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아직도 미혼이었다면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면서 살고 있을까? 결혼한 뒤로 그런 상상을 정말 쉴 새 없이 해봤지만 늘 답은 똑 부러지게 나오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상상의 한계였기에 그야 말로 ‘만약에’로 끝나버린다. 여행도 좋아하지 않고, 혼자서는 멀리 가본적도 없으면서 저자가 패키지 투어로 다녀온 곳들을 보면서 놀랐다. 41살부터 48살까지 북유럽 오로라 여행(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독일), 몽생미셸 여행(프랑스), 리우 카니발 여행(브라질), 핑시 풍등제(타이완) 여행을 다녀 온 기록을 읽으면서 글로 표현되지 못한 더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보고 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저자의 여행 동선을 따라가면서 나름대로 나만의 경로를 짜보기도 했다. 오로라 여행은 그대로 따라가고, 프랑스는 남부로, 브라질 대신 파타고니아로 가겠다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자가 브라질 여행을 하면서 패키지 투어 덕에 여자 혼자서도 이렇게 다닐 수 있다며 안심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여행을 하기도 전에 걱정이 더 많아 시도조차 해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에는 좀 더 용기고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리 경험해도 그렇게 되지 않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여행은 쌓이면 쌓일수록 더 즐겁고 느긋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기에(그렇다고 여행을 아예 안 가겠단 뜻은 아니지만), 저자의 기록을 읽으면서 간접체험하고 상상해보고 느껴보는 것이 좋았다. 여행지가 어디쯤인지 지도를 보고, 그곳에서 본 풍경과 맛있는 음식들, 기념품들을 꼼꼼히 보다 보면 마치 내가 과거에 그곳을 여행한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 타이완의 지우펀 사진을 보고 낯이 익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올 초에 타이완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온 조카가 준 엽서가 생각났다. 내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사다주었는데 정작 나는 받아놓고도 잊어 먹고 있었다. 그러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무대가 되었다고 하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지브리 스튜디오 홈페이지에는 지우펀이 무대가 되었다고 확실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장 앞에 세워져 있는 엽서와 책에 실린 사진을 나란히 비교해보니 기분이 묘해져서 웃음이 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자가 2011년~2017년 사이에 여행한 기록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에 난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니 더 그런 기분이 들었나보다. 결혼을 하고 육아만 하던 시기라 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기에 여행한 저자의 글이라 훌쩍 떠나고 싶기도 했다. 가족과 나의 자잘한 걱정과 근심은 덜어놓고 훌쩍 다녀올 수 있는 여행.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출발도 못할 것 같지만 만약 미혼이었다면 한번쯤 미친 척 하고 실행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패키지 투어라는 안전하고 편리한 장치가 있으니 혼자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말이다. 저자 또한 혼자 여행하면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나는 나의 한 번뿐인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을 만나러 온 것이다.(85쪽)’라고 했으니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소망이기도하고 나 역시 그런 바람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당장 그럴 수 없기에 그런 소망은 더 소중하고, 타인의 여행을 질투로 바라보지 않고 언젠가 떠날 나의 여행으로 대입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을 행복하게 기다리는 방법이 아닐까? 거기다 내 주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야를 가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상의 여행이 될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이재훈 지음 / 두란노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중반쯤부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 눈물을 떨어트리고 싶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이 책을 마주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함으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집행되고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함으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느새 나는 율법에 갇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고,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도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지 하나씩 알게 됨에 따라 마음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서서히 스며들어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인지, 얼마나 귀한 은혜를 잊고 있었는지를 더 깨닫고 싶었다.

내가 가장 크게 범하고 있었던 잘못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라는 게 모든 걸 완벽하게 이룬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여겼다는 점이었다. 절대 완벽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이라고 믿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어리석게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어서 주님과 내 사이에 커다란 벽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늘 죄인이었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고 죄성을 타고 났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죄는 좀 달랐다.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하고, 구하지 못하고,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정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스스로를 정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먼저는 ‘우리를 정죄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정죄해서는 안’되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그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정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사하해 주신 죄와 내려주신 은혜를 받을 통로를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다. ‘우리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는 것은 100퍼센트 확실하게 교만이 있기 때문(172쪽)’이라고 했듯이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교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비롯한 우리를 계획하실 때부터,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을 뿐 아니라 은혜 속에서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하지만 왜 그게 나 때문인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인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팽개쳐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풍성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135쪽)’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이미 부어주신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성령을 외면하고 살아갔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나를 외면하신 적이 없고, 지금도 나를 위해서 부지런한 농부가 되어 나를 염려하고 보살피고 계심에도 나는 교만에 빠져 모든 걸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반성의 눈물이 아닌,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의 깊이에 대해 감격하는 눈물이 나왔던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수많은 고민들에 ‘영원’을 넣어보라는 말처럼, 한순간에 쓸데없는 걱정을 털어버리게 하시고,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 불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말씀이 나를 점점 하나님께 다가가게 만들었다. 또한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다짐하면서도 잘 몰라 늘 헤매기 일쑤인데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오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도 경험했다. 나는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으로 이 세상에 내보내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사실을 통절히 깨닫는 순간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마음의 걱정과 근심이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전히 주님께 나아감을 경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이 깨달음을 어떻게 드러내며 살아가야 할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자아는 ‘너 자신을 부인하라.’였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음으로 끝내지 않고는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하지만 적확하게 보여주고 계신다. 즉 ‘옛 자아가 솟구쳐서 자아가 영광 받고, 자기가 드러나고, 자기로 충만해지는 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했다. 이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자아도취와 교만에 의해 내 영광을 더 드러내고 사탄의 유혹에 따라 세상에 쏠리고 천국을 지루한 곳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한편으로 마음에 부담이’ 되는 이유도 내 힘으로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힘으로 결코 할 수 없고, 성령의 교통하심의 은혜를 입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듯이 오로지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때론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말하고 있다. ‘사랑하면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 앞에 무슨 핑계를 댈 수가 있겠는가. 종종 우리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의 삶이 땅에 파묻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우리는 들어 올리’신다고 했다. 그 과정이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 올리신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사랑이 바탕이 된 순종이 뒤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놓쳐버리기가 쉬워진다. 우리가 영원한 관점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늘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하고, 이 세상에 머무르게 하고, 우리의 시선을 속이는 사탄의 공격과 시험이라고 했듯이 늘 하나님 곁에 바짝 붙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죽으면 끝나는 인생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로 계획하고 창조하셨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대가 없이 주셨으니 그 영광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바라보고 나아가라고 했다.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지 모른다. 왜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내 안에, 세상에 갇혀 살아왔는지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우리의 몸은 아직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 머물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늘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살 때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83쪽)’이라고 했으니 이보다 더 든든한 후원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온갖 율법에 얽매인 허례허식들을 모두 제쳐버리고 오로지 주님께 나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할 때에 진짜 내가 사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낱낱이 목도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드렸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리스도처럼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어느 때보다 마음이 평안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온갖 더러운 생각과 반성을, 모르던 죄와 해결책이 없던 문제들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휩쓸려 사라졌다. 매일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은혜를 깨닫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 마음에 가득 들어찰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의 나로 돌아가 스스로를 정죄하며 쩔쩔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새 사람이 되었고, ‘죄가 아니라 은혜가 더 필요하’므로, 그 ‘은혜 앞에서 한없이 낮추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의 눈물도, 내게 와 닿은 수많은 말씀과 성령 충만한 은혜도 모두 예비하고 계셨다 여기면 그저 나는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수밖에 없다. 어느 때보다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 이후북스 책방일기
황부농 지음, 서귤 그림 / 알마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책방을 한 번 열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크진 않더라도 동네를 꿋꿋이 지키는 나름 아기자기한 책방을 꿈꿨다. 까짓것 책이 없으면 우리 집에 있는 내 책들을 갖다 놓기만 해도 분위기가 형성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내 내 책들을 불특정 다수가 읽고 뒤적이는 걸 견딜 수 있을지, 또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 온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쓰잘머리 없는 걱정들이 가득 채워졌다. 그러면서도 근처에 만화방이라도 생기면 괜히 질투심이 일었다. 나도 저렇게 책방 열고 싶은데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나와는 달리 독립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나는 절대 책방 같은 건 못 열겠구나란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이 쉴 새 없이 교차해 그냥 나만의 책방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책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읽어주는 이들이 있어야 비로소 책은 책으로서 빛난다. 11쪽

내가 읽음으로써 빛난 책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리고 내 책장에는 아직 빛을 못 내는 책과, 빛을 내고 있는 책, 그리고 빛을 내었지만 빛을 잃어가는 책, 그리고 오래도록 빛날 책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책들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들지만 언젠가는 모두 빛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스스로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곤 한다. 그래서 여전히 그게 빛인지 아닌지 존재조차 모르는 책들이 더 많을 것 같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적어도 이 순간에는 <굵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이 책을 빛나게 해주었다고 믿었다. 책방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일들과 그 안에 담긴 고민과 기쁨, 그리고 번뇌까지 무겁지 않고 솔직하고 때론 웃기게 담아 놓았다. 서슴없이 책방에 와 달라고 질척대고, 책을 사줘야 굶어 죽지 않는다고 징징대고, 책방의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소화하는 모습을 보며 크기는 작을지 몰라도 스펙터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이 느껴졌다.

매일매일 같은 공간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책과 음료를 판매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책방에 있으면 한가롭게 책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소개하는 책들을 사람들이 막 사가지 않을까란 착각을 보란 듯이 일깨워 주는 글을 읽고 있으면 역시 독자와 사업자는 확실히 다름을 느꼈다. 어떨 때는 둘의 경계가 없다가도 음료 판매와 책 판매 매출을 고민하고 다행히도(?) 책 판매비용이 더 많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안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행보가 계속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책을 사가는 사람이 꾸준하기를, 지금처럼 매력적인 책방이 계속 유지되기를 말이다.

책방이라는 매력에 끌려 읽게 되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게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은 ‘이후’에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후책방’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때론 추천한 책이 독자에게 어떻게 닿았을지 고민하는 부분에서는 책임의 영역을 능가한 다른 것을 보았다. 성심성의껏 추천했지만 한 권의 책이 각각의 독자에게 닿는 방법과 이유는 모두 다르기에 같을 수 없음을 나 또한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래서 있는 자리에서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꼭 책에서만 그럴까. 모든 순간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한다면 좀 피곤할지 몰라도 적어도 삶의 생기는 잃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난 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점 위치를 찾아봤다. 작년까지 매달 다녔던 치과 근처인 것을 알고는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성이 나왔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분명 치과 가는 길에 들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꿋꿋이 내 자리에서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도 나만의 응원 방식이라 여기면서 아쉬움을 덜어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아직도 미혼이었다면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면서 살고 있을까? 결혼한 뒤로 그런 상상을 정말 쉴 새 없이 해봤지만 늘 답은 똑 부러지게 나오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 하에 할 수 있는 상상의 한계였기에 그야 말로 ‘만약에’로 끝나버린다. 여행도 좋아하지 않고, 혼자서는 멀리 가본적도 없으면서 저자가 패키지 투어로 다녀온 곳들을 보면서 놀랐다. 41살부터 48살까지 북유럽 오로라 여행(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독일), 몽생미셸 여행(프랑스), 리우 카니발 여행(브라질), 핑시 풍등제(타이완) 여행을 다녀 온 기록을 읽으면서 글로 표현되지 못한 더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보고 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저자의 여행 동선을 따라가면서 나름대로 나만의 경로를 짜보기도 했다. 오로라 여행은 그대로 따라가고, 프랑스는 남부로, 브라질 대신 파타고니아로 가겠다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저자가 브라질 여행을 하면서 패키지 투어 덕에 여자 혼자서도 이렇게 다닐 수 있다며 안심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여행을 하기도 전에 걱정이 더 많아 시도조차 해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에는 좀 더 용기고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리 경험해도 그렇게 되지 않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여행은 쌓이면 쌓일수록 더 즐겁고 느긋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기에(그렇다고 여행을 아예 안 가겠단 뜻은 아니지만), 저자의 기록을 읽으면서 간접체험하고 상상해보고 느껴보는 것이 좋았다. 여행지가 어디쯤인지 지도를 보고, 그곳에서 본 풍경과 맛있는 음식들, 기념품들을 꼼꼼히 보다 보면 마치 내가 과거에 그곳을 여행한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 타이완의 지우펀 사진을 보고 낯이 익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올 초에 타이완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온 조카가 준 엽서가 생각났다. 내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사다주었는데 정작 나는 받아놓고도 잊어 먹고 있었다. 그러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무대가 되었다고 하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지브리 스튜디오 홈페이지에는 지우펀이 무대가 되었다고 확실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장 앞에 세워져 있는 엽서와 책에 실린 사진을 나란히 비교해보니 기분이 묘해져서 웃음이 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자가 2011년~2017년 사이에 여행한 기록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에 난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니 더 그런 기분이 들었나보다. 결혼을 하고 육아만 하던 시기라 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기에 여행한 저자의 글이라 훌쩍 떠나고 싶기도 했다. 가족과 나의 자잘한 걱정과 근심은 덜어놓고 훌쩍 다녀올 수 있는 여행.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출발도 못할 것 같지만 만약 미혼이었다면 한번쯤 미친 척 하고 실행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패키지 투어라는 안전하고 편리한 장치가 있으니 혼자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말이다. 저자 또한 혼자 여행하면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나는 나의 한 번뿐인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을 만나러 온 것이다.(85쪽)’라고 했으니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소망이기도하고 나 역시 그런 바람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당장 그럴 수 없기에 그런 소망은 더 소중하고, 타인의 여행을 질투로 바라보지 않고 언젠가 떠날 나의 여행으로 대입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을 행복하게 기다리는 방법이 아닐까? 거기다 내 주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야를 가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상의 여행이 될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유를 그럴싸하게 표현할 재간은 없다. 고등학교 때 읽은『죄와 벌』이 너무 어려워 치를 떨었음에도 20대에 우연히 다시 읽고는 반하고 말았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주변에 그의 작품들을 선뜻 추천할 수 없었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장황스럽고 세세한 묘사들이 좋으면서도 때론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매력을 알게 되면 계속 읽게 되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이런 고리타분한 분위기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문학동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기존의 번역과 너무 달라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책을 읽기 전 하퍼 리의『앵무새 죽이기』를 21년 만에 읽었다. 출판사가 바뀌면서 같은 책을 다시 번역한 김욱동 님은 "평소 모든 번역은 줄잡아 10년 단위로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고 했다. 더불어 "이 작품을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새로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간 것이 아니라 서까래를 갈고 벽을 허무는 등 집 자체를 새롭게 뜯어고쳤다."라고 했다. 나는『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원문을 살펴볼 정도의 능력도 없고, 비교해도 정확한 분석을 할 재량도 없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분명 새로운 번역이 달랐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임에도 현대소설로 읽힌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현재 우리가 쓰는 용어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니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리타분함이 사라진, 요즘 소설로 읽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그럼에도 이 방대한 소설은 내 안에 얽히고설켜 붕붕 떠 있기도 하고, 내면 깊숙이 들어와 있기도 했다. 여전히 내면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소설의 수많은 장면이 수시로 불쑥 올라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당황하게 만들 때도 있다. 굵은 줄거리는 가장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죽음, 즉 친부살해로 이어지지만 그전에 카라마조프가의 아들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 그리고 한 번도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스메르쟈코프까지)에 대한 섬세한 내면 묘사와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가장의 죽음이 잊힐 때도 있었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에 초점이 맞춰 있지만 결국 진실은 만인에게 드러나지 못한 채 죄가 없는 큰 아들 드미트리가 20년의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난다. 이송 중에 그를 탈출시키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과연 그렇게 탈출을 시킨다고 해서 그의 억울함이 풀릴는지, 진정한 갱생과 구원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없는 이반의 혼수상태가, 호소 짙은 담당 변호사의 변호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여인들과 오해가 풀리는 과정들이 그저 모두 안타깝고 힘만 빠졌다.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결코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주지도, 오히려 인간의 추악한 면을 거침없이 드러낸 인물로 구제할 길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살해의 정당함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죽음에 이르고 드미트리가 형을 선고받는 순간까지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의문들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아버지를 누가 죽였는가, 행위는 스메르쟈코프가 했지만 아버지를 죽인 살인죄를 그에게만 물릴 수 있는가, 드미트리의 억울함은 누구라도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물음들이 끝없이 이어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독자인 나도 아버지의 죽음에 가담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한 번도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스메르쟈코프를 살인자로 설정한 것에 이미 우리는 가해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성정을 타고난 세 아들들은 아버지의 면모에 괴로워하지만 결국은 그들의 몸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각기 다른 형태로 아버지의 닮고 싶지 않은 면모가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기도 한다.

저자는 신앙, 사랑, 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 한 가지 주제도 섣불리 다룰 수 없는 방대함을 세 아들에게 투영시킨다. 그들의 생각을 듣고 있으면 모두 맞는 말 같아 때론 마음이 동하기도 한다. 알료사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순수함과 신을 향한 믿음, 드미트리의 예측할 수 없는 열정과 삶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때론 삐뚤어진 내적 갈등, 이반의 선善과 신에 대한 부정과 불합리함이 드러날 때가 그랬다. 특히 이반을 그런 내면을 잘 드러내는 5편의 「반역」「대심문관」부분은 이 소설이 소小우주를 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심오하고 심오하다. 세 형제(혹은 네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삶을 탐미하고, 욕망과 충동, 양심에 각기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모습은 결코 독자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시간, 공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과 갈등은 농밀하게 닮아있다. 때론 인물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사상, 삶의 편린들이 이렇게 다른가란 벽에 맞닥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인간군상임을 통절하게 느끼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좋은 어떤 추억만큼, 특히 아직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살면서 갖게 된 추억만큼,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숭고하고 강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는 걸 꼭 알아두십시오. (…) 그런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이랍니다. 3권 520~521쪽


드미트리의 유형 확정으로 소설이 끝나버렸다면 허무함과 쓸쓸함, 답답함이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류샤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의 친구들과 알료샤, 추억이 남아 있는 그의 집 근처 바위 옆에서의 조사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마음을 풀어주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마음 속 깊이 추억하고 간직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 여겨진다. 처음엔 악연으로 만났던 아이들이지만 모두 하나 되어 일류사를 추억하고, 알료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에서 그 아이들이 진정으로 ‘추억을 많이 가지고’ ‘평생토록 구원’ 받기를 바랐다. ‘구원’의 의미는 각자 다를 것이고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조건이 붙기보다 구원의 요소가 풍부한 사회가 뒷받침 되어 주었으면 싶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한다. 알료샤가 조시마 장로에게 그러했듯, 이 아이들이 알료사에게 그러했듯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도움의 손길도, 도움을 줄 방법도 많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로 인해 우리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구원’은 무엇인지, ‘구원’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지, 어쩌면 평생 찾아야 하고 찾아야 할 질문에 조금 다가간 기분이 든다면 너무 억지일까? 부디 그들의 앞날에, 또한 우리의 미래에 평안한 ‘구원’이 있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