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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 버락 오바마 자서전
버락 H.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편견일 수는 있겠지만 나는 정치인이 쓴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책은 대개 자신에 대한 홍보나 정치적 포석을 두고 써 내려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형식을 빌리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하다. 요 며칠전 지인의 집에 들렀는데, 그 집 거실에 이명박씨가 쓴 <신화는 없다>라는 책이 보였다. 그 책을 보는 순간 지인의 책을 고르는 안목이 훤히 내다보였다. 책을 몇 페이지 뒤적이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대중의 평판과 저서속에 나열된 언어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독자가 책에서 받을 수 있는 느낌이란 두가지 일 수밖에 없다. 인지부조화 아니면 절대적 신뢰.
그럼에도 앞 뒤 재볼것도 없이 그가 정치인이고 나의 삶과 좀체 연관성도 없고, 더군다나 그에 대한 정보도 빈약한 경우지만, 전폭적인 신뢰가 가는 사람이 있긴 하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거물 정치인 힐러리와 공화당의 맹주 매케인을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등장한 버락 오바마란 사람이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구태의연한 감에 의존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진보적 견해, 그의 피부색, 그의 구호(Yes, We Can 이나 Change We can believe in) 혹은 젊은 신예 정치인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두 좋다. 아무튼, 느낌이 좋다고 말하면 욕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받는 느낌은 단순한 호감,비호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느낌속엔 그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이러한 호감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를 사실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은 얼마나 기쁜가? 아무런 주저없이 비교적 비싸고 두꺼운 책 두 권을 구입했다. 버락 오바마의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그의 정치적 견해와 야망을 밝힌 책 <담대한 희망>이다. 지금 나는 버락 오바마의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자서전을 읽고, 한 정치인과 며칠 깊숙한 대화를 나눈 후의 느낌으로 이 서평을 써 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느낌은 근래 책에서 받은 것 중 가장 신선하고, 짜릿한 것이다.
이 책의 초판 서문에서 오바마는 33세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아무래도 삼십대에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3년간 재학 당시 그는 <하버드 로 리뷰>에 편집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최초의 흑인이었다는 것에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곧 삶을 책으로 엮어보자는 출판사의 제의를 받는다. 그렇게 탄생한 책은 놀랍게도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전부터 시작된 그의 돌풍은 그가 쓴 책으로 옮아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원래 오바마의 아내 미셀보다 월수입이 적었던 그는 책의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두둑한 인세 수입을 얻고 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이 이 젊은 미국 정치인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저자로 만든 것일까?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뿌리, 혼란과 두려움의 시작, 제2부 시카고, 구원을 찾아 나서다, 제 3부 케냐, 화해의 땅. 33세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오바마는 시카고 빈민운동에 앞장서는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하던 때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아버지는 케냐의 루오족 출신으로 케냐의 알레고라는 지역에서 출생. 케냐 거주 미국인의 도움으로 미국 하와이 대학교로 유학을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미국인 여학생과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에 골인한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버락 오바마로 이어진다. 그런데 케냐로 유학오기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케냐에 처자식을 두고 있었다. 양가 부모의 반대가 있었지만,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던 아버지는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오바마를 낳고,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오바마의 백인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만다.
`제1부 뿌리, 혼란과 두려움의 시작'에서 오바마는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인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아버지의 부재와 피부색 때문에 내적 방황을 겪어야 했던 시절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함은 어머니를 따라 잠깐 살게 된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낸 하와이의 학창 시절까지 이어진다. 이 장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그가 피부색 때문에 유년을 지나오면서 수없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인종적인 편견이 지금보다 더 강했던 19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아버지를 닮아 영특했지만 검은 피부색 때문에 백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또 백인 조부모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백인이 주축이 된 최우수 학교에 진학하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이 처한 열악한 사회적 지위와 미래없는 주위 동료들을 바라보며, 정신적인 방황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제 1 부에서 오바마는 끝없이 청소년기 자신을 괴롭혔던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아래 좌절하는 자신의 표상을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서 내가 몸을 피하거나 숨거나 혹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지 않고서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외부 세상에 영원히 국외자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던 그 한결같고 무지막지한 두려움이 내가 어떤 판단을 할 때마다 늘 나를 덮쳤던 것이다." p.203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버락 오바마
`제 2부 시카고, 구원을 찾아 내서다' 에서는 컬럼비아 대학 졸업 후, 시민 운동을 위해 정착했던 시카고에서의 삶을 다뤘다. 시카고는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이다. 현재 대통령 당선자 사무소가 개설된 곳도 바로 시카고다. 그가 대학 졸업 후 시카고에 자리를 튼 것은 흑인 빈민들을 한데 모아 조직적으로 인권과 생활 개선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직가로서 살고자 어느 순간 마음을 먹는다. 시카고는 빈민들과 유색인들이 특히 많은 지역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흑인이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아마도 오바마는 이곳에서 빈궁하지만 시민들의 진보적인 정치색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곳에서 20대의 초반을 보내며 시민의 권리와 빈민들의 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으로 조직가로서 경력을 쌓는다. 이 활동들은 교회나 빈민굴 혹은 지역 정치가나 유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하는데 소비된다. 시카고에서의 생활은 오바마가 하바드 대학교의 로스쿨로 진학하기전까지, 즉 그가 시민운동을 이끄는데 있어, 조직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사회적 지위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는 시점까지 이어진다. 그는 이곳에서 청소년기의 인종적 편견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리고 미국 사회가 특정 인종을 비하하고, 그들의 삶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사실, 시민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그와 같다. 즉, 그는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링컨 기념관 계단에 서서 2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강조한 내용들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설정했다. 정체성의 혼란과 초보적인 시민운동 경험을 통해 오바마는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던 것이다. 그가 정치에 뜻을 품은 것도 이때다.
"친애하는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역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1963년,마틴 루터 킹 연설 가운데
`제3부 케냐, 화해의 땅'에서 오바마는 아버지의 고향 케냐에서, 루오족의 후손의 피가 흐르는 자신의 기원을 찾기를 희망한다. 생애 처음으로 한달동안,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지가 있는 땅, 케냐를 여행한다. 그곳엔 수명의 이복형제들과 그들의 어머니, 고모와 사촌, 살아계신 할머니가 아메리카의 흑인보다 더 가난하고, 더 누추하게 살아가고 있다. 케냐에 있는 동안, 그는 인종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에선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형제자매들의 삶과 아프리카의 곤궁함을 바라보며 서글픔에 젖는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버지의 조국은 서양인에 의해 오래도록 점령되고, 아프리카의 순수가 상처입고 전통이 훼손되었고, 조국의 정체성조차 서양적인 것과 뒤섞여 혼란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할머니와 이복 형제들, 고모들의 전언을 통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을 정밀하게 복원시키고 있다. 이미 할아버지 온양고와 아버지 오바마는 고향 땅에 함께 나란히 누워 있지만, 그는 그 조상들의 묘지 앞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 오랜시간 자신의 피부색을 통해서만 확인했던 아버지란 존재, 케냐라는 조국, 그리고 미국이란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가득한 나라에서 정체성을 고민하고 살아야 했던 영특한 한 존재가, 회한 가득 실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이 책을 읽는 독자까지도 가슴뭉클하게 만드는 클라이막스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무덤 앞에 앉아서 울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 내가 누구이고, 또 내가 누구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은 지성이나 의무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말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보낸 내 삶을 돌아보았다. 흑인으로서의 삶, 백인으로서의 삶, 소년 시절의 자포자기적인 절망, 시카고에서 목격했던 분노와 희망..... 이 모든 것은 대서양 건너 멀리 떨어진 이 작은 곳과 이어져 있었고, 내 이름이나 피부색을 훌쩍 뛰어 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느낀 고통은 아버지가 느꼈던 고통이었다. 내가 던질 질문들은 내 형제가 던졌던 질문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귀속된 것이었다." p.688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작되던 때만 하더라도, 감히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매케인에 압도적인 표차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우리 정치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 "오바마의 한국내 인맥"을 찾느라 허둥대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 정치인들이 그 인맥을 찾았는지 모르지만, 그 인맥을 찾아 무얼 하겠다는 건가 ? 조지 부시와 호흡이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는데 이제 파트너가 바뀌었으니 울며 겨자먹기라고 싫어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최소한 4년간은 호흡을 맞춰야 할 판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오바마의 인맥 찾느라 허둥대지 말고, 제발 그가 눈물겹고 처연하게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회고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혼이 없는 정치인들은 비단 우리 나라만 있는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영혼없는 정치인들 때문에 세계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죄없는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신자유주의를 유토피아의 계명인냥 외치며 달려온 자들과 그 나라들은 현재 영락없이 거지가 될 판국이다. 그러나 난세에 영웅이 나는 법이다. 오바마는 21세기 첫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인종적 편견은 가시지 않았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하면서, 오바마를 가리켜 "선탠한 대통령"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농담으로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오바마의 삶 전체가 이같은 편견과 차별적 시선의 연속이었음을 알았다면 감히 그렇게 말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편견과 차별에 맞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정의로, 분노를 사랑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한 발전적인 질문과 진지한 자세는 시민운동에서 정치적 권력으로 나아갔고, 그리고 `변화'를 내걸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동력이 되었다. 이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가 인종이라는 문제로 얼마나 절박하게 고민했는지 얼마나 숱한 날들을 술과 마약에 찌들어 보내야 했을 정도로 상처입었는지 알게 된다. 그는 저소득층의 고통과 유색인들에 대한 차별, 제3세계의 빈곤과 역사적 상처 모두를 뼛속깊이 체험하고, 그 치유의 길을 깊이 고민해온 역사상 유례없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아마, 우리는 오랜시간 편안한 마음으로 미국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미국은 고삐풀린 망아지가 아니다. 오바마는 변화를 내걸었다. 그 변화가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불어 마음속에선 부러움과 시기가 교차한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던 미국인들의 배포가 부럽고, 철학자나 문필가에 버금가는 그의 문학적 재능이 부럽고, 피부색은 검지만 인격은 고결할 것 같은 그의 너그러운 인상이 부럽다. 우리의 오바마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을까?
200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