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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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는 본능이다.  그러나 본능이기에 앞서 그 사랑은 완벽하고, 절대적이다.  고려 속요 <사모곡思母曲>은 어머니의 사랑을 읊은 노래로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사모곡>의 작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호미에, 어머니의 사랑을 낫에 비유하면서 자식사랑에서의 어미의 본능과 절대적 우위를 설명했다.  세상의 숱한 아버지들이 <사모곡>을 읽으며 머쓱할 정도로, 그 비유는 시의적절했으며 정곡을 찌른 듯 했다.   어머니의 사랑, 엄마의 마음, 그 높고 깊이를 재차 설명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가 돌풍을 일으켰다.  베스트셀러에 단박에 오르더니 좀체 내려오려하질 않는다.  독자들이 이 소설에 열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밀려드는 하나의 기시감의 정체는 뭘까?  딱 10여년전 이맘때 우리 경제가 IMF의 손아귀에 들어간 시점에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1996년 출간돼 100만 부가 팔려 나간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는 외환위기와 맞물려 췌장암에 걸린 아버지의 시한부적 삶을 그리면서, 그간 공기처럼 당연한 듯 존재하던 아버지가 가족의 무관심과 몰이해로 점차 소멸해 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땅의 무심한 아내와 자식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만든 그 소설을 나또한 군문을 나오기 2개월전에 강원도 전방 철책선의 어느 고지에서 열독한 바 있다.   

10여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경제적 한파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주제로 담고 있는 이 두 소설의 비슷한 흥행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모두가 왠지 달갑고도 씁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어쩌면 기초적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에야 진정 소중한 것에 눈을 돌릴 줄 아는, 늦은 깨달음에 익숙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다.  소설 속 엄마는 아마도 치매를 앓고 있는 듯 했다.  남편과 동행한 서울길 어느 번잡한 지하철역에서 오는 열차를 아버지만 타고, 엄마는 타질 못한다.  엄마는 아마도 치매 때문에 정신이 가물거려 멈칫했고, 그런 엄마를 무심하게 평생 앞질러 다녔던 아버지는 그 무심한 습성 때문에, 뒤도 쳐다보지 않고 혼자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엄마의 실종', 은 이제 이 소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실타래의 기능을 한다.  각자 앞만 보며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의 평온한 수면(水面)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던져진 듯 하다.  그 돌멩이는 자식들의 일상에 미미하지만, 못내 씁쓸한 영향들을 미쳐온다.  

이 소설속에는 여러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여류 소설가인 `너'와  큰 아들 `그' 그리고 둘째 딸 또다른 `네'가 그들이다.   이제 이 소설은 이들의 기억을 좇아 가면서 어린시절 , 그리고 지금, 대체 엄마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현재 어떤 모습으로 자신들의 삶에 존재하고 있었던 건지, 그 의미를 파고들며, 슬며시 반성문의 노트와 볼펜을 이 화자들에게 들이밀고 있다.  이 소설의 독자는 각기 다른 관점으로 포착된 이들의 노트를 훔쳐보며, 그 반성문의 한구절 한구절에서 끝없는 동질감과 공감에 이르는 경험을 한다.  신경숙의 소설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애프터서비스는, 아마도 소설 속 화자들의 반성문 쓰기에 독자들의 참여를 자연스레 유도한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이 소설 속 화자들은 하나의 깨달음에 이른다.  그건 엄마의 실종 시점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다.  엄마는 그날 그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실종된 것일까?  현상적인 사건으로만 풀이하면 그것이 맞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시점을 이야기할 땐 실종 시점은 훨씬 앞당겨진다. 이 사실이 바로 신경숙 소설이 독자에게 전하는 가장 큰 메세지이며, 경고문이다.  그것은 이미 화자들이 고향을 떠나고, 어른이 되고, 그리고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일에 파묻히던 순간이었다는 사실.  즉, 그들이 더 이상 엄마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과 엄마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던 시기에, 이미 엄마가 실종되었다는 무서운 진실,  바로 그것이다. 

화자들은 어른이 되고,  행복한 가정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갖게 되고부터 엄마를 마음속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마와 화자들 모두에게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화자들에게만 일어난` 진실이다.  공통적인 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 편, 즉 자식들에게만 일어난 현상이다.  엄마는 몇 십년전 자신들을 보살피던 그 시절의 엄마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마는 언제나 엄마로서만 존재했고 존재하려 했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변화와 정체, 아니 신의성실(信義誠實)과 배신,  인간과 한 인간 사이의 이 불균형이 엄마의 실종이란 비극을 낳은 것이다.

믿었던 존재, 나의 분신, 나의 모든 것, 나의 희생과 나의 공덕과 나의 아픔의 산실`이고', 산실`이었던`,  `너'에게서 `그'가 지워지는 순간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것은 `그(엄마)'에겐 더이상 살아가는 동력의 상실로 나타나며, `너(화자)'에겐 너 자신의 비열함과 교만함과 오만함이 자백되는 순간으로 다가선다.  이제 이 소설을 읽어가는 독자들의 가슴이 아릴 차례다. 우리가 잃어버린 엄마, 우리가 잊어가고 있던 엄마, 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이 소설 속 곳곳에 박혀 날카로운 압핀처럼 독자의 눈을 찌르고 있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가 너의 외삼촌을 두고 오빠! 부르며 달려가는 그 순간의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p. 36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종내엔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거야. " p.260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엄마는 오늘의 `너'를 있게 한 `그'였다.  엄마는 더 이상 힘이 없다. 너에게 무엇을 하라, 고 지시내릴 수 없다.  엄마에게서 권력은 이미 떠나가 버린 후이고, 그는 권력이 아니라 무력함으로 존재하는 한 인간이다.   그러나  오늘의 너가 되기전까지 너를 있게 한 따뜻한 힘을 소유했던 권력자는 바로 지금 내 곁에 존재했었던 엄마였다.  이제 우리는 이해의 범주를 넓혀보도록 하자. 이 힘의 불균형과 배신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영역에서만 살펴볼 것은 못된다.  세상사 모두가 그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철거민 진압 화재로 수명이 죽고 다쳤다. 죽고 다친 철거민들은 한때 권력에 표를 던진 사람들일 수도 있다. 즉, 과거의 무능이 현재의 권력이 되도록 한 것은 힘없는 국민들이다.  엄마를 무시하는 잘난 자식들도 한때는 엄마의 보살핌과 관심을 욕망했던 힘없는 존재였다면, 지금 권불십년(權不十年)의 교훈을 명심해야 할 권력도 불과 얼마전까진 국민에게 한표 한표를 구걸하고, 욕망했던 자들이었다.  이제 모든것을 갖고 있는 이 소설속의 화자(권력)들처럼, 비굴하고, 비열하게 굴어선 안될 일이다.   지금 그 당당한 힘을 갖게 되기까지 과거 자신들이 엄마(국민)의 품안에 안겨, 얼마나 그 사랑을 갈망했던지, 훌륭한 사람이 되고 힘이 있는 사람이 되어(권력을 잡고), 다시 엄마(국민)에게 보답하고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하질 않었는지,  자신들이 찍어논 과거의 비디오(선거공약)을 되돌려 보라.

이 소설속 자식들은 엄마가 실종되고 나서야 엄마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후회할 시점엔 이미 엄마는 새가 되어, 자식들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찾아든다.  엄마는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고, 추운 겨울 서울의 어느 구석진 골목에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엄마는 버림받았다.  한겨울 용산의 빌딩 망루에서 울부짖던 우리들의 가난한 이웃이 주검으로 되돌아 오듯이, 그렇게 소설속 엄마는 죽음을 맞았다. 철거민의 타버린 시신은 가족의 동의조차 구하질 않고, 부검당했다,한다.  누구를 위해 `너(권력)'는 존재하는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의 작가 조세희씨는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에서 이 시대를 이렇게 정의 내렸다. 

"우리는 낙원이 아닌 아주 불행한 시대에 떨여져 있습니다"  2009년 1월 22일 목요일자 <경향신문> 인터뷰 中, 조세희 

엄마를 영원히 잃어버리기 전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사랑으로 비워주고 빈껍데기가 되어 버린, 주름진 그이를 위해 당신은 처음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기억하는 것이다.  너를 있게 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권력이 있게 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200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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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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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래리와 앤디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많은 화제속에 개봉된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적지 않은 이슈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는 단순한 공상과학(SF) 영화가 아니라 그 촬영 기법의 독특함에서부터 영화가 보여주는 상징성과 함축성이 종교와 철학적 비유에 닿아 있다는 해석을 낳게 만들었다.  이 영화 이후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매트릭스란 무엇이며, 우리의 메트릭스는 진정 우리 자신을 어떻게 프로그램화 시켰을까?"라고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이 영화가 의미 깊었던 것은 바로 단순한 SF 영화로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관객 자신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게 한것에 있다.  이것은 평소 그런 의문속에 살아오지 않은 사람에게도 가상현실속에서 기계에 의해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영화속의 인간들이 곧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란 의문을 품게 한다.  우리들을 가두고 있는 이 외부의 알 수 없는 힘은 대체 무엇일까?   그 힘은 셀 수 없이 많고, 또한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이란 본래 아무런 힘도,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는 하나의 시스템(체제)속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시스템은 국가일 수도 있고, 법률일 수도 있고, 한 사회의 도덕률 일 수도 있고, 또 인종이나 민족, 더 좁게 가족일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1>의 대사 한 부분은 그런점에서 의미깊다.

"(모피어스)  그게 뭔지 알고 싶나? 매트릭스는 사방에 있어. 바로 이 방에도 있고 창밖을 내다봐도 있고 TV안에도 있지. 출근할때도 느껴지고 교회에 갈 때도 세금을 낼 때도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관이지."
"(네오)  무슨 진실요"
"(모피어스)  네가 노예란 진실.....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지. 네 마음의 감옥. 불행히도 매트릭스가 뭔지 말할 수 없어. 직접 봐야만 해."  영화 <매트릭스1> 대사 중

한 권의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영화 얘기를 한 것은 내가 읽은 책이 우리들의 세계관, 즉 경제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대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기원, 발전, 변질, 고착 되었는지에 관해 우리가 지금껏 배우고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용들을 세밀하고, 친절하게 분석,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원제 Man's Worldly Good(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인 리오 휴버먼은 1903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라는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언론인이자 학자로 노동운동가로 살았던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 하나다. 그는 1949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보 잡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를 폴 M. 스위지라는 사람과 창간해 죽을때까지 편집자로 일한다.  그의 이 책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출판된지 꽤 오래 되었지만(20세기 초), 현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교과서로 부족함이 없이 지금껏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 권의 책이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받은 경제나 역사 교육 전체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다. 그러한 책은 흔하지 않다.  오랜 시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요약하고, 분석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제나 역사를 꿰뚫어 보는 저자의 능력이 첨가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리오 휴버먼의 이 책은 오늘날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친숙한 자본주의로 발전하기까지 그 체제가 발전되어온 단계를 매우 소상하고, 흥미롭고, 지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수작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방대하고 세밀한 책을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 몇단계를 간략히 요약해보는 것은 이 글에서 필요할 것 같다.

중세를 거쳐 근대와 현대로까지 이어지는 이 책의 분석은 경제적 체제의 변화에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나, 실은 경제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경제체제는 경제만을 중심으로 발전돼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사회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견고한 뼈대였으나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었고, 정치 체제까지를 떠받치고 있었다.  중세의 봉건구조아래선, 농민이 지배계층인 성직자와 지주(귀족) 계급을 부양했다. 

중세의 장원제도 아래서 지주는 땅을 분배했고, 그 땅을 경작했던 농민은 수많은 의무를 졌다. 교회와 지주 계층에 대한 농민의 의무는 가혹했다. 즉, 그들은 수탈 당했던 것이다.

" 또 교회는 `십일조'로 재산을 늘렸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소득에 대한 10퍼센트의 세금이었다. 한 유명한 역사가는 그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십일조는 오늘날의 어떤 세금보다도 훨씬 더 부담이 큰 토지세, 소득세, 사망세로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모든 생산물에서 정확히 10분의 1을 바칠 의무가 있었을 뿐 아니라... 양모에 붙은 십일조는 심지어 거위 털에도 적용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길가에서 풀을 깍아도 통행세를 내야 했다.  수확한 곡물에서 경작 비용을 공제한 후에 십일조를 바친 농민은 지옥에 떨어지라는 저주를 받았다. "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p.29

중세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드러난 장면은 역사속에 매몰된 하나의 진실을 건져올리는데 유용하다.

"지중해 연안의 이슬람 교도들과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을 상대로 한 영토 전쟁은 십자군이라는 존엄한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약탈과 토지를 위한 전쟁이었다. 교회는 이 약탈 원정이 복음을 전파하거나 이교도를 절명하거나 성지를 수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존엄을 가장했다."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p.34

중세가 저무는 지점은 상업의 번성이란 사건을 동반한다.  상업이 각 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번지면서 상인계급이 새롭게 부상한다.  상업이 번성하면서 각 도시는 더욱 번성하기 위해, 많은 혜택들을 도시민에게 주려 했다.  그 가운데 구체제인 장원제도와 그 제도 아래서 이익을 봐온 세력은 자신들이 누려온 특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만약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기독교도라면 매우 불편할 수도 있다. 오늘날 근엄과 도덕을 내세우는 교회의 역사적인 악행이 모두 이 책 속에 집약돼 있단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악행은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파렴치한 전쟁을 수행하며,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있으면서, 적반하장격으로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그 어떤 세력도 모두 적이라고 천명하는 그 오만함에 비견될 만하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농노 해방을 제일 반대한 사람들은 귀족이 아니라 교회였다. 농노에게 자유를 주고 돈으로 하루 임금을 받고 자유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자기 지갑을 위해서 더 낫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영주가 알게 됐을 때도 교회는 여전히 농노 해방을 반대했다. 클루니악 수도회의 규칙을 보면 그런 태도가 얼마나 오래 유지됐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수도회의 수도원이 거느리는 농노나 남녀 종, [종] 신분의 여자를 다스리는 사람 가운데 그들에게 해방과 자유의 문서나 특권을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파문한다]'"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p.68

중세를 벗어난 유럽은 국부와 국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여러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해외 무역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한다. 이러한 이론과 법률을 역사는 중상주의라고 규정했다.  중상주의는 자본 형성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구체제는 부르주아들에 의해 혁명이란 결과로 나아가 결국 프랑스 혁명을 통해, 봉건제는 치명타를 입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중세의 끝으로 기록될만 하다. 그리고 이 혁명을 통해 하나의 분명한 중간 계급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부르주아였고, 그들은 봉건제 대신 이윤 창출을 제 1의 목적으로 하는 상품의 자유 교환에 기초한 다른 사회 체제를 등장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역사의 긴 여정을 마치고 도달한 것은 자본주의다.  체제가 바뀌었을 때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봉건제를 굳건히 바치고 있던 농민과 성직자, 귀족은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옷을 입어야 했다.  농민은 명목상 지주의 땅에서 노동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성직자는 농민에게 구시대의 수탈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종교는 새로운 체제의 옷을 입어야 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맞게 수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신교는 근면과 절약이란 미덕을 가르쳤다.  중세 교회는 돈이 많은 것을 악덕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으나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근면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라는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국가는 국부를 향해 달려가면서 식민주의 건설에 열을 올렸고, 자본은 이제 농노에서 자유민이 된 사람들을 새로운 체제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수탈했다.  

전체가 하나 버릴 것 없는 알곡으로만 채워진 책을 만나는 것은 독자에겐 행운이다. 그러나 이런 책에 과도한 욕심을 부려 그 모두를 요약하고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요약은 여기서 끝내고자 한다.  리오 휴버먼의 이 책을 통해, 현대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성되고, 뿌리 내리고, 그리고 유지되었는지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을 역사속에서 조망함으로써,  시대의 역사와 경제, 법률, 종교 그 모두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분명한 것은 중세의 농민은 90 프로가 넘었고,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며, 수탈했던 역사는 과연 몇백년전의 중세에서 끝나고 말았을까?  중세는 근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의 이르렀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도상에서 중세의 `농민'은 현대의 `노동자'가 변신하여 자본에 의해 수탈되는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고 이 책은 분석한다. 이 책은 20세기 초에 집필 되었지만, 21세기 현대의 독자에게도 시대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리오 휴버먼은 단적으로 자본주의를 이렇게 분석한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 남아 있는 한, 과잉 자본은 결코 대중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 p. 310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남기는 교환을 위해서 상품을 생산한다. 자본가는 애국심이나 공익 차원에서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돈벌 기회를 발견할 때에만 투자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p. 321

우리에게 매트릭스는 몸에 익숙한 체제다.  그것은 자본주의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산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되기까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왔는지 아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매트릭스의 본질로 다가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본질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많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수탈과 노동자의 생산 도구화로 변질된 역사가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체제라는 고전적 해석도 있다. 이윤추구라는 인간성의 일부분을 체제로 수용하고, 개인의 발전과 경쟁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두는 공정한 제도라는 인상도 담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지금껏 역사는 언제나 강자 편을 들어왔다. 자본주의 역사의 발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 시대의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법과 제도와 종교까지를 이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아닌 소수가 잘 사는 사회를 위한 그러한 지난한 노력 자체가 바로 인류의 역사였다는 것은 아이러니고 안타까움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은 도덕률은 강자보다는 약자의 손을 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약자는 강자의 횡포에 보호되어야 하며, 그것이 곧 정의다.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될만한 리오 휴버먼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와 경제에 대한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은 느낌이 든다.  자본이나 노동의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이 책은 `역사'라는 하나의 관점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 역사속에서 인간이 한 인간을 그리고 민족이 한 민족을 수탈하고, 살육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더러, 현재 진행형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글픈 이유다.   

지금도 우리 노동자는, 그리고 세계의 약소 민족은,  힘있는 자들의 폭력과 자기합리화 아래서 고통받고 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부르짖는 우리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가 그것을 말해주고, 지구 반대편 세계, 이스라엘의 맹폭을 받은 팔레스타인에서 한 아버지의 손에 들려 피흘린채 울부짖는 아이의 일그러진 얼굴과 눈물이 또한 그것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우리들의 매트릭스는 `정의(正義)'를 어떤 의미로 프로그램화 시켰을까?   진리가 하나라면 그 뜻도 하나여야 한다.  



 
 

200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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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Mr. Know 세계문학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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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게 고전(古典)이다.  고전이란  '오랜 시대를 거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가치를 인정받아 전범(典範)을 이룬 작품'을 뜻한다.  책읽기에 흥미가 붙기 시작했던 나의 20대에는 제법 고전 작품들을 많이 접했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를 뒤적였고,  서양 철학사의 지류를 좇아 서가를 헤매기 일 수 였다.  베스트셀러나 신간은 오히려 손이 가지 않았다.  고전 작품은 오랜 시간 동안 독자와 시대로부터 검증되었다는 생각 아래 대부분의 작품들의 선택에 있어,  그리 신중을 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그만큼의 만족도로 내게 보답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지금 내 독서 경향을 보면 고전 읽기에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고 있단 느낌이 든다. 시류에 휩쓸리는 이러한 독서 태도는 자신도 알지 못하게 고질적인 습관으로 자리 잡아 버린다. 그 가운데 벼르고 벼른 작품 하나가 최근에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 <그리스인 조르바>다.  어느 독자의 리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매체의 지나친 극찬 때문이었을까?  이 작품을 읽겠다고 했을때 오래전 그 고전읽기의 만족도를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 버렸다. 왜냐하면, 이 작품속에서 조르바라고 하는 딱히 `정의내릴 수 없는' `감잡을 수 없는' 인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느낌은 어디서 연원(淵源)하는가?  그것은 내 안에 자리잡은 도덕률, 체제안의 문제점에 반항하기보다는 쉽게 순응하는 길을 택해왔던 그러한 안이한 습속(習俗) 때문이다.  도덕과 법률은 누가 만든 것인가 ? 누구를 위한 것인가 ?  도덕과 법률 자체가 영원 불멸의 진리의 영역에 속한다면, 그것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만들어지고, 규정되는 일은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궁극적 진리의 일부분으로 인식되는 우리의 종교 자체도 시대를 거치며 변질된 역사를 갖고 있다.  가장 성스러운 부문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조차도 시대와 역사에 죄짓고 수많은 만행의 흔적들을 간직한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중세의 성직자들은 특권층이었고 그들은 최하층 농민의 피와 땀으로 호의호식했으며, 그들이 보유한 재산은 영주나 국왕보다도 더 많았다.  더불어, 그들이 받은 혜택도 그만큼 높았고, 시대가 바뀌어 상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부르주아가 도시를 기반으로 신흥 계층으로 부상했을때, 이들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 누구보다 기를 썼다.  중세 교회는 특권과 돈벌이 수단으로 하층민을 부려먹었고, 그 특권을 유지하는 일을 하나님의 가르침보다 앞세웠다.  하여, 역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뿌리깊은 고정관념, 철저한 도덕률, 한 사회의 기틀을 이루는 법률 체계를 조롱하며, 그에 반대의 논거를 제공하려 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소개하기에 앞서, 이러한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기행에서 받은 충격을 흡수할 충분한 스펀지를 판단력에 제공해야할 필요성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연한 역사적 사고와 한 인간에 대한 평가의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만날, 그 천방지축형의 인물은 시쳇말로 `망나니'나 `주정뱅이' `호색한' `신성모독범'으로 인지할 우려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중한 접근은 작가가 미리 예고한 것처럼, 조르바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필요하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조르바는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두목'의 질문에 간단히 답한다. "그것은 자유다" 라고.  이 답변은 그의 삶을 통해 해설된다.  진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일에 빠져들어, 젊은날 그 도자기 돌리는 녹로에 걸거친다는 이유로 자신의 왼손 집게 손가락의 절반 이상을 잘라내 버린다.  스무살 어느 올림포스 산기슭에 있는 마을에서 산투리라는 악기 소리를 처음 듣고 그것을 배우기 원했던 그,  아버지는 그런 그에게 말한다. "창피하지도 않느냐? 네가 집시냐, 거지 깽깽이가 되겠다는 것이냐?" 라고. 그러나 그는 결혼 자금으로 꼬불쳐논 돈을 몽땅 털고, 거기에 돈을 더 보태 산투리 하나를 구입하고, 평생 자신의 인생길에 그 악기와 동고동락한다.  도자기와 산투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집착인가 예술인가 ? `두목'에게 조르바가 비아냥 거리는 얘길 들어보라.

"이것 보쇼. 보아하니 당신은 악기 하나 못 만지는 모양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  집구석에 들어가면, 있는 건 근심 걱정뿐.... 마누라가 그렇고, 새끼들이 그렇잖소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장차 이러다 무엇이 될까?  이런 젠장, 이래선 안 돼요. 산투리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예요. 마누라가 한 마디로 될 것을 열 마디 잔소리로 늘어 놓는다면 무슨 기분으로 산투기를 치겠소 ?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빽빽거리는데 산투리를 어떻게 치겠소 ?  산투리를 치려면 온갖 정성을 산투리에만 쏟아야 해요. 알아듣겠어요 ?"  p. 19,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결혼에 대한 그의 관점은 단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훔친 고기라야 맛이 있다"  그러나 마누라는 훔친 고기가 아니다.  한때 그의 취미는 여성의 치모(恥毛)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검은 털, 금빛 털, 붉은 털, 심지어는 흰 털까지도" 꽤 많이 모아 그걸 베개속으로 채워가지고 잠을 잔 경험까지 털어놓는다.  그의 여성 편력은 화려하고, 추잡스럽기까지 하다.  그가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자유분방한 생각들은 그를 호색한이나 망나니 쯤으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조신한' 독자를 불편하게 하고 `고결한' 성직자의 눈에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서 여자에 대한 책임감은 느껴볼 수 없고, 여성을 쾌락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천박함이 전해진다.  그에게 따뜻한 가정이나 아이 양육을 함께 하며, 부부가 사랑과 정을 쌓아가며 함께 인생이란 바다를 건넌다는 그러한 과정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독자들이 매우 불편한 이유다.

그것뿐인가? 이 작품속에서 조르바는 신부와 수도원을 조롱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서, 종교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금욕집단이나, 욕망을 억압하고 자신의 정상적인 인간적 욕구를 가장한 채 위선을 보이는 가장 몹쓸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조르바의 종교인과 종교집단에 대한 강한 반항심은 이 소설 군데군데서 목격된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것은 파격(破格)이다.  더불어, 그러한 비난을 통해 조르바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계명에 대한 공공연한 `위반'과 `반발'로 이어진다.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서양 역사 속에서 수도원으로 대표되는 종교집단과 그에 소속된 성직자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하층민인 농민을 수탈하고, 땅을 독차지하며, 고리대금업까지 진출해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했었다.  더불어, 그 종교집단은 중세 시절부터 자신들의 종교적인 교리를 발표했고, 그 교리는 그대로 사회의 법률에 해당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에 위반하는 사람은 파문(破門), 즉 신자공동체에서 쫓아내 교회의 의식이나 성례전에 참석할 권리를 빼앗기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소설속에서 그의 종교적 반발심이 극에 달한 장면을 보라.

" 하지만 나는 도둑질도 해봤고 사람도 죽여 봤고 거짓말도 해봤고 계집들도 무더기로 데리고 자본 사람, 계명이라는 계명은 깡그리 어긴 인간이랍니다. 계명이 몇 개더라? 열개? 왜 스무 개, 쉰 개, 백 개 ? 백 개가 되어 봐야 내가 다 깨뜨렸을걸!  하지만 하느님이 있다고 해봐야, 때가 되어 내가 그 앞에 서야 한다고 해도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당신에게 어떻게 알아듣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내 보기엔, 그게 별로 중요할 것 같지가 않다 이거예요. 하느님이 미쳤다고 지렁이 앞에 앉아 지렁이가 한 짓을 꼬치꼬치 캔답니까?  그리고 그 지렁이가 이웃에 있는 암지렁이를 꾀어 먹고 금요일에 고기 한 입 먹었다고 화를 내며 질책할 것 같소?  염병할! 당신 마음대로 해요. 구정물 신부 같으니... 가기 싫으면 그만둬요!"  p.268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쯤되면 평범한 양심과 도덕률, 그리고 종교적 신앙심으로 무장한 독자들은 책장을 덮고 싶을 것이다. 나또한 잠시 그랬다.  이 소설속 조르바가 계속해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건 무엇인가 ?  즉, 그가 체제 순응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반항하는 인간이다.  그 반항속에서 계속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고 싶어 분투하는 사람같다.  인간이란 곧 자유라고 답한 그는 인간을 감싸고 있는 규율과 규제, 그리고 순수한 인간 본능에 대한 종교적인 억압과 성직자들의 위선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였을까?  물고기에겐 바다속이 그의 생의 무대다.  물고기를 뭍으로 끌어내 버리면 그는 더이상 호흡할 수 없다. 유유히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유영(游泳)하는 바다속의 물고기를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  연극의 무대는 연기자가 설정한 가상의 공간이다.  연극이 자연스럽기 위해선, 연기자가 무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좀체 그 무대를 낯설고 어렵게 여긴다면 연기자와 무대가 따로 놀게 된다.  거기서 곧 관객은 연극이 실패했음을 감잡게 된다.

조르바는 반항과 파격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가?  조르바는 세상을 연극의 무대로 생각한건 아닐까?  조르바에게 세상은 물고기에게 바다와 같은게 아닐까?  물고기와 인간이 호흡하는 방식이 다르고,  활동하는 무대가 다르듯이 그는 인간의 본질을 자유로 설정하고, 세상을 자유의 인간이 호흡하는 공간,  인간과 세상이 합일하는 공간으로 바라본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그의 파격적인 행동들은 변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위험에 빠진 소설속 인물을 구해내고 싶은 독자의 마음은 그의 천박한 행동에서 긍정적인 신호들을 수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노크해 본다.

그 가능성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도 바로 이 소설이다. 조르바는 탄광속의 노동자들이 위험에 처하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희생 정신을 보여준다. 무너지는 갱도속에서 모든 이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갱도의 광목을 자신의 노약한 어깨로 바치고 있다가 모든 노동자들이 탈출하자 마지막으로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갱도를 빠져나온 그가 내뱉는 언어를 보라.  언제나처럼 상스럽고 거칠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누가보아도 고결하기 그지 없다.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도 무엇이 가치있는 일이지 알고 있는 인간이다. 더불어, 그는 노동의 고귀함과 휴식의 달콤함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탄광의 갱도를 파고 있을 때, 사랑하는 연인 부불리나의 면담조차 거부하는 모습은 호색한으로 우리가 그를 오해하고 있는 경향들을 수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또한 마을의 과부가 마을 유지들에 의해 피살되는 장면에서 또다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하나의 생명을 구하고자 헌신하는 모습을 보라.  과부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구하려는 노력을 마지막까지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술에 흠뻑 절었들지만, 산투리를 치기 위해 고이 감싼 천을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위대한 예술가의 혼이 전해지는 듯 하다.  이 거침과 순수성 사이에서 두목과 독자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인지부조화인가 ?  그의 삶을 좀처럼 정의내릴 수 없는가 ?  그러나, 누가 누구의 삶을 정의내리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는 이미 인간을 `자유'로 정의내리지 않았는가?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이 다시 태초의 신선한 활기를 되찾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지겨운 일상사가 우리가 하느님의 손길을 떠나던 최초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다. 물, 여자, 별, 빵이 신비스러운 원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태초의 회오리바람이 다시 한 번 대기를 휘젓는 것이었다." p.62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는 한순간 내 도덕률에 불편함을 제공했지만, 삶의 주인공이자 세상이란 무대의 주인으로서 그 주인이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 곧 `자유'임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생을 살아가다보면 자신과 생의 무대가 합일하지 못하고, 그 무대를 어색하고 어렵고 낯설게 느끼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상을 나를 속박하는 규율과 통제로 가득한 감옥인냥 바라보는 것이 우리들의 인식 수준아닐까?   감옥이란 감금의 상태에서는 죄인은 죄책감과 통제를 당연시 받아들인다. 그러나 무대를 자유의 공간, 해방의 공간, 열린 공간으로 만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 삶의 무대, 곧 삶터는 물고기가 아름답게 유영하는 공간, 산투리가 연주되는 흥겨운 공간,  아름다운 여인들을 욕망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미학적 공간, 타인과 타인이 접촉하고 이해 타산만을 고려하는 스트레스 가득한 직장이 곧 나의 이상과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무한대의 가능성의 공간으로 새롭게 인식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나는 조르바에게 `자유'를 배웠다.  내가 이 세상과 합일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세상이 나의 무대라면 내가 두려워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  자유의 궁극은 생의 자연스러움이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다 자연스럽다.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사회의 규율이나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 합일되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움을 연출하는 자기 자신이다.

1953년 그리스 정교회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미할리스 대장>,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신성을 모독했다는 혐의를 씌어 그를 파문한다.  이에, 카잔차키스는 다음과 같은 편지 한통을 써 보냈다.

" 성스러운 사제들이여, 여러분은 나를 저주하나 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께서도 나만큼 양심이 깨끗하시기를, 그리고 나만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시기를 기원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를 파문(破門)한 이 사제들처럼, 세상의 근엄을 가장한 교활한 인간들처럼, 미숙한 독자들처럼, 우리는 오해하지 말자.  흔히 우리의 인식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우리가 그에게서 본 것은 방종(放縱)인가 아니면 자유인가 ?  나는 숲을 보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20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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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 대한민국 30대를 위한 심리치유 카페 서른 살 심리학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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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구입한 건 이 책이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이 아니다.  제목의 `서른살'과 `심리학'이란 단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와 꽂혔기 때문이다.  서른살에겐 그 누구보다 심리학이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좀체,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종잡을 수 없는게 사람이다.  서른살은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같다.  사회생활에 노련하게 안착해야 하고,  인생의 반려에게 충실히 적응해야 하고,  부모님의 품에서 정말로 완전하게 독립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막중한 시기에 만약 우리곁에 멘토하나 없이 마음이 요동치는대로 살아간다면, 그 불안정성은 배가 되고 생활은 엉망이 돼 버릴 수도 있다.  

서른살이며 심리적으로 불안정성을 겪고 있는 독자들을 겨냥한 듯한 이 책의 지은이는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씨다.  서른살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는  심리적인 문제들을  과거 상담사례, 혹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먹은 지은이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초반부는 정신분석의로서 얼핏 이론적인 측면을 해설한 듯 보이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저자의 오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삼십대가 겪는 여러 측면들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 가득 담겨 있단 느낌을 받게 된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서술되는 글에서 내가 지금껏 부딪혀왔던 문제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이란 죽을때까지 남에게서 배우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배우기 위해선 먼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공자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진정한 앎이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르다고 하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그러나 모르는 것을 안다고 자위할 때, 남의 조언같은건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독불장군으로 살아가게 된다.  서른살 자신의 주위에 멘토가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는 평소 공자의 이 명구(名句)를 좋아한다.  항상 부족한 점이 있으면 고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다. 그것이 부족한 인간으로서 겸손한 태도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남의 조언을 잘듣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남의 조언 따위엔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고집을 소신으로 치부하고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보면, 그런 사람때문에 주위 사람만 피곤해진다.  인간이란 본래 자기본위로 생각하고 살아가게 돼 있다.  이것이 본성이다. 그러나 사회생활 같은 개인이 계약관계하에서 인위적인 집단을 형성해 생활하게 되면,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이 대립하게 되고 그 안에서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져야 자신과 남이 부딪히는 경우를 막아낼 수 있다.  우리에게 멘토가 필요한 이유다.

서른살은 이 집단안에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쌓아가야 한다.  사회는 일종의 전쟁터 아닌가?  우리에게 심리학이 또한 필요한 이유다.  타인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지만, 마음을 닦고 조이는 일은 수도자들에게만 필요한게 아니다.  지천명을 넘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한 정신분석학에 대한 학문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빠르고 가볍게 행간을 훑는 내 눈과 마음 모두 편안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몇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책에서 나는 가슴 따뜻한 멘토 한 명을 새롭게 만났기 때문이다.

몇개의 열쇳말들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직장생활의 황금률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직장에서 좋은 관계를 만드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상대를 존중하고, 내가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며,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배려하고, 서로의 사적 영역을 존중하면 된다." p. 207  김혜남,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다음은 결혼 생활의 지혜가 묻어 나는 글이다.

"결혼은 서로를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어젖힌다. 마치 화려한 무대 뒤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소품과 장치들이 노출되듯이, 결혼과 함께 열린 커튼은 상대가 자신이 그동안 생각해 오고 예측해 왔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신혼 초에는 격렬한 부부 싸움이 일어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세세한 부분에서는 아직 맞지 않는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마찰을 거듭하다 보면 두 개의 톱니바퀴도 부드럽게 닳아 돌아가게 마련이다. " p.272

곧 부모가 되는 이들이나 아이 양육에 힘들어 하는 이들에겐 다음 문구가 특히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꼬마와 같이 추는 왈츠와도 같다. 일방적인 수혜가 아니라 아이의 보폭에 맞춰 가며 같이 추는 왈츠, 때로는 이끌고 때로는 넘어지지 않게 잡아 주면서 음악에 맞춰 즐겁게 춤을 추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다."  p.266 

주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연륜으로 깨우친 삶의 지혜를 건내줄 멘토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 든든한 응원군이나 지원군을 소유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곁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해도, 책을 읽는 사람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석학을 멘토로 갖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책은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지혜의 보고이며, 내 삶의 멘토로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아는 교수님의 자제분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교수님 왈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부감은 다 필요없고 책을 좋아하는 여자면 된다" 그러자, 아들녀석이 이리 말했단다.  "요즘 그런 여자 찾기가 더 어렵거든요"  그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학기중 많은 책을 읽히기로 유명하신 분이다.  멀리 전해든 말이지만, 그 교수님의 말 가운데서 그분의 성품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알고 있다.  책읽는 인간은 스스로 진화하는 능력을 품고 있다는 것을.

올해, 당신은 얼마나 많은 멘토와 만났는가?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 명박산성, 미국경제파산, 연예인 자살 등등. 다사다난 했던 한해가 지고 있다.  이제 우리의 서른살에 반갑지 않은 나이가 더해지려 하는 순간이다.  우리 사회는 올해 평화롭지 못했다.  신문을 보니 대학교수들은 2008년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를 선정했단다. `쇠귀에 경읽기'란 뜻이겠다.  나도 사자성어 하나로 올 한 해를 정리해볼까?  "자업자득(自業自得), 즉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자기가 받음" 이란 뜻이다.  올 한 해 우리 국민에게 딱 어울릴 만한 사자성어다. 

정신분석전문의 김혜남 멘토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인생에서의 성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란" 평범한 말을 한다. 더불어 심리적 방황에 지쳐 있는 우리들에게 한마디 응원의 말을 던진다.

"당신은 언제나 옳다. 그러니 거침없이 세상으로 나아가라!"

이 평범한 말 한마디와 그의 응원의 구호가 세밑 삼십대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힘이 될 것 같다.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고, 지혜란 단순한 것이다.  

 


 

200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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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12-3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멘토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2009-01-01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현수 2009-01-0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올해 서른인데 제 삶의 나침반과 멘토가 될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서평 잘 쓰셨습니다.

개츠비 2009-01-09 23:11   좋아요 0 | URL
현수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책같군요..서른살 이제 시작이군요. 아마 좋은 길잡이가 될 겁니다.^^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은 이천년 전 예수가 나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록한 책이다.  반면, 신약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새롭게 약속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유대교는 아직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로 보지 않는 것이다.  서양사에서 유대인들이 히틀러에 의해 살육되기 전까지, 그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니고 차별 받은 이유는 단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메시아를 메시아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했다는 것. 즉,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종교적 관점은 서양 역사속에서 수많은 유태민족의 차별과 비극을 만들어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예수에 의한 인간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서 첫 4 권을 4복음서라 하는데, 마태,마가,누가, 요한 복음을 말한다. 이 가운데, 앞의 3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 한다. 이 세 편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내용으로 하며 같은 서술법으로 기록되어 서로 비교 연구되므로 공관복음이라 일컬어진다. 실제로 이 3복음서를 보면, 내용과 서술 방법이 비슷하고, 중복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같은 듯 하면서도 내용이 다르다. 즉, 앞의 공관복음서에 없는 내용이 삽입돼 있기도 하고, 시간적 순서가 전혀 다르게 기술되기도 한다.  같은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예수의 생애가 왜 다르게 기록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신약성서가 기록된 것이 예수 사후 수십년 후에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오늘날 교회의 초기형태)를 이끈 사도들에 의해 쓰여지고, 또 신자들에 의해 가필 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죽음 이후 시간적 공백기가 존재하며, 인간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더군다나 신약성서 속의 많은 부문이 구약에서 이미 언급하고 예언했던 메시아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것은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일대기 자체가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예수는 유대교를 제외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했던 메시아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는 이천년 전 베들레헴이란 이스라엘의 작은 촌락에서 마리아를 모태로 해서 태어난 분명한 사람이며, 또한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교류했던 역사적 인간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상당히 빈약하다. 성경속에서 예수의 소년기나 청년기의 삶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하므로, 예수의 삶은 어떻게든 주어진 텍스트(성경)와 그 당시의 역사서를 가지고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카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는 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큰 뼈대안에서 예수의 삶 전체에 살을 붙여 소설가적 상상력을 통해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복원하려고 한 책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에서 예비한 메시아다.  4복음서에 기록된 내용들은 모두가 진실이며, 그리고 말씀 하나하나는 메시아의 숨결이 실려 있는 구원의 메세지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는 기적만으론 설명될 수 없는 의문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렇게 기적과 이적을 행했던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해서 허망하게 힘한번 못써보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을 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그의 기적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기적의 증인들이 예수가 체포되자 기다렸단 듯이 줄행랑을 놓고, 새벽 닭이 울기전 예수의 애제자 베드로는 그를 세번씩이나 모르는 사람이라며, 부인한다.   서양의 기독교 역사나 동양의 기독교 유입역사를 보면, 오직 예수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자들은 십자가형보다 더 가혹한 형을 받고 고문을 당했어도, 신앙을 져버리지 않았다.  예수의 얼굴조차 모르는 이나 예수의 기적 한번 본적이 없는 신도들도, 신앙을 지키며 순교할 수 있었는데 그 시절 제자들은 모두 단합이라도 한듯, 예수를 배반한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의 조그만 촌락에서 태어나 로마라는 역사상의 일시적 권력앞에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유대민족을 위해 예수는 이땅에 메시아로 오셨다. 그러나 적어도 인류의 구원자라면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갖는 민족이나 시대에 태어나야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정말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인가 ? 그렇다면 나머지 수많은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걸까?  왜 예수는 흑인이나 동양인이 아니고 유대인으로 태어나야 했을까?  40억년 이라는 지구 역사와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 우주의 역사 가운데 예수는 겨우 2천년전 유대의 그 조그만 촌락에 태어나, 성인기의 2~3년간을 유대민중에게 가르침을 남기고 무력하게 죽었다.  그 사건이 그 당시나 지금의 세계 시민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가 진정 메시아로서 인류에게 합당한 대우를받을만한 필연이라도 있는가?

오늘날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구약성서 속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힘있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유대인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신약의 예수를 한갓 정치적 혁명가나 분파적인 종교지도자로 치부하고 있다.  예수는 진정,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유대 시대에 정치적 야망을 품었던 한 사람의 혁명가에 지나지 않는걸까? 

"다시 말해 예수는 그 짧은 생애 동안 외모에 있어서나 이름에 있어서나 결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물이었고, 삶을 영위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예수가 유대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그 시대 병자와 곤궁하고 가난한 자들을 치료하고 돕기 위해, 이 땅에 온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무엇때문에 이 땅에 왔고, 무엇을 가르쳤는가?  엔도 슈사쿠에 의하면, 그는 사람들의 현재적 필요에 의해,  기적을 배풀고, 이적을 행하고, 산상설교를 하며, 세상을 주유한게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반로마 과격파인 열심당원이나 유대권력을 잡고 있는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의 바람처럼, 자신들을 일시에 해방시킬 그러한 메시아, 즉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인 유대민족의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절대자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한갓 민족적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옹졸한 메시아인 것이다. 

현재의 자신들의 곤궁함을 일시에 날려버리고, 유대민중에게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앞에 서서, 예수는 그 유명한 산상설교를 시작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이에게 은혜를 베풀라. 너를 저주하는 이도 축복하라. 너를 모함하는 이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 겉옷을 빼앗는 이에게 속옷마저 내주어라."

엔도 슈사쿠는 이 책에서 아마도, 이 말을 듣던  민중은 잠에서 깨듯 그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났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왜냐하면, 민중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본 모습은 이런 나약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다는 예수, 그의 말 한마디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 당장에 필요한 식량, 돈, 건강, 민중이 원하는 것은 현재적 필요성이었고, 소위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은 그 모든 개인과 민족의 소망을 이루어줄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마법사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가르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인간의 본성으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을 기뻐하며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라니 ? 역설인가?  어떻게 나를 모함하는 사람을 위해 모략이 아닌 기도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  이 가르침의 독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비밀은 사랑에 있었다, 고 엔도 슈사쿠는 결론 짓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믿기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가 얼마나 애를 썼는가. 이것이 예수의 생애를 일관하는 요소이다."  p.53 ,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예수가 인류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사랑의 위대함과 민중들이 그리고 있었던 메시아 상(像)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 신약성서속 수난 사화의 핵심이다.  예수는 초반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메시아로 숭앙 받는다. 그가 기적을 보이고 이적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 권력에 칼로 맞서지 않으려 했던 예수는 로마라는 지배적 권력과 유대의회라는 민족적 권력앞에 오직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맞섰다. 결국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로마 병사에 체포당하는 무력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조차 옆의 강도에게 조롱을 당한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누가복음 23장 39절 

예수가 체포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줄행랑을 놓았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의 마지막 순간 땅이 꺼지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무덤이 열렸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는 요한복음에는 어떤 특이한 현상도 기록되지 않음을 예로 들어, 어쩌면 공관복음서의 내용이란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고백 가운데 삽입된 부분이 아닌가, 추론한다. 즉, 예수가 죽은 후 그 골고다 언덕은 그저 침묵과 평범함이 뒤덮였을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그날, 평범하게 인간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땅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메시아의 죽음은 초라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 엔도 슈사쿠는 이렇게 적는다.

"만일 우리가 성서를 예수 중심이라는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라 제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으면 그 테마는 단 하나, 겁쟁이, 비겁자, 몹쓸 인간이 어떻게 해서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으로 귀착된다.  더불어 그 불가사의한 제자들의 변화의 원인이야말로 성서가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테마이자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5,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형편없는 제자들, 겁쟁이 제자들.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겁하고 비열했던 제자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이윽고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로 바뀌어 간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성서의 테마의 하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p.158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성서만을 통해 그 당시 예수의 역사적 현장을 추론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어떤 성서학자는 "축구 경기가 끝난 잔디밭 위의 발자국을 통해, 그 날의 축구 경기를 재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어떤 역사 자료를 통해서나 심지어 성경을 통해서도,  그 당시 예수의 정확한 흔적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예수는 이천년전 이땅에 분명히 존재했던 한 인간이며, 복음서에 남겨진 그의 어록을 추론한다면 그가 인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알 수 있다.  겁쟁이 비겁자에 지나지 않은 제자들이 한결같이 예수 사후, 예수보다 더 고통스런 방법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생겨 났을까?  부활의 신화속에서 예수를 보았을 수도 있지만 그건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그 누구도 마지막 순간까지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불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남겨진 이들의 삶을 걱정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는 4복음서 안에서 신비화 된 예수가 아닌 신비의 장막을 걷고 난 후의 예수의 삶을 담백하게 그려낸 책이다. 그의 삶 자체가 기적과 이적으로만 도배된 신화였다면, 그는 무력하게 체포되고, 로마와 유대 권력앞에서 모욕당하고, 그리고 십자가위에서 강도들에게 조롱당하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스토리는 성서속에 나올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성서속의 예수는 신이면서 동시에 나약한 인간이라는 동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동시성이 예수의 실제를 강력히 증거한다.   그는 지구라는 대지를 걷고 30여년 가까이 이 땅에서 인류와 함께 생활했던 분명한 사람이다.  그는 끝까지 사람으로 존재하며, 신의 가장 큰 가르침을 인류에게 영원토록 각인시키려 노력했다.  그가 가르쳐주고자 했던 사랑은 도대체 이천년 전 유대땅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나 어떤 의미로 남는가?  내일이면, 내년이면, 경제 때문에 지구가 멸망이라도 당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요즘, 대체 이천년전 예수가 가르쳤던 사랑은 이 시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엔도 슈사쿠는 성서와 예수의 생애를 사실과 진실로 나누어 설명한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단편적인 부분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예수의 기적들은 그 지역의 오래된 민담을 후대에 조합한 것이란 얘기들도 있고, 신약성서 속에서 메시아로서 예수가 그려지는 것은 구약성서의 예언을 그대로 베낀 것들이란 의심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의 기본 테마는 변질될 수 없다.

그는 무력한 자가 행복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가르친 사랑은 현실에선 무력했다.  자신조차 십자가에서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란 인간을 굴종시킬 수 있지만 절대로 마음속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영혼을 흔드는 힘은 외부적 권력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울림에서 온다.  예수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라고 말했다.  권력은 한시적이지만, 사랑의 힘은 영원하다. 

신약성서의 진실은 사랑의 위대함이다. 예수는 사랑을 위해 순교했다.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보며 증오가 아닌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배반하는 애제자들을 보면서도, 죄없는 누명을 씌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향해서도,  증오의 목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십자가 아래서,  자신을 조롱하는 인간들을 향해 연민의 감정을 갖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는 이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가르치고자 했던 사랑의 의미를 탐구한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행한 많은 시각적인 기적들이 있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는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킨 예수의 단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200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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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동 2019-08-0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춤법이나 좀 잘 쓰세요. ‘제작년‘이 아니라 ‘재작년‘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