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 버락 오바마 자서전
버락 H.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편견일 수는 있겠지만 나는 정치인이 쓴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책은 대개 자신에 대한 홍보나 정치적 포석을 두고 써 내려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형식을 빌리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하다.  요 며칠전 지인의 집에 들렀는데, 그 집 거실에 이명박씨가 쓴 <신화는 없다>라는 책이 보였다.  그 책을 보는 순간 지인의 책을 고르는 안목이 훤히 내다보였다.  책을 몇 페이지 뒤적이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대중의 평판과  저서속에 나열된 언어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독자가 책에서 받을 수 있는 느낌이란 두가지 일 수밖에 없다. 인지부조화 아니면 절대적 신뢰. 

그럼에도 앞 뒤 재볼것도 없이 그가 정치인이고 나의 삶과 좀체 연관성도 없고, 더군다나 그에 대한 정보도 빈약한 경우지만, 전폭적인 신뢰가 가는 사람이 있긴 하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거물 정치인 힐러리와 공화당의 맹주 매케인을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등장한 버락 오바마란 사람이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구태의연한 감에 의존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진보적 견해, 그의 피부색, 그의 구호(Yes, We Can 이나 Change We can believe in) 혹은 젊은 신예 정치인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두 좋다. 아무튼, 느낌이 좋다고 말하면 욕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받는 느낌은 단순한 호감,비호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느낌속엔 그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이러한 호감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를 사실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은 얼마나 기쁜가?  아무런 주저없이 비교적 비싸고 두꺼운 책 두 권을 구입했다.  버락 오바마의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그의 정치적 견해와 야망을 밝힌 책 <담대한 희망>이다. 지금 나는 버락 오바마의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자서전을 읽고, 한 정치인과 며칠 깊숙한 대화를 나눈 후의 느낌으로 이 서평을 써 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느낌은 근래 책에서 받은 것 중 가장 신선하고, 짜릿한 것이다.

이 책의 초판 서문에서 오바마는 33세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아무래도 삼십대에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3년간 재학 당시 그는 <하버드 로 리뷰>에 편집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최초의 흑인이었다는 것에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곧 삶을 책으로 엮어보자는 출판사의 제의를 받는다. 그렇게 탄생한 책은 놀랍게도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전부터 시작된 그의 돌풍은 그가 쓴 책으로 옮아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원래 오바마의 아내 미셀보다 월수입이 적었던 그는 책의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두둑한 인세 수입을 얻고 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이 이 젊은 미국 정치인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저자로 만든 것일까?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뿌리, 혼란과 두려움의 시작, 제2부 시카고, 구원을 찾아 나서다, 제 3부 케냐, 화해의 땅.  33세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오바마는 시카고 빈민운동에 앞장서는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하던 때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아버지는 케냐의 루오족 출신으로 케냐의 알레고라는 지역에서 출생. 케냐 거주 미국인의 도움으로 미국 하와이 대학교로 유학을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미국인 여학생과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에 골인한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버락 오바마로 이어진다.  그런데 케냐로 유학오기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케냐에 처자식을 두고 있었다. 양가 부모의 반대가 있었지만,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던 아버지는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오바마를 낳고,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오바마의 백인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만다. 

`제1부 뿌리, 혼란과 두려움의 시작'에서 오바마는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인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아버지의 부재와 피부색 때문에 내적 방황을 겪어야 했던 시절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함은 어머니를 따라 잠깐 살게 된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낸 하와이의 학창 시절까지 이어진다.  이 장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그가 피부색 때문에 유년을 지나오면서 수없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인종적인 편견이 지금보다 더 강했던 19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아버지를 닮아 영특했지만 검은 피부색 때문에 백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또 백인 조부모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백인이 주축이 된 최우수 학교에 진학하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이 처한 열악한 사회적 지위와 미래없는 주위 동료들을 바라보며, 정신적인 방황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제 1 부에서 오바마는 끝없이 청소년기 자신을 괴롭혔던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아래 좌절하는 자신의 표상을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서 내가 몸을 피하거나 숨거나 혹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지 않고서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외부 세상에 영원히 국외자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던 그 한결같고 무지막지한 두려움이 내가 어떤 판단을 할 때마다 늘 나를 덮쳤던 것이다."  p.203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버락 오바마 

`제 2부 시카고, 구원을 찾아 내서다' 에서는 컬럼비아 대학 졸업 후, 시민 운동을 위해 정착했던 시카고에서의 삶을 다뤘다. 시카고는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이다. 현재 대통령 당선자 사무소가 개설된 곳도 바로 시카고다.  그가 대학 졸업 후 시카고에 자리를 튼 것은 흑인 빈민들을 한데 모아 조직적으로 인권과 생활 개선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직가로서 살고자 어느 순간 마음을 먹는다. 시카고는 빈민들과 유색인들이 특히 많은 지역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흑인이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아마도 오바마는 이곳에서 빈궁하지만 시민들의 진보적인 정치색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곳에서 20대의 초반을 보내며 시민의 권리와 빈민들의 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으로 조직가로서 경력을 쌓는다.  이 활동들은 교회나 빈민굴 혹은 지역 정치가나 유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하는데 소비된다.  시카고에서의 생활은 오바마가 하바드 대학교의 로스쿨로 진학하기전까지, 즉 그가 시민운동을 이끄는데 있어,  조직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사회적 지위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는 시점까지 이어진다.  그는 이곳에서 청소년기의 인종적 편견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리고 미국 사회가 특정 인종을 비하하고, 그들의 삶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사실, 시민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그와 같다. 즉, 그는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링컨 기념관 계단에 서서 2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강조한 내용들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설정했다. 정체성의 혼란과 초보적인 시민운동 경험을 통해 오바마는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던 것이다. 그가 정치에 뜻을 품은 것도 이때다.

"친애하는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역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1963년,마틴 루터 킹 연설 가운데

`제3부 케냐, 화해의 땅'에서 오바마는 아버지의 고향 케냐에서, 루오족의 후손의 피가 흐르는 자신의 기원을 찾기를 희망한다. 생애 처음으로 한달동안,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지가 있는 땅, 케냐를 여행한다. 그곳엔  수명의 이복형제들과 그들의 어머니, 고모와 사촌, 살아계신 할머니가 아메리카의 흑인보다 더 가난하고, 더 누추하게 살아가고 있다.  케냐에 있는 동안, 그는 인종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에선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자신의 형제자매들의 삶과 아프리카의 곤궁함을 바라보며 서글픔에 젖는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버지의 조국은 서양인에 의해 오래도록 점령되고, 아프리카의 순수가 상처입고 전통이 훼손되었고, 조국의 정체성조차 서양적인 것과 뒤섞여 혼란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할머니와 이복 형제들, 고모들의 전언을 통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을 정밀하게 복원시키고 있다.  이미 할아버지 온양고와 아버지 오바마는 고향 땅에 함께 나란히 누워 있지만, 그는 그 조상들의 묘지 앞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  오랜시간 자신의 피부색을 통해서만 확인했던 아버지란 존재, 케냐라는 조국, 그리고 미국이란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가득한 나라에서 정체성을 고민하고 살아야 했던 영특한 한 존재가, 회한 가득 실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이 책을 읽는 독자까지도 가슴뭉클하게 만드는 클라이막스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무덤 앞에 앉아서 울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물마저 말라 버렸다. (....) 내가 누구이고, 또 내가 누구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은 지성이나 의무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말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보낸 내 삶을 돌아보았다. 흑인으로서의 삶, 백인으로서의 삶, 소년 시절의 자포자기적인 절망, 시카고에서 목격했던 분노와 희망..... 이 모든 것은 대서양 건너 멀리 떨어진 이 작은 곳과 이어져 있었고, 내 이름이나 피부색을 훌쩍 뛰어 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느낀 고통은 아버지가 느꼈던 고통이었다. 내가 던질 질문들은 내 형제가 던졌던 질문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귀속된 것이었다."  p.688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작되던 때만 하더라도, 감히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매케인에 압도적인 표차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우리 정치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  "오바마의 한국내 인맥"을 찾느라 허둥대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 정치인들이 그 인맥을 찾았는지 모르지만,  그 인맥을 찾아 무얼 하겠다는 건가 ?   조지 부시와 호흡이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는데 이제 파트너가 바뀌었으니 울며 겨자먹기라고 싫어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최소한 4년간은 호흡을 맞춰야 할 판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오바마의 인맥 찾느라 허둥대지 말고, 제발 그가 눈물겹고 처연하게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회고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혼이 없는 정치인들은 비단 우리 나라만 있는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영혼없는 정치인들 때문에 세계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죄없는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신자유주의를 유토피아의 계명인냥 외치며 달려온 자들과 그 나라들은 현재 영락없이 거지가 될 판국이다. 그러나 난세에 영웅이 나는 법이다. 오바마는 21세기 첫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인종적 편견은 가시지 않았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하면서, 오바마를 가리켜 "선탠한 대통령"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농담으로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오바마의 삶 전체가 이같은 편견과 차별적 시선의 연속이었음을 알았다면 감히 그렇게 말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편견과 차별에 맞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정의로, 분노를 사랑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한 발전적인 질문과 진지한 자세는 시민운동에서 정치적 권력으로 나아갔고, 그리고 `변화'를 내걸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동력이 되었다.   이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가 인종이라는 문제로 얼마나 절박하게 고민했는지 얼마나 숱한 날들을 술과 마약에 찌들어 보내야 했을 정도로 상처입었는지 알게 된다.  그는 저소득층의 고통과 유색인들에 대한 차별, 제3세계의 빈곤과 역사적 상처 모두를 뼛속깊이 체험하고, 그 치유의 길을 깊이 고민해온 역사상 유례없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아마, 우리는 오랜시간 편안한 마음으로 미국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미국은 고삐풀린 망아지가 아니다.  오바마는 변화를 내걸었다.  그 변화가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불어 마음속에선 부러움과 시기가 교차한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던 미국인들의 배포가 부럽고, 철학자나 문필가에 버금가는 그의 문학적 재능이 부럽고,  피부색은 검지만 인격은 고결할 것 같은 그의 너그러운 인상이 부럽다.  우리의 오바마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을까? 

 



 

 


200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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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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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과거의 시간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일이 가끔 있다. 이제 삼십대 초반을 넘어 꺽어지는 나이로 막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요즘, 부쩍 그러한 날이 많아졌다. 놀라운 것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되돌아가는건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름 고난의 시절이라 부르던 과거의 시간들도, 지금와선 대수롭지 않게 기억된다는 것은 이채롭다.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과거란 시답잖은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쩔쩔매느라 낭비된 시간들의 연속같다.  

그럴때 회상속에서 얻는 하나의 힌트가 있다. 그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게 현재 삶에 대범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삶에 자신감을 갖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현재를 헤쳐 나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인생 전체의 그림이란 한눈에 들어오질 않고,  인생이란 본래 상수가 아니라 변수들의 연속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그것은 인생관 혹은 간단히 소신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평범한 삶이란 무엇인가 ?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이를 낳고 또 평범하게 늙어가는 것일까?   아이의 양육이나 돈을 모아 집을 사고, 그리고 노후가 걱정되지 않게 든든한 예금 통장을 갖는 일이 정말 우리 인생의 사명일까?  그러나 애초부터 이러한 평범한 인생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삶이란 자유를 돈과 맞바꾸는 삶이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워는 돈은 자유와 같다고 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그가 가진 것만큼 시간을 소유한다는 말이며 이 말은 그가 오늘 하루, 아니 미래까지도 자유롭다는 의미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영혼을 팔고 시간을 헌납해 돈과 맞바꿀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쁘게 말하면 현실 부적응자 좋게 말하면 이상주의자, 다르게 말하자면 글을 써서 생계를 잇고자 하는 작가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는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미숙한 한 젊은 영혼의 일대기를 짧게 다루고 있는 자서전이다. 이제 갓 작가로 걸음마를 떼는 단계에 있던 폴 오스터의 젊은 날의 초상 쯤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오스터는 자신의 젊은날을 뼛속까지 파고드는 리얼함으로 생생히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자서전이라 이름붙이기에 어색한 면도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폴 오스터 자신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직 삶 가운데 20대의 어느 한 시점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 전체를 포괄하진 못하지만 현재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는 폴 오스터의 습작시절의 생의 기록이기에, 평소 작가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읽는 내내 지적인 흥미로움을 얻기에 충분하다.

책 뒷 부분의 희곡을 제외하면 170여 페이지에 지나지 않은 짧은 글이지만, <빵굽는 타지기>속에는 젊은날을 살아보았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사연없는 인생이 없다지만, 젊은이라면 없는 사연도 만들어 내야 하는 진취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폴 오스터는 부러운 사람이다.  지나온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미숙함과 서투름에 대해, 혹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와 편견, 그리고 잘못된 선택에 대해 그 누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없이 회상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가진 것 하나없고,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애송이가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자 오직 타자기 하나로 생계를 잇겠다는 포부를 갖고 고군분투하는 경우라면, 매일 그는 실패와 맞닥뜨릴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변변치 못한 일로 몇년간 시간을 허비하고, 세상의 냉혹함을 경험하면서 결국엔 돈 한푼 모으지 못했던 시간들이 폴 오스터처럼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내겐 뭔가 가슴 깊이 열정이란게 숨쉬고 있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열정이 나를 살리게 했던 것 같다. 폴 오스터에게 그 열정은 오직 작가가 되겠다는 것, 즉 빵을 타자기 하나로 굽겠다는 것이었다.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글쓰는 일은 수렁에 빠졌으며, 특히 돈 문제에 짓눌려 허덕였다. 이따금 돈이 떨어지거나 어쩌다 한번 허리띠를 졸라맨 정도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노상 쩔쩔맸고, 거의 숨막힐 지경이었다. 영혼까지 더럽히는 이 궁핍 때문에 나는 끝없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p.5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폴 오스터는 1960년대 대학 생활을 했다. 그 시기 미국은 베트남전에 수많은 젊은이를 무작위로 보내던 시절이다.  더불어 대학은 학내 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그는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죽는것보다 싫어했다. 애초부터 베트남전은 모든 미국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까.  이 모든 것을 회피하고 파리라는 도시에 끌려 그는 프랑스로 교내 연수를 떠났다.  이 새로운 도시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젊은날의 습작기를 보낸다. 7년 가까이 파리에 살면서, 그는 리뷰 잡지에 서평을 기고하고, 시를 몇편 지어낸 것을 제외하면 프랑스어 번역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세상과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유조선을 타고 대양을 항해 하기도 했고, 영화 제작자의 시나리오를 다듬는 일이나 대필 작가의 경험도 쌓아본다.  결혼을 하고부터 아내와 함께 번역 잡일을 같이하고,  유명한 개인 소장가의 1인 사원으로 파트타임 일을 해 보기도 한다. 

이것저것 돈벌이를 위해 기웃거렸지만, 그가 하나 원칙으로 삼은게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돈과 자신의 시간, 즉 영혼을 맞바꾸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즉 평범한 직장인으로 하루 종일 어딘가에 매어 사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까지 생겼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했다. 돈이 되는 소설은 쓰지 못했고, 번역일은 애초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과 영혼을 맞바꾸지 않겠다는 삶의 소신은 버리지 못했고, 곧이어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삶을 회피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불성실한 인간이 아니다. 더불어 안락만을 추구하는 여름날의 베짱이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그것으로 생계를 잇고 싶었던 것 뿐이다.

폴 오스터의 그 치열한 젊은날을 바라보면, 작가란 되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되도록 숙명지워진게 아닌게 생각될 정도다. 

결국 그는 이혼을 했고, 궁핍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탐정소설을 직조해 냈지만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건 어린 시절 아이들과 함께 카드 놀이를 하면서 익혔던 카드 베이스볼 게임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팔아보자는 생각에, 그는 전미장난감 페스티벌이 열린 행사장으로 이 아이디어를 사줄 사업자를 찾아 면접을 보러 간다.  그 자리에서 카드 게임의 규칙을 한창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폴 오스터에게 사장은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고맙소, 이젠 그만 가봐도 좋소"   그는 이 때의 경험을 먼 훗날 <빵굽는 타자기>속에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는 (사장은) 돌아서서 내 곁을 떠났다. 카드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을 모두 시가 상자에 도로 집어넣는 데에는 1,2분이 걸렸고, 내가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도 바로 그때였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1,2분 동안이 바로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에 도달한 순간이었다고."  p.154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저절로 `불행의 종합 선물세트' 같던 나의 20대가 필름처럼 돌아가는 듯 했다. 성실하고 열심히 앞을 보고 나아갔지만 내 앞을 가로막은 안개는 걷히지 않았고, 이제 막 들어선  터널은 어둡고 그 끝은 묘연했던 시기, 그게 바로 나의 이십대의 모습이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안개는 태양이 떠오르자 곧 걷혔고, 어둠만이 가득했던 터널의 끝에서 나는 눈부신 빛을 보고 말았다.

폴 오스터란 작가의 책은 처음이고, 현재 그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작가 소개에 나타난 그의 대표작들을 보면, 밑바닥에 도달한 작가는 그 동안의 고난과 경험담을 재료로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써 낸 것 같다.  그리고 세계 수십개국어로 그의 소설이 번역돼 팔리고 있으니, 더이상 그는 가난하지 않을 것이다.  20대, 아니 젊은이에게 좌절과 실패 혹은 불안과 고통은 독이 아니라 약이 된다는 것을 폴 오스터는 이 책을 통해 가르쳐 주는 듯 했다. 20대 젊은 날, 내 소망은 나를 위한 근사한 서재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책을 쌓아두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며,  미래의 어느날 한가로이 그 책을 읽기를 바랐다. 지금 나는 그 소망을 반쯤은 이뤘다.

근사한 서재와 수많은 책들 사이에 파묻히는 일은, 그러나 경제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시간과 영혼, 그리고 돈 사이의 거래를 허(許)했다. 나는 대한민국 직딩이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는 직딩이다.  젊은 시절의 폴 오스터처럼 수지맞지 않게 살 용기란 애초 내게 없었고, 그러한 삶은 내겐 불가능했다.  나는 풍차만 보면 달려드는 돈키호테가 될 순 없었다. 그러나 폴 오스터처럼 작가라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돈키호테의 기질을 갖질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작가란 되고 싶다고 될 수 없으며, 작가란 숙명처럼 태어나는 것이라 하질 않던가 ?

 



 

 

200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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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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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의 서재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들을 둘러보면, 책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들이 있다. 대개, 그것을 훑어보면 그 책 한 권 한 권이 현재 내 방에 온 사연들이 다 있는 것 같다. 그 사연들을 돌아보면  어느 책 하나 버릴 게 없다.  나는 책을 빌려주거나 빌려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이란 빌려주면 받기가 어려울 뿐더러 되돌려받지 못하는 책을 빌려줄 때면 언제나,  그 책과 내 사이에 자리잡은 과거의 어느 시간들 모두를 내 삶에서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책을 빌려보지 않는 이유는 다 읽고 난 이후 내 손때가 묻고 체온이 닿아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물건을 떠나보낼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게 있어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한번 내 서재에 입성한 책은 내 서재를 떠나보내지 않고,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은 어떻게든 사보고야 만다. 이것은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 혹은 둘 사이의 `의리'라 해도 좋겠다.

그렇게 둘러보다 보면,  현재 내 서가의 책들은 하나같이 사연없는 책들이 없다.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은 10년 전 강원도 전방 철책 초소에서 가슴 조리며 읽은 책이다.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이나 그의 <길은 여기에>라는 수필집은 전방 막사의 상황실에서 새어나오는 형광들 불빛아래서,  주로 새벽 근무를 끝내고 책장을 넘긴 책이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는 내 20대를 흔들어놓은 책이며,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던 어느 저녁 나절의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아직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속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문구 즉,  "노란 가로등 불빛 속에 구토가 숨어 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면서 직장생활의 쳇바퀴 도는 생활에서 자유로워졌던 경험, 백수시절 이외수를 읽고 위안을 받던 날들, 그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엔 나의 손때가 묻은 것과 동시에 모두 내 생의 추억이 촘촘히 깃들어 있다.  더불어 책과 함께한 시간들 모두는 하나도 버릴게 없고,  지금 내게 너무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느 책이건, 그러나 시의 적절한 순간에 읽는다면 그 기억이란 더 오래가고 더 소중해 지는 것 같다. 얼마전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 갔을 때, 나의 가방 속에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The Art of the Travel>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여행도중 KTX에서, 카페에서, 고궁의 벤치에서, 읽어 내려갔다.  여행중에 읽은 책의 묘미는 참으로 새로웠다.  나는 가방속의 책을 읽기 위해 여정의 중간중간 일부러 시간을 냈다.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이나 새로운 풍경은 하나 나의 몰입을 방해하진 못했다.  그러면서 한가지 깨달은게 있다. 여행은 밖을 보는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광과 여행을 착각하며 살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나는 그가 여행한 여행지를 안내받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기대를 벗어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여행지에서 곧바로 역사와 인물로 옮겨가, 그의 내면의 풍경을 기술한다.  그는 이 책에서 수백년전 자신이 현재 걷는 길을 먼저 여행한 예술가들의 삶을 추적하고, 분석한다.  이것은 알랑 드 보통만의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예술가와 예술작품 그리고 그 여행지가 갖는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총체적인 여행 산문이라 부를 만 하다.

이 여행기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샤를 보들레르, 귀스타브 플로베르, 알렌산더 폰 훔볼트, 윌리엄 위즈워스, 빈센트 반 고흐 등이며, 그들은 문학과 그림, 그리고 철학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예술가들이다.  그들의 여정을 단순히 추적하는 것에서 끝났다면 흥미가 반감되었을 것이나, 보통은 여행지가 그들에게 어떤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그곳이 대체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생성했는지, 역사적인 문헌과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조밀하게 복원하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여행의 기술(art)일까, 책장을 넘길 수록 알랭 드 보통의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기술은 예술(Art)로도 풀이할 수 있다. 여행은 관광이 될 수 없다. 관광이 유희나 시각적인 즐거움과 단순함을 추구한다면, 여행은 그 모두를 아우르면서도 여행자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총제적인 행위다.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여행은 여행자의 지식과 내적 충만에 전적으로 비례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가 본 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만큼 딱 그 정도만 그에게 의미를 생성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행지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거나 또한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여행이 내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수도 있다.

이 책이 만약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여정만을 기술하고 있다면, 세계적으로 읽힐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책은 넘쳐나고, 또 너무 흔하며 여행 팜플렛의 가치밖에 없다. 이 책에 소개된 여행지란 영국이나 스페인 프랑스의 어느 낯선 도시, 혹은 어떤 사막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솜씨좋은 요리사가 하찮은 재료로 미식가의 입맛을 사로잡는 음식을 만들어 내듯, 작가는 흔하디 흔한 풍경속에 녹아 있는 익숙함을 통해서도, 의미심장한 메세지들을 역사와 인물을 통해 추려낸다. 또 알랭 드 보통은 이러한 낯선 여행지를 통해, 여행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것은 왜 여행을 하는가 ? 하는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예술가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 하는 생소한 의문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퉁이는 예술가들이 그려주거나 글로 써준 뒤에야만 돌아보게 된다는 주장을 완벽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p.288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이 책의 미덕이라 부를만한 요소는 아마도 책의 곳곳을 채우고 있는 흑백 사진들과 소개되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인 그림, 혹은 소설과 시와 산문 등에서 인용된 문장들이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나에게 알랭 드 보통의 글과 이 보조적인 자료들은 내 내면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여행자였던 내게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유화 그림들이 준 인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호퍼의 그림또한 여행중에 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설명에 따르면 호퍼는 1925년 차를 구입해 이것을 몰고 뉴욕과 멕시코를 오가며, 매년 몇 달은 길 위에서 살면서 모텔 방이나 차 뒷자리, 식당등에서 스케치를 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로드드로잉'이라 부를만한 작품들과 알랭 드 보통의 그림 해설은 놀랍도록 세밀하고 알찬데, 그건 미술작품의 해석에 그의 직관력과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아마도 나는 KTX의 좁지만 안락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읽어내려 갔는데, 나는 그때 마침 덕수궁 미술관으로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을 보러가는 길이었다. 이 책은 미술 작품과 그 감상에 문외한이었던 초보 관람객에게 그림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디에 감상 포인트를 둬야 하는지, 시의적절한 힌트를 주고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 <자동 판매식 식당 Automat>, 1927년 
 

"<자동 판매식 식당>은 슬픔에 대한 그림이지만 슬픈 그림은 아니다. 이 그림은 위대하고 우울한 음악 작품과 같은 위력이 있다. 실내 장식은 검박하지만, 장소 자체는 궁색해 보이지 않는다.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혼자일 수도 있다. 호퍼는 고립되어 있는 이 여자와 공감을 느껴보라고 우리에게 권유한다. 그녀는 위엄 있고 관대해 보인다. 어쩌면 지나친 듯싶게 남을 잘 믿고, 약간 순진할지도 모르겠다. (....) 24시간 식당, 역의 대합실, 모텔은 고귀한 이유로 일상 세계에서 가정을 찾지 못한 사람들 - 보들레르라면 시인이라는 경칭으로 명예를 베풀었을 사람들 - 을 위한 성소이다."  p.78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여행을 떠나면서 함께 넣어가는 한 권의 책은 이쯤되면, 그 여행의 의미를 기십프로는 잠식해 버릴 수 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여행의 출발에 앞서,  모 작가의 소설 대신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넣어갔고, 그 여행길에서 그의 방식대로 여행이 어떻게 기술(Art)로 혹은 예술(Art)로 끌어올려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단계까지 갔다.  나는 낯선 사람들과 낯선 풍경속에 놓여 있었지만, 시각적인 요소가 여행의 주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로 여행의 의미에 대해, 내면 깊이 다르게 질문하는 법을 익힌 것이다.

세상은 거대한 책이다.  여행자는 그 세상을 읽는 독자와 같다.  그러나 문맹이라면 책을 읽을 수 없고 배경지식이 부족하면 책을 깊이 읽지 못하듯이, 여행자의 빈약한 내면은 그 여행또한 빈약하게 만든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여행이 단순한 놀이와 유희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드 보통의 발길이 닿는 모든 여행지에는 예술가의 흔적과 그들의 작품이 있었다. 예술가의 흔적이나 그들이 남긴 위대한 예술작품들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풍경은 바뀌었지만, 예술가의 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농익고 있었다. 

여행은 어떻게 예술(Art)이 되는가?  그 질문은 삶과 여행이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이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 둘은 화가의 작업실에 있는 붓과 팔레트와 같다. 붓과 팔렛트를 통해야만 화가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  여행은 그러므로 덤이 아니라 삶의 필수 구성물이다. 질주를 본능으로 아는 삶의 아우토반은 여행이란 휴게소를 통해, 더욱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을 움직였던 그림인 에드워드 호퍼의 <자동 판매기 식당>은 고속도로상에 위치한 어느 휴게소의 여인을 그린 것이다.  그녀는 알랭 드 보통이나 나처럼 여행중에 있었다.

 

 

200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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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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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에서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는 일은 평범한 일상이지만 때로 피곤한 일이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당대 가장 좋은 대학을 나오고서도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집을 짓고 사람과 문명과 격리된 삶을 선택했었다.  그 이유가 구구절절 말들이 많겠지만, 나는 소로우가 사회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려 한 의도를 어느정도 지니고 있었던게 아닌가 추측해보고 싶다.  그가 쓴 <월든>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이 헛간으로 피할 때 그대는 구름 밑으로 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 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월든> H.D.소로우

그의 이 말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람들의 시선따위를 의식하지 않으며, 개성있게 자신을 풀어놓고 살아갈 것을 희망하는 그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한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체면을 생각하게 되면서, 사회 구석구석에선 수많은 비효율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결혼생활  자체가 지옥이면서도 이웃과 친척들의 눈이 무서워 이혼도 쉽게 고려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난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참는걸 미덕으로 알고 자신의 행복추구보다는 자식의 미래를 더 걱정하면서, 사랑없고, 정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우리사회에서 이혼이라는 것은 여전히 금기중의 금기다.  결혼의 그 성대함과 화려함에 비교하면 이혼이라는 인간사의 사건 가운데 하나가 왜 유독 우리사회에서 그렇게 금기시 되고 있는지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개 결혼의 전제조건은 사랑이다.  그 전제조건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가장 큰 동력인 것이다.  하여,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어 그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결혼의 당사자들은 이혼할 "수도" 있는 것이 논리적이다. 더불어 타인의 행복추구권과 직결되고 사생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이혼에 대해, 가십으로 삼거나 더 나아가 이혼행위 자체를 비난해야 할 이유는 타인에겐 없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 행태를 빗댄 유머를 했다가 된통 혼쭐이 나고 있다.  그녀 왈 이렇게 말했었다.  "1등 신부감은 예쁜 선생님이고, 2등 신부감은 못생긴 선생님이고, 3등 신부감은 이혼한 선생님, 4등 신부감은 이혼하고 애딸린 선생님이다"  대개 유머란게 핵심를 찔러야 웃음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것이기에, 그가 유머라고 내뱉은 이같은 얘기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제대로 찔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책임있는 여당의 국회의원 입에서 나올만한 말은 못 된다.  그의 이 유머속엔 이혼녀에 대한 편견과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이 흉물처럼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는 세번 이혼한 여류작가를 엄마로 두고 있는, 더불어 각자 성씨가 다른 동생 두 명을 갖고 있는,  여고생이 화자로 나온다.  세번 이혼한 전력을 갖고 있는 이 가정의 엄마는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유명인이고, 지식인이며, 아이들을 혼자 키워낼 능력도 된다.  강연과 소설쓰기로 바쁜 엄마. 사회적 이슈에 대해선 가장 진보적인 시선을 가진 엄마.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고등학생 딸의 눈을 통해 묘사된 엄마는 평소 덜렁대고, 감상적인 눈물을 아무대나 흘려대고,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소리를 지겹도록 해대며, 담배와 술로 인생을 즐길 줄도 알고, 가끔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요리도 할 수 있는, "비교적" 평범한 엄마다.  그러나 또 하나가 있다. 그는 성씨가 다르지만 자기 배 아파 낳은 아이 셋과 함께 한번 하기도 어려운 결혼을 세번씩이나 하고,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살겠다는 서약을 세번이나 어긴, "세번씩이나"  이혼한 이혼녀다.

이 소설의 화자는 엄마의 큰딸인 여고생이다.  그는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살다 그 집을 나와 엄마의 집으로 온다.  그가 어린 시절을 포함해 아빠의 집에서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엄마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은 비교적 순탄하게  이 소설속에 그려져 있다. 새엄마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 어린 시절 사랑없고 정없는 삶의 아픈 추억, 그리고 아빠에 대한 애증을 안고 세상 사람들처럼 세번 이혼한 엄마에 대한 편견을 품고 있는 그지만, 점점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세상의 편견앞에 떳떳해지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란 시답잖고 부담스런 시선들의 연속이다.  올곧게 살아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 세상에서 타인의 적대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익명이란 옷을 걸치면, 그들의 타인에 대한 공격성은 극에 달한다.  칼보다 펜의 힘이 강하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때 펜의 의미는 정당하고 공정한 펜을 의미한다.  인터넷에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란 태어날때부터 타인에 대한 원초적 공격성을 그 본성에 내포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 폭력성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지, 그러한 폭력적인 본성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도, 우리는 최근의 연예인 자살 사건 등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빙점>을 지은 일본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어느 책에서 죄인의 정의를 이렇게 빗대어 설명했었다.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 귀한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면, 우리는 도둑을 나쁘다고 증오하고 그의 죄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내뱉고 행한 증오스런 언어와 몸짓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자살해 버리진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모욕적인 말 한마디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야말로 우리가 감옥에 있는 그 도둑보다 죄가 더 적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   미우라 아야꼬

그래서 세번 이혼한 여자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좀체 녹녹치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조용히 살아도 유명세를 치를 수밖에 없는 소설속 베스트셀러 여류작가란 그들에게 먹음직스런 먹잇감이며, 이 때 그들은 먹이를 찾아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하이에나만큼이나 집요하고 난폭해진다.

이 소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새 시대에 새 가족의 의미를 묻다"였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은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선언이다. 그에 빗대면 엄마는 해방군의 선봉에 선 여장부와 다를 바 없다.  강연을 부탁하러 왔다가 세번 이혼한 전력을 비꼬는 상대에게 엄마가 쏘아대는 장면은 보라. 

"당신, 이혼 세번이나 했지? 왜 했어?  내가 직접 보니까 알 것 같군만 응?"
"웃어? 세번이나 이혼해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웃어?"
엄마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여자는 엄마가 대답이 없자 약간 의기 양양해지는 거 같았다.
"...저기요. 그거 지금 저에게 상처 입으라고 하신 소리 같은데, 그건 잘못 짚으셨어요. 저 이제는 별로 그런 거에는 상처받지 않아요."  (중략)
엄마는 우리까지 들먹이자 순간 내가 나서서 말려야 하나, 어쩌나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야 ! 너.., 반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래! 나 이뻐! 얼굴도 매꼬롬해, 근데 너는? 너! 못생기면 아무 말이나 해도되는거야 ? 못생기면 다야?"  p. 121 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

그럼에도, 이 엄마와 각이 성이 다른 아이 셋은 꿋꿋히 이 사회속의 일원으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화자인 여고생 나는 학교 선생님과 아이들의 시선따윈 고려치 않고, 모든걸 드러내려 노력한다.  등장인물인 엄마는 소설속에서 몇번이나 세번 이혼한 전력을 독자가 혹시 까먹지나 않을까 애써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상처를 감추려고 하지 않고 드러내려고 하는 이러한 시도는, 모든 상처받은 이들의 자기방어적 전략의 전형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 하나를 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에게 던지는 우리의 얄궂은 시선은 정당한 것인가?  독자인 나부터, 이 소설밖 모든 타자들, 이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의 싱글맘이나, 이혼가정, 이혼녀에게 갖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올바른 것인가? 이혼이 많은 사회적 파장과 가정의 혼란, 아이들에게 남길 상처 등의 부작용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혼이란 금기시되고, 이혼녀나 이혼남이라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편견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이혼율의 급증은 참을성 없고, 개인주의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경박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결혼생활이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아이들에게 미칠 후폭풍 때문에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생활이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고, 중대한 결함이 있어 그 자체가 더 이상 성립불가능할 정도라면, 이같은 인내는 인간본성 그 자체 즉, 행복을 추구하는 그 본성에는 결코 맞지 않는 일이다.  즉,  결혼생활과 이혼의 결정은 본인의 행복추구의 본성이 내릴 가치 판단의 문제가 될 수 있고, 그 자체가 인권과 맞물린 각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럴때, 이혼이란 결정은 각 개인의 순수한 가치판단의 문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소설속 엄마는 지금껏 이 모든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똘똘뭉친 이들의 시선에서 하루도 편할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꿋꿋하게 그녀는 살아가고 있다. 성이 다른 아이 셋을 자신의 힘으로 키우며, 사회적 편견 따위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담배와 술을 즐기며, 가끔 연애도 하면서 이혼녀니까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사회적 자제심을 조롱하며 그들보다 더 신나고 재밌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이같은 엄마의 당당한 삶의 자세가  이 소설속 각기 성씨가 다르지만 한 지붕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산교육이 되고 있다. 엄마는 세번 이혼한 여자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이며,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그리고 한때는 운동권에 몸담았던 낭만적 사회 운동가였다.  이혼만 아니라면, 대체 그녀가 이 사회에 무슨 민폐를 끼쳤는가? 그런데도 왜 타인은 그녀와 그녀의 가정과 그녀 가정의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가?   화자인 나의 눈엔, 세번 이혼한 엄마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편견처럼 그리 나쁘지 않다.  엄마는  이제 고3이 되고 곧 어른이 되는 화자인 `나'의 가장 큰 멘토이자 자랑스런 사표(師表)다. 

"사랑하는 딸, 너의 길을 가거라. 엄마는 여기 남아 있을게. 너의 스물은 엄마의 스물과 다르고 달라야 하겠지. 엄마의 기도를 믿고 앞으로 가거라. 고통이 너의 스승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  p.337 <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유대율법엔 간음한 여인은 광장에서 돌로 쳐 죽이는 풍습이 있다. 예수님이 길 한복판에서 사람들에 포위된 한 여인을 보시고, 돌을 든 사람들에게 보라 하시며 흙바닥에 이렇게 썼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자 군중은 조용히 돌을 내려놓고 자기 갈길을 갔고,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시고, 손을 내밀었다.  왜 그들은 돌을 던지지 못했을까?

우리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가해자들은 어느시점엔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던진 돌덩이는 언제든 방향을 바꿔 자신의 얼굴로 향할 수 있다.  이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1차 피해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이혼자, 이혼가정은  `틀린'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학식이 높은 국회의원조차도 가끔 `다르다'와 `틀리다'의 용법을 헷갈리곤 한다.  그래서 유머라고 내뱉은 말이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메세지도 그와 같다.  제발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해서 쓰자.   이것이다.

 

 
2008.11.19
개츠비의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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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수업 - 앤 라모트의 유쾌하고 다정한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윙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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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스칼의 <팡세>에는 이러한 글이 나온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대체, 자신의 방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잠자기, 라디오 듣기, 전화로 수다 떨기, 티비시청 ?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이 모든 것 뿐인가 ? 파스칼이 의도한 대답은 그게 아닐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자신의 방에서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몰라서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이상 행동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러한 대답보단, 더 고상한 대답을 원했을 테니까.  방에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생각되기 쉬은데, 그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다,라고 단순히 생각해 버리는 착각을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영혼이 부유한 사람은 아무리 비좁고 외딴 방에서라도, 할일이 있다. 그는 외롭지 않다. 수많은 고전들이 감옥의 독방에서 집필되었다는 점은 이 사실을 뒷바침 해준다.  책을 읽거나 노트와 펜이 준비되어 뭐라도 끄적거릴 수 있다면, 그에겐 외딴방은 최고급 호텔에 마련된 만찬장 만큼이나 풍족하고, 여유롭고, 부유하단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덤으로 외딴방은 조용할 테니까. 그래서 아마도 모든 작가라는 사람들은 외딴방에 홀로 머무는 것을 그리 고역으로 느끼지 않을거라 확신한다. 그가 만약, 시장바닥같은 어수선한 곳에서 글쓰기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을 갖추지 않는한 말이다.

`유쾌하고 다정한'이라는 부제가 붙은, 현대 미국 작가 앤 라모트의 <글쓰기 수업>은 외딴 방에서 글을 쓰는 직업을 갖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배작가 앤의 글쓰기에 대한 풍성한 조언이 가득한 책이다.  앤 라모트는 작가이고 동시에 글쓰기 강좌를 실제로 진행하고 있는 강사로서 일하며, 자신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실제 내용을 이 책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이 강의는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라든가, 주제를 어떻게 정하는가?  시점의 완성, 아우트라인의 설정 등 소설쓰기의 기술적인 면에 치중하지는 않는다.

대신, 앤 라모트 자신이 어떻게 글쓰는 작가로 살아왔는지 자신의 인생역정을 사실적인 경험담으로 풀이해 놓았다.  어린시절, 작가였던 아버지와 함께 가족 모두가 책읽기에 몰입했던 어느 저녁 나절의 추억이라든가, 특이한 외모로 친구들에게 놀림 받았던 학창시절의 상처, 그리고 좋은 작문을 제출해서 친구들에게 복수하고 싶어했던 마음까지를 거침없이 회고한다. 더불어, 자신의 첫 소설이나 최고의 성공작이었던 작품 모두가, 병마에 시달리며 시한부 인생을 살던, 아버지와 친구라는 단 두 명의 독자를 위해 쓰여졌으며, 그 둘 모두 그 소설을 읽고나서 결국 죽었다는 극적인 사실을 소개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대열에 오르기까지 비평가의 악평이나 자신의 글에 대한 자학 등으로 괴로움을 당했던, 솔직한 기억들을 이 책에 세심하게 기록해 두었다.

"나는 그가 넥타이를 매야 하는 정규 직장을 갖기를 원했고, 다른 아버지들처럼 매일 아침마다 어디론가 출근을 해서 작은 사무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일을 해주느라 남의 사무실에서 하루 온 종일을 보낸다는 것은 내 아버지의 영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그랬다간 그는 죽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비록 50대 중반이라는 꽤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긴 했지만, 적어도 자기 명대로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 " p.9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책으로 한정시킬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카레이서만 운전을  잘 하는게 아니듯, 작가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인생을 진실하고 진지하게 맞서 성실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작가들이다.  더불어, 이들 잠재적 작가들은 가장 성실한 독자가 될 수 있다.  잘 쓰는 일은 잘 읽는 일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좋은 독자는 좋은 작가이며, 뛰어난 작가는 훌륭한 독자라는 얘기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지금 당장, 무언가라도 끄적거리고 싶어진다. 앤 라모트는 글쓰기에 맹목적인 환상을 심어주진 않지만, 글쓰기를 멀리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것이 읽는것만큼이나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어린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학교 글짓기 과제에 힘겨워하는 자신의 오빠에게 해주었던 조언은 곧 글을 잘쓰고 싶어 이 책을 읽는 우리 모두가 유념해둘만한데, 그건 하얀 백지나 모니터 앞에 선 사람들이 글이 막힐때 `하나씩, 하나씩, 새 한마리씩 새 한마리씩 해치우면 된다" 라고 마음을 편히 여기는 것이다.  글이 막힌다면, 억지로 글을 쓰지 말고 그때가 어쩌면 우리의 외딴방을 빠져나올 적당한 시기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라는 조언처럼 들린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외면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가. 그러나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더 안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그 모든 인생과 사랑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p.297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왜 읽는가? 하는 질문은 왜 쓰는가?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고 믿는다.  앤 라모트는 평소 이같은 나의 의문에 적절한 답을 주는 듯 했다.  대부분의 독서가들은 질주를 본능으로 알고 살아가는 듯 하다. 책읽기의 본능이란 계산없는 전력질주가 아닐까?  도서관의 서가들이나 매달 구입하는 서적들에 짓눌려 언제나 글읽기는 수지가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 장사다.  글읽기에서 흑자를 내는 것은 모든 독서가들의 이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독서가의 책에 대한 욕망과 만족을 채우는 일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욕망이 없다면 그는 이 세계에서 벌써 은퇴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모든 강줄기가 결국 바다로 연결돼 있듯이 모든 책읽기는 글쓰기와 연결돼 있다고 믿는다. 채우는 목적은 끝없이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비우려는 궁극적 지향점에 닿아 있다. 대체, 당신은 그 많은 책을 왜 읽는가 ?  하는 단순한 질문은  잘 쓰기 위해서 라는 명료한 답을 요한다.  앤 라모트의 이 책의 결론도 이와 같다.  삶에 대해 의문과 결핍과 내면의 상처란 모든 글쓰기의 시발점이다.  독자는 타인의 진실에 열광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진실을 풀어놓는 사람이다.  글쓰기와 글읽기가 맞닿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작가들이 예리한 산문과 적확한 진실로 우리의 머리를 흔들어 놓을 때, 우리는 낙천성을 되찾는다. 우리는 인생의 불합리라는 불협화음에 맞춰 춤을 추는 시도를 하거나, 적어도 박수를 따라 친다. 거듭 거듭 그것 때문에 짓눌리는 대신. 그것은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올 때 배 위에서 노래를 하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화난 풍랑을 잠재울 수는 없지만, 노래는 배 위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바꿀 수 있을 테니까." p.364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200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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