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보급판 문고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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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관한 에피소드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나는 주로 내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읽고 와서인지 특별한 기억은 없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속으로 꿈꾸었던 것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갈망이 있었다. 결국 그런 갈망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서 더 책을 많이 보게 되었지만, 우연히 빌린 책 속에서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면 그 사람을 단숨에 사랑할 것 같다. 영적인 교류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 살의 권태에 빠진 콩스탕스처럼 말이다.
 

  로맹 가리를 무척 사랑하는 콩스탕스는 그의 책을 아껴 읽기 위해, 그리고 다른 작가들을 사랑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회원으로 가입한다. 일반회원이 되는데 80프랑이 필요함에도 기꺼이 가입을 하는 콩스탕스를 보면서 우리나라 도서관은 참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사진과 가족관계증명서 한통만 있으면 무료로 가입되어 책을 바로 빌려 볼 수 있다. 거기다 밑줄이나 낙서한다고 일일이 검사하지 않으니(이건 좋은 게 아닌가?) 나름 책을 볼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콩스탕스는 회원으로 가입한 후 빌려온 책에서 한 줄의 낙서를 보게 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누군가 규칙을 위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반납하려던 책에서 사서인 지젤이 낙서를 하면 안 된다며 면막을 주는 바람에 또 다른 글귀를 찾아낸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이 좋은 책이라며 읽어보기를 권하자 콩스탕스는 『노름꾼』의 내용과 그 책에 있을 낙서가 궁금해 안절부절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반납자를 도서관에서 기다려 바로 책을 받고서 역시 그 책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콩스탕스에게 말을 걸듯 밑줄이 그어져 있어 그 사람의 흔적을 좇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이런,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군요.' 라는 문장의 밑줄을 보게 되면 어느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거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어지는 밑줄 때문에 혼란스러워 책을 반납했더라도 다른 여자가 그 책을 읽게 된다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렇게 한껏 꿈꾸게 만든 밑줄 긋는 사람은 그 이후에 읽을 책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콩스탕스는 고독하고 진부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밑줄을 찾아 하는 독서가 서서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밑줄을 찾아 독서를 했다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해 버렸을지 모르나 일상과 맞물리는 밑줄 긋는 사람의 존재는 침착하면서도 빠르게 내면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사람의 흔적을 따라 그를 남자라 확신하고, 그 책을 읽으려는 사람을 찾으려고 했던 것도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고, 밑줄 긋는 남자를 찾아도 부질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사람을 꼭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도서관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의외로 그 사람은 일찍 콩스탕스 앞에 나타난다.

 

  그는 도서관에서 그녀에게 대출을 해주던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편지를 받고, 그와 데이트를 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읽은 책들 속에서 드러난 밑줄로 볼 때 더 고상하고, 아름답고, 문학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너무 평범했고, 콩스탕스가 만난 밑줄 속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밑줄 그은 남자 역할을 했던 청년의 고백이 이어지고, 급기야 청년의 도움으로 밑줄 긋는 남자의 정체를 밝혀내려 한다. 도서관 기록을 이용해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좇으려던 그들은 거의 그 남자를 찾을 뻔 했지만, 그가 최후에 남긴 메시지가 들어가 있는 사프로노프란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긴 것도 최근이 아니었다.

 

  밑줄 긋는 남자는 끝내 밝힐 수 없었다. 그렇게 멋진 문장들을 남겨놓고(작가가 쓴 것이지만 밑줄로 인해 그의 문장인 것만 같았다.) 콩스탕스를 무척 설레고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 속의 밑줄은 콩스탕스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소설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보게 만들었고,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현실에서의 사랑과 이상을 꿈꿀 수도 있었다. 밑줄 긋는 남자와의 이뤄짐이 더 로맨틱하고 애틋하기도 하겠으나, 책 속에 가둬두는 것도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진지하고 독특한 독서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볼 때, 그 사람은 어쩌면 부서지고 상처 입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자는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으로 독자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남자에 대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긴장감 있게 펼쳐놓아 무척 흥미로웠다. 콩스탕스 뿐만 아니라 밑줄 긋는 남자를 어느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서 문학과 인생의 고독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었다. 마지막에 그 사람의 흔적이 툭 끊긴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했으나, 그 사람을 현실에서 만날 수 없더라도 책 속에서 만난 그 시간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느낄 법한 갈망을, 드러내지 못한 희망을 이 책은 충족시켜 주었다. 그래서 밑줄 긋는 남자가 추천해 주었던 책들 중에서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책들을 읽으며 그를 떠올려 보려고 한다. 그가 내게 보낸 메시지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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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야, 어디 가니? - 보행편 6.7.8 안전그림책 1
오시은 지음, 김효은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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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 모양을 보고 있으면 밤톨이 떠오를 정도로 똘망똘망한 꼬마가 보인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어디 즐거운 일이라도 있나보다. 알고 보니 동수는 아빠 생일을 맞아 시장에 선물을 사러 가려고 한다. 혼자 가기엔 좀 이르다 싶지만 엄마와 함께 간 길이라 문제없다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처럼 내리막길을 쌩하니 달린다. 그러다 오토바이와 부딪칠 뻔 하고 걸음을 멈춘다. 혼자 가기엔 조금은 벅찰 것 같다는 걱정이 조심스레 밀려오는 장면이다. 큰 길로 들어서자 더 큰 위험들이 동수 앞에 놓여 있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골목도 많아 한시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다. 그럼에도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횡단보도를 차분히 건너는 모습이 당차 보인다.

 

  동수는 아빠 선물을 사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인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임에도 마냥 즐겁다. 한참 호기심이 많을 나이를 증명하듯 동수가 지나는 거리는 유혹하는 것들과 주변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맨홀 구멍과 공사장이 동수를 위험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이 가지고 노는 자동차, 평소에 갖고 싶던 로봇, 아이들이 잔뜩 모여서 즐기는 게임기 앞에서 기웃거리며 잠시 목적을 잊은 듯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장으로 가려는 찰나, 동수는 길을 잃어 버렸다. 여기저기 눈에 익은 곳을 살피며 길을 찾으려 하지만 봐도 봐도 낯설다. 그러다 엄마와 함께 지나던 길에서 본 교회를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가보지만 역시 낯선 곳이었다. 동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만다.

 

  길을 잃은 것을 알게 된 동수는 엄마, 아빠를 다시 못 만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 빠진다. 어렸을 때 누구나 저런 경험이 한 번쯤 있어서인지 동수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가면서도 동수가 어떻게 이 위기를 빠져 나올지 궁금해진다. 똘망똘망한 모습처럼 잘 헤쳐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시장만 찾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길을 묻기로 한다. 엄마가 가르쳐 준대로 길을 물으려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난감하다. 경찰서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며 두리번거리다 우체국을 찾는다. 그리곤 우체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한테 시장가는 길을 물어본다. 친절한 아주머니는 동수에게 길을 알려 주고, 낯익은 간판이 보이자 그 정도는 문제없다며 자신 있게 시장으로 달려간다.

 

  아주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부지런히 앞만 보며 걷자 익숙한 시장이 보인다. 과일집 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선물 가게에 들어서다 엄마를 발견하고 와락 매달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을 잃어 버려 마음 졸였을 동수에게 엄마는 이 세상 누구보다 반갑고 든든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엄마와 함께 선물을  들고 앞장서서 걷는 동수는 언제 길을 잃어 버렸냐는 듯 당당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단순히 동수가 시장가는 과정만 드러낸 것이 아니라  '안전을 이야기하되 아이들의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잃지 않도록 건강한 안전 교육의 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동수가 지나왔던 골목길, 공사장 현장, 횡단보도, 길을 잃어 버렸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안전하게 보행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긍정적인 상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똘망똘망한 동수처럼 사실적이면서도 너무 귀여운 그림 앞에 저자의 의도를 잃어버릴 뻔 했다. 친절한 부가 설명이 있어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저자의 의도를 확실하게 심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 책의 뒷면에는 생일 파티를 하는 가족의 모습이 드러나 있어 흐뭇한 마음으로 동수의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어 기뻤다. 너무 귀여운 동수가 무사히 시장에 다녀온 것, 길을 물어 잘 대처한 것이나, 엄마를 만나 즐겁게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다행이다 싶었다. 한참 막내 조카를 돌볼 무렵 어린이집 차 시간에 못 맞춰 몇 번 길이 엇갈린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는데, 조카에게 이 책을 읽혀 조금씩 스스로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면 좋을 것 같다. 혼자서도 잘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동수를 통해 배워 스스로 깨우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간접 교육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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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1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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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책장의 책들이 약간 무서워졌다. 책들이 불쑥 말을 걸 것도 같고, 내가 없는 사이에 자기네들끼리 서열을 지어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주인공 유리코의 오빠 히로키는 책에 씌어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오빠를 구하기 위해 초등학생인 유리코는 머나먼 세계로 무거운 짐을 안고 떠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담고 있다 보니 내 책장의 책들이 가벼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물론, 선한 길로 인도할 것만 같은 책들이 시시탐탐 독자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범하던 가정에, 무엇보다 모범생이고 정직했던 오빠가 동급생 둘을 칼로 찌르고 사라진 사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오빠가 칼로 찌른 동급생 한명은 사망했고, 나머지 한명도 중태에 빠졌다. 오빠는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그런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빠가 저지른 사건은 학교와 사회에도 충격으로 다가왔고 가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부모님은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런 오빠가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렸다. 유리코는 의아함이 가득한 가운데 오빠의 방을 둘러보다 얼마 전에 오빠가 방의 창문 밖에서 검은 형체를 바라보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유리코에게 말을 거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유리코에게 말을 건 것은 사람이 아니라 책이었다. 오빠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 아쥬었다. 화들짝 놀란 유리는 아쥬를 통해 오빠가 '영웅'에 홀려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오빠가 영웅의 서를 발견하게 된 할아버지의 양자의 별장으로 부모님께 핑계를 대서 함께 향하게 된다. 그 곳에서 마난 다른 책들로부터 '영웅'의 본체는 이 '테두리'에 없다는 것과 다른 곳에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힘을 전할 수 있는 일종의 사본이 몇 권 있는데 오빠가 만난 책이 그 책들 중 하나인 '엘름의 서'였다.

 

  아쥬를 비롯한 다른 책들에게서 영웅의 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유리는 오빠를 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감당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쥐로 변한 아쥬와 함께 책들의 도움을 받아 전혀 다른 세계인 이름 없는 땅으로 오빠를 구하러 간다. 어린 유리코가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지만 오빠가 저지른 일이 아니란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빠가 왕따를 당하던 동급생을 돕다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더더욱 오빠를 구해 현세로 돌아와야 했고, 영웅의 서의 역사에 감춰진 이면의 세계를 철저히 맛보게 된다.

 

  유리코는 악한 영웅의 서를 쫓아 없애려는 늑대라고 불리는 애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인간시절의 죄업 때문에 평생 노동을 해야 하는 무명승 소라도 만나게 된다. 소라를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처지가 불쌍해 같이 동행하게 되는데, 그 무명승의 정체가 책의 끝에 밝혀짐으로 최고의 반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영웅의 봉인이 풀려 사악한 힘을 발휘하게 된 시점에서 오빠가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고 사건의 발원지인 헤이틀랜드로 향해서 그곳의 역사와 영웅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것들을 모두 알아버린 유리코를 바라보고 있자니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방대한 세계 속에서 유리코는 너무나 작아 보였고,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리코에게 오빠를 구하는 일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유리코를 돕는 무리들이 있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아쥬는 물론 조금은 호의적인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유리코와 어느 정도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늑대 애시, 특별한 존재감을 갖지 않고 시시때때로 도움을 주는 무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영웅의 힘을 빌어서라도 인간세계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을 행하려 했던 한 남자의 정체는 씁쓸하기만 했다. 그의 목적이 이뤄지지 않았음은 물론, 그 잘못된 생각으로 유리코의 오빠가 희생되었다. 그리고 영웅의 사악함은 언제든지 현세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것을 막기엔 유리코의 존재가 너무 미미했지만 유리코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품을 수 있다는 결말은 희망을 말해주는 듯 했다.

 

  어쩌면 사건이 터진 시점부터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리코를 따라 사건의 계기를 알게 되고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면서도 희망을 버리진 않았지만, 너무나 생소하고 방대한 판타지 세계에 넋을 잃고 말았다. 늘 사회문제를 저변에 깔고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는 저자의 역량을 또 한 번 느끼면서도  길고 긴 여행의 공간이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만만치 않음도 느꼈다. 유리코의 오빠가 왕따 문제로 그런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 인간의 영역을 넘어 다른 힘을 이용하려 했던 것, 어설픈 영웅의 인간의 심리를 사악하게 쓰려 했던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질척함을 바라본 것 같다. 인간이 그런 욕망을 이겨낼 수 없다면 언제든지 유리코의 오빠처럼 희생당할 수 있고, 영웅의 힘을 엉뚱하게 쓰려는 남자처럼 언제든 유혹당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이 사악함으로 물들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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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히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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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3종세트를 다 읽고 나니 하루키의 다채로운 문학세계로 들어갔다 온 기분이다. 세 권의 책에서 풍기는 색깔이 조금씩 달라 읽는 내내 색다름을 맛보았다. 단편 하나하나가 모두 독특해서 많은 여행지를 둘러 본 기분이랄까.  다양한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아, 과연 하루키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조금씩 기대하게 된다. 이번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들뜨게 되고, 너무나 생경한 상황 속에서도 자연스레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게 된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저자가 흩뿌려 놓은 글의 마력 때문이리라.

 

  『반딧불이』가 환상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고  『빵가게 재습격』은 기발함을 담고 있다면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그래서 이것은 하루키가 쓴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타인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담으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다. 구전 소설처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고, 나와는 먼 나라 얘기라는 기분도 들었다. 첫 단편  『레더호젠』이 그랬다. 독일에서 흔히 입는 반바지 레더호젠 때문에 이혼하게 된 한 여인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타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남편과 비슷한 사람에게 반바지를 입혀보면서 남편에 대한 혐오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글로 풀어내는 효과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택시를 탄 남자』는 묘한 여운을 남겨 주었다. 화가를 꿈꾸다 결국 큐레이터가 되었지만 자신을 위해 사들인 한 장의 그림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 속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아테네의 택시 뒷자석에서 그림속의 남자를 만난다. 매일 쳐다보던 그림이었기에 단박에 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여행이 되길 원한다며 인사하던 그 남자의 모습을 기억하는 여인. 그러면서 '사람은 뭔가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지워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저자는 타인으로부터 들은 독특하면서도 기이한 느낌까지 불러들이는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내면의 사각지대를 여과 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사라져 버렸을 이야기들. 이미 그런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많지 않는 우리의 기울임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런 삶의 모습이 쌓여서 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사람들의 형태를 만들어 간다고는 하지만 종종 잊혀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풀사이드』의 한 남자처럼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 그의 고민이 남 일 같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비를 피하다』의 여자처럼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불행의 변화에 비난을 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당사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때론 말하는 것으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들도 그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자신만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가볍게 꺼냈을 수도 있고, 은밀한 얘기들을 조심스레 들려주었을 수도 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 독특한 경험을 한 셈이다.

 

  가끔 고요함이 나를 지배할 때, 밤 풍경을 자주 지켜보게 된다. 어둔 밤을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나만 혼자 동떨어진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한 적이 많다. 그런 의문과 궁금증에 하루키가 조금이나마 대답을 해 준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삶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내게 밀려오는 고독에 점령당하지 않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이 사람들처럼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고 해도 그것 또한 내 나름대로는 최선의 삶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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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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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을 하려고 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 나이가 되니 그런 눈을 보면서 낭만적인 생각을 하기보단 내일 출근 걱정을 하게 된다. 혹여나 버스가 끊기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눈을 보며 마냥 좋아하고, 혼자 낭만에 빠지겠다고 눈 위를 걷는 것도 불사했는데, 이제는 일상에 지장이 갈까 걱정하는 단계가 되어 버렸다. 이런 날은 그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며 재미난 책을 보는 게 최고다. 서정적이고 현대적인 소설보다 현실을 잊을 정도의 재미가 깃든 고전이 좋을 것 같다. 일본 환상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이즈미 교카의 작품은 어떨까? '괴이하고 몽환적인 환상 세계'로 이끈다고 하니 어디 한 번 따라가 보자.
 

  책을 읽기 전에는 표지를 보면서 그냥 달이 참 밝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고야산 스님>을 읽고 나니 표지가 으스스한 게 꼭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 같았다. 1900년 작품인 <고야산 스님>은 저자의 작품 중에서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승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런 시작부터가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고야산 스님이 행각승일 때 주막에서 만난 한 약장수 때문에 길을 잘못 들게 된다. 길이 잘못 알고 다른 곳으로 간 약장수를 만나러 들어간 숲은 표지처럼 적막하고 괴이했다. 뱀들이 진을 치고 나뭇가지에서 산거머리가 뚝뚝 떨어지는 곳을 겨우 통과한 스님은 외딴 오두막에 닿게 된다.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의 독특한 매력에 끌리면서도 외따로이 떨어져 살고 있는 그녀가 가여워 잠시 혼란스러워한다. 그때 그 집을 드나들던 한 영감으로부터 그녀의 정체를 듣게 되는데, 욕정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력을 가진 여자였다. 길을 잘못 들고 깊은 산속에서 뱀과 산거머리를 만나고, 외딴 오두막의 미모의 여인을 만날 때부터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여인의 정체가 밝혀지자 내심 나를 따라다녔던 기이함이 정체를 드러낸 셈이다. 백 년 전의 작품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와 오싹함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함이었다.

 

  <초롱불 노래>는 1910년 작품으로 국내에는 처음 번역되었다고 한다. <고야산 스님>이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라면, <초롱불 노래>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구성이 돋보인다. 일본의 전통 예능인 노가쿠를 소재를 삼아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 노가쿠 배우와 연주가는 여관에서 게이사로부터 자신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이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된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노가쿠계의 촉망받던 기다하치란 사람이었다. 맹인 안마사를 죽음으로 몰고 가 파문당한 그는 다른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다른 공간에서 각자였던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노가쿠의 한 대목을 보여주게 된다.

 

  <초롱불 노래>는 조금 독특한 기법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서인지 처음엔 공감각이 형성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제각각의 이야기가 섞여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하다 이야기가 합쳐지고 그들이 만날 때에야 이 독특한 소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고전 미학을 다뤘다는 점에서 조금 생경함을 느꼈으나 저자만의 기이함으로 작품을 완성시키는 모습에 감탄하게 되었다. 두 편의 작품이 실린 얇은 책이지만 시공간을 잊을 정도로 푹 빠져들게 만든 책이었다. 겨울밤에도 무척 잘 어울렸고, 현대문학의 홍수 속에서 만난 고전의 매력을 새롭게 맛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환상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이즈미 교카'란 저자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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