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라딘을 이용한지 벌써 13년이나 되었다. 알라딘에서만 책을 구입한지는 최근 5년 정도 된 것 같고, 그 전에는 여러 서점에서도 많이 구입했다. 그 이전의 기록은 굳이 들춰볼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열심히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고, 기록을 남기면 되지 않을까?

 

앞으로도 알라딘과 계속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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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7-05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폰이 문제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북플에 이미지가 안 보여요. 이미지가 안 보여서 알라딘 어플에 들어가서 보고 왔어요. ^^;;

안녕반짝 2019-07-05 20:19   좋아요 0 | URL
캡처해서 pc로 파일 첨부해서 올렸는데, 그렇게 올려서 안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벌거벗은 그리스도인 - 교만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나를 고발합니다
문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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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모습이다. 기꺼이 자기 삶을 주었던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구원을 받고 복음을 아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 오늘 이 성경이 내 손에 올 수 있었음을 기억하라고 성경책에 붉은색을 칠했다고 들었다. 215쪽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식인도 하고, 문란하고, 언어도 없고, 감정대로 살아가는 파푸아뉴기니 미히 부족 사람들을 보며 은연중에 내가 더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악령을 쫓겠다고 얼굴에 잔뜩 분장을 하는 모습을 보며 세수라도 했으면, 말끔하게 외모를 정리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눈에 비쳤던 조선인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자 이게 얼마나 큰 교만인지, 속사람을 본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고 나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책을 당연하듯 여기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고 나 또한 ‘관념’속에 가두고 있었음이 어렵지 않게 드러났다.

주님은 물질이 너무 부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셨고 너무 많아 교만하게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일용할 양식으로 채우셨다. 오직 영광과 존귀를 받기 원하시는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며, 원동력이며, 감격이시다.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때에도 인내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에 이르게 하셨다. 167쪽

그냥 먹먹해졌다. 저자가 말하는 물질과 내가 말하는 물질은 비교대상이 될 수가 없지만 나 역시 저런 경험을 너무 많이 했다. 분명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감사함에 어쩔 줄을 모르다 시간이 지나면 이내 감사함이 시들해지고, 나의 안위만을 위해 물질을 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자 부끄러웠다. 기도에 응답이 오지 않을 때도 스스로 합리화를 시켰고, 인내하지 못하고, 판에 박힌 기도들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도가 없음이 역시나 부끄러웠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에 ‘나의 생각과 마음을 언제나 감찰하고 계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일’법도 한데 왜 항상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일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니 신앙생활을 해도 성화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행한 모든 신앙의 행동이 어찌 믿음의 일이겠는가? 172쪽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미히 부족 사람들이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신앙을 반성했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처럼 결코 변할 것 같지 않았던 미히 부족 사람들의 변화는 내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던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십계명을 듣고 부끄러하고, 욕심을 부렸다는 이유로 부끄럽다며 마을을 떠나고, 관습처럼 내려져오는 일들에서 서서히 도덕심을 찾는 모습을 보며 그들처럼 뜨겁게,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을 받아들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5-25에서 마음은 선을 행하려 하나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음과 도리어 악을 즐기는 악이 있음을 괴로워하며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말씀이 우리 삶에 응답된 고백이 되게 하심을 감사한다. 268쪽

내 안에 수많은 악이 있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매일 정욕과 싸우면서도 수없이 넘어지고 오히려 악을 즐길 때도 있음을 고백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죄보다 더 어리석은 건 회개가 없는 것이다. 내 자신을 내려놓지 않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그 안에서 복음은 미미할 뿐이다. 회개할 때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때라고 했으니 내가 무언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없다면 회개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응답이며 하나님께 가는 첫 걸음이라 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한 것 같으나 포기할 수 없는 자, 무엇을 내려놓은 것 같으나 내려놓을 수 없는 자, 무엇을 희생하는 것 같으나 희생할 수 없는 교만한 자임을 주님은 깨닫게 하셨다. 158쪽

아무리 강력한 이끌림이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마흔이 다 되어서 하던 사업을 접고 가족을 데리고 언어도 없는 원시 부족의 틈으로 사역을 나간다는 게 쉬울까? 그곳에서 하나님이 네 번이나 목숨을 살려주셨음에도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저자는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교만한 자라고 말한다. 25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오히려 ‘말씀을 전해야 하는 책무를 가진 나 자신의 깊은 회개’를 했다고 말씀 앞에 이 책은 단순히 간증을 담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이 어떻게 살아 계신지, 어떻게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어떻게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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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입는 시간 - 영혼을 위한 7가지 절대 습관
켄 시게마츠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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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의 습관은 우리를 입힐 뿐 아니라 벗기기도 한다. 우리의 습관은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열등감, 우상, 중독, 혼돈을 담아낸다. 우리가 품은 소망과 꿈, 소원, 영혼도 습관에서 드러난다. 습관은 곧 우리 자신이다. 17쪽


책을 좋아하는 나는 습관 때문에 독서가 익숙한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껏 주일은 습관적으로 지키면서도 일상에서 묵상, 성경읽기, 기도가 습관이 잡히지 않을 것을 보며 내가 이중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가, 혹은 하나님께 모든 걸 전적으로 맡기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려 하지 말고, 그분께로 가까이 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19쪽

의지가 부족한 나에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까이 오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에 늘 부합하지 못하는 내가 좀 어리석어 보인다. 어쩌면 내가 습관을 잘 들여 묵상하고, 성경 읽고, 기도도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계획을 세워도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에 좌절해 멈칫 하고 있는 나에게 저자는 ‘실패하든 성공하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대신 전해주었다. 하나님은 나의 성공을 바라고 계신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규칙이 몸에 잘 배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것을 원하는데 내가 먼저 선을 긋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반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찬양하면 점점 그분께 가까워진다. 137쪽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저자는 하루에 세 가지의 감사 목록만 만들어 습관을 들여도 하나님께 훨씬 가까워지고, 인정욕구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결국 많은 문제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할 때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 반대로 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 받음은 물론 삶도 변화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나는 어정쩡하게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뜨거웠던 가슴이 식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는다. 기대감도 없고 그저 모든 게 뜨뜻미지근하다.

좋은 옷과 자동차, 집 같은 물질은 잠시나마 쾌감을 준다. 하지만 그 쾌감은 어디까지나 ‘가장 낮은’ 수준의 행복일 뿐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은 나눔에서 비롯한다. 즉 무조건이고 무한한 사랑으로 남들에게 자신을 내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 150~151쪽

행복하지 않다는 것. 나의 문제는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가장 낮은’ 수준의 행복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니 이상한 습관이 나를 차지해도 내버려두고, 그 습관들을 영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의 기쁨을 맛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을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데도, 어떨 때는 기쁘게 받다가 기쁘지 않다며 시무룩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가장 낮은’ 수준의 행복에 연연한 탓이다.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의 행복을 모르기 때문이다. 조금만 수고로우면 힘들다 불평하고,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 바라고, 타인의 시선에 자꾸 신경을 쓴 탓이다. 나는 ‘무엇을 하느냐로 증명되는 인간이 아니라 사랑받는 아들과 딸, 즉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하나님께 나는 그런 존재다.

이 사실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을 어떻게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작은 시도라도 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 폰을 보는 습관이 아니라 짧게나마 묵상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작은 시간들이 모여 다시 내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세상을 향한, 내 욕구 충족을 향한, 인정 욕구를 향한 뜨거움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만을 위한 뜨거움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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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 - 또다시 찾아온 더 엉뚱한 손님들 그런 책은 없는데요
젠 캠벨 지음, 더 브러더스 매클라우드 그림, 노지양 옮김 / 현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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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를 읽고 너무 재미있어서 오래전에 출간 예정작을 알람신청 해놓았다. 긴 기다림 끝에 손에 쥔 책은 역시나 흥미진진했다. 서점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책은 계속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저자는 서점 세계에서 절대 지루할 일이 없다고 했다) 벌써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 책장 꼭대기에 꽂혀 있는 저 책들은 키 큰 사람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저자는 ‘서점이라는 이상하고 별나고 경이로운 우주를 속속들이 보여주고 싶’었고, ‘괴상망측한 요구들, 엉뚱하고 황당한 답변들, 무례하고 속 터지게 하는 언사들도 있으나 그 무엇보다 아이들이 툭툭 던지는 예측불가의, 차원이 다른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정말 아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고,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더 친절하게, 눈높이에서 대답해주는 서점 직원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손님 그렇다면 말이죠… 만약에 있죠. 제가 만약에, 예를 들면『안네 프랑크의 일기』저자 사인본을 판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요?

직원 있다면 제가 100억 드리죠.

손님 정말요? 잘됐다!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에서『안네 프랑크의 일기』속편이 있냐는 질문을 한 손님이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사인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직원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아니라 손님을 재치(?)있게 응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서와 문화가 다르긴 하지만 불특정다수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이런 여유와 재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게 내심 부러웠다. 조금만 달라도 이상한 취급을 하며, 너무 경계하며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잔뜩 긴장을 하며 살다, 심히 황당한 손님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상하게 긴장감을 풀었다.

손님 히틀러가 쓴 그 희곡 있습니까?

직원 ….


이렇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손님이 나타나기도 한다. 솔직히 이런 손님들이 더 많이 등장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해 해결해 주려는 모습에서 짠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서점이란 공간은 기본적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이 책을 읽으면 그런 생각을 철저히 깨주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희망을 가져본다. 황당한 사람은 있을 지라도 적어도 나쁜 사람은 없을 거라는 긍정적인 희망 말이다. 여전히 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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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31쪽


 

1995년~1996년 사이에『주간 아사히』에 실린 저자의 에세이를 읽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물론 저자와 나는 나이차이가 있어서 공통된 주제와 기억은 거의 없었지만 마치 시간여행을 한 듯 나에게 주어졌던 1995년~1996년의 기억들이 조금씩 올라왔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받은 느낌이었듯, 잊고 있었던 과거를 되짚어본 기분이랄까? 저자의 에세이는 모조리 읽었다고 여겼는데 숨겨진 이야기를 불쑥 발견한 느낌이었다. 반면 당시 중학교 2학년~3학년이었던 나의 모습과 추억들은 형체보다 기억뿐임에도(학교, 짝사랑, 고민, 번뇌, 진로, 독서 등) 사라져 없어졌다 다시 건져 올린 것 같았다.

 

물론 나이들어서도 상처받을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도 그 상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두고두고 곱씹는 건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25쪽

 

저자는 상처 받았던 일을 떠올리면서 상처 받지 않기 훈련을 통해서 많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지만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쉽다는 건 젊은이에게 흔히 보이는 경향인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가 아닐까’란 말을 했다. 최근에도 상처받은 일이 있었던 나는 이 문장 앞에서 멈칫했다. 나는 현재 어느 단계일까? 나이의 의미가 상대적이긴 하지만 나이는 먹었으면서 젊은이들의 고유한 권리를 너그럽지 못한 마음으로 풀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두고두고 곱씹는’ 단계에 가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면서도 결국은 그런 단계까지 가고 마는 연유를 생각하자 괜히 복잡해져 버렸다.

 

이렇게 마이너한 관심사에 취향이 통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꽤 유쾌해진다. 인생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가운데 하나다. 198쪽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소확행’이 저자가 가장 먼저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자의 웬만한 에세이를 읽었다고 여겼던 나는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마치 잊고 있던 저자의 이야기를 만난 것 같은 이 책에서 ‘소확행’ 단어를 만났다. 저자의 에세이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꼭 이렇게 대놓고 정의하지 않아도 저자의 일상에서 심심찮게 ‘소확행’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소확행’ 확장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어떤 틀에 맞추는 건 아니다(저자도 마찬가지일거라 여긴다). 저자가 궁금한 걸 해소시켜가고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잘못된 것에 용서를 구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소신대로 생각을 굽히지 않는 모습에서 적어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억지로 이야기한다는 느낌은 없었다는 뜻이다. 저자 또한 동시에 작업한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인『언더그라운드』가 상당히 무거워서 이 글들을 연재하면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좋은 기분 전환이 되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밝히다『언더그라운드』를 읽고 저자를 완전히 다르게 보고 다른 작품을 탐독했던 터라, 비슷한 시기에 쓰인 이 글들이 하루키란 저자를 좋아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마음의 경계에 다시 걸터앉은 느낌도 들었다.

 

만약『언더그라운드』를 읽기 전에(작품의 비교가 아니라 작가에 대한 내 마음의 인식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에세이를 먼저 읽었더라면 과연 저자의 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별 고민 없이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일찍 읽어버렸다면 분명 이 글들의 매력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텐데, 약 24년이 지난 후에 읽게 된 느낌은 마치 잊고 있었던 일기장을 찾은 느낌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열정적이면서 풋풋한 면이 없지 않지만 현재의 내 모습(저자에게는 그 이후의 작품들)의 중요하지만 서툴렀던 자양분을 발견한 기분이다. 다시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가 되는 행위. 이 글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시 중학생이던 내 기억들이 꼭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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