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소망 - 인생의 밤이 길고, 상처가 깊을 때
케이티 데이비스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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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다 보고 계신다.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다 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 상처를 사용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하나님은 무조건 고통을 피해 가게 하시지 않고, 고통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가도록 성장시킨다. 142쪽


초반에 집중이 되질 않아 책을 덮었다, 펼쳤다 계속 반복했다. 입양한 딸들이지만 열세 명의 엄마라니. 사역자로 우간다에 왔다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세 명의 딸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지 상상이 되질 않아 답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아마 답답했던 상황은 나보다 8살이나 어린 그녀가 열세 명의 아이들을 수고롭고 힘들지만 기꺼이 키워내는 상황에서, 두 명의 내 아이들을 힘들다고 티를 낼 수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들을 키우는 것만이 그녀의 일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집을 내어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모든 것이 엉망일 게 빤한데도 그녀는 기쁘게 그 모든 일을 감당했다. 그 사실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다는 절망감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주님과 함께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런 고통과 슬픔, 상실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될 줄 몰랐다. 처참한 현실이 나의 장밋빛 낙관을 무참히 깨 버림으로써, 그 낙관이 진짜 소망을 흉내 낸 싸구려 모조품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23쪽

그녀가 하는 일은 주님이 없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많은 아이들을 남겨 놓고 죽어가는 엄마를 돌보고, 남겨진 아이들을 걱정하고 맡아줄 사람을 찾는 일.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하나님께 따져 묻기도 했다. 왜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에게서 엄마를 지켜주지 않냐고 말이다. 주님께서 구해 주실 거라 믿지 않으면 그 모든 과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 투정도 부리고, 상심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언제나 주님은 곁에서 모든 걸 예비하고 계심을, 인간의 생각보다 더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가 너무 은혜로웠다.

딸아, 네가 고단한 걸 잘 안다. 하지만 나는 피곤하지 않다. 나는 지치지 않는다. 절대 피로해지지 않는다. 내게 기대라. 네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니. 175쪽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사역 속에서 그녀는 피곤하다고 주님께 말하면 주님은 이런 음성을 주셨다. 이런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과 마음이 있다는 사실 앞에 숙연해졌다. 주님께 기대지 않고 내 의지대로, 기분대로, 멋대로 해석하고 풀었던 나의 과오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영원한 불에서 꺼내 주신 분이 이 짧은 삶의 고난에서도 당연히 구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기에 내 삶에 윤기가 하나도 없고 다른 사람과 비교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사역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보면서 정말 그렇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그 안에서 뜻을 찾으려는 그녀의 모습만 봐도 평안했다. 우간다에서 그녀가 만나고 돕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새 삶을 찾아 갈 때 그녀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렸다. 그야말로 주님의 은혜가 풍성한 삶이었다.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해하지 않았고 모든 현실을 자책하지 않았으며, 좌절하지 않았다. 주님께 생명이 있고,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를 통해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이 다행이면서도, 우리가 돕고 하나님을 알려줘야 할 사람들이 많음을 보았다. 언제까지 내 신앙에 갇혀 자책만 하고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세파에 시달려 만신창이가 되고 무엇 하나 내놓을 것이 없는 우리지만, 예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웃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녀 같은 사역을 못해서 내가 작아지는 게 아닌, 내 믿음을 키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하는 게 내가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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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내가 된다 - 청년 멘토 이영표를 뛰게 하는 가치들
이영표 지음 / 두란노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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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확신이 없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꿈이 없으면 어때, 그래도 괜찮아. 꿈을 찾는 게 더 힘들어.’ 혹은 ‘꼭 뭔가를 해야 해? 안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안 돼?’ 이런 내용이 전부다. 그러다 어린 나이에도 하고 싶은 게 확실하면 대단하다고 말해준다. 나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몰라서 찾고 있다고 좀 멋쩍어 하면서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내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다. 그리고 꿈을 찾으라는 말도 그렇다. 이렇게 꿈에 대한 나의 모호한 말과는 달리 축구 선수로 익히 알고 있는 저자의 ‘재능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란 말에 어떻게 이런 확신이 드는지 궁금해졌다.


자신의 재능을 찾아 쉽게 성공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숨겨 놓으신, 노력으로만 찾을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인 또 다른 의미의 재능을 찾아나서야 하지 않을까? 이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38쪽

늘 재능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여겼던 내게는 좀 과하게 들렸다. 하고 싶은 분야에 10년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공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당장에 결과물을 알 수 없기에 미적지근하게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 숨겨 놓으신 재능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꿈과 재능에 대한 나의 태도는 그야말로 내 안에 내가 주인인, 인간적인 마음으로 가능과 불가능을 멋대로 나눴기 때문이었다.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고 입술로 말하면서 정작 이성적으로는 내가 주인인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토록 활력이 없고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세상을 향해 ‘노력 없이 그저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불공평을 외치고’ 있었다.

part 1 <마음의 가치관>에서는 축구선수로서의 경험이 진지하게 묻어난 성공, 삶, 인내 등 마음으로 지녀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처음엔 왜 이렇게 뻔한 얘기를 하나 싶었다. 누구나 성공을 바라고, 그럴 방법이 있다면 우르르 몰려가서 배운다. 하지만 많은 조건들이 뒷받침 되지 않을 때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배웠던 인생의 지혜들이 많이 언급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내 하나님이 주인인 삶은 그런 지혜도, 성공도, 이후에 오는 허무함이 아무것도 아닐 때도 있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더한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준다.

사람들은 삶의 주인이 자기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115쪽

우리는 하나님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다. 오로지 믿기만 하면 어떤 조건 없이 공평하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그렇게 감격했으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해지고, 의심하고, 결국엔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대신 피를 흘려 목숨을 구해주셨다는 사실을 잊고, 당장 눈앞에 놓인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한다. 어쩌면 우연이라고, 소소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그런 소소한 감사도 드리지 못하면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을까?

저자는 청년 멘토의 역할도 하고 있어서인지 동성애에 대한 옳은 판단, 진정한 자유,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한 모든 것을 성경으로 풀어낸다. 성경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간과하고 있었던 내용들도 많았다. ‘우리가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다.’ 라는 말 앞에서 나의 지난했던 날들에 대한 게으름이 부끄러워진다. 꿈이 없다면 하나님의 계획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너무 세상에 젖어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에 가치관을 두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많은 메시지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실천하게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평범한 내 일상에 대한 감사와 함께 실천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이런 고민이 주님께 다시 나아가는 길이고, 지치지 않은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 진정한 내가 되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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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빵 한솔 마음씨앗 그림책 2
백희나 글.사진 / 한솔수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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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비도 오고 꾸물꾸물한 날이면 가만히 집에만 있고 싶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볼일을 본 뒤 바로 집으로 와서 제습기를 틀었다. 제습기 덕분에 덜 마른 빨래도 말리고, 집도 뽀송해지는 기분이라 나름대로 집 안에서의 활동들이 뿌듯해진다. 최근 들어 유난히 습기에 민감해지는 나인데 아이들은 다른가 보다. 우리 집만 해도 비가 온다고 하면 아이들은 즐겁게 장화를 신고 우산을 챙긴다. 이 책 속의 ‘나’도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동생을 깨워 비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걸 보니 아이들은 비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동생과 함께 밖에서 비오는 하늘을 쳐다 보다 나뭇가지에 걸린 작은 구름을 발견한다. 어릴 때 하늘이 너무 맑은데 흘러가는 구름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손을 뻗으면, 지붕 위로 올라가면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진짜 나뭇가지에 걸린 구름을 잡아 집으로 가져온다면 정말 신날 것 같다. 아이들은 작은 구름을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엄마는 구름을 밀가루 삼아 아침으로 먹을 빵을 만든다. 빵이 만들어지는 동안 아빠는 아침을 거른 채 허둥지둥 출근을 한다.

부엌에는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잘 익은 구름빵이 두둥실 떠오른다. 빵이 저절로 떠올라 그걸 하나씩 잡아서 먹는 모습이 따뜻한 전등과 함께 행복한 웃음을 만들어 낸다. 구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떠오르는 빵의 모습을 아이들은 얼마나 즐거워하고 행복해 할까? 빵을 좋아하는 내 아이들도 만약 이렇게 빵이 떠다닌다면 아마 먹기도 전에 깔깔거리며 신나 할 것 같다.

구름빵이 저절로 떠다니듯이 빵을 먹자 엄마도, ‘나’와 동생도 모두 둥둥 떠다닌다. 아이들은 빵을 먹지 못하고 출근한 아빠가 마음에 걸린 듯 아빠에게 빵을 가져다주기로 한다. 구름빵을 먹은 뒤라 걸어서 아빠를 쫓아갈 필요가 없었다. 투명봉지에 먹음직한 빵을 싸가지고 비오는 하늘을 날아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있는 아빠를 발견한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빵을 주고 구름빵을 먹은 아빠도 둥실 떠올라 회사로 간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한 아빠를 보고 안심한 뒤 다시 하늘을 날아 집으로 도착한 아이들. 지붕 위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며 구름빵을 먹은 아이들은 연신 맛있다며 감탄한다.

비오는 날은 온통 회색빛이라 괜히 우울해지고 감상에 젖게 만든다. 그런데 비구름에 상상력을 덧대 풍성한 색깔과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며 비 오는 날이 달리 보였다. 비 오는 날이면 신발과 바짓단이 젖는 게 싫어서 아예 젖을 채비를 하고 나간다. 아마 날아다니느라 더 젖을지도 모르겠지만 구름빵이 있다면 나도 그 빵을 먹고 아이들 하원을 하러 가고 싶어진다. 아이들도 하나씩 먹여 두둥실 떠올라 창문을 열고 우리 집 복도에 닿는 상상.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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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똥 문지아이들
이경주 지음, 이윤우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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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메산골에서 자란 나는 수세식 화장실을 초등학교 때 접했다. 그 전에는 재래식 화장실이어서 밤에 화장실을 가는 게 정말 싫었다. 거기다 언니와 오빠가 무서운 얘기라도 해주면 그야말로 난감 그 자체였다. 화장실은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렸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언니나 오빠에게 사정사정해서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고, 몇 번씩 확인한 적도 많았다. 너무 어릴 적 얘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래서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왔을 때의 신세계는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선했다.

그렇기에 이 책 속의 민재가 밤만 되면 똥이 마려워 덜덜 떨며 화장실에 가는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민재는 나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수세식 화장실이지만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화장실을 가야 하는 불안함은 같았을 거라 생각한다. 왜 밤에만 똥이 마려운지 고민이 되어버린 민재의 마음이 나 역시 진지하게 다가왔다.

그런 민재에게 더 큰 일이 생겨버렸다. 가족과 함께 숲으로 여행을 갔는데 역시나 밤이 되자 똥이 마려웠다. 어릴 적 나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숲 속에서 혼자 똥을 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식구들을 깨워보아도 일어나질 않고, 어둠이 주변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그림을 보며 민재가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깊은 밤,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고 이상하게 내 눈은 말똥거려 천장을 보고 있는데 장지문 사이로 그림자가 비춰 흠씬 놀랐던 기억도 있다. 무서워서 온갖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다 나중에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허무했던 일도 있었다. 분명 알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어떻게 나뭇가지일 수 있는지 날이 밝은 뒤에 민망해졌지만, 혼자 텐트 안을 나와 숲길을 걸어 화장실에 가야 하는 민재의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둠에 둘러싸여 있고 소리가 들릴 때마다 민재가 괴물에 잡혀 가는 상상. 생각은 인간을 훨씬 더 두렵게 만든다는 걸 알기에 민재가 부디 무사하길 바랐다.

우여곡절 끝에 화장실에 도착했지만 두려움 때문인지 똥은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던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민재를 덮친다. 놀란 민재는 바지를 후다닥 올리고 밖으로 나오자 숲의 나무들이 동물 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이 기괴하게 다가왔다. 이내 손전등을 비추자 각기 다른 동물들이 보인다. 올빼미, 족제비, 사슴, 다람쥐 등 모두 민재처럼 밤똥을 요란스럽게 누고 있었다. 민재처럼 밤똥을 누는 동물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어 민재도 함께 앉아 똥을 눈다. 아침이 되어 형에게 말해주지만 형은 잠꼬대라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민재는 여전히 밤똥을 눈다. 하지만 예전만큼 무섭지 않다. 함께 밤똥을 누던 동물들이 생각이 났고, 민재가 앉아 있는 화장실에도 그런 동물들이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민재의 화장실이 멋진 숲으로 변해있는 마지막 장면에 괜히 흐뭇해졌다. 분명 무서운 경험이지만 민재 혼자만 밤똥을 누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밖으로 화장실을 가야 했던 내게, 동물들이 나타나 함께 똥을 누었다면 나는 아마 놀라서 바지도 못 올리고 울며 도망갔을 것 같다. 정말 웃픈 상황이지만 민재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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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한구석에 - 상
코노 후미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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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배경인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활자로 표현된 전쟁도 싫어하니 당연히 전쟁영화도 싫어한다. 왜 이렇게 전쟁에 관한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니 인간의 잔악함이 내게는 너무 크게 부각되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할 때면 큰 호흡을 하고 다짐을 해야 할 정도다. 그래서 이 만화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이라고 했을 때, 많은 고민이 들었다. 전쟁 자체를 싫어하는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배경이 된 만화라니. 스스로 논란의 중심에 설 것 같아서 피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꾹 읽어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에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전쟁은 어디서나 비극이라는 사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배경이지만 한 여인의 성장기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1934년 1월부터 1946년 1월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도, 일본도 전쟁의 한 가운데 있었다는 게 이 이야기의 비극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주인공 스즈에게 전쟁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때는 그나마 나름대로의 삶이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되고, 시집을 가고, 불안함이 고조되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나날이었다. 쿠레 군항 공습과 원자폭탄 투하가 있었던 히로시마가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스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 어디선가 들은 이 말이 스즈에게,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서민들에게 잔인하리만큼 맞는 말처럼 들렸다. 학교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지만 집안일을 힘껏 도우며 열심이고, 나름 꿈도 있었던 소녀 스즈는 결혼을 해서도 힘든 일과가 이어진다. 남편도 서먹서먹하고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가운데, 서서히 서로의 사랑을 깨달아 가기도 하고 마지막엔 남편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그래도 스즈는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점은 철저한 고증이었다. 글을 통해 더 상세히 알게 되었지만 스즈가 살고 있는 배경을 보면 마치 당시 내가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세세하다. 삶의 고단함, 전쟁의 폐해, 일본 내에서도 사람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단절시켜버렸는지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에 이 책의 배경을 알고 읽기가 꺼려졌음에도 이런 만화가 있다는 사실도, 우리나라에 광복이 된 날이자 일본이 전쟁에 패배한 날, 거리에 걸린 태극기를 보며 스즈가 의미심장하게 한 말도 몰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폭력으로 복종시킨 나라는 폭력으로 망한다는 말. 스즈 또한 원자폭탄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꿈이 좌절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즈의 말처럼 폭력이 폭력을 불러오는 일을 역사는 똑바로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격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처절하게 들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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