진다.


당신을 사랑해요. 136쪽

오로지 빅브라더만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줄리아를 만나고 그녀와 위험한 밀회를 즐기는 일이 불안하지만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감정이 변하는 것도 감지해내는 텔레스크린을 속여 그녀를 만나고, 대화를 하고,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윈스턴 스미스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윈스턴 스미스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일기를 쓰고, 줄리아를 만나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내내 마음을 괴롭혔던 불안함은 결국 드러나고 만다. 그들은 체코되고 끝까지 저항할거라 여겼던 윈스턴 스미스는 끔찍한 고문과 세뇌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빅브라더를 사랑했다고 고백하게 된다.

윈스턴, 자네가 인간이라면 자네는 마지막 인간이야. 자네와 같은 인간들은 멸종했어. (…)자넨 자네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 자네는 역사 밖에 있고 존재하지도 않아. 332쪽

줄리아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윈스턴 스미스는 ‘우리에게 반항하는 한 우리는 절대 처형하지 않아. 우리는 그를 개조하고, 그의 속마음을 움켜쥐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그들의 말대로 변모해 간다. ‘자유는 굴종’을 인정하고, ‘2+2=5’까지 인정했지만,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쥐 고문 앞에서 그는 그 고문을 피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줄리아한테 해요! 줄리아한테 해요! 내가 아니야! 줄리아야! 그 여자한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단 말이에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고, 뼈다귀가 나올 때까지 해치워요. 내가 아냐! 줄리아한테 해! 나는 안 돼! 353쪽

한 인간이 완전히 ‘개조’ 되어버리는 순간을 너무나 섬뜩하고 그려낸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윈스턴 스미스인지, 기꺼이 그 시대에 복종하는 보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인지 혼란스러웠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우리 삶 곳곳에 빅브라더 산재해 있음을 익히 알고 있고, 저자가 약 30년 뒤를 예상하며 쓴 소설은 완전히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다름은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 사고를 인간에게 한정짓는 것도 모순일 수 있지만 인간됨의 사고를 과연 누가 구분하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대는 이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한 철저한 계획이라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저자가 이 소설에서 인간 미래에 대한 절망과 그에 대한 경고를 나타냈다고 했듯이 독재와 전체주의에 반대한 ‘인간의 본질을 상실한 영혼 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생각 자체에 우월함을 가지면 안 된다. 기준이 모호하더라도 나의 생각이 정당한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삶을 산산조각 내고 있지는 않은지, 편협한 사고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닌지를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한다. 너무나 미온적이고 지지부진하더라도 저자가 반대하는 전체주의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이러한 미미한 노력이라도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고문이 당도하지 않은 이상, 아직 내게 닥칠 불행과 자유 그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릴 여력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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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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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그녀는 도대체 이 모든 먼지가 어디서 나올까를 궁금해하면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은 먼지를 턴 그 친숙한 물건들을 빠짐없이 훑어보며 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이블린」중

아이들을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보낸 뒤에 거실을 치웠다. 늘 그렇듯이 거실만 대충 정리하고 테이블에 앉아 책도 읽고, 오늘의 할 일들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막상 앉고 보니 오후 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거실을 청소하면서 서재방의 엉켜있는 내 책들을 보니 한숨이 나와 요리조리 피할 수 있도록 다시 책을 잘 쌓아두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얌전히 앉았어야 했는데, 괜히 찬장을 열었다가 마스크, 그릇, 반찬통까지 정리하고 베란다로 나갔더니 무당벌레들이 활개를 치고 있어서 모두 쓸어 창밖으로 보내주고(1층이라 창문을 열면 바로 땅이다), 분리수거까지 하고 오니 오후가 돼버렸다. 그러고 나서 마주한 이 문장이 오늘 나의 일과를 잘 말해주는 듯 해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책만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의『더블린 사람들』의 녹록치 않았던 읽기 과정이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첫 단편「자매」를 읽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 바로 해설을 펼쳤고,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을 끝까지 못 읽었을 거란 확고함이 들었고, 어쩌면 저자의 문학세계는 영영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지금껏 그래왔듯 여전히 책의 우주를 하염없이 누비면서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나섰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우연히 이 책을 읽고 뒤늦게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을 찾았다며 그때에야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책이다.


작가의 체취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몰개성적인 작가라고 부를 수도 있는 조이스의 작가의 초연성 이론에는, 작품은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작품 스스로 자율적으로 생산된 것이라는 느낌을 독자에게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_해설 중


저자가 주장한 ‘초연성 이론’에 철저히 외면당한 나였지만 친절하고 애정 넘치는 작품 해설 덕분에 ‘작품 스스로 자율적으로 생산된’ 느낌을 갖지 못했지만 저자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조금 알게 되었다. 이 계획을 이해한 이면에는 해설자의 생각에 도움을 받았으므로 ‘초연성 이론’에는 들어맞되, 그것을 지켜본 또 다른 독자의(나를 비롯해)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설가 역시 ‘열린 텍스트는 의미를 포착하기 어려워서 아무리 노력해도 독자들 간의 해석상의 일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작품’ 이라고 했으니 전지적 독자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렬했던 것은 저자가 ‘열린 문학을 실현하기 위해 개발한 획기적인 기법’이었다. 특히 ‘현현(epiphany)의 기법,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저자의 문학이 난해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고(특히『율리시스』), 이 작품을 통해서 충분히 느꼈으며 무엇보다 ‘20세기 이후의 지구촌 문단의 거장치고 그의 위업에 열광하지 않은 작가가 드물 지경’이라고 하면서 언급한 작가들이(T.S 엘리엇, W. 포크너, E. 헤밍웨이, F. 피츠제럴드, S. 베케트, 근래에 와서는 T. 핀천, U. 에코, S. 류수디, O. 파무크 등) 너무나 익숙했다. 저자의 ‘새로운 문학 기법’을 차용한 다른 작가들의 작품만 실컷 읽어오다 이제야 우두머리격인 ‘제임스 조이스’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마치 실컷 감시당하며 살아오다 나를 감시하던 존재, 즉 문학계의 ‘빅브라더’를 만난 기분이랄까?


이 코딱지 같은 집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갤리허처럼 멋지게 살아보려 노력하기에는 너무 늦었을까?

「작은 구름」중

저자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내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궁핍감이 물씬 물씬거리는 스타일로’ 쓴 아일랜드 소시민의 삶에서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더블린은 수천 년 동안 유럽의 수도 가운데 하나였고, (…) 어떤 예술가도 이를 세상에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더블린을 무대로 세계문학의 선구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또「작은 구름」,「어느 어머니」를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파넬의 서거 후 영국이 정치적인 감시와 탄압을 강호하자 아일랜드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문화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국민적인 일체감을 유지하려 한 민족주의 운동) 허점을 폭로했는데, 아일랜드만의 ‘독자적인 민족 문화를 수립하는’ 목적을 하나의 코미디로 치부하면서 ‘마비’라는 잠에 빠진 시민들의 잠을 깨우기 위한 목적에 철저히 부합한다. 오히려 문예부흥운동보다 ‘영국의 통치 아래 신음하는 더블린의 치부를 세상에 널리 폭로하여 조국의 발전에 촉구’하기 위해 쓴 이 작품이 아일랜드를 더 널리, 낱낱하게 알리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저자가 ‘개척한 열린 문학에 필요한 문학 기법을 성공적으로 창출’ 했고, ‘동포들의 정신적 병폐를 낱낱이 들추어 조국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는 사실에 이 작품의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아일랜드 전 대통령 메리 로빈슨은 ‘우리를 위선과 마비에서 해방시키려는 예술가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발전의 가능성은 상상마저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말할 정도로 고속 성장의 밑바탕에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인지『더블린 사람들』들의 순환적 구조가 제목과 내용을 더 자유롭게 만든다. 특히 첫 단편「자매」와 마지막 단편「죽은 이들」제목을 바꿔서 읽어도 어색함이 없다. 어떻게 읽어도 당시의 아일랜드의 정신적, 물질적, 사상적 ‘궁핍’이 적나라하게 들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만큼 잘 읽히는 책이 이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설이 없었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열린 문학 기법에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을 이해하게 된『더블린 사람들』을 읽었으니 악명 높은(?)『율리시스』를 읽어보려 한다. 부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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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꼼꼼히 정한 책들을 구입했다.

알라딘 보관함에는 약 1,100만원 어치의 책이 있는데

(다 들이지 못한다면 담기라도 하자 싶어서)

10년 넘은 리스트라 절판된 책도 많고, 개정판이 나온 책도 많다.

 

리스트를 신중하게 채우는데 그 중에서 신간 위주로 골라본 책들이다.

 

오랜만에 조우하는 작가들도 있고,

정말 읽고 싶어서 배송을 기다렸던 책도 있고,

무슨 책을 읽어야할지 고민이 들 정도로 너무 최상의 리스트다.

 

손이 딱 가는 책으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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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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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상에서 ‘한아’뿐인 존재이고 싶다. 과연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이 책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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