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엘리자베스 엘리엇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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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세상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가사의다. 28쪽


 

그렇기에 누구나 고통이라는 불가사의로 들어가기를 싫어한다. 들어가기는커녕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고통이다. 그런데 저자는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고 있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고통이 결코 이유 없지 않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늘 내 안에 있었다. 그런데 ‘고난은 원치 않은 것을 갖거나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라며 ‘모든 고난을 망라’하는 이 말 앞에서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고통은 고난에서 비롯되었기에 꼭 엄청난 고통이어야만 고난을 받고 있다고 여겼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내 삶의 곳곳에 고난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다 인정해버린 것처럼 고통이, 고난이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고통은 헛되지 않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큰 교훈은 대개 가장 큰 고난에서 얻은 것이다. 38쪽

 

결혼한 지 27개월만에 선교를 위해 들어간 에콰도르 인디언들에게 남편이 살해되고, 당시에 10개월 된 딸이 있었음에도 남편을 죽인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다시 들어가 사역을 했던 저자. 16년 뒤 미국으로 돌아와 신학자와 재혼을 했지만 3년 반 만에 암으로 또 다시 남편을 잃었다. 세 번째 남편은 현재 살아 있지만 저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저자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그렇게 큰 고난 속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이해한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다며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그런 저자를 보면서 난 아직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다 혹은 두렵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럼에도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을 향한 충실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욥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과 전혀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수만 가지 질문을 품고 있었고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59쪽

 

욥처럼 저자도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실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수만 가지의 질문을 하고 깨달아갔다. 그리고 어떠한 순간에도 반응이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감사여야 한다.’고, 즉 감사와 수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이다. 배우자를 두 번이나 잃는 극심한 순간에도, 자신보다 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을 알게 될 때에도 저자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납득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며, ‘그 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나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작은 것에도 불평과 불만이 쏟아지고 신세한탄이 되는 나와는 달리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만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에 내가 고난을 당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나를 위해, 내 안에서 고난을 당해 주신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 그 분도 고통을 당하신다. 173쪽

 

저자는 오랜 생각 끝에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온 고통을 받아들였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단지 고백하고 받아들였다고 했다. 우리에게 닥친, 닥칠, 닥치고 있는 모든 고통을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지나신 곳보다 더 어두운 곳으로는 나를 인도하시지 않는다.’ 라는 사실만 인지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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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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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이 입고 있는 목부터 퍼지는 붉은 드레스가 뭔가를 불안하게 한다. 화려한 색은 시녀임을 밝히고 있지만 존재는 철저히 가려지는 역설. 시녀 양성 교육 센터를 거친 오브프레드의 독백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전말이 드러난다. 전체주의 속에 갇혀 버린 그녀의 삶은 생기라곤 하나도 없이, 오로지 사령관의 아이를 가져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여자들의 옷으로 신분을 판별하고, ‘가게 이름조차 과도한 유혹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그림으로 간판을 식별하게 만드는 곳. 장벽에는 불법을 저지른 자들의 시체를 메달아 놓고, 그것을 보며 경멸과 증오심을 가져도 되는 곳. 그런 곳을 알아가는 것조차 결코 녹록치 않았다.

 

시녀로 살아가는 게 비참을 넘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만들게 하는 힘은 아무래도 소설보다 그래픽 노블의 힘이 아닌가 싶다. 소설로 읽었다면 너무 어두워 덮어버렸을지도 모를 작품을, 화려하고 생생하면서 참담함으로 이끄는 그림의 힘이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활자만으로 불가능했던 압도적 표현력’이라는 말처럼, 어느 한 장면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그림이 색을 띠지 않을 때보다 오히려 화려하게 색을 띠는 것조차 부자연스럽게 만들었고, 내면 깊숙이 불안을 끌어냈다. 결론을 알 수 없어 막막했고, 이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오브프레드의 독백과 함께 완전히 이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령관과 단둘이 만나는 건 금지된 일이다. 우리는 번식을 위해 존재한다. 첩도 아니고, 게이샤나 창녀도 아니다. 우리는 두 발 달린 자궁이자 성스러운 그릇, 걸어 다니는 성배일 뿐.

 

시녀들의 목적이 분명하기에 사령관과 관계를 맺을 때도 경악스럽다. 시녀가 철저히 자궁의 역할만 하도록 사령관의 아내도 그 자리에 동석한다. 일을 치르고 난 뒤 누가 더 괴로운지는 알 수 없지만 각자의 역할만 수행했을 때 나름의 평화(?)가 공존한다. 그런 그녀에게 사령관은 은밀하게 따로 만나기를 원한다. 나름의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비밀스런 클럽에 데려가고 그곳은 과거의 자유를 방탕하게 누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시녀 생활을 적응하지 못한 오브프레드의 친구를 만난다. 장소만 다를 뿐 그곳 생활도 정상적인 삶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기에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담겨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철저히 감시받고 자유가 사라진 사회는 아니었다. 오브프레드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딸아이도 있다. 시녀로 살아가야 하는 중에도 종종 떠올린 그녀의 과거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회였다. 하지만 딸아이의 생사를 몰랐다 겨우 알게 되었을 땐 자신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려는 부분이 보였다. 사소한 것부터 욕망에 이르기까지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위험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사령관이 숙청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탈출인지 처형을 당하러 가는 것인지 모를 차를 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역사적 주해’에서는 이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가 발견된 장소, 그녀의 이름조차 ‘가부장제적 명명’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탈출해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또 다른 지옥 속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혹은 ‘과거의 거대한 암흑’으로 빨려들어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를 정확히 해독’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남긴 흔적을 통해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아마도 곧 출간 될 후속작『증언들』에서 그 흔적을 더 비참하게, 낱낱이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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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 반사
키크니 지음 / 샘터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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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8시 28분. 둘째가 어린이집 차량을 8시 35분에 타야 하는데 순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들이 놀라 일어나고, 그때부터 정신 나간 여자처럼 준비했다. 18kg이 넘는 둘째를 안고 달리면서 왜 알람소리를 못 들었는지 후회를 해보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알람을 더 촘촘히 맞추는 수밖에. 그렇게 아이 둘을 보내고 기력이 딸려 멍 때리며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따끔거리는 목을 달래려 아침부터 컵라면을 먹고, 집안일을 했다. 어제 개켜둔 빨래 정리부터 물건들을 제자리 넣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왜 물건들은 손대는 순간 제자리에 돌아가지 못할까? 어이없는 한탄을 하며 이제야 한숨을 돌린다. 특별할 것 없지만 나의 일상은 이렇게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요즘은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나라면 이런 소재를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낼까 하는 생각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다. 18쪽

『키크니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을 재미있게 읽어서 저자의 에세이가 가미 된 후속작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무척 궁금했다. 역시나 재미있게 읽었고, 그림 그리는 ‘키크니’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어쩌다 그림 그리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프리랜서의 삶, 가족, 우정, 먹는 것, 저자의 등치(?) 같은 것을 세세히 알다 보니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나도 오늘 아침에 일을 주절이주절이 떠들어봤다. 저자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낼까’에 고심했겠지만 나는 타인의 일상에 더불어 나의 일상을 기록하고 기억해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상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 게 뭔지 모르지만 든든해 보였다.

어릴 적부터 가사보다 멜로디가 좋아 음악을 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가사도 있었지만, 어릴 때는 가사의 뜻도 잘 몰랐기 때문에 주로 멜로디에 심취했다. 내 상황에 멜로디는 이입하는 재미가 있었다. 67쪽

완전 내 이야기 같았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도 나는 가사의 뜻을 모르고 여전히 멜로디에 심취한다는 점이다. 철저히 멜로디 위주다 보니 한 소절만 듣고도 반해 음반을 사거나(나머지 곡이 다 별로인 경우 허다), 수백 번을 반복해서 들을 때도 있었다. 주로 외국곡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 가사를 찾아보고 놀란 적도 많았지만 내 귀에 확 꽂히는 멜로디가 주는 매력을 버릴 수가 없다. 이런 얘기를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데 이 구절을 읽고 정말 너무 공감이 가서 마음이 후련할 정도였다. ‘남보다 특이한 상상을, 그것도 아주 길게 하고 있’다며 한탄을 하지만 정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전작을 읽을 때는 투박하게 느껴졌던 그림체가 이번에는 뭔가 정리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네 컷 만화의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말풍선의 내용도 많아지고 익숙한 형식이어서 그런지 훨씬 더 재미있었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많아 이름처럼 키 큰(키가 커서 ‘키크니’) 사람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얘기 같았다. 이런 책을 만나면 늘 그렇듯 별 볼일 없는 나의 일상이, 무탈한 나의 하루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나의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감사하게 된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우여곡절도 많지만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게 그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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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소망 - 바벨론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요한계시록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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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맞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23쪽


 

‘묵시와 예언, 상징으로 가득하고 이 책을 근거로 많은 이단이 나온 것도 사실이기에 선뜻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는 저자의 고백에 나 역시 공감한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글자만 읽고 넘어간 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종말이 아닌 주 예수님이란 말에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오해가 풀리고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며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면서 미지근하여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하신 말씀이 직구로 쿵, 하고 날아왔다.

 

예수님을 믿어도 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113쪽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교회에 안 나오는 것보다 나오는 게 낫지 않냐, 중언부언 기도라도 하는 게 낫지 않냐고 적반하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이 정말 주님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하나씩 내 상태를 알아 갈수록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를 철저히 깨달아간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단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수님을 믿으려면 고난을 견디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욕먹고, 핍박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불의에 참고, 바보처럼 당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상황, 심지어 생각까지 주님께 의미를 물어보라는 뜻이다.

 

기도 없이 사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연하고 답답한 이유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177쪽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요즘의 나는 기도시간에도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내 마음이 마땅치 않아 스스로 고립되고 아무런 의욕도, 간구도 하지 않는 나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책망하셨던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의 믿음처럼 뜨뜻미지근하니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인데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혼자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힘들다고 징징대는 모습을 보인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자신의 한계를 깨트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구하지 못하니 중보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내 개인적인 이익과 고민과 걱정에서 빠져나올 리가 없다. “창조주 앞에서 ‘이것을 보십시오, 제 집을 보십시오, 제 차를 보십시오. 제 몸을 보십시오. 제가 모은 이 조개껍질들을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라는 존 파이어 목사님의 말씀처럼,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다.

마귀와 싸우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하늘에서의 전쟁에서 이미 패하여 땅으로 쫓겨난 존재입니다. (…) 그런데 마귀가 가장 증오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대상이 교회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 그렇게 할 것입니다. 224쪽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입는 상처, 시련, 고통들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알면 지혜롭게 헤쳐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건 위험하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안에는 자유의지가 분명하게 있다. 그 자유의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냐의 차이일 뿐, 나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면 된다.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깨닫는 시작은 단순한 이 진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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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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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오랫동안 미뤄둔 이유는 단순했다. 현실을 너무나 잘 반영해 81년생인 내가 읽으면 우울할 것 같아서였다. 그건 내 독서의 방향과 반대다. 우울하단 이유로 현실을 너무 잘 드러내는 책은 대놓고 피하고, 그래서 고전을 더 좋아하고 가까이 한다. 결국배경만 다를 뿐, 고전도 현재와 다를 바 없는데도 시간적 배경이 주는 차이에 안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짜증이 났다. 우울한 게 아니라 짜증이 나서 당황스러웠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촘촘히 올라와버렸기 때문이다.

 

 

셔츠 안에 목둘레와 진동이 둥그런 전형적인 흰색 러닝셔츠를 반드시 입어야했다. 끈나시도 안 됐고, 면티도 안 됐고, 색이 있거나 레이스가 있는 것도 안 됐고, 브래지어만 입는 것은 절대절대 안 됐다. 54쪽

 

아직도 종종 꿈을 꾼다. 고등학생인 나는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데 교문 앞을 지키는 선도부가 보이는 순간부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교복 안에 흰색 러닝셔츠를 안 입고 온 것이다. 그렇게 당황하다 깨면 꿈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9년이나 되었는데도 이런 꿈을 꾸는 이유는 뭘까? 여고라서 오히려 남자를 더 찾기 힘든 학교에서 왜 그렇게 복장규정이 심했던 걸까? 학교 밖을 돌아다니는 그 짧은 시간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지켜야했기 때문일까? 이런 짜증부터 중학교까지 항상 남자아이들이 1번부터 번호가 부여되는 것들, 남자에게 당하는 부당한 시선과 희롱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했던 시간들이 모조리 다 짜증이 났다.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65쪽)’는 말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녀가 항상 동등하지 못한 시선을 ‘차곡차곡’ 인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145쪽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경단녀가 된 후 육마만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세 살 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된다는 둥 아이들이 혼자 있는 게 짠하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놀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그리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해방감을 느꼈고, 그렇게 바라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하면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스스로 ‘된장녀인가?’ 되뇌며, 갓난아이를 제대로 안고 있지 않은 엄마들을 보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아이를 키울 때도 조언인지, 오지랖인지, 욕인지 모를 온갖 충고들이 기껍지 않았으면서도 어느 순간 나도 똑같이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이중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149쪽

 

온갖 감정들이 솟구쳤다 사라졌다. 남녀평등에 분노가 일고, 답 없는 질문들을 던지다가도 결혼, 출산, 육아 문제만 나오면 어느 입장에서도 줏대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며 침울해진다. 육아에 전혀 소질이 없는 나를 인정하고, 그 와중에 내 삶을 들이밀면 뭔가 미안하고, 무엇 하나 야무지게 잘하는 것 없는 내 모습에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적성에 맞고 육아를 하면서 시간 활용을 잘 할 수 있는 현재의 내 직업이 소설에 언급된 것처럼 괜히 떠밀리듯 하는 일처럼 느껴졌고(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절대 아니다), 김지영이란 인물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와중에 나는 무기력해져버렸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내가 드러났다 사라졌고, 용기가 불끈 솟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자꾸 주변의 여성으로 빙의 되는 김지영 씨. 이 이야기는 김지영 씨를 상담하는 의사가 정리했다. 해리장해를 의심했다가,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인 사례’라고 판단하지만 이내 자신의 진단이 성급했다고 말하는 의사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뜻’으로 말한다. 짧게 자신보다 공부를 잘했던 아내가 결국 교수를 포기한 이유도 육아 때문이었다고 말하듯이 김지영 씨를 이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임신 때문에 회사를 관둔 유능한 여직원을 보면서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는 말에 뜨악하고 말았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이지, 타인을 쉽게 판단할 여지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나를 비롯해 누구나 저지르고 있는 일이다. 때론 그 무례함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책 속의 김지영 씨는 분명 내 곁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책장을 열고 덮어버리자 김지영 씨는 다시 책장에 갇혀 버린 것 같다. 양성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여성이라는 편견 속에, 사회가 부여하는 여성의 자리에 혹은 내 스스로 규정지어버리는 여성이라는 틀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한 것 같다. 김지영의 잃어버린 목소리, 그 해결책은 김지영 혼자서 찾을 수 없다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 김지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여성학자 김고연주 씨의 말이 분명 묵직한데도 묵직하게 전해오지 않는다. 이미 고민도 하기 전에 진 것 같다. 싸워보지도 못한 세력에 기가 눌리고 넉다운 되어버린 기분. 현재의 나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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