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만큼 성공한다 - 개정판, 지식 에듀테이너이자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제안하는 재미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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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미와 베짱이의 교훈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한가로이 노는 사람에 대한 가르침이다. 여름동안 열심히 일한 개미가 추운 겨울 베짱이에게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데, 그건 왜 너는 추운 겨울을 대비해 여름을 땀흘려 일하지 않았냐? 는 거다. 어린 시절 지겹도록 읽고 배운 이솝의 우화는 그대로 근면과 성실에 관한 뭇 사람의 인생론으로 자리잡았다. 이솝은 고대 그리스의 우화작가로 BC 6세기 경의 인물이다. 이솝의 가르침이 3천년 가까이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그래서 공부안하고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건 악덕 가운데 악덕이었다.

 

21세기가 되자 개미와 베짱이는 삶이 역전된다. 자기 몸 생각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한 개미가 말년에 성인병으로 고생하다 병원에서 우울한 인생을 보내는 사이, 아마추어 음악인 베짱이는 훗날 음반 한장이 히트를 치는 바람에 국민 가수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이다. 우스개 속에서 바라보는 개미와 베짱이의 인생역전이다. 우스개라지만 어느 정도 진실을 담보한다. 근면과 성실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인 20세기의 가치이자 `먹고 살기 힘든 시대가 남긴 대표적인 피해의식'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이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인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이다.

 

인생의 목적이 `일'에 있지 않고 `노는' 것에 있으며, 더욱 `잘' 노는 것에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원과 노동력이 부족한 한국의 경쟁력은 오직 장시간의 근로시간과 일에 대한 헌신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이 파격적인 주장은 무어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는 잘 놀지 못하면 제 2 의 IMF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겁박하기까지 한다. 더 열심히 일하고 허리를 졸라매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많은 여가문화와 잘 노는 방법을 연구하지 않아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그는 시간이 주어져도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노는 것에 문외한이라고 질책하고 있다.

 

실제 저자의 주장대로 한국은 열심히 일하는 나라다.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중 최장 노동시간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2003년 근로기준법의 개정으로 주 40 시간 근무제가 5인 사업장까지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이러한 불명예를 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법안의 특례제도 때문에 이 법의 예외를 적용받는 노동자가 4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특례를 적용받는 기업은 사실상 무제한의 연장근무를 허용하고 있으니 당분간 한국은 최장노동시간을 보유한 국가의 불명예를 벗어나기 힘들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노동생산성은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는거다. 그러니까 같은 일을 하는 선진국 노동 생산성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지만 쓸데없이 일터에서 시간만 많이 보내고 있는 꼴 아닌가?

 

우리는 공인된 자료를 통해서도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저자의 잘 노는 인생론에 한번쯤 귀 기울여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그의 `노는 인생론'에는 수식어 `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잘' 논다는 것은 무턱대고 노는게 아니다. 한해의 시작에 `잘' 놀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1년을 빈둥빈둥 보내자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잘 노는 인생'은 어디까지나 일과 노는 일의 밸런스를 맞추자는 것이다. 기업의 목적과 인생의 목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의 목적은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나 죽을 때 더 많이 일하지 않았음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내 인생이 보람있었나? 의미있었나? 를 되돌아 본다. 인생 자체가 재미와 흥미로 가득찼다면 그는 죽을 때도 행복하게 눈감을 수 있을 것이다.

 

"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내가 행복해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평생 주어진 임무를 다하며 그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디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삶의 목적이 되는 행복과 재미를 추구하면 뭔가 죄의식을 느낀다. 잘못된 생각이다. 모두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시절이 남긴 피해의식이다." p.73 김정운, <노는 만큼 성공한다>

 

인생에서 일은 행복에 이르는 한가지 수단인데 지금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주객전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일이 지닌 인생의 가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다면 저자가 설명하는 `잘 놀아야 인생이 성공하는 이유'는 뭘까?

 

첫째, 지식은 21세기의 산업을 이끄는 가치다. 그런데 새로운 지식은 창의력에서 나온다. 창의력은 어떻게 개발되는가? 바로 `재미'다. 재미는 열심히 일하는 근면과 성실의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가와 휴식을 통해 보다 많은 자유를 개인에게 부여하는 순간, 그 한가로운 유희의 순간에 찾아온다. 과거에는 노동과 자본이 없는 나라가 망했지만, 21세기에는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지 않는 사회가 망한다. 이러한 지식창출은 결국 `잘 노는 놈'들의 몫이다.

 

둘째,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아이의 본분은 노는 것이다. 엄마와 나누는 최초의 대화는 놀이가 매개가 된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꿔가는 능력을 배운다. 인간의 본질은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다. 인간으로 길러지는 것의 바탕에 놀이가 자리하며, 엄마와 잘 노는 아이가 건강하게 커갈 수 있다. 결국 성공적인 인생을 시작하는 길은 잘 노는 일에 있었다.

 

셋째, 잘 노는 사람이 타인과 정서공유를 잘한다. 정서공유는 의사소통의 핵심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정서공유 능력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

에 대처하는 능력은 놀이을 통해 개발된다.

 

넷째, 성공해야 행복한게 아니라 인생이 행복해야 성공하는 것이다. 행복은 먼 미래의 목표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인내하고 희생한다. 행복은 일상에서 얻어지는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일과 의무로 둘러쌓인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재미와 흥미를 잃어버린 오늘이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행복해야 그 행복이 모여 미래가 행복해지고 인생이 행복해진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 성공한다. 인생에서 소소한 재미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도대체 이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어딜 가면 재미있는지, 뭘 하면 재미있는지 알려줄 것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내가 물으면 대부분 당황한다. 한참 생각하다가 남들 다하는 `여행' `영화' `먹는 것'이라고 머쓱해 하며 대답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p.282, 김정운 <노는 만큼 성공한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효율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코치한다. 하지만, 이 책은 효율적으로 노는 법을 가르친다. 개미와 베짱이의 21세기판 역발상이다. 성실과 근면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20세기형 CEO들이 한국사회에 많다. 성실과 근면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너무나 성실하고 근면해서 탈이 난 한국 사회를 이제는 되돌아 보자는 얘기다. 그래서 김정운 교수의 문제제기는 시의 적절하다.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 OECD 세계 최장 노동시간 보유국, 최다 자살률, OECD 청소년 행복지수 최하위국 이란 오명을 듣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통해 근본적 삶을 성찰해야 될 때가 온 것이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책 제목은 전형적인 역발상이다. 하지만, 이 시대 베짱이의 인생역전은 더이상 우스개가 아니다.

 

인생의 목적을 `일'과 `지위'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은퇴 후 할 일이 사라지고, 지위에서 물러나면 빨리 늙고 빨리 죽는 다는 속설이 있다. 삶의 목표가 사라져버리자 생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이들의 쓸쓸한 말년이다. 그들의 남은 생을 구원해주는 것은 틈틈이 익혀온 취미다. 그들에게 사소한 재미를 선사했던 그것, 몇 개월 몇 년을 지탱하고 사라지는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라, 흥미와 관심으로 재미를 불러오는 그 누군가의 소소한 취미가 살아가는 의욕을 주고, 건강을 줄 수 있다. 저자는 노후에 이러한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사람이 진짜 성공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 아이덴티티는 재미에서 기원한다.

 

신문 칼럼을 통해 만나왔던 저자의 글에서 받은 인상은 `재미있는 삶'이었다. 언제나 유쾌한 글을 쓰는 그도, 군대시절 차가운 총구를 입안에 넣고 자살 직전에 내몰린 적이 있음을 이 책에서 고백한다. 어쩌면 항상 재미를 추구하는 그의 글들은 그러한 젊은 시절 트라우마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상처의 경험이 재미있는 인생을 살자는 교훈으로 되돌아 온 것이라면 정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에서 심리학을 13년간 수련하고, 이 시대의 오피니언 리더로 살아가는 저자가 그 권위와 진지함으로 열심히 놀자며 독자를 부추긴다. 책장을 다 덮고 나니, 이제 맘놓고 노는 방법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잘 노는 걸까? 그 숙제를 풀어야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일게다.

 

 

 

201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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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치유 식당 - 당신,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심야 치유 식당 1
하지현 지음 / 푸른숲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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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병과 관계된 가장 큰 편견과 오해는 정신과와 연관돼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정신과에 가는 일은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와 눈총을 받기 싫어 정신적 문제들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도 어쩌면 정신과에 대한 홀대와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고민이 있을 때, 그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의논할 타자를 찾지 못할 때 판단력이 미숙한 사람은 쉽게 극단을 생각할 수 있다.

 

10년도 더 되었지만, 대학 졸업반 시절 나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가 보다. 4월에서 5월 사이로 기억하는데, 불면과 불안이 나를 옥죄었던 적이 있다. 망상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고, 불안 때문에 잠시도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짧은 두 달 동안 내가 잠깐 공황장애 비슷한 걸 앓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그때 내 몸은 무척 건강했다. 하지만, 망상과 불안이 내 정신을 잠식했고 곧이어 내 육체의 건강을 위협했다. 그 시절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놀랍게도 정신과 진료를 받은 날 이후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정신과에 들러 한 일이라곤 정신과 의사에게 내 상태를 설명하고, 고민을 풀어놓은 것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과를 제발로 찾는 일은 현대인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찾는다 하더라도 콧대높은 의사가 당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줄지 장담할 수 없다. 주변인은 정신과를 찾는 당신을 색안경 끼고 쳐다볼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외과의처럼 환부에 칼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가장 공부를 잘하고 많이 해야 될 수 있는 의사가 바로 정신과 전문의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의료지식으로만 고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보이지 않는 환자의 정신적 문제들에 대한 치료법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정신적 문제가 있는 당신에게 필요한 의사는 친구처럼 편안히 술한잔 나누며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현직 대학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하지현의 심리 에세이 <심야치유식당>에서 만날 수 있는 픽션속의 전직 정신과 의사 `철주'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대학가 뒷골목 지하에 20평 남짓한 술집겸 식당 노사이드를 열어, 그곳을 찾는 주객들의 심리상담을 해주는 철주는 이 책의 저자, 하지현의 아바타 같은 인물이다. 그는 정신과 의사이자 대학교수로서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뛰쳐 나와 술집을 열었다. 사회적 지위와 돈보다는 온전히 자신의 삶과 마주하고 싶어서 였다고, 그는 철주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의 심리 에세이지만, 소설 형식을 빌어 환자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의 삶 자체를 성찰하고픈 속내를 드러낸다. 일반적인 정신과 의사가 내는 저작의 틀을 벗어나 일방적인 상담과 해법이란 형식으로 책을 엮지 않았다. 저자는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정신,심리적 문제들을 그러한 상황에 놓인 가상적 인물들의 삶을 통해 복기하고 치유하는 여정을 담는다.

 

"48일 동안 잠 못 든 남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민수라는 남자는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정돈된 삶을 선호한다. 민수는 성실하고 올곧지만 한가지 삶의 방식을 정답인냥 집요하게 추구한다. 그의 문제점은 정돈된 트랙에서 벗어나면 모든게 끝날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불면증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불감증에 기원하므로 화낼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잠을 잘 때, 알람을 맞춰둔 방안의 시계가 숙면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방안에서 시계를 추방하는 것은 부차적인 처방이다.

 

"공황장애에 걸린 남자" 편에서 사십대 초반 임원으로 한 사업부 전체를 총괄하는 동우는 1년 후가 아니라 , 단 한 달 후도 장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루저가 될 것이므로 삶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고 계속 달려나가지 않으면 넘어지고 말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가정에선 아이 얼굴 보기도 힘들어 아이와 멀어지고, 아내에게 일방적인 별거 통보를 받은 남자. 철주는 이 남자에게 맞서 싸우지 말고 힘에 부치면 내려 놓는 것도 좋다고 말한다.

 

"채워지지 않는 잔을 놓고 안달복달을 하니 경고등이 켜질 수밖에 없겠죠. 저도 그렇게 살았어요. 어느 순간 그 완벽함이란 결국 내 마음속의 허상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이 세상이 우리를 너무 열심히, 뼈 빠지게 일만 하게 만들기 위해 거는 최면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죠." p. 175 <심야치유식당> 하지현

 

이 책에서 일곱번째 손님으로 등장하는 "자신감 없는 여자" 편에선 예민할수록 피곤해지는 인생에 대해 상담한다. 직장에서 사람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습관이 있는 완벽주의자 유진에게 철주는 감정의 레이더 수신 감도를 줄이라고 조언한다. 수신 감도가 높을수록 레이더는 미세한 사물까지 포착해 낸다. 군사 레이더는 감도가 높을수록 좋은 법이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레이더가 이처럼 성능 좋다면 그의 인생은 쓸데 없는 감정낭비로 소진되고 말 것이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레이더 감도는 최고조다. 무시하고 넘어가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될 타인의 시선과 행동, 사소한 말 하나하나를 의미 있는 것으로 포착해 해석한다. 그리고 그 신호가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반응을 준비한다. 그러니 인생이 피곤할 수밖에 없다. 대범한 사람은 비중이 큰 일들만 마음의 레이더에 포착되도록 세팅을 해놓는다. 그 외의 일은 아예 정보로 취급하지 않는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효율성의 추구. " p. 256 <심야치유식당> 하지현

 

이 책에서 여덟 개의 질환을 가진 여덟 명의 손님은 노사이드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전직 정신과 의사와 속깊은 상담에 이른다. 때로 철주는 그들을 데리고 거리나 놀이시설, 직장을 찾는다. 혹은 직접 집으로 찾아가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그네들의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세심하게 조언한다. 현실에서 그런 정성으로 치유하는 정신과 의사는 없다. 역시 잘나가는 대학교수와 정신과 의사직을 내버리고 심야에 술집겸 식당을 열어, 찾아오는 고객에게 정신상담을 하는 사람도 없을 게다.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 철주가 운영하는 노사이드 식당에 찾아가고픈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책 속 철주는 인간미가 풍겨나는 의사다. 고압적인 태도도 없고, 환자의 상황을 뼈속까지 이해하며, 환자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발벗고 나선다.

 

모든 정신적 문제들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정신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수 있다. 경쟁과 성공만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쉽게 낙오와 나태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정신적 문제에는 예외가 없다. 미국 내 조사를 보면 정신과 의사의 자살률이 가장 높게 나온적이 있다. 책 속 `철주'라는 인물이 환자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책 끝 부분에선 자신의 문제를 풀어야 할 상황에 놓인 것만 보아야 알 수 있다. 우리는 직업인이기 전에 모두가 연약한 인간이라는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수퍼맨과 수퍼우먼을 선호하는 사회의 요구에 당당히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가끔 `No'라고 말해야 할 이유다.

 

좀더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완벽함 보다는 때로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르도 삶은 의미가 있다는 조언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그 수준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기는 방식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 때만 행복할 수 있다,는 철주의 말도 기억에 남는다. 처방하고 고치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한 시대의 동류의식으로서 환자와 접촉하고, 치유를 시도하려는 한 정신과 의사의 가상한 노력이 `픽션심리에세이'라는 흥미롭고 독창적인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독자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정신과 의사가 이 시대의 직장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읽고나면 왠지 편안해 진다. 진심이 담긴 위로 때문일까? 혹은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적인 피로감 때문일지도?

 

 

 

201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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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지음 / 부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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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도 예외없이 장하준을 읽었다. 이로써 그의 저작으로선 세번째 독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이어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대선과 총선이 있는 올해 그가 발표한 또 하나의 문제작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나꼼수의 주진우 기자가 소속된 `시사in'의 경제,국제면 팀장을 맡고 있는 이종태 기자와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현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 및 운영위원으로 있는 정승일과의 대담으로 구성된 책이다. 하지만, 이 대담집은 대담 참여자 사이의 논쟁은 찾아볼 수 없다. `일심과 동체'가 되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함께 성토하고 있으니, 이 책의 대담자들은 장하준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군다나 이 세명의 대담자들은 2005년에 합심하여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공저한 경력이 있기까지 하다.

 

그간 장하준의 저작들에서 그의 목소리를 지지하고, 긍정했던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상당한 혼란을 겪을 것 같다.  그가 신자유주의를 앞장세운 선진국들의 횡포와 과거를 비난한 전작들에서 독자들은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폭로하고 비판해온 그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세계 경제의 이면에 드리워진 가진자들의 폭거와 선진국들의 약삭빠른 `사다리 걷어차기'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장하준의 글을 읽으며 세계 경제가 오늘날의 형태를 하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 경제학 책이 도표와 수식, 전문용어만으로 설명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 환호했다. 장하준은 뭇 독자들이 경제학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도왔다. 그의 책이 지금껏 경제학 서적으로는 최초로 100만권이 넘는 판매고를 거둔 이유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읽는 독자들은 무턱대고 장하준의 논리에 환호하는 일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장하준의 논리,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공부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서 장하준과 대담자들은 비판의 초점을 놀랍게도 `우파 신자유주의'가 아닌 `좌파 신자유주의'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와 좌파 신자유주의는 물론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이 논쟁적인 책에서 대담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정치적 용어와 일맥상통한다. 우파는 보수, 좌파는 진보계열을 통칭한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혐의가 짙은 보수보다는 진보계열을 성토하는데 지면을 크게 할애했다는 점이다. 장하준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을 긍정하고, 진보계열이 주장하는 재벌해체를 반대하며, 소액주주 운동을 이끌고 있는 시민단체의 경제민주화 운동 자체를 비판한다. 경제민주화 세력의 활동이 재벌을 해체하고, 지배구조를 1인 소유에서 다수 주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국부의 해체와 이적행위에 빗대어 설명한다. 과연, 장하준은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 반역사적이고, 반민주적인 의견을 내놓은 것일까? 지난 3월 말 출간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지금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고 있다. 지금껏 우리는 장하준을 잘못 알아온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장하준은 변하지 않았고, 이 논쟁적인 책은 그간 장하준이 집필한 책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항상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해 왔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시장에 자유를 확대하는 것인데, 그건 경제학의 원로 애덤 스미스가 시장은 가만히 놔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걸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의 현대적 버전이다. 장하준은 지금껏 이같은 고전경제학의 원리를 철저히 부정하고, 부패와 불공정으로 기울기 쉬운 자유방임 시장에 국가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지금의 선진국이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그들도 과거에는 산업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국가가 산업정책을 이끌어왔다. 개발도상국에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선진국의 행태는 전형적인 `사다리 걷어차기'의 일종이라고 일갈했다.

 

이 책에서 장하준과 대담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한발 더 나아가, 경제 민주화와 재벌 해체 세력이 결국엔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돕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목적은 시장의 공정한 경쟁, 부정의한 재벌의 추방이지만 주주 자본주의로 무장한 국제화된 금융 자본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어, 투자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하는 시대, 결국 경쟁력을 갖춘 재벌의 유망 기업들이 국제 펀드와 외국 자본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1인 지배의 재벌 체제와 박정희식 관치경제을 긍정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재벌을 해체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화려한 말 잔치일 뿐, 결국엔 한국 대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넘겨 국민 경제가 해체될 수 있다는 걸 걱정한다. 박정희식 관치경제는 부정적 용어이긴 해도, 오늘날로 치자면 불공정한 시장과 외국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국가 권력의 개입을 통해, 국민경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관치 금융이라는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정부가 끌어안고 소중하게 잘 키워 우리나라 은행 산업의 미래를 만들어야 합니다.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산업 정책과 정책 금융의 전통을 앞으로도 잘 살려 진정으로 첨단 금융을 세워야 하는 거예요.그 좋은 전통을 민간의 시중은행에 접목하기 위해서라도 은행권의 주주 자본주의는 강력하게 규제해야 하고요." 장하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p.115

 

한국 경제의 고질병을 장하준과 대담자들은 진보 경제학자들의 주장처럼, 박정희와 재벌에 떠넘기지 않고 시각을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력들, 즉 국제금융자유주의 세력과 월스트리트의 주주이익 극대화 세력에 있다고 본다. 결국엔, 진보계열이 국내적 시각에서 관치경제의 박정희와 독점 재벌의 횡포에 초점을 맞춘거라면, 이들의 시각은 국제적이라 평할 수 있다. `시사in'의 이종태 기자를 제외하곤, 장하준과 정승일이 유럽의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는 것에서도 이들이 미국 주도의 월스트리트 주주,금융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이유는 설명 가능하다. 이 책을 통해 장하준과 진보,개혁 세력의 논쟁이 붙은 이유는 연구실에서 집필된 단일 저자의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정제된 표현을 벗어나는, 보다 공격적인 어투의 문장들이 대담 가운데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담 가운데 이들이 쏟아낸 문장들은 그간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서, 한미FTA를 반대하고, 재벌 해체를 경제 정의 차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들을 `좌파 신자유주의자'로 일방적 매도한 부분이 있다. 매도를 당한 측에서는 도대체 장하준이 자신들의 저서를 읽기나 한건지, 그 학자적 불성실에 의혹을 제기한다. 한국적 상황에서 박정희의 관치경제와 재벌이 주도하는 산업이 현재 국제 경쟁력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보면 장하준과 대담자들의 쏟아낸 좌파 신자유주의자들에 관한 비판은, 박정희와 재벌을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로 비춰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 부분에 대해 장하준은 한겨레21 인터뷰를 통해, 일부 부적절한 표현이 있음을 시인하고 `자신과 개혁진보 진영 간에 방법론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큰 방향에서는 같다'는 점을 인정했다.

 

"우리가 원하는 복지국가는 국가 형태는 민주 공화국이면서 경제 형태는 통제된 자본주의 내지는 복지 자본주의이다. 그러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경제 민주화는 국가 형태는 민주주의이면서 경제 행태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장하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P.421

 

일부 논쟁이 있긴 하지만, 장하준과 대담자들이 이 책의 결론으로 삼고 있는 주제는 우리 경제와 국가가 나아가야 할 경제 체제다. 그것은 유럽식 복지국가 건설로 규정지을 수 있다. 유럽식 복지는 전국민 복지다. 미국식 복지가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관한 잔여복지라면, 유럽식 복지는 세금을 올리더라도 전국민이 골고루 혜택을 받는 상향 평준화된 복지다. 국가 개입을 통해 현재 재벌의 주요한 산업을 국유화 하더라도, 외국 자본에 넘기는 일을 막고, 주주 자본주의의 통제와 국제 금융 자본의 규제를 통해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하면서, 재벌로부터 노동권과 임금, 증세를 맞바꾸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재벌도 선호하는 주주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방법에 대해서는 크게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이 책의 대부분이 주주자본주의와 국제 금융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것을 규제할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점은 명확히 밝혀놓지 못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장하준은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의 밖에 존재하는 경제학자다. 스스로 그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진보성향의 독자들이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지금껏 악이라고 규정하던 반민주 세력과 보수진영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있단,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관치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재벌은 노동자의 희생과 독재 권력의 비호 아래 지금의 국제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웠지만, 오늘날 재벌이 하는 일들은 여전히 동물적인 포식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정치적, 경제적 부정의를 모두 눈감아야 하는가, 라는 자조섞인 자문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장하준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결론적으로 진보계열 경제학자들과 장하준의 논쟁은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궁극적인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방법론의 차이인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반대 의견없는 인적 구성원의 대담 과정에서의 과열된 동조와 호응이 피아(彼我)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 점이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장하준 공격의 십자포화를 빗겨난 신자유주의의 원조 세력인 보수와 재벌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반복지, 친재벌,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장하준의 격려가 아니라, 은유적 공격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장하준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연 평균 노동 시간이 연 2500시간인데, 이것은 유럽인들의 1500~1700 시간에 비교하면 엄청난 노동 시간을 보유한 것임을 밝히며, 이러니 우리 인생이 피곤하지 않겠는가? 라고 묻고 있다. 이 논쟁적인 저작에서 장하준과 대담자들이 가닿는 결론이 왜 유럽식 복지국가인지 명확해진다.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은 "쥐를 잡을 수만 있다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따질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장하준은 이 말을 그의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인용한적이 있다. 큰 틀에서 이 말 많은 대담집에서 장하준의 주장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연상케 한다. 장하준이 역사,경제적 명분보다 실용주의를 선택한 것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것이 옳으냐, 하는 점에서 뭇 경제학자와 독자들로선 생각의 간격이 존재할 것이며, 논쟁의 시초가 될 만 하다.

 

 

 

 

 

 

201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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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미래 - 총.달러 그 이후... 제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지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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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세계의 역사는 곧 패권 제국의 역사였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멀리는 로마제국이 그러했고, 가까이는 대영 제국이 그러했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는 미국이란 대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살고 있다. 당장 피부에 와닿지 않지만, 사실 우리 생존권이 제국 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다. 한반도 유사시 전시작전권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갖고 있질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며칠 전 용산 한미연합사에서 미태평양 사령관 새뮤얼 로클리어가 국방부 기자단과 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3차 핵실험시 "정밀타격(surgical strike)"도 고려하고 있다, 고 언급했다. 그 몇 시간 후 미국측은 한국 기자들이 문맥을 잘못 이해한 오보였다고 해명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정확히 그는 어떻게 말했을까? 그는 "우방국들과 함께 모든 가능성(considering all options)을 열어두고 살필 것"이라고 했다. 이 말 자체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타국의 일개 사령관이 주권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전쟁개시나 다름없는 폭탄발언을 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정밀 타격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걸 포함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해도 문제 없는 발언이다. 이 발언을 듣고 무감각한 한국인이 있다면 그는 무지하거나 태평한 것이다. 정밀타격은 곧 선전포고 아닌가? 오늘날 미국은 세계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등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제국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중국계 미국인 2세이자 현재 예일대 법학과 교수로 있는 여성 에이미 추아가 2007년 부시 정권 아래서 저술한 <제국의 미래>는 미국의 지성계와 정치계에 영향을 준 특별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주의를 비판했다. 당시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을 침공,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했고 각 나라들의 정권을 바꿔치웠다.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부시는 북한과 이란을 대놓고 `악의 축'이라 비난했다. 협상과 설득보다는 힘을 통한 일방주의적 정책은 부시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 일방주의 덕분에 부시는 자신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국가들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의 원성을 샀다. 

 

에이미 추아는 2003년에는 세계화의 모순을 비판한 저작 <불타는 세계 World on Fire>을 통해 미국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전적이 있는 지식인이다. <제국의 미래>에서 그는 광범위한 미 제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미국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다. 이 책은 정치 비평, 논문에 닿아 있는 저작이지만 역사서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사료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사에 등장한 제국의 역사를 다루다보니, 고대에서 중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주요한 제국들의 흥망 성쇠를 흥미롭게 재구성해 놓은 것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인류사의 주요한 제국은 어떤 나라들이었을까?

 

최초의 패권국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팍스로마나의 전설 로마, 중국의 황금기를 이룬, 당,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몽골제국, 그리고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스페인, 자본주의 경제를 석권한 중세의 네덜란드, 불관용의 덫에 빠져든 오스만, 명, 무굴 제국과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를 이룬, 대영제국 그리고 최첨단 기술, 자본으로 현대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 제국에 이르기까지다. 더불어, 이 책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유럽연합, 인도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점치며 마지막으로 미국이 제국으로서 그 명백을 유지하는 길에 대해 저자의 깊이 있고 진정성 있는 논평으로 책을 마무리 한다.

 

"모든 초강대국들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 p.7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

 

제국은 성장기에 정복 전쟁을 통해 이웃 나라를 병합하고 거대 연합을 이룬다. 제국은 그 후 정복한 땅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는 방법을 썼다. 고대 사회는 다종교와 다문화를 통해 하나의 제국으로 병합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음에도, 이들 제국은 어떻게 그 과정을 순탄히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일까? 로마는 시민권 부여와 제국에의 편입이라는 미끼를 통해, 발전된 로마 문화에 대한 피정복민의 환심을 이용했다. 몽골제국의 징기즈칸은 세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했지만, 본토의 빈약한 문화와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족은 각 나라의 인종과 종교에 대한 무한한 관용 정책을 폄으로써, 거대 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잔인한 종교박해가 유행하던 시절인 1492년부터 1715년 사이에 이주한 숙련된 기술과 자본력을 가진 유럽인들을 포용함으로써, 중세의 강대한 자본주의 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다. 19세기 대영제국은 계몽주의적 관용정책을 갖고 만민평등 사상에 기초해, 다양한 인종 집단과 종교집단에게 본토박이 잉글랜드인들과 같은 사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대영제국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성장했다.

 

저자는 제국의 탄생과 유지, 성장과 미래의 핵심 키워드로 `관용'을 설정한다. 그것은 인종을 무차별하고 종교를 박해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상 제국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언제나 인종과 종교적 무관용이 등장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역사상 모든 제국에서 그점은 예외가 없었다. 중세의 네덜란드는 유럽의 소국 가운데 하나였지만, 인종과 종교에 대한 포용력 덕분에 기술과 자본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듬으로써 유럽 최강의 부국으로 발돋음한다. 로마 제국의 쇠락해지는 지점에서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종교적 불관용에 들어섰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종교적 불관용은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켰던 동화 및 통합 전략을 훼손시키게 된다.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국내 기독교도에 대한 잔인한 박해를 시작했다. 개신교도에 대한 프랑스내 종교 자유를 인정했던 낭트칙령을 철회 한 후, 개신교 성직자들은 교수형을 당했고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수많은 위그노교도들이 투옥,고문,처형을 당했으며, 이 당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많은 이들이 영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대영제국의 탄생은 종교,인종적 관용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같은 사례들을 통해 저자가 추출해내려는 지혜는 바로 미국이란 제국이 나아갈 미래다. 미국은 현재 정치,경제,군사적으로도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기축통화국의 자격을 위협받았고, 자국의 주요한 기업들은 문을 닫거나 닫을 위기에 처했다. 공적자금의 수혈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주요한 기업들은 몰락의 길을 이미 걸었을 것이다. 경제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자, 정치적 영향력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좌파정권들로 바뀐 남미에선 미국의 목소리가 잘 먹혀들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아시아 지역에선 중국의 경제력이 상승함으로써 군사적 힘겨루기가 진행중이다.

 

" 내가 반대하는 것은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 또한 다른 나라 사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 " p. 467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

 

저자는 군사력을 바탕으로한 미국의 일방주의 전략은 반드시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미국이 전 세계를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개조하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지속하기 보다는 자국의 역사와 원칙에 입각하여 세계를 위한 본보기 국가가 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세계에 체제적 제국을 이식하려 들지 말고, 자유주의 국가로서 보다 많은 관용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언덕위의 도시'가 되라고 말한다.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습성은 위험하다. 그것은 반드시 반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것보단 공존을 택해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역사와 문화, 종교가 다른 지역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는 시도 자체가 반민주적이다. 역사에서도 그같은 제국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고, 제국 자체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평화와 공존을 위해 쓰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회와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나라로서 성장할 때, 제국은 군사력이 아니더라도 세계가 인정하는 제국으로 영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에이미 추아의 이 책은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성장 배경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담았다. 저자의 아버지는 중국인이었지만 필리핀에서 자라났다. 2차세계 대전을 겪던 필리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미군의 지프차에서 던져주던 스팸 깡통을 뒤쫓던 아이였지만, 미국으로 건너와 일과 공부를 병행해 31세에 박사학위를 따고 미국 대학에서 종신교수로 임명된다. 저자는 미국이 이민자에 대한 기회와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오늘의 자신과 가족이 진정한 미국인으로 성장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올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미국의 힘은, 또 제국의 힘은, 그같은 세계 시민에 대한 기회의 땅으로서 미국이 건네준 포용력과 관용임을 저자 자신이 증거하고 있다.

 

 

 

201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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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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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다는 것은 과거의 일들과 하나씩 결별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습관이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내 기억에 선명한 습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다.   요즘 시골에서는 별보기가 쉽지 않다. 골목마다에 가로등이 설치 돼 있고, 인근 도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오염물질은 밤하늘의 별들을 감추어버린다.   하지만 그 시절엔 달랐다.  마을의 골목길은 무척 어두웠고 공기도 맑아 별빛이 선명했다.  시골 밤은 고요했으며 어두웠다.  그저 별을 보기 위해선 마당에 나오는 것으로 충분했다.

 

여름 어느날엔가 아랫채 지붕위에 돛자리를 깔아놓고 누워 한참동안 별을 본 적도 있다.  저녁을 먹고 홀로 별을 보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오른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소년은 엄마와 아버지가 불러도, 누나가 불러도,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고 오랜시간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봤다.   생각해보니 그 날이 내가 별을 본 마지막 유년이었다.  왜냐면, 그 이후로 다시 별을 보기 위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숱하게 많은 날 별을 보았겠지만, 그 하루가 기억에 남는 건 왜일까?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이라는 것은 밤하늘을 뜻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나는 얼마나 자주 밤하늘을 쳐다봤을까?  모르긴 해도 수백 번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 첫 밤하늘은 어쩐지 그 밤의 하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 116 김연수 <원더보이>

 

한 편의 성장소설을 읽어가는 일은 먼지낀 유년의 시간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다시 꺼내보는 일이다.  그동안 쌓인 먼지들을 털고나면 자신이 소설 속 아이와 다를 바 없이 하나의 과정을 통과했을을 직감한다.  그 경험은 같고도 다르다.  소설 <원더보이>의 정훈이 통과한 유년의 시간들을 표현하자면 그것은 `혼란'과 `고통'일 것이다.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엄마는 자신을 낳다 죽어서 얼굴조차 모른다.  어느날 우연히 남파간첩을 차로 들이박고 죽은 아버지는 영웅이 되고, 옆자리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식물인간이 된 후 깨어난 소년은,  초능력을 가진 `원더보이'로 탄생한다.  소년은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이제 갖게 된 것이다.

 

정훈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정훈의 초능력은 단순히 마음을 읽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타인이 고통받을 때 그 마음을 더욱 선명히 읽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작가라는 사람들은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다.   타인의 삶에 공감하고 느끼고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곁을 지켜주는 어른들이 공감의 능력을 통해 작가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돼라고, 응원하는 것은 정훈의 그 능력 때문일테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개인이건 국가권력이건, 누구든 말이다.

 

하지만, 1980년 신군부는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국가권력을 접수했다.  그들은 뭇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무감각했기에 그같은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게다.  소년과 신군부가 갈라서는 지점이 거기다.  그들의 권력은 무소불위였고 공작과 사찰은 그네들의 주된 무기였다.  소통과 공감에 관심없는 권력집단아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  소설은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지만 정확히 그것은 한 시대의 성장과도 닿아 있다.  하여, 김연수의 <원더보이>는 역사를 성찰하는 성장소설이다.   

 

1980년대는 놀라운 시절이었다.  컬러TV가 보급되고,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보급된 TV를 통해 놀라운 쇼들을 볼 수 있었다.  지구촌 어디에서 UFO가 출연했다는 소식이 뉴스를 타고 전해오면, 그 시절 아이들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상상하며 소문을 확대 재생산하고, 공포에 떨기도 했다.  당시 숟가락을 쳐다보며 구부러져라,라는 주문을 외면 숟가락을 휘게 만들었던 유리겔라의 TV 출연 사건은 초능력자가 실재한다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뉴욕과 파리와 서울을 위성으로 연결하여 생중계하는 광경을 TV에서 처음 보았을 때,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해야 했을 것이다.  이 경이로운 사건들이란 신군부의 기획된 집권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실은 더 쇼킹한 일들이 밀실에서 행해졌다.  감금,폭행,고문,의문사,광주항쟁,불법사찰?

 

정훈은 자신의 초능력을 취조실에서 써먹으려는 권대령을 피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신군부는 정의롭지 못한 세력이었다.  권력이 정의롭지 못할 때, 그들은 끊임없이 그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 시민들을 감시하고 구속시켜야 했다.  소년이 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자 이제 그 반대편에서 국가권력과 부당한 시대의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필연이다.  이 소설에서 소년은 성장이란 개인사의 아픔을 감내하며, 또 한 편에선 절망적인 역사의 공간과 시간을 거쳐가는 것이다.  소년이 감당해야할 고통은 개인과 사회, 이중적인 것이다.  소년이 꿈꾸는 미래는 엄마를 되찾는 것이고, 세상이 꿈꾸는 내일은 민주화된 나라다.  그 성장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아픔과 절망을 소설은 추적, 묘사한다.

 

화염병(FB,Fire Bottle)을 가장 잘 던지는 선재 형을 만나고,  군부권력의 손에 첫사랑을 잃고서 남장을 하게 된 강토 형(희선)과 교우한다.  그들을 통해 자신을 이용하려 했던 거대한 국가권력의 실체를 확인한다.  시골에서 단학에 빠져 살며 생명역동농법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무공 아저씨와 17살의 봄의 보내며, 우주의 기운을 받아 농사를 짓는 한 자연인의 삶을 배운다.   단 한 줄의 기사를 트집잡혀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기자 재진 아저씨로부터 엄마의 정체가 조류학자일 거라는 확신을 얻는다. 

 

"우주에 그토록 별이 많다면, 우리의 밤은 왜 이다지도 어두울까요? (.....)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304-314  p. 116 김연수 <원더보이>

 

이 소설이 특별한 것은 한 아이의 성장을 한 시대의 성장과 대별시킨데 있다.  불행한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정훈은 엄마의 존재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국제조류학회에 편지를 보내고 결국 엄마의 흔적이 담긴 편지를 손에 넣게 되는 소설의 끝은 의미롭다.  희망이 결국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군부에게 권력을 뺏긴 시민은 1987년이 되어서야, 보통선거권을 되돌려받는다.  역사는 아이와 함께 그 고통과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어둠은 빛이 도달하기 전까지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에 대한 간절함은 배게 된다.  아픔없이 사람이 성장할 수 없듯이,  민주화된 세상도 뭇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다.  정훈의 삶에 드리워진 외로움과 절망과 시대의 암울은 그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올려다본 밤하늘은 어두웠기 때문에 그 별빛이 더욱 강렬했고 지금도 그 빛은 우리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우리가 올려다본 별은 유년의 흔적이고 희망의 증거이자 성장의 기억이었다.

 

어린시절 정훈은 아버지와 함께 별을 올려다본 날의 밤을 기억한다.  그때 아버지는 별빛을 본게 아니라 떠나버린 엄마의 흔적을 그 밤하늘에서 찾고 있었음을 소년은 이제 안다.    그렇게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의 세계와 우리의 자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역사가,  진보하지 않고 후퇴하는 순간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터널의 시작은 어두워서 두렵다. 한데, 어둠은 종료의 시간을 반드시 예정한다.  `밤이 어두운 까닭이 우주가 아직 젊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부침많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듯 하다.

 

 

 

 

 

20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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