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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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감이 몰려왔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임에도 불구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아침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널브러진 옷가지와 침대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책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어쩌자고 이렇게 지저분하게 해놓고 방을 나선건지, 퇴근해서 돌아오면 늘 자책이 깃든 후회를 하게 된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 지인에게 문자가 왔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오늘 도착한 것을 알고 있는 지인이었는데, 단편집이니 책 제목부터 읽어보라는 문자였다. 내가 현재 어떠한 상태로 있는지도 모르고 문자를 보낸 지인 때문에 설핏 웃음이 나면서도, 내 손은 김연수의 책으로 뻗어갔다. 그리고 책 제목이 실린 단편부터 펼쳐서 읽어 나갔다. 시력이 나빠 안경을 벗으면 책을 코앞까지 끌어당겨야 겨우 겨우 보임에도 불구하고, 피로가 눈으로 뭉쳐 안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었는데, 안경을 벗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경을 벗고 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낯섦은 글자의 확대로 인한 이야기의 다가섬이다. 안경을 끼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책을 읽어나갈 때는, 시각이 뻗어나가는 범위 안에 들어온 주변의 자질구레함까지 모두 포함시키며 읽어야 한다. 그 안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딴 생각도 포함되는데, 책을 바로 코앞으로 끌어당겨 읽을 때면 오로지 글자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잡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불편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김연수의 책을 꺼냈던 것이고 지인이 먼저 읽어보라는 통에 책 제목의 단편을 먼저 읽어본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단편은 평상시에 내가 하는 독서의 세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펼쳐놓은 세계에 성큼 다가간 느낌이었고(코앞에서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질구레함을 포함시킬 여력이 없었으므로(안경을 쓰지 않아) 내게 펼쳐진 세계는 단 하나였다. 단편을 읽고 난 뒤 문자를 보낸 지인에게 바로 답장을 했다. 왜 이 단편을 읽어보라 했냐는 질문에 이야기가 이야기를 엮어가는 구성이 돋보였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지인에게 무슨 답변을 원했던 것일까. 그 단편이 나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서 읽어보라 했을 거라 지레짐작한 나는 지인의 답변에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그것을 발견하라고, 단편집이라 해도 순차적으로 읽는 나에게 그런 모험을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지인의 답변을 듣고 보니 내가 금방 읽은 단편을 축약 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도서관 게시판에 붙임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만남과 이야기의 파생은 김연수 특유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 단편의 시작에서 저자는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 소설집 속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이 말에 밑바탕을 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물고 물리는 인생의 톱니바퀴를 거리낌 없이 펼쳐놓고 있었다.

 

  특히나 이 소설집에서 돋보였던 것 중의 하나는 과거로 잠식해 들어가 현재의 '나'와 연결해주는 인생의 단면이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나'는 17살 연하의 유학생이었던 연인의 흔적을 찾아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뒤 한국을 방문한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는 소도시 도서관에 십년 째 드나들며 책을 읽어 온 한 노인의 과거는 한 사서를 통해 훑고 지나간다. 해설에서는 노인의 세계가 '붕괴했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붕괴로 인해 노인이 과거의 행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했던 모습이 과거를 떼어버리지 못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달로 간 코미디언> 역시 미국의 사막에서 실종되어 버린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딸의 행보로 비춰졌다. 이렇듯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 해도,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흘러온 세계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도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인생의 단면을, 이토록 매끄럽게 이끌어 내는 저자에 역량에 감탄할 뿐이었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국내 현대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유인즉슨 현실도피성 독서를 하는 나에게 현대문학은 피하고 싶은 세계를 맞닥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 언어로 쓰인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비유가 너무나 적나라해서 나의 감정이 쉽게 휩쓸리고 말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럴 때에 내게 나타난 작가가 김연수다. 국내문학에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국내 문학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깨트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첫 작품으로 산문을 읽은 탓에 소설을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었는데,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통해 김연수의 소설에 입문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김연수의 소설에 내포된 메시지를 단박에 찾아내는 것도, 그것을 정리하는 것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려낸 세계는 내가 피하고만 싶었던 우울함이 가득한 현실이 아니라,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은 듯 평이하지만 남다른 삶의 단면을 보여주었기에 내 마음의 문이 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 김연수가 그려내는 삶의 무대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다는 뜻이 아니라, 외국의 무대(?)를 서슴지 않게 이용하는 그를 보면서 인생의 연결고리가 한 곳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시각의 넓힘을 경험했다. 소설 속의 '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기에 세밀한 무대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국내에서의 삶만 바라보다 다른 나라로 무대를 옮겨 이어지는 삶의 단상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인생의 단면일지라도, 다른 나라의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충을 나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소설과는 조금 동떨어진 생각까지 들었다. 소설 같은 이야기, 소설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 이렇게 수많은 연결고리로 얽혀 있을 거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김연수의 소설로 인해 존재의 이유를 드러냈다.

 

  같은 장르더라도 수많은 갈래에 의해 나뉘는 문학을 탐독하다 보면, 저자가 몸담고 있는 장르에 의해 표현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시인의 언어로, 수필가는 단아한 문장으로 일상을 돋보이게 만들며, 소설가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것들을 전한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야기를 통한 전달의 묘함에 놀라곤 한다. 기억을 더듬어가듯 펼쳐놓는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꼬임 없이 차분하게 써 내려가는 것이 마냥 신기할 뿐이다. 어릴 적 추억 하나를 끄집어내어 말로 하기는 쉽지만, 막상 글로 옮겨보려 하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한 적이 있기에, 글 속의 질서를 지켜내는 저자의 교통정리를 통해 요리조리 잘 빠져나온 기분이다. 그의 산문을 읽고 단박에 빠져버렸지만, 그의 소설은 처음이라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여운이 내 안을 맴돌고 있다. 쉽게 스쳐지나버릴 수도 없는 작가지만, 쉽게 다가가기도 조심스러운 그의 작품들은 다시 한 번 구석구석 살펴보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다. 책장에 즐비한 그의 소설을 꺼내 읽으면 되지만, 어떠한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되면서도 무언가를 각오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볍게 손이 뻗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어 감사하고,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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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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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성장 소설일거라 추측하고 냉큼 집어 든 책이었다. 막상 읽어 보니 성장 소설도 아니었고, 생소한 작가에 쓰촨과 티베트 경계인 '지촌' 마을이 배경인 것을 보고 당황했음은 당연했다. 내가 생각한 소설과 양상이 다를 때는 실망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색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어 더 좋았다. 티베트에 관해서는 사진 속의 자연 때문에 무한한 동경만 생겼는데, 책 안에 펼쳐지는 티베트를 만나고 나서 새롭게 각인되었다. 사진 몇 장으로 가둘 수 없는 티베트의 내면을 지켜 본 것 같아 기분 좋은 생경함이 나를 지배했다.
 

  책을 읽고 보니 성장 소설인 줄 알고 펼친 이 책이 내게 또 다른 인연으로 다가왔다는 느낌이 든다. 성장 소설에 관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아라이의 소설을 만나지 못했을 거고, 이렇게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게 괜찮은 책이 나를 찾아 올 때면 책을 읽는 보람을 느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아무런 정보 없이 펼친 아라이의 소설이 단편인 줄 모르고 읽다가 끝나버리는 허무함을 느낄 새도 없이 어색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편인 줄 알고 읽는 책들 가운데서도 무언가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게 끝나는 책들 앞에서 허무하기 마련인데, 아라이의 단편들은 스토리의 전개도 자연스러웠고 묘사도 뛰어났다. 그렇다보니 어떤 지점에서 소설이 끝이 나더라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나 분위기를 느끼다 보면 종종 어느 시대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문명이 닿지 않은 시골 마을이 드러나기도 했고, 이제 새로운 기술이 들어온 마을의 모습이나 혁명이 자리한 사회모습들이 뒤엉켜 있었다.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이야기라서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있는 줄 모르고 잠시 헷갈렸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티베트 출신의 작가라고 해서 티베트의 온전함을 느낄 거라 생각했는데, 중국과 티베트의 경계선에 자리한 마을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온전히 티베트만의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경계선으로 인해 나라가 다르니 선을 딱 그어 문화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저자가 불러내는 세계를 탐닉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책을 읽으니 아름다운 자연과 순수함이 그득한 곳의 이야기를 더 진하게 만날 수 있었다.

 

  저자의 시적인 언어와 수수한 묘사도 좋았지만, 그럼에도 '성큼성큼 이야기를 전개하면서(김려령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꼼꼼하게 소설을 완성해 가는 것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이었다. 시대의 섞임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을 비교해 볼 수 있었고, 그 안에 인간의 본질을 끄집어내려는 저자의 시도가 늘 엿보였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소소한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질과 본성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마차의 등장으로 마을에서 새로운 인물로 떠오른 곰보는 트랙터의 등장에 밀리는가 하면, 나물을 캐면서 삶을 지탱해가는 소녀의 가출이나, 승려였다가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자로 살다 다시 승려가 되었지만 변해버린 실정에 조용히 사라져가는 라마승 단바의 이야기가 그랬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소재가 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순수하고 색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접하는 동안, 현재 나의 존재가 진하게 다가오면서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상반된 생각들이 나를 지배해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자연과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저자가 펼쳐놓는 언어의 메타포는 너무나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지명과 이름, 문화가 낯선 이야기임에도 이렇듯 나를 끌어당기는 소설을 너무 오랜만에 만난 터라 이 느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다. 단편들의 줄거리를 쏟아낼 수도 없는 것이고, 인물들과 배경의 나열만 할 수 없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졌던 분위기를 쏟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런 연유다.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단적인 분위기로 드러낸다는 것이 어색하긴 해도, 새로운 세계를 이토록 즐겁게 여행한 경우는 최근 들어 너무 오랜만이라 읽는 내내 마음이 뿌듯했다. 그래서인지 현실과 동떨어지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작품 속의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정감 있게 다가와, 누군가의 비밀을 캐가는 듯 신비로움이 가득했다.

 

 티베트를 비롯해 중국 작가의 작품들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한 터라 낯섦이 거부감으로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색다른 묘미가 전가된다는 느낌과 함께 신선한 기분이 들어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도, 한가한 카페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읽었음에도 조우되는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가 당면한 현실 세계는 책 속의 현실과 무척 달랐지만, 한 편의 꿈을 꾸는 듯,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해서 티베트의 한적한 시골 마음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 저자의 문체가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책을 읽는 동안 감칠맛 나는 표현과 수수한 묘사들이 의아할 정도였다. 역자후기를 읽어보니 시와 소설을 같이 쓴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시의 언어로 소설을 써 내는 저자 덕분에 그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만끽할 수 있어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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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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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절정을 향해가고 있는 요즘, 나는 아주 심하게 가을을 타고 있다. 식욕도 없고, 마음은 쓸쓸하고, 모든 것이 흥미가 없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있다. 밤마다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대책 없음에 하루를 마감하는 일상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무조건 가을 탓으로 돌리기엔 뭔가 미심쩍었지만, 구구절절이 원인을 따지기보다 그냥 이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가을에는 감정이 민감해져서인지, 그 감성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들을 찾게 된다. 그런 장르의 책들은 수필, 산문, 시, 미술책 등을 꼽을 수 있는데(나의 취향 상) 이번에는 시집이 가장 먼저 끌렸다. 작년 여름, 지인을 만나러 갔다가 서점에서 구입한 문태준의 시집을 꺼내들면서, 이 가을에 어울리는 독서를 한다는 뿌듯함보다 드디어 이 시집을 읽게 된다는 후련함이 더 짙었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다른 분들의 리뷰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의 신간 시집보다 먼저 읽고 싶었다. 그래도 선뜻 읽기가 망설여졌는데, 김연수의 책을 읽다 지인이 문태준 시인과 동창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각자의 문학의 비교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동창이었다고 하니, 안 그래도 가던 관심이 증폭된 것이었다. 계기가 조금 엉뚱하다 싶었지만, 그렇게라도 문태준 시인의 시를 읽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음이 허전하다고 펼친 시집을 순식간에 읽어버리고, 시를 이렇게 읽어도 되나 싶어 현실세계의 낯섦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서 먼저 나의 시선을 찔렀던 것은 한자였다. 한자가 섞여 있을 거라 전혀 예측하지 못한 나는, 종종 드러난 한자 때문에 흐름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한자가 많이 섞여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읽을 수 있는 한자도 많았지만, 한글의 의미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벽을 만나버린 기분이었다. 모르는 한자를 찾아 읽을 바지런함도 발휘할 수 없어, 내 멋대로 읽다보니 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망쳐버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큰 문맥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았기에, 한자를 모르는 나의 무지를 탓하며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비교적 수월하게 읽어 나갔다.

 

  문태준의 시집을 읽었지만, 어떠한 느낌이 드는지 나 또한 알 수 없어 생각보다 잡설이 길어지고 많았다.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의 대상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읽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수능 공부한다고 듣는 인터넷 강의에서는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어, 그 가르침이 각인이 되었음에도, 정작 내게 있는 시집을 읽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것을 보고 약간 민망해졌다. 한 시인의 첫 시집을 읽는 것이기에 최소한 어떠한 시선으로 쓰였는지 배려를 해야 함에도, 몰이해를 드러내는 읽기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읽더라도 어떠한 분위기다는 느낌이 오기 마련인데, 문태준의 시집은 한 없이 흩뿌려지고 말았다. 언어가 탄생이 되자마자 세상 속으로 점점이 흩어져 버리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해설가 이광호님의 말처럼 '문태준 시학의 개별성을 무화시키는 덕목'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을 보아도 깊이 있는 분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터라 온전히 이해했다고, 동조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똑같은 시를 읽음에도 이렇게 다른 느낌의 엇갈림이 낯설 뿐이다. 분명 문태준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는 한번쯤은 품었을 법한, 또한 내가 발견하지 못한 일상에 대한 소소함이 드러나 있어 공감을 했던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덮고 난 후에는 내게 남아 있는 이미지라든가, 여운이 없어 당황하고 만 것이다. <시월에> 라는 시에서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의 구절을 보고 멈칫 했던 이유도, <빈집의 약속>에서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란 구절이 마음 깊이 와 닿았던 이유가 분명 있었다. 같은 방향은 아닐지라도 삶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하고, 느꼈을 감정을 이토록 고요하게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에 대한 감탄과 다가감이었다.

 

  이 책의 제목인 <가재미>란 시에서도 또한 수많은 다른 시에서도 앞에서 예를 들었던 공감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저자만의 세계에 온전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허우적거리다 온 나에게,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시가 어떠했다고 단정 짓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라고,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의 시에서 무엇이 좋았노라 칭찬할 수 없어도 처음으로 마주한 문태준 시인의 시는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시라는 문학 장르는 나에게 어렵고 흔적을 남겨주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가 많지만, 시와의 만남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고 있음에도 접하지 못한 시인들이 너무나 많고, 시가 난해하더라도 억지스레 써 내려가는 이런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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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빙하기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좋은생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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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다 보면 가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과 번민이 굉장히 낯설게 다가오던 경험. 지금의 내가 그렇다. 책을 펼치기 전에 들었던 온갖 잡다한 생각과 고민들이 썰물 빠지듯 쑥 빠져나가 버렸다. 마치 몸이 아프기 전에 들었던 자질구레한 삶의 푸념들이, 막상 아프고 나니 건강만 되찾는다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순간적인 다짐처럼 또 다른 나를 돌아볼 여유가 아직 없는 것 같다. 무엇이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무엇이 또 다른 생각을 갖게 해 주었던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면서도 담담하게 고민하고 도전해가는 한 소년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고 있는 와타루는 다른 아이들과 좀 달랐다. 갈색 머리를 한 외모부터 남달랐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수업시간에 얌전히 있질 못했다. 뛰어나가고 싶어 다리는 근질거렸고, 그런 와타루의 행동을 탐탁하게 여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와타루의 남다름은 그렇게 유치원시절부터 드러났고, 달릴 때에만 숨통이 트이는 듯 해 혼란스럽기는 와타루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소에 다니는 엄마와 함께 시골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자(母子)는 동네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배 도둑, 창녀, 튀기 등 낯부끄러운 수식어가 따라다녔고, 와타루는 늘 혼자였다. 자신의 외모가 왜 그렇게 다른지, 왜 아버지는 없는지, 자신은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과 물음이 와타루에게는 어릴 적부터 따라다녔음에도 무엇 하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 대답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모든 것을 감수한 채 와타루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고,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도 아직은 말해줄 수 없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가 젊은 시절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의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연구센터에 계셨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엄마의 방에서 발견된 기사를 보고 자신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크로마뇽인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가 유학하던 시절 시베리아 빙하에서 1만 2천 년 전의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로 와타루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엄마가 유학하던 시기와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추측을 앞세워, 엄마가 시골에서 자신을 키울 수밖에 없노라고,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남들과 다른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와타루가 그 기사를 읽고, 나름대로 추측할 때마다 나 또한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은 얘기라고 생각했다. 와타루 엄마가 연구원이었다는 사실과, 와타루는 외모부터 내면의 기질까지 다른 아이들과 달랐고(모든 아이들이 같을 수 없음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고, 후에 보통 소년으로 자라나는 와타루를 보게 나로써도 괜히 미안해지는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달리기를 해야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그제야 실마리가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실마리는 500페이지가 가까운 책의 초반에 드러났고, 만약 와타루가 크로마뇽인의 자식이라면 나머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와타루도 자신의 존재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난 뒤, 자신의 기이한 행동과 내면을 어느 정도 다스리며 크로마뇽인 자식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매머드를 사냥하는 상상을 하며, 돌칼과 창을 만드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와타루의 내면에 잠식해 있는 외로움은 어느 정도 걷히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와타루가 성장해감에 따라 이 소설은 한 소년의 태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직감하게 됐다. 그리고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높지도 않은 크로마뇽인의 자식이라는 생각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릴적 부터 남들과 다르긴 했어도 와타루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소설 속에서 와타루의 솔직하고 담담한 내면의 세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와타루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유쾌하진 않았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우울하게 몰아가지도 않았다. 와타루의 내면을 지켜본 초반에는 와타루가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육상에 뛰어난 자질을 드러냈을 때는 달리기로 인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저지를 거라는 묘한 흥분이 일었다. 그러나 서서히 보통 아이의 모습을 드러내는 와타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좀 특별한 과정일 뿐이라고, 많이 외로우며, 아버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와타루를 지켜보는 것이 점점 마음 아파질 것이 뻔했다.

 

  그런 와타루에게도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크로마뇽인의 자식이라고 여기고 동네 산에서 돌칼을 만들던 시절, 동네로 이사 온 사치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사치는 와타루의 외모와 독특함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와타루에게 첫 친구가 되어 주었다. 사치의 등장으로 와타루의 학교생활이 조금은 윤택(?)해 진 것도 같았다. 아이들의 놀림에도, 무관심에도, 또한 갑작스런 관심에도 적응할 수 있게 되었고 사치와의 관계도 끊길 듯 말듯 이어지는 것이 단순한 친구가 될 것 같지 않았다(사치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음에도 그들은 연인이 된다). 그 무렵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사냥개 쿠로를 기르고 있었기에 와타루에겐 그간의 삶에서 가장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육상에 소질을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씩 한계를 맞이하면서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듯 보였으나 어떤 것도 와타루의 미래라고 단정 지을 만한 것은 없었다.

 

  체육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와타루가 담담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도 와타루의 담담함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와타루의 내면으로 채워진 글을 읽다보니, 어느새 와타루의 성격과 특이사항을 알게 되었고, 거기다 성장해가는 십대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아서 편안하게 와타루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비로소 밝혀진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들었을 때도, 진짜 아버지와 자신이 믿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 시베리아로 갔을 때도 담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와타루의 내면이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프고 아렸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씩씩하게 자신의 삶을 향해서 가는 모습에 되레 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와타루의 평탄치 않은 삶이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올곧아 가려는 모습과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 충만함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와타루는 기사에서 보았던 크로마뇽인(사실은 4500전의 미라로 밝혀진)과 자신의 친 아버지를 찾아 시베리아로 간다. 어차피 엄마를 혼자 일본으로 떠나게 만든 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그다지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터라, 실망스러운 모습에도 담담했다. 그러나 어리시절 자신의 아버지로 믿고 있었던 아이스 맨을 향해 향수 짙은 말들을 뱉어낸다. 아버지가 필요했고, 다른 아이들처럼 아버지를 갖고 싶었다던 혼자만의 고백이 마음 찡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이스 맨을 다시 빙하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싶어, 미라를 훔쳐서 나온 와타루는 자신을 찾아 따라온 사치와 함께 온통 눈뿐인 설원을 향해 나아간다. 와타루의 곁에 사치가 있어 외롭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힘겨운 성장 과정을 거친 와타루에게 어느 정도 일단락되는 경험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성장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책이 내게 선택된 이유는 순전히 작가 때문이었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오로로 콩밭에서 붙잡아서>를 읽고, 좋아서 기억해 두었던 작가인데 이번에 신간이 나와서 읽게 된 것이다. 이 책 또한 내가 좋아하는 성장소설이서 좋았고, 독특한 소재로 자아를 찾아 나가는 와타루의 여행에 동참할 수 있어서 그것 또한 좋았다. 누구나 거치게 되는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광활한 내면의 바다를 통해 독자에게도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65억 인구의 1명뿐인 작은 존재라고 해도,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지구처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구성원에 한 몫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대로 너무 작은 존재여서 쉽게 묻혀 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와타루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법, 자신이 향하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란 존재가 지구 안에 맴도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라도 오늘을 맞이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다는 것에 감사가 절로 터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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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 어느 시골의사 이야기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김현우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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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아직 선택되지 못한 책과 작가들이 참 많다. 관심이 있어서, 어느 책에선가 보아서, 다른 사람들의 추천으로 그러모으게 된 책들임에도 다시 나의 관심을 받기란 무척 힘들다. 읽고 싶은 책은 늘어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그 책들을 읽기란 더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간혹 호기심 발동으로 인해 재조명 되는 작가가 있는데, 존 버거가 그랬다. 존 버거의 신간 소설을 한 편 읽은 후, 책장에 숨겨진 그의 책을 꺼냈음은 물론 구입하지 않은 도서들을 샅샅이 찾아 구비했다. 그렇게 책을 갖춰놓고 보니 무척 든든했지만, 읽기가 녹록치 않은 작가라 무척 느린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존 버거의 글이 넘나드는 장르는 너무나 다양해서, 만날 때마다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것 같다.
 

  <행운아>는 사진가 장 모르와 함께 작업한 영국의 한 시골의사 사샬에 관한 에세이였다. 소재부터가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사에 대한 에세이에 왜 사진가가 함께 등장하는지, 어떠한 의사기에 존 버거가 에세이를 쓰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존 버거의 글을 읽어보았다면 내가 가진 의문들이 속 시원히 풀려질 거라 기대하지 않은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역시나 나의 예상대로 존 버거는 글에서 그런 내용을 비추긴 했어도,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또렷이 밝혀주지 않았다. 시골의사 사샬을 통해서 그가 하는 일, 더불어 존 버거가 피력하고자 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사샬을 보고 있노라면 시골에서 왜 그렇게 고생을 하는지 틀에 박힌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의사였다. 시골에서 생활하기엔 꽤 괜찮은 의사였고, 그가 담당하는 사람들만 해도 약 2000명에 이르며 밤에도 쉴 새 없이 불려나가며 피곤함이 그득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사샬은 그런 일상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산이든 들판이든 서슴지 않고 달려 나가 치료를 하는 그를 보면서, 도시에서 생활했다면 이런 삶을 만끽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그의 삶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존 버거의 말마따나 그 지역 사람들이 사샬 덕분에 얼마나 운이 좋은지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떤 힘든 일이 있던 지간에 사샬은 그곳에서 계속 시골의사로 일을 계속 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샬은 단순히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그들과 교제하며 의사이기 이전에 이웃으로써 인간관계를 맺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책의 시작에는 그가 치료가 필요한 곳에 달려가서 도움을 주는 내용들이 나와 있지만, 뒤로 갈수록 치료가 온전한 목적임이 아님을 피력하는 내용이 짙어진다. 그의 직업이 의사이기에 어떻게 사람에게 다가가고 관계를 맺어 가는지, 삶과 죽음의 연속성상에 있는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끊임없이 성찰하게 되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저자의 시각을 통해 한 단계를 거쳐 독자에게 투영되는 사샬의 모습은 온전히 그의 모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삶과 내면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아도, 의외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수많은 연결고리 앞에서 헤매게 되기 마련이다.

 

  저자도 그런 어려움을 피력하긴 했으나, 글과 사진을 통해서 바라본 사샬의 모습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사진이 있었기에 사샬이 어떠한 모습으로 일을 하는지, 어떤 외모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긴 했다. 존 버거의 글과 잘 어울린다 싶을 정도로 꾸며지지 않는 장 모르의 사진은, 사샬을 이해하는 데에 보탬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시골의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사샬이나 시골 풍경, 그의 환자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가 의사라는 사실보다 저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삶을 살아가는 헬퍼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의사의 권위적인(환자가 전적으로 의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모습보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얽혀 들어가는 모습을 한 사람은 글로, 한 사람은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자는 사샬의 이야기를 하다 더 큰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사샬의 이야기와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좀 난해하긴 해도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언인지 알지 못하기에 그의 책을 통해 좀더 알아가려 했는데, 이 책의 옮긴이가 명쾌하게 설명해 주어 잠시 멍해지기도 했다. 옮긴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존 버거를 이야기할 때마다 '개인이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감정의 움직임을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작가' 라고 말한다고 한다. 내가 가진 생각을 또렷이 수면에 올려 보내지 못하고 의뭉스럽게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렇게 단박에 설명하다니. 존 버거의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사샬에 대한 이야기 안에도 그런 능력이 어김없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 사샬의 내면과 삶, 그리고 저자의 뜻을 내가 간추린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에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남기고 있지만,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조차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다지 두껍지 않고, 사진도 많을 뿐더러, 에세이이기에 읽기가 쉬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존 버거의 책이 늘 그렇듯(지금껏 몇 권의 책을 읽어왔지만, 녹록한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쉽게 간과하며 재빠르게 읽어나갈 수 없었다. 작은 책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한 사람의 삶과 일상을 담은 듯 소소한 것 같아도,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는 독자를 혼란스럽게도 만들며 생각할 여지를 뭉뚱그려 건네주기도 한다. 그렇다보니 이해가 느리거나, 포괄적으로 독서를 하지 못한 나 같은 독자에게 존 버거의 글은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그런 어려움이 나를 끌어당겨 그의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작은 책에서 보여준 한 시골의사의 삶을 통해 저자의 또 다른 저력을 맛보았음은 물론, 저자와 같은 시선에서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자꾸 그가 남긴 메시지를 좇게 된다. 아마 그것 때문에 존 버거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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