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할지라도 그럼에도 사랑하심 - 사무엘상 2 김양재의 큐티 노트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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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이 책을 마주하기 싫었다. 제목만 보고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내용인가 보다 짐작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읽기를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주변 상황이 열악함에도(매일 야근 하는 남편, 육아, 집안일 등등) 허투루 읽지 않고 끝까지 정독했다. 이상하게 읽기 싫었던 마음과 달리 나를 계속 잡아끌었고, 수없이 무너졌다, 폭발했다를 반복했다. 너무 깊은 은혜가 되어 한바탕 눈물을 쏟다가도, 독서를 방해하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나를 보면 한심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는데 내가 책을 읽으며 은혜를 받으면 뭐하나 싶었다. 당장 내 눈앞에 사랑스런 아이들에게 감정조절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람 피운 남편, 힘든 시댁, 힘든 상사, 힘든 사람들과 환경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내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그들이 수고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이다. 51쪽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저런 상황인데 저 말씀이 정말 감사하게 들릴까? 계속되는 남편의 야근으로 혼자서 아이들을 돌본다는 사실 하나에 뭔가 억울함이 서릴 정도로 속 좁은 나인데, 이런 상황을 복음에 빚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 내 몸이 좀 편했으면, 내 걱정과 염려와 분노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좀처럼 이 문장 앞에서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 해결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랬기에 은혜롭다가도 책에서 눈을 떼어 현실을 마주하면 짜증이 자꾸 솟구쳤다.


꼭 좋은 남편과 살아야만 행복한 게 아닙니다. 나를 교훈시키기 위해 이상한 남편과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의 구원에만 관심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상황을 두고 자꾸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따지면 안 됩니다. 67~68쪽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감사하다가도 무뚝뚝한 남편을 보면 종종 인간적인 마음으로 날 사랑하는 게 맞나, 나는 현재 행복한가를 고민할 때가 있다. 하지만 늘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남편은 꼭 말을 해야 아냐고 하고 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해도 늘 곁에 있는 사람 취급만 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왜 내가 이렇게 짜증이 나 있는지를 따져보니, 한 달 넘게 야근에 찌들어 있는 남편보다 온전히 육아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엉뚱하게 나를 좀 사랑해 달라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 고백을 하는데 펑펑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내가 사랑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무뚝뚝한 남편과 살게 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에서 자라다보니 사랑보다는 방임에 가까운 성장을 지나왔다. 그래서 깊이 사랑 받았다는 기억이 별로 없어서인지 내 스스로도 굉장히 이기적일 때가 많다. 어린 시절 부족했던 사랑을 나는 남편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남편에게는 그 한 마디가 하기 힘들었다. 조금 특별하게 목회를 시작하신 목사님과 성도들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고백을 듣고 있으면 당황스러웠다. 외도, 도박, 술, 이혼 등등 모두 감추고 싶은 내면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털어놓는다. 그렇게 상처받고 죽을 것 같은 사람들만 찾아오라고 광고를 하셨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들이 찾아와 고백을 하고 점점 커져 만 명이 넘는 교회가 되리라고 목사님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삼아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암나귀’만 찾아 헤맸던 사울처럼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암나귀’가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첫 번째는 사랑이었다. 사랑을 맘껏 주지도 못하고, 그랬기에 사랑 받고(남편, 아이들에게)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투성인데도 나는 ‘하나님이 그토록 못 잊어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평안했다가 다시 되돌아보면 순종이 아닌 제사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좌절했다. 그리고 나의 불행과 우울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렸던 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사무엘이 옆에 있음에도 하나님 없는 예배 중독이 되어버린 사울을 비난할 수 없었다. 끝내 회개하지 못한 사울도, 그런 사울을 끝까지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무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새끼’라며 염려하셨을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했다. 지금껏 아니라고 했지만 ‘악하고 음란한, 이기적인 내 자신의 원수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으로 싸웁니다. 내 욕망에 거슬리는 것이 다 내 원수입니다. (226쪽)’란 말처럼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중심을 잡고 있으면 큰 구원이 이루어져서 전염된다는 사실을, 그럴 때 나, 가정, 교회를 살리는 일임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의미를 희미하게 깨달아갈 무렵 책의 말미에는 북한 선교사님의 입을 통해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탈북을 하고 싶은 이유가 찬송을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싶다는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탈북을 권하자 할아버지는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며 잠시 기도를 하고 오시더니 울면서 ‘저 아무개 목사가 우리를 돕겠다는데 따라갈까요, 말까요?’란 질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 두는 지 아느냐?’라는 대답이 들려왔다고 했다. 오히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라며 경찰이 오고 있다며 목사님께 어서 가시라고 했다. 목사님이 한 번 더 탈북을 권했지만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압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나는 예배당 종도 쳐 봤고,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다 해봤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니 자유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않겠소. 압네다. 압네다.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지요. 264쪽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나는 마지못해서 하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에 물어보는 믿음이며 그럼에도 순종하고 따르는 확신이 내게 있는가 싶어서였다. 나는 여전히 내 육신의 정욕과 싸우고 있다. 그걸 하루도 지키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젠 감추고 싶지 않았다. 고백할 때 악은 사라진다고 했다. 힘이 없어진다고 했다. 필요하면 수없이 고백하고 싸워서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저 할아버지의 믿음을 닮고 싶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순간 깊이 내려와 나는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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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0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2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적인가 우연인가 -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파헤치다
리 스트로벨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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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란, 역사 속에 활동해 오신 하나님을 보여 줄 목적으로 평소의 자연 질서에 한시적으로 예외가 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실행하시는 사건이다. 30쪽


머리로는 익히 알고 있다. 기적이란 단어도 종종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기적을 온전히 믿느냐고 묻는다면 단박에 대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고 싶지만 기적에 관한 부분을 마주할 때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는 사람의 얘기도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떨까?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앙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능치 못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믿음이지만 정 안 되면 억지로라도 믿어 넘기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느니 억지로라도 믿고 넘겨 더 큰 하나님을 만나라고 말이다.

그러다 기독교는 그러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게 당연하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리고 복음이 제대로 들어왔을 때 왜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어떻게 믿어지는지도 경험했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를 영원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고, 부활을 인정하면서 의심은 걷혔다. 하지만 정말 기적을 바라며 기도했을 때 반대의 경우를 목격한 적도 많다. 내 입으로 아픈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안수하셔서 온 몸이 깨끗하게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다. 내 기도가 부족할 때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끝내 치유하지 못하고 하나님 곁으로 간 성도들을 볼 때면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죽음을 목전에 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평안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내게 과연 그런 믿음이 있는가? 나라면 이렇게 평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그저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부활의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294쪽

무신론자였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혹은 그 반대인 사람들의 인터뷰와 기적을 체험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생각났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적을 나는 이미 여러 번 체험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첫 아이를 출산할 때 임신중독증인 줄 모르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앰뷸런스에 실려 대학병원으로 가던 일. 너무 고통스러워 여기서 깨어나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무사히 딸아이가 태어났고 그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중보기도가 있었다는 사실. 첫 아이의 돌 무렵 두 다리 길이가 맞지 않아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아이 다리를 붙들고 중보기도를 100일만 해보라던 형부의 말을 듣고 일 년 뒤에 건강해졌던 일. 둘째가 태중에서 호흡이 없어 응급으로 수술했지만 뇌손상을 입었던 일. 많은 사람의 기도 속에 100일 뒤에는 뇌손상이 말끔히 사라진 일. 내가 만난 하나님을 자연법과 개연성을 운운하며 비논리적이라며 반박한다면 나 역시도 당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나 은혜 안에서 주관적인 감정에 치우치는 나 일지라도 나는 몇 번이나 하나님의 기적을,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고 말이다.

철저한 무신론자에다 노련한 저널리스트였던 저자가 기적을 신앙으로 풀어내는 과정은 흥미롭다. 뭐랄까.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며, 근거가 부족하고 논리정연하지 않다며 하나님과 성경을 부정하는 이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반박한다고 해야 할까? 은혜가 충만해 명쾌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터뷰 내용은 확연하게 다르다.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 보여 놀랐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적당히 인정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진심으로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을지라도 나름 평안한 상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마지막 인터뷰어인 한 철학과 교수는 오랜 생활 아내의 투병을 지켜보는 일이 괴로우면서도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는 모습에서 마음이 찡했다. 누군가 ‘요즘 어떠십니까?’ 라고 인사한다면 사실대로 ‘밧줄에 매달려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요. 그런데 다행히 그 밧줄을 하나님이 엮으셨다고 말입니다.’ 라고 대답할 거라고 했다.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이 불완전한 삶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기꺼이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인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삶을 목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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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햇살이 좋아서 그런지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러다 카페에 들어가서 음악을 들으며 차 한 잔 마셔도 그것만으로도 소소한 행복이 된다. 외출을 하면 항상 책을 들고 나니는 터라 즉흥적으로 카페에 들어갈 때, 순간의 기분과 책의 호흡이 좋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카페에서 읽었을 때 정말 좋았던 혹은 카페에서 읽었으면 더 좋았을 책들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1cm+ - 김은주






깊은 밤, 책상에 앉아 작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읽다 만 책도 있었고 읽으려고 가져다 놓은 책도 있었다. 20권이 넘는 책들을 꺼내서 읽다 안 읽히는 책들은 도로 집어넣고 마음이 가는 책들은 계속 읽었다. 그러다 이 책이 마음에 훅 들어왔다. <1cm art>를 읽고 좋아서 구입한 책인데 마음이 동하지 않아 계속 책장 신세만 지고 있었던 책이었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저 책은 정말 내 마음이 힘들거나 혹은 위로 받고 싶을 때 꺼내서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금방 읽힐 책이지만 아무 감흥 없이 쉽게 읽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시간에 보답하듯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이 책을 담담히 읽고 있는 나를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았다. 느긋하게 읽었지만 책장은 쉼 없이 넘어갔고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메모지를 붙이고 잠시 음미하기도 하고 혼잣말처럼 자책과 다짐을 되뇌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책 속의 말들이 내게 콕 박히는지 곰곰 생각해 보니 오랫동안 쌓여 있던 감정을 격하게 남편에게 모두 쏟아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얘기한 직후라서 그랬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 행위가 무척 부끄럽게 여겨지는데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에 더 이상 자존심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서로 상처를 좀 받더라도 싸매고 있는 것보다 풀어내는 게 더 낫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순간의 분노, 순간의 오해, 순간의 욕망, 순간의 좌절, 순간의 유혹...... 악마는 순간을 지배한다. 순간을 지배함으로써 모든 것을 지배하는 법을 안다. 반대로 순간이 순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곧 지나가 버릴 순간에 구속당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과 인생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17~18쪽)


  나의 순간의 분노를 곱게 포장하긴 했지만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 좀 더 솔직해지기로 다짐한 뒤 이 글귀를 보니 많이 부끄러웠다. 감정을 쏟아내기 직전에 나는 순간의 유혹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내 자신에게 순간을 참지 못해서 욱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순간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잠시 심호흡을 하거나 잠시 공간을 이동한다거나 하는 행동으로 조절해 보기로 했고 좀 더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대부분 현실보다 상상이다.(26쪽)’란 말에도 적극 공감하면서 머릿속에 온갖 상상력을 현실로 끌어들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당근과 채찍을 한꺼번에 받는 것 같아 하나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서 좋았다. 위로에 잠시 마음이 촉촉해지면 금세 이런 마음을 채찍질 한다. 내가 무언가에 회피하려 TV를 보거나, 핸드폰 게임에 빠져 있거나, 쇼핑에 빠져 있는 행위를 ‘마음의 커튼’에 비유해서 공감시켜 주었고 그 커튼의 이면에 진짜 무엇이 있는지 정면으로 바라볼 시선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약간’ 해본 것, 성공, 기쁨, 만족, 사랑 등등에 위안 받지 말고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나쁜 버릇(소파 위 게으름, 인스턴트식품, 나쁜 뉴스, 거짓말 등)에 적응하는 것도 말이다.




2. 잘돼가? 무엇이든 - 이경미





책이 읽고 싶은데 도무지 읽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책을 들고 집 근처 카페로 갔다. 평일 한 낮인데도 카페는 앉을 자리가 거의 없었다. 널찍한 책상에 겨우 자리를 정하고 앉았지만 내 앞자리까지 그야 말로 사람들로 빽빽했다.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평안한 상태에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얼마 안가 책을 덮고 천장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부디 내 앞에 앉은 여자가 날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길, 내가 웃지 않으려 천장을 보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않길 바랐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마주한 웃긴 장면에서 그야말로 나는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다 무심코 터져 나오는 웃음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냥 기분이 좋았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존중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정말 싫은 마음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도 아름다운 존중이다. 75쪽

영화감독인 저자의 이야기는 주제에 따라 우울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어둠으로 침잠하기도 하며,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하지만 저자의 글은 결코 독자의 감정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는다.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고나 할까? 깊게 공감해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지도, 너무 겉핥기만 하다 지나치지 않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감각적으로 잘 썼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고, 이래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빤하고 지난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도 어쩜 그렇게 솔직하고, 웃프고, 무언가를 자꾸 생각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지! 저자의 의도야 어떻든 나는 이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 참 좋았다.

삶이라는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90쪽

그러면서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모든 것을 깨달아 버린 혹은 정답이 없는 삶의 질문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것 같은 공감 가는 말들이 나올 때면 여러 번 문장을 곱씹었다. 마치 내 경험인 듯, 과거에 그러했던 일들이 이제야 확인 받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쉽게 눈길을 떼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나의 과거를 모두 되짚으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참 어리석었구나, 즐거웠구나, 다시 돌아가도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여러 감정들이 솟구쳤다 사라졌다. 그런 감정들이 남긴 뒷맛이 일단 씁쓸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잠시 추억 속에 잠겼지만 결국 그렇게 여러 맛을 느낄 과거를 또 만들기 위해 미래를 향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분명 재밌게 읽었는데 이 모든 감정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대단하지 않는 일들이, 대단하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은 일단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모든 감각의 총동원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말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능력에 따라 이야기가 갈리겠지만 나도 그런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어떠한 형태든 시작을 해보고 끝을 보고 싶었다. 오래전 저자의 일기가 이 책에서 그런 역할을 했듯이 무언가 끼적거리더라도 남겨보고 싶었다. ‘잘 되고 있지 않아, 아무것도’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도 어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하나의 과정인 것을! 뭔가 엄청난 걸 깨달아 버린 것 같다.




3. 모던 라이프 - 장 줄리앙





나는 좀 까다로운 사람인데다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도 무척 많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서 주위에 있으면 불편한 사람이 되느니, 내 작업을 통해 이런 것들을 코미디로 바꿔보기로 했다.


짜증을 코미디로 바꾸려는 시도가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무심코 책장을 넘겼다가 나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급기야는 낄낄대다 박장대소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유머를 발견하려 애쓰는 일은 곧 스트레스 해소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저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짜증이 이 책을 보는 동안에는 깡그리 잊혔다. 양복을 입고 태연히 발표를 하고 있지만 아랫도리가 축축한 그림이나, 한 남자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반대편 남자는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그림, 의자 괴물을 나타낸 그림들은 흔히 마주할 수 있지만 세심한 관찰이 아니면 코미디와 연결 지을 수 없는 센스가 돋보인다.



그리고 그런 유머가 왜 즐거운지를 아는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림 속 상황과 배경이 우리 정서와 좀 다를 수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 얽혀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불편하고, 피곤하고, 짜증이 날 수 있는데 생각의 전환으로 별 일 아닌 걸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거나 시선이 두려워 해보지 못한 일탈(?)들로 인해 간접적으로나마 후련함을 느끼면서 불쾌한 감정들을 시원히 날려버리는 기분. 글이 거의 없는 그림으로 이런 기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또한 저자는 매일 아침 사무실에 도착하면 한 시간 남짓 주변 물건들을 갖고 논다고 했다. ‘창의력 체조’라 부른다고 하는데, 사물을 완전히 새로 인식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세상 속의 예술가’라는 제목이 붙은, 앞선 그림들과 좀 더 다른 창작물을 보고 있으면 주변 사물들도 얼마든지 존재감을 뽐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커피가 들어 있는 머그 두 잔이 선글라스를 낀 사람으로 변할 때나, 하얀 붓이 수염과 머리카락으로 변할 수 있는 모습들은 기발했다. 내가 매일 마주 하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친구처럼 혹은 동지처럼 대할 수 있는 시선과 생각이 부러웠다. 그렇다면 나 혼자 늙어가는 게 아니구나(읭?), 혼자가 아니구나 하며 사물들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런 소소한 즐거움이 생긴다면 일상이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말이다.



4. 그런 책은 없는데요… - 젠 캠벨





아무런 정보 없이 그저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들어 읽게 된 책이 좋아질 때면, 책을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 책 역시 그러했고 예상치 못한 행복이 찾아온 듯 푹 빠져 들어 한참을 웃다, 황당해 하다,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작은 책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은 책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을 차지하고라도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제인 에어’가 쓴 책과 <안네의 일기> 속편이 있냐고 묻고, 제목을 정정해 주어도 자신이 태어난 해와 똑같아 정확히 기억한다며 <1986>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실수는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뒤로 갈수록 맘껏 웃을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씩 난감해졌다.


그런 생각이 점점 짙어진 건 서점에 전화나 방문을 해 항의를 하는 건지 괴롭히는 건지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손님들 때문이었다. 무려 캐나다에서 전화를 걸어와 동화책 때문에 자기 딸이 악몽을 꾼다며 판매 중지를 요청하거나 책을 주문하고 몽땅 복사한 후 반품해서 서점에서 항의하자 자신이 예언자라며 종교 팸플릿을 보낸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질서와 상식이 필요하지만 늘 그 기준이란 게 모호하다는 걸 느끼고 어려워 할 때가 많다. 서점에서 만난 다양한 손님들을 보며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가도 그런 기준이 다른 것인지, 이기적인 것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즐겁고 독특하다는 사실에 매료되었으면서도 사연이 심각해질 때마다 왜 서점에서 이런 요구들을 해대는 것인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뒷부분에 다른 서점의 이야기도 실려 있지만 독특한 손님을 대하는 저자를 보면 책을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해주려 할 때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래서 이런 손님들을 만날 때마다 저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이상한 질문과 요구를 하는 손님들을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 이상은 없다. 개인적인 설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 이후 상황을 독자가 모두 받아들여야 하니 마치 내가 서점 직원이 되어 그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책을 읽어갈수록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뭐,’ 싶다가도 어느새 피로해지고, 왜 서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듯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런 시간을 견디고 버티고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보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책이라는 방패막이 존재하는 서점이라는 공간 때문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책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저자 또한 그런 마음이 들었을 거라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서점이라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 아님을 제대로 느꼈다고나 할까? 종종 책 속을 통해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도, 종종 너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 이 책을 통해(자꾸 책을 언급할수록 ‘책’이라는 아이러니에 갇히니 서둘러 이 책 속에서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응? 이게 무슨 말이지?) 책 밖의 세상을 제대로 경험한 기분이 든다. 역시나 책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한 권의 책으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내가 서점 직원이라면 이런 손님들은 자주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이 시간에도 다양한 손님으로부터 꿋꿋하게 서점을 지키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존경을 표해본다.




5.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정은우





여행이란 듣기에는 설레도 막상 해보면 대체로 고단한 것투성이다. 어쩌면 우리는 반짝이는 찰나를 위해 고단함도 감내하겠다는 각오를 여행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33쪽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준비부터 설렌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귀찮고 고단해서 쉽게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준비해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성향과 안 맞을 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정하자 더 이상 여행에 관한 글을 회피하지 않게 되었다. 여행서를 마주할 때마다 나도 가고 싶어 질까봐, 현재의 나의 상황을 한탄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자 여행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고, 오히려 가보고 싶은 곳도 생겨났다. 틀에서 벗어나면 좀 더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경험한 셈이다.

여행자는 자신의 낯섦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일상과 맞교환한다. 그렇게 그들의 일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여행 아닐까. 44쪽

그럼에도 종종 안전해서 평범한 나의 일상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일상과 맞교환’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혼자 여행하기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역시나 고단함을 이길 정도의 열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과 그림,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종종 유혹에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특별함보다는 소소함에서 오는 느낌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할 일이 빼곡하게 적힌 여행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뭔가를 보고 남겨야 하는 여행과는 무관한 빈둥거림을 우리는 원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때론 예기치 못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여행의 느긋함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때론 ‘지금 여기에 없는 답이 여행이라고 있을 리가.’ 있겠냐는 팩트를 날리고 ‘이국의 낯섦을 보는 것도 좋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것 역시 훌륭한 여행이 될 있다. 잘 알고 있다 여기던 것들을 새삼스레 살펴보고 새로운 사유만 할 수 있다면’ 서 사람들이 국내 여행을 잘 하지 않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여행을 간접으로만 경험한 나에게도 제대로 날아드는 말들이 잠시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세계 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 도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들려주는 게 좋았다. 작가나 책이 되기도 했고, 유명 인물이나 그림이 되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과 얽힌 여행의 느낌들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게, 때론 잔잔하게 흘러가는 글이 책 속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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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 100년 전,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재판관이 벌인 재판정 격돌, 현장 생중계! 재판정 참관기 시리즈
김흥식 엮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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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도 가지고 차도 한 잔 마시러 카페에 갔다. 다소 신난 음악을 들으며 그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는 왜 하필 이 책을 가져갔을까?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장의 사진 앞에 멈췄고 순간 눈물이 날뻔 했다. 각자 나름대로 카페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마음이 평안했고, 귓가에 흐르는 음악도 그런 분위기를 고조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외국어로 된 음악, 커피, 불특정다수들이 모여드는 카페.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들여다 본 사진은 하얼빈에서 암살을 앞둔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의 마지막 기념사진이었다. 의거 3일 전에 마지막을 예감하듯 이발소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의식을 치르듯 찍은 사진이었다. 왜 이렇게 이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을까? 눈물이 맺히고 마음이 울컥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안중근 의사의 나이는 31세, 우덕순은 34세, 유동하는 19세 라는 나이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린 재판장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이 책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일본 초대 총리이자 제1대 대한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재판 과정을 재구성한 책이다.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고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8일 동안 여섯 번의 공판을 받는다. 그 공판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고, 공판을 지켜보면서 안중근 의사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낱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이 러일 전쟁을 일으킬 당시만 해도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토가 부임한 이후에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을사늑약(1905년 11월)과 행정권을 박탈한 정미 7조약(1907년 7월)을 강제로 체결하고 동양 평화를 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을사늑약 당시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허락도 없이 체결했으므로 부당함은 불 보듯 뻔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일본은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삼아 제국주의를 향한 야욕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를 넘어 동양 평화에 위협을 가중시키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 이 재판장이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두 변호사의 엇갈린 변호(사형과 무죄)에 자신의 주장을 정확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죄’라고 주장하는 변호사에게도 ‘오늘날 모든 인간은 법률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다니 말이 되는가?’ 라며 자신을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말한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까지 책임지는 모습에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자꾸 올라왔다.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의식이 깨어있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고향을 떠나 3년 동안 활동하면서 ‘첫 번째는 한국의 교육을 꾀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한국의 의병으로서 나라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연설을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리고 조국에 대해 품은 사상은 오래 전부터였고,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 더욱 절실해졌다고 했다. 그가 행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을 넘어 동양 평화까지 생각하는 사람 앞에 불가능한 것이 없어보였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똑같은 상황을 겪고 보면서도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행동만이 최선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뜻을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기꺼이 조국을 대표했고, 형식적으로 이뤄진 재판에 순응하면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자신의 뜻 또한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말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쓰기 시작한 <동양평화론>은 완성되기 전에 형이 집행 되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아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이 힘을 합쳐 서양의 제국주의에 맞서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책이라고 하는데, 100년이 지난 현재를 보면 안중근 의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동북아 국제 정세는 달라진 것이 없고, 더 적대적이며 여전히 전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뻔히 보인다. 행동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생각이 깨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생각이 깨어 있고 행동했던 사람들이 있어 (극단적인 예로 ‘헬조선’이라 부르는) 현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뻔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걸 어떡해야 할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의거를 치르기 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눈물이 났던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귓가에는 당시에 들었던 외국어 노래가 흐르고 있다. 내 곁에는 커피가 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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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를 버린 논어
공자 지음, 임자헌 옮김 / 루페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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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읽고 싶은데 내 역량이 되지 않아 읽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분야별로 다양한데 그 가운데 <논어>도 단연 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다. 논어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오래된 책이 지금까지 언급되는 게 궁금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실생활과 연관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저히 자신도 없고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를 것 같은데 어떻게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랬던 내가 <논어>를 읽었다. 가장 큰 용기가 되었던 것은 이 책의 번역 때문이었다. 논어를 완역한 책인데, 흔히 들어온 군자와 소인이란 단어가 없다. 그리고 ‘공자님 말씀’에 비속어, 유행어, 외래어가 섞여 있다. 즉 나처럼 <논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읽을 수 있게 한 다음 논어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하는 번역자의 뜻이 보였다. 그리고 멋지게 먹혀들었다.


공자가 말했다. “「시경」의 시 300편을 한마디로 하면 이거다. 맑은 마음.” 32쪽

이렇게 <논어>의 해석과 함께 번역자의 생각과 느낌이 곁들어진 게 이 책의 구성이다. 「시경」의 ‘맑은 마음’에 대한 번역자의 느낌은 신박하다 못해 논어를 계속 읽고 싶게 만든다. ‘솔직의 탈을 쓴 직설, 독설 때문에 일상에 크고 작은 빡침이 있었다면 자, 맑은 시의 바다에서 잠시 쉬시면서 셀 위 댄스?’ 라고 말해준다. 그저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보다 이렇게 공감해주고 알아먹기 쉽게 말해 주니 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이런 말은 어떤가.

공자가 말했다. “이번엔 부모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말해볼게요. 부모님이 잘못하는 것을 보게 되잖아요? 그럼 돌직구 날리지 말고 돌리고 돌려서 감정 상하시지 않게 부드럽게 일러드려야 해요.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부모님이 내 말을 따라서 고치지 않으시잖아요? 그래도 또 공경스럽게 대해야 하고 엇나가면 안 돼요. 물론 피곤하죠. 그래도 원망하면 안 되는 거예요.”

- 나를 낳고 길러준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막무가내 효도를 스스로 세뇌할 것인가? 공자는 부딪히라고, 부모님의 잘못된 생각에 끊임없이 부딪치라고 말한다. 대신 언성을 높이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돌려 말하라고 한다. 건강하게 집요해야 하는 것이다. (71~72쪽)

효도는 어렵다. 자식 된 도리도 어렵다. 그런데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서로 부딪히는 모습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절하고 도리에 맞게 하라고 알려준다. 번역자 또한 ‘건강하게 집요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논어>가 고리타분하게 잔소리만 하는 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공자가 말했다. “아, 어떡하지? 아, 어떡하지? 하며 전전긍긍 애쓰지 않는 인간한테는 나도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요.”


-발은 내가 떼는 거다. 좋은 선생님이 날 어떻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283쪽

꼭 내게 하는 말 같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그 선택도 내가 해야 하고, 선택에 따른 긍정과 후회의 몫도 모두 내 책임이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나서서 해주기를,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내 뜻과 다르면 원망의 대상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할 때가 많다. 현재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는 내 스스로가 발을 떼어 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알아서 해주겠거니 하는 기대 없이 스스로 독립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발을 떼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알아먹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며 온전히 깨달았다. 그리고 번역자의 말마따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을 너무 낡은 언어로 마주하고 있었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알아먹지 못해 고민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부작용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알아먹기 쉬운 말로 논어를 읽고, 번역자의 생각을 더듬다 보니 왜 <논어>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책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바람직함, 사람다움,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갈망은 세월이 지나도 본질이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더 많이 읽혀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었다. 혼자 살아간다 해도 필요한 것이 사람다움인데, 하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면 그게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완벽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논어>에는 현인의 깨달음과 조언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일 뿐 <논어>는 결코 낡은 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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