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간 - 반항과 복종
디이트리히 본회퍼 / 대한기독교서회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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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계명을 어기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교만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을 C.S 루이스는 그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언급한다.  그 이유를 곰곰 따져보면 몹시 당연한 말 같다.  즉, 10계명의 모든 조항들을 지키지 못하는 건 결국 그만큼 인간이 교만하기 때문이기에. 교만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할줄 모르고, 간음하고, 살인하고,이웃을 업신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우상을 숭배하고, 그리고 범죄하는 것이다.  즉, C.S 루이스가 교만이 기독교인의 죄 가운데 가장 무겁다고 말한 이유는 모든 죄악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그것이며, 그래서 그만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의와 통찰이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교만을 지도자가 갖게 될 때, 역사는 언제나 불행의 질곡속으로 빠져들었다.  20세기 초,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통과 대통령을 겸하는 자리에 올랐던 히틀러는 일당독재 체제를 굳히고,  곧바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무구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개 보병의 신분에서 한 정당의 당수로 그리고 대통령과 총리를 겸하는 총통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무소불위한 권력의 힘만을 믿고 교만으로 빠져들어 결국 민족과 자신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고 말았다.

이같은 히틀러의 철권통치 시절을 거치며, 독일 내의 모든 정치와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의 권력아래 줄서기를 하는데 바빴다.  종교세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시절 독일교회는 나치당의 강령을 따르는 제국 교회로 재편되었는데, 소수의 깨어있는 기독교 목회자들이 힘을 모아, 나치의 제국교회에 반대하고 히틀러에 저항하는 고백교회를 연합하기에 이른다.

20세기 초,  21살의 나이에 베를린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였던 청년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바로 이 고백교회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교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실 우둔함이다.  본회퍼의 <옥중서간>의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10년 후'란 장에서 그는 이렇게 우둔함의 위험성을 설파한다.

"우둔은 악(惡)보다도 훨씬 위험한 선의 적이다. 악에 대해서는 대항할 수 있으며 그것을 폭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힘을 가지고 방해할 수 있다.  악은 적어도 인간 속에 불쾌함을 남겨놓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해체의 싹을 자기 속에 품고 있다.  그러나 우둔에 대해서 우리는 무방비하다. 우둔에 대해서는 항거를 가지려 해도, 힘을 가지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이유를 들어 우둔한 자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p.18

이 장속에서 `10년후'가 의미하는 것은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1월 30일 이후인 1943년을 말한다. 즉, 이 글을 쓰기전에 본회퍼는 이미 비밀경찰(게슈타포)의 수배를 받고, 체포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다.  히틀러가 집권한 10년 후의 독일이 어떻게 우둔한 자의 통치아래, 형편없이 변모하였는지 본회퍼는 히틀러를 우둔함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은 여기에 갖다 붙여도 될 것이다.  지도자가 우둔해서, 전 국가와 전 세계가 위기에 빠져들어 있다는 한탄인 동시에, 우둔한 자의 위험성을 특별히 경고하는 듯한 이 글은, 운이 참 좋았다.  본회퍼는 10년 후라는 이 짧은 글을 1943년 그가 체포되기 직전 써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부쳤고, 원문은 자신의 집 지붕의 기와와 서까래 사이에 감추어 두었는데, 전후 폭격에도 불구하고 원본 그대로 발견되어, <옥중서간>에 실리게 되었다고 한다.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결국 게슈타포에 체포당한다.  그의 혐의는 히틀러에 저항하는 단체인 고백교회의 리더였다는 것과 이것을 발판으로 그가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였다. 명망있는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21살이라는 나이에 이미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로부터 "신학적 기적"이라는 논문평까지 얻은, 촉망받던 청년 신학자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천재성 보다도 오늘날 그는 행동하는 신학자, 시대의 양심, 그리고 순종과 결백, 용기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체포되기 4년전 미국 유니언 신학교의 초청교수로 가서, 안전하게 망명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미한지 두달만에 다시 나치당의 조국 독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는 독일과 미국의 성도들에게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 기독교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라는 편지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조국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어 투옥된다.  반항과 복종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그의 <옥중서간>은 1943년 4월5일부터 1945년 4월 9일의 2년간 그가 여러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며,  부모님과 친구이자 제자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쓴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둔한 히틀러가 권좌에서 제거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들에선, 아들을 걱정할까 노심초사하는 부모님을 생각해 자신의 안위를 희망과 열정으로 묘사하려는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옥중에서는 그는 여전히 청년학자로서 수많은 책들에 대한 열정과 글쓰기에 대한 염원을 조금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영국군 폭격기들이 베를린 시와 수용소를 공습하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집필하는 시간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제자이자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들에선, 아직은 단단히 세워지진 않았지만 미숙한 자신의 신학사상들 가운데 일부분을 비교적 논리적이고, 감동깊게 엿보여주고 있다.  본회퍼는 현대 교회와 기독교의 흐름을 값싼 은총이 대량으로 유포되고, 허락되는 현실로 분석하며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 우리의 시대와 함께하지 않는 신앙은 헛된 기복신앙에 불과하고, 신앙이 개인의 구원과 천국의 티켓으로 오인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시고 박해받고, 십자가위에서 피 흘린 이 대지위의 삶을 경원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죽어서 오는 천국을 기다리지 말고, 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 노력하지 않는가,하는 질책같이 다가온다. 

교만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신념 아래서 감금과 죽음을 예상하고도 자신의 길을 갔던 본회퍼. 그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끝임없이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현실과도 언제나 타협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  본회퍼의 조국 독일의 신앙인들이 나치당의 제국교회에 줄서기를 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모든 문제를 덮고(사회적), 오직 개인의 안위을 기원하는 기복신앙. 그것은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서민과 사회적 약자로부터 멀어지는 교회. 부르주아가 점령해 버린 현대 미국의 교회들.  미국 교회를 벤치마킹하는데 여념이 없는 우리 교회의 미래 자화상이 아닐까,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한다.

"신은 우리의 가능성의 한계에서가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된다네. 하나님은 죽음에서아니라 생에서, 고난에서가 아니라 건강과 힘에서, 죄에서가 아니라 행위에서 비로소 인식되기를 원하시지.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중심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것이 아니라네. 어떤 문제든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 역시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라네." p.186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영국 앤튼 경의 명언이 있다. 이걸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오만과 교만에 찌든 권력은 반드시 실패한다"  일당독재를 통해, 강력한 독일, 뛰어난 혈통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히틀러의 오만과 교만에 찌든 국가관과 정치관 때문에 결국 독일은 일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600만명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사건의 피의자가 되었다.  1000년 왕국을 꿈꾸었던 나치당은 불과 10여년 사이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 악마성을 영원히 인정받아오고 있다.   불과 100년도 되지 않는 나치의 역사와 패배를 바라보면서, 밀려오는 나의 상념이란 대체 무엇인가 ? 한 시대는 그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또한 선택한 그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1945년 4월 9일 아침,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수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간절한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20세기, 39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간 본회퍼의 신학사상의 영향력은 컸다.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보여준 `교만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는 무엇보다 큰 감동으로 남는다.

 

 

 

 

 

2008.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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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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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금요일이면 로또를 산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겠다.  로또에는 관심조차 없던 내가 금요일이면 꼭 퇴근하기전에 집앞 편의점에 들른다. 지난번 토요일 어느 저녁엔 단발의 차이로 로또구매에 실패했다. 기차에서 내려 차를 몰아 집앞 편의점에 골인한 순간, 나보다 먼저 편의점에 당도한 아저씨가 로또를 이십만원어치나 사는 바람에, Pm 8:00 로또 마감시간을 눈앞에서 다 보내고야 만 것이다.  아저씨가 얄미웠다. 

편의점을 나오면서 쓴 미소를 지었다. 나두 나이를 먹은건가 ? 예전엔 로또같은건 관심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인생에 요행은 없다?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고친게 그러고보니 최근의 일이로구나. 세상을 대하는 나름의 자세가 바뀌고 있다는건, 인생의 연륜이 쌓이고 있다는 얘기. 내 삶이 성장했다는 증거?   아니면 세파에 시달려 내 영혼이 닳고 있다는 물증?  다 좋다. 아무튼, 나는 나이를 먹고 있고 이제 조금씩 삶에서 조바심이 이는 나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런 내게도 17살이 있었다. 아침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내또래 여자 아이를 짝사랑하고, 친구들이랑 토요일이면 영화관에서 성인영화를 보며 짜릿한 쾌감을 맛보던, 때로는 혼자 있는걸 좋아해서 교정 잔디밭에 누워 알 수 없는 시 나부랭이를 끄적거리던 시절, 또 그 시절 정체 모를 분노때문이었을까,  학교 언덕배기에서 어느날이면 개미를 눌러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던 17살.  그러나 술이나 담배를 해본적이 한번도 없었고 학교와 집에선 언제나 고분고분한 성격이었던 나.  반항의 시절이라는 그때, 나는 반항하는 법을 몰랐던 순진한 아이였다.

김형경의 <꽃피는 고래>에 나오는 17살 주인공 니은이. 아빠와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나는 그렇게 불행하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과 육체가 어떤 일을 겪어 내기엔 감당치 못할만한 나이가 있기 마련이다. 17살이란 나이는 부모의 부재를 온몸으로 겪고 감내하고, 극복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닐까.  소설속 니은이가 오랜시간 입이 아니라 내면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답답하면서도, 이해되는 것은 그때문이다. 

아빠의 고향, 처용포.  부모를 사고로 잃고 니은이가 세상과 이제 소통을 시작하려 하는 공간이다. 그곳엔 오래도록 고래잡이를 했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한글교실에서 한글을 깨치고, 니은이의 아픈 영혼에 밥이 되어주는 왕고래집 할머니가 산다.  17살, 푸릇푸릇한 소녀와 세월의 주름을 얼굴에 지닌 두 사람 노인과의 만남, 그리고 소통.   장포수 할아버지는 유능한 고래잡이였지만, 금지된 포경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화려한 시절을 회상하며, 포경선을 닦고 조이는 것을 낙으로 알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금지된 고래를 잡으러, 다시 포경선을 띄울 날을 동경하고 있다. 왕고래집 할머니는 가난한 시절, 첫정에게 시집와 또다른 첫정을 잊지 못하는 남편을 애틋한 마음으로 저승으로 보내고, 혼자 그 세월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분이다. 

이 두 노인의 지나온 삶은 상실, 즉 잃어버림의 연속이다.  시간속에 묻어오는 것은 연륜뿐만 아니라, 끝없는 이별이다.  17살, 너무 이른 나이에 니은이가 부모를 잃어버렸듯, 두 노인도 삶속에서 고래와 남편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적인 흔적들은 사라지고, 세상은 고래잡이를 금지하고, 피할 수 없는 이별을 강요했지만,  각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신화 하나씩을 내면에 짓는다. 훗날 어쩌면 부모의 죽음을 거치며 겪은 모든 상실감과 그 무게감이 17살에 자신의 삶속에서 서술된 하나의 신화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을때, 니은이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잡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 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 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 올리는 일이든,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p.256

삶은 여행이다. 여행은 눌러앉음이 없다.  모든 설렘과 애착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정든 모든 것을 떠나보낼 수 있어야, 플레폼에 남겨진 사람과 풍경을 뒤로할 수 있어야, 새로운 여정은 시작되고, 우리의 여행은 지속되며 그래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떠나온 공간에 대한 과도한 욕심도, 지난시간에 대한 과분한 집착도, 올바른 여행자의 태도는 아니다.  주어진 앞날에 대한 긴장감과 기대감이면 충분하다.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고, 앞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삶의 `처음'은 계속되는 법이다.  여행의 묘미란 바로 그것이다. 

어느날, 장포수 할아버지는 박물관에 기증하겠다던 포경선을 몰래 타고 먼 바다로 떠나 버린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포경선과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삶이자 꿈, 그리고 오랜 시간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그 바다와 고래를 향하여, 마지막 여행을 떠난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자신의 신화의 마지막 페이지에 신비감을 덧붙였다.  

이제 니은이는 17살, 부모잃은 고아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큰 상처와 이별을 겪었지만, 그것이 생의 마지막 상처와 이별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니은이는 `떠나보낼 수 있는 자만이 어른이 될 수 있다'라는 평범한 깨달음을 얻었다.  니은이는 이제 어떤 신화를 쓰게 될까?  그가 방황을 멈추고 하얀 백지앞에 펜을 들려 한다. 

내가 읽은 김형경의 첫 소설이다.  에세이 <사람풍경>속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소설을 읽으며 좀체 주인공 니은이의 존재가 잡히지 않는 모습에 적이 답답함과 실망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딱히 인상깊게 다가오는 등장인물도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을 읽는 내내 부단한 인내심을 강요받았다.  이외수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여기엔 단서가 있다.  7,80년대에 쓰여진 그의 초기 작품들을 나는 좋아한다.  공교롭게도 그러나 내가 접한 이외수의 첫 소설은 2002년에 출간된 그의 <괴물>이란 작품이다. 그때 내가 이외수에게 얼마나 큰 실망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처음접한 김형경의 소설을 읽으며 이외수에게 품었던 한때의 오해가 생각나는건 왜일까?

 



 

 

 
 

2008.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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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작별 세트 - 전2권 - 정이현 산문집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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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X세대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소비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좋고 싫음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고, 어른들의 시선따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과 새로운 미디어(PC통신)에 첨병 역할을 한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을까?   가끔 일상에 파묻혀 살다보면,  내가 내 자신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낯설어지는 경우가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어린애같고, 철이 든다는 것은 먼 훗날의 남의 얘기처럼 살고 있는 사람. 30대 중반, 그 나이의 무게감을 느끼기란 좀체 어렵다.  그러나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아마도 스물아홉의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하고,  2년정도 남은 대학 생활을 고3처럼 열심히 보냈던 시절.  군대가서 사람 됐다는 주위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며,  자랑스런 사각모자를 쓰고 졸업앨범 한 장 씩을 받고 곧바로 백수가 되었던 시절. 그런데 스물 아홉이란 낭떨어지에 선 나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게도 사랑을 하고 있었다.  보기좋게 미끄러지긴 했지만, 스물 아홉까지의 그 사랑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X세대로서 젊은 날에 남겨둔 마지막 낭만적 사랑의 기억이란, 그게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되고, 나는 더이상 스물 아홉의 순수한 사랑따윈, 내게도 상대에게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직도 서른 중반의 내가 이 사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득하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  언제까지든, 이 사회속에서 나와 우리 세대의 시대는 오지않을거란 비극적인 예감은 대체 어느 지점부터 머리속에 기생하게 된 것일까?  90년대 PC통신의 창작공간을 종횡무진하던 내또래의 K씨는 아직도, 도서관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때 제법 공부를 잘 했고, 집안이 부유했던 J는 몇차례의 고시에 연타 떨어지더니, 아직도 그 세계를 헤매고 있는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매일 밥벌이를 위해 정시출근을 생활화 한 나는 그 정체성의 혼란에서 좀 벗어날때도 되지 않았나 ?

며칠전 회사에서 정이현의 산문집을 읽다 휴게실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P가 내게 묻는다.  정이현? 소설가냐 ? 몇살인데?  "형님하고 동갑.... " 곁에서 지켜보던 마흔이 넘은 Y형이 P에게 말한다. "야, 너랑 동갑이잖아.  이 여자는 소설쓰고 책까지 내는데, 너는 그 나이에 지금 뭐하고 있냐 ? 풋ㅎㅎ " 이 말에 모두다 한바탕 웃었다.  그 말을 들은 P 왈. "내가 지금 어때서 ?"  그래 맞다.  꼭 정이현처럼 자기 이름으로 책내야 성공한건 아니니까. 

정이현의 산문집을 하루에 한 권씩. 이틀에 걸쳐 읽었다.  근래에 책을 잡고 이렇게 빠르게 속독을 할수 있었던건 나의 독해력이 늘어나서일까?  아닌거 같다. 정이현의 문체에 날개가 달린것뿐.  글을 이렇게 속도감있게, 전혀 지루하지 않게,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김형경도 그랬고, 정이현도 그렇다.  소설가인데, 소설을 먼저 읽지 않고 산문집부터 보고 있으니 나는 책읽기를 잘못하고 있는건가 ?

<풍선>과 <작별>, 책은 두 갈래로 묶여 있다.  <풍선>에선 영화평을 담았고 <작별>은 내 또래 여자 소설가의 삶을 조금 보여주다 곧바로 읽은 책에 대한 리뷰로 이어진다.  지금껏 작가가 소설을 쓰다가 외유처럼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묶은 것 같다.  때는 2005년을 전후로 한 시점.  그 시점엔 된장녀란 것도 없었고, 촛불집회도 없었고, 쇠고기 협상도 없었고, 비정규직 문제도 없었을까?  밀려서 가끔 읽는 신문과 매일 노트북을 켜고 포탈에 접속하면 보게되는 요즘의 시대상과 격세지감?을 느꼈다면 오버일까?  아침에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커피 한잔을 타서 책상에 앉아 인터넷을 검색하다, 곧바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맘내키는대로 소설을 쓰는 생활? 

이것이 중산층으로 자라나 여류 소설가로 살고 있는 정이현의 일상의 단편이다. 영화와 티비 드라마 그리고 책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가로서의 삶의 일부분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소시민, 작가와 같은 서른 중반의 한 남자가 지난달에 이미 다녀온 여름휴가를 한 번 더 정신적으로 다녀온 듯 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면, 이 산문집에 감사할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  

"그분들께 짧은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인가,`나쁘다'인가?  주지하건대 `싫다'와 `나쁘다'는 엄청나게 다른 말이다. `싫다'는 것은 주어의 주관적 감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나쁘다'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의 표현이다. 타인의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것이라면, `좋다'의 반대말은 당연히 `싫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상식이다. 그러니까, " 그 영화 별로다"라는 문장의 앞뒤에 생략된 말은, `나는' 과 `~라고 생각한다'가 아닌가 말이다. " <풍선> p.203

이 산문집의 어느 구석에 여자로서 남자란 어떤 생물인지 궁금하다 라는 문구를 읽다가,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서른 중반, 90년대를 함께 통과해온. 중산층 가정의 정규 교육을 받은, 내 또래의 여자와 또 여자 소설가는 이 시대를 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건지, 궁금했던 거다.  직장 형이 "너 나이에 이 여자는' 이라는 말을 할때처럼,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이 나이에 나란 남자는'이란 질문을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정이현의 산문집은 그에 대한 그림을 너무도 선명히,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엿보여주고 있었으니, 어찌 올 여름 두번째 외유의 순간이라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작가와 내가 한 시대를 동시에 통과해서,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몹시 새롭고도 낯설다.  시대를 읽는 감각의 더듬이를 한층 높이 세우고, 기생하는 지역과 공간을 뛰어넘고, 가정환경과 직업적 차이를 무시하고, 함께 현시대를 사는 동료로서 작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의 묘미를 몇배는 더 첨가하는 길이다.  

그래 이 여름, 지난 90년대의 X세대들은 사회 구석구석에 박혀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그 다양성이 모여 우리들의 정체성을 찾게 될 날이 올 것이다.  90년대 잊혀진 세대인 나와 작가가 만나게 될 지점이 거기가 아니겠는가?  정이현의 산문집을 읽으며 지난 여름 휴가 중에 만난, 아내의 중학 친구가 생각이 났다.  유명 방송인으로서, 나름의 프라이드와 지성적인 체취가 물씬 풍겼던 그녀.  그녀가 몰고온 프라이드 골드 뒷자석엔 영문모를 영어 원서 뭉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아내에게 말한다. " 너 자신을 믿어, 그리고 타인이 아니라 바로 너에게 감사해, 너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200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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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독 흰 고독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영도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독한 새에는 다섯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가장 높은 곳까지 나는 일이요
둘째는 같은 종이라해도 친구를 삼지 않는 일이요
셋째는 부리를 하늘로 쳐드는 일이요
넷째는 한 가지 빛깔을 하고 있지 않는 일이요
다섯째는 낮고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  후아나 델 라 쿠르스 수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는 8,000급 봉우리 14좌가 있다.  그 가운데 9번째인 8,125미터 높이의 산, 낭가파르바트는 30명의 알파니스트를 죽음으로 몰아간 역사가 있는 악명높은 산이다. 수많은 이들이 이 산에 오르기 위해 막대한 물자와 인원을 쏟아부었지만, 이 산은 도전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에게만 산의 정상을 허락하고 품안으로 받아들였다.

1953년 수차례의 역사적인 도전끝에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볼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한다. 낭가파르바트란 이름은 카슈미루어로 `벌거벗은 산'이란 뜻을 갖고 있다. 사실 이 산은 깍아지른듯한 바위와 5,000미터가 넘는 수직 빙벽을 갖고 있는게 특징이다.  이 지역 일부에서는 이 산을 `디아미르(산중의 왕)'라 부르기도 한단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극지를 모험하는 이들의 생리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그러한 일에 관심갖고 체험하기전까지 나는 아마도 그들의 심리와 열정을 알지못할 것이다. 목숨을 내걸고 하는 것은 소위 말해서 스포츠나 레저가 아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취미로 피아노 치기를 즐기는 것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쳐도, 연주도중 죽을 염려는 없다.  환상적인 연주가 끝나면 관객의 환호와 갈채가 이어진다.  연주를 하는 도중이나 연주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다 고꾸라져 사망하는 경우도 없다.  열정은 예술로 승화되고 오직 연주가 끝나면 연주의 평가와 관객의 감동이 뒤따른다.  그러나 히말라야를 오르는 알파니스트에게 정상의 등정만으론 성공이라 부를 수 없다. 올라온 만큼, 죽음을 무릅쓴 하산의 여정이 남아 있다. 실제로 수많은 등반가들이 하산길에 눈사태나 크레바스를 만나 죽음에 이른다.

희박한 공기, 차가운 기온, 몇분후를 알 수 없는 날씨,  그리고 바위산과 수직빙벽으로 이루어진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치밀한 준비와 강인한 체력, 정상정복에 대한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산을 오르는 동료 가운데 누가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같은 죽음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산을 오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그 과정을 이겨내고 정상을 밟을거라는, 희망을 안고 등반을 시작한다. 그러나 암묵리에 그것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인식만은 회피할 순 없다.  세계의 꼭대기라 할 수 있는 8000미터 급의 봉우리에 올라보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 소수가 되어보는 일은 알파니즘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매력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그러나 알파니스트의 세계를 그처럼 단정지을 순 없다. 독일 출신으로 세계 등반 기록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 라인홀트 메스너는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르고, 그 이후 곧바로 낭가파르바트를 단독으로 등반하여,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8,000미터 급을 완등해낸  신화적인 인물이다. 1978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성공하고, 주위의 관심과 찬사를 즐길법도 한 그였지만, 불과 몇개월만에 또다시 사람들의 의혹과 냉소속에 다시 낭가파르바트로 향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든가 잘해 보라는 등의 말들이 여권 창구 너머로 들려온 마지막 인사였다. 그들의 말투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비난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내 생애의 마지막을 준비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 길을 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p.57

그리고 그는 낭가파르바트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미 30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산에 도전한다. 지금껏 당연시되어왔던 방대한 자원을 배경으로 한 등정이 아니라, 산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정상까지 최소의 비용과 단촐한 몸 하나만을 의지한 채, 모든 지원을 되도록이면 거부한 단독 등반이었다.  산을 오르기 위해 법적으로 필요한 의료 요원 1명, 그리고 수행 장교 1명이, 그의 등반에 참여했을 뿐이고 40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서 8125미터의 낭가파르바트 정상까진, 거대한 산과 유약한 한 인간 라인홀트 메스너와의 맞섬이 있을 뿐이었다. 이 등반기를 기록한 이 책에는 정산등반까지 메스너가 낭가파르바트의 빙벽과 설산에서 보낸 시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무엇때문에 곳곳에 죽음이 크레바스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이 산에 오른걸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알파니스트의 열정과 도전뒤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도 극지를 탐험하는 등반대의 개념을 넘어서, 오직 혼자의 몸으로 그 모든 것을 체험하고자 했던 이 사나이는 본래 고독을 사랑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었을까?  그러한 자문이 책을 읽는동안 솟는다. 낭가파르바트는 그 산세가 험준하기로 히말라야에서도 악명이 높은 곳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위세로 서 있는 그 산앞에 등정을 위해 최소로 짐을 줄인 단촐한 행장에, 몸무게 겨우 60kg이 나아가는 한 인간이 맞서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 위압적으로 솟아 있는 산 안에서는.  훗날, 사람들의 갈채가 있을지도 모르나, 당장에 눈사태에 휩쓸려 순식간에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정상에 오른다고 해도,  오히려 돌아오는 길이 원래 더 힘든 법 아닌가?  그러나 이 도전을 매스너는 멈출 수 없었다. 

"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제 고독은 더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 "  p.165

세계 60억 인구가운데, 역사상 수천억의 인구 가운데, 그 산의 정상에 오른 자는 겨우 몇명에 지나지 않는다.  라이홀트 메스너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지구상에서 사물이 줄 수 있는 절대의 고독을 지닌 장소가 있다면, 아마도 8,000미터급의 히밀라야 14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평범한 모든 이들처럼 영원히 이 아래 대지에만 머물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극한의 정상에 닿아 본 이는 그곳에서 무엇을 느낄까?  아니 정상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혼자의 몸을 태워 인간의 한계인 극한에 맞서고 있는 인간은, 매 순간 무엇을 느끼고 있는걸까? 

내가 걸어가보지 않는 길이기에, 그것은 낯설다.  타인이 목숨걸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에 냉소의 감정이 솟고,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때로 말이나 글로서는, 그리고 스크린의 생생한 화면조차도 설명하지 못하는 생의 진실이 있는 법이다.  진실은 오직 본인의 체험과 느낌으로만 드러나기도 한다.   체험과 느낌은 글이나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라이홀트 메스너가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에서 느낀것이 무엇일까? 조금이라도 감을 잡아보려 애쓴 나의 노력은 헛되다.  그가 체험한 흰 고독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러나 당장에 내 자신이 낭가파르바트의 그 끝없는 빙벽을 아이젠과 아이스피겔만으로 오르며, 저산소의 갑갑함과 중력의 무거움을 느끼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엄습해오는 그 순간순간을 체험하지 않는한,  그 흰 고독의 정체를 깨닫는게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잠시 고독이란 해악이 아니라 평온함도 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조금 얻는데 만족한다.

 


 


 200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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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시클 다이어리 - 누구에게나 심장이 터지도록 페달을 밟고 싶은 순간이 온다
정태일 지음 / 지식노마드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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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삽니다. 과거는 기억일 뿐이고 미래는 기대에 불과합니다. 나는 살아 있음을 사랑합니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다.  인류의 영원한 영적 스승인 소로우에 내가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떠한 관습이나 법률, 체제 안에 가두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삶이 인간의 질서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믿는 단순함을 버렸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삶을 살 수 있었고 거기서 창의적인 사상과 삶이 나올 수 있었다. 하버드를 나온 수재였지만,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2년간 머물며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보고자 노력했고, <시민의 불복종>이란 저서를 통해서 국가라는 체제의 절대성에 맞서 개인의 인권과 개성이 권위와 집단권력에 의해 억압되는 구조를 질타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의 기초를 20대에 닦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20대는 어떤가?  입시지옥에서 탈출하면 모든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대학입학은 입시지옥의 탈출이 아니라, 또다른 지옥의 시작과 같다. 그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끝없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이 20대의 운명이자 로드맵이다.  이력서에 뭔가 하나라도 더 기재하기 위해 자격증이나 어학연수, 학점관리에 여념이 없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이 어느 정도 였을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높지는 않았을거다.  정치혐오 때문에 그랬을까?  아니었을거다. 그 시간에 영어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기 위해, 도서관을 점령하고 있었겠지. 

그러고보면 오늘날 20대는 고3의 연장이다. 20대가 끝나는 시점까지 이 이상한 전쟁은 계속된다.  그리고 30대에 접어들면, 운좋은 `소수의 승자'가 다수의 패자를 뒤로 하고 안정된 30대의 삶을 쟁취한다.  패자의 삶은 언제나 쓸쓸하고 슬프다. `88만원 세대'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그러지 않기 위해 20대의 싸움을 30대까지 이어오기도 한다.  백수라는 딱지를 붙이고 말이다. 

그러는 사이, 인생에 있어 가장 패기있고 정의롭고 신선해야할 20대 시절이 좌절과 분노, 그리고 쇠락의 기운으로 가득찬다. 이것은 비정상이다.  20대는 원래 불안과 좌절과 방황의 시절이라는 타이틀은 안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삶도 그만큼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삶은 치열하지 않은데 사회 구조가 사람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  대통령 선거날에 국가와 자신의 장래를 위해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는 일보다, 다가오는 토익시험을 위해 영어 단어 몇 개을 외우는게 더 가치 있다고 사고하는, 이 스케일 좁고 기성의 이기적 냄새가 풀풀나는 이 젊은이들이 어찌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이상한 패배와 좌절의 기운, 이 비정상적 젊음에 반기를 들고, 어느날 갑자기 유럽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난 젊은이가 있다. <바이시클 다이어리>의 저자. 정태일.  원래 여행을 떠나기전에는 그 여행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가 64일간의 유럽 자전거 여행에 `행복과 성공에 이르는 비결'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성공의 열쇠를 발견하게 되는 일은 없다. 여행은 여행일 뿐이고, 그것은 삶의 연장이며, 또다른 만남의 시작이다.  

"나는 결국 그렇게 12시간 동안 끈질기게 달렸다. 파리지엥의 만류를 뒤로하고 떠나온 지 9일째, 마침내 뚜르에 도달했다.  뚜르에 도착하자마자 참았던 오줌을 누니 샛노란 기운이 주르륵 쏟아졌다. 온 몸이 바르르 떨리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예상보다 힘든 첫 주행이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싶었던 강렬한 유혹을 떨쳐낸 내 자신이 대견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결국 5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순전히 자전거에만 의지한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자신감과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본문 p.105

나는 이 여행기를 읽으면서 모호한 성공철학에 대한 의미부여보다는 이 책을 쓴 젊은이의 결단과 행동, 그리고 64일간 자전거 페달을 밟을 수 있었던 그의 의지에 더 높은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하나의 여행을 기획하고 준비하고,실행하고, 그리고 마무리하는 과정은 곧바로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일과 흡사하다. 그 둘은 다르지 않다.  64일간의 유럽 여행을 통해, 저자가 경험한 일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홀홀단신, 낯선 나라에 내려앉아 냉정하지만 속살이 따스한 그 도시를 알아보는 일이나, 길을 가다 우연하게 만나는 유럽의 자전거 표랑객들과의 담소, 그리고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도시들속에서 만난 교과서안의 지성들, 또한 그곳의 생소한 풍광과 어울어지는 예기치못한 로망스의 경험. 이 모두를 통해 저자는 아마도 인생의 성공비결 보다도 더 큰 삶을 맞이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워왔을 것이다.

20대,스물 아홉,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누빌 이유는 분명하고, 이미 열정은 그 나이의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잊고, 감추고, 그리고 억압하며 사는 젊음은 불행하다.  젊음의 열망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 구조적 오류는, 젊은이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길들여진 기성이 해 놓은 비열하고, 옹졸한, 계략이다. 젊은이를 기성의 제도에 옭아 매려는 치졸한 장치다. 젊음은 그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져야 한다. 그것을 거부하고, 그리고 스스로 주체로 일어서야 한다. 선거날에 도서관에서 앉아 영어단어 하나더 외우는 것보다, 당당히 잘못된 기성을 심판하고, 자신의 미래에 한표를 던지는 사람. 그가 바로 20대, 스물아홉 젊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내게 자전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  시골집 본가에 오래도록 방치해둔 오래된 자전거 한 대를 며칠전 수리해서 아파트로 가져왔다. 자전거 수리하는 아저씨가 너무 오래 안타서 자전거 기어가 퍽퍽 하단다.  나의 게으름이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웠다. 장가를 들고, 1년도 훨씬 전에 자전거 한대를 사두었으니 이제 자전거가 두 대다. 타지 않던 자전거, 현관을 덩그러니 차지해서 언제나 통행에 장애만을 주던 자전거.  이제 저 자전거에 날개를 달아줘야겠단 생각이 문득 든다. 이 책의 저자처럼 유럽 자전거여행은 못하더라도, 30대가 되어 둘이 타는 자전거는 10대 시절, 철없이 달리던 자전거와 어떻게 다를까?  40대엔,50대엔......또 어떻게 다를까?  

 


 

 2008.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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