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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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의 제목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바깥으로 들어가다'라는 의미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깥의 뜻은 '밖이 되는 곳(네이버 국어사전)'인데, 밖이 되는 곳을 '들어갔다'고 해도 되나 싶었다. 바깥을 다른 세상으로 치부하자면 굳이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더 깊이 생각하려 하니 자꾸 헷갈리기만 했다. 무엇이 저자를 바깥으로 인도했는지 궁금증을 풀어야만 책들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랜만에 책 제목을 음미하게 된 것이다. 책머리를 열자마자 저자의 '바깥'의 의미가 순식간에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은 안과 맞버텨야만 서는 단어다.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할 것이다.'라며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바깥'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한 인터뷰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익숙하고 무덤덤한 만남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분명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라고 나와 있는데도, '인터뷰'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사물과 풍경이 등장했을 때는 당황하고 말았다. 사물과 풍경에 대한 인터뷰가 가능하냐는 초보적인 견해부터 이 책에 담긴 '바깥'의 의미를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정신을 수습하고 인터뷰를 꼼꼼히 읽어나가다 보니, 그제야 책 속에 담긴 숨은 의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마이너리티를 만났고, 그런 풍경을 보여줬으며, 사물을 통해 메이저를 넘어선 세계를 만끽하게 했다. 속된 말로 2인자에도 끼지 못하고 잊힌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자신은 그 축에도 못 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외>를 떠올렸다. 저자가 나치 수용소 돌멩이에서 보았던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쓰인 글처럼 소외 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강렬한 책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것들의 의미가 나치 수용소의 글만큼은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를 잊혀가는 사람과 사물, 풍경에 대한 인터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인터뷰로 채워진 글이라면, 그다지 유쾌한 분위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1등만 나열되어 있어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세세함에는 더 관심이 없었다. 분명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한 호흡에 읽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저녁 내내 책을 놓지 못해 다 읽어 버리고 가중된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였다. 분명 주변의 이야기인데도 딴 세상을 만나는 것 같았고, 수많은 사연의 본질이 내 안으로 몽땅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로인해 어두워져 버린 마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머릿속은 책 내용들로 마구 뒤섞이고 있었다.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토록 나를 혼란스럽게 할 줄 몰랐다. "절망은 감정의 거스러미이고, 세상 어디에도 논리적 절망이란 없다. 그리고 우스운 절망, 우스워할 만한 타인의 절망도 없다.(159쪽)" 이 말이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파쇄 되는 책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택배기사가 된 연극배우가 생각나고, 풀피리도 어엿한 전통 악기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한 인생이 스쳐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흑백사진으로 점철된 바깥사람들과 사람들을 만나니, 마치 색깔이라곤 지녀 본적 없는 세계를 통과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바깥이 아닌 안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도 혼자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유롭고, 즐거우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바깥세상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시류를 잘 못 타서, 노력해도 되지 않아서 바깥에 머무르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불평불만으로 과거를 되짚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삶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며 숙연해지곤 했다.

 

  그러나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무언가 거슬리고 아류로 전략하는 기분은 나를 떠나지 않아, 바깥세상을 맘껏 둘러보고 있으면서도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이 인터뷰는 단순하지 않았다. 정상의 자리에 선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식상함이 없었으나,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는 회한이 자리했다. 또한 글이 가볍지 않아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주었고, 바깥과 어우러진 저자의 시선은 녹록치 않게 다가올 때도 많았지만 바깥의 의미를 더 담근질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고, 안과 바깥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을 조금씩 이해해 갔다. 각자의 처소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큰 변화 없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기도 했다. 

 

  스물여섯의 사연과 만나면서 주어진 것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것을 봐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집약되어 지나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바깥세상일지라도 결코 쉽게 넘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유명 산악인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한 산악인이나, 돈만 보며 책을 만들지 않겠다는 출판사 사장이나, 달리지 않는 퇴역마나, 나름대로 삶의 의미, 더불어 바깥세상의 의미를 느끼며 살고 있었다. 인터뷰 하면서 '꿈'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며, 꿈꾸는 이들을 만나, 멋대로 해몽이란 걸 한 셈이라고 말한 저자처럼, 그들은 자기들만의 작은 꿈을 다져간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남들에게 비춰지지 않는 소소한 꿈일지라도, 자신 안에서는 얼마나 크게 부풀려지는지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부풀린 꿈을 축소하는 것이 아닌 더 빵빵하게 채워 버린다. 부디 부풀려진 꿈이 허황되게 '뻥'하고 터지지 않길 바라며, 이들처럼 바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라도 서성이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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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스케치 장 자끄 상뻬의 그림 이야기 4
장 자크 상뻬 지음 / 열린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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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력감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존재감의 상실에 몸부림을 칠 때 힘이 되는 한 마디는 "책 사줄까?"다. 그 말을 들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반짝 빛나며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요즘 내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가 그 말을 건넸다. 친구도 내가 책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물었단다. 그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갖고 싶은 책 중에서 최근에 구입하려고 마음먹은 <파리 스케치>를 골랐다. 상뻬의 책은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어쩌다 이 책을 놓쳐 버렸다. 책을 주문했다며 힘내라는 친구의 말에 기분이 한껏 고조 되었다. 책이 언제 오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상뻬 책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져 사무실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큼지막한 책에 펼쳐진 상뻬의 데생이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 움츠러들고 강퍅해진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어, 상뻬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찾아갔다. 상뻬의 데생을 보고 있노라면 주변의 것들은 다 잊고, 오로지 책 속에 펼쳐진 세계만 쳐다보게 된다. 니콜라 시리즈만 보다가 오랜만에 데생 집을 봐서인지 더 여유롭고 자유로운 세계를 만끽한 기분이다. 더군다나 <프랑스 스케치>에서는 고층 건물이 빽빽이 들어찬 도시를 표현하기보다 시골의 풍경이 더 많아서 나의 기분과 잘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시골이라고 해서 데생의 공간이 남아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편의 그림처럼 펼쳐진 자연이 보기 좋았다. 드넓게 펼쳐진 밭과 우거진 나무, 그 사이에 자리한 집과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푸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상뻬의 데생집이라고 해도 짤막한 글이나 대화가 있기 마련인데, <프랑스 스케치>는 글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상뻬가 그려낸 세계를 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껴야 했다. 글 보다 한 편의 그림이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해 준다는 것을 알기에 맘껏 상상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상뻬가 어느 배경을 그리던지 특유의 익살이 들어 있었고,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맘껏 표현하고 있었다. 드넓게 펼쳐진 시골 풍경에 수영장에 들어가 있는 젖소나, 마담 보바리를 읽고 있는 암탉은 익살을 자아냈고, 깜깜한 밤길을 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전거, 들을 헤집고 와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드는 모습은 흐뭇하게 만들었다. 간간히 끼어있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은 퍽 유쾌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서 그런지 상뻬의 데생 집 중에서도 유난히 <프랑스 스케치>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실제의 시골은 푸근하거나 평화롭기보다, 지루하고 단순한 삶 속으로 빠지기 쉬운데 <프랑스 스케치>를 보면서는 동경에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저런 곳에 살게 되면 내 삶이 좀 더 풍요로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나는 사로잡았다. 자연 안에서의 고독도, 자잘한 불편함도, 여유와 평온함으로 모두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느낌으로 드리워진 데생 때문에 동경의 눈빛을 보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상뻬가 그려 낸 삶은 특이할 것이 없는 행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프랑스 스케치>를 보게 됨으로 상뻬의 데생 집을 모두 모으게 되었다. 상뻬의 책을 처음 볼 때만 해도 그의 작품을 모두 모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이렇게 한권씩 모아 주르륵 꽂고 보니 예상외로 뿌듯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꿈꿀 때 꺼내면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는 상뻬의 데셍 집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과 해학과 유머가 늘 잠재해 있어 언제라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그래서 더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기다리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이 좀 힘들 때 선물 받은 책이어서인지, 유독 내 마음에 와 닿았던 <프랑스 스케치>. 봄바람이 더 따스하게 살랑 거리면 자주 꺼내서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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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6 - 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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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에는 읽다만 장편소설을 읽기로 하고, 첫 번째로 <홍루몽>을 완독했다. 4권남은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었지만 <홍루몽>을 읽고 나니 자신감이 붙어 <아리랑> 6권을 꺼내들었다. 5권의 리뷰를 보니 역시나 우울해지는 소설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잠시 쉰다는 것이 4년 동안 방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정래 작가의 장편을 다 읽고도 유독 <아리랑>만 독파하지 못해 늘 애가심으로 남아 있었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이다. 책 내용이 유쾌하지 못하더라도, 5권까지 읽은 과정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다시 꺼내들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용기를 부여해 본다.

 

  오랫동안 읽기가 끊겨 버린 책이라도 읽다보면 신기하게도 기억이 난다는 것을 <홍루몽>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리랑>은 <태백산맥>과는 달리 인명사전이 없어 걱정이 앞섰는데, <홍루몽> 덕분에 걱정을 덜게 되었다. 거의 백지 상태에서 다시 읽기를 시작했으나, 6권을 읽고 어느 정도 전체적인 분위기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아리랑>을 읽으니 해외문학을 읽느라 번역체에 익숙해져 있고, 국내소설을 읽더라도 젊은 작가들의 현대소설이 대부분이어서 문체의 아름다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조정래 작가에 반하게 된 것도 단편속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 때문이었는데, 4년 만에 다시 저자의 문체와 조우하게 되니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더불어 오랜만에 만끽해보는 우리 언어의 수려함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만족해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6권은 총 4부로 이루어진 <아리랑> 2부의 마지막 책이었다. 5권에서 땅을 뺏긴 농민들이 만주로 떠나는 것을 보고 한탄했던 것으로 보아, 6권에서 변화된 동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제 감정기가 36년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제 10년째를 맞이하는 6권이 답답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절정에 이르러 3·1 만세 운동을 배경에 담고 있었지만, 앞으로 16년이 흐른 후에 해방될 거라는 사실을 혼잣말로도 할 수 없었다. 들불같이 일어나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강타한 만세 운동 앞에서 숙연해짐은 물론,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있어 쉽게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들고 일어난 후에 일본이 어떻게 보복을 가할 지 뻔히 알면서도 일어설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충을 과연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의 대하소설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하는 것은 역사의 큰 틀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민중의 세세함을 표현해 내는 역량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가상인물과(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 그들은 분명 존재했던 사람들이었다.) 실존인물들이 뒤섞여 등장하는 것은 간접경험에 생생함을 부여해 주는 것이었다. 3·1 만세 운동의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의 등장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늘 고달픈 농민들의 삶이나 일제 앞잡이들의 이야기만 읽다 보니,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아직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에 용기가 샘솟았다. 3·1 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난 만큼 여러 장면을 통해 정황을 살펴보게 해주었고, 일본과 만주, 상해 등 해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사람들의 삶을 파고들어 속속들이 전해 해주었다.

 

  인물 사전이 없었기 때문에 각지에 퍼져있는 인물들의 등장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너무 오랜만에 읽은 책이었고, 기억에 남아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대화나 저자의 설명을 통해 추측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속 시원히 그들의 행적을 되짚어 볼 수 없었다고 해도, 흐름을 익힐 정도는 파악이 되어서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이웃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송수익, 공허 스님, 장칠문, 수국, 방영근, 양치성 등등 역사의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들보다 이들과의 만남이 더 반가웠음은(반갑지 않은 인물들도 있었지만) 더 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 전라도의 사투리가 그대로 녹아들어 읽어나가는데 속도가 더뎌지기도 했는데, 전라도에 살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언어가 구수하게 들릴 정도였다.

 

  흩어진 조각들은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해 앞으로의 이야기를 읽어나갈 원동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철님이 좋은 소설의 미덕은 아주 작은 것들의 섬세한 묘사로부터 나온다고 아리랑을 극찬했던 것처럼,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묘사가 이 소설을 훌륭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은 황폐한 농민들의 삶과 어우러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끈끈한 민족애로 뭉친 그들이 있어 현재의 내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진부하도록 말해 무엇하리.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고, 당시의 고충을 잊어 버렸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아리랑>을 통해 역사의 과거를 간접경험하고, 윗세대들의 고달픈 삶을 통해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3·1 만세 운동이 6권의 주요 사건인 만큼 그 이후에 일본의 횡포는 더 극심해 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학살이 있었고, 조선 사람들은 이 땅에서 더 살기가 팍팍해졌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조선 땅에 일본인이 들어왔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제재할 순 업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 땅을 잃고 타지로 나간 사람들, 일본인 지주아래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출세하려는 사람들 등 그 수많은 사람들이 들썩여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어떤 움직임을 통해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삶의 의미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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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12
조설근 외 지음, 안의운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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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홍루몽 12권을 읽어 3년 동안 끊겨버린 이야기를 완성 시켰다. 9권부터 줄기차게 읽어내던 책이 12권에서는 좀 주춤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왠지 모를 서운함과 장편을 마감 짓는 서사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며칠을 노닥거리다 책 읽기를 마쳤다. 3년만에 책을 다시 잡았을 때는 이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 있었다. 결말을 대충 알고 있다고 해도 과정이 중요한 작품이므로 저자가 인도하는 길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에 대해 저자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왕이면 긍정적이고 교훈을 줄 수 있는 결말로,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며 희망을 엿볼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결말을 향해 가면서 그런 저자의 뜻을 간파해서 그런지 어떠한 일에도 놀라지 않았으며, 그것이 삶의 흐름이라는 순종적인 태도로 홍루몽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보옥이 현세에서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완벽한 세대교체가 이뤄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가세는 기울어가고, 사소한 것부터 큰일까지 많은 사고가 일어나며 가족들의 죽음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보옥에게 기대를 걸 수 없으니, 앞으로 가씨 집안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가씨 집안의 분위기는 다시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울했다. 대부인을 따라 원앙도 따라 죽고, 어른들이 집을 비우고 있는 사이 집안에 도둑이 들었다. 물건만 훔친 것이 아닌 묘옥스님을 납치해 못된 짓을 하고, 왕희봉도 병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묘옥스님이 납치 되어 소식도 없자 석춘은 출가의 뜻을 비친다. 그런 가운데 보옥은 정신을 놓았다 차렸다 하는데, 보옥 또한 현세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통옥령을 얻어 태허환경을 경험한 뒤였다. 보옥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생사를 오락가락 할 때에 웬 스님이 찾아와 구슬을 전해주며, 구슬 값으로 만 냥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 사이에 보옥은 태허환경에 이르러 죽은 가족들을 만난다. 다시 목숨이 살아난 보옥은 그 일로 인해 현세의 물욕이 다 쓸데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가정의 명령으로 과거시험을 봐야 했기에 잠시 정신을 차린 듯 열심히 공부를 하기도 한다.

 

  가정은 대부인을 비롯한 대옥의 시신을 가지고 강남으로 가는 길이라 집안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남은 식구들에게 집안일을 맡겼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희봉의 딸 교저에게 잘못된 혼사를 이어주려는가 하며, 놀음과 주색잡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큰 댁 식구들에 의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더 이상 일이 잘못되려야 잘못 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보옥과 가란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한다. 좋은 성적으로 급제한 보옥은 그 길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사라진다. 다행히도 보옥과 가란이 나란히 합격한 것을 황제가 원춘 귀비의 식구임을 알아보고 갸륵히 여겨 가사의 죄를 용서함과 동시에 몰수 되었던 재산까지 돌려준다. 안 좋은 일만 일어나 흉흉하던 가씨 집안에 조금씩 화기가 돌고 제자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가정은 어머님의 시신을 안치하고 돌아오던 중에 구 소식을 들도, 보옥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보옥이 하계로 내려온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식구들에게도 보옥의 존재를 단념시키지만, 이미 보옥의 아이를 가진 보채와 왕부인, 습인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보옥 자신이 그렇게 될 줄 알고, 식구들에게 여러 말은 해 준 것이 현실이 되면서 보옥이 빠진 가씨 집안은 예전의 부귀영화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고, 사랑하는 식구들과 헤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남겨진 식구들이 앞으로의 생을 잘 이어갈 거라 생각한다. 세상의 인연은 억지로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진 이치에 따라간다고 하니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흐뭇하면 흐뭇한 대로 순리에 따라야 할 것 같다.

 

  조설근이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를 고악이 이어 썼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책의 말미에는 가우촌을 통해 조설근 선생을 등장시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는 익살을 남긴다. '부질없는 이야기'라는 것과 '인생의 허무를 찔러 놓았다.'며 소설을 마무리 하고 있기에, 나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한 편의 긴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홍루몽의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방대하고 거대한 이야기 속에는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그네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그것이 빠졌다면 이 책을 읽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끝까지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쩔 때는 너무 깊숙이 내 안으로 들어와 그들의 희로애락이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잘 마무리를 하게 되어 나름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 호흡에 읽었다면 전체적인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장편을 한 호흡에 읽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앞으로 읽게 될 또 다른 장편들은 이렇게 끊어서 읽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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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졸업식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3
요코사와 아키라 지음, 이경옥 옮김 / 생각과느낌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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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우연히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시리즈를 중 한 권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난 뒤 성장소설에 대한 애정이 급격히 상승했고,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만 달고 있어도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시리즈는 못 읽고 있었는데,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책을 발견하곤 지인을 졸라 구입했다. 책을 묵혀둘 겨를도 없이 집에 오자마자 책을 펼쳐 밤이 늦도록 읽고는 따뜻해지는 마음을 한참동안 부여잡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거라며 책장에 꽂힌 다른 성장소설을 힐끔거리기도 했다.

 

  성장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가 같은 10대로서 공감할 수 있을 때 이런 책을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정작 내 마음을 울리는 책보다 어려운 세계문학과 국내문학을 주로 읽은 터라, 기억에 남는 성장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이제야 성장소설을 열심히 읽는지도 모르겠으나 나의 유년시절에 대한 동경도 어느 정도 자리하는 것 같다.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고 거절하겠지만 10대의 고뇌와 풋풋함이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유코도 자신에게 닥친 현실과 존재감 때문에 힘겨워 하고 있었다. 학교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고,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강박증이 심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를 나가는 것이 두려워 집에서만 보내게 되었다. 그런 유코를 이해해 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 같아도 학교에 가기 싫다고 가지 않는 유코를 보며 겁쟁이라고 놀렸을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은 지금도 실컷 피하면서 유코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싶지만, 그런 힘겨운 시간을 모두가 다 거쳐 왔다는 자부심이라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유코의 고민을 진정으로 이해한 후에 학교를 나가지 않는 것도 나가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을 통해 나도 학교를 나가는 동안 힘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온통 유코의 내면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는 동안 마치 유코가 나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민의 색깔이 다를 뿐 유코와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펼쳐진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코가 학교에 나가지 않자 주변에서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인생을 망치고 말거라는 말만 해댔다. 유코의 진심은 묻지도 않은 채(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집에서 은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엄마랑 단 둘이 살고 있는 유코에게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들이 들려와도 유코는 도저히 학교에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두려움을 오랫동안 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지 자신의 말을 누군가 귀 기울여 주고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은 유코에게 새 학년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유코가 결석할 때도 유코를 회유하려 선생님이 찾아오긴 했으나 유코는 선생님과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온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좀 달랐다. 독특한 웃음 때문에 크큿 선생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유코에게 왜 학교를 나오지 않느냐, 무엇이 고민이냐는 질문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교과서를 던져주면서 필요 없으면 재활용 하라는 둥, 배탈이 났다며 화장실을 이용하겠다고 불쑥 찾아오는 둥, 선생님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행동만 하고 있었다.

 

  그런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유코는 조금씩 호기심이 일었다. 학교와 공부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은 채 매주 화요일에 찾아와 엄마와 잠깐 이야기 하고 가는 선생님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분이라는 기대까지 한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자 유코는 크큿 선생님의 작은 배려로 인해 하나씩 자신을 깨치고 나온다. 어느새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같이 밤바다를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학교에서 받은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게 된다. 온통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크큿 선생님은 유코가 마음을 열게 만들어 주었고, 유코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아픔을 공감할 줄 알았다.

 

  유코는 여전히 학교에 나가지 않았지만, 크큿 선생님으로 인해 세상을 향해 한 발짝씩 내 디딜 수 있었다. 유코 혼자 졸업식을 하던 날,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크큿 선생님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 간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지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단출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조금씩 건강해지려는 유코를 보면서, 변화를 이끌어준 크큿 선생님과 묵묵히 기다려준 엄마, 또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한 발짝씩 내미는 유코가 보기 좋았다. 학교를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코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유코가 세상을 향해 건강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을 보면서 유코의 내면을 낱낱이 봐와서인지 괜히 내가 다 뿌듯해졌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겁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한편으론 유코처럼 등교거부를 하며 내면과 싸우고 있는 상처받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들을 모두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틀에 박힌 교육제도로 아이들을 가두지 않으며, 학교가 생존을 위한 전쟁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아이들이 출발선에서 조금 늦었다고 해서 결코 패배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을 진정 사랑할 때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유코처럼, 아이들에겐 어른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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