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비룡소 전래동화 24
성석제 글, 김세현 그림 / 비룡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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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에 읽어서일까, 아니면 어렸을 때 읽었던 시선과 달리 나이가 들어서 읽었기 때문일까?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고 별다른 감흥이 없을 거라 열어젖힌『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은 예상을 벗어나 마음이 찡해져버렸다. 김부식의『삼국사기』에 실려 있고,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서울 광진구 아차산에 있는 아차산성과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이라는 추측은(전자에 더 가깝다고 한다)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지만 내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이 서로를 어떻게 변화시켜갔는지가 더 깊게 다가왔다.


결혼 8년차를 앞두고 있는 나를 보면 아무리 울보 고집쟁이라 하더라도 온달에게 시집을 간 평강 공주나 그런 공주가 찾아오자 거부하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변화하는 온달이 대단해보였다. 아무리 사랑으로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길 바라는 게 사람 마음이다. 별 것 아닌 것에 서운해 하고, 매일 마주하고 있기에 서로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평강공주는 울 때마다 ‘너를 바보 온달이한테나 시집보내야겠다.’고 말한 아버지의 말을 지키라며 나중에는 정말 쫓겨나다시피 온달을 찾아간다. 사연도 모른 채 평강 공주가 자신을 찾아오자 온달은 ‘나 같은 거지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할 리 없다.’ 라며 도망가지만 온달 어머니의 만류에도 평강 공주가 한 말이 가관이다.

서로 마음에 맞는 게 중요하지 처음부터 다 갖추고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평강 공주는 이런 말을 하며 설득을 하지만 정작 마음도 맞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밀어붙이는 게 막무가내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이름만 들어온 온달과 과연 마음을 맞추며 살 수 있을까?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평강공주는 온달을 변화시킨다. 온달을 씻겨서 멀끔하게 만들어 놓고, 말 타기며 글공부며 평강 공주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아낌없이 온달에게 가르쳐준다. 온달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지만 그런 평강 공주의 가르침에 모두 따른 것을 보면 분명 둘의 마음은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보라고 불리던 온달이 평강공주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따랐을 리 없을 것 같다.

어찌되었건 둘은 서로를 변화시켰다. 평강공주는 고집쟁이 울보 공주에서 어엿한 현모양처로, 온달은 거지 바보에서 멋진 인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결혼생활을 이어가면서 평강 공주와 온달이 보여준 행동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했다 자칫 잔소리와 이해심 없는 배우자로 보이기 일쑤고,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릴 적에 읽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평강 공주와 온달 사이에서 이런 과정이 이뤄졌다고 생각하니 새삼 마음을 맞춰간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전심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가, 존중하고 있는가, 함께하는 시간에 감사해 하는가. 평강 공주와 온달의 이야기는 내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공주, 내 사랑 평강 공주!

전쟁터에 나가 이 말을 하고 전사한 온달을 보면서 울컥했다. ‘내 사랑 평강 공주!’란 말이 이렇게 슬프고 찡하게 들릴 줄이야. 생전에 했던 약속 때문에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다가 평강 공주가 한달음에 달려와 ‘우리 이제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말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아로 가득한 삶을 살았을 두 사람은 ‘함께’하면서 더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서 빛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은 어쩌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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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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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목표는 무엇인가. 더 많은 사람의 인간다운 삶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멀리 더 넓은 안목으로 그런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이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인간에 목적은 둔 가치관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32~33쪽

 

소설에 편중되어 있던 나의 독서가 요즘에는 인문학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마주했던 인간군상에 대한 궁금증이 이제야 드러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시간은 좀 걸리긴 했지만 자연스런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문학과 기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기독교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지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사유 속에서 먼저는 그런 의미를 찾았다. ‘인문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고정된 목적의식을 가진 학문과 차별화’ 되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인문학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대화를 통해 나와 너의 주장을 양보하고 모두를 위해 더 좋은 제3의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가치추구의 정도임을 알려주는 것이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48쪽

 

또한 저자는 선진사회의 지성인들은 사회과학적 사고와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자연과학적 방법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많은 갈등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근대사에 늦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철학을 가르쳤던 저자는 기독교인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와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표와 삶의 방향을 굉장히 깊이 있게 연관시켜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부터,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사회과학을 독점했던 이유, 종교가 휴머니티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 그 안에서 여전히 종교의 잘못이 드러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건전한 종교와 참다운 신앙은 언제나 좋은 인간성 위에 건설되는 법이다. 113쪽

 

인문학과 기독교, 그리고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적확한 시선이 아닌가 싶다. ‘좋은 인간성’이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휴머니티도 복음도 사랑을 전할 수 없다. “키르케고르의 말을 빌린다면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우리를 지배할 뿐이다.’”라는 말처럼 존재의 유무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엉뚱한 것이 지배하고 만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과제는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답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구원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이라고 말이다. ‘겸손히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나로부터 출발하며, 그 결실을 가져오는 진리가 참된 진리인 것’이며, ‘영원한 진리란 언제나 새로운 진리이며, 그것은 항상 나를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진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종교는 주체자의 근원과 목적에 관여하는 문제이며, 신 앞에서 스스로의 완성을 결단하는 일이기 때문에 최후의 주체성을 지니게 된다. 189쪽

 

기독교가 주체성을 지니면서도 절대 진리인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이유가 설명되는 듯하다. 하지만 ‘영원한 진리’는 언제나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고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받아들일 때 내 안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진리가 솟아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교회는 개인적인 진리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사회에도 시선을 돌리라고 말한다. 오늘날 이 사회가 ‘사랑과 자비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모두 잊어버’린데에는 게으른 기독교의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그렇기에 모든 것의 근본인 사랑에 도달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말씀처럼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 삶을 본받는 것이며, 윤리나 도덕 이상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문학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수많은 개념과 사상이 생겨나고 보완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의 깊이에 때론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인문학이 휴머니티로 변화되는 과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사랑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엔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렇게 촘촘하게 인문학과 기독교를 엮어 개념을 확장시켜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오늘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을 욕하는 일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모두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의 나는 과연 얼마나 폭력에 자유로웠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러움만 남는다. 이 폭력들을 회개하지 않으면, 사랑을 하고 사랑을 전해줄 수 없게 된다. 당장 내 사랑을 먼저 해결하는 일이 게으른 기독교인에서 벗어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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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장씩 읽고 있다.
오늘은 5장을 읽고 있고, 이 계획이 착실히 지켜진다면 8일 뒤에는 완독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코스모스>를 완독한다면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을 것 같다. 독서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책만 쌓아가고 있다는 자괴감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준 책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이겨내고 있다는 위로가 가장 크다.

 

카오스 같은 현실에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코스모스>를 읽으며 어서 카오스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는 의미를 억지로 붙여본다.

 

 

 

 

뉴턴이 미해결로 남아 있던 최속 강하선(물론 나는 뭔지 모른다)에 관한 문제를 하루만에 풀고 답을 보내는 장면에서 웃고 있었다. 익명으로 풀이를 보냈는데,

“발톱 자국을 보아하니 사자가 한 일이다.”

이 말을 한 사람도, 그 말을 듣는 뉴턴도 대단하다.

그나저나 <코스모스> 재밌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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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3-0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저도 저도 도전해봐야겠어여 ~ :-)

안녕반짝 2020-03-07 18:00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추천합니다^^
 
착취도시, 서울 - 당신이 모르는 도시의 미궁에 대한 탐색
이혜미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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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극단적 빈민이 최저 실존을 위해 몸 누일 공간 ‘한 쪽’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의 ‘가난해서’ ‘괴로운’ 상황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착취에 가까운 임대업으로 부의 첨탑을 쌓아가고 있다. 이른바 ‘빈곤 비즈니스’다. 19쪽


외면하고 싶었다. 분명 책을 읽는 내내 암울할 것 같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좌절할 게 뻔했다. 예상대로 얇은 책임에도 읽는데 긴 호흡이 필요했다. 자주 멈췄고,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읽었다. 사람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현실이 너무나 처참했다. 쪽방촌에 관한 이야기는 사회면 기사로 접했지만 자세히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쪽방촌의 행태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 어떤 구조로 여전히 쪽방촌이 횡행하는지, 쪽방촌이 사라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쪽방: 방을 여러 개의 작은 크기로 나누어서 한두 사람이 들어갈 크기로 만들어놓는 방. 보통 3제곱미터 전후의 작은 방으로 보증금 없이 월세로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35쪽

난방도 되지 않고, 취사, 세면, 화장실 등이 적절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쪽방은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월 20~25만원이다. 실체가 불분명한 쪽방은 숙박업도 임대업도 아니라 온갖 법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런 쪽방을 과연 누가 운영을 하고 있는 걸까? 저자는 주민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종로구 창신동의 쪽방촌의 건축물대장과 등기부등본을 모두 떼어서 추적해가다 보니 ‘쪽방 주민의 고혈을 쌓아 올린 빌딩’은 ‘가족 비즈니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섯 채의 건물에서 어림잡아 1400만원의 현금 소득을(세금은 내지 않는다) 올리고 그 소득으로 역세권에 건물을 세운 것이다.

우리 사회에 침투한 친자본주의는 쪽방마저 재테크의 수단으로 변질시킨 비정한 형태였지만, 감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천박함이어서 기사화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83쪽

쪽방촌의 소유주를 추적해 나가다보니 재테크로 여기는 사람들이 소유를 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비인간적인 공간을 내어주고 부를 쌓는 대상으로만 본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고 씁쓸했다. 쪽방촌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시청에 쪽방촌을 없애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증금 없이 일세로도 살 수 있는 쪽방은 동시에 거리 노숙을 막는 자원으로 활동되는 게 사실’이고, 쪽방촌을 변화시키려 해도 소유주들의 횡포에 맞서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이런 행태는 대학가 쪽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9가구 거주 공간으로 허가를 받아놓고 더 많은 임대수익을 올리기 위해 34가구로 쪼갠 신쪽방촌. 신축, 리모델링, 풀옵션의 가면을 쓴 이런 신쪽방촌은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뜨내기 손님들에겐 허울 좋은 곳’일 뿐이다.

세상이 얼마나 청년들을 가혹하게 청년들을 각자도생과 자력구제로 내모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 피라미드 한 층을 올라가는 누군가에 대해 얼마나 윤리적으로 무딘지를. 191쪽

잠입취재를 한 저자가 둘러 본 신쪽방촌은 공간에 사람을 가눠놓고 보증금 500에 관리비 포함 50만원이 기본이었다. 너무 좁아서 월세가 센 다른 방을 아무리 봐도 ‘좁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 ‘막말로 요즘 대학생들 공부한다고 바빠서 집에 잘 있지도 않는데, 넓은 건 그렇게 대수가 아니에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중개사의 생각이 섬뜩했다. 저자 말대로 당신이라면 이런 곳에 월 5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살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쪽방 사람들이 그곳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가난을 견뎌야만 한다고 말하죠. 그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67쪽

이른바 빈곤 비즈니스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으로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이다. 나에게 수익이 생긴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빨아먹는 쪽방 투자. 기숙사를 지으려고 해도 임대업자들의 반대로 주거 난민이 되어가는 대학가. 비단 이 둘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이익을 본다는 것은 누군가는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내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 다른 이가 힘겹게 올린 계단을 밀어버리는 행위는 언제까지 행해져야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을 자체가, 이런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사실이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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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02-15 0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 구조와 시스템으로 인해 양산된 가난을 개인이 극복해야하는 문제라고 치부하는 천박한 자본주의...ㅠㅠ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 - 미친 듯이 웃긴 인도 요리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현수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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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스의 인도 요리 탐방기라니! 저자의 이름을 걸고 무조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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