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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간 - 반항과 복종
디이트리히 본회퍼 / 대한기독교서회 / 199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계명을 어기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교만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을 C.S 루이스는 그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언급한다. 그 이유를 곰곰 따져보면 몹시 당연한 말 같다. 즉, 10계명의 모든 조항들을 지키지 못하는 건 결국 그만큼 인간이 교만하기 때문이기에. 교만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할줄 모르고, 간음하고, 살인하고,이웃을 업신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우상을 숭배하고, 그리고 범죄하는 것이다. 즉, C.S 루이스가 교만이 기독교인의 죄 가운데 가장 무겁다고 말한 이유는 모든 죄악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그것이며, 그래서 그만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의와 통찰이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교만을 지도자가 갖게 될 때, 역사는 언제나 불행의 질곡속으로 빠져들었다. 20세기 초,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통과 대통령을 겸하는 자리에 올랐던 히틀러는 일당독재 체제를 굳히고, 곧바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무구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개 보병의 신분에서 한 정당의 당수로 그리고 대통령과 총리를 겸하는 총통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무소불위한 권력의 힘만을 믿고 교만으로 빠져들어 결국 민족과 자신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고 말았다.
이같은 히틀러의 철권통치 시절을 거치며, 독일 내의 모든 정치와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의 권력아래 줄서기를 하는데 바빴다. 종교세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시절 독일교회는 나치당의 강령을 따르는 제국 교회로 재편되었는데, 소수의 깨어있는 기독교 목회자들이 힘을 모아, 나치의 제국교회에 반대하고 히틀러에 저항하는 고백교회를 연합하기에 이른다.
20세기 초, 21살의 나이에 베를린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였던 청년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바로 이 고백교회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교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실 우둔함이다. 본회퍼의 <옥중서간>의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10년 후'란 장에서 그는 이렇게 우둔함의 위험성을 설파한다.
"우둔은 악(惡)보다도 훨씬 위험한 선의 적이다. 악에 대해서는 대항할 수 있으며 그것을 폭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힘을 가지고 방해할 수 있다. 악은 적어도 인간 속에 불쾌함을 남겨놓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해체의 싹을 자기 속에 품고 있다. 그러나 우둔에 대해서 우리는 무방비하다. 우둔에 대해서는 항거를 가지려 해도, 힘을 가지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이유를 들어 우둔한 자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p.18
이 장속에서 `10년후'가 의미하는 것은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1월 30일 이후인 1943년을 말한다. 즉, 이 글을 쓰기전에 본회퍼는 이미 비밀경찰(게슈타포)의 수배를 받고, 체포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다. 히틀러가 집권한 10년 후의 독일이 어떻게 우둔한 자의 통치아래, 형편없이 변모하였는지 본회퍼는 히틀러를 우둔함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은 여기에 갖다 붙여도 될 것이다. 지도자가 우둔해서, 전 국가와 전 세계가 위기에 빠져들어 있다는 한탄인 동시에, 우둔한 자의 위험성을 특별히 경고하는 듯한 이 글은, 운이 참 좋았다. 본회퍼는 10년 후라는 이 짧은 글을 1943년 그가 체포되기 직전 써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부쳤고, 원문은 자신의 집 지붕의 기와와 서까래 사이에 감추어 두었는데, 전후 폭격에도 불구하고 원본 그대로 발견되어, <옥중서간>에 실리게 되었다고 한다.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결국 게슈타포에 체포당한다. 그의 혐의는 히틀러에 저항하는 단체인 고백교회의 리더였다는 것과 이것을 발판으로 그가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였다. 명망있는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21살이라는 나이에 이미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로부터 "신학적 기적"이라는 논문평까지 얻은, 촉망받던 청년 신학자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천재성 보다도 오늘날 그는 행동하는 신학자, 시대의 양심, 그리고 순종과 결백, 용기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체포되기 4년전 미국 유니언 신학교의 초청교수로 가서, 안전하게 망명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미한지 두달만에 다시 나치당의 조국 독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는 독일과 미국의 성도들에게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 기독교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라는 편지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조국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어 투옥된다. 반항과 복종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그의 <옥중서간>은 1943년 4월5일부터 1945년 4월 9일의 2년간 그가 여러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며, 부모님과 친구이자 제자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쓴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둔한 히틀러가 권좌에서 제거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들에선, 아들을 걱정할까 노심초사하는 부모님을 생각해 자신의 안위를 희망과 열정으로 묘사하려는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옥중에서는 그는 여전히 청년학자로서 수많은 책들에 대한 열정과 글쓰기에 대한 염원을 조금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영국군 폭격기들이 베를린 시와 수용소를 공습하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집필하는 시간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제자이자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들에선, 아직은 단단히 세워지진 않았지만 미숙한 자신의 신학사상들 가운데 일부분을 비교적 논리적이고, 감동깊게 엿보여주고 있다. 본회퍼는 현대 교회와 기독교의 흐름을 값싼 은총이 대량으로 유포되고, 허락되는 현실로 분석하며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 우리의 시대와 함께하지 않는 신앙은 헛된 기복신앙에 불과하고, 신앙이 개인의 구원과 천국의 티켓으로 오인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시고 박해받고, 십자가위에서 피 흘린 이 대지위의 삶을 경원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죽어서 오는 천국을 기다리지 말고, 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 노력하지 않는가,하는 질책같이 다가온다.
교만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신념 아래서 감금과 죽음을 예상하고도 자신의 길을 갔던 본회퍼. 그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끝임없이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현실과도 언제나 타협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 본회퍼의 조국 독일의 신앙인들이 나치당의 제국교회에 줄서기를 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모든 문제를 덮고(사회적), 오직 개인의 안위을 기원하는 기복신앙. 그것은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서민과 사회적 약자로부터 멀어지는 교회. 부르주아가 점령해 버린 현대 미국의 교회들. 미국 교회를 벤치마킹하는데 여념이 없는 우리 교회의 미래 자화상이 아닐까,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한다.
"신은 우리의 가능성의 한계에서가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된다네. 하나님은 죽음에서가 아니라 생에서, 고난에서가 아니라 건강과 힘에서, 죄에서가 아니라 행위에서 비로소 인식되기를 원하시지.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중심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것이 아니라네. 어떤 문제든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 역시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라네." p.186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영국 앤튼 경의 명언이 있다. 이걸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오만과 교만에 찌든 권력은 반드시 실패한다" 일당독재를 통해, 강력한 독일, 뛰어난 혈통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히틀러의 오만과 교만에 찌든 국가관과 정치관 때문에 결국 독일은 일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600만명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사건의 피의자가 되었다. 1000년 왕국을 꿈꾸었던 나치당은 불과 10여년 사이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 악마성을 영원히 인정받아오고 있다. 불과 100년도 되지 않는 나치의 역사와 패배를 바라보면서, 밀려오는 나의 상념이란 대체 무엇인가 ? 한 시대는 그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또한 선택한 그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1945년 4월 9일 아침,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수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간절한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20세기, 39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간 본회퍼의 신학사상의 영향력은 컸다.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보여준 `교만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는 무엇보다 큰 감동으로 남는다.
2008.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