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상처가 나에게 말한다 - 나하고 얘기 좀 할래?
울리케 담 지음, 문은숙 옮김 / 펼침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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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도 나를 사로잡긴 했지만, 부제목이 이 책을 더 읽게 들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 상처가 나에게 말한다'란 문구에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려 보게 될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갖게 되는 내면의 어려움이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은 상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종종 우울함으로 빠질 때면 나 또한 갖게 되는 생각이라 한 권의 책을 통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내 자신과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만, 진솔한 대화를 이어간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책을 빌어 나와 대화하고,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상처를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만큼 큰 수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었기에 어린 시절이 단순히 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이어주는 또 다른 나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잔잔한 감동을 줄 수도 있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내가 만나는 책들은 나를 스쳐가는 책들이 더 많았다. 나의 첫 기대와는 달리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 책에 대해서도 그렇게 치부해 버렸다. 내가 관심을 덜 기울인 탓인지, 나의 내면을 온전히 보지 못한 탓인지 이 책이 내게 끼친 영향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대입해 보지 않은 채 비교적 큰 감흥 없이 그렇게 읽기를 마쳤다. 그러나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내면을 송두리째 흩트려 놓는 일이 발생했고, 나는 내 안으로 칩거해 버렸다.

 

  한참을 칩거하다 보니 문득 이 책이 떠올랐다.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기보다, 책 제목이 나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고난이 닥치자 감정에 치우쳐 그것에 지배받는 데만 몰두하다 보니, 그 안에서 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조금씩 정신을 차리자 그제야 내가 팽개쳐버렸던 내 자신이 느껴졌고, 나와의 대화를 힘겹게 시작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행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실천 방법이 있었는데, 막상 그 상황이 현실에 부딪히자 생각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 한 가지, 내면의 '아이(내 자신)'과 대화를 해 보라는 방법이 생각이 났고, 내 안에 한 아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내 안에 한 아이가 있다는 말로 시작해 그 아이가 왜 지금 힘이 드는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왜 이런 사태까지 와 버렸는지 내가 알 수 있는 내용을 내 자신에게 모두 말했다.

 

  책으로 읽었을 때는 저자가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가 참 쉽게 다가왔는데,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있고 보니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자꾸 말을 머뭇거렸고, 내 안의 아이에게 현재의 상황을 인식시키고, 인정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말을 걸고 있는 아이가 정말 내 자신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대화를 하고 보니,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 느껴졌고, 거울을 보면서 진지하게 내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내 눈을 내 자신이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 한 적이 마치 처음인 듯, 진지했고 진솔한 대화였다. 그 대화 이후로 나에게 좀 더 다가간 기분이 들었고, 많이 차분해져서 현재의 나를 피하지 않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는 중이다.

 

  책 속의 사연들을 마주할 때만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렸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내게 없다는 생각도 안 들었지만, 내 상처는 이 사람들과 다른 색깔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안의 모든 것은 배제한 채 다른 사람의 사연을 읽어나가기 바빴고, 저자의 충고는 그냥 흘려들어 버렸다. 그랬으니 종종 공감하는 부분을 발견했음에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내가 이 책을 필요로 할 때가 오면)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자신의 내면의 아이와 대면하길 두려워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내 안의 아이를 인정하기 싫었기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과거를 저장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대비하게 해준다.'라는 의견에 동조하기도 버거웠다. 나를 괴롭히는 상처가 있다면 피하고 잊어버리고 싶지, 그것을 미래로까지 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내 안에 감추어진 내면의 아이는 더 꽁꽁 숨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아이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어를 했다.

 

  저자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통해서 현재 어른의 모습을 빗대어보고,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을 토대로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은 위로와 치유를 건네고 있었다. 때론 그 위로가 피부에 와 닿지 않고, 저자 자신의 깊은 사유를 드러낼 때가 많아 공감을 갖기 힘든 적도 많았다. 거기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치유에 도움이 되고자 실어놓은 여러 가지 방법제시도 실행해 볼 수 있는 조건제시가 부족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조건이 아니라 띄엄띄엄 내게 맞는 방법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 또한 그 방법을 모두 실행해 보라고, 그 조건에 부합한 사람만을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처럼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이 책을 들춰 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은 순간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내면의 아이를 부인한 채 살아가다 어느 날 문득 대화를 걸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자 했을 것이다.

 

  독자가 내면의 아이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이 책을 읽는 순간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면에 다가갈 때 순간순간 펼쳐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잊고 있었던 내면의 아이를 갑자기 만나는 것 보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정한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읽는 책이 아니라 느끼는 책이며, 독자가 마음을 열었을 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자신과의 조우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하고, 혼자만의 조우가 힘이 들 때 이 책을 꺼내보고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책을 경험이 이어졌을 때 새롭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내 자신과의 만남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진정한 내면의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은 나를 향해 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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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꿈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미메시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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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 니콜라> 시리즈에 빠져 들면서, 상뻬에 대해 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원래 좋아하는 작가라 신간이 나올 때마다 바로 구입하지만, 그의 숨겨졌던 작품으로 새롭게 관심을 갖고 보니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상뻬의 책을 거의 다 모았으면서도 유독 <꼬마 니콜라> 시리즈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었다. 상뻬가 종종 삽화로 참여하는 작품이 있지만, 이 방대한 시리즈를 상뻬만 믿고 구입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 보니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상뻬의 다른 작품에 더 관심이 기울이게 만들었다.

 

  <꼬마 니콜라> 덕분에 상뻬의 책을 모두 보고 읽고 싶었고, 내게 없는 상뻬의 책을 검색하다 <거창한 꿈>을 구입하게 되었다. 상뻬의 책은 읽는다는 표현보다 보고 느낀다는 표현이 더 맞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짤막하게나마 글이 실려 있지만, 그의 데생이 주는 느낌은 책의 전체를 지배한다. 기존의 상뻬 책에서 크기가 조금 작아진 상태로 출간되어서 그런지, 상뻬의 데생을 큼지막한 느낌으로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 동안 여러 크기의 상뻬 책을 보아왔지만, 아무래도 큰 책으로 상뻬의 데생을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상뻬가 그린 세계에 더 다가가고, 널찍하게 보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거창한 꿈>을 펼쳤을 때 작은 크기의 책 안에 갇힌 상뻬의 데생이 조금은 애처로워 보였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인간의 군상을 여러 모습으로 그린 세밀한 데생이 많았는데, 온전히 날개를 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책의 크기에 투덜거리고 있기보다, 상뻬가 그려낸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 마음은 잠시 접고 <거창한 꿈>을 느끼는 데만 집중했다. 상뻬의 데생집을 보면 책 제목이 늘 눈에 띈다. 한 가지의 주제를 잡고 그것만 그려낼 때도 있고, 데생 내용과 조금은 동떨어진 내용이 그려질 때도 있다. 거기다 추상적으로 제목을 이끌어 내거나 익살스런 제목을 붙일 때도 있다. <거창한 꿈>은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던 것도 제목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에 대한 관심이었다. 데생과 짧은 글을 읽어나가면서 상뻬가 <거창한 꿈>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해 설핏 웃음이 났다. 제목과 완전히 일치된 공감보다 익살을 드러낸 데생이 더 많았고, 그것을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 <거창한 꿈>이라면 이루지 못할 꿈이거나, 허풍스러운 꿈을 상상하기 십상이다. 이 책에서 상뻬를 통해서 펼쳐지는 '거창한 꿈'은 일상에서 만나는 '꿈'의 허황됨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 풍자도 많았고, '꿈'의 대상이 한정된 것이 아닌 다양한 장소와 대상을 다루고 있기에 낯선 것도 많았다. 또한 데생을 보면서 독자가 상상할 수 없는 엉뚱함이 드러난 것도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데생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은 상뻬의 짤막한 글이었다. 그 글은 이질적일 때가 더 많았지만, 상뻬의 수다스러움이 덧입혀 지면서 상뻬 특유의 매력이 발산되기도 했다. 그 안에서 책 제목이 주는 <거창한 꿈>의 실체를 엿볼 수 있었다. 추상적이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글을 통해서 타국의 정서를 느끼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상뻬의 데생집을 무척 좋아하고, 데생만 삽입된 된 책들도 찾아보는 열정이 생겼지만, 그의 데생집을 보고 난 느낌을 남기기란 여전히 힘에 부친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데생이 주는 느낌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잡는 것도 어렵고, 상뻬의 데생을 일일이 분석하는 것도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상뻬의 데생을 보면서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들의 매력을 알고 있기에 상뻬의 책을 계속해서 찾게 되는 것 같다. 익살스러우면서 풍자적이고, 유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면을 모두 갖추고 있기에 그의 흔적을 좇는지도 모른다. 그의 데생집을 보면서 명쾌한 느낌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그의 데생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감격스럽다. 상뻬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 앞으로도 이런 흔적을 많이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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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열두 달 타샤 튜더 클래식 7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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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2010년 1월이 중순에 접어들고 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을 따로 갖지 못해서인지, 여전히 시간 감각이 없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보니, 시간의 흐름이 어긋나는 요즘이다. 구정이 되면 새로운 마음을 갖겠노라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갈수록 빨라지는 시간의 흐름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서 시간이 멈춰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는 것도 아니기에, 흐름에 따라 나를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타샤 할머니가 그린 열두 달에 관한 동화책을 보니 괜히 위로가 되는 듯 했다. 마치 내가 흘려 보내버린 2009년 한 해를 이 기회를 통해 돌아보라는 위로 같았다.

 

  생뚱맞게도 책장의 두툼한 책들을 보면 겨울방학이 생각나곤 한다. 방학 때는 늦잠도 실컷 자면서 하루 종일 책을 보며 뒹굴 거려도 시간이 부족했기에, 그런 여유로움이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다. 책 읽기가 지겨워지면 바깥에 나가서 어울리던 시절이 언제인지 아련한 추억만이 나를 엄습하지만, <타샤의 열두 달>을 보면서 시간이 넘쳐나던 겨울방학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놀기만으로도 바빴던 유년의 겨울과 늘 시간이 부족했던 시골의 방학생활과 연관 지어진 탓도 있었다. 타샤 할머니는 이 책에서 수채화로 시골에서의 열두 달을 표현했다. 시골 생활을 워낙 좋아했던 할머니기에 이 책에 등장하는 배경은 모두 시골이다. 타샤 할머니의 집과 아이들이 배경이 되어주는 타샤 할머니의 일 년은 그림을 통해서 모두 드러나고 있었다.

 

  다른 동화책에서도 그렇듯, 타샤 할머니 특유의 꽃 테두리 안에서 펼쳐지는 열두 달의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꽃 테두리가 좀 더 둥그스름해졌다는 것과 수채화의 느낌이 진해졌다는 것이다. 흑백으로 된 그림도 있었지만 색이 입혀진 수채화가 더 많았다. 잔잔한 시골을 풍경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고, 계절에 따라 아이들과 어른, 가족들의 모습, 자연의 모습이 정겹게 펼쳐졌다. 왼쪽에는 계절과 상황을 나타내는 짧은 글이 번역되어 있었고, 오른쪽에는 영어의 원문이 실려 있었다. 짧은 영어임에도 읽기가 쉽지 않은 단어들이 나올 때면, 어차피 번역이 되어 있기에 그냥 추측만 하고 넘어갔다. 글보다 타샤 할머니의 그림을 더 좋아하기에, 영어를 읽느라 끙끙댔던 마음을 얼른 지워버렸다.

 

  1월부터 12월까지의 시골 모습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네 모습과 공통된 부분과 다른 부분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1월이면 썰매를 타고, 3월에는 나무의 수액을 채취하는 것,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4월, 마을 잔치가 열리는 9월(우리의 추석과 비슷해 보였다.)은 내가 자란 시골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타샤 할머니가 그려낸 열두 달 속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한 정경이었지만, 할로윈 데이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모습이 우리와 조금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날들이 어색하지 않지만, 시골의 모습보다 도시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보다 그런 모습을 한 편의 그림으로 드러낸  수채화들이 정감 있게 다가왔다. 타샤 할머니의 몇몇 동화책을 보아서인지 책마다 약간 다른 화풍의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각각의 동화책마다 어느 시대에 발간된 것인지 집어낼 수 없더라도, 조금씩 변해가는 화풍과 주제를 비교해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타샤 할머니의 동화책은 읽는다는 느낌보다 본 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곤 한다. 글은 짧고 그림이 많이 실려 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동화책 속의 그림들이 아니라 타샤 할머니의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서일 것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풍경과 아이들, 자연은 다른 책에서 익히 보아온 타샤 할머니의 인생의 즐거운 시기였다. 시골 생활을 좋아하고,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맘껏 누릴 줄 아는 타샤 할머니. 그런 타샤 할머니였기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책일지라도, 새롭게 책이 출간될 때마다 관심이 간다.

 

  처음 타샤 할머니의 책들을 읽어나갈 때의 흥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데서 오는 신기함으로 책을 읽어갔고 모든 책들을 모았다.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타샤 할머니가 남겨준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감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샤 할머니가 남겨놓은 것들은 이런 책들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평생 일군 코기빌의 정원도 있고,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번진 삶의 기쁨이 있다. 그것들을 온전히 간직할 수 없대도, 이런 동화책을 한권씩 만날 때마다 타샤 할머니가 전해준 삶의 기쁨을 기억하고 일상에서 누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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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의 눈을 달랜다 - 제2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60
김경주 지음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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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을 때 시어에 소리를 덧입히고 안 입히고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껴서인지, 시집을 마주하면 벌써부터 목이 칼칼해진다. 소리를 내어 읽는다는 것은 시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평소에 다물고 있던 입을 여느라 목이 잠기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시를 조금 읽는다고 해서 목이 아프다고 푸념하는 것인지, 소리 내어 읽는 것에 대해 조금 계면쩍어 지기도 하다. 내가 시에 소리를 덧입히는 시간보다, 시를 써 내려가는 시인들의 노고가 깃든 시간이 비교될 수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칼칼해지려는 목을 가다듬고 시집을 펼쳐 명랑을 가장해 시를 읽어 내려갔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시집이라고 하니, 관심부터 남달라진다. 상을 받은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기보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 너라, 유독 시집에는 경우가 뒤집어지곤 한다.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시를 읽으면서도 깊은 공감을 하지 못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시는 내게 어려운 장르이고, 읽는 것조차 버거운 문학이다. 거기다 상까지 받은 시집이라고 하면, 주눅이 들면서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떠한 시들을 썼기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 까란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문으로 바뀌고 말았다.

 

  시에 소리를 덧입혀 재탄생하게 만드는 또 다른 매력은 <시차의 눈을 달랜다>의 시집에 적용되지 않는 듯 했다. 낯선 시들에 적응하고, 시인의 내면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 몇 편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일쑤다. 그것을 알기에 첫 시부터 소리 내어 읽었건만, 몇 번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아도 시의 의미는 내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는 세계의 언저리를 보여주고 읊어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시들이 가득했다. 이 시집의 제목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나와 시인의 '시차'를 달래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의 시를 이해하기엔, 그의 시를 온전히 느끼기엔 내게 부족한 것투성이라는 자괴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좌절했던 것은, 소리를 덧입혀도 시어가 내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소리를 덧입혔을 때 달콤하게 다가오는 시 때문에 시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쳤건만, 김경주의 시집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시어가 입에 감기지 않았고, 적절한 곳에서 끊이지도 않았다. 읽다 보면 앞 뒤 언어가 꼬이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헤매다 보니 시가 더 엉켜버린 느낌이었다. 거기다 운율에 맡긴 시들보다, 산문처럼 무한히 펼쳐진 시들이 더 많아 나의 어려움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시의 의미를 알아가고, 시인의 내면으로 혹은 시들이 드러내고 있는 세계로 동행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워 보였다. 겨우겨우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시어들에 메모지를 붙이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아등바등 시를 만날 뿐이었다.

 

  김경주 시인의 시들과의 만남이 처음이듯이 순차적으로 다가오는 낯선 감정에 부응하듯, 그의 시는 난해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조금씩 그의 시의 깊이를 느끼고, 무언가 알듯 말듯 한 세계를 음미해 나간다는 기분이 느껴진 것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을 때였다. 목이 칼칼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멈추지 않기 위해 중얼거리듯 시를 읽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시어는 꼬이고 엉켜버린 시들을 풀어가기 보다 그대로 전진하고 있을 때, 시어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발견을 일궈냈다는 기쁨보다, 늘 더디게 깨달음을 얻어 가는 내가 여전히 힘겨웠다. 한참을 읽어야 그런 느낌이 겨우 오기 마련이고, 그 느낌은 시를 끝까지 대하기 전에 또 다른 혼란을 주기 마련이었다.

 

  시를 읽으며 반가움을 드러낼 때는 내가 가진 경험에 대한 드러냄이 등장할 때다. 김경주 시인의 시에서 가장 먼저 공감을 느꼈던 부분은 <바늘의 무렵>의 첫 연,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다니는 바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였다.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바늘이 몸속에 들어가면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죽어간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이 났다. 떠도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 시에서 드러나고 있어 신기하면서도 학창시절의 친구의 말에 신뢰를 던져 주지 못한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시인은 바늘을 삼킨 자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불에 떨어진 바늘로 인해 그 이불을 덮고 자는 이들에 대한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터무니없는 공포는 무안해 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시의 내면을 볼 수 있어 시인에게 좀 더 다가간 기분이었다.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반복적인 드러남도 있었지만, 반복적인 드러남이라 하더라도 온전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었다. 새, 나비, 욕조 등 익숙한 소재에 시인이 실어준 메시지는 가볍지 않았다. 거기에 시집의 제목인 '시차'는 다양한 모습으로 시를 통해 독자와 시인을 연결시켜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제대로 들어가기란 내게 무리였다. 내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종종 나를 사로잡는 시의 드러남은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모래의 순장>에서 '다른 것들의 몸을 빌려 자신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만 년 전부터 떠돌고 있는 자신의 무덤을 찾기 위해'란 구절을 통해 흔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시만 짜서 이대로 생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이 비단 시인만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시인을 비롯한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고뇌이고, 번민이기에 그의 시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바탕을 같은 셈이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온 몸으로 세계를 느끼며, 표현이 다를 뿐이라는 것. 시야가 좁아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내게, 시인은 온 세상을 훑고 지나가는 시를 들려주었다. 세상의 모든 언어와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몰이해보다, '시차'의 피로함을 핑계 대며 떨쳐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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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아래아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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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라는 작가에 대해 재조명을 하게 되면서, 그의 작품을 하나씩 찾아서 읽어보고 있다. <사고>밖에 읽진 않았지만, 그 작품이 너무 강렬해 다른 작품도 찾게 되었다. <사고>만큼이나 유명한 작품인 이 책을 작년 가을에 구입해 놓고 읽지 못하다, 얼마 전 <사고>를 다시 읽고 자연스레 이 책을 꺼내 읽게 되었다.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있는 작가인 만큼, 내게 두 번째로 오게 된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책을 다 덮을 때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어 차분히 읽어갔음에도 도저히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책은 한 형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도로변에 세워진 차량에서 베른경찰청 소속의 슈미드 형사의 시신이 발견된다. 슈미드 형사의 상관인 베를락 형사에게 사건이 보고되었고, 그때부터 슈미드 형사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연결 고리로 깊게 펼쳐진다. 베를락 형사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형사로 이름을 알렸고, 고국인 스위스로 영구 귀국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런 터에 슈미드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고, 사건을 추적해가는 그의 행동은 슈미드 형사의 직접적인 죽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슈미드 형사가 람보잉에 살고 있는 지역 유지인 가스트만의 연회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가스트만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베를락 이외에 사건을 맡은 찬즈 형사는 그런 태도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가스트만의 변호사와 국장 사이에 오간 대화로 베를락과 찬즈 형사가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슈미드 형사의 죽음은 단순히 범인을 잡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슈미드 형사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가스트만의 연회에 참석했다는 점과 가스트만은 자신의 집을 사업가와 정치가들의 은닉처로 제공했다는 점이 걸렸다. 그런 민감한 사안에다 가스트만이 가지고 있는 이력 때문에 담당 변호사는 가스트만을 내버려 두라고 했고, 국장도 베를락 형사에게 그런 부분을 전달했다. 베를락 형사는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시각에서 가스트만을 추적해 간다. 그 추적이라는 것이 적극적이거나 흥미진진하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은 가스트만과 베를락은 오래전부터 숙적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40년 전, 둘의 내기로 인해 베를락은 가스트만의 죄를 드러내려 했고, 가스트만은 그런 베를락을 농락하며 교묘하게 자신을 포장해 또 다른 죄들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40년 동안 가스트만의 뒤를 쫓는 베를락은 슈미드 형사의 죽음으로 또한번 편치 않은 만나게 된 것이다.

 

  40년 전,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우연이 작용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죄 행위가 필연적으로 밝혀질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베를락이었다. 그에 반해 '인간은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은 가스트만이었다. 두 사람은 상반된 의견 앞에 내기를 걸었고, 며칠 후 가스트만은 베를락이 보는 앞에서 사업가 한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을 증명하려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가스트만에게 어떠한 죄를 덮어씌울 수 없었고 둘은 그렇게 40년의 시간동안 내기의 끝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슈미드 형사의 죽음으로 다시 조우하게 된 그들은 여전히 불편했고, 지병으로 인해 죽음이 다가오는 베를락을 농락하듯 가스트만은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슈미드 형사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야 했기에, 베를락과 찬즈 형사는 나름대로 사건을 추적해 나갔다. 두 형사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지 않는 베를락 형사를 찬즈 형사가 무조건 따를 리 없었다. 모든 것을 밝히지 않고, 소신대로 밀고 나가려는 베를락의 속을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지병으로 인해 휴가를 가려는 베를락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런 베를락 앞에 가스트만은 태연히 나타나 그를 조롱하고, 그를 죽이겠다는 충고를 한다. 그런 가스트만을 향해 그를 재판할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며, 오늘 밤 사형 집행관이 가스트만을 찾아갈 거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베를락은 뱉어낸다. 그리고 가스트만은 그의 심복 두 명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를 사형 집행한 사람은 찬즈 형사였고,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베를락의 속내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책은 거의 끝나가고, 가스트만은 죽었고, 베를락이 속 시원히 무언가를 말해 주지 않고 있어 긴장감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베를락은 슈미드 형사를 초대해 가스트만의 죽음을 자축한다는 의미를 갖다 붙였지만, 둘의 식사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것을 밝히고 뒤집는 시간이었다. 슈미드 형사를 죽인 사람이 누군지, 가스트만을 재판한 사람은 베를락 자신이지만, 집행하는 사람은 찬즈 형사인 이유를 모두 밝힌다. 분명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는 복선을 저자가 곳곳에 깔아 놓고 있었음에도, 결말에 가서야 베를락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름대로 꼼꼼하게 읽었다 생각했음에도 종종 마음속에 걸려드는 의문을 완전히 수면에 올려놓지 않은 채, 저자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서야 책 제목 안에 내포된 메시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저지르는' 가스트만의 행동에 대해 온전한 비난을 던질 수 없었던 것은 반전을 던져준 찬즈 형사 때문이었다. 베를락이 우연과 필연성에 의해 모든 범죄가 필연적으로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을 가스트만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정확한 일례를 보여 준 이가 찬즈 형사였다. '비록 법으로는 단죄할 수 없었지만 완벽한 작위적 우연으로 죄를 응징' 했다고 표현한 옮긴이의 말마따나 어느 정도 가스트만의 의견에도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가스트만의 의견을 참착하듯 찬즈형사가 그대로 움직여 주었고, 결국 자신이 자신을 단죄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길지 않은 책임에도 간단치 않은 줄거리와 의미 때문에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베를락과 가스트만의 사고와 행동에 어느 곳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으면서도, 내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양심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바탕과 그 안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이끌어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무언의 책임감 같은 것이었다. 한낱 에피소드로 지나쳐버리기에 석연치 않은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계속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이론과 생각에 자신의 삶을 치부해 버리기 보다,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삶이 존재한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와 인간의 기본 심성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그것을 잃어버리면, 가스트만과 찬즈 형사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 같아 심히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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