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분노하는가? - 분노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길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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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혜롭게 수용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지금 내 상황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분노가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시선, 믿음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차원의 시각이 열립니다. 36쪽


이 구절을 읽다가 몇 달 전에 생겼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90일 통독 성경’을 꺼냈다. 늘 성경을 일독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펼칠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의 시선, 믿음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여호와 이레’, 준비 하는 과정을 만들고 나를 상황으로 이끄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몇 달 동안 신앙 서적을 읽으며 내게 부족한 지식을 채우게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된 듯 꼭 읽어야 하는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이끄셨다. 90일의 목표를 세워놓고 겨우 3일 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멈춰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가인의 분노와 사라의 분노를 읽다가 성경을 펼쳤고, 통독하는 가운데 가인과 사라가 그대로 등장하는 부분을 읽다 보니 말씀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솔직히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기에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경의 배경지식을 알고, 성경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서는 가운데 성경을 펼치니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말씀이 살아서 내게 다가온 기분이 들었다. 익히 알고 있던 인물들이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쓰셨는지를 깊이 알게 되면서 나를 많이 대입해 보았다. 흠 많은 나도 하나님은 똑같이 사랑하시고, 언젠가 알맞은 때에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고 계신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요셉처럼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배움의 기회로 삼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을 성취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구원을 위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 때문에 인생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51쪽

고백하건데 분노도 나의 큰 고민 중 하나였다. 나는 잘 분노하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욱하는 마음이 올라와 임신과 출산, 육아 핑계를 대고 있었다. 분명 그 영향도 있지만 분노의 대상이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사실에 늘 마음 한구석이 어려웠다. 그리고 성경 속 인물들이 어떻게 분노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분노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결국에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불거져 나오는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면 하나님의 시선에서 분노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인과 사울과 요나 같은 이기적인 분노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왕이면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아무 때나 분노하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안에서 분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의 분노를 내일까지 끌고 가지 않고, 나의 의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며, 정말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 욕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모두 고하고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감정적인 분노, 이기적인 분노, 경험적인 분노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처럼 분노할 수 있을까요?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면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181쪽

결국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사랑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리고 절대 내가 갚을 수 없는 죗값을 치러주시고 은혜 내려 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노도 미움도 절망이 나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연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늘 주님께 모든 걸 맡기며 죄와 가까이 하지 않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렇게 평생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삶이며, 그 가운데 믿음과 사랑이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율법에 갇힌 행위가 아닌 사랑에 의한 실천. 내게 당면한 작은 어려움 하나라도 그렇게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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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어쨌든, 잇태리> 박찬일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갔다가 허수경 시인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찍은 사진이다.




페이스북을 잘 들어가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눈 뜨자마자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없이 글들을 보다 허수경 시인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결국 돌아가셨구나. 위암으로 투병중이시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이런 소식이 부디 전해오지 않길 바랐다.



허수경 시인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고 싶어 블로그를 뒤졌다. 약 4년 전에 우연히 찍은 사진이 나왔다. 듬성듬성 센 머리카락과 체크 목도리가 무척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나던 사진이었다. 이젠 정말 사진으로밖에 뵐 수가 없는 분이 되어버렸다.

 

 



책장을 뒤졌다. 2011년에 출간된 <박하> 책이 나왔다.

 



겉표지를 들추면 유난히 예뻤던 표지로 기억되던 책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책장을 열어보고는 놀랐다.

정말 잊고 있었다.

허수경 시인의 사인본이 있을 줄이야.


사인본을 보고는 마음이 울컥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냥 참고 싶었다.

내가 울어버리면 정말 영영 이별일 것 같았다.



이미 읽은 작품이지만, 다시 읽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으로 다시 만날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평안하시길!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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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역사와 삶의 철학이 만나는 살아 있는 기록 청소년 철학창고 12
사마천 지음, 고은수 엮음 / 풀빛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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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읽어야지 다짐했던 책을 읽고 나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최근에 그런 독서를 좀 했는데 이 책도 그 중 한 권이다. 중국 역사서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자성어들이 <사기>에서 유래된 사실이란 정도만 알고 있지만 책을 읽어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청소년들이 접하기 쉽게 쓰인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워낙 등장인물이 많아 낱낱이 파악되지는 않지만 다음에는 완역본으로 정독할 자신감을 얻었+다. 읽고 싶은데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책이라면 일단 쉽게 쓰인 책부터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기>는 오제 시대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총 3천 년의 총체적인 기록이라고 한다. 아무리 총체적인 기록이라고 해도 3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니, 얼마나 방대할지 잠시 아찔했다. 하지만 단순히 연대순의 서술이 아닌, 통치자 중심으로 한 기전체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좀 더 흐름을 파악하는데 용이했다. 각 시대의 주요한 인물과 당시의 제도와 문물, 경제 실태, 자연 현상 등으로 분류하여 특징과 변동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시대의 연결은 잘 되지 않더라고 인물 중심으로 연결해 기억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영웅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업가, 코미디언, 여성, 실패한 인물 들을 평가해 자신만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함께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나서 여기저기서 들었던 왕들이 정립이 되었던 경험처럼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띄엄띄엄 알고 있었던 인물들이 정리가 되었다. 특히 여불위와 진시황제의 관계,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적 의미, 왕위를 세습하지 않았던 요, 순 임금, 토사구팽 당한 한신의 내막까지 상세히 알게 되니 그제야 사마천이 의도했던 그만의 역사관과 가치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런 비참한 운명 앞에서도 이 책을 썼고 그랬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 운명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기에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왜 <사기>는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되었을까? 평소에 어렵다 여기고 있던 터라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는 그 자체에 중점을 두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현재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혜안을 얻으려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록위마의 고사만 보더라도 진실을 은폐하고 황제를 우롱하는 신하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당시에만 일어난 일일까? 현대에도 이익을 위해 진실을 감추고 거짓 증언을 하고, 언론이 국민을 속이는 일도 허다하다. 황제가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하자 ‘말’이라고 대답하는 신하들이 있다면 당당하게 ‘사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지금껏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로 인해 현재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믿는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거짓이 줄어들 것이며, 더딜지라도 건강한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믿는다. 때론 그런 살마들을 외면하고, 귀찮아하는 일도 많지만 그런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거짓에 맞서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기>가 내게 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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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제자도 - 내 안에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
마이클 웰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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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든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면서, 정작 꼭 필요하면서도 이미 거저 받은 것은 보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누리는 하나님과의 깨지지 않는 관계다. 65쪽


오늘도 나의 마음은 몇 번씩 들쭉날쭉 했고, 슬그머니 잘못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 또한 나보다 더 가진 자들을 잠시 질투했고, 나의 현재를 한탄했다. 그것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허용된 소중한 시간과 내가 누릴 수 있는 감사함을 잊을 뻔 할 때 이 말씀을 만났다. 그리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가 왜 이렇고 있는 걸까,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였다고 믿으면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 여기면서 왜 그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육신의 끌림대로만 살아가려는 것일까? 깨닫는 순간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겠다 다짐했으면서도 ‘우리 인생의 진정한 초점은 우리 자신과 안위가 아니라 십자가 위의 인자시다.(310쪽)’란 말을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벗어나면 우리 가정, 가족, 가까운 지인들까지 뻗어나가지만 매일매일 이렇게 나 아닌 타인의 평안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다. 내 자신이 부족한 것 투성이라 내 안의 선하지 않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게 애쓰느라 여력이 다한 탓도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어떤 부류의 신자였는지 낱낱이 보고 말았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나와 너무 닮은 유형의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파괴와 변명을 멈추고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라는 진리를 경험할 것이(288쪽)”라고 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변명 하지 않길 원하지만 ‘변명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가감 없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게 필요한 문구를 만날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했고 필요할 때는 짤막하게 기도했다. 그것이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실천이라 여겼다.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분에게 적용되는 것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며, 옛 사람, 옛 본성, 옛 삶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277쪽

분명 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았을 때 내 안에 찾아왔던 자유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삶의 이런저런 일들에 부딪히다 보면 희미해지고, 옅어지며, 어쩔 때는 의심하기도 한다. 저자는 사역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풍부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그 사례들이 낯설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거쳐 온 과정도 있었고, 내 고민거리와 일치하고, 저런 과정은 겪고 싶지 않다거나 혹은 저런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일들도 있었다. 좀 더 생생하게 들렸던 이유는 현재 이 사회에 만연한 문제(마약, 술, 섹스, 외도, 이혼 등)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이 반복되어 거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북하다고 이 문제들을 외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작 거북해야 할 대상은 자꾸 죄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악의 유혹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기 전까지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의 삶을 살 수 없었건만, 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뒤에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 삶을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51쪽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개인적인 바람보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땅에서 편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저자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굉장히 단순하다고 말하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의심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단, 장기전이라고 경고한다. 장기전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무런 존재도 아님을, 보혈을 흘려 기꺼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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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 윗집 사이에 고래뱃속 창작그림책 9
최명숙 글.그림 / 고래뱃속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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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어놓으면 제법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요즘인데 우리 집은 현관문을 열 수가 없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질러대는 둘째 때문에 온 방문은 물론 때론 베란다 문을 닫고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정말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안방에 들어가 아이와 한바탕 한다. 아이는 울고, 나는 울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그것도 안 되면 아이의 발바닥을 때린다. 이내 곧 후회를 하지만 정말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너무 많다. 분명 내가 이렇게 한바탕 아이와 싸우면 아랫집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아파트라 우리 집에서도 윗집의 소리가 다 들리는데 아랫집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럼에도 아랫집에서 한 번도 항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랫집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천사가 살 거라고 말이다.


 

이 책은 글이 없다. 그럼에도 충분히 흐름을 알 수 있고 어떤 상황인지를 알며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 유추할 수 있다. 우리 집과는 달리 책에서는 아이들이 떠들면 아랫집 할아버지는 부리나케 올라와서 고함을 친다. 한 번은 생일파티 때 할아버지가 올라와 분위기를 망친 적이 있다. 분명 공동주택이니 주의해야 하지만 조금만 소음이 나면 올라오는 할아버지 때문에 윗집은 항상 가시방석이다. 항상 조심한다고 하지만 엄마가 외출하고 아이들만 둘이 남겨졌을 때 역시나 시끄럽게 떠들었고 이내 할아버지가 쫓아올 거라 생각하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올라와야 할 할아버지는 올라오지 않았고 심지어 잠잠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사실을 알렸고,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할아버지는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구급차에 실려 할아버지는 병원에 이송되었고 얼마 뒤에 아이는 공을 갖고 놓다 엘리베이터에서 할아버지를 만난다. 아이는 또 할아버지에게 혼이 날까 잔뜩 겁을 먹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공을 주워준다.

예민했던 할아버지는 사건이 있은 후 달라졌다. 아이들 덕분에 고비를 넘겼고, 그런 아이들이 다르게 보였음은 당연하다. 아이들도 그런 할아버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될 거라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윗집에 새로운 이웃이 놀러오고 음식을 들고 인사갔던 엄마는 그 집에도 아이들이 있음을 알고 친하게 지낸다. 그리고 집이 아닌 밖으로 나가 공동주택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배려를 자연스레 알려준다. 함께 잘 사는 게 분명 어렵지만 어쩌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음을 이 책을 보면서 느낀다. 조금만 배려하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해주면 얼굴을 붉힐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 나와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고집을 부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다툼과 이견 차이가 발생하겠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한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그게 쉽지 않음을 느끼지만 그렇기에 늘 조심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언제든 반대의 입장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얼마 전 서재방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고 있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새벽 2시. 싸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복도 창문으로 살펴보니 6층에서 싸우고 있었다. 무슨 큰 일이 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심한 드잡이가 오가더니 결국 경찰이 와서 아줌마 두 명을 데려갔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싸움의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저렇게 앞 뒤 가리지 않을 정도로 큰 싸움을 벌일 일이 뭐가 있었을까 싶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새벽 2시라는 의아함과 함께 이내 곧 잊어버렸지만 때론 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 공동주택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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